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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부 용 산
부용산 오리 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사이 사이로 회오리 바람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봉우리에 하늘 푸르러 푸르러 (박기동 작사 /안성현 작곡) ♬ 해설 구전가요 「부용산」은 슬픈 가사에 애조 띤 가락이 잘 어우러지는 노래다. 지난 시절 빨치산들이 즐겨 불렀다고 하며, 전남 지역에서는 지금도 입에서 입에서 전해지며 맥이 이어지고 있다. 80년대에는 대학생들 사이에도 꽤 널리 퍼졌다. 최근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 노래는 해방 직후 목포 항도여중과 목포 사범학교에 근무하던 음악교사 안성현 과 국어교사 박기동이 이 학교에 다니다가 요절한 여학생의 상여 나가는 소리로서 이 노래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가사는 그보다 몇 해 전 박교사가 전남 벌교에서 그 역시 일찍 죽은 여동생을 추모하고자 쓴 것이다. 최근에 1절이 지어 진지 52년 만에 2절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다음은 「부용산」에 대한 칼럼이다. "東西의 노래 부르지 못한 노래 「부용산」이 반세기만에 다시 불려졌다. 누가 공식적으로 금지시킨 것도 아니면서 쉬쉬하며 숨은 입에서 숨은 입으로만 전해오던 노래가 누가 공식적으로 해금한 것도 아닌데 저절로 실컷 목청을 뽑기 시작했다. 지난 5월29일 저녁 전남 목포의 대형 레스토랑 뉴프린스에서 열린 소프라노 송광선(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씨의 초청 음악회에는 250여명이 모여 테이블을 가득 메웠다. 이 자리에서 송씨는 박기동 시 안성현 곡의 「부용산」을 불렀고 피날레에는 목포시립합창단이 이 노래를 합창했다. 휴식시간에는 국회의원 한화갑, 탤런트 임동진씨 등이 나와 이 노래를 경창했다. 「부용산」의 광복 음악회였다. 「부용산」은 본란이 작년에 두 차례에 걸쳐(98년2월14일자, 3월28일자) 발굴·소개한 노래다. 1947년 목포 항도여중에서 함께 교편을 잡고 있던 작시·작곡자에 의해 만들어져 목포에서 맨처음 불리기 시작했고 6·25때 작곡자가 월북하고 빨치산들의 애창곡이 되면서 지하로 숨어 호남지역에서만 구전되어 왔다. 젊어서 죽은 누이동생을 애도해 지은 시가 애제자이던 소녀의 죽음을 추모한 곡으로 변한 이 노래는 전혀 사상성이 없이 그 애조가 가슴을 애잔하게 적신다. 이 곡이 빛을 보면서 정식으로 음반에 수록된 것은 가수 이동원씨에 의해서이고 지난 3월 CD가 나왔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노래는 가사가 1절밖에 없었다. 그 후 송광선씨가 음악회를 준비하면서 2절을 보충할 방법이 없겠느냐고 나에게 물어왔다. 나는 93년 호주로 이민 가서 살고 있는 작시자 박기동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올해 82세의 박씨는 별다른 망설임 없이 사흘 후 2절 가사를 팩스로 보내왔다.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 데 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1절이 나온지 52년만에 작시자 자신에 의해 붙여진 이 행운의 2절은 이번 목포 음악회에서 처음으로 불려졌다. 박씨는 이 가사를 보내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써놓고 보니 좀 껄끄럽게 된 것도 같고 너무 애상적으로 흐른 느낌이 없진 않지만 원래 「부용산」이란 시와 곡에는 그런 뉘앙스가 다분히 흐르고 있으니 어떡합니까. 눅눅한 음지만을 헤매던 이 곡이 소리의 주인공을 만나 햇볕 쏟아지는 양지로 나온다니 반갑습니다. 아옹다옹 쫓기고, 뜯기고 할퀴면서 이것도 사람 사는 동네인가 싶을 만큼 썩어 문드러진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동포들 중 몇 명이라도 이 노래로 인해 위안을 받는다면 보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얼마후 「부용산」의 악보를 찾아냈던 목포출신의 배우 김성옥씨가 시드니로 가서 박씨를 직접 면담하고 왔고 목포의 음악회는 김씨가 주선한 것이다. 「부용산」 광복음악회는 목포에서 끝난 것이 아니다. 이 노래의 가사의 원산지는 작시자의 고향이자 실제로 부용산이 있는 전남 보성군의 벌교다. 벌교에서는 이달 하순경 이동원씨를 초청해 「부용산」을 시창(始唱)할 준비를 하고 있고 노래비도 세울 예정이다. 「부용산」은 실은 목포에서의 광복에 한발 앞서 경북 포항에서 불려졌다. 지난 5월13일과 14일 「삶과 꿈 싱어즈」(대표 신갑순)가 포항공대와 포스코에서의 공연에서 이 노래를 합창으로 소개했다. 이것은 「부용산」으로서는 획기적인 일이다. 호남의 노래인 이 곡이 영남에서 불린 것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어느 연배 이상의 호남인이라면 「부용산」을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고 영남인 중에서는 이 노래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노래가 숨어다니는 동안 영·호남의 경계인 지리산을 넘지 못했다. 음악은 합일(合一)의 기호(記號)다. 모든 노래는 하나 되게할 힘을 가졌다. 노래 하나도 통일되지 않는 땅에 화합은 없다. 이제 마음놓고 불려지기 시작한 「부용산이 국민개창의 노래가 된다면 동서화합에도 기여할 것이다. (한국일보, 김성우 칼럼, 1999. 6. 3)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신문 칼럼 東西의 노래 부르지 못한 노래 「부용산」이 반세기만에 다시 불려졌다. 누가 공식적으로 금지시킨 것도 아니면서 쉬쉬하며 숨은 입에서 숨은 입으로만 전해오던 노래가 누가 공식적으로 해금한 것도 아닌데 저절로 실컷 목청을 뽑기 시작했다. 「부용산」은 1947년 목포 항도여중에서 함께 교편을 잡고 있던 작시·작곡자에 의해 만들어져 목포에서 맨처음 불리기 시작했고 6·25때 작곡자가 월북하고 빨치산들의 애창곡이 되면서 지하로 숨어 호남지역에서만 구전되어 왔다. 젊어서 죽은 누이동생을 애도해 지은 시가 애제자이던 소녀의 죽음을 추모한 곡으로 변한 이 노래는 전혀 사상성이 없이 그 애조가 가슴을 애잔하게 적신다. 이 곡이 빛을 보면서 정식으로 음반에 수록된 것은 가수 이동원씨에 의해서이고, 이때까지(1999년)만 해도 이 노래는 가사가 1절밖에 없었다. 그 후 송광선씨가 음악회를 준비하면서 2절을 보충할 방법이 없겠느냐고 나에게 물어왔다. 나는 93년 호주로 이민 가서 살고 있는 작시자 박기동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올해 82세의 박씨는 별다른 망설임 없이 사흘 후 2절 가사를 팩스로 보내왔다.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 데 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 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박씨는 이 가사를 보내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써놓고 보니 좀 껄끄럽게 된 것도 같고 너무 애상적으로 흐른 느낌이 없진 않지만 원래 「부용산」이란 시와 곡에는 그런 뉘앙스가 다분히 흐르고 있으니 어떡합니까. 눅눅한 음지만을 헤매던 이 곡이 소리의 주인공을 만나 햇볕 쏟아지는 양지로 나온다니 반갑습니다. 아옹다옹 쫓기고, 뜯기고 할퀴면서 이것도 사람 사는 동네인가 싶을 만큼 썩어 문드러진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동포들 중 몇 명이라도 이 노래로 인해 위안을 받는다면 보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노래 가사의 원산지는 작시자의 고향이자 실제로 부용산이 있는 전남 보성군의 벌교다. 어느 연배 이상의 호남인이라면 「부용산」을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고 영남인 중에서는 이 노래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노래가 숨어 다니는 동안 영·호남의 경계인 지리산을 넘지 못했다. 음악은 합일(合一)의 기호(記號)다. 모든 노래는 하나 되게 할 힘을 가졌다. 노래 하나도 통일되지 않는 땅에 화합은 없다. 이제 마음 놓고 불려지기 시작한 「부용산」이 국민 개창의 노래가 된다면 동서화합에도 기여할 것이다. 한국일보(1999. 6. 3)에 실렸던 김성우씨의 칼럼을 편집했습니다.--운영자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광남일보 2004년 08월 13일] [특별기고]부용산, 그 작지만 험한 고개
한송주 언론인 ‘부용산’이 드디어 무대에 오른다 하니 극본을 쓴 사람으로서 당연히 감개가 크다. 그러나 그 감개는 ‘부용산’의 연극화 작업에 참여했다는 단순한 동참자의 기쁨에 머물지 않고 ‘부용산’을 간접적으로나마 앓았던 전라도 후예의 감회로까지 파장을 잇는다. 내가 부용산을 만난 건 1992년 겨울로 거슬러 올라간다. 목포에서 열린 소청 조희관선생의 추모제에 취재차 갔을 때였다. 고 이을호박사, 고 이기태씨, 차범석선생, 정종박사 등 소청의 후학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대회가 성황리에 막을 내리는 참이었다. 좌중에서 누군가가 일어나 “우리 고인을 위해 부용산 오릿길을 제창합시다” 라고 큰 소리로 제의를 했고, 어느 분의 선창이 있자 한 사람 두 사람 애절한 곡조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처음 듣는 귀에도 절절하기 그지없는 그 노래는 그런데 한 절이 끝나고 나서도 거듭 거듭 흐느낌을 실어가면서 이어지는 것이었다. 좌중은 그야말로 감격의 물결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정종박사로부터 부용산 오릿길의 사연을 대충 얻어 들었다. 우리 땅에 이런 기막힌 정조를 가진 노래가 있었다는데 감탄하면서 노래의 진짜 내력은 무엇일까, 왜 이런 절창이 맥이 끊겼을까, 하는 의문과 아쉬움을 되뇌었다. 기회가 닿아 부용산 노래의 내력을 찾아나선 게 그로부터 1년반 뒤. 벌교와 목포 등지를 돌면서 관련자들의 증언을 모으고 안성현씨의 작곡집을 발굴해 발표하는 한편, 박기동 시인의 현황 등을 중계해 월간지에 보도함으로써 미흡하나마 ‘부용산 오릿길’의 복원을 마무리했다. 그 3년 뒤에 한국일보 김성우 주간이 칼럼에 부용산을 등장시키는 것을 신호로 같은 표제의 노래와 소설들이 나오고 급기야 서울에 예술인들이 주축이 된 동호회가 결성되면서 부용산은 거국적인 복권 단계에 들어서기에 이르렀다. 목포와 벌교 지역 주민들이 부용산의 지리적 배경이 우리 쪽이라며 다툼아닌 다툼이 벌이고 부용산 시비며 정자 건립 등 기념사업들을 부랴부랴 서두는 것이 이즈음의 풍경이었다. 얼마간 희화적인 분위기가 없던 건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시대의 질곡을 훌륭한 비극으로 표출한 예술작품을 뒤늦게나마 되찾아 향수하려는 노력들은 높이 사서 충분한 것이었다. 나는 이 무렵 때가 무르익었다고 보고 부용산의 연극화 작업을 이리저리 모색하기 시작했다. 너무나 아름답고 아프고 한스러운 우리들의 이야기가 극의 소재로 부족함이 없고 또 뛰어난 시인들과 작곡가가 어울려 만든 음악이 그 극을 띄워올리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그토록 법석을 떨었던 서울의 동호인들은 이 좋은 건을 무대화하지 않고 무얼하고 있는 걸까, 고개가 갸우뚱거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알만한 예술인들도 부용산의 연극화 작업에는 이상하게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물건이 될 것은 같은데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지 않느냐, 하는 식으로 미적거렸다. 현실적 어려움? 나중에야 알아챘지만 그것은 다름아닌 이데올로기 콤플렉스였다. 아, 그 도저한 주눅. 관련자들이 아직도 살아 있고 부용산의 내력이 확실히 규명된 것도 아닌데 섣불리 극화시켰다가 무슨 성가신 일을 당하려구, 하는 게 평생 굿을 업으로 어느 쟁이의 변설이었다. 좋다, 그렇다면 쟁이가 아닌 신출내기가 한다, 하고 소시적 연극을 했던 경험을 살려 일을 저지른 게 어찌어찌 극본의 모양이 되었던 것이다. 부용산이 무대에 오른다는 소식을 듣고 부용산과 개인적인 시절인연을 되짚는 식으로 이야기가 엮어지고 말았다. 이런 저런 우여곡절 끝에 우리 곁에 돌아온 우리들의 아픈 이야기를 다시 살면서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의 역사를 아파하는 기회로 삼아야할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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