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8월 필리핀인들은 스페인의 통치에 저항하여 봉기했다. 무장 항쟁이 계속되던 1897년 3월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필리핀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해 12월 임시정부는 총독부의 폭압적 통치를 개혁하는 대신 아기날도가 필리핀을 떠나는 조건으로 휴전에 합의했다. 아기날도는 홍콩으로 망명했으나 스페인 당국은 협정을 이행하지 않았다.
필리핀 초대 대통령 에밀리오 아기발도
1898년 1월 25일 스페인령 쿠바의 아바나에 입항한 미국 군함 메인호가 2월 15일에 발생한 의문의 폭발로 침몰하여 미국 해군 266명이 사망했다. 미국 대통령 매킨리는 이 사건을 스페인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며 의회에 개전을 요청하였고 의회는 4월 20일 스페인에 선전포고하였다. 지금까지 메인호의 폭발 원인은 단순한 사고였다는 주장, 미국의 자작극이라는 주장, 미국과 스페인의 전쟁을 유도하려는 쿠바 독립군의 소행이라는 주장 등 여러 가지가 있으며 스페인의 소행은 아닐 것으로 보고 있다.
메인 호
홍콩에 있던 미국의 아시아함대는 선전포고 즉시 필리핀으로 출동하여 5월 1일 마닐라 앞바다에서 스페인 함대를 격파하였다. 미국은 홍콩에 망명 중인 아기날도에게 스페인에 대항하여 함께 싸우자고 제안했다. 아기날도는 미국 해군이 제공한 선박으로 5월 19일 마닐라로 귀환하여 미국 함대 사령관 듀이를 면담했다. 듀이는 미국이 필리핀에 대하여 영토적 야심이 없다고 다짐했다. 아기날도는 스페인에 대한 전쟁을 개시하고 6월 12일에 필리핀의 독립을 선언했다. 6월 30일 3만여 명의 미군이 필리핀에 도착하였다.
한편 미국은 쿠바를 점령하였고 미국과 스페인은 8월 12일 워싱턴에서 휴전협정에 서명하였다. 이어 12뤌 10일의 파리조약에서 스페인은 쿠바와 푸에르토리코, 괌을 미국에 양도하고 필리핀을 2천만 달러에 매각하기로 합의했다. 12월 21일 매킨리 대통령은 필리핀을 합병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1899년 1월 23일 필리핀 사람들은 헌법을 제정하고 공화국 수립을 선포했으며 아기날도가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그해 2월 4일 미군이 마닐라에서 필리핀 사람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미국 신문들은 필리핀인들의 이유 없는 총격으로 미군 22명이 사망하고 125~200명이 부상했다고 보도했다. 필리핀인 사망자는 수천 명으로 추정되었다. 필리핀 취득조약은 협박과 회유 속에 가결 요건인 3분의 2를 단 한 표 넘겨 2월 6일 비준되었다. 상원 의원 리처드 페티그루는 필리핀 독립 약속을 저버린 배신 행위는 금세기 최악의 국제범죄라고 평했다.
미군에게 학살된 필리핀인들
필리핀 대통령 아기날도는 미국에 대한 무력투쟁을 선언했다. 필리핀인들은 미국에 저항하는 필리핀군을 압도적으로 지지하고 그들에게 음식과 거처를 제공했다. 일부 미군은 아메리카 원주민과 싸울 때 썼던 수법을 그대로 사용해 극도로 잔인하게 대응했다. 한 번 매복 공격을 받은 로이드 휘튼 장군은 반경 19 km 이내의 모든 마을을 파괴하고 주민을 몰살하라고 명령했다. 필리핀군이 사미르 섬의 미군 부대를 습격하여 미군 74명 중 54명을 사살하자 제이콥 스미스 대령은 10세 이상 주민은 모두 죽이고 섬을 황무지로 만들어 버리라고 명령했다. 군인들은 신이 나서 이 명령에 따랐다. 주민 수십만 명이 강제수용소에 구금되었다.
미군의 필리핀인 총살 집행
1900년 11월의 미국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나서 필리핀에서 미군이 저지른 만행이 보도되기 시작했다. 살인, 강간, 물고문 같은 끔찍한 이야기 투성이였다. 1901년 11월 <필라델피아 레저> 마닐라 특파원이 쓴 기사를 보자.
우리 군인들은 무자비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 남자, 여자, 아이를 가리지 않고 저항군 포로와 단순 체포자, 적극 가담자와 의심되는 자를 가리지 않고 10세 이상이면 다 죽인다. 씨를 말리려고 작정한 것 같다. 필리핀 사람은 개보다 나을 게 없다는 생각이 만연하고 있다. .... 우리 병사들은 원주민에게 소금물을 퍼 먹여 자백을 받아낸다. 두 손 들고 항복한 주민들이 저항군이라는 증거가 하나도 없는데도 잡은지 한 시간 만에 다리 위에 세워 놓고 차례로 총을 쏘아 죽였다. 시체가 강물로 떨어져 둥둥 떠내려간다. 저항하면 이렇게 된다는 본보기를 보여주는 것이다.
<오마하 월드 헤럴드> 신문은 병사가 보낸 독자 투고를 이렇게 보도했다. “그들을 땅바닥에 눕혀놓고 두 손 두발을 밟고 선다. 그런 다음 입에 막대기를 물리고 입과 코에 물을 한 동이 들이붓는다. 그래도 자백을 안 하면 다시 한 동이를 더 들이 붓는다. 그러면 배가 두꺼비처럼 불룩해진다. 정말 끔찍한 고문이다.”
1901년 3월 23일 미군은 아기날도를 생포했으나 전쟁은 멈추지 않았다. 9월 6일 매킨리 대통령이 피격되어 9월 14일에 사망하고 부통령이던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대통령직을 승계하였다. 1902년 7월 4일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필리핀 전쟁이 종료되었다고 선언했으나 필리핀인들의 항전은 1912년까지 계속되었다. 미국의 역사가 하워드 진(Howard Zinn 1922~2010)은 이렇게 썼다.
“1906년 3월 10일 한 미군 부대가 필리핀 남부의 한 섬에 있는 이슬람교도 모로족의 마을을 습격하여 무장도 하지 않은 남자와 여자 그리고 어린아이 600여 명 모두를 하나도 남김없이 몰살했다” 이 전쟁에서 미군은 12만 6천명의 병력을 투입했고 4,374명이 죽었다. 필리핀인 사망자는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60만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당시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필리핀 정복전쟁에 격렬하게 반대하며 이렇게 썼다. “우리는 수천 명의 필리핀 사람들을 진압한 후 땅에 파묻었다. 그들의 논밭을 망가뜨렸으며, 마을에 불을 질렀고, 과부와 고아들을 집 밖으로 내쫓았다.... 미국 국기를 바꾸어야 한다. 우리는 국기의 하얀 줄무늬를 검게 덧칠하고 별 대신에 해골과 십자 형태의 뼈를 그려 넣어야 할 것이다.”
마크 트웨인
<참고서적>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Untold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2012
저자 ; Oliver Stone – 영화감독
Peter Kuznick – 아메리칸 대학교 역사학 교수
역자 : 이광일, 2015, 들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