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근·현대사 =5·18 민주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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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08.19. 06:39조회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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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근·현대사 =5·18 민주화 운동
1. 교과서 속 주개념
1) 5·18 민주화 운동(1980)의 배경
10·26 사태이후 12·12 쿠데타(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 세력이 권력 장악)가 발생하였다. 이후 계엄령 해제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대학생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서울의 봄) 이에 대해 신군부는 국회를 폐쇄하고 정치 활동을 금지하였으며 대학 폐쇄, 파업 금지, 언론 검열 강화 등을 포고하였다. 민주화 요구에 대한 무력 진압을 시작한 것이었다.
2) 광주 민중 민주 항쟁의 전개
광주 민주화 운동의 전개과정은 다섯 국면으로 구분된다.
제1국면은 5월 18일 학생시위에 의한 항쟁의 발단기이다.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교문 앞에서 집결한다는 사전 결의에 따라 학생들은 18일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 집결했다. 그러나 공수부대의 강력한 저지로 학생들은 광주역에 재집결하여 시위를 전개했다. 시위대열이 점차 불어나자 계엄군이 다시 시위진압에 나섰으며, 공수부대의 진압으로 부상자가 속출했다. 계엄군의 무력진압은 첫날의 시위를 해산시켰으나 오히려 시민·학생들의 분노를 야기시켜 시위를 항쟁으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제2국면은 학생시위에 시민이 합세하면서 봉기의 형태로 발전하기 시작한 19일부터 시작되었다. 공수부대의 만행에 분노한 학생, 시민들이 군경(軍警)과 공방전을 벌이면서부터 시위는 점차 격화되어갔다. 이 시기에 계엄군은 간선도로·주요시설 등을 확보하여 시위대를 포위하면서 대치했고, 이에 따라 시민들은 화염병, 돌 등으로 초보적인 수준의 자위적 무장을 시작했다.
제3국면은 도시빈민·노동자 등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투쟁의 선두로 나선 20일부터 시작되어 무장 항쟁으로 발전했다. 이 과정에서 신문사, 방송국, 세무서, 파출소 등 공공기관이 습격 받았다. 특히 계엄군의 발포로 사상자가 속출하면서 탈취한 소총 등으로 무장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시점에서 시위대 대표와 도지사(道知事) 사이에 협상이 열렸으나 결렬되었고, 계속되는 계엄군의 발포로 사상자가 급증했다.
제4국면은 카빈 소총으로 무장한 시위대가 시가전에 돌입하고 항쟁이 전라남도권으로 확산되면서 농민들의 참여가 시작된 21일 오후부터 시작되었다. 항쟁지도부를 구성한 시위대는 고립을 극복하기 위해서 목포·영암·장성·나주 등으로 진출했으며, 22일 오전의 총공세로 도청과 도경에서 공수부대를 몰아내고 광주 시내를 장악했다.
제5국면은 22일부터 계엄군에 의해 광주가 다시 점령되는 27일까지의 시기이다. 광주를 장악한 시위대는 치안확보 등 자치활동을 수행했으며, 23일부터 매일 범시민궐기대회를 열어 투쟁목표를 재확인했다. 그러나 이때 구성된 수습대책위원회가 광주시민의 요구를 수렴하기보다는 원상복구와 사태회복에만 주력함으로써 수습 대책 위원회와 광주시민 사이에 분열이 야기되었다. 이에 시민들은 범시민궐기대회를 통해 수습 대책 위원회를 규탄하고 25일 새로운 투쟁지도부를 구성했다. 동시에 계엄군의 무력진압에 대비해 시민군을 체계적으로 조직했다. 그러나 27일 새벽 0시를 기해 외곽도로를 봉쇄하고 탱크 등으로 무장한 계엄군의 대대적인 진압작전으로 10일간의 5·18광주 민주화 운동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일단락되었다.
3) 5·18 민주화 운동의 의의
광주 민주화 운동은 1980년대 이후 급격하게 고양된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또한 군부독재에 저항하는 민중 의식의 표출이었다. 그리고 한국군의 작전권을 지니고 있던 미군은 광주 진압을 위한 계엄군의 병력 이동에 동의함으로 인해 미국의 본질을 알게 되었고 이후 반미 운동이 시작되었다.
2. 확장 개념
12·12 쿠데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된 후 헌법 제48조 규정에 따라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에 취임했다. 최 권한대행은 27일 오전 4시를 기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동시에 계엄사령관에 육군참모총장 정승화 대장을 임명했다. 이어 최 권한대행은 1979년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에 의해 제10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최 대통령은 '우리는 정권을 계속 유지하려는 의사가 전혀 없는 정부'라는 말로 국민들의 의구심을 풀려 했다. 야당인 신민당은 정부가 과도기간을 연장하는 등 불만스러운 점이 없지 않았으나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국민들 역시 유신체제라는 억압에서 막 벗어나려는 순간에 있어 정부의 조치를 조심스럽게 지켜보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12월 12일 저녁 10·26 사건 수사를 맡았던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은 9사단장 노태우 소장 등 하나회 출신의 정치군인들과 (황영시, 유학성, 박준병, 박희도, 장세동, 김진영, 최세창, 정호용, 허삼수, 이희성, 김복동.....) 함께 일련의 군사 행동을 취하였다. 全 사령관은 박대통령 암살 사건에 관련 혐의가 있다는 이유를 들어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재가도 없이 계엄 사령관인 정승화 육군 참모 총장을 강제 연행하는 하극상의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게다가 정 총장을 연행하면서 총격전까지 벌였다.
한편 전 사령관의 연행 재가 요청에 최대통령은 정 총장 연행을 허락하지 않았다. 노재현 국방장관도 정 총장을 석방하고 각자 부대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전 보안 사령관은 이를 거부하고 군을 동원해 무력으로 중앙청, 국방부, 육군 본부 등 국방 중추부를 차례로 장악하고, 각 방송국, 신문사, 통신사를 그들의 통제하에 두었다. (12·12 쿠데타)
결국 이 사건으로 전두환 보안 사령관 등 일부 군인들의 위법적인 행동에 반대했던 많은 군 장성들이 체포되고 군에서 쫓겨났다. (이들은 정승화를 비롯, 그의 추종세력인 3군사령관 이건영, 특전 사령관 정병주,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등을 80년 1월 20일자로 모두 강제 예편시키고 정승화에게는 징역 10년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전두환 사령관은 자신의 육사 동기생 및 가까운 친구들을 요직에 앉혔다. 9사단장 노태우 소장은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됐다. 또 쿠데타 주체세력들은 특전사령관과 3군 사령관 등 핵심 부대의 책임자가 됐다.
美정부와 서울의 미대사관측은 전두환 사령관의 '권력 찬탈' (Power grab : 당시 글라이스틴대사가 사석에서 사용한 표현)을 원상태로 복구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런 노력이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글라이스틴은 전두환의 측근들에게 "우리는 12월 12일 일어난 사건을 역전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있다."고 명백히 밝혔다. 그 대신 미국은 전 사령관에게 정치에 개입하거나 정치권력을 차지하려 들지 말라고 압력을 넣었다. 그러나 그는 미국의 충고를 간단히 무시하고 곧바로 정치 개입과 정치권력 장악에 나섰다.
12·12 쿠데타는 약 20년에 걸친 박정희 군사 독재가 끝장난 후 한국인들이 열망하던 민선·민주 정부의 부활을 가로막았다. 그 후 몇 달에 걸쳐 군부가 다시 집권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천명(天命)이나 피치자(被治者)의 동의 없이 무력을 동원한 한 무리의 군인들에 의해 국가 권력이 또다시 찬탈되고 있음을 느꼈다.
[네이버 지식백과] 5·18 민주화 운동 (통합논술 개념어 사전, 2007. 12. 15., 한림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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