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왕기하 강해 (6)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
왕하 6: 8~17
I. 서론
1976년에 방영된 미국 TV 시리즈 중에서 “소머즈”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영어 제목은 “Bionic Woman”(생체공학 여인)입니다. 드라마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습니다. 테니스 여자 프로 선수였던 소머즈는 스카이다이빙을 하다가 큰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오스카 골드먼과 루디 웰스라는 의사가 소머즈의 생명을 구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생체공학을 활용하여 인공기관을 소머즈에 이식해 주었습니다. 그 결과 소머즈는 보통 사람이 들을 수 없는 주파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데, 아주 먼 거리에서 나는 소리도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소머즈는 인체공학적 오른팔과 두 다리를 이식 받음으로 무려 시속 60 마일(약 97킬로미터)의 속력으로 뛸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소머즈의 직업은 중학교 선생님이었지만, 그녀의 진짜 역할은 자신이 새롭게 부여 받은 엄청난 능력인 귀와 오른팔과 두 다리로 정부 기관을 위해 스파이로 활동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는 흡사 소머즈 영화를 보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엘리사는 멀리 아람 왕이 침실에서 한 말까지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아람과 북이스라엘은 전쟁 중이었습니다. 고대 사회의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먼저 유리한 지점에 진을 구축해야 합니다.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산 아래 쪽에서 산 위에 있는 성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세 배의 병력이 더 필요하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됩니다. 그래서 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위해서 가장 좋은 곳에 진을 치라고 작전지시를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아람 군대가 그 지역을 가려고 할 때마다 이미 이스라엘 군대가 그 지역에 주둔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자, 아람 왕은 자기의 신하 중에 분명히 스파이가 있다고 확신을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신복을 불러서 자신의 나라에 스파이가 있는 것이 분명하니 그 자를 찾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신하가 아람 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왕이시여, 이것은 우리 나라에 스파이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에 엘리사라는 선지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는 왕께서 침실에서 말한 것도 모두 듣고 이스라엘 왕에게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듣자, 아람 왕이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엘리사를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람에 있는 말과 병거과 강한 군대를 모아서 엘리사가 거처하고 있는 도산 성에 가서 그 성을 밤에 에워싼 것입니다.
엘리사의 종이 아침에 일어나서 나가보니, 기절초풍할 일이 벌어져 있었습니다. 자신이 거주하고 있던 도단 성을 아람 군대가 와서 완전히 포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도단은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로부터 북쪽으로 약 12마일(약 20킬로미터) 떨어져 있었습니다. 걸어서 5시간 정도 소요되는 거리이기 때문에 한나절도 안 거리입니다. 이스라엘 왕이 마음만 먹으면 군대를 파견하여 엘리사를 보호해 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이스라엘 왕은 그럴만한 능력이 없었습니다.
왕하 6장 24절부터 나오는 아람과의 전쟁 상황을 보면, 이스라엘 수도 사마리아가 아람 군대의 포위를 당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굶어 죽게 되어 자신의 아이들을 삶아 먹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만큼 당시 이스라엘은 약해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엘리사의 상황은 누군가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도단은 스스로를 방어하기에 작은 성이었고,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도울 수도 없었는데, 아람 군대는 말과 병거와 강한 군대로 그 성을 포위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 상황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에 우리가 이런 상황에 처했다면, 우리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혹시 우리 중에 이와 비슷한 두려운 상황 가운데 있는 분이 계십니까? 그 누구도 우리를 도와줄 수 없는 상황 말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본문을 살펴보아도 엘리사는 두려워하고 있은 것 같지 않습니다. 반면, 엘리사의 종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상황은 같은데, 한 명은 평안하고, 한 명은 두려움에 휩싸인 것입니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하게 되었을까요? 우리도 어떻게 하면, 엘리사처럼 상황에 관계없이 평안을 누릴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그 해답을 얻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II. 본론
1. 첫째, 두려워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5~17절,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이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을 에워쌌는지라 그의 사환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하니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엘리사가 자신의 종과 달리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불말과 불병거를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는 불말과 불병거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군대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요? 엘리사는 자신의 스승 엘리야가 승천할 때, 불병거와 불말이 나타난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왕하 2:11,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 여기 나오는 불수레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불병거와 똑 같은 단어입니다. 히브리어로 똑같이 “레켑”입니다. 영어로도 똑같이 “Chariot”입니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열왕기하 2장에서는 단수로 사용되었고, 열왕기하 6장에서는 복수로 사용된 것입니다. 열왕기하 2장에서는 하나의 불병거와 여러 불말들이 나왔지만, 열왕기하 6장에서는 여러 불병거들와 여러 불말들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엘리야가 승천할 때 등장했던 불말과 불병거를, 엘리사가 위기 상황에서 다시 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록 우리 육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두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평안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시면, 엘리사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불말과 불병거를 보내 달라고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그 곳에 불말과 불병거가 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어려움에 처할 때일수록 하나님께서는 더욱 가까이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모래 위의 발자국”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네. 주와 함께 바닷가를 거니는 꿈을 꾸었네. 하늘을 가로질러 빛이 임한 그 바닷가 모래 위에서 두 짝의 발자국을 보았네. 한 짝은 내 것. 또 한 짝은 주님의 것 거기서 내 인생의 장면들을 보았네. 마지막 내 발자국이 멈춘 곳에서 내 삶의 길을 돌이켜 보았을 때 자주 내 삶의 길에 오직 한 짝의 발자국만 있는 것을 보았네. 그때는 내 인생이 가장 비참하고 슬픈 계절이었네. 나는 의아해서 주님께 물었네 ‘주님, 제가 당신을 따르기로 했을 때 주님은 저와 항상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지요. 그러나 보십시오. 제가 주님을 가장 필요로 했을 때 그때 거기에는 한 짝의 발자국 밖에는 없었습니다. 주님은 저를 떠나 계셨지요?’ 주님이 대답하시었네. ‘나의 귀하고 소중한 아이야, 나는 너를 사랑했고 너를 결코 떠나지 않았단다. 네 시련의 때, 고통의 때에도. 네가 본 한 짝의 발자국, 그것은 내 발자국이니라. 그때 내가 너를 등에 업고 걸었노라’
구약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 야곱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도 굉장히 불안한 상황 가운데 처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를 속이고 장자권을 받은 다음, 형 에서를 피하여 외삼촌이 있는 밧단 아람으로 떠나게 됩니다. 이제 가면, 언제 돌아올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고, 외삼촌 라반이 자신을 반겨줄 지도 몰랐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브엘세바에서 하란(밧단 아람의 도시)으로 떠나는 도중, 벧엘에서 돌을 베개로 삼고, 잠을 자는데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창 28:15~16,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야곱과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2. 둘째,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세상의 가치관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영적인 세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히브리대학교 역사학 교수인 “유발 하라리”입니다. 이 교수가 쓴 “사피엔스”라는 책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미국 독립선언문의 가장 유명한 구절을 생물학 용어로 한번 번역해보자. “우리는 다음의 진리가 자명하다고 믿는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으며, 이들은 창조주에게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를 포함하는 양도 불가능한 권리를 부여 받았다.” 생물학에 따르면, 인간은 ‘창조’되지 않았다. 진화했다. 또한 ‘평등’하게 진화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평등사상은 창조사상과 뗄 수 없게 얽혀 있다. 미국인들은 평등사상을 기독교 신앙에서 얻었다. 모든 사람의 영혼은 신이 창조했으며 신 앞에 모두 평등하다고 주장하는 신앙 말이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신과 창조와 영혼에 관한 기독교 신화를 믿지 않는다면,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중략) 생물학에 따르면, 사람은 창조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무언가를 ‘부여’하는 ‘창조주’ 같은 것도 없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맹목적인 진화과정뿐이며, 개인은 어떤 목적도 없는 그 과정에서 탄생한다. ‘창조주에게 부여 받았다’는 단순히 ‘태어났다’고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중략)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나 민주주의, 자본주의 같은 상상의 질서를 믿게 만드는 방법은 무엇일까? 첫째, 그 질서가 상상의 산물이라는 것을 결코 인정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사람들을 철저히 교육시켜야 한다.
하라리 교수가 쓰는 책마다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습니다. 그 교수가 말하는 핵심은 기독교는 상상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면, 영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권면을 기억해야 합니다. 고후 4: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라는 것입니다.
III. 결론
마지막으로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영적인 세계를 주목하는 것이 중요한데, 어떻게 하면 그 세계를 주목하여 볼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이 그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17절,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엘리사가 기도했고, 하나님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는 방법은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신 것처럼 우리의 눈을 열어 주셔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보는 것의 중요성을 말씀하셨습니다.
요 3: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사람이 거듭나야지만,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영적인 세계인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사용된 “거듭나다”의 헬라어는 “아노텐(anothen)”인데, 이 단어의 원래 의미에는 “From above”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하늘로부터 태어나야지만 즉,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우리의 눈을 열어주셔야지만, 우리가 영적인 세계인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에 우리의 기도와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영적인 세계를 보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두려움의 상황 가운데서도 엘리사처럼 평안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우리의 이웃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이 영적인 세계를 보고 주님을 믿어 거듭날 수가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크신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