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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 여호수아 1장 1-9절
제목 : 모세가 죽은 후에
일시 : 2019년 9월 1일
1.
“장강의 뒷물이 앞물을 밀고 간다”고 마오쩌둥이 말한 바 있다. 무릇 역사는 앞 세대가 뒷 세대에게 권력을 자연스럽게 이양하거나 순순히 물러나는 법 없이 다음 세대가 지난 세대를 치고 올라가거나 밟고 나아가는 방식으로 쟁취하였다. 그럴 경우는 연속성 보다는 전임자와의 차별화를 시도한다. 그런 갈등과 투쟁으로 역사는 한 걸음 앞으로 성큰 내딛기도 하지만, 뒤로 큰 걸음으로 후퇴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는 권력의 승계가
2.
모세가 죽었다.
모세가 죽었다는 것이 함축하는 바는 넓고 깊다.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리더십의 문제다. 모세와 같은 리더는 없다. 그러나 모세와 같은 리더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모세가 죽은 후에 직면한 이스라엘의 위기이자 여호수아가 당면한 과제이었다. 한 마디로 모세가 없다. 아니, 모세가 아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시종이었고, 모세가 가나안에 침투시켰던 스파이였고, 모세의 군사령관이었다. 모세도 아닐뿐더러 모세가 될 수도 없다. 모세의 부재 상황에도 모세에 버금가는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다른 하나는 과업이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조상들에게 약속한 땅, 이집트에서 안전한 노예살이가 아니라 위험과 모험으로 가득한 광야를 거친 궁극의 이유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정착이었다. 모세가 살아 있을 때에 바산 왕 옥의 땅 등, 요단강 서편 지역을 일부 점령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시작이었을 뿐, 완수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이루지 못한, 또는 이루지 못하게 한, 바로 그 무거운 숙제를 여호수아가 도맡게 되었다.
이럴 때, 모세의 지위를 이어받는 것은 모세의 두 아들, 게르솜과 엘르에셀이 아니라 모세의 비서인 여호수아다. 세습이 아니라는 말이다. 혈통에 의한 승계가 아니라 능력에 따른 계승이다. 왕의 적장자를 통한 권력 후계 구도는 예측가능하고 안정적인 측면이 있다. 허나, 세상이 어디 그렇게 작동하는가? 예측 불가능하고 불안정하다. 아버지의 세상과 다른 세상이다. 물리적으로는 동일한 공간이지만, 정치, 사회적으로는 판이한 공간이다. 그러니 검증되지 않은 리더십을 통해 새 시대의 과업을 맡긴다는 것은 위험한 도박이다.
여호수아는 이미 그의 능력을 입증했고, 인정 받았다. 그는 모세가 가는 곳마다 따라 갔고, 모세가 머무는 곳에 머물렀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는 40일 내내,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도 모세와 함께 했던 것처럼, 모세와 함께 한 자, 여호수아와도 함께 한다.
모든 사람이 모세에게 반역하고, 걸핏하면 이집트로 돌아가자며 옛 향수에 젖어들 때, 여호수아만은 모세를 버리지 않았다. 모세의 자리에 섰다. 모세의 편, 모세의 뒤에 섰다. 그랬기에 하나님도 여호수아를 버리지도 떠나지도 않겠다고 굳건한 약속을 주신다.
모세가 맡긴 일도 잘 수행했던 것이 여호수아다. 각 지파의 대표로 파견된 가나안 땅 정탐을 일을 잘 수행한 것도 여호수아이고, ??족을 공격할 때에는 사령관이었다. 모세의 그늘에 가려있기는 하지만, 그는 자신의 성과를 갖고 최종 리더십의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아버지가 모세라는 이름으로 모세의 지위와 사명을 잇는 것이 아니라 모세와 같은 성과와 성취가 있기에 모세의 지위와 사명을 계승한 것이다.
역사는 우리에게 탁월한 리더인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의 능력에 미치지 못하여 일을 그르치고, 나라를 말아먹은 부자의 이야기를 숱하게 들려준다. 묵상의 맥과 흐름이 끊겨서 방안을 맴돌다가 꺼낸 책,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뜨인돌)에서 사이토 다카시는 “세습은 제국 붕괴의 첫 걸음”이라고 잘라 말한다. “황제는 대부분 자신의 아들에게 제국을 물려주고 싶어 하는데, 거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합니다.”(165)
그 살아 있는 사례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이다. 우리에게는 임진왜란의 원흉으로 기억되는 그는 아들이 없을 때, 즉 가문과 혈통으로 권력을 넘겨줄 “자식이 없었을 때는 거의 완벽한 무장이었는데, 자식이 태어난 뒤부터 돌변”했다고 한다. 아들 히데요리에게 권력을 안정적으로 물려주기 위해서 방해 요소가 되는 이들을 가차 없이 숙청하고, 불필요한 일들을 저지른다. 그 욕망이 자신을 망치고, 아들을 죽이고, 세상을 혼란에 빠뜨렸다.
[추가한다면, 태조 이성계가 자신이 지목한 아들 정종이 아니라 제 힘으로 그 자리를 거머쥔 태종 이야기를 한 문단 더 추가할 수 있겠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강을 건널 준비를 하라고 지시한다. 모세가 가보지 못한 곳, 모세가 하지 못한 일을 해야 한다. 그 일은 준비된 사람의 숙제이다. 모세의 아들이기에, 자신의 의지와 능력과 무관하게 아들이라는 단 하나의 조건 때문에 남들 보다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는 것은 물려주려는 자, 깜냥도 안 되는 데도 물려받고자 하는 자, 둘 다를 파멸시키고, 그 사회를, 교회를 위험하게 만든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리더십은 자기 실력을 입증한 자에게, 준비된 자에게 돌아갈 것이다. 세습이 아니라 능력이 기준이다. 여호수아처럼 말이다.
3.
모세가 죽은 후에 누가 모세를 잇는가? 실력과 능력으로 입증된 자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것이 첫 번째 대답이다. 모세의 후계를 말했으니 모세의 과업 이야기를 할 차례다. 본문은 모세가 죽은 후에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을 제일 먼저 한다(2-4절). 바로 가나안 땅 정복이다. 그 땅은 하나님이 주시는 땅(2절)이자 조상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한 땅(6절)이다. 여호수아가 해야 할 일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 하나님의 첫 번째 말씀이었다.
이것을 우리 시대의 언어로 말하면, 시대적 사명 또는 시대사적 요청이라 하겠다. 각 시대는 각 시대마다 사명이 있다. 출애굽 세대는 노예살이 끝장내고 해방의 첫걸음을 떼는 일이었다면, 광야 시대가 땅 없이 떠돌던 시기이었다면, 여호수아 세대는 약속의 땅을 정복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것을 잊는다면, 그는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된다. 현재의 도전이 두려워 과거의 성취에 안주해서는 결코 안 된다.
하여, 하나님은 여호수아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거명한다. 바로 4절이다. 여호수가 싸워 빼앗아야 할 땅의 사면 경계를 알려준다. 남으로는 광야에서 북으로는 레바논 접경지역까지, 서쪽에서는 유프라테스 강가까지, 동쪽으로는 지중해에 이르는 지역이다. 그곳이 하나님이 주실 땅이다.
나는 여기서 사명이 무엇인지를 똑똑히 알아야 하지만, 한편으로 사역의 한계를 설정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는다. 4절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영토의 특징은 두 가지다. 다른 곳의 기록과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과 그 중에서 가장 넓은 영토라는 것이다. 다윗과 솔로몬 치하의 영토보다 조금 더 넓다. 그러나 그 땅은 대제국의 것이 아니다. 지도를 펼쳐 보면, 지금의 이스라엘은 경상남북도를 합한 정도다. 그러니까 저 4절의 땅 전체라고 해 봐야, 한반도의 면적보다 넓지 않다(정확하게 찾아볼 것).
명확한 목표물을 설정하는 것, 그리고 그 한계를 명확하게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고, 할 수 없는 것, 해서는 안 되는 금지를 알지 못하면, 야망이 욕망이 되고, 망하고 만다. 그것이 제국의 길이 아니던가.
하박국 2장 4절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대구하는, 대립하는 구절은 기억하는 이가 드물다. 교만이다. 개역개정은 ‘마음이 교만하다’고 했는데, 새번역처럼 잔뜩 부풀어 올랐다는 뜻이다. 그것을 공동번역은 ‘멋대로 설치지 마라’고 했다.
할 수 없는 일, 하면 안 되는 일을 침범한 대표적 사례가 바로 선악과 사건이 아니던가. 자기 한계를 모르고 하나님의 영역까지 침투하려던 태초의 그 사건 말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로마서에서 공동체 생활의 첫 원칙을 ‘분수에 맞게 생각하라’(12:3)고 했다. 오버하지 말라는 것이다. 몸이라는 유기체 안에서의 자기 역할과 타인의 존재와 지위, 자리를 인정하면서 함께 움직이라는 것이다.
나는 로고스서원 사역을 시작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일 보다는 내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먼저 정했다. 출판사 하지 않는다, 서점 하지 않는다, 아카데미 하지 않는다, 이 세 가지다. “나는 책을 쓰는 사람을 배출하지 책을 만드는 일을 하지 않겠다, 나는 책을 읽게 하는 일을 하지 책을 팔지 않겠다, 나는 책을 읽게 하지, 최고의 강사의 강연을 수동적으로 듣는 대중 강연 중심의 활동을 하지 않겠다. 그것은 출판사에, 서점에, 아카데미에 맡긴다. 그것은 내 일이 아니다.” 라고 결정했다. 지금도 유효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부산이라는 지역적 특성상 아카데미적 활동을 조금씩 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해야 할 일은 딱 하나다. “‘책’으로 일한다”이다. 수십, 수백가지 일을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을 관통하는 단 하나가 있으니 ‘책’이다. 그래서 우스개 소리로 이렇게 말하곤 했다. “로고스서원에는 예수님은 올 수 없고, 바울은 올 수 있다.” 바울은 책을 썼지만, 예수님은 책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지는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면 문어발 확장을 하게 되고, 잘 난 줄 알고 잘 될 줄 알고 이것저것 건드리다가 한껏 부풀어 올랐다가 뻥 터지는 풍선의 운명을 맞이한다.
자기 사명이 뭔지, 그리고 사명의 기준을 따라 하면 안 되는 일을 각인해야 한다면, 다른 한편으로 은혜에 대한 각성이 있어야 한다. 여호수아서에서, 오늘 본문에서 ‘땅’이라는 단어를 발화할 때 사용된 동사를 주목해야 한다. 바로 ‘주다’(give)이다. 2절에서는 ‘내가 그들에게 주는 땅,’ 3절에서는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6절에서는 ‘조상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은혜요 선물이라는 말이다.
앞으로 계속 말하겠지만, 여호수아서에서 ‘땅’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은혜로 거저 받는 것이다. 이것은 끝도 없이 강조해도 된다. 이후에 약속의 땅을 분배하는 이야기를 읽을 터인데, 그것을 선물로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거룩한 전쟁이라고도 하고, 야훼의 전쟁이라고도 하는 가나안 정복 전쟁을 읽을 때도 엄청나게 중요하다. 인간의 전쟁이 아닌 한, 하나님의 전쟁인 한, 전리품을 나눠 가지지 않는다. 논공행상을 금지한다. 혁명이 성공한 후, 최고의 난제는 무엇인가? 일등 공신들의 권력 다툼이다.
[조금 더 쓰고 정리할 것]
4.
모세가 죽은 후에 모세와 같은 능력을 검증 받은 자가 모세의 일을 해야 한다고 했다. 이제부터는 그러면 어떻게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적인 노력을 말하기 전에,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성경은 우리 인간의 이야기이지만 하나님의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먼저 말하지 않고 인간의 행위를 말하는 것은 성경을 자기 계발서나 소설 작품으로 만드는 지름길이다. 하나님의 이야기를 말하면서도 인간의 노력과 행위를 동시에 말해야 한다는 것, 그러나 하나님을 먼저 말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다른 텍스트와 다른, 성경을 성경으로 읽는 방식이다.
그러기에 나의 눈은 동행하시는 하나님에게 머문다. 여호수아가 어떻게 해야 할지 보다도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지를 말하자. 바로 하나님의 임재, 동행이다. 5절과 6절이다. 모세와 함께 한 그대로 바로 너와 함께 한다는 임재의 약속을 강력하게 확언하신다.
수종 들었던 모세에게서 여호수아는 뭘 보았을까? ‘외로움’이지 않았을까? 만인지상의 자리인 줄 몰라도 만인의 적이 되어야 하는 자리가 아니던가. 모두를 이해해야 하지만, 모두에게 이해 받지 못하는 자리. 모두를 품어야 하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 줄 수도 없는 사람이 리더이다. 그 고독을 견뎌내는 자가 리더이다. 리더의 권력만 탐하는 자는 왕좌 위의 칼을 보지 못한 자다. 언제든지 정수리 위로 내리 꽂힐 칼이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자를 맞이한다.
이집트의 바로와 맞설 때, 잠시 잠간 환호하던 백성들은 바로의 탄압이 거세지자 등을 돌렸다. 홍해 앞에서도 아우성쳤고, 물이 없다고 소리 질렀다. 너만 리더냐, 라는 고라 일당의 반란이 있었고, 누이인 미리암의 도전도 받았고, 포퓰리즘에 빠져 대중이 요구하는 대로 황금송아지를 만들어 주었던 것은 그의 형 아론이었다. 외로운 모세. 그리고 하나님과 일대일 대면으로 사십 일 동안 씨름하는 그를 곁에서 지켜보았던 여호수아다. 리더는 외롭다. 외로우니까 리더인 것이다.
모세에게도 대들던 이 백성이, 모세를 힘들게 했던 이 족속이, 가나안 땅의 아낙 자손 이야기를 듣고 밤새 통곡하며 모세를 죽이고 이집트로 돌아가자던, 차라리 노예로 사는 것이 낫겠다는 악한 건지, 어리숙한 것인지 모를 이 사람들을 이끈다는 것, 그것은 외로움이다. 외로움을 견뎌내는 자리이다. 모세도 버거워했던 그 일을 이제 여호수아가 감당해야 한다.
외로움과 함께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과연 자신이 모세의 빈자리를 대신하고 대체할 수 있을지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모세도 견디지 못하고, 분통을 터뜨리다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다는 죄목으로 꿈에 그리던 가나안 땅을 눈으로만 보고, 발로는 밟지 못했다. 목이 뻣뻣하기 이를 데 없는 백성들의 반란이 두렵다. 호기롭게 아낙자손과의 전투에 자신감을 보였지만 그들은 철기문명을 가진 선진 문화이고 군사력에서도 이스라엘을 압도하지 않는가.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의 반역과 불순종에 분노한 하나님이 당신의 임재를 철회하겠다고 하신 적이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변심이 가장 무서웠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용기’일 것이다. 소극적인 언어로는 두려워하지 말라 이고, 능동적인 언어로는 강하고 담대하라, 이다. 그만큼 여호수아가 직면한 상황은 녹록치 않다. 모세가 없는 이 시점에서 어찌 감당할까. 외롭고 두려워 잠 못 이루는 밤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임재만큼 반가운 약속은 없다.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이가 있다는 것. 언제 어디서나 내 편이 되어 주는 이가 있다는 것. 내 가는 길에 때로는 말없이 묵묵히 함께 걸어만 주는 이, 지치고 곤하여 어찌할 바를 모를 때 내 머리 쓰다듬으며 내 눈의 눈물을 닦아주는 이, 그가 있어 행복하다. 바로 그가 하나님이시다. 여호수아에게, 우리에게, 내게. 다른 것이 다 있어도 하나님이 없으면 다 없다. 새로운 리더, 여호수아에게는 남들이 없는 것이 있다. 바로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약속(promise)과 임재(presence)가 있다.
땅을 갖지 못한 자, 땅이 없는 자들, 땅을 잃은 자에게 저 약속에 대해서 한 두 문단<이것은 저 위의 어느 곳에 배치할 것>
5.
모세가 죽은 후에 어떻게 해야 하나?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명령한 것은 딱 한 가지다. 율법 준수와 말씀 묵상이다.
8절의 묵상과 성공의 관계
묵상을 설명할 것.
이 맥락에서 말씀은 여호수아 앞의 성경인 신명기이고, 좀 더 넓게는 모세오경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구약 전체와 신약 성경도 포함된다.
시편 1편 1-2절로 마무리할 것.
말씀 묵상이 우리를 살린다.
성경을 반복해서 읽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모세의 죽음과 부재가 차지하는 비중에 눌려, 그 관점으로 말씀을 읽는데, 뭔가 막힌다는, 답답하다. 1절은 모세의 죽음 보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것이 포인트이다. 모세가 있던 없던,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모세와 같든 같지 않든, 모세와 이야기하던 하나님은 지금 모세와 대면하시고 말을 건넨다. 그러고 보면, 인간적으로는 모세를 중심으로 이전과 이후로 역사를 구분해야겠지만, 하나님을 중심에 놓고 보면,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 없다.
이것이 여호수아 개인만이 아니라 여호수아서 전체를 읽는 방식이기도 하다. 바로 위의 글에서 모세를 모세오경이라고도 일컬어지는 토라/율법으로 바꾸어 읽으면 된다. 구약만 놓고 보면, 39권의 책이 모두 정경(cannon)이라는 점에서 이스라엘의 삶의 규범이 되는 가르침이지만, 모세오경은 그 모든 경전 안의 경전(cannon of cannon)이다. 모세오경이 끝난 이 시점부터는 모세오경에 기대어, 모세오경을 자기 시대의 언어로 해석하고 실천하는 이야기라고 보면 된다. 토라에 대한 하나의 해석이자 실천/실현이 구약 전부이다.
첫댓글 제대로 자기 분수를 아는 것과 용기 부족으로 안주하는 것. 두 가지를 구분하는 것이 아직도 때로 어렵습니다. 아직 더 성숙해져야 하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