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그리고 여백이 있는 곳] 염색
수필가 권명자
거울 앞에 앉아 가만히 나를 들여다본다. 윤기 없는 얼굴에는 세월이 남긴 잔주름이, 머리엔 흰 머리가 희끗희끗하다. 애써 지우려 할수록 또렷해지는 흔적들 앞에서 마음이 착잡해진다.
문득 ‘가는 세월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고 늙음을 한탄한 우탁의 시조가 떠오른다. 나이가 들면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열흘이 멀다 하고 모습을 드러내는 흰 머리는 눈엣가시다.
젊었을 때는 지성과 품위를 갖춘 노년의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주름진 얼굴에 번지는 온화한 미소는 사람을 편안하게 하고 반백이 넘는 머리도 우아하고 멋지게 느껴졌다. 그러나 정작 그 시간이 내게 닿자 생각이 달랐다. 마음은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몸의 변화가 앞서는 것 같아 마음이 심란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아름다움보다는 추레하게만 보였다. 우선 눈에 보이는 흰 머리라도 감추고 싶었다. 몸은 늙어가는데 마음은 여전히 젊어 보이고 싶어 자꾸 염색약을 집어 들게 했다.
흰 머리는 유전과 스트레스, 노쇠와 영양부족으로 인해 멜라닌 세포가 사멸하며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한다.
요즈음은 머리 색깔도 자유롭다. 검고 윤기 나는 머리가 아니어도 거리낄 것이 없다. 하얗고 노랗고 붉거나 푸르거나 젊은이들은 저마다의 색으로 자신의 개성을 표현한다. 그렇지만 나는 검은 머리 색이 좋았다.
흰 머리카락을 보면서 시간의 빠름을 느낄 때가 있다. 염색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어느새 흰머리가 삐죽삐죽 올라오니 말이다. 내가 염색을 시작한 것은 사십 대 부터였다. 봉사 활동으로 많은 이들을 만나며 단정한 외모에 신경을 쓰게 되었다. 깔끔하고 검은 머리는 젊음과 자신감으로 활력이 넘치게 했다.
자주 염색 하는 나를 말리던 남편이 어느 날 왜 염색을 안 하느냐고 했다. 얼마나 초라해 보이고 눈에 거슬렸으면 그랬을까. 그 말에 나는 다시 염색약을 꺼냈다.
염색 도구를 챙기고 튜브에 든 검은 색과 흰색 중화액을 짜서 섞었다. 서로 다른 성질의 액체가 하나의 색으로 어우러졌다. 그 모습이 마치 어울려 사는 우리네 삶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쁨과 슬픔, 젊음과 늙음, 희망과 체념이 섞여 한 생을 살아가는 모습들처럼 말이다.
거울 앞에 서서 염색약을 바르려고 하는데 불현듯 처음으로 아버지의 머리를 염색해 드리던 날이 떠올랐다. 아버지의 목에 어깨 보를 두르고 숱도 적은 힘없는 머리칼을 조심스레 젖혀가며 약을 바르던 순간 나는 그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할머니의 흰 머리는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받아들였는데 아버지의 흰 머리는 나를 슬프게 했다.
“왜 그러고 섰어? 어서 해야지.” 아버지가 말씀하셨지만. 나는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허허 웃으시며 나를 재촉하시던 아버지의 얼굴에는 괜찮다는 위로가 담겨 있었다. 그 담담하고 체념한 듯한 표정이 가슴을 더 아프게 했다.
염색한 뒤 머리를 감고 수건으로 물기를 털어내신 뒤 거울을 보신 아버지는 “어떠냐, 십 년은 젊어진 것 같지?” 하며 환하게 웃으셨다. 내가 염색을 하는 나이가 되니 아버지의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버지의 웃음은 자식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며 자신의 노쇠함을 감추는 방식이었음을 이 나이가 들고서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날 이후로 흰머리는 내게 시간의 색이자 이별을 준비하는 마음의 색이 되었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해로하고 살아라’ 하시던 부모님의 덕담을 들으며 시집온 날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나도 백발을 감추려는 사람이 되었다.
이젠 딸들도 염색을 한다, 그러니 그만둘 때도 되었건만 나는 아직도 포기할 수가 없다. 오늘도 머릿결을 살살 가르고 제쳐가며 잘 섞인 검은 액체를 골고루 바른다. 겉모습을 다듬는 이 시간 동안 나는 인성과 품격의 성장을 위해 내면을 얼마나 가꾸어 왔는지 돌아본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일은 왜 이토록 어려운가.
염색한 머리를 헹궈 물기를 닦고 나니 한결 젊어진 머릿결에 잠시 마음이 놓인다. 염색하지 않아도 단정하게 빗은 흰머리가 비단처럼 고와 보이고 주름진 얼굴의 온화한 미소가 편안함을 주는 사람이 되었으면 참 좋겠다.
염색은 물들임이다. 머리카락뿐 아니라 내 삶 또한 포근하고 정감 있는 품격으로 물들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