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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오늘도 예배자로서는 저와 여러분의 삶과 가정과 일터 가운데에 충만하게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좌우 앞에 계신 분들하고 인사하시고 축복합니다.
주 안에서 사랑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 인생의 문제는 능력의 문제라고 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리에게 굉장히 큰 힘을 발휘했죠.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파괴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을 병들게 했죠. 하지만 여러분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작동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반화시킬 수 없다는 것이죠. 어떤 사람은 코로나 바이러스를 쉽게 물리치는 사람도 있었고요. 무증상으로 지나가는 사람도 있었다는 거예요. 따라서 병이 문제가 아니라 병을 이길 힘이 있느냐 이길 힘이 없느냐의 문제인 것이죠. 그래서 겨울철 때면 독감 주사를 맞아요. 독감 주사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독감에 걸리는 분이 있고요. 평생 독감 주사 안 맞았는데 독감에 안 걸리는 이러한 경우들을 우리는 흔히 봅니다.
이것을 우리가 실패라는 것이라고 좀 같이 생각해 보면 실패라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것이죠. 따라서 실패해서 넘어지는 것 분명히 힘든 일입니다만 다시 일어날 능력이 있다면 실패는 큰 교훈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실패가 우리에게 유익을 가져다 준다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를 넘어뜨리려 하는 사단의 전투력은 어마무시합니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큰 힘이 사탄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탄을 짓밟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훨씬 큰 능력의 주님이시라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면 사탄은 우리를 절대로 이길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나와 함께하지 아니하면 나는 사탄을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이죠. 혹 우리가 사탄에 의해서 넘어지더라도 부활하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실 때 우리는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혹 사탄이 우리를 넘어뜨려도 저와 여러분들이 부활하시는 주님의 만남을 통해서 일어나고 승리하고 전진해 나아가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주님을 떠나 실패했던 한 사람, 부활한 주님을 만나서 그 실패를 교훈 삼아 다시 일어나는 자의 모습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40일 동안 머무시면서 제자들과 간헐적으로 만나시고 그들에게 가르치시고 사명도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신 그러한 사건으로 그 장소는 디베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디베랴 많이 들어봤는데 어딘지 잘 모르시겠죠? 사진을 한 장 보여드리겠습니다. 갈릴리 호수 사진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갈릴리 호수라고도 하고 바다라고도 이야기합니다. 가보니까 진짜 깊어요. 넓어요. 그래서 바다 같아요. 사진을 자세히 보시면 11시 방향에 게네사렛이라고 돼 있고요. 7시 방향에 보시면 디베랴라고 돼 있습니다. 모두 갈릴리 바다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지명을 적은 이유는 갈릴리에서 이 갈자가 히브리어로 둥글다라는 거예요. 호수가 둥글게 생겼으니까 갈자를 써서 갈릴리라고 지은 것이겠죠. 또한 게네사렛이라는 것은 갈릴리 바다 모양이 수금같이 생겼다. 그래서 키노스라는 단어인데 그 수금같이 생겼다고 해서 지은 것이죠. 시면 아시겠지만 둥글기도 하면서 이렇게 좀 수금같이 생긴 그런 모양새 아니겠어요? 그래서 지은 것이죠. 디베라는 뭐냐? 디베라는 당시 헤로당이 로마 황제 디베랴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갈릴리 해변에다가 디베랴라는 신도시를 건축했어요. 그래서 그 이름을 붙인 것이죠. 그래서 디베라 도시 앞에 있는 바다 그래서 디베라 바다라고 하는 예수님이 왜 이곳에 찾아오셨을까? 당시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서 오순절이 되기 전까지 어디 가 있었습니까? 갈릴리 바다에 가 계십시오. 있었죠. 그래서 찾아간 것도 있지만 여러분 예수님께서 살아생전에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실 그때에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 가겠다. 그렇게 약속하신 장소이기도 합니다.
또한 부활의 새벽에 흰옷 입은 청년이 무덤에 찾아왔던 새 여인에게 했던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전해라. 말씀하신 대로 갈릴리에서 만날 것이다. 이 약속이 있는 장소 바로 그것이죠. 예수님이 찾아가셨던 이 디베라 바다에는 누가 있었는가? 시몬 베드로가 있었고요. 디드모라는 도마 디드모는 쌍둥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한 도마가 있었고, 갈릴리 가나 사람인 나다나엘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세베데의 두 아들과 또 다른 두 명의 제자가 그 자리에 함께 모여 있었습니다.
바다에 갔으니 뭐 하겠어요? 당신 베드로가 야 나 이제 고기 잡으러 가야겠다 하고 출발하니까 주변에 있던 제자들이 나도 간다, 나도 간다 하면서 같이 우르르 배 타고 지금 바닷가에 나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게 웬일입니까? 밤이 새도록 그물을 내렸는데 물고기 한 마리 잡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어부였는데 꼭 3년 동안 주님을 따라다니면서 어부질하는 것을 잊었나 그것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밤새 헛수거만 하고 돌아온 것이죠. 물고기가 한 마리도 없는 빈 배를 가지고 돌아온 것입니다.
그렇게 날이 밝아올 무렵 허탈하게 돌아오는 제자들을 누가 맞아주시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을 맞아주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묻습니다. 얘들아 너에게 고기가 있느냐? 아니 없습니다. 배 오른편에 그물을 내려가라 그러면 물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러니 놀라운 것입니다. 여러분 밤새도록 그물을 내렸으면 힘들 것 아니겠습니다.
여러분 물고기가 만약에 많이 잡혀서 돌아오면 기분이라도 좋아서 힘이 나는데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단 말이에요. 얼마나 기분도 나쁘고 지쳐 있었겠어요. 그런데 오른편에 그물을 내가 저분 도대체 누군데 우리에게 그런 걸 시키는 거야 짜증 나고 화날 만하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아무 말 없습니다. 말씀에 순종해서 그물을 내렸다는 그런데 더 놀라운 건 뭔지 아십니까? 그물이요. 끌어올리기 힘들 정도로 많이 잡혔다. 성경에는 153마리가 잡혔다. 큰 물고기가 잡혔다.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말씀하시면 그저 순종하여 놀랍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우리 귀한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 요한이 베드로에게 귓속말을 했는지 큰 소리로 외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주님이시라고 하는 거예요. 그 말을 들은 베드로는 너무나 예수님을 빨리 보고 싶은 나머지 자기가 벗어놓았던 겉옷을 얼른 챙겨 입고 바다로 뛰어드는 거예요. 예수님 만나게 그 깊이가 얼마나 됐는지는 사실 모르겠습니다. 얼마나 수염을 잘해서 갔는지는 그것도 모르겠습니다만 배에서 뛰어내 그리고 육지로 올라가 보니까 예수님 계신 그곳에 숯불이 지펴져 있고요. 그 위에 물고기와 떡이 익고 있었던 것이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지금 잡은 생선 좀 가져와라. 그리고 또 말씀하세요. 와서 아침을 좀 더 그려 친절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한 사람 한 사람 다가가서 떡과 물고기를 가져다줍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디베르 와서 만나주시고 고기 잡는 경험도 하시고 아침까지 챙겨주신 이유는 도대체 뭘까는 것입니다.
그 대답이 오늘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답 대화 속에서 우리는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아침 식사가 마쳐진 후에 예수님께서는 본격적으로 시몬 베드로에게 질문을 하시죠.
요한의 아들 시몬아 내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냐 여기에서 이 사람들보다는 이것들보다 즉 모든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라고 질문하는 그때 대답하죠. 예수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걸 주님이 아십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또 질문을 하는 거예요. 뭔 질문을 하는가 들어봤더니 요한의 아들 시모나 내가 나를 사랑하는 똑같은 질문을 하시는 거 대답하지 예수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십니다.
내 양을 치라 끝난 줄 알았어요. 그런데 예수님도 삼세번을 좋아하셨나 봐요. 세 번째 또 질문을 하시는 요한의 아들 시모나 내가 나를 사랑하는 베드로는 이 세 번째 질문 왜 예수님께서 세 번 질문하셨을까? 그래서 근심을 했던 모양이에요. 물론 사랑이라는 표현이 다르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많은 사람들이 설교를 하죠. 그래서도 그렇겠지만 어쨌든 베드로는 잠시 근심하면서 있다가 다시 고백합니다.
주님 주님 모든 것 다 아시잖아요. 제가 주님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틀림없이 아십니다.
내 안에 예수님의 질문과 베드로의 대답은요. 매우 단순하면서 간단 명료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질문 그리고 베드로의 대답이 간단했지만 예수님의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한 질문이었죠. 무엇입니까? 내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이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찾아와 만나주시고 고기 잡는 경험도 하게 하시고 조반을 주신 이유는 이 질문을 하고 싶어서 주님이 오신 것이죠.
그렇다면 여러분 이 질문 안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져 있을까라는 거 세 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 번째는요. 예수님의 질문을 통해서 과거에 대한 잘못을 돌아보게 하셨다는 거예요.
여러분 베드로가 어떻게 이야기합니까? 앞서서 예수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나 예수님 모릅니다. 세 번 부인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심지어 베드로는 예수님을 저주하고요. 하나님께 맹세까지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몇십 년 전의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불과 한 달여 전후에요. 자신이 저지른 행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을 이 베드로는 주님이 하신 이 질문 앞에 말문이 턱 막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매우 당황스럽고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특별히 여러분 베드로가 했던 말이 있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저는 절대로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큰소리 치면서 후원 장담했던 사람이 베드로예요. 또 여러분 누가복음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너를 위해서 기도한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하신 말씀이 있어요. 우리 한번 같이 읽어보실까요? 22장 31절 32절 말씀인데 같이 읽어보실게요.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내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내 형제를 굳게 하라
이 말을 듣는 순간 베드로가 순간적으로 매우 얹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다음 말씀 보면 아주 자신 있게 큰 소리로 외칩니다.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오게도 죽는 데에도 같이 가겠습니다.
아주 강하게 각오를 다짐하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 이러한 베드로의 발언을 생각해보면 당시에 게세마네 동산에 유다가 군사들을 데리고 이렇게 왔잖아요. 그때 칼을 빼서 휘둘러 말고의 귀를 베었잖아요. 사실 이 사건이요. 어쩌면 자신의 충성심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행동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렇게 예수님 앞에서 자신 있게 말하고 행동했던 그였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예수님께서 잡히셔서 끌려가는 그때에도 군인들에게 매맞고 조롱하는 그때에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가다가 쓰러지신 그때에도 주님과 함께 했어야 하는 것이죠.
하지만 베드로는요 도망자이자 배신자였습니다. 그가 자신의 입술로 내뱉은 말, 그것 지키지 못한 실패자였더라는 그런 그에게 예수님이 묻는 거예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 세 번을 통해서 그가 과거에 잘못했던 그 사건을 강제로 소환해 내신 것입니다. 왜요? 과거의 잘못을 생각하고 반성하기를 원했던 것이죠.
여러분 요한계시록에 보면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을 합니다. 그리고 권면하신 말씀이 있죠. 그 권면의 내용은
어디서 떨어졌는지 생각하고 회개하여서 처음 행위를 가져라
이것이 권면의 말씀이었습니다. 즉 처음 행위를 처음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진단하고 다시 그 자리가 회복되어질 수 있도록 애쓰고 노력해야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과거를 소환해내야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의 삶이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계기로 인해서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인지되어질 때 그때 비로소 과거를 생각합니다. 왜 이랬지 뭐가 문제지 뭐 때문에 이렇게 됐지 과거를 생각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어디서 잘못되었는지를 생각하게 되는 그 삶의 나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여러분 그렇게 생각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돌이킬 줄 알아야 돼요.
여러분 내가 가는 길이 어딘지 몰라서 가는 길이라면 그게 잘못된 길이라도 그거 어떡하겠습니까? 안타까운 현실일 뿐이죠. 하지만 내가 가는 길이 잘못된 길임을 깨닫고도 그 길을 끝까지 가는 사람은요. 미련함의 끝을 보여주는 거죠. 가면 안 되는 걸 알면서 가는 거예요. 저기 100m 가면 낭떨어진 걸 아는데 굳이 100m를 왜 갑니까? 빨리 돌이켜서 가야죠. 왜 헛수고를 해? 그럴 이유가 없다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그런데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그 순간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계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활의 주 저와 여러분들에게 묻는 거예요. 지난주에 부활하셨죠? 그 부활의 주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함을 따라 내가 다른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게 대답하시겠어요?
한번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 예수님께서
내가 나를 다른 것보다 더 사랑하느냐
이 질문 앞에 나의 신앙과 삶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두 번째,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을 통해서 베드로로 하여금 지금 사랑의 고백을 하기를 원하셨다. 앞선 것은 과거였다면 두 번째는요. 지금의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내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질문하는데 베드로의 입술을 통해서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기에 그 질문을 하셨을까요? 갑자기 연구처럼 잘 모르겠는데 그렇게 반응을 했다면 예수님께서 얼마나 당황스러우셨겠어요? 예수님이 듣고 싶었던 말이 있을 것 아니겠어요?
주님 나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 말을 듣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온전한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죠. 예수님의 사랑은요. 그 어떤 때에도 변한 적이 없었다. 일관된 사랑이었다. 오늘 찬양의 고백을 통해서 우리가 얘기 우리가 고백했잖아요. 그 사랑 변함없으신 후회 없으신 그 주님의 사랑 그 사랑은 변하지 않는 사랑이다. 그래서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부르시고 제자로 데리고 다닐 때에도 베드로를 사랑하셨고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그때에도 그 베드로를 바라보시며 눈 맞추시고 사랑의 눈빛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도 그 제자 베드로를 사랑하셔서 그가 있던 자리로 찾아와 주신 것이죠.
여러분 이렇게 주님은 변하지 않는 사랑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변하죠. 상황에 따라 변하고 위치에 따라 변하고 세월에 따라 변하고 대상에 따라 변하고 기분에 따라 변합니다. 시도때도 없이 되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요. 저와 여러분들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가장 소중한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베어주신 것 아니겠어요 여러분 아들의 목숨을 우리의 목숨과 맞바꾸시는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몸소 친히 죽으심으로 사랑의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죠.
그리고 이제 우리의 사랑 고백을 듣고 싶어서 묻는 거예요.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내가 나를 사랑하느냐
여러분은 두 번째 질문에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바라고 소망하는 것은
주님 저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이 나를 변함없이 사랑하셨던 것처럼 나도 이제부터는 변함없이 주님만을 사랑하겠습니다.
이 사랑의 고백이 저와 여러분들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에베소서 6장 24절의 말씀이 우리의 말씀 되기를 소망하면서 우리 큰 소리로 같이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안 나오나요? 사도신경이 나왔네요. 제가 다시 한 번 해드릴게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은혜가 있을지어다. 할렐루야
저와 여러분들이 우리 주님 변함없이 사랑하셔서 우리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가 날마다 충만하여 우리의 삶의 기쁨과 감사가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세 번째 질문을 통해서 결국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명을 부여해 주셨다. 과거의 것들을 청산하게 하시고 현재 사랑을 고백하게 하시고 미래에는 그러면 그 사랑 가지고 사명 감당이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죠.
여러분 베드로가 대답했잖아요.
주님이 아십니다. 내 사랑 고백을 했잖아요.
그때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명령하셨어요?
내 어린 양을 먹여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그렇다면 여러분 베드로에게 먹이라고 한 이 양은 누구의 양입니까? 내 양 즉 하나님의 양을 먹이라고 이야기한 것이죠.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양을 도맡아서 니가 감당해야 될 청지기적 사명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신 목적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 것이죠. 복음을 위탁하고 그 복음을 증거하고 가르칠 사명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디베라에 있던 제자들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명을 맡기시기에 앞서서 베드로에게 확인했던 것이 있었다는 것이죠. 그것이 무엇입니까? 니가 나를 변함없이 사랑하는지 진정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지를 먼저 확인하셨다라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는 순서상으로 사명이 먼저가 아니라 사랑이 먼저라는 것을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한번 따라해 보실까요?
사명이 먼저가 아니라 사랑이 먼저다.
사명이 먼저가 아니라 사랑이 먼저다.
순서를 잘 알아요. 여러분 사랑하면 사명자가 될 수 있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가요 맡겨진 사명 감당하는데 내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명을 감당하는지를 확인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확인했는데 내 안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다라고 느껴진다면 어떻게 해야 돼요?
하나님 나에게 맡겨주신 사명이 있는데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의 마음을 부어주시옵소서 그래서 그 사랑이 나한테 회복되어지는 은총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것이 먼저 되어져야 된다는 것이죠. 여러분 그렇게 먼저 열렬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사명을 감당합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만약 우리가 주님의 위대한 일을 감당하고 정말 큰 일을 했다고 해보죠. 그런데 그 동기가 하나님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사랑해서 또한 세상의 어떠한 것들을 위해서 했더라면 그것은 무엇이 됩니까? 자기 업적이 되는 거예요. 분명히 일을 했는데 자기 업적이 되는 것이죠.
여러분 그 대표적인 사람이 누굽니까? 사울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즉 왕의 사명을 받은 자이죠. 하지만 그가 왕이 되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는 모습으로 왕 노릇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아말렉을 쳐서 다 진멸하라고 그렇게 명령을 하셨죠. 그런데 이 순종을 다 하지 못해요. 아악과 그가 가지고 있던 소와 양 중에 괜찮은 것들은 구별해서 일부를 남겨놓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지 않으니까 사명을 감당하는 가운데 불순종이 드러나더라는 거예요.
그것뿐입니까? 아말렉과의 전쟁 그 후에 승리 후에 그가 무엇을 했습니까? 성경에 보니까 자기 이름을 위하여 기념비를 세웠다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기 이름을 높인 것이죠. 여러분 이것이 사명을 감당하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음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명을 감당하는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다 보면 말씀을 듣고 순종하다가 때로는 불순종의 모습들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사랑으로 그 사명을 감당해야 또한 때로는 내 직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심의의 사명을 감당할 때도 있다는 것이죠.
저와 여러분들이 이러한 사명을 감당하되 사울과 같은 자의 사명자가 되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울을 생각하면 반대로 떠올리는 한 사람이 있죠? 누구예요? 다윗이죠? 다윗 그러면 다윗은 어떠했습니까? 블레셋과의 전쟁이 있을 때 다윗이 형들을 위문하기 위해서 그곳에 갔다가 골리앗을 보게 됩니다. 당시에 골리앗은 엄청난 위세로 이스라엘을 모독하였고, 온갖 저주를 퍼부으면서 악한 말로 이스라엘을 위협했습니다. 그리고 그 위협 앞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벌벌 떨고 있었어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다윗은 달랐다는 것입니다. 사실 형님들을 위문하러 갔던 그 자리지만 할례받지 못한 저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군대를 모독하는 장면을 보고 나면 격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거예요. 거룩한 분노가 그 안에서 부를 듯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군대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사수하기 위해서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가지고 진격했던 거예요.
그는 군사도 아니었잖아요. 그래서 사울 왕이 갑옷 내어줬는데 입어보니까 너무나 크고 거취장스러워서 다 벗고 뭘 가지고 왔어요? 물멧돌 들고 나간 것 아니겠어요? 여러분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윗은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뜨거웠기 때문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저 인간 내가 가만둘 수 없다 그런 마음 가지고 나아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맡겨진 사명 잘 감당하는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실패한 베드로에게 부활의 주님은 이길 힘을 얻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동력은 그의 입술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사랑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백을 통해서 우리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다시 사명을 주신 과거에 처음 만나서 나를 쫓으라 했던 그 주님께서 이제 다시 사명을 주면서 나를 쫓으라 말씀하시는 놀라운 축복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나의 신앙 상태 어떠한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 주체할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이 너무 사랑되어서 한 영혼을 품고 기도를 하고 그 사랑에 힘입어서 봉사를 하고 있는가 내 삶을 돌아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니면 나는 그동안 수 없는 많은 시간들을 보내면서 하나님을 예배하지만 사랑하는 마음 없이 그냥 형식적으로 또한 내가 직분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명을 감당하고 있지는 않은지 저와 여러분들이 잘 돌아보시고 특별히 이 시간을 통해서 우리 주님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묻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가
여러분 그 사랑의 질문 앞에 저와 여러분 주님 내가 사랑합니다. 주님 아직 내가 사랑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으면 사랑으로 고백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한 기도가 있어 저와 여러분들이 감당해야 될 귀한 은혜가 내 삶 속에서 우리 주님과 함께 동행되어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4월 4일이 우리 창립 기념일이었어요. 지난주에 우리 부활주일하고 이러면서 말씀을 못 드렸는데 여러분 42년 동안 우리 하나님께서 신흥교회를 기록 가운데 세워주시고 인도해 주신 에벤에셀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사명 주셔서 여기까지 인도하신 것이죠. 앞으로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 신을 통해서 이 지역에서 감당하실 사역들을 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들이 이제는 사랑하는 마음 가지고 지금까지 그러했지만 더 뜨거운 사랑과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만 바라보시고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서 귀히 쓰임받는 저와 여러분 우리 신흥교회가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