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김씨학봉종택(義城金氏鶴峰宗宅. 경상북도 기념물. 경북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856번지)
조선 중기 문신 학봉 김성일(1538∼1593) 선생의 종가이다.
김성일은 선조 1년(1568) 과거에 급제하여 정언과 수찬 나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경상도 초유사로 관군과 의병을 화합시켜 의병의 전투력 향상에 큰 공을 세웠다. 퇴계의 제자로 뛰어난 성리학자이기도 한 그의 학문은 이후 영남학파의 학문 전통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가옥은 一자형 안채와 사당, 문간채, 풍뢰헌, 운장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출처 : 문화재청)
김성일(金誠一. 사순士純,학봉鶴峯,문충文忠.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조선 전기 안동 출신의 문신.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峰). 할아버지는 김예범(金禮範)이고, 아버지는 김진(金璡), 어머니는 여흥민씨(驪興閔氏)로 민세경(閔世卿)의 딸이다. 동생은 김복일(金復一)이다.
김성일은 안동부 임하현 천전리(현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에서 태어났다.
19세에 글을 읽다가 ‘선비가 세상에 태어나서 과거 공부만 하고 진리를 깨치기 위한 도학을 하지 않는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라는 생각이 들어 동생 김복일과 퇴계(退溪) 이황(李滉) 문하에 들어갔다.
이황은 김성일이 민첩하게 배우기를 좋아하고 마음을 세움이 정성스럽고 절실하다고 칭찬하였다.
29세 때 이황은 요(堯), 순(舜), 우(禹), 탕(湯), 문왕(文王), 무왕(武王), 주공(周公), 공자(孔子) 등 16명의 성현들이 전수한 심법(心法)을 차례로 서술한 「병명(屛銘)」을 전수했다.
1590년(선조 23) 52세에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갔다.
김성일은 일본 체류 중에 왜인들의 무례를 엄격히 따지고 조선 사신의 체모를 강조하였다.
당시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은 “오랑캐와는 겨룰 필요가 없으며 자그마한 예절은 다툴 것이 못된다.”라고 했으나 김성일은 “나라의 체면을 높이고 체모를 중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듬해 귀국하여 황윤길이 병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한 데 반해 김성일은 그렇지 않다는 주장을 했다. 이와 같이 정사와 부사의 엇갈린 보고에 대해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은 “황윤길이 돌아와 조정에 보고하기를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는데, 김성일은 아뢰기를 ‘그런 낌새를 보지 못했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내가 김성일에게 ‘그대의 말이 황 상사와 다른데 만약 전쟁이 일어나면 어찌할 것인가?’ 했더니, 그는 ‘난들 어찌 왜가 끝내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보장할 수 있겠는가마는 황윤길의 말이 너무 심해 조정과 백성들이 당황하므로 이를 완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라고 하였다.”라고 수기에 기록하고 있다. 보고한 것과 달리 이듬해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김성일을 잡아들이라는 명을 내렸다.
김성일은 “한 번 죽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라는 장계를 올리자 선조가 감동하여 서울에 가는 도중에 경상우도초유사(慶尙右道招諭使)에 임명하여 다시 영남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귀임 후 초유문을 지어 경상도 내에 포고하고 김면(金沔)과 정인홍(鄭仁弘)을 의병대장으로 삼았으며, 특히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와 감사 김수(金睟) 사이의 알력을 적극적으로 중재하여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는 데 노력하였다.
공을 인정받아 가선대부의 품계가 내려졌으나 1593년 경상우도순찰사 재임 중 진주 공관에서 병사하였다.
학문 경향의 측면에서 볼 때 김성일은 이황에게 수학할 당시부터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에 관해서는 그다지 흥미를 갖지 않았다.
현재 남아 있는 그의 저술에도 이기심성론에 관한 글은 찾아보기 어렵다. 예컨대 『학봉집(鶴峰集)』에 있는 글들은 대개 시사(時事)에 관한 시(詩)와 문장이며 그나마 학문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는 「상퇴계선생문목(上退溪先生問目)」과 「상퇴계선생서(上退溪先生書)」 정도이다.
그 내용은 상장제례의 절차에 관한 세세한 질문이거나 일상적인 문제들의 처리에 관한 질문으로 이론적이거나 사변적인 문제와는 거리가 멀었고 실용적이었다.
예학(禮學)에 있어서 고례와 인정을 중시하는 퇴계 예학을 계승하여 부친상을 당해서는 모든 예절을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행했으며, 『두씨통전(杜氏通典)』, 『구씨의절(丘氏儀節)』, 『향교예집(鄕校禮輯)』 등을 참고해 『상례고증(喪禮考證)』을 지었다.
출사 이후에는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경세론 내지 개혁론을 개진하였다.
김성일은 31세에 문과 급제한 후 56세에 진주 공관에서 순직할 때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벼슬길에서 보냈기 때문에 많은 제자를 양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학맥에 내포된 지역적 혈연적 요소가 크게 작용하였고 대표적인 제자 장흥효(張興孝)의 활약으로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장흥효의 뒤를 이어 이휘일(李徽逸)-이현일(李玄逸)-이재(李栽)-이상정(李象靖)-남한조(南漢朝)-류치명(柳致明)-김흥락(金興洛)으로 한말까지 이어지면서 퇴계학파 내에서 최대의 학맥을 형성하였다.
문집으로 『학봉집』 16권 10책(원집 7권, 속집 5권, 부록 4권)이 있으며 저술로는 『해사록(海槎錄)』, 『상례고증』, 『조천일기(朝天日記)』, 『기묘일기(己卯日記)』, 『북정일록(北征日錄)』, 『조선연혁풍속고이(朝鮮沿革風俗考異)』 등이 있다.
문집은 1649년(인조 27) 이홍조(李弘祚), 김시온(金是榲) 등이 여강서원(廬江書院)에서 원집을, 1782년(정조 6) 김주국(金柱國), 이상정(李象靖) 등이 속집을 간행하였다.
묘소는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서지리 산75·3에 있다.
1605년(선조 38) 선무원종공신가의대부이조참판에 추증되고, 1664년(현종 5) 신도비가 세워졌다. 1676년(숙종 2)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1679년 ‘문충(文忠)’의 시호가 내려졌다.
임하현의 임천서원(臨川書院)·여강서원(뒤에 호계서원으로 개명됨)·사빈서원(泗濱書院), 영양의 영산서원(英山書院)과 경덕사(景德祠), 나주의 대곡서원(大谷書院, 뒤에 경현서원으로 개명됨), 의성의 빙계서원(冰溪書院), 하동의 영계서원(永溪書院), 청송 안덕현(安德縣)의 송학서원(松鶴書院), 진주의 경임서원(慶林書院) 등에 배향되었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鶴峯 金誠一 선생에 대하여
휘(諱)는 성일(誠一)이요, 자(字)는 사순(士純)으로 본관(本貫)은 의성(義城)이다.
학봉선생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선조(宣祖)원년(1568)에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등을 역임하였다. 임란시 경상도 초유사(招諭使)에 임명되어 민중의 궐기를 호소하는 초유문을 지어 각 고을에 보내 의병의 궐기와 지원을 극력 종용하였다.
특히 관병과 의병을 잘 조화하여 임진왜란의 삼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을 거두었다. 이듬해 왜적과 사력을 다한 독전 중 병을 얻어 56세에 진주성에서 순국하였다. 뒤에 임천서원(臨川書院)에 제향되고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되었으며 문충공(文忠公)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퇴계선생의 적전고제(嫡傳高弟)로서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영남학파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으며, 그 학통은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를 거쳐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밀암(密庵) 이재(李裁),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손재(損齋) 남한조(南漢朝), 정재(定齊) 류치명(柳致明),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 鶴峯先生의 11代孫)에 이르기 까지 면면이 이어지고 있으며 저술로는 해사록(海槎錄), 상례고증(喪禮考證), 경연일기(經筵日記) 등과 문집(文集) 16권이 전해오고 있다.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 사빈서원(泗濱書院), 임천서원(臨川書院), 영양의 영산서원(英山書院),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하동의 영계서원(永溪書院), 청송의 송학서원(松鶴書院), 나주의 경현서원(景賢書院), 진주의 경림서원(慶林書院)등에 제향되었다.
학봉 종택은 口자형 정침을 비롯하여 사당(祠堂), 풍뢰헌(風雷軒), 유물을 보관한 운장각(雲章閣), 학봉기념관(鶴峯紀念館), 문간채 등 100여칸의 건물이 고색창연하게 위치하고 있다. 특히 운장각에는 경연일기(經筵日記), 해사록(海槎錄) 등 학봉 친필 원고와 사기(史記),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교서(敎書), 유서류(諭書類) 등의 고문서 503점이 보물로 지정되어 보관되어 있다. 현재의 집터인 금계(金溪)는 이곳 사람들이 '검제(黔提)'라 부르며, 조선 전기부터 천년동안 결코 그릇된 일이 없을 명당중의 명당(천년불패의 땅)으로 손꼽히던 곳이다. 학봉선생께서 마흔다섯이 되던 1582년에 2,000여 평의 터에 집을 지으셨다.
사진·동영상 촬영 및 편집 : 대경상록자원봉사단 영상반(이남 회원. 이태희 회원. 김성호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