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이규봉 교수의 불로그에 올린 글입니다.-
-"푸른 역사"의 '미안해요 베트남'에 대한 월남전 참전자의 반론글-
이규봉 선생.
나는 이선생이 썼다는 월남전에 참전 했던 32만명을 폄훼하고 전장에서 앞서 전사했거나 전쟁 후
고엽제 같은 전쟁 후유증이나 고령으로 사망한 전쟁영웅들을 욕되고 화나게 했다는 책을 읽지는 못
했습니다.
전쟁이 지난 반세기 가까운 세월이 지난 후에 현지를 답사하고 현지 주민들(특히 주월 한국군에 대
해 감정이 좋지 않은 사람들을 상대로)을 상대로 대담도 가진 근거를 가지고 책을 쓴걸로 압니다.
전쟁은 보는 방향에 따라 다른 평가가 나올수는 있습니다.
전후에 미국이나 자유진영에서 발간된 책들,언론들 그리고 월남전을 이야기로 엮은 많은 영화들이
있었습니다.
그것들의 대다수는 월남전에 대한 미국의 개입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들이 많았습니다.
일부 독자들을 늘리고자 하는 상업적인 장사꾼 심리에서 호도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대다수가 합당
한 평가였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떠한 이유에서 시작 되었던간에 전쟁 자체는 찬양할수 없는 인류 최대의 비극인것입니다.
전쟁은 진정한 진실 보다는 힘에 의한 답을 얻고자하는 무리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전쟁을 통해서 많은 인명의 손실이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그 가운데는 본의아니게 양민의 인명피해가 있기 마련입니다.
반면에 양민 못지 않게 주둔군이나 진격하는 군대의 인명 피해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월남전에 참전한 한국군인에 의한 의도적인 대학살은 없었습니다.
있을수가 없었습니다.
전쟁포로(월남양민 혹은 베트남공산군)들 재판 과정에서 낱낱히 밝혀졌고 무리한 양민살해가 밝혀
지면 한국군 본인은 물론 지휘관이 큰 문책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규봉 선생은 1958년생이면 금년 53세 입니다.
내가 월남전쟁터로 떠나던 1967년 이선생은 당시 9세의 초등 2년생 이였습니다.
월남참전군인들에 대한 전송마당에도 나올 나이가 되질 못했습니다.
현지를 답사하고 당시 피해가족을 면담했던 이야기를 주로 적은 책이라 전해들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샅샅히 현지를 답사하고 인터뷰를 했다고 해도 월남전에 참전한 실재 경험자들 만큼
월남전쟁 현장에 대해 더 정확하게 안다고는 말할수 없을것입니다.
만약 끝까지 월남전을 모두 알고 꿰차고 있다고 말하면 그것은 이선생 본인과 양심을 속이는 죄인
이 됩니다.
본인은 1967년 파월되어 1970년에 귀국 했던 월남전 참전자 입니다.
나는 월남전 참전 기간 상당기간 작전 전후 정보를 입수하고 작전 후 현장에서 작전결과를 조사하
고 분석해서 보고하는 일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민간인 복장으로 많은 시간을 월남인들과 함께하며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나름 월남전쟁과 우리한국군, 그리고 월남민간인들에 대해 비교적 많이 안다고 자부하고 있
습니다.
만약 이선생이 이번의 말썽 많은 책을 쓰기전에 나를 만났더라면 아주 훌륭한 많은 자료들을 얻어
서 아주 훌륭한 책을 꾸밀수도 있었을 겁니다.
월남전쟁중 우리 한국 군인들이 월남 양민들을 위해서 얼마나 지극 정성을 쏟았는지 직접 대민작전
에 참여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모릅니다.
저는 1970년 월남에서 귀국해서 (당시 학생신분으로) 산사에서 사법고시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봄날 어느날 산사로 배달된 일간지 신문 앞면에 "신춘문예 현상모집"이라는 "사고"를 접했습니다.
불현듯 머리에 떠오르는게 있었습니다.
내가 오랜기간 참전하면서 보고 체험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책을 쓰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시공부를 하던 책을 덮고 원고지 채우기에 삼매경을 했습니다.
물론 함께 공부하던 4촌 동생이 죽기살기 말렸씁니다.
지금은 한국사회 지도급 인사로 성장한 4촌 동생의 심각한 지경에 이르도록 심한 만류도 뿌리치고
나날이 원고의 두께를 더해갔습니다.
책의 주 내용은 전쟁의 비참함과 양민도, 주둔군도 적군도 모두가 피해자라는데 촛점이 맞추어졌고
전쟁을 통해 생존의 존엄과 가치가 쓰고버린 휴지처럼 땅바닥으로 추락한 전쟁속의 슬픈인간들의
아픈곳을 글로 나열하는 참전수기와 같은 내용이였습니다.
단기간에 완성한 원고플 신문사에 제출했습니다.
제출한지 며칠만에 어느 노신사가 내가 머무는 산사를 찾아왔습니다.
손에는 두툼한 봉투를 들고,
그 노신사의 손에 든것은 내가 제출했던 현상모집 원고였습니다.
그분은 먼저 제게 "미안하다"는 사과를 했습니다.
심사위원장이였던 그분의 말씀인즉, 내가 제출한 원고는 반전작품이라는게 첫번째 이야기였습니다.
그 작품이 서방세계나 자유진영 국가에서면 큰 호응과 함께 사회적으로 크나큰 반능을 일으킬 작품
이지만 우리나라 현실에는 맞지 않는다는 말씀이였습니다.
좋은 작품이 세상으로 태어나지 못하고 유산되는 아픔을 나눈 우리는 훗날 좋은 날을 만나면 책으
로 발표하라는 말씀을 남기고 헤어졌습니다.
아마 지금쯤 발표 되었다면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을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젊은 패기는 내 원고를 산사의 뒷마당에서 한장한장 불에 태우며 누구도 원망하지 않
고 나 스스로의 맹세를 굳혔습니다.
"내가 다시 글을 쓰면 사람의 새끼가 아니다"고.
그 후로 문필생활은 하지 않았지만 백정이 버들을 물고 죽는다는 이야기 같이 저의 평생 대다수 시
간을 종이에 먹칠하는 일(언론인)을 하면서 살와왔습니다.
지금 도 그 당시에 내가 섰던 글의 일부를 기억 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당시 우리 한국군 병사가 죽으면 전사후 24시간 안으로 유가족에게 전사통지서가 전
달이 됩니다.
그리고 전사위로금 미화 $200 이 전달 되었습니다.
그런데 충격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 한국군이 작전 중에서 운전병이 실수로 월남인들 소유의 소 한마리를 죽이면 당시 미화 $700
을 물어주었고, 닭 한마리를 죽이면 $200 상당의 돈이나 물품으로 보상을 하고 월남 양민의 상한
마음을 달래느라 별의별 짓들을 다 했습니다.
월남전 당시 우리 한국군은 월남 양민들에 대한 대민사업에 많은 예산과 시간,정성을 쏟아습니다.
물론 작전중 일부 양민의 인명피해는 있을 수 있었습니다. 전쟁 이니까.
그 피해는 우리 한국군인이 입은 인명 피해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러나 고의적인 양민집단 학살이라는 용어가 나올 정도의 막무가내의 참혹한 행위는 절대 없었다
고 맹세코 이야기 할수 있습니다.
서울을 가본 사람 보다 가보지 않은 사람이 남대문을 더 잘안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그 안다는 서울 이야기는 일반적인 구전을 통한 무책임한 이야기일수 있습니다.
이규봉 선생.
모처럼 한권의 히트 작품을 남기고팠던 마음은 충분히 이해 합니다.
그러나 꼭 전쟁후의 이야기를 쓰려하셨다면 우리의 동포들인 32만 전쟁영웅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공적을 치하하고 승화시키는 글을 써야만 했었습니다.
분명한것은 한국인은 어느 누구도 한국군의 월남전 참전의 공을 폄훼하거나 헛되게 해서는 않된다
는 이야기 입니다.
인생의 황금기를 전장에서 보낸 32만명의 숭고함을 나무라고 폄훼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적이요, 배
신자요 비민족적 비양심적 처사이기 때문입니다.
만에 하나 꼭 책을 남기고팠으면 (읽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책의 서두에 참전자 32만명의 공적을
치하하고 희생자들의 영령을 기리면서 "이책은 월남전을 바로 보지 못하는 일부의 사람들과 가진
인터뷰를 나열한 글이니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는 양해를 구하는 말로 시작되었어야 했습니다.
이규봉 선생.
53세 이면 우리 참전자 세대가 보면 아직 한창 어린사람 입니다.
젊은 오기나 소영웅적 발상에서 그런 책을 썼다면 지금이라도 그 오기와 소영웅적 작은 영웅심리를
접어주시기를 간곡히 호소 드립니다.
휼륭하고 좋은 존경받는 학자로 남기를 기도 드리겠습니다.
1967년~70년 월남전 참전 대한민국 국가유공자
-황금박쥐-
jounnara1004@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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