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무용의 백미로 일컬어지는 이매방 선생의 ‘승무’와 ‘살풀이춤’을 시드니에서 감상한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선생의 발디딤 하나하나의 단아한 멋과 내면의 에너지는 큰 무대를 혼자 끌고 나가기에 손색이 없었고, 무대가 꽉 차오르는 거인의 느낌이었다.
지난 10일 저녁 재호 한인상공인연합회(회장 조일훈)이 파라마타 리버사이드극장에서 마련한 ‘한호 우호 증진을 위한 시드니 무용축제’에서는 한국 전통무용과 발레, 현대무용이 옴니버스 식으로 선을 보였다. 중앙문화예술협회(단장 허성재)의 주선으로 시드니를 찾은 40여명의 무용예술가들에겐 무대가 너무 좁아 보였다.
관객들의 호응 역시 무대 위의 춤사위에 걸맞았다.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1, 2, 3층은 거의 만석이었으며 휴식시간 없는 3시간 공연에도 지루한 기색 하나 없이 조용히 끝까지 모두들 자리를 지켰다.
총 12작품의 이번 시드니 공연 프로그램은 오랜 해외공연으로 검증된 허성재 단장의 탄탄하고도 다양한 장르의 ‘해외공연 맞춤형 작품’들로 각 구성 요소마다 제각각의 색깔과 맛으로 재미를 더했다.
이매방의 ‘승무’는 “얇은 사 하얀 고깔은 고이 접어 나빌레라…”로 시작하는 조지훈의 시 ‘승무’의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이매방의 승무는 화려함 속에서 기품있고 우아했다. 80이 넘는 고령의 남성이 그렇게 섬세한 몸짓으로 아름다움을 표현한다는 게 가히 예술의 극치라고 할 수 있었다.
그의 춤 속에는 인간의 희로애락을 억제하여 격조있게 승화시키는 ‘절제의 미’가 그대로 드러났다. 이는 ‘살풀이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恨), 흥(興), 멋, 태(態) 4가지를 골고루 갖춘 대표적인 춤으로, 특히 선생의 기방계 살풀이춤은 차가우면서도 단아하고 비장하면서도 청아한 춤이 압권이었다.
이준철의 현대무용 ‘홀로사랑’은 아픈 사랑으로 차마 고백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그야말로 온몸으로 표현해 주었다. 관객들은 애절한 노래에 맞추어 사랑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그의 동작에 큰 박수를 보냈다.
공연단 단장인 허성재 선생이 보여준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34호 안성향당무인 ‘화조무’는 정말 한 마리의 새가 산 속에서 이 꽃 저 꽃을 날아다니며 노니는 듯한 가볍고 사뿐사뿐한 동작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오미자 외 3인의 ‘소고춤’은 농악의 소고놀이를 무용으로 재구성해 사물놀이 장단과 태평소 반주에 맞췄는데, 빠른 춤사위와 현란한 몸놀림이 제법 흥겨운 춤판이었다.
역시 이날 공연의 마무리는 신명나는 한마당 ‘모듬 북’ 퍼포먼스. 한인자 선생이 이끄는 한영외고 학생들이 두드리는 심장 박동 같이 힘찬 북소리와 격렬한 장고 소리가 어우러져 관객들이 박수 리듬을 이끌어냈다.
허성재 단장 인터뷰 - “ 한인들, 열심히 사는 모습이 자랑스러워”
“해외에 나와 보면 여러 민족들 중에 한인들이 제일 열심히 사는 것 같아 정말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허성재 단장은 2년 전 타운홀에서 70명과 공연했을 때 인연을 맺게 된 재호한인상공인연합회의 초청으로 다시 시드니에 오게 됐다고 한다.
지난 1989년 해외공연페스티벌에 참가한 후 지금까지 매년 유럽과 미주공연을 해 온 허 단장이 본격적으로 해외공연에 나선 것은 2000년 중앙문화예술협회를 만들면서이다.
모든 행정 업무까지 하면서 외국공연을 추진해 외국인들에게는 한국문화의 홍보를, 한인 동포들에게는 화합의 장을 만들어 주는 역할을 성공적으로 해왔다.
많은 예술인들을 이끄는 단장의 자리가 때론 힘들기도 하지만 허성재 단장은 이번 공연을 마치면, 또 다시 7월 미국 아틀란타 공연, 8월 디즈니랜드 공연을 준비할 것이라고 했다.
이매방 선생 인터뷰- “ 한국춤은 한마디로 정중동”
“시드니는 처음이여. 근데 날씨가 참 덥구만.”
14년 전 캔버라 방문 이후 두번째로 호주 땅을 밟은 우봉 이매방 선생은 연로한 나이에 먼 길 여행과 스케줄에 피곤해 보이셨다. 때마침 선생이 호주에 도착한 지난 8일은 섭씨 47도까지 올라가는 무더운 날씨였다.
9일 재호한인상공인연합회가 마련한 환영연에서 만난 선생은 이튿날 공연할 승무를 ‘춤의 왕’이라며, 그 유래와 공연 구성에 대해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한국무용의 살아있는 전설 우봉 이매방 선생은 1927년에 태어나 어릴 적부터 춤과 일생을 동고동락했다. 1987년 7월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됐고 뒤이어 1990년 10월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97호 살풀이춤의 예능보유자가 됐다.
지난해 9월 오페라 하우스에서 공연을 가졌던 서울시무용단 단장 임이조 선생도 그의 전수자 중 한 명이다.
“사람들이 살풀이라고만 하는데 그러면 안되고 살풀이춤이라고 불러야 한다”며 한국춤의 칭호 하나에도 바른 관심을 기자에게 부탁하는 듯 했다.
여성적인 미를 기반으로 춤추는 이매방 선생은 “한국춤은 한마디로 ‘정중동(靜中動)’이야. 여자같은 요염함과 애절함, 슬픔과 원통함이 정(靜)이고, 남성적인 박력을 통해 발산하는 것이 동(動)이지. ‘동’을 기본으로 하는 서양춤은 천만가지 감정의 변화를 표현하는 우리 춤을 못 따라가”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