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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시감상
황경원/청령각에서 잔을 띄워 밤에 술을 마시다 달이 밝아지길 기다려 취한 채 시냇가로 걸어가다.
[淸泠閣 流觴夜飮 候月明 醉步谿上]
정갈한 사립문 안 아담한 정원 있어 / 衡門瀟灑小園棲
구비진 연못 저켠 날 듯한 다락 솟았네 / 飛閣崢嶸曲沼西
아침엔 키 큰 솔에 기대 먼 산 바라보고 / 朝倚高松看遠嶂
저녁엔 냇물 따라 맑은 계곡으로 나가네 / 夕隨流水出淸谿
뉘엿뉘엿 가는 구름 잡아두기 어렵고 / 歸雲冉冉已難駐
휘영청 밝은 달은 아직 기울지 않았네 / 明月亭亭猶未低
우리 함께 살구꽃 피는 봄철 기다려서 / 共待杏花春色徧
청려장 짚고 저 들판 안개비 속 가고지고 / 平郊煙雨一扶藜
황경원/동재에서 이틀 밤 자며 짓다
〔信宿東齋作〕
기약이란 본시 어긋나기 다반사라 / 期約本多違
어찌 이 모임 성사될 줄 알았으랴 / 豈謂成玆會
봄기운은 꽃 핀 정원에 자욱하고 / 春氣積芳園
이어진 산은 푸르른 아지랑이 머금었네 / 連山含翠靄
바위에 올라 소나무 가에서 쉬고 / 緣巖憇松際
시내를 따라 꽃 핀 저 밖 걸어가네 / 循澗行花外
비둘기 우는 곳에 저 들판은 푸르고 / 鳩鳴田野碧
방죽 물 맑은 곳에 나무들은 무성하네 / 陂淸林木大
깊은 밤 동재에서 주연을 벌이는데 / 深夜宴東齋
앞 여울엔 비바람 가득 몰아치네 / 風雨滿前瀨
숨어 사는 사람은 얽매임이 전혀 없어 / 幽人無一累
종일토록 옷의 띠도 매지 않네 / 永日不束帶
더구나 여기 마음 맞는 벗이 있어 / 况此同心友
문장도 지금 이 시대 최고인지라 / 文翰爲時最
아름다운 시 몇 차례 오가는 사이 / 蘭章屢唱酬
빈 골짝에 저녁 바람소리 울리네 / 空谷生夕籟
황경원/정릉 골짝 어귀를 거쳐서 청령각으로 돌아오다
〔經貞陵谷口 還淸泠閣〕
가고픈 마음에 남은 경치 아쉬운 채 / 歸心惜餘景
그윽한 청산에 들어왔네 / 窈窕入靑山
봄 아지랑이 속 버들은 휘늘어졌고 / 柳重春煙裏
저녁 안개 사이로 꽃은 눈부시네 / 花明暮靄間
이틀 밤 머물면서 잔치 벌였고 / 留連兩夜讌
한 언덕에서 노닐며 한가로왔네 / 笑傲一丘閒
떨기나무 위 우짖는 숱한 새들도 / 灌木多啼鳥
지지배배 노래하며 돌아가지 않네 / 嚶嚶且不還
[주D-001]한 언덕〔一丘〕 : 일구지학(一丘之狢)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같은 언덕에 사는 오소리는 다른 데가 없다는 뜻으로, 동류(同類)나 한통속으로 차별이 없는 것을 말한다.
황경원/시골집 8수
〔田廬 八首〕
시골집이 먼 교외에 있진 않지만 / 田廬非遠郊
그래도 숲속 골짝의 정취가 있네 / 猶有林壑趣
맑은 시내는 육칠 리나 뻗어 있고 / 淸谿六七里
구름은 산길에 잔뜩 끼어 있네 / 雲滿山中路
높다란 재실은 층층 봉우리로 둘려 있고 / 高齋遶層嶂
아래로는 사철나무들이 굽어보이네 / 下臨冬靑樹
작약은 북쪽 섬돌에 활짝 피어 있고 / 勺藥榮北階
오동은 서쪽 채마밭에 우뚝 서 있네 / 梧桐拂西圃
옳거니 옛날 화양의 어르신께서 / 念昔華陽叟
외딴 마을에서 이틀 밤 묵으셨지 / 信宿孤邨暮
그때의 필적만이 지금까지 남아 있으니 / 墨澤秪今存
훌륭한 그 말씀 참으로 그리웁구나 / 德音誠可慕
아 외조부시여 / 嗟嗟外王父
내가 어릴 적 어르신 수발을 들 때 / 弱齡侍杖屨
남기신 가르침을 내게 읊어주시며 / 爲余誦餘訓
아침저녁으로 깨우쳐 주셨다네 / 晨夕以申諭
두 번째〔其二〕
띠풀집이 서쪽 봉우리를 등졌는데 / 茅棟負西峰
푸른 잣나무가 그 뜰에 서 있네 / 翠柏立其庭
그 아래 한 조각 바위가 가로놓여 / 下橫一片石
하늘의 별들을 바라볼 수가 있네 / 可以望天星
박달나무는 동쪽 울타리 가에 섰는데 / 檀樹在東籬
기이한 향기가 창문에 흠씬 어리네 / 異香滿窻櫺
밤나무 숲은 북쪽 난간을 에워쌌고 / 栗林繞北楹
맑은 이슬은 문간 가리개에 스미네 / 淸露透門屛
봄 깊어 온갖 꽃이 싱그러웁고 / 春深百花繁
늘어진 버들 저 멀리서 푸르네 / 垂柳遠靑靑
지팡이 짚고 아래쪽 시내로 내려가니 / 扶杖下南溪
저녁 기운이 바로 어둑어둑해지네 / 夕氣正冥冥
떠오른 달은 수풀 끝에 와 있고 / 昇月林際來
돌아가던 구름도 이미 멈추었네 / 歸雲亦已停
곰곰이 고문의 절묘함을 생각하며 / 潛思古文妙
밤 깊도록 한 등불을 밝히네 / 永夜一燈熒
쓸데없는 말들만 천하에 퍼져있으니 / 莠辭徧天下
바른 소리를 끝내 누구에게서 듣겠는가 / 正聲竟誰聽
태평성세를 기대할 수 없으니 / 盛世不可攀
서글프게 사립문을 닫아거네 / 悄然掩柴扃
세 번째〔其三〕
아침 햇살이 띠풀집을 비출 때 / 朝日照茅屋
내가 비로소 태어났다 하네 / 曰余始降時
우물과 부엌은 상기도 예와 같고 / 井竈尙猶昔
다듬이와 절구도 그대로 놓여있네 / 砧杵亦不移
아버지께선 병으로 누워계시면서 / 父兮寢疾病
나를 대하면 늘 기뻐하셨지만 / 對余輒怡怡
젊은 여종이 나를 꾸짖던 날이면 / 少婢誚余日
정색을 하며 볼기친다 하셨지 / 正容謂可笞
어느 날 앞 숲에 불빛 번쩍이더니 / 前林有火光
도적떼가 산 울타리에 들어왔네 / 羣盜入山籬
어머니께선 놀라 밤중에 걸으시어 / 母兮驚夜步
나를 업고 험한 산마루에 오르셨지 / 負余上嶺巇
빈 골짝에 사람 자취 사라지자 / 空谷無人跡
이윽고 위기를 면하였네 / 於焉免憂危
매번 부모님이 그리워질 때면 / 每懷父母心
어찌 눈물을 흘리지 않겠는가 / 安得不涕洟
네 번째〔其四〕
동쪽 뜰에 서있는 키 큰 소나무 / 東園有喬松
우뚝 선 그 모습 펼친 일산 같네 / 特立如張盖
높은 서재에서 늘상 내려다보면 / 高齋一以眺
푸른 가지에 저녁 안개 생겨나네 / 碧柯生夕靄
밝은 달이 그 꼭대기에 떠오르면 / 明月昇其巓
그윽한 운치가 숲 너머로 두루 퍼지네 / 幽韻徧林外
모진 북풍도 꺾지 못했으니 / 朔風不能折
알겠구나 땅속에 서린 뿌리 큰 줄을 / 乃知蟠根大
길러 키움이 진실로 오래 되었으니 / 長養良已久
서리와 눈도 어찌할 수 없다네 / 霜雪亦無奈
장차 보리라 백년 후에는 / 將見百年後
우거져서 무성한 나무 될 것을 / 繁陰成叢薈
다섯 번째〔其五〕
쟁기 잡고 따라가는 남쪽 이랑을 / 秉耒遵南畆
예전엔 높다고만 여겨왔었네 / 在昔以爲高
대대로 화전밭이나 일궈온 터에 / 世世事新畬
어찌 쑥대밭을 부끄러워하랴 / 何必耻蓬蒿
밤사이 내린 봄비 흡족도 하니 / 春雨夜云足
자갈밭을 곧 김맬 수 있겠네 / 石田便可薅
왕골 삿갓 쓴 늙은 농부가 / 臺笠老農夫
소를 몰고 평평한 언덕으로 올라가네 / 牽牛上平臯
시어머니는 소반에 사발 얹어 새참 내가고 / 長婦盤盂饋
며느리는 광주리에 대밥통을 이고 가는데 / 少婦筐筥操
아이는 그 뒤를 졸졸 따르고 / 稚子踵其後
귀여운 삽살개 목에는 방울이 딸랑딸랑 / 小厖繫鈴絛
문득 보이는 산 너머서 온 나그넨 / 忽見山外客
광릉에서 거룻배를 타고 왔다네 / 歸自廣陵舠
나에게 조정의 일 전해주는데 / 爲傳朝右事
세 치 혀로 죽일 놈 살릴 놈 하더라 / 寸舌誅且褒
농가엔 시비거리가 없었는데 / 田家無是非
뜻밖에 이 사람을 만났네 / 不意斯人遭
오곡 익는 시절을 길게 노래하며 / 長歌黍稷天
내 도시락 속 막걸리를 기울이네 / 傾我榼中醪
여섯 번째〔其六〕
외로운 무덤이 산 동쪽에 있으니 / 孤墳在朝陽
옛사람이 묻힌 곳이라 하네 / 云是古人葬
봉분은 아직도 손질 안 된 채 / 馬鬣猶不改
가을철 잣나무만 제냥 씩씩하네 / 秋柏秪自壯
내 듣건대 만력 시대에 / 吾聞萬曆世
팔 년 동안 고생한 여러 장졸들 / 八年勞諸將
어떤 이는 파촉지방에서 왔고 / 或由巴蜀來
혹은 형초지방에서 앞장서 왔네 / 或自荊楚倡
야전에서 병기에 다쳐 죽지 않으면 / 野戰不死兵
해전에서 반드시 장독(瘴毒)으로 죽었다네 / 海防必死瘴
그 유해는 돌아가지도 못하고 / 遺骸未得歸
이 곳 푸른 계곡 봉우리에 묻혔다네 / 瘞此靑谿嶂
한식날엔 그 누가 와서 제사지내 주리오 / 寒食誰來祭
비바람만이 무덤 위에 몰아치겠지 / 風雨滿冢上
무덤가에 석양은 볼 수도 없고 / 石羊不可見
초동들의 장소되니 서글프기만 하구나 / 樵童但悽愴
일곱 번째〔其七〕
고세라 삼월이 갈마드니 / 姑洗三月交
단비에 뽕잎이 목욕하네 / 靈雨浴桑葉
뻐꾸기 우는 봄날 해는 길고 / 鳩鳴日方遲
하얀 쑥에 부는 바람 참 조화롭네 / 白蘩風正協
오솔길엔 여인네 두 명이 / 微行二女子
광주리 끼고 가벼운 걸음으로 가네 / 執筐散輕屧
두 손으로 뻗친 가지 거머잡는데 / 雙手攀遠揚
도끼를 양 옆에 끼고 있네 / 斧斨左右挾
명주실은 벌써 뽑아 놓았고 / 繭絲倐已成
길쌈일도 어찌 그리 재빠른지 / 織紝何其捷
산골 집 가난하다 말하지 마라 / 莫謂山家貧
검은 비단이 상자에 가득 찼다네 / 純帛且盈笈
여덟 번째〔其八〕
골짝 어귀 숲속이 깊기도 하니 / 谷口林木深
샘물이 밤낮으로 맑게 흐르네 / 泉流日夜淸
바위 빛은 비록 새하얗진 않으나 / 石氣雖不白
바둑판이 냇가에 평평하게 놓여있네 / 棊置川上平
서쪽을 바라보니 천 길 높은 봉우리들 / 西望千仞峰
구름 저편 울창히도 높이 솟았고 / 雲際鬱崢嶸
저 멀리 스님 사는 암자에서 / 迢迢釋氏居
바람에 저녁 경쇠소리 실려오네 / 風送暮磬聲
큰 외숙은 사나운 매 길들이느라 / 伯舅馴豪鷹
앞 바위서 꿩 울기를 기다리고 / 前巖候雉鳴
막내 외숙은 사나운 개 고삐 잡아챈 채 / 季舅緤猛犬
들판에서 노루 지나가길 살피네 / 中田伺麕行
내 맘껏 사냥하여 부모님께 올리고 / 縱獵養高堂
독실히 행하여 천지신명 감응시키리 / 篤行感神明
즐거운 마음으로 이 한세상 마치리니 / 怡愉以終世
자식 직분 다하기만 바랄 뿐이네 / 但求子職成
[주D-001]화양(華陽)의 어르신 : 화양동주(華陽洞主) 송시열(宋時烈)을 가리킨다. 화양은 우암 송시열이 학문을 연마하고 제자들을 가르친 곳으로, 화양서원이 있는 충북 괴산의 마을이다.
[주D-002]외딴 마을 : 황경원의 외가가 있는 시골 마을을 가리킨 듯하다.
[주D-003]외조부 : 작자인 황경원의 외조부는 안동 권씨(安東權氏)인 권최(權㝡)인데, 생애는 미상이다.
[주D-004]남기신 가르침 : 우암 송시열의 가르침을 뜻한다.
[주D-005]화전밭〔新畬〕 : 신(新)은 개간한 지 2년 된 전답을, 여(畬)는 3년 된 전답을 말한다.
[주D-006]만력 시대〔萬曆世〕 : 만력(萬曆)은 중국 명(明)나라 신종(神宗)황제 때의 연호(1573~1619)로 만력 20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주D-007]팔 년 …… 장졸들 :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서 파병되어 온 군사들을 가리킨다.
[주D-008]장독(瘴毒) : 열병의 원인이 되는 산천(山川)에서 나오는 나쁜 기운을 말한다.
[주D-009]고세(姑洗) : 12율(律)의 하나로 황종(黃鐘)에서 5번째이며, 음력 3월의 다른 이름이다. 고(姑)는 고(故)로 구(舊)의 뜻이고, 세(洗)는 선(鮮)으로 신(新)의 뜻이다. 곧 모든 옛것을 보내고 새것을 맞는 달이란 말이다.
[주D-010]단비〔靈雨〕 : 영우(靈雨)는 단비이며, 군왕의 은택을 비유한다. 《시경》 〈용풍 정지방중(定之方中)〉에서 “단비가 이미 내리거늘, 저 관인을 명하여, 별을 보고 일찍 멍에하여, 뽕나무밭에 멈추니〔靈雨既零, 命彼倌人, 星言夙駕, 說於桑田.〕”라고 하였다.
[주D-011]뻐꾸기 : 구(鳩)는 시구(鳲鳩)로 뻐꾸기를 말한다. 《시경》 〈조풍(曹風) 시구(鳲鳩)〉에서 “뻐꾸기가 뽕나무에 있으니, 그 새끼가 일곱이로다〔鳲鳩在桑, 其子七兮.〕” 하였다.
[주D-012]뻐꾸기 …… 길고 : 《시경》 〈빈풍(豳風) 칠월(七月)〉에 “봄에 햇빛이 비로소 따뜻해져, 꾀꼬리가 울거든, 아가씨는 아름다운 광주리를 잡고, 저 오솔길을 따라, 이에 부드러운 뽕잎을 구하며, 봄에 해가 길고 길거든, 흰쑥을 캐기도 많이 하니, 아가씨의 마음 서글퍼함이여, 장차 공자와 함께 돌아가리로다.〔春日載陽, 有鳴倉庚, 女執懿筐, 遵彼微行, 爰求柔桑, 春日遲遲, 采蘩祁祁, 女心傷悲, 殆及公子同歸.〕” 하였다.
[주D-013]뻗친 가지〔遠揚〕 : 원양(遠揚)은 위로 솟아 멀리 뻗은 가지를 말한다. 《시경》 〈빈풍(豳風) 칠월(七月)〉에 “누에치는 달에 가지치기를 하는지라, 저 도끼와 네모진 도끼를 취하여, 멀리 뻗어난 가지는 베고, 저 여린 뽕은 잎만 따느니라.〔蠶月條桑, 取彼斧斨, 以伐遠揚, 猗彼女桑.〕” 하였다.
[주D-014]검은 비단 : 원문의 ‘순백(純帛)’은 검은 비단으로 최상품이다. ‘純’은 ‘緇’와 통한다.
[주D-015]바둑판이 …… 놓여있네 : 개울가 너럭바위 위에 바둑판을 그리거나 새겨놓은 것을 말한다.
[주D-016]독실히 행하여 : 《중용장구》 제20장에 “널리 배우며, 자세히 물으며, 신중히 생각하며, 밝게 분별하며, 독실히 행하여야 한다.〔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篤行之.〕”라고 하였다. 주자의 주에서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분별함은 선을 택하는 것으로서 지가 되니, 배워서 아는 것이요, 독실히 행함은 굳게 잡는 것으로서 인이 되니, 이롭게 여겨 행하는 것이다.〔學問思辨, 所以擇善而爲知, 學而知也. 篤行, 所以固執而爲仁, 利而行也.〕”라고 하였다.
황경원/고금행
〔鼓琴行〕
신성보 소(申成甫韶)가 거문고를 안고 와서 사행(士行)이 쓴 시보에 따라 연주하였는데 모두 음률에 맞았다. 오직 위풍(魏風)의 〈벌단(伐檀)〉 3장의 악보가 전하지 않아서 거문고 줄에 의지하여 시를 맞추었더니 매우 들을 만하였다. 그래서 〈고금행〉을 지어 성보에게 보이고, 겸하여 사행에게 부친다.
중추에 병으로 남산 북쪽에 누웠는데 / 仲秋卧病南山陰
성보가 거문고를 안고 달밤에 와 주었네 / 申子携琴月下臨
나를 위해 거문고를 연주했는데 / 爲我弄朱絃
거문고는 옛 가락을 지니고 있었지 / 朱絃有古音
첫째 곡은 황종으로 녹명을 연주했는데 / 初曲黃鐘奏鹿鳴
내게 대도(大道)를 보여줌이 어찌 그리도 성대한가 / 示我周行何其盛
해계 골짝에서 봉황의 울음소리 듣는 듯하니 / 嶰谿若聞鳳皇吟
조화로워라 육률이 진실로 바르도다 / 渢渢六律諒云正
둘째 곡 〈어리〉는 만물의 풍성함을 노래했으니 / 二曲魚麗萬物成
군자에게 술이 있어 즐겁도다 / 君子有酒於焉樂
청명광대함은 천지를 본떴고 / 淸明廣大象天地
신속히 몰아침은 비바람이 이는 듯했네 / 奮迅還如風雨作
셋째 곡 월조는 무역에 맞으니 / 三曲越調中無射
규문의 엄숙공경은 〈주남〉에서 시작되었지 / 閨門肅敬周南始
지극히 높고 원대하여 사람을 깊이 감동시키니 / 窮高極遠感人深
화락하여라 국풍의 진미를 그 누가 알랴 / 雝雝誰識國風美
넷째 곡 소남은 청상으로 연주하니 / 四曲召南奏淸商
거문고 느린 가락에 다시 노래를 올려 부르네 / 練絲達越更升歌
지극한 덕이 감화시킴의 묘를 알고 싶은가 / 欲知至德薰蒸妙
방중지악이 성정을 조화롭게 하는도다 / 房中之樂性情和
마지막 곡으로 벌단을 타노니 / 終曲絃伐檀
하수 물가에 버려두면 무슨 소용 있으랴 / 寘之河干何所用
내 벗이 참으로 슬퍼하리니 / 吾友諒自悲
이 마음 오직 사행과 함께할 뿐이로다 / 此心唯與士行共
우아한 곡조 비록 전해오진 않으나 / 雅聲雖不傳
그래도 또 거문고를 울려보았지 / 猶且拊孤桐
서쪽 숲에 달은 지고 곡조는 끝났는데 / 西林月落玉徽閴
기러기는 이슬 속을 날아가며 우네 / 歸鴈飛鳴白露中
[주D-001]신성보 소(申成甫韶) : 신소(申韶, 1715~1755)의 자가 성보(成甫)이다. 본관은 평산(平山), 호는 함일재(涵一齋)이며, 조부는 대사간을 역임한 신심(申鐔)이고, 아버지는 신사건(申思建)이다. 어머니는 음보로 벼슬길에 나아가 승지, 강원 감사를 역임한 광산(光山) 김진옥(金鎭玉)의 딸이다. 신소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매진하여 경전과 예학에 조예가 깊었으나, 청나라의 배신이 되기를 거부하여 끝내 과거를 보지 않았으며, 일찍 죽었다. 황경원(黃景源)ㆍ남공철(南公轍)ㆍ송명흠(宋明欽)ㆍ송문흠(宋文欽) 등과 교유하여 그들의 문집에 이름이 나와 있다.
[주D-002]사행(士行) : 송문흠(宋文欽, 1710~1752)의 자이다. 본관은 은진(恩津), 호는 한정당(閒靜堂)이다. 1733년(영조9) 사마시에 급제하였고, 1739년 음보(蔭補)로 장릉 참봉(長陵參奉)이 되고, 이어 시직(侍直)ㆍ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ㆍ형조 좌랑(刑曹佐郞) 등을 거쳐 문의 현령(文義縣令)에 이르렀다. 문장과 시에도 뛰어났으며, 글씨는 특히 예서를 잘 써서 전서의 이인상(李麟祥)과 함께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서예가로 불린다. 작품에 《이유신단비(李瑜神壇碑)》가 있고 문집에 《한정당집(閒靜堂集)》이 있다.
[주D-003]거문고 : 원문의 ‘朱絃’은 익힌 명주실〔熟絲〕로 만든 붉은 색의 거문고 줄을 말한다. 또한 금슬류 현악기의 범칭으로 쓰인다.
[주D-004]옛 가락 : 원문의 ‘古音’은 고악(古樂)을 말한다. 아악(雅樂)으로서, 고대 제왕의 제사나 조회 때 연주한 음악이다. 선왕(先王)의 바른 음악〔正樂〕이라 하였다.
[주D-005]황종(黃鐘) : 음률의 이름이다. 동양 음악에서 음율(音律)의 기본이 되는 12율인 육률(六律)과 육려(六呂) 가운데 가장 긴 것으로 육률(六律)의 첫째 음이며, 계절로는 11월, 간지는 자(子), 오음(五音)에서는 우(羽)에 해당한다. 황종의 관(管)은 검은 기장알 1,200개가 들어가는데, 이것은 양(量)의 1약(龠)에 해당하는 바 지금의 작(勺)이 된다. 황종의 관은 도량형(度量衡)의 기본이므로 천지만물을 측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
[주D-006]녹명(鹿鳴) : 《시경(詩經)》의 편명으로 〈소아(小雅) 녹명지십(鹿鳴之什) 녹명〉이다. 〈녹명〉은 여러 신하들과 아름다운 손님을 연향하는 시이다.
[주D-007]내게 …… 성대한가 : 《시경》 〈녹명(鹿鳴)〉 첫 수에서 “내 아름다운 손님이 있어, 비파를 타며 젓대를 부노라. 젓대를 불며 생황을 울려, 광주리를 받들어 폐백을 올리니,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나에게 대도를 보여 줄지어다.〔我有嘉賓, 鼓瑟吹笙. 吹笙鼓簧, 承筐是將, 人之好我, 示我周行.〕”라고 하였다.
[주D-008]해계(嶰溪) …… 듯하니 : 고대에 황제(黃帝)가 악관 영륜(伶倫)에게 음률을 만들라고 하자, 영륜이 대하(大夏)의 서쪽에서 완유산(곤륜산으로 전해짐) 북쪽으로 가 해계 골짝에서 대나무를 베어다가 열두 개의 피리를 만들어 십이율(十二律)을 제정했다. 십이율은 봉황의 울음소리를 듣고서 구별하여 만들었는데 수컷 울음소리로써 육률(六律)을 삼고, 암컷 울음소리로써 육려(六呂)를 삼았다고 한다. 《呂氏春秋 仲夏紀 古樂》
[주D-009]육률(六律) : 주(周)나라 때 만들어진 음악의 여섯 가지의 고저 율조이다. 각 율마다 음양으로 나뉘어 실제로는 십이율이며, 이중 양률(陽律)을 육률(六律), 음률(陰律)을 육려(六呂)라고 한다. 또 전체 십이율을 통칭하여 율려(律呂)라고 한다. 육률은 저음부터 황종(黃鐘)ㆍ대선(大蔙)ㆍ고선(姑洗)ㆍ유빈(蕤賓)ㆍ이칙(夷則)ㆍ무역(無射)이며, 육려는 대려(大呂)ㆍ협종(夾鐘)ㆍ중려(中呂)ㆍ임종(林鐘)ㆍ남려(南呂)ㆍ응종(應鐘)이다.
[주D-010]어리(魚麗) : 《시경》 〈소아〉의 편명으로, 만물(萬物)이 풍성하고 많아 예(禮)를 갖춤을 찬미한 시(詩)이다.
[주D-011]군자에게 …… 즐겁도다 : 《시경》 〈소아(小雅) 어리(魚麗)〉에서, “고기가 통발에 걸렸으니, 날치와 모래무지로다. 군자에게 술이 있으니, 맛있고 또 많도다.〔魚麗于罶, 鱨鯊. 君子有酒, 旨且多.〕”라고 하였다.
[주D-012]월조(越調) : 음조(音調)의 이름으로 상성(商聲) 칠조(七調)의 하나인데, 월 나라에서 나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전국 시대 월나라 사람 장석이 초나라에 벼슬하여 부귀를 누렸으나, 고국을 잊지 못해 병중에 고국을 그리며 월나라의 곡을 노래하였다.
[주D-013]무역(無射) : 양률(陽律)인 육률(六律)의 하나로, 9월에 속하는 소리이다.
[주D-014]주남(周南) : 《시경》 〈국풍(國風)〉 첫머리에 수록된 노래로, 후비(后妃)의 덕을 기린 내용이며 〈관저(關雎)〉 등이 있다.
[주D-015]소남(召南) : 《시경》 〈국풍(國風)〉에 두 번째로 수록된 노래로, 부인과 대부(大夫)의 아내의 덕을 읊은 내용이며 〈작소(鵲巢)〉 등이 있다.
[주D-016]청상(淸商) : 상(商)은 오음(五音)의 하나로 특히 맑은 소리이다.
[주D-017]거문고 느린 가락 : 원문의 ‘練絲’는 염색하지 않은, 익힌 명주실로서 거문고 줄을 말한다. 또는 거문고를 가리키기도 한다. ‘達越’은 거문고 밑바닥의 구멍을 뚫어 소리를 통하게 하여 소리를 느리고 장중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거문고 뒷면에는 3개의 울림구멍이 있어, 공명된 음을 외부로 전달한다.
[주D-018]방중지악(房中之樂) : 후(后), 부인(夫人)들이 풍송(諷誦)하여 그 군자를 섬기는 음악으로서 종경(鐘磬)의 절주를 쓰지 않고 〈주남(周南)〉ㆍ〈소남(召南)〉의 시를 현가(絃歌)로 연주했다. 이는 선왕의 풍속의 훌륭함을 드러내어 밝힌 것이다.
[주D-019]벌단(伐檀) : 《시경》 〈위풍(魏風)〉의 편명이다. 관리가 하는 일 없이 탐욕스러운 것을 풍자하기 위해 지은 시라고 한다. 탐욕스럽고 비루한 자가 하는 일 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현명한 사람이 벼슬에 나아가지 못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주D-020]하수 …… 있으랴 : 《시경》 〈벌단(伐檀)〉에 “쿵쿵쿵 박달나무 베어 왔거늘, 하수 물가에 버려두니, 하수가 맑고 또 물결이 일도다. 심지 않고 거두지 않으면, 어찌 벼 삼백 전을 취할 것이며, 수렵하지 않으면, 어찌 너의 뜰에 매달려 있는 담비를 보리오? 저 군자여, 공밥을 먹지 않도다.〔坎坎伐檀兮, 寘之河之干兮, 河水淸且漣猗. 不稼不穡, 胡取禾三百廛兮. 不狩不獵, 胡瞻爾庭有縣貆兮? 彼君子兮, 不素餐兮.〕” 하였다.
[주D-021]우아한 …… 않으나 : 원문의 ‘雅聲’은 여기서 〈벌단(伐檀)〉을 가리킨다.
[주D-022]거문고 : 원문의 ‘孤桐’은 역양고동(嶧陽孤桐)을 말한다. 역산(嶧山)의 남쪽에 자라는 한 그루 큰 오동나무로서 거문고를 만드는 데 좋은 재료로 쓰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