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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재속프란치스코 야고바형제회 원문보기 글쓴이: 세베리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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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호델에서 아침을 맞았다. 과거 바위를 파고 주거지로 만들었던 것을 현대적으로 변형하여 호텔형식으로 만든호텔 Bezirhane는 모든 것이 아기자기 했다. 서쪽에 달이 걸려 있는 이른 아침에 호텔 방문을 열고 나왔다. 인적이 끊긴 호텔내부는 고요했다. 석굴이 있는 호델뒤로 나가자 철지난 풀장이 을신년스럽게 다가 온다. 이른 시간인데도 아침을 먹을 레스트랑내부는 분주했다. 호텔주변 마을을 한바귀 돌기 위하여 호텔 골목길을 나서려할 때 석굴이 있는 암봉 위로 열기구들이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아침햇살이 퍼질 무렵이라 탑승자들은 추을 것 같지만 그렇지 는 않은 것이 열기구다. 열을 분사하는 버너에서 나오는 열기가 대단하여 어느정도 추위를 막아 주기 때문이다. 식물도감 그림처럼 자연과 마을들의 모습들이 사실적, 입체적 감각으로 동시에 보여주어 공중에서 보는 경치는 근사하게 펼쳐진다.
열기구의 행렬을 구경하다 다시 실내로 들어 다시 떠날 채비를 차린 후 식당으로 갔다.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로 식당은 넘쳐 났다.
어제 민속춤 공연장에 본 낮익은 얼굴들도 많이 보인다. 빠르게 아침을 챙긴 후 커피를 받아 느긋한 마음으로 커피를 마셨다.
짐을 차에 실고 다음 행선지로 떠났다. 오늘은 버스로 이동이 많은 날이다. 갑파도키아에서 콘야로 이동하는 날이다. 거리로는 약223km 소요시간 약 4시간이며 가는 도중 중국에서부터 터키의 이스탄불 그랜드 바자르까지 연결되는 실크로드 일부분에 있는 오브룩에는 실크로드 상인들이 묵어가던 숙소인 오브룩 한 (Obruk han)이 있다.
Silk road! 문자 그대로 비단 길이다. 세계문명의 발상지를 갖고 있는 중국과 중동일대 국가들을 이어지는 문명교류역활을 했던 길이다. 중국의 비단은 중동과 유럽에 커다란 인기를 끌었다. 어디 그뿐인가. 도자기, 종이, 향료 각종 차류 등등은 유럽과 중동인
들의 생활의 모습마저 급격하게 변화시켰으며 역으로 유리와 숫자와,천문, 의료기술 등등은 동북아의 문명을 바꿔 놓는다. 상호문명의 교류의 주체자는 바로 상인들이었다. 낙타등에 짐을 바리바리 쌓아 올리고 긴대열을 이룬 많은 상인들이 어울려 카라반을 형성한 후 오고 가며 장사를 했던 것이다. kervan saray에게는 늘 도적 때와 불순한 일기는 공포 그 자체었다. 12,000 km를 걸어야 하는 대장정, 그들은 늘 위험에 노출된 상태에서 목숨을 걸고 오고 간 것이다. 당시 제국을 장악하고 있던 슐탄들은 그들이 무사히 당시 국제무역항의 도시였던 이스탄불 바자르까지 도착하기를 염원했다. 무역을 통하여 벌어 들이는 금은 보화는은 바로 국력의 밑거름이었기 때문이었다. 보통 대상들은 9시간을 걸어야 40km이동할 수 있었다. 40km 마다 세운 것이 바로 카라반들의 숙소다. 그리고 200km 지점마다는 대형숙소를 세웠다. 돌로 성곽처럼 세워 도적때의 습격을 막았으며 그 안에 각종 편의시설을 만들어 대상들에게 안전한 휴식및 숙식을 할 수 있도록 배려 한 것이다. 시설로서는 목욕탕, 약국, 기도처, 가게, 낙타보관소, 등등이 있었다.
오브룩한을 보면서 그 뒤에 있는 호수를 찾았다. 하늘이 맑고 흐림에 따라 푸른 또는 회색으로 변화는 신비한 오브룩 호수는 긴 타원형으로서 아름답다. 급격한 지각변동에 의하여 만들어진 호수, 그 이름은 대상들의 숙소였던 이름을 따서 오브룩 호수라 부른다. 단층들이 에메랄드 물빛에 반영되는 모습이 참 기묘한 아름다움을 전한다. 촬영 포인트를 찾아 동행들을 모이게 한 후 여러장의 사진을 남겼다.
길고 긴 차량 이동은 방랑자의 심신을 지치게 한다.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식당에 정차했다. 이젠 터어키식 음식에도 적응하기 시작했는지 음식이 낮설지 않다. 야채를 시작으로 빵과 과일로 점심을 해결 한 후 식당 광장으로 나와 오랜시간 차에서 시달려야 했던 다리근육을 풀고자 산책을 하였다. 적당히 다리 근육이 이완된 후 창에 올라 버스 정면에 걸려 있는 지도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토레스 산맥 넘어 아름다운 지중해 도시를 찾아가는 긴 여정, 6시간 동안 넘어야 하는 길고 긴 산맥 투어다. 폭설이라도 내리면 교통이 끊기는 산맥은 높고 험했다.
콘야를 경유하여 약 420km의 이동 거리를 6시간이나 걸려 안탈라로 가야 한다. 험준한 산맥을 타고 넘는 산정상 부근에 도달하자 차창밖으로 비가 뿌렸다. 산은 수림보다는 회색빛 돌들이 촘촘하게 산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 어두운 먹구름이 산정상을 덮는다 또 하나의 산등을 타고 넘자 날이 개였다. 산이 깊은 만큼 날씨도 변화가 많았다. 마음씨 좋게 생긴 형제나라의 기사양반, 운전 솜씨가 노련하다. 타고 내릴적마다 수고한다며 인사를 전하면 씩 웃는 모습이 순박하게 느껴지는 사람이다.
산맥을 넘어 해질무렵 도착한 지중해 작은 도시 사거리 Ring hotel에 도착하여 길고 긴 버스, 산맥투어를 끝낼 수 있었다. 조금은 지치는 하루였다. 저녁식사 후 마친 후 숙소로 이동하여 일찍 잠을 청했다. 그리고 이른 새벽 5시에 일어나 산책을 나갔다. 생소한 지중해 부근 작은 도시, 조금은 두려움이 있지만 개의치 않고 산책을 즐겼다. 그리고 호텔로 돌아 와 1층로비에서 8층까지 연달아 걸어 오르고 내려서기를 반복하며 여행중 먹는 기름진 음식과 시차 스트레스로 깨진 몸의 균형을 조금이라도 유지하기 위하여 노력을 하였다. 그리고 아침을 다시 챙긴 후 항구로 나갔다. 로마시대에 건설된 성곽을 벗어나 해안선 밑으로 내려가자 항구특유의 내음이 비쳤다. 태양과 바람과 쪽빛 바다가 근사한 지중해! 해안선 따라 펼쳐진 그림같은 풍경들, 왜 유럽인들이 지중해 연안에
별장을 갖고 싶어하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름답다는 감탄사밖에 할 말이 없었다.
성곽옆으로 난 가파른 계단을 내려서자 기념품 가게가 눈부시게 다가 온다. 웃통을 벗어 던지고 상점 물건을 진열하는 주인 모습이 인상적이라 윙크로 눈인사를 보낸 후 샷다를 눌렀다. 호응해 주는 점포 주인에게 웃음을 다시 보낸 후 목례를 하였다. 그리고 멋진 여인의 상반신을 보며 해적선에 올랐다.
저 해안선 뒤로 보이는 산맥이 바로 어제 넘어온 토레스 산맥이다. 해안선이 참 아름답다.
우리 일행이 도착할 무렵 고운 무지개가 폭포 사이로 떴다. 일곱가지 색 무지개를 이른 아침에 보았다는 것은 하루 일정에 길조가 드렸졌다는 뜻이 아닌가. 다들 환호성을 지른다 배가 폭포 가까이 다가가자 물 보라가 허공으로 산산히 부서져 내린다. 그 사이사이를 놓치지 않고 샷다를 눌렀다. 그리고 배선미에 마련된 타이타닉호의 인상적인 광경처럼 흉내를 내는 일행들을 번갈아 세우고 추억을 만들어 주었다.
해적선에서는 한국 노래가 흘러 나왔다. 회항하는 순간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 흘러 나온다. 뱃머리 부근에 있는 작은 홀 위로 일행인 보스턴 여인이 올라 서서 멋진 춤을 추자, 해적선 선장이 포도주 한 병을 들고 나타나 따라 준다. 한 잔 그리고 잔을 또 내밀어 한 잔을 더 받아 마셨다. 이젠 태양이 제법 눈부시고 해풍도 밀려 왔다가 다시 밀려 간다. 흥겹고 멋진 지중해 유람이었다.
해적선이 회항하려 배를 선착장으로 기수를 돌리자 옆배 선장이 경계의 눈으로 해적선을 주시한다. 길고 좁은 배와 배 사이를 멋지게 파고 들어 정박시키는 해적선장의 명을 받아 키를 조정했던 터어키 여인이 안도하는 눈치다. 해적선장에게 수고했다는 인사를 나눔하고 선착장을 떠나 옛도시 투어에 나섰다. 골목 골목 길이 아름답다.
고도의 구석구석 골목 길을 투어하다 가죽 폐션쇼를 구경하였다. 여러가지 형태의 가죽 옷들이 화려했다. 샤스와 가죽벙어리 장갑 등 소품을 산 후 매장을 빠져 나왔다.
지중해 최고휴양지 안탈라! BC130년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방문을 기념하기 위하여 만들었다는 대리석 문, 하드리아누스문과 AD2세기에 만든 성모마리아를 위한 교회를 7세기 이후 모스크로 사용한 이울라 미나렛과 카라알 리우로 공원과 항구 등등을 투어 후 이곳에서 4시간 이상 소요되는 파묵깔레로 가기위하여 차에 올랐다. 파묵깔레로 가는 도중 카크리크 동굴을 찾기로 하였다.
종유석, 석순 등등의 석회암 지형들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석회암 동굴 카크리크에는 크고 작은 웅덩이들이 있으며 동굴속에는 물이 흐르고 있었다. 동굴의 물은 피부병이나, 관절염 치료에 효과가 상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굴을 떠나 저녁무렵 파묵깔레 Colossae hotel에 도착하여 체크인한 후 숙소에 들었다. 호텔은 휴양지답게 리조트풍으로 깨끗하고 넓었다. 서둘러 식사를 마친 후 호텔 아래 동네에 있는 재래식 시장을 찾아 야시장을 구경하였다. 길고 큰 시장에는 각종 산물로 가득했다. 옷과 채소와 과일, 귀금속 등등 다양한 물건들을 보면서 대부분 상인들이 한국말을 조금씩 하는 것을 보아 많은 한국인들이 내방하는 곳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이곳에서 무화과 열매로 만든 무화과 곳감을 사서 먹어보니 달콤했다. 제노베파가 큰 비늴봉지에 들어 있는 무화과 열매샀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서 커다란 야시장을 구경하였다. 사람사는 냄새가 풀풀거린다. 어느나라를 가던지 그 나라의 삶의 내부 동향을 보고 싶다면 재래시장처럼 좋은 곳은 없다. 먹는 음식재료와 음식을 담는 그릇과 입는 옷들을 살펴 보므로서 그 나라의 삶의 환경에 대하여 느낄수 있기 때문에 재래시장 방문은 여행중 중요한 선택이다.
다시 호텔로 돌아 와 일행들과 함께 수영복으로 갈아 입은 후 세개의 탕으로 구성된 온천탕으로 몰려 가 야밤 온천욕을 즐겼다. 온,냉탕을 오고가며 여행에서 찌든 여독을 풀어내니 몸은 한결 거뜬해 졌다. 온천욕 덕분인지 다음날 아침 몸이 훨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달이 서천에 걸린 이른 새벽에 어제처럼 쪽시간을 이용하여 산책을 하였다. 아무도 없는 이국땅 호텔 외진 곳을 산책을 하는 재미가 솔솔했다.
아침식사 후 서둘러 차에 짐을 실은 후 석회층으로 이루워진 환상적인 경관이 준비된 파묵깔레 투어에 나섰다. 우선 BC190년 페르가몬 왕국이 건설한 로마의 도시 히에라폴리스를 찾아 그 안에 있는 하얀 종유석 계단 절벽을 보고 노천온천에 들러 족욕을 한 후 필립사도의 순교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교회로 갔다. 도시중에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필립교회를 찾아 가기위하여는 한참을 걸어 언덕으로 올라 가야 했다. 마침 일행중 미국에서 목사 활동을 하는 성직자가 있어 교회에 도착한 후 개신교의 예배방식으로 방문예배가 있었다. 상당한 크기의 교회는 히에라폴리스를 한 눈에 바라 볼 수 있는 멋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12제자 중 한 사람이었던 빌립사도의 순교 기념 교회는 평원지대를 걸어 한참을 올라야 만날 수 있었다. 마르티리움이라 불리는 이곳은 중앙에 2개의 십자가를 서로겹처 8각형을 만들고 그 주위에 여러개의 방들의 둘러 쌓고 있는 형태의 팔각 옥타콘이다. 돌에 맞아 이곳에서 순교한 빌립을 기념하기 위하여 5세기초 건축된 교회다.
사도필립 순교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교회구조는 이 문양처럼 사각형을 엇비슷하게 배열한 후 모서리에 생긴 공간들은 방이었다. 그리고 중앙에는 예배를 볼 수 커다란 공간이 있었다.
예배를 보고 있는 일행들....
일행들은 오랜시간을 통해 복음을 읽고 기도를 드렸다. 예배를 끝낸 일행을 교회 중앙에 세운 후 기념촬영을 갖았다.
빌립사도의 순교기념 교회에서 바라 본 히에라폴리스 전경이다. 당시 도시 규모를 상상만 해도 광활함을 느낄 수 있다. 지금도 계속 발굴중이다.
이곳은 원형극장으로 맹수와 검투사들이 혈투를 벌렸던 곳이다. 원형무대가 검투사와 맹수가 싸우던 장소였고 그 뒤 철창살 안쪽에는 사나운 맹수와 검투사들이 대기하고 있다. 황제를 비롯한 각료들과 관객들에 입장이 끝나면 처절한 혈투를 벌렸던 곳이다.
점토로 만든 입장권이 있어야 출입이 가능했던 원형극장 가파르면서도 그 규모가 웅장했다. 고대 로마 도시를 전체를 본 후 그 웅장함에 감탄사를 느끼며 로마가 어떻게 천년의 역사를 누릴 수 있었는가에 대하여 느낌이 왔다. 세계사적으로 국가를 천년을 유지했던 민족은 흔하지 않았다. 로마와 신라만 천년 정도 유지했던 국가였다. 그런면에서 한민족으로서 자부심을 느끼게 된다.
이젠 독일에서 오는 제노베파의 친구들을 만나로 지중해로 다시 나가야 한다. 길을 서둘렀다.
가는 길에 도미구이를 맛있게 하는 호수부근 식당이 있어 잠시들러 쉬며 점심을 챙겼다. 호수의 물빛이 쪽빛이다. 전혀 파문조차 일지 않는 호수는 그냥 명경지수였다. 동요가 없는 호수 그 잔잔함이 마음을 울컥하게 한다. 우리들 누구나 지니고 있는 마음이란 존재가 있다. 그 녀석은 묘한 녀석이라 보는 것 하나만으로도 요동을 치고 듣는 것 하나만으로도 활활 불이 붙는다. 어디 그뿐인가 보고, 듣는 것이 결합되면 통제 불가능하게 되는 것도 마음이다. 한번 요동치기 시작하는 마음은 좀체로 잡을 수 없다. 그래서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 바로 수양이며 종교적 본질이 아닌가 한다. 우리가 흔하게 사용하는 말중에 조심하라는 이야기 있는데 그 말은 바로 네 속에 들어 있는 마음을 잘 관리하라는 뜻이다. 마음을 잘 간수해야 실수가 없기 때문에 생긴 언어인 것이다. 호수에 파문이 없는 것과 나의 마음에 파문과 비교가 되니 울컥한 것이다. 마음에 늘 평화에 볕이 든다면 고요의 정숙으로 나가 항상 행복할텐데.... 하루에도 열두번씩이나 요동치니 딱한 일이다. 이놈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면 모든것은 헛수고다. 수면을 배경으로 인물사진을 찍어 주었다. 배경이 깨끗하면 그 앞에 있는 피사체도 깨끗하고 아름다운 영상물로 표현된다.육신도 제대로 살려면 마음이란 배경을 항상 맑고 투명하게 만들어 놓아야 한다.
도착한 항구도시는 각종선박으로 가득했다. 대부분 선박은 요트가 많았다. 휴양도시라 그런지 리조트, 호텔, 터미널, 선박 등등이 잘 정비되어 있었다. 광장에서 독일에서 온 친구들과 만난 후
항구 뒷골목에 있는 각종 상품들로 가득한 점포 길을 걸어 내일 투어할 성 아래 노천카페로 몰려 갔다. 항구와 도시의 전반이 한 눈에 들어 오는 전망이 있좋은 곳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반가운지 듣기 좋은 소란을 피우며 담소가 길어졌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다 호텔로 자리를 옮겼다.
독일에서 온 친구들이다. 저녁식사 후, 호텔 베란다 한 쪽에서 동창회가 열렸다. 동창이 아닌 사람들은 해안가에 붙어 있는 카페로가 맥주를 마시며 깊어가는 밤바다를 보며 달빛과 불빛이 소리없이 흔들리는 바람빛 춤을 구경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동해와 서해 남해에서 흔하게 듣을 수 있는 파도소리 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함을 지닌 곳이 바로 지중해 연안이었다. 내일 일정을 소화하기 위하여 일찍 잠을 청했다. 그리고 새벽에 일어나 해안가 산책에 나섰다. 어두운 구름 그늘속에서도 빛이 꿈틀거린다. 검은 구름에 굳게 잠긴 동녁이 아침빛에 터질 모양이었다. 아침이 근사하게 밀물처럼 다가 왔다. 서둘러 아침 준비를 한 후 아침을 챙기고 짐을 차에 실고 항구 주차장으로 갔다. 그리고 골목길을 꾸준히 걸어 세계 7대 불가사의 한 유적지를 찾았다.
마우솔레움 유적지다. 현재발굴이 거의 이루워졌으며 건물 안에는 영묘의 모형을 만들어 놓고 전시중이다.
영묘로서 웅장하며 조각이 특히 아름답다. 발굴 후 재현하여 건축할 계획이란다.
아래 사진과 같은 건물이 있던 유적지다. 마우소루스의 묘인 마우솔레움이다.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다.
전설에 따르면 이 도시를 세운 것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온 도리아인 트로이젠이라고 한다. 할리카르나소스 출신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옛날에는 이 도시가 트리오피온에서 열린 도리아인의 아폴론 축제에 참가했다고 말했지만, 이 도시의 문학과 문화는 철저히 이오니아적이었던 것 으로 보인다. 악천후를 피할 수 있는 커다란 항구가 있고 항로의 요충에 자리잡은 이 도시는 작은 전제국가의 수도가 되었는데, 이 나라의 가장 유명한 통치자는 BC 480년에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왕을 도와 그리스를 침략한 아르테미시아라는 여왕이었다. 카리아 왕 마우솔로스는 BC 370년경에 할리카르나소스를 수도로 삼고, 이 도시에 웅장한 성벽과 공공건물 및 비밀 조선소와 운하를 건설했다. 그러는 동안 이웃에 사는 렐레기아인의 강제 이주로 할리카르나소스의 인구는 크게 늘어났다. BC 353(또는 352)년에 마우솔로스가 죽자, 그의 미망인은 이 도시에 웅장한 무덤을 지었다. 마우솔레움이라고 불리는 이 무덤은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이다.
로도스 섬 출신의 페르시아군 사령관인 멤논 시대에 이 도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저항했다(BC 334). 그후 할리카르나소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들인 안티고노스 1세(BC 311)와 리시마코스(BC 301년 이후) 및 프톨레마이오스 왕조(BC 281~197)에 복속되었지만, BC 192년까지 독립을 누리다가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 할리카르나소스는 주교 관구였다. C.T. 뉴턴이 1856~57년에, A. 빌리오티가 1865년에 이 지역을 광범위하게 발굴한 결과, 웅장한 성벽의 상당 부분과 체력단련장의 유적, 후기의 주랑, 신전의 기단, 바위를 잘라 만든 무덤 등을 발견했다. 고대 유적은 1400년경에 성 요한 기사단이 세운 성의 웅장한 건물들 때문에 다소 빛을 잃었다. 오늘날 이 지역에는 터키의 보드룸이라는 마을이 있다.
보드룸항구의 전경이다. 이곳으로 이동하여 에게해 남쪽끝이며 지중해 입구인 그리스 철학자 헤로도토스의 고향이다. 이국적인 색채가 강한 이 항구의 이름은 보드룸이다. 이 보드룸에는 성베드로 城이라 부르는 보드룸성이 있다. 보드룸항구 전역을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서 대포로 무장한 보드룸성은 천혜의 요새었다.
성곽 망루에 올라서자 동서남북 전방위로 항구가 아름답게 펼쳐저 있다. 아름답다는 표현이외의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망루 이곳저곳을 오고가며 많은 숫자의 사진을 남겼다. 보드룸항구는 평새토록 아름다운 항구로 오래토록 각인될 것 같다.
보드룸 성안에서 사용되던 여러가지 물건들의 유물관이다. 유럽 방랑객이 잠시 쉬는 모습이 보여 양해를 구한 후 가메라에 담아 두었다.유럽 최고의 휴양지로 알려진 이곳은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헤로도토스가 태어난 곳으로 블루빛 바다와 대조적으로 흰색 아름다운 집이 줄비한 곳이다. 터어키에서는 이곳을 산토리니로 부른다. 이국적인 정취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터어키인이나 유럽인들에게 가장 각광 받는 휴양지다. 나 역시 강한 인상을 받았다.
15세기 십자군 건축양식으로 만들어진 BODRUM CASTLE.내부는 현재 바다에서 건져올린 진기한 유물들로 가득한 UNDERWATER ARCHEOLOGY MUSEUM 이 바로 사진속에 건물이다. 고대인들이 사용하던 토기를 비롯한 장신구,무기,보석,유리공예품들은 감탄을 자아내게하며 이방인의 눈을 즐겁게해 준다.보너스로 성에서 내려다 보는 아름다운 보드룸에 파노라마는 카메라의 셔터를 연신 누르게 만든다. 보드룸에 있는 오토만 타워도 볼만하다. 보드룸 바자르와 줌 후리에트 거리를 구경한 후 모드룸 모스크를 본 후 다음 행선지로 가기 전 보드룸 항구에 서서 단체 사진을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