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春軒公(啓泮) 遺作 [춘헌공(계반) 유작]
춘헌공 휘는 계반(啓泮․1848~1939)은 휘 석열(錫說)과 영광 정씨(丁氏)의 4남 중 장남으로 戊申年 8월 13일 관산에서 태어났다. 공은 장흥을 대표할 정도로 자타가 인정하는 대문장가였다. 19세기 말과 20세초 격동기를 거치면서 남북을 아우르는 대동보를 발행하는 사업에 앞장서는 등 문중을 위해 헌신했던 몇 안 되는 주인공이다.
공의 유작 가운데 백산재(栢山齋)․죽천사(竹川祠) 양춘재(陽春齋) 등의 상량문은 명문으로 세인의 주목을 끌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공은 문중의 숙원사업인 남북합보를 위해 노심초사했지만 주변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제강점기인 1939년(己卯)에 타계했다. 공의 유문은 많지만 국역이 되지 않아 관북종인들과 관련된 몇 편만 옮긴다. (유고집)
■ 關北宗人(鍾卨)寄來書 (관북종인 종설의 서신)
「關北宗人(鍾卨)寄來書有合譜之意聊以一絶謝之書來千里外寄送故鄕情一語誠珍重勿寒此日盟」
<해설>함흥 일가 종설씨가 편지를 보내왔는데 합보할 의사가 있다하기에 시 한수로 감사의 뜻을 표한다.
천리 밖에서 편지가 날아왔는데
고향의 정을 붙여 보내 왔네
합보한다는 한 말씀 참 고마우니
이 날의 맹세를 헛되게 마소서
■ 送宗人(鍾卨)歸關北 (종인 종설의 귀향을 전송함)
一別一逢五百年 5백년에 단 한번 만나고 헤어지니
序倫樂事一宵圓 하룻밤 둘러앉아 일가의 정 맘껏 폈네
北關亦有冠山月 함흥에서도 이곳 관산 달이 비추리니
應記天涯是故園 멀리서도 이곳 고향의 정을 기억하소서
千里幾勞訪古城 고향 찾아 먼길 가느라 얼마나 고생했소
某邱某水眼中明 뒤에 언덕 앞에 물이 눈 속에 역력하리
異時關北多來雁 다른 날 함흥에서 기러기를 보거든
倘記春軒病寧名 혹시 춘헌이란 병든 나를 기억하소서
■ 答咸興宗人鍾卨 (함흥종인 종설에게 답함)
「落落天涯一面猶難而分未一朔書又踵至此何奇緣珍玩在手如得空靑水碧不覺紙面生毛喜何言諭况二千里長程不多日平安過涉極協顒祝兩處事狀追後始聞令人愧死無地彼亦宗也何若是沒倫冷情也痛歎何言序文件遠意難可坐孤略構數行豈曰文也且不見錄中文字之爲何樣而只以南遊爲主其不爲郢書燕說耶覆甁似可未審靜體一如書來時耶遠泝切切宗下哀相益甚何足仰浼但臘日不遠今年似或泰平過去耳此后書面非老漢可望臨紙忡忡耳」
<해설> 쓸쓸한 하늘가에 한 번도 보기 어려운데 헤어진 지 보름도 못되어 또 편지를 받으니 이 무슨 기연인가? 보배를 하늘(蒼空)에서 얻은 것 같아 읽고 또 읽어 종이가 닳아 짐도 알지 못하고 읽었으니 그 기쁨을 무슨 말로 비유하리오.
하물며 2천리나 머나 먼 길에 오셔서 여러 날을 편치 않게 지내며 하고 싶은 일의 협조 받지 못하였다 하니 두 곳의 형편을 뒤늦게 듣고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들도 또한 일가들이거늘 몰상식하고 비정할 수 있단 말이오. 그저 통탄스러울 뿐입니다.
부탁하신 서문은 일가의 뜻을 저버릴 수 없어 두어줄 얽었으나 어찌 글이라 할 수 있으리오. 보내신 서신마저 무슨 글자인지 알지 못하여 다만 남유(南遊)에 의미를 두니 견강부회(牽强附會)가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존체는 편지를 보낼 때와 같이 강녕하시겠지요. 먼데 있으면서 궁금합니다.
저는 쇠한 모습이 날로 더합니다. 걱정을 끼친 것만 같습니다. 다만 섣달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금년도 그저 태평하게 지나기를 바랄 뿐입니다. 늙은이가 이후로도 편지주시기를 어찌 바라겠소. 편지를 대하면서 근심스러울 뿐입니다.
■ 敬次忠烈祠新建韻 (先祖忠烈公妥靈之所 在咸興)
(충렬사 신건을 공경하며 읊음)
美諡易名正合公 좋은 시호로 명실 맞아 공께 어울리니
殊恩常典表丹忠 특별한 은전으로 단충을 표창하였네
日星不滅暉暉德 해와 별이 불멸하듯 찬란한 덕 지니셨고
天地長存烈烈風 천지 간에 길이 남을 아름다운 풍도 있네
史筆大書光異代 청사에 대서하니 후대에 빛이 나고
王庭配食享元功 종묘에 배향하니 큰 공을 세우셨다네
嚴嚴廟貌江頭起 웅장한 사당모습 강가에 우뚝 세워지니
八域儒生妥侑中 팔도의 유생들이 영령을 위로 하네
ㅁ 復齋公(啓玟) 遺稿[복재공(계민) 유고]
휘 계민(1855~1923)의 자는 치영(致塋) 호는 복재(復齋)다. (遜庵) 휘 준식(準植)과 영광 김씨의 아들로 1855년(철종 7 乙卯) 단산(丹山)에서 출생했다. 연암(淵庵) 송병선(宋秉璿)․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등 당대의 석학들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학문을 배웠다. 선영이 있는 언덕에 영귀정(詠歸亭)을 지어 후학을 지도와 시인묵객들과 수창을 즐겼다.
공은 영귀정의 또 다른 이름인 '봉덕재(鳳德齋)' 상량문에서 '우리 이사(里社)는 재울(齋鬱)의 지음이네/ 나가서 일하고, 들어와서는 쉬니/ 부형의 낙륙(樂育)하는 성의가 적고/ 배불리 먹고, 따습게 입으나/ 배우고자 하는 생도에게 학업의 장소가 없구나' 하며 인재 육성의 공간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한 나머지 강학의 장소로 정자를 지었음을 밝히고 있다.
공은「送咸興宗人楨珪歸故山序」에서"서울에 초방(初榜:初試)를 보러 왔다가 몸이 아파 임시로 머문 집에서 뜻밖에 정규(楨珪)군을 만났다" 고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공과 관북종인 정규공과의 만남은 미리 계획된 만남은 아닌 것이다. 공은 일제치하인 1923년(癸亥)에 6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많은 글을 남겼으나 관북종인들과의 종유한 한시만 소개한다. (유고집)
■ 送咸興宗人鍾卨北歸序 (함흥 종인 종설이 귀복전송서)
「吾姓之在東方者南則長興北則咸興而咸興乃進士公諱自恭之僑居也雲仍之文學仕宦連世燀爀蔚爲關北華閥進士公養德行善之餘蔭可知矣嗚乎南北之相距爲二千里派系之相分爲十四世派譜之未合聲息之阻絶自先世而慨之何幸吾宗奉北譜一秩而來年過六旬背任足繭慕先敦族不憚遠涉之苦感歎何極且君之謹飭文華可謂法家拂士矣觀於君而僉宗之淸德雅望又可知也將行略書顚末以備異日敍宗盟之一證云爾」
〈해설〉 위씨 성을 가지고 우리나라에 세거하고 있는 지역은 남쪽에는 장흥(長興)이고 북쪽에는 함흥(咸興)으로 곧 진사공(進士公) 휘(諱) 자공(自恭)이 교거(僑居)한 지역이다. 후손들 중에 문학(文學)과 사환(仕宦)을 지낸 분들이 대대로 연해서 빛을 내고 있으므로 문교가 널리 관북(關北)지역에서 화벌(華閥:높은 문벌)로 알려져 있으니 진사공께서 덕을 쌓고 선행(善行)을 닦은 여음(餘蔭)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 (嗚乎) 남(南)과 북(北)이 서로 떨어진 거리도 이천 리나 되고 파계(派系)가 갈린지도 십사세(十四世)째 되었지만 파보(派譜)를 합치지도 못하고 소식이 두절되어 선세(先世)때부터 개탄스럽게 여겨오고 있는 중이었다. 어쩌다 다행하게 종설씨(鍾卨)가 육순이 넘은 나이에 북에서 만든 족보 한질을 등에 지고 가지고 오면서 발이 부르트도록 멀리 찾아 왔으니 선조를 추모하고 동족에게 돈목하는 성심 때문이다.
멀리 산 넘고 물 건너서 괴로움도 꺼려 아니하고 찾아왔으니 감탄스러움을 어쩌다 말하겠는가? 또 종설씨는 근신하고 조심성이 있으며 문장과 재화가 범백이 있는 필사(拂士:현사)이다. 군(君)의 이모저모를 살펴보면 그쪽에 여러 종씨들의 청덕(淸德)과 바른 덕망을 또 알 수 가 있었다. 장차 떠나려 할 때 대략 그 전말을 써두고 후일 동종 간에 맹약을 논할 때 한 가지의 증표로써 대비해 두기로 하였다.
■ 送咸興宗人楨珪 歸故山序 (함흥 종인 정규 귀향 전송서)
「昔程夫子云氏族不繁盖吾姓之謂也咸興宗人楨珪卽進士公諱自恭之後孫進士公移居于咸興子孫因居焉數百年間忠孝節義道學文章間世幷出南有存齋北有萬庵兩先生以道學文行著名當世而未得顯達于朝至今爲儒者之所嗟惜焉天限南北嘗以宗盟之落落爲恨余以經第初㮄寄名山外在京沈病適與君邂逅異鄕花樹其喜可知而旋復忽忽告別畧敍數行以盡其未盡之情」
〈해설〉 옛날 송나라 때 정부자(程夫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씨족(氏族)이 번성하지 못하다고 하였는데 아마 우리의 성(姓)씨를 두고 이른 말인 것 같이 여겨진다. 함흥(咸興)에서 온 일가 정규(楨珪)는 곧 진사공(進士公)인 휘 자공(自恭)의 후손이다. 진사공이 함흥으로 이거(移居)하였기에 자손들이 그로 인해서 그곳에서 대대로 세거(世居) 하게 된 것이다.
수백 년간 충효와 절의를 지키며 도학과 문장가들이 보기 드물게 같은 연대에 배출하였으니 남(南)에는 존재(存齋)선생이요. 북(北)에는 만암(萬庵)선생이 바로 그 분들이다. 이분들은 도학(道學)과 문행(文行)으로 당세에 저명하였으나 당시 왕조 때 그리 현달한 고위직에 이르지를 못하였기에 지금에 이르도록 선비들 간에 한탄하며 애석해 하고 있다.
남과 북으로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일찍부터 동종 간에 맹약을 해 왔었다. 나는 초방(初榜)으로 인하여 산외(山外)에 나와 명예를 걸고 서울에서 임시로 머물던 집에 있으면서 오랜 병고 끝에 마침 정규(楨珪)군과 우연히 만나게 되어 타향에서 일가끼리 정담을 나누다 보니 그 기쁨을 알만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돌아갈 때 갑자기 작별을 고하게 됨에 대략 두어줄 글을 써 그동안 다하지 못한 정(情)을 펴 보았다.
※ 복재공은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에 갔다가 몸이 아파 임시거처에 머물고 있는데 관북의 종원 정규(楨珪)씨를 만났던 것이다. 공이 그를 군이라고 했으니 나이차가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144-094일차 연재에서 계속)
첫댓글 (144-093일차 연재)
(장흥위씨 천년세고선집, 圓山 위정철 저)
93일차에는 '춘헌공(계반)의 유작'과 '복재공(계민) 유고'가 밴드에 게재됩니다.
[본문내용- 춘헌공의 유작과 복재공의 유고]/ 무곡
남북종친과의 만남이 가히 소설의 한 대목으로 봐도 무난할 것으로 보입니다. 종친간의 만남은 마음을 설레게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별앞에 마음을 아프게도 하는 것 같습니다. 어찌되었든 남북종친과의 만남은 '과거시험'도 큰 만남의 계기가 되기도 했던 것으로 사료됩니다./ 무곡
남북종친의 만남과 이에 대한 글이 마음을 즐겁게 합니다. 피의 뜨거움과 친근한 정이겠죠!!/ 벽천
주)'경강부회'는 '견강부회'의 오자이기에 바로 잡았습니다./ 무곡
영귀정 상량문이 나오네요. 강학의 장소로 그 역할이 컷다고 보입니다. 학업이란 태어나면서 시작되어 죽을 때까지 지속되는 것같습니다. 꾸벅./ 벽천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