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의 시/ 홍수희
슬픔을 극복할 때 사람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픔을 극복할 때 사람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고통을 밟고 일어설 때 사람은 얼마나 위대한가
그때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를 읽었네
눈물에 젖어 활짝 웃는
빛나는 당신의 두 눈동자에서
눈물 속에서 피어나는 인간의 존엄
— 홍수희 「천사의 시」론
홍수희의 「천사의 시」는 짧다. 그러나 짧은 시가 반드시 작은 세계를 담는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은 불과 몇 행 안에서 슬픔·아픔·고통이라는 인간의 시련과 그것을 넘어서는 인간의 존엄, 그리고 그 순간 발견되는 아름다움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이 시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제목인 '천사의 시'이다. 시인은 천사를 직접 등장시키지 않는다. 날개도, 천국도, 신도 없다. 대신 눈물을 흘리면서도 웃을 수 있는 한 인간을 보여준다. 결국 시인이 발견한 천사는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고통을 견뎌낸 우리 곁의 사람이다.
1. 슬픔에서 고통으로 — 점층되는 인간의 시련
첫 연은 세 문장의 반복으로 이루어진다.
"슬픔을 극복할 때 사람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픔을 극복할 때 사람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고통을 밟고 일어설 때 사람은 얼마나 위대한가"
구조적으로 매우 단순하지만 치밀하다.
슬픔 → 아픔 → 고통
으로 정서의 강도가 점점 높아진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평가 역시
아름다운가 → 아름다운가 → 위대한가
로 상승한다.
특히 세 번째 행에서 '극복하다'를 다시 사용하지 않고
"고통을 밟고 일어설 때"
라고 표현한 것이 중요하다.
'극복'이 관념적인 언어라면 '밟고 일어서다'는 육체적인 이미지다. 쓰러져 있던 사람이 자신의 고통을 딛고 두 발로 일어서는 장면이 보인다.
그래서 세 번째 행에 이르면 시는 격언적 진술에서 구체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전환된다.
2. 이 시가 말하는 아름다움은 '상처 없는 아름다움'이 아니다
작품에서 말하는 아름다움은 흔히 말하는 외형적 아름다움과 정반대에 있다.
시인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사람은
슬퍼본 사람이고,
아파본 사람이며,
고통을 겪은 사람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을 겪고도 다시 일어선 사람이다.
따라서 이 시에서 고통은 아름다움의 반대말이 아니다.
고통을 통과한 뒤에도 인간성을 잃지 않는 순간, 오히려 더 깊은 아름다움이 탄생한다.
이것이 「천사의 시」를 단순한 위로시와 구별하게 하는 중요한 지점이다.
3. "그때 나는" — 관념에서 한 사람에게로
두 번째 연에서 작품은 중요한 전환을 맞는다.
"그때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를 읽었네"
첫 연까지는 '사람'을 말한다.
불특정한 인간이다.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나는"
이 등장한다.
보편적 명제였던 이야기가 화자의 구체적인 체험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더 중요한 것은 화자가 '시를 썼다'고 하지 않고
"시를 읽었네"
라고 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 시는 어디에 쓰여 있었을까.
책도 아니고,
종이도 아니며,
원고지도 아니다.
그 답을 마지막 연이 내놓는다.
4. 이 작품의 백미 — "눈물에 젖어 활짝 웃는"
마지막 세 행이 작품 전체를 완성한다.
"눈물에 젖어 활짝 웃는
빛나는 당신의 두 눈동자에서"
아주 아름다운 역설이다.
눈물과 웃음은 서로 반대되는 감정처럼 보인다.
눈물은 슬픔이고,
웃음은 기쁨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둘이 동시에 존재한다.
바로 이것이 시인이 말하는 '극복'의 실체다.
눈물이 사라진 뒤 웃는 것이 아니다.
눈물이 남아 있는데도 웃는 것이다.
이 차이는 매우 크다.
고통을 극복한다는 것은 과거의 고통을 완전히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를 품은 채 다시 웃을 수 있게 되는 것이라는 깊은 인간적 통찰이 담겨 있다.
5. '눈동자'가 한 편의 시가 되는 순간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시적 전환은 사람의 눈동자를 한 편의 시로 읽어내는 것이다.
시인은 종이에 적힌 문장을 읽은 것이 아니다.
고통을 견디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웃고 있는 사람의 눈을 읽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 시"
는 바로 '당신'이다.
이 지점에서 제목 「천사의 시」도 비로소 온전히 이해된다.
당신이 천사이며, 당신의 삶이 시이고, 눈동자가 그 시를 기록한 원고지인 셈이다.
이러한 의미의 확장은 짧은 작품에 비해 상당히 크다.
6. 제목 「천사의 시」가 지닌 의미
흥미로운 것은 본문에 '천사'라는 말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좋은 선택이다.
본문에서 직접
'당신은 천사다'
라고 했다면 작품은 자칫 감상적인 찬사에 머물 수 있었다.
대신 시인은 제목에만 '천사'를 남겨두고 본문에서는 고통을 이겨내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독자가 마지막까지 읽고 나면 스스로 깨닫게 된다.
아, 시인이 말한 천사가 바로 이 사람이구나.
제목과 본문 사이의 이러한 거리는 작품에 여백을 만들어준다.
7. 반복이 만드는 기도와 찬가의 리듬
첫 연의 반복도 주목할 만하다.
슬픔을 극복할 때
아픔을 극복할 때
고통을 밟고 일어설 때
이 반복은 마치 기도문이나 찬가처럼 읽힌다.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감탄 역시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이 아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감탄이다.
따라서 첫 연에는 고통을 견뎌낸 사람을 바라보는 화자의 경외심이 담겨 있다.
화자는 상대를 동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중요하다.
불쌍하다고 하지 않고
아름답고 위대하다고 말한다.
연민의 시선에서 존경의 시선으로 올라선 것이다.
8. 이 작품에서 가장 뛰어난 것은 '절제'다
「천사의 시」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왜 슬펐는지,
무엇 때문에 아팠는지,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바로 이 점이 작품의 장점이다.
만약 구체적인 사연을 길게 설명했다면 한 사람의 개인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원인을 지움으로써 독자는 자신의 경험을 그 빈자리에 넣을 수 있다.
병을 이겨낸 사람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다시 일어선 사람일 수도 있으며,
실패나 가난을 견뎌낸 사람일 수도 있다.
그래서 '당신'은 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수많은 사람이 된다.
9. 평론적 관점에서 본 아쉬움
문학적으로 냉정하게 살펴보면 첫 연의
"슬픔을 극복할 때 사람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와
"아픔을 극복할 때 사람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는 표현 자체로는 비교적 익숙하다.
'슬픔을 극복한다', '아픔을 극복한다'는 말은 일상에서도 자주 사용되기 때문에 시적 낯섦은 크지 않다.
그러나 이 작품은 후반부에서 그 평이함을 만회한다.
특히
"눈물에 젖어 활짝 웃는"
이라는 역설적 장면과
"두 눈동자에서 시를 읽는다"
는 발상이 앞부분의 관념적 언어를 구체적인 이미지로 바꾸어놓는다.
따라서 이 작품의 중심은 사실 첫 연의 선언보다 마지막 세 행의 발견에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종합평가 — 가장 아름다운 시는 사람에게 쓰여 있다
홍수희의 「천사의 시」는 인간의 진정한 아름다움이 상처받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상처받고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에 있다고 말하는 작품이다.
시의 구조 또한 명료하다.
슬픔 → 아픔 → 고통 → 극복 → 눈물 → 웃음 → 빛
으로 나아간다.
결국 어둠에서 빛으로 이동하는 구조다.
그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마지막의 '두 눈동자'다. 눈은 눈물이 흘러나온 자리인 동시에 빛이 들어오는 자리이다. 따라서 '눈물에 젖은 눈'과 '빛나는 눈동자'가 한 공간에 공존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 작품의 주제를 상징한다.
그리고 시인은 그 눈에서 한 편의 시를 읽는다.
이는 시에 대한 아름다운 정의이기도 하다.
시는 반드시 종이 위에 쓰이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의 삶이 시가 될 수 있고,
견뎌낸 시간이 한 행의 시가 될 수 있으며,
눈물 속에서도 다시 피어나는 미소가 한 편의 시가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천사의 시」는 '시란 무엇인가'를 말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짧고 맑은 서정시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고통받은 사람에게 "불쌍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리고 마침내 "위대하다"고 말한다.
그 시선의 높이가 바로 「천사의 시」가 지닌 가장 따뜻하고 품격 있는 미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