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민족과 평화
바보새 함석헌
현실의 모습
한민족과 평화라는 문제를 주고 글을 써 보라는 부탁을 받아, 한 달을 두고 생각을 했는데도 좀처럼 실마리가 잡히질 않았다. 밥을 먹으면서도 생각, 길을 가면서도 생각인데 그래도 잡히는 것이 없으니, 아, 내가 정말 늙었구나! 심사가 좋지 않아, 스스로 나를 달래려고 앉았는데 갑자기 전화가 왔다. 건국대학 안에 여러 대학 학생들이 몰려 벌써 며칠째 농성 투쟁을 벌이고 있는데, 그것을 해산시키려 수천 명의 군경대가 투입됐고 헬리콥터까지 뜨고 있다는 소식을 알려 주었다. 붓을 놓고 어찌 그럴 수가 있을까 혼잣소리를 하며 붓을 놓고 앉았노라니, 이번에는 학생들이 굶은 지가 여러 날 되어 안으로부터 먹을 것을 좀 넣어 달라는 소리도 나왔고 또 부형들이 음식을 가지고 간 것도 있어 들이게 해달라고 요청도 했는데 군경들의 태도가 아주 강경해 절대로 허락할 수 없단다고 하는 소식이 이어 왔다. 그뿐 아니라 물길까지도 아주 끊어 버렸다고 했다.
그것을 듣고, 그게 무슨 소리야 하며 목구멍에서 치밀어 올라오는 것이 있는데 또 전화가 왔다. 수화기를 들으니 이번에는 담당 기관원이 아닌가? (소위 우리들 반체제 인사라는 사람들에게는 기관들로부터 담당이라는 직원이 각각 있어서 이따금씩 찾아오는 일이 있다.) 긴 세월이 가는 동안, 법은 멀고 인정은 가까워, 나는 그들과도 친구로 알고 지내는데, 그의 음성을 듣는 순간 내 감정은 자동적으로 폭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화풀이를 하였는데 그때 나는 내 속에서 다른 음성을 들었다.
네 원수를 사랑해라!
너를 대적하는 자를 위해 기도해라!
그 다음 날이 원고 마감날이라, 이젠 다 틀렸다고 생각하면서, 잡지사에는 무슨 말을 할까 생각하고 있는데 편집부 여직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차라리 아니 쓰게 됐으면 하는 생각을 하면서 “약속을 못 지켜 죄송해요“ 했더니 그는 주저하지도 않고 ”이삼일 연기해 드려요“ 했다. 아뭇소리도 못하고 그대로 승낙할 수밖에 .
이제 놨던 붓을 다시 들고 무거운 마음으로 책상 앞에 앉으면서, 나는 병자호란 때에 나라의 재상 노릇을 했던 최명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싸움에는 지고 임금 이하 모든 신하가 다 남한산성을 농성을 하고 있을 때 이제는 양식도 다 떨어지고, 하는 수 없이 전날에 오랑캐라고 업신여겼던 청나라 군대 앞에 나가 항복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그항서를 누가 쓸까, 옥신각신 말이 많다가 도저히 아니 쓸 수는 없고 쓰기는 해야 하므로, 그때 누구누구였던지 이름은 모르나 몇이서 글을 지어 썼다는 것인데 반대파 강경론자들은 죽으면 죽었지 어찌 항복을 할 수 있느냐 하면서 그 초고해 놓은 항서를 잡아 당겨 모두 찢어 버렸다. 그랬더니 최명길이 그 찢어진 조각들을 하나씩 다시 모아 붙여 놓으면서, “쓰는 이는 없어서는 아니되고, 찢는 이도 없어서는 아니되며, 다시 모아 붙이는 이도 없어서는 아니된다“고 탄식을 했다는 것이다. 역사란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왜냐? 삶 그 자체가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감정만으로 안되고, 이성만으로도 안 되고, 불덩이같은 치욕도 꿀꺽 참아 삼켜넣는 참음도 있어야 한다. 생명이란 것이 어찌 그러냐? 네가 항의를 한데도 별 수 없고, 분신 자살을 해도 별 수 없다. 믿음으로 하는 복종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복종이 아니라, 절대자에 대해서 하는 복종이다.
1 평화의 뜻
평화란 말을 한문으로 平和라 쓴다. 平자는 본래는 평 이렇게 썼는데 그것은 亏과 八 두자를 합한 것이다. 亏는 기운이 땅에서 올라와서 퍼져 나가는 것을 그린 것이요, 八자는 여덟이라는 글자인데, 여덟은 잘 갈라지는 수다. 여덟을 갈라 넷이 되고 넷을 갈라 둘, 둘을 갈라 하나가 되듯, 平자는 골고루 갈라놓아서 많고 적고가 없도록 고르게 한다는 말이다.
和자는 본래는 龢 라 썼는데 음악에서 여러 가지 소리를 골고루 잘 조화 되도록 낸다는 뜻이다. 후에 오다가 그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가 고르게 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되면서 龠(이것은 피리를 그린 것) 대신 사람을 표시하는 口(입 구)로 바꾸게 됐다. 음악에서 화음(和音)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또 한 사람이 노래를 하면 그것을 듣고 이쪽에서도 맞부는 것을 화답(和答)이라 한다.
그것을 한데 붙여서 생각한다면 사람과 사람 사이, 집과 집, 단체와 단체 사이, 나중에는 나라와 나라 사이, 하늘과 땅 사이를 고르게 하는 것이 평화다. 그렇지만 그중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나라와 나라 사이에 전쟁을 하지 않도록 하자는 일이다.
옛날 공자(孔子)는 대학에서 할 공부를 세 가지로 明明德(밝은 속 알을 밝힘), 親民(씨을 사랑함), 至治善(지극한 선에 머무름)이라 했고, 그것을 실지로 하는 순서를 格物(모든 것을 연구함, 혹은 나 자신을 바로 잡음), 致知(참지식을 얻음), 誠意 (뜻을 참되게 함), 正心(마음을 바르게 함), 修身(제 인격을 닦음), 齊家 (가정을 올바르게 함), 治國(나라를 다스림), 平天下(온세상을 고르게 함) 의 여덟 단계로 해서 사람의 개인적 전체적 최고의 의무가
평화 세계를 이룩하는 데 있음을 밝혔다. 나는 여섯 살부터 기독교교육 속에서 자라면서도, 최고의 문명에 이르렀노라 머리를 내젓는 오늘의 국가들을 보고야 예수가 하늘 나라를 선포했던 뜻이 무엇임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됐다.
그것을 다른 말로 바꾸어 한다면 이 국가란 것이, 이 정치란 것이 세상을 잘못 만들고 있단 말이다. 예수가 복음 전파를 하기 위해 나서려 할 때 사십 일 동안을 사탄에게 시험을 받앗다고 했는데 그 마지막 조목이 무엇이냐 하면, 천하 만국을 한순간에 보여주면서 이것이 다 내 권세 안에 있으니 내게 절만 하면 다 준다고 했다 하지 않나? 세상 권세를 다 내가 쥐고 있다는 것이, 정치가 최고라는 것이, 그래서 모든 인간을 그 권세 아래 두자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2. 민족의 비극
지금 우리 민족에게 가장 걱정스러운 큰 문제는, 새삼 말할 것도 없이, 남북으로 갈라져 두 나라가 됐다는 사실이다. 사천 년 넘는 역사를 가진 하나의 당당한 민족으로서, 한때나마 자유를 잃고 남의 식민지가 됐던 것도 부끄럽지만, 참말, 천우신조(天佑神助), 하늘이 돕고 하나님이 붙들어, 해방이 됐는데, 그것을 잘 받아 누리고 키우지는 못할망정 도적에게 뺏기고 둘이 서로 원수가 되어 욕지거리로 날을 보내면서, 뉘우쳐 다시 하나될 생각을 하지도 않고 있으니, 이런 죄스러운 일이 있을까? 사람은 동물이 아니요, 민족은 그저 무리지어 있는 짐승이 아니다. 생각에 살고, 뜻에 살며, 보람을 쌓고 의무를 다하는 것이 사람이다.
찬탁은 무엇이고 반탁은 무엇이냐? 도대체 탁이 무슨 탁이냐? 누구에게 무엇을 맡긴단 말인가? 아기는 나왔으면 제 어미가 젖을 먹이면 그만이다. 먹으면 크고, 크면 일어서고, 일어서면 사람이다. 스스로, 저절로, 사람 노릇 하는 것이 사람이다. 그런 것을 너희가 왜 간섭했단 말이냐? 그러나 도적 보고 네가 왜 도적질하느냐 물을 필요도 없다. 할 일은 그저 막는 거요 내쫓는 거다. 씨 전체가 하는 거다. 씨은 본래 제 할 일을 아는 거다. 중국 전국 시대 사백 년, 오백 년을 소위 정치한다는 놈들이 서로 휘두르고 돌아갔을 때 그것을 보고 안타까와했던 노자(老子)가 뭐라 했던지 아느냐.
聖人無常心, 以百姓心爲心
거룩하게 나신 이는 제 맘이란 것이 없고
씨알의 마음으로 제 마음을 삼는다.
당초 잘못은 씨알을 제쳐놓고 누가 시키지도, 청하는 것도 아닌 것을, 제가 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왔던 그 정치꾼들에 있었다. 그들은 씨알을 믿은 것도, 자기를 믿은 것도 아니요, 양키를, 로스케를 믿고 나온 것들이었다. 거기서부터 잘못이 시작된다.
그럼 어떻게 할까? 대답은 간단하다. 씨알을 못 살게 굴지 말고,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지 말고, 가만 두는 일이다. 평화에서 시작하잔 말이다. 정치한다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 남을 믿지 못할까? 본래 남을 못 믿는 것은 도둑이다. 내 속에 도둑질할 생각이 없는데 왜 남을 믿지 않겠나? 도둑놈은 남을 도둑하기 전에 자기 자신을 도둑해 버린다. 그러므로 눈을 바로 뜨지 못하고, 생각을 올바르게 하지 못한다. 마음이 제대로 있지 않고, 속이 편안하지 못한 법이다. 평안치 못한 속에서 지혜와 힘은 절대로 나오지 못한다. 힘, 남 속이고 뺏는 것이 힘이 아니고 사람 죽이는 것이 지혜 아니다. 참 힘은 내 생명 또 남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그 힘은 누가 주는 것도 아니요, 제가 내자 해서 내어지는 것도 아니다. 참 힘은 본래부터 주어진 것이다. 사람 노릇할 수 있는 힘, 그것을 믿지 않으면, 그것은 사람이 아니요 살인귀다, 그렇게 볼 때 현대의 대부분의 정치는 악마에게 붙잡힌 사람 아닌 사람들에게 나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나라 안에 평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이 민족은 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랑이 변하면 원수가 된다. 남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원수된 제 형제다. 형제가 서로 원수가 되면 그 집안은 망할 수밖에 길이 없지 않은가? 미움이 불타면 아무 것도 못한다. 그러기에 전쟁 잘 하던 나라는 다 망하지 않았는가? 그것을 모른다는 것은 말이 아니다. 죄를 지으면 죄의 종이 된다. 지금 우리 민족은 거의 전부가 미움의 종이 되버린 상태다. 시간을 다 그 불길 속에 던지지, 돈, 물질을 다 그곳에 던지지, 다른 데서 빚까지 내다가 그 원수 갚겠다는 미움의 불길 속에 던져 버리니, 문화고, 역사고 있을 여지가 없지 않은가? 미쳐 버리면 정신 잃고, 정신 잃으면 가족이고 친척이고 민족이고 나라고 없다. 아무 것도 없다. 아직 절망은 아니지만, 이대로만 간다면 어쩔 수 없이 그 절망에 빠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시급한 것이 평화다. 남북의 화해다.
유교의 옛날 가르침에 이런 말이 있다. 군자와 같이 있으면 마치 난초 꽃 있는 방에 들어간 것 같아, 처음에는 그 향기를 알다가 나중에는 그 향기를 모르게 되고, 소인과 같이 있으면 마치 썩어진 생선 가게에 들어간 것 같아, 처음에는 그 구린 냄새를 알지만 나중에는 그것을 모르게 된다. 왜냐? 거기 화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는 난초 방인가, 썩어진 생선 가게인가?
사람은 변[化]하는 것이다. 선 속에 있으면 선에 화하고, 악 속에 있으면 악에 화한다. 정치에서 소위 표어니 이데올로기니 하는 것은 무엇이냐? 그 안에 있는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 버리려고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 속이는 것이다. 지배주의자가 자기의 지배를 영구화시키기 위해 그럴듯한 말로 속이는 것이다. 도대체 오늘날 국가치고 지배주의 아닌 국가가 어디 있나? 그러나 말이나 제도의 힘은 한 때 있을 것이지, 결코 영구한 것은 아니다. 영구한 것은 오직 하나이니, 그것은 처음부터 주어진 것이요 누가 만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늘이 주신 양심이라 하지 않나?
3. 국가주의의 죄
인류의 역사를 처음부터 자세히 더듬어 볼 필요가 있다. 국가란 무엇인가? 어떻게 돼서 이루어졌으며, 그 속살은 무엇인가?
국가란 한문으로는 國家인데, 家는 집이란 뜻으로 처음에는 핏줄이 같은 것들이 모여 살다가 그것이 커져서 나라가 됐으므로 붙여 썼을 것이고, 國이 정말 그 뜻을 나타내는 것인데 옛날 글자의 뜻을 설명해 주는 [설문](說文)이란 책에 보면 나라를 표시하는 글자를 처음에는 㖪이라고 썼다 한다. 或은 지금은 혹시라도 하는, 무엇을 좀 걱정하는 뜻이 들어 있는 글자로 쓴다. 그래서 나라를 지키노라니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지나 않을까 하기 때문에 그 혹자를 쓰고 戈는 그 들고 지키는 쟁기를 말하는 것이고, 口는 입 구 자로 나라 안에 있는 사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도 하고, 혹은 그 땅을 표시하는 것이라고도 하며, 또 어떤 이는 그 아래 있는 一 이 땅을 나타내는 것이라고도 하는데, 어쨌거나 무기를 들고 지킨다는 뜻이다. 후에 와서 나라가 점점 커지게 되자 그 국경을 의미하는 테두리를 다시 크게 만들어 國으로 쓰게 됐다는 것이다. 우리말로는 나라인데 그 말뜻은 알 수 없다. 여러 십 년 전에 잠깐 신문에서 안재홍 씨가 그 어원을 나곧(自我)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말을 했던 것을 기억하지만 그밖에는 들은 것이 없다.
어쨌거나, 나는 國과 나라를 서로 구별해 쓰고 싶다. 나라는 그저 무리 지어 다니며 살던 때의 평화로 이루어진 단체를 말하는 것이고, 國은 몇이서 만들어 씨알 위에 가져다 씌운, 지배적인 정치를 해 가는 단체를 말하는 것으로, 거기는 무리가 들어 있는 것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저절로 된 자유로운 단체가 아니고 강제하는 단체다. 그래서 먼저 것을 사회적이라 한다면 후에 것은 정치적이다.
아마 그것은 역사에 따라 그렇게 변했을 것이다. 수가 적을 때는 서로 자유롭게 하면서도 하나되어 갈 수가 있지만, 수가 늘어나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그냥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나라 사람의 인구가 늘어가는 것만 아니라, 그 강요하는 무기를 쓰게 되는 데 다른 더 큰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물론 무슨 기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의 정신면을 살펴보는 데서, 아마 그렇지 않을까 하고 단정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어느 민족 어느 나라를 보아도 그 먼 옛적의 이야기는 다 신화 전설로 시작된다. 어떤 사람들은 눈에 뵈지 않는 것(形而上的)은 아주 부정해 버리려 하지만 그것은 사람 자신에 대한 캐어 들어감에 있어서 좀 잘못된 것이 있다. 공상이라 하거나, 망상이라 하거나,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이고, 생각은 할수록 자꾸 깊어 가고, 높아 가고, 늘어가서, 무한이라는 데까지 가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모든 사람이 다 소크리테스가 아니더라도 한 사람의 소크리테스가 나오면, 인간은 형이상의 세계를 가진 것이다. 사람은 개인이면서 전체요, 전체이면서 하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형이상의 세계에 들어가 보지 못했다 해서 형이상의 세계를 아예 부인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요 건방진 일이요 비과학적인 일이다.
신화 전설은 그때 그 사람들의 살림이다. 만일 진화에 있어서 인간은 어느 시기에는 잔나비와 비슷한 때가 있었다 하는 것이 인간에 대한 모욕도 아무것도 아니라면, 신화 전설의 시대를 역사의 시작으로 보아도 아무 잘못이 아닐 것이다. 단군 신화가 그대로 사실이라는 말이 아니라, 그것이 그때의 사실을 무엇인가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는 말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신화로 남아 있는 그 시대에 있어서는 소위 그들에게서(후대에서 말한다면) 성인이라 할 만한 인물들이 있어서, 일반으로 한다면 즘생의 지경을 채 벗지 못한 인간들을 불쌍히 여겨, 가르치고 지도했다는 것이다. 오늘의 지배욕을 가지는 정치인들 같지 않아, 초창이니 만큼 거기에는 높고, 낮고도 없고, 재배, 피지배도 없었다. 비가 많이 올때 어떻게 해서 홍수를 면하며, 가뭄이 심할 때 어떻게 해서 냇물을 끌어 올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었으며, 개개인으로 떨어져 있는 사람을 설득해 하나가 되어 큰 일을 하게 하니 어떻게 그들을 존경 아니할 수 있으며, 절을 하거나, 혓바닥을 내밀거나, 무엇으로든지, 고맙다는 표정을 하지 않았겠나? 그래서 무슨 “검() 하는 칭호가 아니 생겼겠나? 선에서 시작 아니된 악이 어디 있으며, 참에서 시작되지 않은 거짓이 어디 있겠나? 인간을 만든 것은 틀림없이 인간 이상인 이가 있어서 된 것이다. 노자는 “잘하는 선(善)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에게 그저 좋게 해주면서도 남이 다 싫다는 저 낮은 데로 내려간다...... 그저 다투는 법이 없다“ 했다. 그것이 곧 왕검(王儉) 아니겠나? 검은 , 곧 신이란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나라의 시작일 것인데, 세월이 흐르노라니 내 생각을 하는 것 아니고 백성의 마음을 제 마음으로 하는, 그런 어진 이는 나기 쉽지도 않지만, 그런 덕은 없으면서도 재주와 꾀는 있어 성인의 흉내를 내며 그 자리를 꾀로 뺏아 보려는 놈은 나기가 쉽다. 그래서 후대로 오면 올수록 임금이다. 영웅이다 하는 놈은 많아졌고, 글줄이나 읽고 지을 줄 아는 것들을 신하로 써서 제도를 갖추고 법을 만들어 씨의 자유를 구속하며, 나라를 지킨다 하면서 군사를 뽑아 제 집의 종으로 쓰게 됐다.
그래서 부족(部族) 정치였던 것이 봉건의 계급 정치로 되고, 유럽에서는 십팔 세기에 큰놈들이 민족이란 말을 내세워 봉건 군주들을 없애 버리고 아주 민족주의의 대국이 되게 됐다. 이것이 소위, 위하여 목숨을 바치면 호국의 영웅이라면서 대대적으로 전쟁을 하여 부귀를 누리던 민족 국가의 제왕들의 역사다.
그러나 자라는 것이 생명의 본 성격이요 확산돼 나가는 것이 정신이라, 마침내는 그 제국주의, 군국주의가 민중의 비판을 받는 날이 오고, 성명 없던 백성이 나라의 주인은 우리라 하는 날이 오게 됐다. 그것이 민주주의 아닌가? 무슨 영문인지 알지도 못하고 그저 영광의 조국을 위해서라니까 꾹 참고 답답한 참호 속에서 짐승처럼 딩굴던 군인도 번쩍이는 빛이 있어 영국과 독일의 졸병이 겨누던 총부리를 내리고 서로 건너다 보며 “야 너와 내가 왜 이래야 하지?” 했을 때 역사의 새 페이지는 넘어오게 됐다. 제1차 세계 대전 때의 이야기다.
마음은 자라는데, 그 마음의 표시로 인하여 만들었던 제도나 법은 자라지 못한다. 아기는 크는데 그 입은 옷은 못 자란다. 아무리 비싼 옷이라도 버티는 수밖에 없다. 본래 잘못 생각 아닌가? 옷이 아기를 위해 있지, 아기가 옷 위해 있는 것 아니듯이, 국가가 씨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어째 씨알이 국가를 위해 있다 하겠나? 씨알이 스스로 “이제 우리가 나라의 주인이다.“ 하는 이때에 왜 시대 착오의 국가를 위해 죽는 것이 영광이라고 할까?
실지로 작용 못하는 것이 우상이다. 우상에 찬란한 옷을 입히고 음악을 하며 거기 절하라 하는 것은 그러는 동안에 그 순진하고 깨지 못한 사람의 수고한 결과를 가로채며, 자기가 하기 싫은 고된 일을 시켜 먹기 위해하는 것 아닌가? 앞으로 나가는 것이 문명이지 뒤로 물러가는 것이 문명은 아니다, 이제 남, 북 모두가 시대에 떨어진 것임은 틀림 없다. 지금 씨알은 저를 스스로 알고 제 할 일이 무엇임을 아는 나라의 주인이지, 옛날 임금의 종노릇 하던 어리석은 백성이 아니다.
옛날에는 임금이 주인이요 백성은 그 종이어서 전쟁을 빌미로 나가서 싸워 죽으라면 죽었지만, 지금 이 씨은 눈이 하늘의 별처럼 또렷또렷 깨어서 무엇이 참이며 무엇이 거짓이며, 어느 것이 사는 길이오 어는 것이 죽는 길임을 다 안다. 그런데 그 씨알을 옛날같이 소경인줄 알고 뺏아 가도 모르고 죽는 데 넣어도 가만있는 줄 아니, 아, 참으로 슬퍼라. 그 옛날의 어리석었던 그 사람보다도 더 어리석고, 시대에 역행을 하려 하기 때문에 죄인들이다. 오늘날 이 세계가 이렇듯 어지러운 것은 고집스런 국가 지상주의의 자칭 정치인들이 그 옛날 잠이 아직 달콤한 듯 깨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4. 초국가주의
이제 우리 씨알의 할 일을 말해보자. 우리는 이 지배주의의 국가관을 벗어 버려야 한다. 오늘날 평화 소리가 높은 것은 무엇 때문이냐? 핵 전쟁이 일어날까 무서워서가 아니냐? 국가인 담에는 나라란 나라는 모두 다 잡아먹고 내 나라만이 남아야 한다는 것이 민족주의 국가, 제국주의 국가들의 믿어 오던 종교였고, 그 때문에 예로부터 있던 영원 무한의 참 생명을 믿어 오던 종교는 다 퇴색해 버리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 포악한 제국주의의 시녀로 떨어져 버리고 말아 인류는 허탈감에 빠졌는데, 이 강대국이라는 나라들의 하는 일이 무엇이냐 하면, 잔뜩 만들어 쌓아 놓은 핵폭탄을, 말로는 한 번 터지기만 하면 지구 위의 모든 생명을 다 태워 버린다 하면서 그것을 없애 버리지도 않고, 군비 축소 소리는 해 가면서 아주 영리하고 악질적인 전쟁을 하고 있다. 아주 꾀가 늘어 이제는 쏘지 않으면서 쏘는 방법을 쓰고 있다. 평화를 존중하는 체하면서 속을 꿰뚫어 본다면 사람을 오래오래 두고두고 죽어 가도록 한다. 터뜨리는 핵 무기는 한 번에 망하게 하지만, 둬두고 없애지도 않고 두고두고 심리적으로 쏘는 핵무기는 더 잔인한 것이다. 어째서 그런 악독 잔인한 일을 할까? 무엇을 믿고 그럴까? 소위 국가라는 것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최후까지 발악한다는 괴물이 뭘까? 이것, 이 국가란 것 아닐까? 제국주의는 변함 없는 제국주의인데 이제 변색을 한 것이라 인류를 최후까지 놓지 않고 아주 씨도 없이 하려고.......... 아, 문명이 이런 것일까?
우리는 그런 우상적인 국가주의를 초월해야 한다. 세계의 모든 씨알을 믿기만 한다면 그 간악하고 잔인한, 우리로 하여금 아파도 아프다는 소리를 못하고 죽어도 죽노라는 비명도 내지 못하게 하던, 그 큰 우상은 봄이 올 때의 눈사람처럼 스러질 것이다. 칼을 쓸 필요도 없다. 우리 스스로를 믿으면 태양이 따로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 스스로를 믿고 서로 사랑하면 그것이 곧 그 우상을 녹여 없어지게 하는 태양이다. 이 말을 공상이라 해서는 아니 된다. 의심이 곧 우상을 불러들이는 악마의 겨울 바람이다. 그러기에 냉전이라 하지 않던가?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공포의 찬바람이 우리 모두를 얼어죽게 만들었던 것이다. 서로서로 믿지 못하고 미워했을 때, 우리 혼은 모두 얼어 국가주의라는 우상의 종이 되어 서로 서로를 욕하고 미워하여 서로 서로를 시체로 만들었다. 생명은 죽는 법이 절대 없다. 우리 스스로가 생명의 자녀임을 잊어버리고 악마의 국가주의의 거짓 선정에 속아서는 안 된다. 자본주의니 공산주의니 하지만 문제는 거기 있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물론 죄악이지만 공산주의도 마찬가지로 잘못이다. 그 두가지는 수단으로 하는 선전이요 싸움이지 근본 문제가 아니다. 보라, 지금 계급 투쟁을 그렇게 외치던 공산주의도 돈 벌려고 미쳐 돌아가지 않던가? 정말 속셈은 독수리도 곰도 똑같이 국가 지상주의에 있다. 내가 모든 것을 주장하겠다는 것이다. 보라, 평등이니 뭐니 하면서도 인간을 즘생으로 만들어 영구히 지배하겠다는 욕심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둘이 다 둘만 아니라, 모든 강대국이 똑같이 지배주의다. 우리가 거기 속아 약자인 우리끼리 서로 의심했기 때문에 우리는 속아 얼어 죽은 시체가 되었지만.................
이제 봄이 온다.
겨울이 만일 왔다면야
봄이 어찌 멀다 할 수 있으리오.
악한 것을 두려워 마라. 악은 거짓이므로 실지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속에, 우리 가운데 죽지 않는 생명이 있음을 믿었을 때 우상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새 하늘 새 땅의 그림이 뚜렷이 나타나지 않았던가?
5. 우리의 사명
나는 우리 역사를 고난의 역사라고 하지만, 왜 고난이냐? 지난 날의 잘못을 깨달으라고, 깨닫고 아픔과 잘못됐음을 증거하라고, 증거해 온 천하 만 백성을 건져내야지.
잘못이 무슨 잘못이냐. 국가주의, 폭력주의의 종이 됐던 것이 잘못이지.
그 책임은 뉘게 있느냐? 지배했던 자와 지배에 못 견디었던 자가 다 같이 책임이지. 지배자가 만일 제 잘못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의 당하는 아
픔으로 그 양심을 깨우쳐야지.
앞으로는 남을 재배하는 큰 나라는 없어질 것이고, 서로 취미를 같이 하는 조그만한 공동체가 늘어갈 것인데, 우리가 그 본때를 보여주어야지.
잘못의 근본은 인간의 교만에 있으니, 작은 것이 아름답고, 낮은 것이 좋고, 다툼이 없고, 강하기보다 부드러워짐이 이기는 길임을 실지로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 우리 살림이 돼야지.
기독교사상 1986년 12월호
저작집30; 1-243
전집20;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