흐린 기억 속의 그대
언니라는 단어를 네이버 사전에 검색해 보았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사이이거나 일가친척 중에서 항렬이 같은 동성의 손위 형제를 이르거나 부르는 말’
나는 남자건 여자건 언니라고 부를만한 ‘손위 형제’가 없다. 친척오빠, 언니는 있지만 왕래가 잦지 않았고 그와 반면에 사촌들과는 친남매처럼 지내긴 했지만 외가에서는 내가 제일 맏언니였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언제나 연상이 좋았다. 연상이라 함은 나이만 많은 것이 아니라 나보다 성숙한 사람을 의미한다. 나이가 얼마나 많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얼마나 더 성숙한가, 얼마나 더 농염한가, 얼마나 나를 깊숙이 품어줄 수 있는가, 그렇지만 동시에 얼마나 그도 나를 필요로 하는가. 그게 중요하다. 내가 없어도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은 사람이 날 필요로 한다는 것, 그게 매력적인 것 같다. 이런 환상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된 거냐고? 사실 환상이 아니다. 환상이라 하면 헛된 공상과도 같은 것인데 나의 이야기는 공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소개할 어릴 적 나의 언니는 환상이 아닌, 흐리긴 하지만 여전히, 기억으로 내게 남아있다.
너무 어렸을 때 얘기를 시작하려니 조금 민망하기도 하고 그 때의 기억이 미화되어서 저장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웃기기도 하지만, 어쨌든! 나에겐 ‘옆집 누나’같은 옆집 언니가 있었다. 언제 처음 만났는지 내가, 언니가 몇 살이었는지 그런 건 너무 어렸을 때라 그 시작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처음 만난 날, 그 느낌과 배경은 기억이 난다.
이사 온지가 얼마 되지 않아서 친구를 아직 사귀지 못하고, 다니던 선교원의 놀이터에서 여느 날처럼 혼자 놀고 있었던 날이었다. 그 때 한 언니가 왔다. 누가 그렇게 소개해줬는지는 기억이 나진 않지만 그 언니가 우리 집 옆에 살고 있고 그 선교원이 속해 있는 교회에 그 언니가 다니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보다 한참 나이가 많던 그 언니는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을 유난히도 – 지금도 유아 관련 일을 하고 있을 정도로 – 좋아했고 정이 많았다. 그렇게 서로 가까이에 살던 우리는 자주 같이 놀았고 아마 엄마들끼리 바쁜 날이면 내가 항상 언니 집에 가서 온종일 함께 놀았던 것 같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우리의 ‘놀이’ 수위가 조금 높아졌던 것 같다. 한창 사춘기의 나이였던 언니는 여전히 나와 놀아줬지만 역할 놀이는 언제나 사랑이야기를 바탕으로 시작되었다. 나는 언제나 남자역할이었고 언니는 언제나 여자역할을 맡았다. 정확히 어떻게 놀이를 했는지 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도 잊지 못하는 장면이 딱 하나 있다.
아마 내가 카라 티셔츠를 입고 있었던 것 같다. 둘이 나란히 침대 위에 누워 있다가 내 카라 티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둘 중 누가 풀었는지는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걸 일부러 풀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내 오른쪽에 누워 있던 언니가 풀어진 단추 사이로 살짝 손을 넣어 내 오른쪽 목깃을 움켜쥐었다. 그 손은 그 이상 깊숙이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쇄골 조금 밑, 가슴 조금 위에서 느껴지는 언니의 손 끝의 작은 떨림은 나를 긴장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키도 나보다 훨씬 더 컸던 언니가 그렇게 내 오른쪽 어깨에 기대어 살포시 누워있었다.
그 때 처음 숨소리가 참 듣기 좋다는 생각을 했고 그 때 처음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왠지 모를 긴장감과 흥분이 기분 좋았고 가깝게 밀착된 그 몸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좋았다. 이불에서 나는 섬유탈취제 향기에 섞여 언니에게서 나는 따뜻함을 맡을 수 있었고 어렸던 나는 그 폭닥폭닥한 내음에 취해 잠이 들었다.
다른 기억은 다 잊어도 그 순간의 모든 감촉, 향취, 감정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그렇지만 한동안 그 때의 일을 떠올리며 살지 않았다, 아니 떠올릴 필요가 없으니 잊고 살았던 것 같다. 그러다가 20살이 되고 나는 왜 여자를 좋아하나, 언제부터 그랬나를 뒤돌아보게 되었을 때, 그 때 기억이 났다. 아마 그때부터였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의 관계는 언니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점점 멀어졌고 나중에는 마주쳐도 인사를 안 하게 됐다.
그러다 얼마 전 한번 언니를 만나게 되었다. 결혼식에서 마주친 언니는 여전히 예뻤고 결혼하는 신부보다 백색 드레스가 훨씬 더 잘 어울릴 모습이었다. 그렇게 조금 어색하게 앉아 있는데, 문뜩, 물어보고 싶었다, 아니 조금 따지고 싶었다. 혹시 그 때 무슨 마음이었던 건지, 왜 그랬는지, 그 일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아는지. 하지만 돌아올 대답도 뻔했고 물어볼 때 나의 모습이 조금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까도 싶고 서로 민망해질 것 같아 그만두었다. 언니는 여전히 예뻤고 여전히 아이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냥 그렇게, 나의 언니를 그대로 그 자리에 두기로 했다.
말풍선)
많이 늦은 업로드 죄송합니다 흑흑...
어렸을 때, 그 일이 뭐라고 낯 뜨거워서 연락도 못하고 지내네요.
그래도 가끔 궁금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