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상속자와 손님” 相続人と客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을 좀 읽어보신 분이시라면 읽어가시면서 감동도 받고 은혜도 받고 그렇습니다. 그렇게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이해가 되고 머리 쏙쏙
들어오면 얼마나 좋겠습니다까마는, 이렇게 읽다 보면 좀 이상하게 여겨지는 경우도 더러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애굽을 탈출하여 광야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 그들은 매일매일 하나님께서 만나를 먹고
살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먹었던 만나가 어떤 것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남아있는 그림도 없고, 당연히 사진도 없습니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만나를 보고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 <만나>라고 하는 이름도 <이것이 무엇이냐>라고 하는 <만후>라고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정도입니다.
여호수아 5장 12절입니다.
“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
彼らがその地の産物を食べた翌日から、マナの降ることはやみ、イスラエル人には、もうマナはなかった。それで、彼らはその年のうちにカナンの地で収穫した物を食べた。
여기서 <그 땅>이라고 하는 것은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마치고 요단강을 건너서 이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을 때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살펴본 성경구절에 의하면 <만나>라고 하는 것은 본래부터 있어왔던 음식이 아니요, 하물며 광야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생활을 하기 전에는 없었고, 광야생활을 마치 후에도 없었으며, 오직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에만 한시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본다면 참으로 이 <만나>라고 하는 음식은 놀랍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영양소가 필요합니다. 이를 두고 필수영양소라고 하는데 그 종류가 18가지의 비타민과 20가지의 미네랄, 그리고 8가지의 아미노산,
이렇게 총 46가지 필수 영양소가 있는데, 이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영양소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이 몸 속에서 자체적으로
만들어낼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음식물로 섭취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살면서 거의 이 만나만 먹고 살았는데, 누구 하나 영양실조에 걸렸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이 만나를 먹기만 하면 우리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모든 영양소를 섭취할 수 있었다고
하는, 역사상 가장 완벽한 음식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와 같은 깊은 사랑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모르는 이스라엘 광야 1세대들은 불평 불만이 끊이질 않습니다.
민수기 11장 4절 후반부터 6절까지 봅니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イスラエル人もまた大声で泣いて、言った。「ああ、肉が食べたい。エジプトで、ただで魚を食べていたことを思い出す。きゅうりも、すいか、にら、たまねぎ、にんにくも。だが今や、私たちののどは干からびてしまった。何もなくて、このマナを見るだけだ。」
지금 뭐라고요? 애굽에 있을 때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을 것이 생각난다고요? 아니, 아무리 애굽이 부자
나라였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값없이 먹을 수가 있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그들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값없이 먹었다고 하는 것은, 나라에서 공짜로 나눠줘서 먹었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종살이를 하던 그 집에
있던 것을 몰래 먹었던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이에요? 하나님께서 넘치도록 허락하신 완벽한 음식인 만나는 이제 지겹고, 종살이를 하면서 몰래 먹었던 것들이
그리워진다면서 지금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못살게 굽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고기를 잡수시고 싶대요.
이와 같은 이스라엘 민족을 보고 모세가 하나님께 하소연을 합니다.
민수기 11장 13절~15절입니다.
“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 그들이 나를 향하여 울며 이르되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라 하온즉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 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
どこから私は肉を得て、この民全体に与え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しょうか。彼らは私に泣き叫び、『私たちに肉を与えて食べさせてくれ。』と言うのです。
私だけでは、この民全体を負うことはできません。私には重すぎます。
私にこんなしうちをなさるのなら、お願いです、どうか私を殺してください。これ以上、私を苦しみに会わせないでください。」
출애굽을 할 당시 모세의 나이는 팔십이었다고 출애굽기 7장 7절에 기록합니다. 백성들이 얼마나 원망하고 불평 불만을 하고 못살게
굴었으면 팔십 먹은 노인네가 지금 이렇게 하나님께 차라리 자기를 죽여달라고 하소연을 하고 있겠습니까. 이 광경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아마도 가슴이 찢어지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어? 그래? 고기가 잡수시고 싶으시다고? 그러면서 내가 사랑으로 너희한테 베풀어준 완벽한 음식인
만나를 무시하고, 내 종으로 세운 모세를 그렇게 못살게 구나? 그래. 좋아. 고기? 줄게.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같은 민수기 11장 17절~20절
“내가 강림하여 거기서 너와 말하고 네게 임한 영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리니 그들이 너와 함께 백성의 짐을 담당하고 너 혼자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또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몸을 거룩히 하여 내일 고기 먹기를 기다리라 너희가 울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애굽에 있을
v 때가 우리에게 좋았다 하는 말이 여호와께 들렸으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실 것이라 하루나 이틀이나 닷새나
열흘이나 스무 날만 먹을 뿐 아니라 냄새도 싫어하기까지 한 달 동안 먹게 하시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중에 계시는 여호와를 멸시하고 그
앞에서 울며 이르기를 우리가 어찌하여 애굽에서 나왔던가 함이라 하라”
わたしは降りて行って、その所であなたと語り、あなたの上にある霊
のいくらかを取って彼らの上に置こう。それで彼らも民の重荷をあなたとともに負い、あなたはただひとりで負うことがないようになろう。
あなたは民に言わなければならない。あすのために身をきよめなさい。あなたがたは肉が食べられるのだ。あなたがたが泣いて、『ああ肉が食べたい。エジプトでは良かった。』と、主につぶやいて言ったからだ。主が肉を下さる。あなたがたは肉が食べられるのだ。
あなたがたが食べるのは、一日や二日や五日や十日や二十日だけではなく、
一か月もであって、ついにはあなたがたの鼻から出て来
て、吐きけを催すほどになる。それは、あなたがたのうちにおられる主をないがしろにして、御前に泣き、『なぜ、こうして私たちはエジプトから出て来
たのだろう。』と言ったからだ。」
……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모세야. 걱정하지마. 너 혼자한테 힘든 짐을 지게 하지 않을 거야. 내가 내 능력으로 종살이에서 해방시켜주고
애굽에서 탈출시켜 자유민으로 만들어줬더니, 이제 와서 기껏 하는 말이 종살이 때가 그리우시다고? 그 때 종살이 하면서 주인 몰래
잡수시던 고기가 그리우시다고? 좋아. 먹게 해 주마. 하루나 이틀? 아니야. 아주 지긋지긋할 정도로 먹어주마.
그러면서 어떻게 하십니까.
민수기 11장 31절~32절
“바람이 여호와에게서 나와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 진영 곁 이쪽 저쪽 곧 진영 사방으로 각기 하룻길 되는 지면 위 두 규빗쯤에
내리게 한지라 백성이 일어나 그 날 종일 종야와 그 이튿날 종일토록 메추라기를 모으니 적게 모은 자도 열 호멜이라 그들이 자기들을
위하여 진영 사면에 펴 두었더라”
さて、主のほうから風が吹き、海の向こうからうずらを運んで来て、宿営の上に落とした。それは宿営の回りに、こちら側に約一日の道のり、あちら側にも約一日
の道のり、地上に約二キュビトの高さになった。
民はその日は、終日終夜、その翌日も一日中出
て行って、うずらを集め、――最も少なく集めた者でも、十ホメルほど集めた。――彼らはそれらを、宿営の回りに広く広げた。
본래 광야는 아무 것도 없는 삭막한 곳입니다. 그러니 메추라기가 있을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람을 불게 해서 메추라기를
모아 이스라엘 민족이 있는 광야로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20절에 의하면 성인 남성 60만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성과 어린 아이들을 다 포함하면 대략 200만명은 되었을 것이라고 신학자들은 예상을 합니다. 성인 남성이 60만이고 부인에 아이들이
한 둘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전혀 과장된 숫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수많은 메추라기를 보내주셨을 뿐만 아니라, 너무 높이 날아다니면 잡을 수가 없으니까 두 규빗쯤 높이만 날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한 규빗은 대략 45센티 정도라고 하니 두 규빗은 90센티 정도 되겠죠? 그러니까 메추라기가 그 정도 높이만 날아다녔다고
하니까, 성인 남성이라고 한다면 충분히 손이 닿을 만한 높이였을 것입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참 얼마나 세심하신 하나님이십니까.
그래서 신나게 사람들이 메추라기를 잡는데, 그날 종일과 종야, 그리고 이튿날 종일토록 메추라기를 잡았다고 하는데, 그러니까 그날
아침부터 잠도 안 자고 꼬박 새면서 메추라기를 잡았고요, 그 다음 날도 하루 종일 잡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잡은 메추라기가 얼마 정도인가 하면요, 적게 모은 자도 열 호멜이라고 합니다. <호멜>이라고 하는 단위가 잘 감이 안 오시죠?
말씀 드리겠습니다. 한 호멜이 어느 정도냐 하면 지금 단위로 220리터라고 합니다. 1리터가 몇 킬로그램이에요? 예, 1리터는
1킬로그램입니다. 그러니까 한 호멜이 220킬로였는데, 이틀 동안 꼬박 잡은 메추라기 무게가 적게 잡은 사람도 열 호멜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무게가 얼마예요? 220킬로 곱하기 10이면…예, 2200킬로입니다. 2톤이 넘어가는데, 적게 잡은 사람이 그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메추라기 한 마리 무게가 대충 얼마나 나갈까요? 인터넷에 찾아보니까, 90그램에서 100그램 정도래요. 조그마한 새입니다.
그러니까 편의상 100그램이라고 하죠. 그러면 1킬로는 1000그램이죠? 그러니까 1킬로가 메추라기 10마리입니다. 그런데 적게 모은
사람이 열 호멜, 2200킬로였다고 하잖아요? 그러면 메추라기를 몇 마리 잡았다는 거예요? 예, 22,000마리를 잡았다는 것입니다.
그게 적게 잡은 사람이 그렇다는 거예요. 상상이 되십니까? 2200킬로 고기를 한 달에 먹는다고 하면요, 하루에 73킬로 이상을
먹어야 합니다. 4인 가족이라고 치고 한 사람당 하루에 400그램씩 먹는다고 하더라도, 기껏해야 하루에 1.6킬로입니다.
2200킬로를 하루도 빠짐 없이 그렇게 먹는다고 하더라도 3년 이상, 거의 4년 가까이 먹을 수 있는 분량인 것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숫자 얘기를 좀 더 해볼까요? 그럼 도대체 메추라기가 몇 마리나 날아온 계산이 될까요?
편의상 성인 남성만이 메추라기를 잡았고, 모두 최소한 22,000마리를 잡았다는 것인데, 이를 단순계산하면 되겠죠? 성인 남성이 60만명이었고,
여기에 22,000마리를 곱하면 어떤 숫자가 나오냐 하면요. 132억마리입니다. 역시 잘 감이 안 오죠? 참고로 공원 같은 곳에서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비둘기가 전세계에 얼마나 있는지 인터넷을 좀 봤더니 대략 2억에서 3억마리라고 하네요. 그러니까 전세계에
있는 비둘기의 50배나 되는 수의 메추라기가 한 번에 광야에 몰려왔다는 것입니다. 이건 뭐 정말 아무리 날아다니는 새라 하더라도 이
정도면 그야말로 눈감고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을 정도였겠죠.
누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렇게 많은 메추라기가 한 번에 몰려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상식 적으로 이해가 안 간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께 말해드리고 싶습니다. 우선 지금 이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3500년이나 전에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지금과는 생태계가
상당히 많이 달랐겠지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정도의 일을 못 믿는다면 어떻게 홍해가 갈라졌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 것이요, 어떻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홍해의 기적도, 예수님의 부활도 믿을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그렇죠. 바로 성경에 적혀 있기 때문에, 성경은 전혀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기 때문에 우리는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메추라가기 132억마리가 몰려왔다는 것을 못 믿을 이유가
없는 것이겠죠.
이것은 여담입니다만, 지금 현재 메추라기는 멸종위기종이라고 합니다. 어쩌면 이 때 너무 많이 잡아서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만, 아 이건 어디까지나 여담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어마어마한 수의 메추라기를 보내주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해서요? 아니요.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불평 불만을 늘어놓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의 종 모세를 원망하는 그들에 대해서 진노하셨다고 성경은 분명히 기록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고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도
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만나만 주었을까요. 그것만이 아니죠. 광야고 보통 험한 곳입니까? 거기에는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워해서요? 아니요. 미워했다면 단번에 쓸어버리셨겠지요. 이렇게 사사건건이 불순종하고 그러는 사람들을 미워하셨다면
이렇게 살려두셨겠어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너무나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신다고 하면서 왜 그런 험난한 광야생활을 허락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신명기 8장 14절 후반부부터 16절까지 봅니다.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v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主は、あなたをエジプトの地、奴隷の家から連れ出し、
燃える蛇やさそりのいるあの大きな恐ろしい荒野、水のない、かわききった地を通らせ、堅い岩から、あなたのために水を流れ出させ、
あなたの先祖たちの知らなかったマナを、荒野であなたに食べさせられた。それは、あなたを苦しめ、あなたを試み、ついには、あなたをしあわせにするためであった。――
이렇게 어려움을 겪게 하신 이유를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마침내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 그러셨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자,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넘치는 메추라기를 보내주십니다. 하지만 그것이 축복이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 33절~34절에 뭐라고 적혀 있나요?
“고기가 아직 이 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라 불렀으니 욕심을 낸 백성을 거기 장사함이었더라”
기브롯 핫다아와(탐욕의 무덤)
肉が彼らの歯の間にあってまだかみ終わらないうちに、主の怒りが民に向かって燃え上がり、主は非常に激しい疫病で民を打った。
こうして、欲望にかられた民を、彼らがそこに埋めたので、その場所の名をキブロテ・ハタアワと呼んだ。
그 많은 고기를 아직 씹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큰 재앙으로 내리심으로 말미암아 욕심을 낸 백성들을 크게 치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 보면 이 부분이 이상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먼저 첫째로,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죄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우리에게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기껏 주신 고기를 씹기도 전에 재앙을 내리셨을까요.
그리고 둘째로, 사실 백성들이 고기를 달라고 했던 일이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두 번째입니다.
출애굽기 16장에 보면요, 이 때는 만나도 주셨고 고기도 주셨습니다. 출애굽기에서는 이렇게 주셨는데, 왜 이제 와서 민수기에서는
이처럼 무서운 재앙을 내리셨습니까. 하나님한테는 한 번만 구할 수 있고, 두 번 구하면 안 되나요? 아뇨. 하나님께 구하는데 무슨
회수제한 같은 것은 없습니다.
사실 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을 받아주고 요구를 들어주셨던 출애굽기 16장, 그리고 원망에 대해서 진노하시고 무서운 재앙으로 치셨던
민수기 11장 사이에는 중요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바로 출애굽기 24장이 있었던 것입니다.
출애굽기 24장은 시내산 언약이라고 불리는 언약 체결식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에 관한 신학적인 어려운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만,
여기서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게 되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간에 공식적인 언약을 맺게 됩니다. 예전에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맺는 언약은 무조건 계약입니다. 아브라함이 무엇을 할 필요가 없어요. 그냥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은 아닙니다.
출애굽기 24장 3절과 7절을 봅니다.
먼저 3절은요,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의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전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そこでモーセは来て、主のことばと、定めをことごとく民に告げた。すると、民はみな声を一つにして答えて言った。「主の仰せられたことは、みな行ないます。」
그리고 7절을 봅니다.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そして、契約の書を取り、民に読んで聞かせた。すると、彼らは言った。「主の仰せられたことはみな行ない、聞き従います。」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모든 율례를 모두 따를 것이라고 서원을 합니다. 그리고 6절과 8절에 보면 하나님께 바친
소의 피를 제단에 뿌립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피는 생명을 상징하지만 또한 희생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를 어길 시에는
준엄한 심판이 따른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 피로 맺어진 시내산 언약인 것입니다.
이 언약으로 인하여 이제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은 진정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관계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시내산 언약을 체결하기 전에는 하나님과 그들의 관계는, 말하자면 고급 호텔 레스토랑 사장님과 손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어느
식당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사장님이나 직원이 우리를 친절하게 대해줍니다. 식당에 들어가면 웃는 얼굴로 우리를 반겨주고 자리로
안내해줍니다. 그 자리는 깨끗한 식탁포로 덮여있고요, 냅킨도 예쁘게 접혀 있습니다. 메뉴에 대해서 물어보면 하나하나 설명도 해주고요.
음식이 다 되면 공손히 가져다 줍니다. 물을 더 달라면 더 주고요, 포크가 지저분하다고 하면 죄송하다고 하면서 곧바로 새것으로
바꾸어줍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 반면, 직원들은 어때요? 손님들이 많으면 바쁘게 움직입니다. 손님들이 무슨 불평 불만을 하면 그저 죄송하다고 사과합니다.
직원들이 그런 아름다운 자리에 앉아서 식사를 해요? 아뇨. 그렇지 않죠. 손님들이 안 보이는 저쪽 안쪽이나, 아니면 허름한 직원
식당에서 때우기도 할 것입니다. 레스토랑 사장이 그럼 직원들을 공손하게 대해주나요? 아니요.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지시를 합니다.
그리고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혼이 나기도 하겠지요. 그리고 또 어디 그 뿐인가요. 직원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가게가 오픈하기 훨씬 전에
와서 준비를 해야 하고, 가게 문을 닫은 다음에도 뒷정리가 보통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고급 호텔에 한 젊은 직원이 있었습니다. 그 사장님은 아주 엄하기로 소문이 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직원이 오래 버티지
못하고 맨날 바뀌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젊은이는 꿋꿋이 근무하고 있어요.
그렇다고 이 사장님이 그 젊은이한테는 상냥하게 대해주거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엄하게 대해면 대했지
봐주거나 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그 호텔 단골손님이 그 젊은이한테 물었답니다.
“이봐. 자네는 정말 참 대단한 것 같네. 내가 자네를 지켜 봐왔는데 저렇게 엄한 사장님 밑에서 어떻게 이렇게 오랫동안 꿋꿋이 버틸
수 있는지 얘기해줄 수 있겠나?”
그러자 이 젊은이가 웃으면서 조용히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저 사장님은 제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몇 년 뒤면 이 호텔을 제가 물려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을 들으니까 모든 것이 납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손님이라고 한다면 상냥하게 대우하겠지요. 요리도 갖다
주어야겠지요. 다 먹으면 그것도 치워야겠지요. 무슨 불평이나 불만을 이야기하면 사과도 하고 요구도 들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면 뭐합니까. 그 손님은 어차피 남남입니다. 가족도 아니고 식구도 아니에요. 밥 다 먹으면 갈 사람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단골손님이고 아무리 매상을 많이 올려주었다 하더라도 가게 문 닫을 시간이 되면 내보내야 합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아무리 좋은
손님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은 남남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족은 어떻습니까. 영업시간이 끝나면 바닥도 쓸고 테이블도 정리하고 그릇도 치우고 정신 없이 바쁩니다. 그 젊은이도 잘못한
것이 있으면 사장인 자기 아버지한테 혼이 나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젊은이가 호텔 사장의 가족이고 장차
그 호텔을 이어받을 상속자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8장 16절~18절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私たちが神の子どもであることは、御霊ご自身が、私たちの霊とともに、あかししてくださいます。
もし子どもであるなら、相続人でもあります。私たちがキリストと、栄光をともに受けるために苦難をともにしているなら、私たちは神の相続人であり、キリストとの共同相続人であります。
今の時のいろいろの苦しみは、将来私たちに啓示されようとしている栄光に比べれば、取るに足りないものと私は考えます。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남남이면 다시 안 보면 그만입니다.
잠언 24장 19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너는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
悪を行なう者に対して腹を立てるな。悪者に対してねたみを起こすな。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아직 영업중인 상황에서 그 사람이 손님이라면 대우를 받을 수 있겠지요. 그런데
영업시간이 끝났을 때, 아직도 계속 거기 있고 싶대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내쫓게 되는 것입니다. 돈이 없어요? 그러면 곧바로
경찰에 신고를 당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을 성경에는 뭐라고 적혀 있나요.
마태복음 7장 23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しかし、その時、わたしは彼らにこう宣告します。『わたしはあなたがたを全然知らない。不法をなす者ども。わたしから離れて行け。』
여러분, 손님이 좋으시겠습니까. 상속자가 좋으시겠습니까. 제가 평신도 때 여러 교회에 다니다 보면요, 교회에서 이걸 해달라 저걸
해달라 그러면 싫어합니다. 그냥 자기는 예배를 드리기만 하겠다는 것이에요.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아무한테나 이걸 해달라 저걸 해달라
그러겠어요? 아닙니다. 그것은 이제 교회의 손님이 아니라 교회 주인이, 교회 가족이 되어달라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교회에 새로 오신 분한테 전도를 하라고 하겠어요, 아니면 청소를 하라고 하겠어요. 이것도 갖다 주고 저것도 챙겨주고
그렇습니다. 그건 아직 손님인 단계라는 것이지요.
주님도 마찬가지십니다. 이것도 해주고 저것도 해주고 그럴 때는 아직 손님입니다. 예, 홍해도 갈라주셨습니다. 단단한 바위에서 물도
주셨습니다.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왜요? 그 때까지는 아직 그들은 손님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손님이 좋은가요? 손님은 어디까지나 가족의 반대말, 상속자의 반대말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피의 언약을 맺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호텔 사장님과 손님 관계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남남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자격을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손님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전에는 손님이라서 사장한테 이것도 해달라 저것도 해달라 말할 수 있었지만, 이제 손님이 아니라 직원이요, 가족이요, 상속자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사장한테 이걸 해달라 저걸 해달라 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야말로 혼이 안 날래야 안 날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 시내산 언약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이 언약은 고대 시대에 행해진 것이기에 우리와 상관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과 피의 언약을 맺음으로 인하여, 생명을 걸고 하나님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이를 지키면 축복을 받지만 이를 어기면 죽음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이를 지켰나요? 아닙니다. 어기고 어기고, 또 어기고
그랬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 목숨을 걸고 지키겠다고 했는데 어겼으면 죽어야지요.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닙니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당장이라도 죽어서 지옥불에 떨어져도 마땅한 존재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죽는 대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인해서,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죽은 것으로 치자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모든 저주를 받으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저주를
받은 것으로 치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나요? 예, 이미 우리가 받을 형벌을 예수님께서 모두 받아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맞을 채찍을 모두
받아주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축복 받게는 받을 것이 없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죄는 모두 사라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 받을 수
있는 특권을 얻게 된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믿음을 다시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지금 상속자의 믿음입니까. 아니면 손님의 믿음입니까. 나는 지금 교회
가족의 믿음입니까, 아니면 여전히 새신자의 믿음입니까.
지금 힘드십니까. 어려우십니까.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 광야생활을 허락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 허락하신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8장 18절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今の時のいろいろの苦しみは、将来私たちに啓示されようとしている栄光に比べれば、取るに足りないものと私は考えます。
우리 모두 하나님 나라의 자녀로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서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잘 섬겨서 마침내 하나님 나라를 물려받는 영광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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