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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건릉(健陵)
정의
조선 정조와 비 효의왕후(孝懿王后) 김씨(金氏)의 능.
개설
건릉(健陵)은 1800년(정조 24)에 정조가 승하함에 따라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무덤인 현륭원(顯隆園) 동쪽 기슭 강무당 터에 조성되었다. 그 후 1821년(순조 21)에 효의왕후가 죽자, 오늘날의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인 수원 구읍의 향교 터로 건릉을 옮기면서 합장하였다. 고종 연간에는 현륭원이 융릉(隆陵)으로 격상되면서 가까이에 자리한 건릉과 융릉이 일원을 형성하게 되었다. 현재는 두 왕릉이 함께 사적 제206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성 경위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창경궁 영춘헌(迎春軒)에서 승하하자, 왕대비의 명에 의해 빈전은 환경전(歡慶殿)으로, 혼전은 선정전(宣政殿)으로 정해졌다. 국장을 이끌 총호사(總護使)는 좌의정(左議政) 이시수(李時秀)로, 빈전도감(殯殿都監) 제조(提調)는 김재찬(金載瓚)·이만수(李晩秀)·한용귀(韓用龜)로, 국장도감(國葬都監) 제조는 이조원(李祖源)·이재학(李在學)·조진관(趙鎭寬)으로, 산릉도감(山陵都監) 제조는 서유린(徐有隣)·김문순(金文淳)·이득신(李得臣)으로 정하고, 제반 절차는 영조 때 편찬된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을 따르도록 했다.
7월 6일 빈청 회의에서 묘호(廟號)는 정종(正宗)으로, 전호(殿號)는 효령(孝寧)으로, 능호는 건릉으로 정했다. 그러나 7월 13일, 효령이 숙종의 전호와 비슷하다고 하여 효원(孝元)으로 고쳤다. 산릉은 현륭원 동쪽 강무당 옛터의 해좌(亥坐)로 정하였다. 그런데 건릉의 위치를 정하고 봉표(封標)하자 현륭원 어진(御眞) 봉안각과 너무 가까워지게 되었다. 결국 화성 행궁에 전각을 건립하고 옮겨 봉안하라는 대비의 하교가 있었다. 이 어진 봉안각의 전호는 1801년(순조 1) 빈청 회의에서 화령전(華寧殿)으로 결정되었고, 강무당에서 남쪽으로 77보, 낙남헌(洛南軒)에서 북쪽으로 79보 떨어진 길지(吉地)에 유방(酉方)을 등지고 묘방(卯方)을 바라보는 방향, 즉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건립되었다[『순조실록』 1년 1월 29일].
정조의 영구는 같은 해 11월 3일 발인해서 11월 6일에 묻혔다. 국장이 끝난 11월에 암행어사신현(申絢)의 청에 따라 화성의 지지대(遲遲臺)에 사적비를 세웠다. 지지대는 정조가 헌륭원에 행행할 때 항상 머물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건릉이 조성된 지 21년 만인 1821년(순조 21) 3월 9일, 효의왕후가 자경전(慈慶殿)에서 승하했다. 빈전은 환경전, 곡반(哭班) 처소는 명정전(明政殿), 혼전은 통화전(通和殿)으로 하여 국장이 진행되었다. 이때 빈청에서 효의왕후의 전호는 효희(孝禧)로, 능호는 정릉(靜陵)으로 아뢰어 정했다. 그런데 효의왕후의 국장이 진행되는 동안 한편에서는 건릉의 이전이 논의되고 있었다. 건릉의 자리가 좋지 않다는 소문이 있자 정조의 국장 당시 총호사를 맡았던 이시수가 적극 주장하여 천장(遷葬)을 결정하고, 더불어 효의왕후와 합장하도록 정하였다.
천장할 곳으로는 교하의 장릉(長陵) 재실 뒤와 수원의 옛날 향교 터가 물망에 올랐는데, 수원이 교하에 비해 매우 귀하고 길하다는 상지관(相地官)의 말에 따라 수원으로 정하였다. 또 봉분은 영릉과 장릉의 전례에 따라 합분하기로 하였다. 새로 옮길 곳이 이전의 능과 아주 가까웠으므로 능에 설치할 석물(石物)을 모두 옮겨다 썼으며, 합장했지만 현륭원의 예에 의거하여 모든 석물은 이전과 똑같이 하였다[『순조실록』 21년 4월 21일].
조성 상황
건릉의 현궁(玄宮)은 회격분(灰隔墳)으로 조성되었다. 능상(陵上)의 봉분 주위에 병풍석을 두르고 뒤쪽에 곡장(曲墻)을 설치했다. 봉분의 사방에는 양석과 호석 각 4개씩을 놓고, 상계(上階)에는 혼유석과 망주석 1쌍을 설치하고, 중계(中階)에는 장명등(長明燈)과 문인석, 마석 1쌍씩, 하계(下階)에는 무인석과 마석 1쌍씩을 배치했다. 정자각은 정전(政殿)이 3칸, 배위청(拜位廳)이 2칸이며,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정자각의 왼쪽에는 표석을 보호하기 위한 비각을 설치했으며, 향어로(香御路)의 좌우에는 수라간과 수복방(守僕房)을 두었으나 현재는 수라간만 남아 있다. 향어로의 끝에는 홍살문을 배치하였다.
변천
건릉의 변화는 주로 재실에 있었다. 1873년(고종 10)에 재실이 화재로 불에 타서 중수(重修)하였으며, 일제강점기인 1912년에는 조선총독부에서 수원군화산(花山)의 삼림 면적이 광활하여 관리하기 어렵다며 융릉(隆陵)과 건릉의 재실 일부에 임업사무소를 두었다. 이로 인해 일본인들이 자주 드나들게 되었으며, 1914년에는 부속 건물을 수리하기도 했다. 조선총독부 산하 임업사무소에서 화산의 삼림을 대부분 주기적으로 벌목과 보식(補植)하도록 정했으나, 융릉과 건릉 및 소속 사원(寺院) 주위의 삼림은 금벌림(禁伐林)으로 획정하였다.
건릉의 또 하나의 변화는 표석에 있었다. 대한제국 선포 후 1900년(광무 4)에 선대왕을 황제로 추존하고 각릉 표석의 내용을 고치는 작업이 있었는데, 이때 건릉과 함께 고쳐진 능은 건원릉(健元陵), 제릉(齊陵), 정릉(貞陵), 융릉, 인릉(仁陵), 수릉(綏陵)이다. 표석의 음각을 위한 글씨[陰記]는 고종이 직접 썼다.
관련 사항
건릉은 사적 제20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다른 조선 왕릉과 더불어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참고문헌
『건릉산릉도감의궤(健陵山陵都監儀軌)』
건원릉(健元陵)
정의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능.
개설
오늘날의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일대인 양주검암촌(儉巖村)에 건원릉이 조성된 뒤, 국상(國喪)이 생길 때마다 이 능의 경내는 언제나 왕릉 터의 물망에 올랐다. 이후 이곳에 현릉(顯陵), 목릉(穆陵), 휘릉(徽陵), 숭릉(崇陵), 혜릉(惠陵), 원릉(元陵), 수릉(綏陵), 경릉(敬陵) 등 8기의 능이 더 조성되면서 동구릉(東九陵)이라 불리게 되었다.
조성 경위
1408년(태종 8) 5월 24일, 태조이성계는 태상왕으로 물러난 지 10년 만에 창덕궁의 별전에서 승하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빈전·국장·조묘·재(齋)의 4도감(都監)을 설치하고 국장을 준비했는데, 산릉의 자리는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하륜(河崙) 등을 보내 살피도록 하였다. 산릉을 찾는 동안 빈전에서는 능엄법석(楞嚴法席), 법화삼매참법석(法華三昧懺法席) 등 불교 의례가 계속되었다[『태종실록』 8년 7월 8일]. 아직 고려의 습속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해 6월 28일에 하륜 등이 양주검암촌에 길지가 있음을 아뢰자, 태종이 직접 가서 살펴보고 조묘도감(造墓都監) 제조(提調)박자청(朴子靑)으로 하여금 공장(工匠)을 거느리고 역사를 시작하도록 하였다. 7월 9일에는 서운관(書雲觀)에서 석실 만들기를 청하여 의정부에 논의하였으나, 『가례(家禮)』에 의거해 회격(灰隔)으로 하자는 의견도 있어 쉽게 결론을 내지 못했다. 그러자 태종은 당시 세자였던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로 하여금 종묘에 나가 점을 치도록 했고, 점괘에 따라 석실로 정했다.
산릉의 재궁(齋宮)에는 개경사(開慶寺)라는 이름을 내리고 조계종에 속하게 하여 노비 150구(口)와 전지(田地) 300결(結)을 주었으며, 수호군 100명으로 하여금 능을 지키도록 했다. 태조가 승하한 지 100일째 되는 9월 5일에 흥덕사(興德寺)에서 백일재를 베풀고, 9월 7일에 발인하여 9월 9일 자시에 현궁(玄宮)에 시신을 봉안하였다. 이후 신주는 반우(返虞)하여 혼전인 문소전(文昭殿)에 모셨다.
조성 상황
건원릉의 현궁은 석실로 조성하였으며, 능상의 봉분은 병풍석과 상석으로 감쌌다. 봉분 바깥쪽에는 난간석을 두르고, 그 뒤로는 곡장(曲墻)을 설치했다. 봉분에는 북도(北道)의 청완(靑薍)으로 사초(莎草)하였다. 봉분의 사방에는 양석과 호석 각 4개씩을 놓고, 봉분 상계(上階)에 혼유석과 망주석 1쌍, 중계(中階)에는 장명등과 문인석, 마석 1쌍씩, 하계(下階)에는 무인석과 마석 1쌍씩을 배치했다. 정자각은 정전(正殿)이 3칸, 배위청(拜位廳)이 2칸이며,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표석을 보호하는 비각은 왕릉 중 규모가 가장 큰 정면 4칸에 측면 3칸이며,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변천
1409년(태종 9) 태종은 창덕궁과 더불어 건원릉 주변에 소나무를 심게 했으며, 같은 해 윤4월에는 13자 2치 크기의 신도비를 건립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비각은 세우지 않았다. 1415년(태종 15)에는 이양달(李陽達)이 풀과 나무가 무성해 들에 갑자기 불이 나면 끄기가 어렵다고 하자, 금화지(禁火地) 외의 땅에는 백성들이 경작하는 것을 허용하라고 명했다.
1588년(선조 21)에 헌관(獻官)이 다른 능에는 비각이 있으나 건원릉에만 없어 표석이 잡초 속에 묻혀 보기에 민망하다고 아뢰었으나, 갑자기 비각을 만들 수는 없다고 하여 미루어졌다[『선조실록』 21년 7월 8일]. 이후 1690년(숙종 16) 비각이 건립되었지만 당시 조정에서는 건원릉에 본래부터 비각이 있었으나 전쟁으로 허물어졌다라는 생각을 했고 이에 비각을 건립하기에 이른 것이다[『숙종실록』 16년 10월 27일]. 그러나 건원릉의 비각은 이때 처음 조영(造營)된 것이다.
1629년(인조 7)에는 봉분의 사초를 고치는 데 대한 논의가 있었다. 건원릉의 봉분에는 북도의 청완을 사초로 썼기 때문에 다른 능과 달리 사초가 매우 무성했다. 그런데 봉분 앞쪽의 잡목뿌리가 봉분으로 뻗자 주변 청완을 뽑아 버려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으나 청완은 태조의 유교(遺敎)로 특별히 쓴 것이었으므로 사초는 두고 나무뿌리만 뽑아내게 하였다[『인조실록』 7년 3월 19일].
1708년(숙종 34)에는 정자각을 개수하려 했으나, 왜적의 병화가 미치지 않은 것은 신령의 도움이라 일컫고 있으니 쉽게 고칠 수 없다고 하여 그대로 두었다[『숙종실록』 34년 8월 9일]. 1722년(경종 2)에도 정자각이 오래되어 기울어지고 허물어져서 수개하려 했으나, 숙종조의 전례에 따라 여름 장맛비를 보아 가며 살피라는 명이 내려져 다시 그 상태를 유지하게 되었다[『경종실록』 2년 3월 22일]. 1764년(영조 40)에는 정자각에 틈이 생기는 등 훼손 정도가 심해 개수해야 한다는 의견에 따라 마침내 중수청(重修廳)을 설치하고 공조(工曹), 호조(戶曹), 예조(禮曹)의 당상관들이 감독하여 공역을 진행했다[『영조실록』 40년 2월 12일]. 영조가 직접 나가 이틀 동안 역사를 살피기도 했다. 이때의 공사 내용은 『건원릉정자각중수도감의궤(健元陵丁字閣重修都監儀軌)』에 잘 기록되어 있다.
대한제국 선포 후 1900년(광무 4)에 예에 따라 고종은 선대왕들을 황제로 추존하고 건원릉, 제릉(齊陵), 정릉(貞陵), 융릉(隆陵), 건릉(健陵), 인릉(仁陵), 수릉의 표석 고치는 일을 진행하면서 전면과 음기(陰記)를 직접 썼다.
관련 사항
건원릉의 터는 태조 승하 당시 하륜 등에 의해 정해졌지만, 태조가 승려 무학(無學)과 더불어 친히 고른 땅이다[『현종실록』 즉위년 7월 2일]. 건원릉은 나라를 창업한 태조의 능이므로, 이후 왕들은 새로 조성하는 능을 건원릉의 제도에 넘치지 않게 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건원릉은 동구릉의 하나로 사적 제19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2009년에는 다른 조선 왕릉과 더불어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참고문헌
『건원릉정자각중수도감의궤(健元陵丁字閣重修都監儀軌)』
경릉(敬陵)
정의
조선 추존왕인 덕종과 비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韓氏)의 능.
개설
의경세자(懿敬世子)는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왕위에 오르지 못한 채 죽었는데, 1470년(성종 2)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1457년(세조 3)에 만들어진 무덤은 세자의 지위에 따라 의묘(懿墓)로 조성되었으나, 1470년 왕으로 추존되면서 무덤도 경릉(敬陵)으로 개칭되었다. 1504년(연산군 10)에 소혜왕후가 승하하자 경릉 경내에 능을 들이기는 했지만 합장하지는 않았다. 창릉(昌陵), 명릉(明陵) 등과 더불어 서오릉(西五陵)의 경역(境域)을 이루고 있다.
조성 경위
1457년 의경세자가 병으로 승하하자, 세조는 도성 근처를 샅샅이 뒤져 길지를 찾도록 명했다. 양주 대방동, 광주(廣州), 과천, 헌릉(獻陵)과 건원릉(健元陵), 과천의 청계산, 인덕원, 고양, 장단(長湍)의 옛 읍 터와 임진(臨津)의 서국동(瑞國洞), 이천, 천녕(川寧) 등이 물망에 올랐는데, 풍수지리에 따라 땅의 생김새를 보고 길흉을 판단한 끝에 도성에서 오가기도 편하고 지리에도 적합한 고양현(高陽縣) 봉현(蜂峴)으로 결정하였다. 봉현은 오늘날의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에 있는 서오릉 일대에 해당한다. 이곳에 의묘(懿墓)를 조성했으며, 신주는 의경묘(懿敬廟)에 모셨다.
이곳에 소혜왕후의 능이 조성된 것은 1504년(연산군 10)의 일이다. 그해 4월 27일 창경궁 경춘전(慶春殿)에서 소혜왕후가 승하하자, 인양전(仁陽殿)에 빈소(殯所)를 차렸다. 산릉의 터는 공조(工曹) 참판(參判)임사홍(任士洪)으로 하여금 살피도록 하였으나, 소혜왕후의 평소 뜻에 따라 경릉에서 130보(步) 가량 떨어진 서쪽 언덕에 계방(癸方)을 등지고 정방(丁方)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무덤을 만들었다[『연산군일기』 10년 4월 29일].
조성 상황
덕종의 무덤은 석실분이다. 석실분 위에 봉분을 쌓고 그 주위에 양석 1쌍을 두었으며, 둘레에 곡장(曲墻)을 설치했다. 봉분 앞 계체석(階砌石) 위에는 혼유석을 놓았고, 아래에는 문인석과 마석을 좌우에 각각 1쌍씩 배설했다.
조선초기 왕릉은 고려의 전통에 따라 현궁을 석실로 조성했지만, 자신의 무덤부터는 회격(灰隔)으로 조성하라는 세조의 유교(遺敎)에 따라[『예종실록』 즉위년 9월 22일] 소혜왕후의 현궁은 회격분으로 만들어졌다. 소혜왕후 능상(陵上) 봉분은 그 바깥쪽에는 난간석을 두르고 뒤쪽에는 곡장을 설치했다. 봉분의 사방에는 양석과 호석 각 4개씩을 놓았으며, 봉분 상계(上階)에 혼유석과 망주석 1쌍을, 중계(中階)에 장명등과 문인석, 마석 1쌍씩을, 하계(下階)에 무인석과 마석 1쌍씩을 배치했다. 정자각은 하나만 두었는데, 정전(正殿)이 3칸, 배위청(拜位廳)이 2칸이며 맞배지붕이다. 표석을 보호하기 위한 비각도 1칸짜리 하나뿐인데, 영조 연간에 건립되었으며,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경릉은 소혜왕후의 무덤이 서쪽에, 덕종의 무덤이 동쪽에 배치되어 있다. 망자(亡者)의 경우 서쪽을 상위로 하여 왕의 무덤을 서쪽에 두고 왕비의 무덤을 동쪽에 두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경릉은 그 반대로 되어 있다.
변천
1478년(성종 9)에 한명회(韓明澮)가 덕종 능실의 제도가 갖추어지지 않았으니 돌난간과 담장을 설치할 것을 청했으나, 성종은 묘소 조성 당시에 특별한 뜻이 있어 설치하지 않은 것이라며 허락하지 않았다[『성종실록』 9년 10월 3일]. 그때 결정된 상설(象設)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경릉의 표석은 조선전기의 능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1754년(영조 30) 영조의 명에 의해 세워졌다[『영조실록』 30년 12월 12일]. 그런데 이때 표석에 소혜왕후의 출생을 잘못 기록하는 일이 생겼다. 태어난 해는 적지 않고 월과 일만 썼는데, 그것도 9월 8일을 3월 12일로 오기한 것이다. 1793년(정조 17)에 예조 판서민종현(閔鍾顯)이 이를 정조에게 아뢰었다. 그러나 표석을 새로 만들지는 않고, 다만 표석의 뒷부분에 주석을 달아 새기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1899년(광무 3)에는 재실(齋室)이 무너진 지 오래되어 재관들이 거처할 곳이 없다는 보고가 있어 이를 수리하였다.
관련 사항
경릉은 서오릉의 하나로 사적 제19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다른 조선 왕릉과 함께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경릉(景陵)
정의
조선 헌종과 원비 효현왕후김씨, 계비 효정왕후홍씨의 능.
개설
헌종과 두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배치한 삼연릉(三連陵)으로, 오늘날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의 동구릉 내에 위치해 있다. 헌종은 요절한 효명세자(孝明世子)의 아들이다. 1830년(순조 30)에 왕세손으로 책봉된 뒤, 1834년 11월 18일에 즉위하였다. 1849년(헌종 15) 6월 6일에 창덕궁 중희당(重熙堂)에서 승하하자, 효현왕후의 능 오른쪽에 묘향(卯向)으로 장사 지냈다.
헌종의 원비(元妃)인 효현왕후(孝顯王后)김씨(金氏)는 김조근(金祖根)의 딸로, 1837년(헌종 3) 왕비에 책봉되었다. 1843년(헌종 9)에 승하하자, 동구릉 안 건원릉(健元陵) 서쪽에 경좌갑향(庚坐甲向)으로 장사를 지내고 능호를 경릉(景陵)이라 하였다.
계비인 효정왕후(孝定王后)홍씨(洪氏)는 홍재룡(洪在龍)의 딸로, 효현왕후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844년(헌종 10)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이후 1904년(광무 8)에 덕수궁 수인당(壽仁堂)에서 승하하자, 효현왕후의 능 왼쪽에 경좌갑향으로 합장하였다.
조성 경위
효현왕후가 승하하자 시호를 효현, 능호를 경릉이라 하고, 여러 산릉 후보지를 세 번에 걸쳐 간심(看審)한 뒤 목릉(穆陵)의 옛터로 확정하였다. 효현왕후의 장지로 봉표한 곳은 원래 선조(宣祖)의 능인 목릉이 있던 자리였는데, 1632년(인조 8)에 건원릉 동쪽으로 천장하여 비어 있었다. 산릉도감(山陵都監)의 총책임자인 총호사(總護使)는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조인영(趙寅永)이 맡았으나, 두 달 만에 좌의정권돈인(權敦仁)으로 바뀌었다.
그 뒤 헌종이 승하하자 묘호는 헌종, 능호는 숙릉(肅陵)으로 정하고, 총호사에는 영중추부사조인영을 임명하였다. 그런데 효현왕후의 능이 십전대길(十全大吉)의 제일 길지로 낙점이 된 까닭에[『철종실록』 즉위년 7월 6일], 왕후와 합장하고 능호를 그대로 경릉으로 하였다. 조선시대에 왕비가 먼저 세상을 떠나 장례를 치르고 이후 왕이 승하했을 때 왕을 왕비의 능에 합봉(合封)한 사례는 후릉(厚陵), 헌릉(獻陵), 영릉(英陵), 명릉(明陵) 등이 있었는데, 이때 먼저 정한 능호를 그대로 사용한 전례를 참고한 것이다. 다만 선조의 경우에는 먼저 조성한 의인왕후(懿仁王后)의 능은 유릉(裕陵)이었으나, 나중에 선조를 합장하면서 목릉으로 능호를 바꾸었다.
헌종의 계비인 효정왕후는 1904년 1월 2일(양력)에 승하하였다. 이에 특진관(特進官)윤용선(尹容善)을 총호사로 임명하고, 산릉 자리를 경릉 경내에서부터 살피도록 하였다[『고종실록』 41년 1월 2일][『고종실록』 41년 1월 7일][『고종실록』 41년 1월 18일]. 그리고 이듬해 1월 29일에 효현왕후의 능 왼쪽에 합장하였다.
조성 상황
처음 조성된 효현왕후의 능을 중심으로, 왼쪽에 헌종의 능을 조성할 때는 좌측 곡장과 석물을 옮기고, 오른쪽에 효정왕후의 능을 조성할 때는 우측의 석물들을 뒤로 물려서 배치하였다. 최종적으로 능상은 상·하로 구분하여, 상계(上階)에는 곡장을 두르고 봉분 좌·우에 망주석 1쌍을 두었으며, 봉분마다 혼유석을 놓았다. 하계(下階)에는 세 봉분의 중앙에 장명등을 1개 배치하였고, 문인석·무인석 각 1쌍 및 마석(馬石) 2개를 함께 배열하였다. 봉분은 병풍석을 설치하지 않고 난간석만 연결하여 두르고, 좌·우에 양석(羊石)과 호석(虎石)을 각각 4개씩 총 8개를 배치하였다.
변천
1879년(고종 16)에 여러 능의 비각과 정자각을 대대적으로 수리하는 과정에서 경릉의 비각과 정자각도 수리하였다. 이후 1908년(융희 2) 5월 11일에는 헌종을 헌종성황제(憲宗成皇帝)로 추존하고, 표석의 음기(陰記)를 고쳐 세웠다.
관련 사항
경릉(景陵)은 고려 11대 왕 문종의 능호이기도 하다. 고려 경릉은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법창동에 있는데, 1904년에서 1906년(광무 10) 사이에 다른 고려 왕릉들과 함께 여러 차례에 걸쳐 도굴되었다. 이에 조정에서 이를 수리하고 치제(致祭)하도록 했다는 내용이 『고종실록』에 자주 등장한다.
한편 경릉은 조선 세조의 능호로 거론되기도 했다[『예종실록』 즉위년 9월 24일]. 또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능호도 경릉으로 정하였으나, 영조의 능인 원릉(元陵)에 쌍릉으로 조성하게 되면서 별도로 능호를 쓰지 않았다[『순조실록』 5년 1월 18일][『순조실록』 5년 1월 28일].
참고문헌
『[헌종]경릉산릉도감의궤([憲宗]景陵山陵都監儀軌)』
『[효정왕후]경릉산릉도감의궤([孝定王后]景陵山陵都監儀軌)』
『[효현왕후]경릉산릉도감의궤([孝顯王后]景陵山陵都監儀軌)』
곡장(曲牆)
정의
① 능원의 봉분과 석물의 좌우 및 뒤쪽까지 삼면에 둘러친 낮은 담장.
② 궁성 문 곁에 설치한 구부러진 담장.
개설
능원의 봉분 주위에는 먼저 석물을 배치하고, 그 외곽에 개방한 전면을 제외한 삼면을 담장으로 에워싸는데, 이 담장을 곡장이라고 한다. 에워싸는 형태는 여러 종류인데, ⨅형을 기본으로 모서리를 다양하게 꾸며 오각, 육각, 칠각 등으로 만든다. 조선시대에 왕릉을 조성할 때 표본으로 삼은 고려 공민왕의 능에는 ⨅형으로 곡장이 둘러져 있으며, 조선 왕릉에는 오각형으로 이루어진 곡장이 많다. 대개 곡장은 가공한 장대석으로 지대석을 쌓고, 그 위에 전돌이나 기와 조각으로 담을 쌓은 다음, 상부는 기와를 올려 마감하였다. 담벼락은 성석(星石)이라 부르는, 원형으로 가공한 석재를 일정한 간격으로 번갈아 꽂아 장식하였다. 성석은 이름에서 나타나듯, 해와 달과 별을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내용 및 특징
곡장에 대한 기록은 『세종실록』에 처음 등장하는데, 능실의 제도에 봉분 동·서·북 삼면에 두르는 담장은 원장(垣墻)으로, 동서 방향으로 구부러진 부분은 곡장으로 구분하였다[『세종실록』 28년 7월 19일]. 하지만 이후 기록에서는 대부분 봉분 주위에 두른 담장을 곡장으로 표현하였다.
곡장의 규격은 능원의 상황에 따라 달랐다. 1600년(선조 33)에 의인왕후(懿仁王后)의 인산(因山)을 앞두고 담당 관리 등으로 하여금 여러 능의 제도를 두루 살피게 했는데, 영의정 이항복(李恒福)은 의물(儀物)을 설치해 놓은 곳의 거리와 너비가 원래 일정한 규정이 없어 모두 같지 않고 혈이 있는 언덕의 산세에 따라 정하였으므로 일일이 자로 재어서 결정할 필요는 없다고 아뢰었다[『선조실록』 33년 11월 13일]. 또 1611년(광해군 3)에도 봉릉도감(封陵都監)에서 여러 능의 규모와 제도를 조사했는데, 각 능의 봉분 중에 지름이 큰 것은 40여 자이고 작은 것은 20여 자이었으며, 곡장 내부의 폭도 넓은 것은 70여 자이고, 그다음은 60여 자, 좁은 것은 50여 자로 일정하지 않았다[『광해군일기』 3년 3월 24일].
변천
1608년(광해군 즉위)에 선조(宣祖)의 능인 목릉의 곡장을 개축하였는데, 부스러진 잡석을 섞어 쌓은 외면의 대석(臺石)을 모두 바꿔 쌓았다[『광해군일기』(중초본) 즉위년 8월 20일 6번째기사]. 이를 보면 목릉의 곡장은 장대석이 아니라 잡석을 썼다가, 이때 장대석으로 교체한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천재지변으로 인해 곡장과 사초(莎草)가 무너지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그래서 1788년(정조 12)에 편찬된 『춘관통고(春官通考)』에서는 이런 일을 당했을 때 취해야 할 대책을 세부적으로 규정해 놓았다. 이처럼 파손과 수리가 반복되면서 조선시대 왕릉의 곡장은 대부분 줄눈 모양이 바뀌고 줄눈 표면에 장식한 문양도 사라졌는데, 다행히 인조의 능인 장릉(長陵)의 곡장에는 운문(雲紋), 즉 구름무늬가 일부나마 남아 있다.
참고문헌
『춘관통고(春官通考)』
김상협, 「조선 왕릉 석실 및 능상구조의 변천에 관한 연구」, 명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이희중, 「17, 8세기 서울 주변 왕릉의 축조, 관리 및 천릉 논의」, 『서울학연구』17, 2001.
공릉(恭陵)
정의
조선 예종의 원비 장순왕후(章順王后) 한씨(韓氏)의 능.
개설
장순왕후는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한명회(韓明澮)의 셋째 딸로, 성종의 비(妃)인 공혜왕후(恭惠王后)와는 자매간이다. 1457년(세조 3)에 뒷날의 예종인 해양대군(海陽大君)이 왕세자로 책봉된 뒤, 1460년(세조 6)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이듬해인 1461년(세조 7) 11월에는 원손 인성대군(仁城大君)을 낳았으나, 다음 달에 승하하였다. 이에 시호를 ‘장순(章順)’이라 하고 장순빈(章順嬪)으로 삼았다[『세조실록』 8년 2월 4일].
조성 경위
1461년 12월 5일에 장순왕후가 세자빈의 신분으로 승하하자, 이듬해 2월 25일에 오늘날의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리에 안장하였다. 이처럼 공릉은 애초에 세자빈의 묘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빈전도감(殯殿都監)이나 산릉도감(山陵都監)이 아닌 염빈도감(斂殯都監)과 조묘도감(造墓都監)이 설치되어 장례와 관련된 각종 일들을 맡아보았다.
이후 예종이 왕으로 즉위함에 따라 왕후로 추존되었고, 성종대에는 시호를 ‘휘인소덕장순왕후(徽仁昭德章順王后)’로 추존하고 능호를 ‘공릉’이라 하였다. 하지만 추존된 뒤에도 수렴청정을 하던 대왕대비, 즉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가 폐단을 없앤다는 이유로 능침에 더 이상의 의물을 설치하지 못하게 하여 공릉은 왕릉으로서의 격식을 갖추지 못하였다[『성종실록』 1년 1월 25일]. 능에 조성된 석물이 다른 왕릉에 비해 간소한 것은 이 때문이다.
조성 상황
파주 삼릉 중 하나인 공릉은 한북정맥(漢北正脈)에 속하는 개명산에서 분기하여 우암산 비호봉을 거쳐 명봉산에 이르는 능선에 위치해 있는데, 그리 높지 않은 용맥이 능역을 감싸는 지형이다.
재실과 행랑채는 능역 입구 왼쪽에 자리 잡고 있으나, 공릉의 재실인지 조선 영조의 맏아들 진종(眞宗)과 그 비 효순왕후(孝純王后)의 능인 영릉(永陵)의 재실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788년(정조 12)에 편찬된 『춘관통고(春官通考)』에 따르면, 공릉에는 연못이 없으며, 홍살문 서남쪽 170보 거리에 전사청 3칸이 있었다. 또한 제기고는 전사청 옆에 위치하였으며, 안향청은 6칸, 재실은 20칸 서남측으로부터 150보 거리에 있었다.
한편 『능원지(陵園誌)』에 따르면, 정자각은 능 아래 65보에 있으며, 정자각 오른쪽 14보 거리에 수라청 3칸이 있었다. 수복방 3칸은 정자각 왼쪽 14보 거리에 있었고, 정자각 서쪽 49보 지점에는 망료위가 있었다. 또 홍살문은 정자각 동쪽 140보 거리에 있었다.
관련 사항
공릉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이 없으며, 상계, 중계, 하계로 이루어진 층계도 없다. 다만 봉분 좌우에 양석(羊石)과 호석(虎石)이 서로 엇갈려 2개씩 배치되어 있으며, 문인석 1쌍과 마석(馬石) 2개가 설치되어 있을 뿐이다. 이는 장순왕후가 세자빈의 신분으로 승하한 까닭에 왕릉의 예(禮)로써 능역을 조성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또 장순왕후가 추존된 뒤에도 백성들을 대거 노역에 동원하는 등의 폐단을 염려한 대왕대비의 하교에 따라 공릉에는 더 이상의 의물이 설치되지 않았다.
한편 조선전기에는 광중(壙中)에 석실을 두었으나, 세조의 유명(遺命)에 따라 이후에는 대부분 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우는 회격분으로 조성하였다. 예종의 능인 창릉(昌陵)도 마찬가지인데, 공릉은 이와 달리 석실로 조성되었다. 이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왕릉이 아닌 세자빈의 묘로 조성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따라서 공릉은 왕릉의 명칭을 사용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대군과 공주, 옹주의 무덤인 원(園)과 같은 묘제(墓制)를 적용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참고문헌
『춘관통고(春官通考)』
목을수, 『고려·조선능지』, 문성당, 1991.
문화재관리국, 『헌릉(원경왕후능)해체실측보고서』, 문화재관리국, 1989.
은광준, 『조선왕릉석물지 상편』, 민속원, 1985.
은광준, 『조선왕릉석물지 하편』, 민속원, 1992.
김상협, 「조선 왕릉 석실 및 능상구조의 변천에 관한 연구」, 명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이희중, 「17, 18세기 서울주변 왕릉의 축조, 관리 및 천릉 논의」, 『서울학연구』17, 2001.
광릉(光陵)
정의
조선 세조와 비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尹氏)의 능.
개설
조선 왕릉으로는 최초로 석실을 두는 대신 회격, 즉 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지는 방식으로 능을 조성하고 봉분에 석물 치장을 한 점에서, 조선시대 능제(陵制) 변화의 기점이 되는 능이다. 또한 왕과 왕비의 봉분을 같은 능역에 조성하되, 언덕을 달리하여 배치하는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첫 번째 사례로 꼽히기도 한다. 이와 같은 광릉의 능제는 17세기 이후 왕릉의 모범이 되었다. 오늘날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적 제197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성 경위
조선초기에 왕권을 강화하고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데 진력한 세조는 재위 14년 만인 1468년(예종 즉위) 9월 8일에 승하하였다. 뒤를 이은 예종은 선왕의 능을 길지에 모시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종친을 비롯해서 정인지(鄭麟趾), 신숙주(申叔舟), 한명회(韓明澮) 등 세조를 보필하던 중신들이 보름 넘게 여러 곳을 살핀 끝에 9월 26일 양주 땅에 터를 잡았으며[『예종실록』 즉위년 9월 26일], 왕이 직접 현지까지 가서 이를 확인하였다. 능호도 이 무렵에 와서야 ‘광릉’으로 정했다[『예종실록』 즉위년 9월 25일].
왕비 정희왕후는 세조의 등극을 적극적으로 도운 것으로 전하는데, 세조가 승하한 뒤에도 19세에 즉위한 예종을 도와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하였다. 그뿐 아니라 예종이 1년 만에 세상을 뜨고 성종이 13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7년 동안이나 수렴청정을 했다. 이후 1483년(성종 14)에 66세로 승하하자, 광릉 동쪽에 안장하였다. 세조의 능은 자좌오향(子坐午向) 즉 남쪽을 향하여 조성한 데 비해, 정희왕후 능은 축좌미향(丑坐未向)으로 서남쪽을 향하도록 조성하였다[『성종실록』 14년 6월 12일]. 그리고 두 능의 축선이 만나는 지점을 택하여 정자각을 세웠다[『성종실록』 14년 7월 14일].
조성 상황
광릉이 들어선 곳은 본래 이 지역 유력한 문중의 묘소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광릉이 조성되면서 주변 약 20리의 땅이 모두 화소(火巢), 즉 능역에 속하게 되자, 많은 묘소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에 따라 조정에서는 관을 짤 나무를 비롯한 각종 물품을 지급해 주고, 역군 수십 명도 해당 문중에 보내 주었다.
세조는 승하하기 전에,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두지 말라고 유명(遺命)을 남겼다[『예종실록』 즉위년 9월 17일]. 이전까지 능은 석실을 만들고 그 안에 석곽을 두는 것이 관례였는데,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중신들이 석실을 둘 것을 여러 차례 간곡히 아뢰었지만, 예종은 선왕의 뜻을 받들겠다는 뜻을 내세우며 받아들이지 않았다[『예종실록』 1년 1월 3일]. 결국 광릉은 조선왕조의 왕릉 가운데 최초로 석실을 두지 않고 목곽에 목관을 넣고 석회로 메워 다지는 회격분으로 조성되었다. 또한 봉분 주변에는 병풍석과 사대석을 배치하지 않고, 간단히 난간석만 둘렀다. 그밖에 나머지 석물들 즉 혼유석과 장명등, 양석(羊石)과 호석(虎石), 망주석, 문인석과 무인석, 마석(馬石) 등은 다른 왕릉과 유사하게 설치하였다.
한편 광릉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능 남쪽에 봉선사(奉先寺)를 지어 조포사(造泡寺)로 삼았다. 조포사는 제사에 쓸 ‘두부를 만드는 절’이라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능을 관리하고 불교식의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다. 특히 봉선사에는 세조의 영정을 봉안한 봉선전(奉先殿)을 두어, 이곳에서 제례를 지내게 하였다.
광릉은 비록 도성에서 가까운 곳은 아니었지만 세조의 위상이 컸기 때문에, 그 이후의 왕들은 이곳까지 직접 찾아와 몸소 제사를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럴 경우, 왕은 봉선사에도 들러 봉선전에 참배하였다. 1525년(중종 20)에 중종은 이른 아침 경복궁을 출발해 도중에 두 차례 휴식을 취한 다음, 당일 저녁에 봉선사에 도착해서 먼저 봉선전에 참배하였다. 그리고 이튿날 해 뜰 무렵 다시 봉선전에서 다례를 베푼 뒤 광릉에 참배하였다[『중종실록』 20년 3월 9일]. 제례를 거행한 후에는 능 위를 둘러보는 봉심(奉審)까지 하려고 했지만, 당일에 도성에 도착하기 어렵다는 대신들의 만류로 포기하였다.
변천
광릉은 임진왜란 때 왜군의 노략을 당하였으나, 봉선사 승려의 노력으로 세조의 영정은 무사히 보존되었다[『선조실록』 26년 2월 20일]. 난리가 끝난 뒤 영정은 도성으로 옮겨졌는데, 이때 왕과 백관들이 5리 밖까지 나가서 맞이했다고 한다. 세조의 영정이 도성으로 옮겨진 이후에도 봉선사는 광릉의 조포사로서 그 위상을 유지하였다.
17세기 이후에도 조정에서는 광릉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며 지속적으로 보수를 하였다. 1686년(숙종 12)에는 정자각을 중건했다. 『광릉지(光陵志)』에 따르면, 당시 정자각은 정전 6칸에 월랑 2칸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장대석을 6단으로 겹쳐 놓은 높은 지대석 위에 건물을 세웠다고 한다. 정자각 동쪽에는 비각 2칸이 있었다. 정자각 서쪽에는 수라간인 신주 3칸, 동쪽에는 수복방 3칸이 있었고, 남쪽 160보 거리에는 홍살문이 있었다. 1보는 약 1.2m이다. 어정(御井)은 홍살문 동쪽 10보의 지점에 있었다. 왕릉과 왕후릉의 거리는 120보이며, 두 능에서 홍살문까지는 300여 보 거리였다. 이와 같은 숙종 때의 광릉 모습은 오늘날까지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광릉은 18세기에 와서도 능제의 모범으로 받아들여졌다. 1789년(정조 13)에 정조는 부친인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으로 옮기고 그 명칭을 현륭원(顯隆園)으로 고치면서, 석물을 광릉의 제도에 따라 조성하도록 하였다[『정조실록』 13년 8월 16일]. 또한 정조는 1792년(정조 16)에 직접 광릉을 참배하기도 했다. 이때는 양주목 관아를 숙소로 삼아 첫날을 지내고, 이튿날 아침 일찍 능을 참배하고 당일에 환궁하였다.
한편 광릉 주변의 광대한 산림은 조선시대에도 각별하게 취급되었고, 이곳의 나무를 함부로 베는 사람은 처벌을 받았다. 그 덕분에 광릉의 수목은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그 울창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후 일제강점기 때도 산림 보호구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았다. 광릉은 한국전쟁 때도 화를 입지 않고 무사히 보존되었는데, 인근의 봉선사는 건물이 전소되는 피해를 입었다.
관련 사항
광릉은 1970년에 동구릉, 헌릉, 영릉 등과 함께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그 당시의 보호 면적은 105만 9,289㎡였다. 본래 광릉의 영역은 그보다 훨씬 넓었지만, 일제강점기 때 능역의 일부를 임업 시험림으로 전용하면서 크게 축소되었다. 시험림은 광복 이후 산림청의 수목원으로 바뀌어 광릉과 별도로 일반에 공개되었으며, 최근에는 국립수목원이 되었다.
참고문헌
『광릉지(光陵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