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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인 조르바⌟, 그는 진정한 자유인인가?
지난 2월 어느 날 독서회 활동을 함께 한 친구들과 학창 시절에 읽었던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같은 책이지만 그 때 책 맛과 지금 책 맛이 다르다고 하였다. 그 때와 지금의 감동과 감흥, 깨달음과 비평이 다른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다. 이슬만 먹고도 살 수 있었던 10대 투명한 영혼의 독서와 4,50년의 삶의 경험을 더 가진 사람이 읽어 내는 책의 맛이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학창시절에는 자기 생각과 해석보다 번역가와 해설자의 설명을 거르지 않고 받아들이므로 세계 문학가로 명성을 날리는 사람들의 글에 대해서는 맹목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분위기가 무르익으며 여러 작가들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작품들에 대한 옛 기억과 지금의 생각들을 서로 유쾌하게 나누었다. 이야기장이 파할 무렵에 ⌜그리스인 조르바⌟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한 친구가 학창시절에는 ‘조르바’가 자유인으로서 관습이나 관념이나 사회적 통념과 금기를 떠나서 욕망대로 거침없이 사는 주인공이 진짜 사람답게 산다고 생각하였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며 우리들의 의견을 물었다. 이어서 다른 친구가 그의 오만 잡동사니와 같은 삶의 경험이 그의 자유, 그의 위대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에 대한 본능적 욕구와 애착, 집념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그는 죽음에 항복하지 않겠다며 똑 바로 서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반문하였다. 또 다른 친구는 앞서 친구들과 다른 의견을 피력하였다. ‘지금 여기’에서 삶의 주인으로 사는, 과거에 대한 후회도 없이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없이 주어진 상황에 압도당하지 않고 평정을 잃지 않고 춤을 출 수 있는 그가 진정으로 자유인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조르바처럼 살지 못하지만 조르바처럼 관습과 계명을 거스르며 사는 사람들을 존경한다고 하였다. 네 번 째 친구는 작가는 조르바를 초인, 운명에 저항하는 불굴의 인간으로 그렸지만 자신은 그렇게 거창하거나 자유롭지 않고 위대하지 않게 살지만 자유롭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이야기는 조르바가 진정한 자유인인가? 작가가 말하는 자유가 진정한 자유이며 그렇게 사는 것이 자유인의 삶이냐는 질문이 나왔다. 친구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자유, 자유인에 대하여 열변을 토하였고 우리는 부옇게 동터오는 아침을 맞이하며 해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누구의 의견이 옳은 것도 아니고 그른 것도 아니었다. 누가 더 본질적으로 저자의 생각과 사상에 접근해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어른이 되어서 우리들 나름대로 비판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소중하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나는 열변을 토하는 친구들 곁에서 ⌜그리스인 조르바⌟의 스토리를 떠올리며 이야기에 참여하고 싶었지만 머릿속이 박속처럼 창백해서 입을 다물지 않을 수 없었다. 줄거리는 떠오르지 않고 작중의 나인 저자가 선창가에서 조르바를 만나는 장면과 몇 개의 단어들만이 표면으로 떠올랐다가 이내 사라졌다. 크레타, 자유, 조르바의 악기 산투르와 춤, 음모로 만든 베개와 수백 번의 결혼 등이.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리스인 조르바⌟를 다시 읽기로 결심하고 바로 서점에 가서 책을 구입하였다. 친구의 말대로 책을 읽는 맛이 아주 달랐다.
30여 년 전에 문장이 지루하고 산만해서 나를 강권해서 억지로 읽었던 기억과 다르게 금번의 새 책은 순풍에 돛단배처럼 읽혀졌다. 그러나 옛날과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그 때는 내용이 난해하였지만 저자를 숭배하는 마음이 있어서 무엇에나 놀라고 감탄하였다. 한 편으로 의심을 하면서도 저자가 제시하는 불굴의 인간상으로 조르바를 긍정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저자가 말하는 자유인, 초인,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조르바가 역마살(驛馬煞)이 낀데다 자유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자로서 보통과 사람들과 다르게 사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기인(奇人)으로 보였을 뿐이다. 세상의 구속에서 벗어난 인간이 아니라 자기 욕망대로 살고자 욕망의 화신 조르바에 대한 저자의 숭배적인 표현들이 신을 뛰어넘는 초인이고자 하는 그의 집념으로 느껴졌다.
책은 작중의 ‘나’가 항구 도시 피레에프스 선술집에서 조르바를 만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줄거리는 작중의 내가 조르바를 갈탄 광 사업장에 일꾼으로 채용하여 함께 크레타 섬에 들어가서 갈탄을 채굴하며 지내다가 탄광 사업이 망하여서 조르바와 헤어지는 과정이다. 거기에다 작가는 조르바의 삶을 돋보이게 하고자 에필로그 식으로 조르바에게서 온 몇 장의 엽서에 적힌 이야기와 그의 죽음의 이야기를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위대한 인간을 추모하고 있다.
저자는 자신과 함께 살면서 자기의 지식과 이성에 매인 계산적인 삶을 깨우쳐 주는 조르바의 자유분방하고 메이지 않는 현재에 철저한 삶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인숙의 늙은 접대부 오르탕스와 칸디아의 젊은 술집여자 롤라와의 바람, 살인 목도, 수도원 사기와 방화, 마을에서 마녀 취급을 당하는 과부에 대한 동정, 칼부림과 용서, 갈탄 갱도의 무너짐과 케이블과 철탑의 무너짐을 기술하였다.
저자는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요소들이 두 조르바 안에서 극복, 해소되었다고 착각한다. 그의 방탕한 성생활과 순결, 인간에 대한 냉혹과 자비,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 선과 악, 실재와 비실재, 폭력과 용서 등이 그 안에서 용해되어 그는 신의 억압과 명령을 이긴 자가 되고 스스로 해방자가 된다.
그의 자유로운 초인의 행위는 언제 어디서나 과부, 접대부, 불행한 여자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더 나아가서 여성에게 긍지를 느끼게 해주는 차원에서 압도적이며 노동자를 호되게 부리고 위선자들을 골탕을 먹이며 성직자들을 경멸하며 타성에 젖어 사는, 관념에 사로잡힌 무리들을 불쌍히 여김으로 두드러진다. 그는 자기와 다른 방식으로 이성과 계산으로 사는 작중의 나에게 너의 삶은 기만이라고 속임수이고 가짜라고 말한다. 끊임없는 충고와 비판으로 그를 제이의 조르바로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철탑이 쓰러진 자리에서 그는 조르바와 함께 춤을 추고 나서 이렇게 고백한다.
“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돈, 사람, 고가선, 수레를 모두 잃었다. 우리는 조그만 항구를 만들었지만 실어 내보낼 물건이 없었다. 깡그리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그렇다. 내가 뜻밖의 해방감을 맛본 것은 정확하게 모든 것이 끝난 순간이었다. 마치 어렵고 어두운 필연의 미로 속에 있다가 자유가 구석에서 행복하게 놀고 있는 걸 발견한 것 같았다. 나는 자유의 여신과 함께 놀았다. 모든 것이 어긋났을 대, 자신의 영혼을 시험대 위에 올려놓고 그 인내와 용기를 시험해 보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보이지 않는 강력한 적, 혹자는 하느님이라고 부르고 혹자는 악마라고 부르는 이 우리를 쳐부수려고 달려온다. 그러나 우리는 부서지지 않는다. 외적으로 참패했을지라도 내적으로는 승리자일 때 우리 인간은 말할 수 없는 긍지와 환희를 느낀다. 외적인 재앙이 지고의 행복으로 바뀌는 것이다.”
저자가 생각하는 자유는 철저히 자신의 자신에 의한 자신만을 위한 자유다.
아래는 조르바의 말이다.
“산투르는 짐승이오. 짐승에겐 자유가 있어야 해요. 마음이 내키면 칠거요. 또 노래도 할 거요. …중략… 처음부터 분명히 말래 놓겠는데, 마음이 내켜야 해요. 분명히 해둡시다. 나한테 강요하면 그때는 끝장이에요. 이런 문제에서만큼은,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
“자유라는 거지.”
작중의 나, 두목은 인류 사회의 보편적인 자유를 부정한다.
“이런 게 자유라고……나는 생각했다. …중략…
하나의 정열에서 풀려나와 다른 더 고상한 정열의 지배를 받는 것. 그러나 이 역시 예속의 한 형태가 아닌가? 이상을 위하여, 종족을 위하여, 하느님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한다? 우리의 지향이 고상할수록 우리가 묶이는 노예의 사슬이 더 길어지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훨씬 넓은 경기장에서 찧고 가불다가 그 사슬의 한계에 이르지 않는 채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자유일까?”
조르바는 기본적으로 인간성을 신뢰하지 않았다. 의식화교육이 사람을 망친다고 생각했다.
“짐승은 사납게 대하면, 당신을 존경하고 두려워해요. 친절하게 대하면 눈이라도 뽑아갈 거요. 두목, 거리를 뒤요! 놈들 간덩이를 키우지 말아요. 우리는 평등하다. 우리에겐 똑같은 권리가 있다, 이따위 소리는 하면 안 돼요. 그러면 당신에게 달려들어 당신 권리까지 빼앗을 거예요. 당신 빵을 훔치고 굶어 죽게 내버려 둘 거요. 정말이지 두목을 위해서 충고하건대, 거리를 둬요.”
“아니, 당신은 아무 것도 믿지 않아요?” 나는 격분해서 소리쳤다.
“안 믿지요. 아무 것도 안 믿어요. 몇 번이나 얘기해야 알아듣겠소. 나는 아무도, 아무 것도 믿지 않아요. 오직 조르바만 믿지. 조르바가 딴것들보다 나아서가 아니요. 나을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요. 조르바 역시 딴 놈들과 마찬가지로 짐승이요. 그러나 내가 조르바를 믿는 건, 그놈이 유일하게 내가 아는 놈이고 유일하게 내 수중에 있는 놈이기 때문이요. 나머지는 모조리 허깨비들이오.…”
조르바는 사람들을 각성시켜서 깨어나게 하는 것에 대하여 부정적이었다.
“두목, 사람들 좀 그대로 놔둬요. 그 사람들 눈뜨게 해주려고 하지 말아요! 그래, 눈을 띄워 놓았다고 칩시다. 뭘 보겠어요? 자기들 비참한 처지밖에 더 봐요? 두목, 눈 감은 놈은 감은 대로 놔둬요! 꿈꾸게 내버려 두란 말이에요!”
“만일에 ……만일에 말이지요 ……”
“만일이라니, 뭐요? 들어 봅시다!”
“만의 하나, 그 사람들이 눈을 떴을 때, 당신이 지금의 암흑세계보다 더 나은 세계를 보여 줄 수 있다면 또 모르겠소.……보여 줄 수 있어요?”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타파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폐허에 무엇을 세워야 하는, 그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생각했다. 어렴풋하게나마 그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의 낡은 세계는 구체적이고 견고하다. 우리는 그 세계를 살며 순간순간 그 세계와 싸운다. 실재하는 세계다. 미래의 세계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조르바는 한 때 애인이었던 여인숙 주인의 죽음 이후로 바로 잊었고 그런 사실을 지적당하자 곧 바로 변명한다.
“새 길을 닦으려면 새 계획을 세워야지요!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묻지요.”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는 뭐하는가?” “잠자고 있네.”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하고 있는가?” “일하고 있네.” “잘해 보게.” “조르바, 이 순간에 뭐 하는가?”“여자에게 키스하고 있네.” “조르바, 잘해 보게. 키스할 동안 딴 일일랑 잊어버리게. 이 세상에는 아무 것도 없네. 자네와 그 여자 밖에는. 키스나 실컷 하게.”
조르바는 나라와 민족, 선과 악을 넘어서 모든 인간을 불쌍히 여기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내게는, 저건 터키 놈, 이건 불가리아 놈, 요건 그리스 놈,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두목, 나는 당신이 들으면 머리카락이 쭈뼛할 정도로 조국을 위해서랍시고 태연하게 했습니다. 나는 사람의 멱도 따고 마을에 불도 지르고 강도짓도 하고 강간도 하고 일가족을 몰살하기도 했습니다. 왜요? 불가리아 놈, 아니면 터키 논이었기 때문이지요. 나는 때로는 자신을 이렇게 질책했습니다. <염병할 놈, 지옥으로 곧장 가라, 이 돼지 같은 놈! 싹 꺼져 버려. 이 병신아 !> 요새 와서는 사람은 좋은 사람, 저 사람은 나쁜 놈, 이런 식입니다. 그리스인이든 불가리아인이든 터키인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좋은 사람이냐, 나쁜 놈이야? 요새 내게 문제가 되는 건 이것뿐입니다. 나이를 더 먹으면 이것도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좋은 사람이든 나쁜 놈이든 나는 그들이 불쌍해요. 모두가 한가집니다. 태연해야지 하고 생각해도 사람만 보면 가슴이 뭉클해요. 오, 여기 또 하나 불쌍한 것이 있구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자 역시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두려워한다. 이자 속에도 하느님과 악마가 있고 때가 되면 뻗어 땅 밑에 널빤지처럼 꼿꼿하게 눕고, 구더기 밥이 된다. 불쌍한 것! 우리는 모두 한 형제간이지. 모두가 구더기 밥이니까!”
조르바는 특별히 자신에게 여성에 대한 동정심이 지나치게 많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여자라면 ……젠장, 눈이 빠지게 울고 싶어집니다요. 두목, 당신은 내가 여자를 너무 좋아한다고 놀리지요. 내가 어떻게 이것들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자기가 무엇하는 지도 모르고 젖통만 쥐면 손을 들어 버리는 이 연약한 것들을 말입니다…….”
이맇게 말하는 그가 결혼을 정당하게는 딱 한 번, 반쯤 정당하게는 두 번, 부정하게는 천 번, 2천 번, 3천 번? 나중에는 몇 번 했는지 그걸 다 어떻게 계산 하느냐고 반문 하였다.
작가 카잔차키스는 1883년 터키의 지배아래 있는 크레타 섬에서 태어났다. 그는 사춘기 시절에 터키로부터 해방을 쟁취하기 위한 독립전쟁으로 말미암아 비참한 피난 생활을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그의 평생의 화두는 자유와 자기 해방을 위한 투쟁이 되었다.
그의 1단계 투쟁은 식민지 억압자 터키로부터 해방이었고 2단계 투쟁은 내부의 억압자들인 무지, 악의, 공포, 불안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관념과 습관으로부터 해방이고 3단계 해방은 우리 자신도 모르게 우상이 되어버린 생활의 습관, 이상, 희망, 꿈, 계획, 확신 등으로 부터의 해방이었다. 그의 삶은 신으로부터 악마로부터 운명으로부터 해방을 위한 투쟁의 여정이었다. 벗어남, 투쟁, 저항을 위한 그의 삶은 때로는 맹목적으로 해방을 위한 해방이 되기도 하였을 것이다.
아무튼 그의 묘비명은 초인에의 염원, 영원한 자유인의 선언이다.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그러나 나는 아래와 같이 그의 묘비명을 뒤집고 싶다.
그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다고 하였지만 자유와 해방을 바랐고
그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였지만 억압을 두려워하였고
그는 자유다고 하였지만 자유와 속박의 긴장 속에서 살았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아바타인 ⌜그리스인 조르바⌟에게 당연히 같은 묘비명을 줄 것이다.
2023.4.14.금 진시
우담초라하니
참고문헌
니코스 카잔차키스 저, 이윤기 번역 ⌜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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