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섬기는 신앙, 주는 신앙 / 시 32:1-11, 마 20:20-28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먹을 것이 부족하다든지, 잘 곳이 없다든지, 입을 것이 없다든지 하는 물질의 빈곤에 있지 않다. 목적을 잃어버리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다. 목적을 모르는채 살아가는 것이다. 돈을 벌었지만 왜 애써 벌었는지 그 이유를 모른다. 물질을 많이 가졌는데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고 있다. 궁극적 목적을 모른다. 공부를 한다, 공부를 시킨다. 그런데 왜 공부를 하는지, 왜 공부를 시키는지 모른다. 도대체 궁극적인 목적이 어디 있나? 우리는 많은 수고를 한다. 아침부터 밤까지, 건강을 잃어버리면서까지 일을 한다. 그러나 수고의 목적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불행해지고, 허무해지고, 피곤해진다. 그리고 이 목적이 문제이다. 목적이 의미를 주고, 의미가 가치를 형성한다. 그런데 목적이 없으니 가치기준이 없다. 결국 가치의 상실로 인하여 피곤하게 된다. 또한 목적에 따르는 결단이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추상적 목적이 현실화 되기 위해서는 비장한 결단이 필요하다. 가만히 보면 생각은 있다. 이래야지 저래야지 하고 말을 잘하는데, 그에 따르는 구체적인 현실이 없다. 결단이 없다. 참된 목적이 있다면 참된 결단이 따라야 한다. 목적이 확실하다면 결단은 자동적으로 따라가게 마련이다. 마치 갖고 싶은 귀한 것을 발견했을 때에 있는 것, 없는 것 다 팔아서 그것을 사고 아깝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빌 2:17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간증한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여기서 전제가 무엇인가? 피를 쏟아붓는 제사이다. 목적과 가치가 너무나 뚜렷하고 분명하고 보니, 그대로 피를 토하고 죽어도 좋을만큼 감격하고 있다는 말씀이다. 그만큼 확실한 목적과 그것에 따르는 확실한 결단이 있다는 말씀이다. 목적에 끌려가고 목적에 흡수되는, 아름다운 결단이 없는 인생은 피곤할 뿐이다.
미국의 어느 연구소에서 2,500명을 대상으로 ‘당신은 왜 실패했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설문조사를 하였다. 한 30여가지로 대답한 실패의 원인 중에서 가장 뚜렷하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결단이 없었기 때문에 실패하였다’이다. 어쨌든 결단이 필요하다. 미국의 시인 롱펠로우는 ‘결단하라. 그러면 당신은 자유로워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우리 삶에 자유가 없다면 그것은 확실한 결단이 없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젊은 사람들, 혼기가 가까이 오면 참 고민이 많다. ‘결혼을 할가 말까? 이 사람하고 해야 하나, 저 사람하고 해야 하나’ 하고 고민한다. 그러다가 마땅한 사람이 나타나서 확실하게 결정짓고 일단 결혼을 하고나면 그 고민은 없어진다.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혼한 후에도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 ‘그때 그 사람하고 결혼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하는 미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운명은 정해졌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남편 코고는 소리가 크든작든 이제는 정해진 운명이다. 이 사람하고 평생을 함께 살아야 한다. 아내가 음식을 잘하든 못하든 이제는 그녀와 평생을 살도록 결정되었다. 왜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가? 무릇 결단이 없는 삶이기에 고민을 많다. 결단에는 변화가 없어야 한다. 환경이나 여건, 대상을 따지지 않고, 결정된 구체적인 신앙의 의지는 절대로 변화를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초지일관하여야 한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천지개벽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 결단에는 뱐함이 없어야 한다. 처음의 마음 그대로 사는 사람만이 성공하고, 평안할 수 있고, 자유할 수 있다. 내가 사랑받았다고 남을 사랑하고, 내가 미움받았다고 남을 미워하고, 내가 손해봤다고 남의 것을 빼앗고, 이렇게 종속적으로 흔들리는 사람이라면 하루도 평안할 날이 없다. 그저 사랑하기로 생각하였으면 사랑하고, 일단 남에게 주기로 마음먹었으면 주면 된다.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는, 심지가 견고한 사람에게 자유함이 있다.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고 계신다. 이미 십자가를 지시기로 결심하셨다. 그 불변의 신앙 의지가 성서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십자가를 향하여 가시는 예수님의 뒤를 졸랑졸랑 따라나선 제자들은 너무나 한심하다. 우편이냐 좌편이냐, 우정승이냐 죄정승이냐 하면서 다투고 있다. 빌라도 법정이나 대제사장 가야바의 음모같은, 예수님을 해치려는 세상 이야기는 접어두고라도, 가까이 있는 이 제자들마저 참으로 한심하다. 그러나 이런 것 저런 것 자꾸 생각하면 마음만 흔들린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지 않으셨다. 그저 주려고 하셨기 때문에 주신다. 원칙적인 본래의 목적 그대로 주기로 하셨기에 주실 뿐이다. 사랑하기로 결정하셨기에 사랑하시고, 십자가를 지시기로 결심하셨기에 지실 뿐이다. 어떤 일로도 그 결심은 주저될 수 없고, 방해될 수 없고, 좌절될 수 없었다. 본문 말씀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라고 말씀한다. 처음부터 섬기러왔기 때문에 끝까지 섬기겠노라 하신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한심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사랑을 베푸신다.
흔히들 처음에는 좋은 뜻으로 주려고, 베풀려고, 사랑하려고 마음먹는다. 그런데 도중에 어찌하여 변심하기도 하고, 변덕을 부려서 실패한다.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다. 가장 큰 원인은 이기주의이다. 이기주의처럼 사람의 마음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이기심은 자기양심의 성원을 받지 못한다. 나의 양심은 마음 속의 이기심을 옳다고 성원하지 않는다. 주위 사람들도 반기지 않는다. 나는 잘한다고 하는데 주위 사람들이 나에게 잘못하는 것처럼 느낀다면, 그것은 내가 무엇인가 잘못하고 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나에게는 왜 친절하지 않을까?’ 그 이유는 바로 나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주변에 대한 책임은 내가 져야 한다. 이기적인 사람은 어디서나 환영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고독하다. 고독한 사람은 이기적인 사람이다.
본문 말씀에서 우리는 집단적 이기주의를 볼 수 있다. 가정적 이기주의이다. 어머니가 두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면서 청을 넣는다.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오직 우리 가문, 내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마음이다. 그렇지만 우리 가정, 우리 자손, 우리 가문만 생각하는 집단적 이기주의이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는 마음이 집단적 이기주의이다. 이는 문제이다. 실은 자기도 불행하게 되고, 가문을 위하는것도 되지 않고, 사회에는 비사회적인 행위를 저지르는 것이 된다. 무엇보다도 자기양심의 가책으로 인하여 부끄럽고 다른 사람 보기에도 창피하다. 이기적인 사람은 결코 부끄러움을 면할 길이 없다. 또한 이기적인 사람은 자기가 구하는 것을 모른다. 이기적인 노예가 되기 시작하면 자신이 무엇을 구하는지, 왜 구하는지를 모르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욕심만 있었지,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기가 구하는 것의 대가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다. 이기적인 사람은 허구한 날 교회에 나와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한다. 아무리 기도하여도 응답이 없다. 왜 그런가? 마음의 문이 닫혀 있기 때문이다. 본문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하고 자상하게 설명하신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본문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기적인 사람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질시를 받는다. 적이 많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겠다고 하니, 그 당장에 다른 제자들이 분하여 화를 낸다. ‘네가 뭔데 너만 잘되겠다는 것이냐?’ 모두들 그들을 시기한다. 여러분, 봉사하는 사람이 시기하는 것을 보았나? 이기적인 사람은 언제나 제 생각만 하기 때문에 반드시 적이 있고, 시기 질투하는 사람이 따르게 마련이다.
어느 큰 기업체를 경영하는 장로님이 계신다. 이 분은 일본과 합작으로 벌이는 사업이 있어서 일본 현지에도 자주 가고 친구들도 많다. 어느 정도 일본 기업인들과 허물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 무렵에 그들에게 물어보았다. ‘이상하게도 우리나라 사업이 잘 풀리지 않는데, 우리 한국의 기업들이 잘되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일본인 친구는 ‘한국인은 기술도 있고, 재주도 있고, 눙력도 있고, 자본도 있고 다 갖추었는데 딱 한가지, 애국심이 빠졌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순간 한대 얻어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은 장로님에게 한마디 덧붙였다. ‘적어도 우리 일본 기업인들은 수입을 할 때에 아무리 돈벌 수 있는 상품일지라도 나라에 이롭지 않다고 판단되면 수입하지 않습니다. 제아무리 돈이 된다 해도 나라를 해치는 것이라고 생각되면 절대로 수입하지 않아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나라가 어떻게 되든지 사회가 어떻게 되든지 아랑곳하지 않고 돈만 벌면 그만이라고들 생각하더군요. 아마도 이런 점이 한국의 기업들을 부진하게 만드는 이유가 아닐까요?’ 사실이다. 우리는 너무나 쓸데없는 것들을 많이 수입하고 있다. 필요없는 상품이 상점에 가득하다. 이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지 않고, 그저 저 하나만 잘살면 된다는 태도이다. 제 한몸 편안하고 자식 손자들이 남보다 흥청거리면 그만인가?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 이기적인 생각은 불행의 원인이다. 몸이 편안하다고 마음까지 평안한가? 남의 눈총받고 사는 것이 그리도 재미있나? 이기주의가 큰 불행의 원인이 된다. 집이 좋아서 잠이 잘오나? 침대가 좋아서 잠이 잘오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어떤 소리를 듣고 사느냐가 문제이다. 많은 사람들의 원성을 사고 있는데 그 심령이 어떻게 평안할 수가 있겠나? 양심이 어떻게 평안하겠나? 생각을 고쳐라. 불행, 고민, 고통의 원인은 거기에 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기적인 생각을 지적하고 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그렇다. 높아지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은 낮아진다. 하나님의 심판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적인 생각과 욕망에 메이는 것은 벌써 자기 불행의 시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프랑스의 작가 모파상의 소설 ‘목걸이’의 주인공 마틸드는 아주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의 여인이었다. 돈 많은 사람과 결혼하고 싶었지만 지참금이 없어서 원하지 않았던 아주 가난한 교육부에 다니는 직원과 결혼을 한다. 마음은 언제나 멋지게 살아보고, 화려한 사교계에서 활동하고 싶었지만 뜻대로 안되던 차에, 교육부장관 주최의 파티에 내외가 초청을 받았다. 너무도 좋아하던 마틸드는 파티에 입고 나갈만한 옷을 마련하느라 집을 사려고 모아두었던 400프랑의 돈을 써버렸다. 그런데 목걸이가 없었으므로 돈많은 친구에게 값비싼 진주목걸이를 빌려가지고 파티장에 나갔다. 생전에 소원했던대로 여러 남자들과 춤도 추고, 사교계의 여왕이라도 된듯한 기분으로 시간을 보냈다.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많은 칭찬을 받았다. 썩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면서 보니 그만 목걸이가 없어졌다. 도둑맞은 것이다. 큰일 났다. 그래서 3만6천 프랑이나 되는 빚을 지고 똑같은 목걸이를 사서 친구에게 돌려주었다. 이 빚을 갚기 위하여 마틸드 부부는 10년이나 갖은 고생을 다 한다. 한 순간의 즐거움을 위하여 그토록 엄청난 값을 치러야 했다. 빚을 다 갚을 무렵의 어느 날, 고생으로 찌든 마틸드에게 그 옛날 목걸이를 빌려주었던 그 친구가 말한다. 그때 빌려준 목걸이는 가짜였다고.
여러분, 때때로 우리는 의미없고 부질없는 이기적인 행동때문에 나라를 망치고, 가문을 망치고, 자기를 망치고, 명예 체면 다 잃고, 하나님 앞에도 죄송스럽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왜 이렇게 불행하게 살아야 하나? 자기 희생이 곧 자기 행복임을 알아야 한다.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는 ‘자기를 희생하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다’라고 말했다. 여러분, 언제 이것을 배울 수 있겠나? 언제 가야 깨달을 수 있겠나? 섬김을 받는 것과 섬기는 것, 주는 것과 받는 것은 어느 것이 클까? 여러분은 어떤 기쁨으로 살아가고 있나? 유치한 수준일 때에는 받는 기쁨이 좋지만, 성숙해지면 받기보다는 주는 것이 좋은 법이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란 ‘주는 기쁨’에 살아야 한다. 희생하는 기쁨에 살아간다. 섬기는 기쁨을 즐기는 취향으로 살아간다. 물질을 주고. 목숨을 주고, 의미를 주고, 진리를 주고, 대속물로 주어서 내가 죽고 내가 희생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영광이 돌아가게 하고 의미가 돌아가게 하는 것, 이런 것을 즐기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취향이 되어야 한다. 주는 것은 곧 자발적인 것이어야 한다. 창의적인 것이어야 한다. 억지로 주어서는 안된다. 어떤 사람은 자녀에게 학비를 주거나 먹을 것을 줄 때, 귀한 자녀 있는 것으로도 기쁘고 감사하여, 특히 자녀들의 장래를 생각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무엇이든 준다고 한다. 그런데 꼭 뻬앗기는 마음, 강도만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만 낳을 것을 괜히 셋씩이나 낳아서 다 빼앗긴다’ 하고 후회하는 사람도 있다. 도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속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20년 부부생활을 돌이켜 볼 때에 20년 내내 강간당하는 기분으로 살아왔다는 여자분들도 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왜 아름다운 결혼생활을 자발적으로 기쁜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엮어가지 못하고 평생을 강간당하는 기분으로 산다는 말인가? 왜 자발적이고 좋은 마음으로 주지 못하고, 주는 기쁨으로 살지 못하고, 평생을 강도만나거나 도둑만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나? 어차피 사람이란 다 주고받으면서 살아가게 마련이다. 남에게 주면서 사는 사람이 있고, 남에게 빼앗기면서 사는 사람이 있다. 결국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문제이다. 준 것은 빼앗긴 것이 아니다. 주었을 뿐이다. 항상 베푸는 사람처럼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이다. 본래 사람은 그러해야 한다. 또한 이 마음에 변함이 없어야 한다. 상대가 나에게 어떻게 하였건, 세상이 어떻게 하였건,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처럼 전혀 번함이 없어야 한다. 상대방이 기쁘게 생각한다면 어떤 것이라도 다 베풀고 어떻게라도 섬기겠다는 마음으로 일관하여야 한다.
여러분, 마음 속에 고민이 있는가? 깊이 생각해 보라. 마음 속에 이기적인 생각이 있어서 그렇다. 옛날에 주엇던 것을 이제와서 섭섭하다고 탓하는 사람도 있다. 남에게 주기로 마음먹었으면 고맙다는 소리를 들을 생각마라. 주기로 하였던 것이니 주어버리고, 희생하기로 했던 것이니 희생하는 것이 깨끗하다. 시시하게 섬기려 하다가 섬김받으려 하고, 주려하다가 뺏으려 하고, 변변하지 않은 것 하나를 주어보지도 못한 채 초라하게 살지 말아야 한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섬기고 주러 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는 데에 능력이 있고, 자유가 있고 영원한 영광이 있다. 능력있는 삶, 자유한 삶, 영원한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려면 섬기는 신앙, 주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 섬기는 신앙, 주는 신앙을 갖고 살면서 능력있고 자유하며 주님께 영광돌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1998-04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