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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협도 곽쥐
한가위를 지난 더위가 바람도 없이 기승을 피우는 날씨였다.
이날, 한나절이 좀 지나서 서울 장안을 휩쓸던 유별난 도둑(경사횡행희세절적) 곽지의는, 함거에 실려 이제 번화한 육주비전 거리를 돌아, 일률(사형)의 처형이 집행될 새남터로 향하는 길이었다.
거리에는 벌써부터 소문을 듣고 몰려온 군중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人山人海 (인산인해)의 의미: 사람이 산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었다는 뜻으로, 사람이 수없이 많이 모인 상태를 이르는 말.
세상에 짜하게 이름난 대도 곽지의를 한번만이라도 보려고 모여 든 사람들은 서로 앞을 다투어 목을 늘였다.
그나마 영문을 모르는 사람까지도, 도대체 무슨 구경이기에 이다지도 야단법석들인가 싶어 어리둥절하면서, 역시 군중들 틈을 비집고 끼어드는 것이었다.
野壇法席(야단법석)의 한자적 의미
아주 시끄럽고 떠들썩하다는 뜻인 '야단법석'은 한자로 野壇法席이다.
野壇法席이란 부처님의 법문을 듣기 위해 드넓은 들판에 단을 세우고 여러 사람이 앉을 수 있도록 마련한 자리를 뜻한다.
즉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없는 법당을 벗어나 넓은 공터에 단을 세우고 설법을 듣고자 함이다.
석가가 영취산에서 법화경(法華經)을 설법했을 때는 무려 3백만 명이나 모였다고 하니, 질서도 없고 시끌벅적하였을 것이다.
이에 따라 경황이 없고 요란스런 상태를 가리켜 비유적으로 쓰이던 말이 일반화되어 일상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저기 곽쥐 온다. 울지 마라!」하면 보채던 아이도 이내 울음을 그친다는 그다지도 떨치던 협도 곽지의, 이 곽지의를 항간에서는 흔히들 《곽쥐》라고 불렀다.
서울 장안 오부 중에서도 남촌 아랫대(하대)에 사는 빈민들에게 있어서는 곽쥐는 그야말로 고마운 신령님처럼 섬겨졌다.
끼니를 굶고 아침 죽거리가 엇는 집에는 의례 한방중이면 곽쥐가 바람처럼 나타나서 토방에 엽전 몇 닢 씩을 놓고 간다는 사실은 진작부터 널리 알려진 일로 젖먹이 아이까지도 곽쥐라면 모르지 않았다.
그 곽쥐가 오늘 형장에서 이슬로 사라지게 된다.
황소 한 마리가 끄는 달구지 함거 속에 갇힌 곽쥐는, 별로 슬퍼하거나, 괴로운 표정없이 아주 침착하고 태연스러웠다.
함거 앞에는 곽귀의 죄목을 크게 써붙인 방문을 치켜든 나졸이 앞장섰고, 둘레에는 군사와 사령이 따랐다.
상복사 검률 김인직은 그 뒤에 있었다.
군중의 눈길은 나졸이 치켜들고 가는 방문에 쏠렸다.
《여기 곽쥐라고 불리우는 곽지의 도둑놈은, 서울 장안에 있는 부자집이라면 빼놓지 않고, 그 곳간이나 다락의 자물쇠를 열고 스며들어 재물을 훔치되 몇몇해 동안에 훔쳐낸 도합이 놀랄지어라 구천 칠백 냥이 넘는도다. 이놈은 과연 곽쥐라고 할만큼 몸가짐이 날쌔어 바람처럼 날으듯이, 물처럼 스미듯이 소리없이 왔다가 자취없이 사라지니 그 흔적을 잡지 못하고 심지어 납짝한 쇠못하나로 어떠한 자물쇠라도 순식간에 벗기니 그 재간이 놀랍도다. 오늘날까지 도둑질을 하느라고 사람들을 상하지 않았음은 실로 기특하고 기기한 바이나, 너무도 엄청난 재물을 훔침으로써 민심을 흉흉케 하였으니, 그 죄 마땅히 대벽(대군 : 사형)에 당하다. 따라서, 만인의 본보기로 참형에 처하여 효수하노라》
이렇게 곽쥐의 죄상이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곽지의가 《곽쥐》로 불리우는 연유는 이름이 쉽게 와전된 까닭도 있겠다.
이 또한 방문에도 씌어 있듯이 소리없는 행동과 신통력에 가까운 놀라운 손재주로, 짤막한 쇠못만 가지고도 아무리 든든한 자물쇠일망정 순식간에 열어 젖혀 버리는, 그 재간에 대한 별명이기도 하였디.
곽지의는 포도청에서 밝힌바와 같이, 서울 오부 장안을 신출귀몰하면서 탐학한 양반의 재물만을 몰래 들어냈으되 도합 구천 칠백냥이나 되는 거액을 무엇에 써 버렸는지, 그 용도에 대해서만은, 아무리 혹독한 형신(고문)에도 끝끝내 토설하지 않았다.
神出鬼沒 (신출귀몰)의 의미: 귀신같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는 뜻으로, 그 움직임을 쉽게 알 수 없을 만큼 자유자재로 나타나고 사라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하지만 포도청으로서는 곽쥐가 그 훔친 재물을 어떻게 썼는지는 대강 짐작은 하고 있었다.
다만, 죄인 스스로 고음(증언)이 없이 함부로 추단을 할 도리는 없었다.
어느 학반댁에서, 혹은 아무개 호반 다락에서 얼마 재물을 훔쳤다는 자복은 피해자의 말과 조금도 틀림이 없었지만, 그것을 어쨌느냐는 추문에는 마치 갯가로 밀러난 대합조개 모양 다부지게 아물린 곽쥐의 입이 도무지 열리지 않았다.
피가 튀는 형장에도 무가내로 묵비였다.
그렇지만, 서울변두리 가난한 백성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장안의 누구나 곽쥐가 훔쳐낸 재물을 어떻게 없앴는지를 너무도 똑똑히 알고들 있었다.
이들 빈민촌 사람들은 곽쥐를 일러 《분왕 신령님》이라 우러러 받들었다.
분왕이란, 분양왕을 잘못 일컫는 말이다.
옛날, 중국 당나라 명장인 곽자의는, 안록산의 난을 평정하고 토번을 쳐서 많은 공을 세워 분양왕으로 봉함을 받았는데, 돈 많고 공명있고 팔자가 좋아 세상에서는 오복을 갖추어 지닌 아주 팔자가 좋은 사람을 가리켜 《곽분양 팔자》라 했다.
말하자면, 부귀공명을 겸비한 분양왕 곽자의 팔자와 같다는 뜻으로 쓰던 말이 이제끔 가난한 사람들을 남몰래 도와주는 사람이 다름아닌 곽지의 곽쥐이니, 곽자의 분양왕의 화신 일시 분명하다는 존경심으로 어느덧 곽쥐를 《분왕 신령님》으로 부르게 되었던 모양이다.
富貴功名 (부귀공명)의 의미: 재산이 많고 지위가 높으며 공을 세워 이름을 떨침.
사람들은 곽쥐의 모습을 한번도 본일이 없으면서도 그 음덕에 머리를 숙이고 입이 마르도록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사실상, 곽쥐는 제몸을 위해서라면 한푼일망정 허투로 쓰지 않았다.
뿐만아니라, 자기의 내일을 위해 단돈 한푼을 모아 둘 생각도 않고 살았다.
포도청에 잡혀 갇히고 나서, 곽쥐가 홀로 살고 있던 수구문 유축 초가집 단간방을 훑어본 군관들은 그 살림살이가 너무도 무욕 청빈한 사실에 오히려 놀라서, 아연할 따름이었다.
곽쥐의 집에는 무엇하나 볼만한 것이라곤 없었다.
솥, 무쇠납비, 사발, 대접에 숟가락 한 벌과, 그리고 북덕이불 하나… 이것이 곽쥐의 모든 전 재산이었다.
재물이 될만한 물건이거나 돈은 하나도 없었다.
그 숱한 전량 재물을 도둑질 했어도 자기로서는 무엇하나 욕심내어 차지하지 않은 곽쥐의 특별한 뜻에 포도청 군관들도 감탄하여 말문이 막혀 버렸다.
곽쥐 곽지의는 분양왕 곽자의와는 그 경우가 전연 다르지만, 장안 빈민들이 《분왕 신령님》으로 우러르는 까닭은 실로 이런데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곽쥐는 숨이 탁 막히도록 무지막지(無知莫知)한 추국에도 훔친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어 준 사실을 끝끝내 불지 않았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그런 사실을 자복하면 어떻든 재물을 얻어 쓴 빈민들도 의례 포도청에 잡혀와 신문을 당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면, 훔친 돈을 함부로 썼다는 죄목으로 그들도 논죄되리라.
그렇게 되면, 차라리 빈민들을 구제해주었다기보다는 재앙을 빈민들에게 들씌우는 노릇이 되는 것이다.
은혜가 도리어 원수로 바뀌는 결과가 되겠기에 고통을 참으면서 끝내 의리를 지켰다.
의적으로서 곽쥐가 장안 빈민들 사이에 인기가 대만하다는 사실을 짐작하는 포도청에서도 그러므로 곽쥐의 자복을 꼭 받으려고 형신에 형신을 거듭하지는 않았다.
만약, 기어이 곽쥐가 그 재물을 모두 장안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자백한다면 포도청으로서는 빈민들을 어떻든 한 번씩은 문초를 하지 않을수 없게 될 판이다.
그렇게 된다면, 포도청은 가뜩이나 백성들의 원혐을 받는 터에 더욱 빈민들까지도 원망을 퍼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곽쥐의 덕망을 마음깊이 새겨 기리게 될 것이 뻔했다.
포도대장이나 군관들로서는, 《자는 범에게 코침주기》와 같은 결과가 될까봐 그것을 은근히 두려워했다.
의적이라, 혹은 《분왕 신령님》이라 칭송하는 곽쥐의 인기를 그냥 눌러버리러면 곽쥐가 빈민들에게 훔친 재물을 나누어 준 일은 차라리 모른 채 묵살할밖에 없었다.
훔친 재물의 행방을 밝히지 못한 죄인을 그대로 처형 한다는 것은 포도청으로서도 꺼림직한 처분이지만,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추단을 내려야만 했던 것이다.
2. 새남터 가는 길에
곽쥐는 옥문을 나오기전에 몸을 씻고 새 옷을 갈아 입도록 허락받았다.
마지막 길을 깨끗하게 보내려는 자비심인가.
곽쥐는 코웃음치면서 그대로 했다.
함거 속에 갇히고도, 손과 발을 묶인 곽쥐는 실눈을 가느스럼히 뜨고 흔들리고 있었다.
달구지는 느릿느릿 굴러서, 그런대로 육주비전 거리를 중간 쯤이나 지났다.
길가에는 구경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겨우 행렬이 지나갈 정도였다.
『섰거라!』
형조검률 김 인직이 함거 뒤에서 영을 내렸다.
《흥, 사세구를 읊조리게 할 모양이로군》
팍쥐도 짐작이 갔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모인 지점에서 일단 죄수를 세워 놓고, 그로 하여금 세상을 하직하는 시가를 부르게 하는 관례가 언제부터인지 있었다.
『사세구를‥·』
검률 김 인직은, 곽쥐에게 영을 내리듯이 엄하게 말했다.
『없소이다』
검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곽쥐는 두 눈을 번쩍 뜨면서 내뱉듯이 대했다.
『그렇다면, 아직 짓지를 못했다는 말인고?』
김인직 검률은 너그럽게 말했으나, 적이 심기를 상한 어조로 되물었다.
『생각도 안했소이다』
『이승을 하직하려면 누구나 사세구를 남기는 법이어늘, 그대 어찌 이다지도 망녕되뇨. 일찌기 충신으로서 세월을 잘못 만나 역적의 억울한 누명을 쓰고 새남터 이슬로 사라진 분들도 훌륭히 사세구를 읊조렸거니. 그대 비록 흉한 도적이라 할지라도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의협남아로서, 어이 남겨둘 한줄 사연이 없을손가·‥』
『아직 빠르외다.』
곽쥐는 퉁명스레 내뱉듯 말했다.
『어인 말인고?』
『소인은 죽지 않겠소이다.』
『뭣이라고? 그 무슨 망녕된 소리뇨.』
『죽지 않으리다! 정녕 죽을 수 없소이다. 그러매, 사세구 따위가 어찌 당하리까.』
곽쥐는 이제 참수가 될 사람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을 만끔, 의기 늠렬하고 싱싱한 목소리로 태연히 말을 이었다.
『어서 갈길이나 재촉해 주시오!』
그는 다시금 눈을 내리감고 유유자적 하는 몰골이었다.
悠悠自適 (유유자적)의 의미: 속세를 떠나 아무 속박 없이 조용하고 편안하게 삶.
검률 김인직은 시쁜 표정으로, 하는 수 없다는 듯 영을 내렸다.
함거는 다시 움직였다.
곽쥐는 함거 속에서 조용히 흔들리면서, 그러나 가슴이 터지도록 자기가 자기에게 타이르듯이 외쳤다.
《나는 결코 죽지 않는다. 나는 어김없이 묶인 끈을 풀고 새남터에서 행방을 감추고 말 터이다. 그리고는 반드시 김승상(영의정 김좌근)네 비고를 감쪽같이 깨뜨려 보이겠다. 꺽정이(임거정)이도 손재주에 있어서는 따르지 못한다는 천상천하의 유독한 곽쥐 곽지의로서, 김좌근이 탐학한 뇌물을 쌓아 둔 비밀 곳간을 털지 못했대서야, 어찌 의협 남아라고 할 것인가 제 아무리 양국(서양)맹꽁이 자물쇠일지라도, 기어이 열어 보이겠다. 김승상이 특별히 구해서 비고에 채웠다는 그 맹꽁이 자물쇠를 곽쥐로서도 끝끝내 열지 못하고 별수없이 저승으로 가버렸다면, 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이겠느뇨. 지금 이대로 죽어선 결코 안된다. 꼭 그놈의 맹꽁이 자물쇠를 열고 죽더라도 죽어야 한다.》
오늘을 흘러간 석달 전, 첫 여름이 무르익어가는 그믐밤이었다.
암흑칠야의 괴괴한 삼경 바람처럼 달려와서 역시 바람결인 양 날렵하게 높은 담벼락을 홀랑 뛰어 넘은 곽쥐, 쥐새끼 걸음걸이로 소리없이 당대의 세도가인 영의정 김좌근의 장동 사저 안채 비밀창고로 다짜고짜 덤벼들었다.
이 곳간에는 소문대로라면 금은보화(金銀寶貨)가 가득할 것이다.
곽쥐의 눈은 어두울수록 오히려 더 빛났다.
쥐의 눈과 같았다.
창고에는 굉장히 다부진 자물쇠로 잠겨져 있다고 했다.
과연 처음 보는 맹꽁이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참으로 훌륭하게 만들어진 자물쇠였다.
곽쥐는 냉큼 그 맹꽁이 자물쇠를 매만지면서 감탄해 마지 않았다.
근래에 웬만한 곳간이나 다락을 자기집 드나들 듯이 횡행하는 절적이 있어 간담이 서늘해진 부민 양반집에서들은, 다투어 튼튼한 자물쇠를 구하게 되었거니와, 하물며 승상 김좌근 같은 재보를 지닌 집은 특별히 유의하여 만든 양국 맹꽁이 자물쇠를 잠그지 않고는 마음을 놓지 못했다.
때문에 김좌근 정승은 《어떠한 도둑일지라도 열쇠를 갖지 못하고는 절대로 열 수 없다.》는 다짐을 받고 양국의 맹꽁이 자물쇠를 맞추어 비밀 곳간에 채우게 되었다.
맹꽁이 자물쇠라고는 하지만, 서양에서 만든 자물쇠를 사들인 것은 아니고 그저 서양에서 새로 들여온 강철로써 특별히 견고하고 묘하게 공인이 만들어낸 신식 자물쇠였다.
《과연 잘 만들었군. 웬만해서는 꿈쩍도 않아, 어지간히 열기 힘들겠군.》
곽쥐는 자기 나름으로 만든 특수한 쇠못을 열쇠구멍에 꽂고서, 서너 번 비틀어 보고는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다른 예사 자물쇠 같으면야 서너번까지도 비틀 것 없이 쇠못을 구멍에 집어 끼우기가 무섭게 짤가당! 자물쇠가 제풀로 열려지게 마련이건만, 과연 이 맹꽁이 자물쇠만은 도무지 손끝으로 아무런 느낌도 전해 오지를 않았다.
강철로 만들었으니 쟁기가 없이는 깨뜰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
이런 자물쇠는 어디까지나 재간으로 벗기는 도리 밖엔 없었다.
《절대로 안 열릴 리가 없으렷다! 양국 강철이라야 한껏 견고하달 뿐이지, 열쇠 얼개 짜임새까지도 다를 수는 없는 법이다. 이 따위 맹꽁이 자물쇠 쫌을 열지 못한데서야 어찌 곽지의 곽지가 이란 대도로 으뜸이 될수 있단 말인가.》
오밤중 냉기가 어지간히 싸늘하건만 곽쥐는 이마에 비지땀을 흘리면서 일심전력으로 쇠못을 가누어댔다.
이 쇠못은 곽쥐가 스스로의 슬기와 온갖 정성을 기울여 만든 만능 열쇠로서 굳지도 않고 무르지도 않고 알맞은 강도를 지녀, 자물쇠를 열기에 안성마춤인 쇠못이었다.
곽쥐는 맹꽁이 자물쇠를 열기에 재주를 다했다.
이를 악물고 서너번째 쇠못을 비틀면, 웬만한 자물쇠는 짤가당 소리를 내고 열리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번 자물쇠는 도무지 손끝에 느낌조차 전해 오지를 않았다.
『응야, 응호, 이놈은 정말 다부질세』
도대체 걸리지를 않는 것이다.
《이렇게 찔러도 안 걸리지. 그럼, 요쪽으로 저렇게 비틀고, 여기를 눌러서 응흐! 이래도 안되다니….》
곽쥐는 손등으로 이마의 구슬땀을 쓱쓱 문질렀다.
주위는 물속처럼 고요했다.
이렇게 적요할수록, 쇠못을 조심스럽게 움직이지 않으면 소리가 퍼져서 들킬 우려가 있다.
이런 조심성에도 상당한 신경이 쓰인다.
《내가 세상에서 으뜸 꼽히는 대도로서 후세에까지 이름을 떨치게 되고 못되고는, 모름지기 이 맹꽁이 자물쇠를 여느냐 못 어느냐에 결판이 달려있으렷다. 양짓골 몽태는 분명히 말했것다.아무렴! 곽쥐 곽쥐의는 지금까지 숱한 곳간을 털었다는 걸 뉘 모를까. 놀라운 재주에 나는 머리를 숙이네만 말일세. 오늘날까지 열어 낸 자물쇠로 말하면 노리개 같이 우스광스러운 장난감이나 진배 없으리로세. 아무리 분왕이라는 곽쥐이기로소니, 장동 재상댁 비밀 곳간 맹꽁이 자물쇠만은 어림도 없을 것 이니라고 했것다.》
곽쥐는 맹꽁이 자물쇠에 매달려 온갖 비술을 다 쓰면서, 양짓골 녀석이 하던 말을 되뇌어 보는 것이다.
4. 양짓 골 몽태
양짓골 몽태는 이제는 손끝이 무뎌져서 직접일은 못하지만 앞이 열놈이나 졸개를 거느리고 그 훔친 재물로 우쭐거리고 행세하는 두목녀석이었다.
곽쥐는 외톨백이 협도로 다만 동사끼리의 의리라는 것을 생각해서 가끔 양짓골 몽태집으로 놀러가기는 하지만 무엇을 들고 가는 법은 한번도 없었다.
《그녀석한테 갔다줄 재물이 있으면 비록 한푼이라도 끼니를 굶주리는 빈민들에게나 나누워 주리라.》
곽쥐는 이런 뱃짱이기에 몽태와는 이십년이나 터울이 지는 연배지만 팽팽하게 터놓고 지내려했으며 몽태로서도 곽쥐의 건방진 태도가 속으론 달갑지 않았으나 그의 신묘한 재주에 눌러서 그런 아니꼬운 터수를 눈감아주고 지내왔었다.
그러나 젊은 졸개들은 여간 못마땅한게 아니여서 『두목 곽쥐녀석을 어째 내버려두슈, 그냥 두고보자니 눈꼴이 사나워서···. 그녀석 좀더 있으면 정말 이라도 된듯이 아니꼽게 댕구(의 결말)를 펑펑 터뜨릴테니···. 일찍감치 끝장을 내버립시다.』
『그래도 곽쥐는 너희들 따위와는 물건이 다르니라, 한번에 오백냥이나 되는 엽전을 마치 제것인냥 의젓하게 빼오지 않어. 재주있고 통크고 늠름한 폼이 너희들관 판이 다르니라. 너희도 곽쥐에게 배워야한다.』
몽태두목은 일수 곽쥐를 두둔했다.
곽쥐가 자기 졸개가 되어준다면 하고 못내 아쉬움을 느끼는, 거추장스럽지만 그런대로 아끼는 보배와 같았다.
때문에 몽태두목은 곽쥐가 건방지게 굴어도 좀처럼 화를 내지 않았지만 졸개들은 무가내였다.
『여하튼 두목! 녀석이 우리집에만은 못오게 하슈』
『왜』
『녀석이 집에 오면 아주머니가·‥』 말끝을 맺지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두목의 안색이 변했기 때문이다.
하기야 말하지 않아도 두목은 너무도 깡그리 잘 알고있는 사실이었다.
몽태의 아내 부용은 스물하나의 젊은 계집이다.
예쁘장하게 생긴 모습에 매끈하게 풍염한 몸매는 쉰살의 중늙은이 도둑놈의 첩으론 좀 아까운 계집이었다.
부용은 원래 백정의 딸로 태어난 저주스련 운명을 가눌길 없어 어렸을 때부터 도벽이 생겨 열일곱살 때에는 어느덧 몽태일당에 끼게 되었다.
부용은 여간 남자 못지않게 도둑질솜씨가 비상했었다.
열아홉살 봄에 몽태 두목에게 강제로 몸을 망치고 그냥 늙은 두목품에 안기긴 했지만 진정 싫은 노릇을 할수없이 살아오고 있었다.
이럴무렵 곽쥐를 처음 보고 그만 마음이 온통 쏠렸으니 부용이 곽쥐를 사모하는 마음은 날이 갈수록 굳어갔다.
오늘쯤 곽쥐가 찾아올 성 싶은 날이면 부용은 공연히 마음이 들떴으며 그녀의 화장은 정성이 깃들고 한결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한번은 몽태가 없을때 마침 곽쥐가 찾아와서 부용이 안방으로 곽쥐를 끌어들여 정을 쏟으며 매달리는 광경을 졸개들에게 들킨 일이 있었다.
곽쥐도 부용이 너무 좋았다.
그렇게 될수만 있다면 부용을 아주 자기 아내로 삼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그늘에서 꽃필 뿐이었다.
몽태도 이런 기미를 전연 모르는 바는 아니었기에 다른 문제와는 달리 제계집의 일로 꼬집히고 보니 그 역시 약한 사내일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날 곽쥐가 찾아왔을 때 얘기끝에 몽태는 슬그머니 이런 말을 했다.
『정말 자네는 훌륭하네, 탐학한 양반놈들을 털어서 한푼도 사사로히 쓰지 않고 빈민들을 위해 뿌리니 이야말로 우리 도씨의 정도요 귀감이네. 하지만 그쯤으론 아직은 세상에서 으뜸가는 대도는 못되네』
『............』
『장동 호랑이 김정승이 요새 새로 맹꽁이 자물쇠를 장만해서 비밀곳간에 채웠다는데, 제아무리 곽쥐라도 이것만은 열지 못할꺼라고 큰 소리치더라는 소문이 났더군』
『그까짓 한번 해보겠소.』
『과연 곽쥐답군. 두목깜으로 받들어 모셔야겠지만 그것만은 김정승댁 맹꽁이 자물쇠를 열고 털고난 후로 미루겠네』
『실수없이 해치우면 그땐 나를 으뜸가는 대도로 모시겠단 말이군』
『이르다뿐이오. 이 몽태 당장 임자 졸개가 되겠네』
『틀림없소? 몽태영감』
『아무렴 내 졸개들도 함께 맏기겠네』
『그뿐이오?』
곽쥐의 눈길이 술쩍 안방쪽을 돌아보았다.
몽태의 눈치도 잽쌌다.
『부용이도 어김없이 자네차지네』
『좋소. 두말않기요』
곽쥐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 눈망울이 유달리 빛나면서.
『언제쯤?』
『오늘밤 삼경』
『내일 아침엔 좌우 포청에서 쏟아져 나오는 관에 장안이 떠들썩하겠군. 자네가 이번에 맹꽁이 자물쇠까지 열어젖히면 제아무리 일국의 영상이라도 울상이 되겠군. 그 꼴을 구경하자니 지금부티 신바람이 나는군』
『뭘 그까짓걸 가지고…… 탐학한 앙반놈들 울상을 보느니, 차라리 수구문밖 빈민촌으로 나와서 가난한 그 사람들이 기뻐하는 모양을 보구려』
-그날 곽쥐는 몽태뿐아니라 부용이 엿듣는 자리에서 호언장담했다.
豪言壯談 (호언장담)의 의미: 호기롭고 자신 있게 말함. 또는 그 말.
무엇보다도 그 푹신하고 말랑한 예쁜 부용을 마음놓고 품을 수 있다는 조건이 곽쥐의 마음을 불태웠다.
때문에 곽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어이 맹꽁이 자물쇠를 깨뜨려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5. 함정의 뒤안길
열리지 않을리가 없으렸다.
이럴수가 있단말인가.
맹꽁이 자물쇠란 이쪽이 꼬부라져서 여기서 걸리면, 요렇게 찌르고 요렇게 비틀어서 살짝 낚아채면 잘가닥 열리게 마련인데…
곽쥐는 오늘밤 이 맹꽁이 자물쇠를 기어이 열어야만 했다.
그러나 김좌근영의정이 아낌없는 공전을 내놓고 공인으로 하여금 온갖 재주와 솜씨, 정성을 기울여 만든 이 양국 맹꽁이 자물쇠는 좀처럼 열릴 가망이 전혀 없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손끝이 전해와야 할 반응이 도무지 없었다.
곽쥐로선 자물쇠라는 자물쇠는 어떤 것이든 그 얼개의 됨됨이를 훤히 알고있다고 자신했었다.
아무리 양국맹꽁이 자물쇠라도 사람이 만들었음엔 틀림없으려니 이치에 어긋나는 얼개란 있을 수 없어..
곽쥐는 필사적이었다.
온갖 기술을 다해서 목숨과 진배없는 쇠못을 열쇠구멍에 꽂고 요리조리 가눔질했다.
잘까닥!
비로소 반응이 나타났다.
첫번째 열림쇠가 풀린 것이다.
(옳지)
곽쥐는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첫번째 열림쇠가 풀렸으니 이 맹꽁이자물쇠를 여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곽쥐는 다시금 손 끝에 온 정신을 모아 쇠못을 가누었다.
일초, 이초, 삼초···바야흐로 마지막 열림쇠가 쩔거덩소리도 요란하게 열리려는 찰나-.
탁!
등뒤의 어둠속에서 무엇인가 날라와서 곳깐 문짝에 부딛쳐 박살이 났다.
달걀이었다.
그 달걀은 깨지면서 동시에 희뿌연 가루를 퍼뜨렸다.
곽쥐는 창졸간에 그 희뿌연 가루를 얼굴에 뒤집어썼다.
그 순간 매콤한 냄새가 코를 찔러 콧구멍이 간질간질하더니, 재채기를 쏟았다.
그 바람에 가루가 눈으로 스며들었다.
『어이쿠』
곽쥐는 아찔했다.
그것은 고춧가루와 재를 섞은 실명소였다.
아차 실수로다!
황급히 맹꽁이 자물쇠에서 손을 데면서 쇠못을 벽 틈사이에 끼웠다.
그때 연거푸 여남은 개의 달걀이 날아들면서 깨어지는대로 가루가 곽쥐를 휩쌌다.
『곽쥐도적 오라를 받아라』
마치 벼락치듯한 고함소리가 울리면서 손에 손에 횃불을 치켜든 포도청 군사가 개미떼처럼 몰려들었다.
곽쥐는 눈을 뜨지못하면서도 본능적으로 몸을 날렸으니 이미 때는 늦었다.
어느결에 겹겹이 둘러싸여서 이대로 결박을 당하고 말았다-.
곽쥐같이 날렵한 광적을 사로잡자면 이렇게 갑짜기 떼를 지어 덮치지 않고서는 도리가 없음을 알고 있었기에 포도대장은 어둠속에 군사들을 잠복시켜놓고 곽쥐가 자물쇠를 열기에 골몰할 때까지 기다렸던 것이다.
계략에 속았구나
포도청 군사들에게 엎치고 덮치면서 곽쥐는 이를 갈며 분해했다.
양짓골 몽태놈 짓이군. 놈이 나를 함정에 몰아넣을 심뽀인줄은 몰랐구나
몽태가 밀고하지 않았다면 오늘밤, 이시각에 포도청 군사들이 여기와서 숨어있을 까닭이 없었다.
더구나 만반의 준비까지 갖추고-.
곽쥐는 몽태의 신의없는 능글맞은 상판에 침을 뱉어주리라 별렀다.
6. 신념
곽쥐는 흔들리는 함거속에서 눈을 감고 그날밤의 일을 돌이켜보고는 구역질이 날만큼 역거워졌다.
몽태야 네놈은 나를 속여 배반했지만 나는 포도청에서의 무서운 고신(고문)에도 동사의 의리로 너를 팔진 않았다. 이놈 두고보자. 내가 죽을즐 알고. 나는 새남터에서 막바지에 발승술로 몸을 빼어 달아나리라. 그리하여 이번에야말로 실수없이 김좌근 승상이 자랑삼는 맹꽁이 자물쇠를 열고 비밀곳간을 몽땅 털어, 너와 나의 언약을 반드시 지키고 나서 죽어도 죽겠다. 너한테 할말을 할 자신이 있어서 네놈의 그 흉측한 행적을 고하지 않았느니라.
함거 달구지는 어느덧 장통교를 건너서 황토마루도 지나고 이제 모전다리로 해서 구리개에 다다랐다.
장동 김좌근 정승집앞을 지날 때는 정승택 사내종놈이 쫓아와서 함거속의 곽쥐한테 볶은 콩을 뿌리면서 『쉬이! 마귀야 가거라! 쉬이!』했다.
흉악한 도둑놈이니 넋까지 쫓아버리자는 수작인가.
곽쥐는 한쪽 눈을 지긋이 뜨고 종놈의 그런 꼴을 보면서 『그 콩일랑 맹꽁이 자물쇠 곳간 앞에나 뿌려두거라. 오늘밤엔 틀림없이 곳간을 털테니 미리 잡귀신이나 쫓게시리·‥…』
이렇게 종놈을 향해, 소리 질렀다.
그러나 곽쥐의 호통은 누구에게나 미친놈의 죽기전 발악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도대체 말이나 될법한가. 함거에 갇혀서 이제 새남터에 닿으면 지체없이 망나니의 한칼에 모가지가 썽둥 달아날 죄인이, 오늘밤 곳간을 털겠다니…….
하지만 곽쥐는 꼭 새남토에서 탈출해서 오늘밤으로 반드시 김좌근 정승댁 맹꽁이 자물쇠를 열고야 말겠다는 신념이 용솟음쳤다.
맹꽁이 자물쇠를 깨뜨려 보이겠다는 언약은 비단 몽태에게만의 약속은 전혀 아니다.
서린방옥에 있는 여러 사람들한테도 장담을 했느니라.
어김없이 발승술로 몸을 빼쳐 죽지않겠다고. 이 곽쥐의 멋진 발승술을 똑똑히 겪어본 그 친구들의 놀란 꼴이라니‥·‥
발승술이란 팔다리를 묶은 포승줄을 몸을 움츠려 풀어헤치는 술법이다.
그는 어렸을 때 우연히 이 술도의 스승을 만나 익혀둔 명수이기도 했다.
곽쥐는 죄목이 결정되어 서린방 전옥서로 옮겨져 갇히면서 때문에 실랑이를 당한 일이 있었다.
덩이란 옥에 새로 감힌 죄수가 옥정(죄수좌상)에게 바쳐야되는 돈으로 이 덩이를 못 내놓으면 죄수끼리도 무척 하대를 받게되니 요즘의 과 비슷했던 모양이다.
곽쥐는 그 덩이를 가지지 못했기에 다짜고짜 덤벼든 고참 죄수들한데 묶여서 대들보에 대롱대롱 매달렸었다.
그런데, 곽쥐는 어느결에 발승술로 포승을 풀어헤치고 의젓이 옥정 앞으로 걸어와 앉자, 모두들 눈이 휘둥그래 놀랐다.
『허어 희한한 놈이로세. 임잔 발승술을 아는 모양인데 여태 뭘해먹었누?』
옥정은 빙그레 웃으면서 물었다.
『그저 좀도둑 노릇이나 했소』
『기왕 도둑질을 할양이면 곽쥐처럼이나 하지』
『곽쥐가 그렇게 대단하오?』
『허어 건방진 놈이군. 생판 곽귀이름도 못들었구먼』
『이름이야 알지요. 옥정은 곽쥐를 만나 보았소』
『아직 못보았지만 듣자니 훌륭한 협도라드군』
곽쥐는 그만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옥정의 눈살이 날카롭게 비틀리면서 금방 후려칠 기세로 쏘아붙였다.
『왜 웃나?』
『고정하오. 실은 내가 곽쥐 곽지의요 그제서야 옥정의 얼굴이 풀리면서『그런걸 내 미쳐 몰랐구려.,..... 그럼 발승술도 하면서 어째 삼십육계를 놓지 않고 끌려왔소?』
곽쥐는 자기의 과거지사를 쭉 얘기했다.
과거지사의 자세한 의미: 이미 지나간 때의 일.
그러면서 『나는 새남터에서 망나니의 칼날이 떨어지기 직전에 발승술로 몸을 풀고 도망칠 작정이오』
옥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곽쥐의 발승술을 목격한 그로서는 넉넉히 곽쥐가 새남터에서 탈출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래서 오늘 마지막으로 옥에서 끌려나가는 곽쥐에게 옥정은 당부까지 했다.
『아무쪼록 뜻을 굽히지 마오. 당신뜻대로 성취하기를 천지신명께 빌겠소』
天地神明 (천지신명)의 의미: 천지의 조화를 주재하는 온갖 신령.
옥정은 새남터 막바지찰나에 묶인 포승을 풀어버릴 수 있다는 곽쥐의 끈덕진 신념을 애처롭게 여기면서도 한편 성공하기를 빌며 곽쥐를 떠나 보냈다.
7. 이마음 담긴 꽂을
달구지가 끄는 함거는 곽쥐의 이러한 가지가지 사연을 뿌리면서 이제는 새삼터 가까이에 당도하였다.
여기서도 곽쥐가 타고오는 함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몰려있었다.
달구지가 문득 서는 바람에 곽쥐는 번쩍 눈을 뜨면서 얼굴을 들었다.
늦더위에 함빡 땀이 흘러 갈증이 났다.
『나 물 좀 주시오!』
검률 김인직이 영을 내려 곽쥐에게 물을 주라고 하였다.
사령 하나가 길가 주막에서 샘물 한바가지를 철철 넘치게 떠다가 곽귀 입에 대주자 곽쥐는 그 물을 단숨에 들여 마셨다.
『이제야 정신이 드는군!』
그 소리를 듣고 옆에 있던 사령은 『금방 죽어 자빠질 놈이, 정신은···』
곽쥐는 그말에 그저 빙그레 웃을 따름이었다.
『곽쥐어른께 이 꽃을······』
그때, 군중속에서 튀어나온 젊은 아낙이 함거 곁으로 다가와서 곽쥐에게 하얀 목부용 한송이를 내밀었다.
『오오 부융······』
치마 저고리를 하얗게 차려입은 소복의 여인! 그는 부용이었다.
몸은 비록 몽태에게 얽매어 있으나 마음은 항상 곽쥐를 따르고 있는 순정의 여인 부용-. 그 부용이 제마음을 담은 목부용 하얀송이를 품고 이제 여기 새남터에서 마지막 가는 그리운 님을 위해 목부용과 아울러 마음을 영원히 바치려고 왔다.
부용의 눈매에는 이슬처럼 맑은 슬픔이 함초름히 맺혀서 소리없이 울고있었다.
의지의 사나이 곽쥐 곽지의도 정에는 여리어 목이 메었마.
그러나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초롱초롱한 빛 나는 눈동자로 부용을 보고 빙그레 웃어보였다.
곽쥐는 무엇인가 말하고 싶었다.
《아니 나는 안죽소. 그러매로 이별을 ?어할 까닭이 없소. 나는 반드시 결박을 풀고 다시금 김좌근정승 비밀곳간으로 달려가 기어이 맹꽁이 자물쇠를 열고 말겠소. 몽태와 언약한 대로 으뜸대도가 되고 몽태를 졸개로 거느리면서, 정말로 부용! 당신을 아내로 맞아 품에서 놓지않겠소. 결코 이별이 아니오. 잠깐만 기다려주오. 오, 부용 부용!
그러나 부용은 곽쥐의 이런 마음속 외침을 전혀 알수가 없었다.
곽쥐는 마냥 안타까웠다.
8. 생시련가 꿈이련가
이욱고 우거진 수풀속 형장을 향해 함거는 들어섰다.
사람들은 형장가까이까지 쫓아와서 의적 곽쥐의 마지막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령 여섯사람이 함거에서 곽쥐를 끌어내어 한복판에 막힌 말뚝아래 꿇어앉히고 손 발 허리를 꼼짝못하게 결박지어 놓았다.
이제 망나니가 시퍼런 장검을 휘두르면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망난이의 자세한 의미: 참수형을 집행하는 사람. 살인이라는 부담스러운 일을 맡고 있는 상당히 특수한 직업이다.
망난이 춤은 사람을 베기 전에 귀신을 불러 고하는 전례였다.
이와 동시에 향타바깥에 모여있던 구경꾼이 지르는 아우성소리가 마치 해소인양 은은하게 곽쥐의 귓전으로 스며들었다.
곽쥐는 될 수 있는대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신을 차분하게 가다듬으며 당황하지 말지어다.
침착하게 최후가 닥아온 순간 몸을 빼쳐야 되느니라.
끝내 신념을 지니고 여기 이르러서도 결코 낙심하지 않았다.
기회는 한순간에 온다고 믿었다.
어느덧 저녁해가 한가람(한강) 물결위에 넘실거리며 반짝반짝 무늬를 일으키고 있었다.
『해가 멀어지기전에 어서……』
검률 김인직이 사령에게 영을 내리자.
사령은 망나니에게 전했다.
사령의 팔이 후들려지자.
망나니는 여전히 칼을 들어 춤을 추면서, 빙글빙글 곽쥐주위를 싸고 돌았다.
『어흐허, 어이흐허, 호허이야…‥·』
텁텁한 목소리로 영문모를 소리를 곡조를 붙여가며 불렀다.
이런소리가 나오면 언제 어떻게, 치는지 모르게 번개처럼 망나니의 칼이 내려온다.
침착하게, 서둘지 말고‥·‥
곽쥐는 스스로에게 타일렀다.
저바깥 맨 앞에, 하얗게 소복입은 부용의 손모아 비는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
곽쥐는 무엇보다 저 부용을 위해서라도 꼭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우호어, 우우호··…·헛!』
망나니의 소름끼치는 곡조와 함께 망나니의 칼이 번쩍하며 날랐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찰나의 일이었다.
『우욱』
곽쥐의 몸뚱이가 말뚝위로 솟구쳤다.
몸을 움츠리고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던 팍쥐의 발승술이 성공한 것이다.
곽쥐는 말뚝에서 벗어나자, 잠깐 땅위에 머물러섰다.
바다와 같은 함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곽쥐는 날렵하게 몸을 움직여 망나니에게 달려들어 칼을 뺏어 단칼에 베어버리고는 그대로 쏜살같이 수풀속을 빠져나갔다.
소란한 소리가 등뒤에서 들려왔다.
한가람은 그다지 머지않았다.
곽쥐는 기슭에 이르러 뒤쫓아온 사령군관 놈들을 망나니칼로 쫓고 풍덩! 푸른 물속으로 깊숙히 파고들었다.
곽쥐는 물속깊이 숨었다가 숨을 쉬기 위해 떠올랐다하면서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살았다. 이젠 김정승집으로!)
어둠을 타고 기슭에 닿은 곽쥐는 냉큼 평지로 올라오자, 부리낳게 장동으로 달렸다.
김정승댁 담밑에 다다랐을 무렵엔 이미 캄캄한 밤이여서 훌렁 담을 넘자.
비밀곳간으로 내달았다.
아무도 없이 쥐 죽은 듯이 너무나 고요했다.
곽쥐는 전에 여기서 잡힐 때 식못을 감춰둔 벽틈을 더듬어서 쇠못을 찾았다.
쇠못은 그 자리에 그대로 박혀있었다.
그 쇠못을 찾아든 곽쥐는 미친듯이 맹꽁이 자물쇠와 대결했다.
열쇠구멍에 쇠못을 끼우고 손끝을 움직였다.
몇번 가누어서 짤가당!
첫번째 열쇠가 열렸다.
비술로 가눔질을 계속했다.
쩔그렁!
묵직한 소리와 함께 드디어 맹꽁이자물쇠는 열리고야 말았다.
열었노라! 곽쥐는 눈물이 쏟아질 만큼 큰 희열을 느꼈다.
나는 으뜸 대도가 되었도다. 나를 배반한 몽태놈도 내 졸개가 됐느리라. 부용은 내 아낙 오오 부용!)
곽쥐는 떨리는 손으로 자물통을 꼰아잡고 쭉 눌러 뽑았다.
어김없이 쑥 뽑혀 늘어졌다.
『열렸노라! 드디어‥·으뜸 대도--』라고 외치려다가 곽쥐의 목은 뎅겅 잘리우고 말았다.
핏줄기가 솟구쳤다.
두번째로 비스듬히 선을 긋고 날아간 망나니의 장검이 아주 곽쥐의 모가지와 몸뚱이를 바로바로 갈라놓았고 그와 동시에 곽쥐가 입술에 물고있던 흰빛 목부용 꽂송이가 핏물에 빨갛게 물들며 땅에 떨어졌다.
이제 마지막 넘어가는 저녁해가 붉은 노을의 여광을 남기고 관악산넘어로 사라졌다.
놀빛에 비낀 곽쥐의 얼굴은 피빛이었다.
저쪽 울밖에서는 언제까지나 천지신명(天地神明)께 곽쥐의 넋을 비는 나지막한 여인의 울음섞인 목소리가 가늘게 퍼져나갔다.
그 맹꽁이 자물쇠를 기어이 열었노라고 믿고 죽어갔는지.
곽쥐의 얼굴에는 이윽고 아련한 미소가 어리고 목부용 꽃송이가 그옆에 쓸쓸히 놓여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