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초등학교 2,3학년 이전의 기억이랄 게 거의 남아 있질 않지만, 이상하게도
‘청년’이었던 아버지의 작은 서재의 풍경만큼은 사진으로 찍어
놓은 듯, 또렷이 머릿속에 담겨 있다. 어디에 어떤 책이
자리하고 있었는지 너무도 생생하여, 지금이라도 손을 내밀면 마음먹은 책을 당장 끄집어 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이백의
<山中問答>이 새겨진 병풍이 둘러져 있던 작은 방, 한글을 간신히 읽어내던 아이에게는 ‘형상/이미지’로 각인되어버린 책 제목들의 글꼴과 색감까지가 아직도 눈 앞에
환하다.
<씨알의 소리> 영인본, 뿌리깊은나무의
<한국의 발견> 시리즈, 후쿠오카 마사노부의 <생명의 농업>, 이태형의 <별자리여행>,
사토우치 아이의 <원예도감>, 열화당의 <초가>, 대원사의 <빛깔있는
책들> 시리즈, <피카소 전기>, 정신세계사의 <성자가 된 청소부>, 아버지가 총서기로 일하셨던 성서유니온에서 펴낸 성경해석 및 묵상관련 단행본들, 창조과학회의 각종 단행본들, <칼뱅전집>, <삼국지>, <목민심서>, <다경>, <음악의 유산> 시리즈, 영화 <마농의 샘> 그리고 <미션>의 화보집, 518희생자들의 모습이 검게 삭제되어 있던 광주 한 초등학교 졸업사진이 실려있던 '노래를 찾는 사람들' 음반의 팜플렛들, 풀빛출판사의 <광주오월민중투쟁사료전집>, 윤동주와 괴테의 시선집, 문익환 목사님의 시집 <두 하늘 한 하늘>,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족보(!) 등등.
TV 따위의 오락매체가 일체
없는 적막한 집안에 혼자 갇혀 있던 아이는, 소위 ‘아동서적’의 극히 ‘아동스런’ 내용에
질려버린 이후부터 하는 수 없이 ‘어른’의 경계를 슬슬 침범하며 아버지의 서재를 탐색하기 시작하였고, 어느
시점부터는 아버지의 책들과 은밀히 ‘벗’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런
일관성이 없는 내 인생이 하도 한심하여 오늘 잠시 그 까닭을 헤아려보니, 마구잡이로 살아왔지 싶은 ‘정신 줄 놓은’ 내 인생에도 단 하나의 ‘법칙’이 있었고, 그건
다름아닌, 내 삶의 모든 움직임이 마치 북극을 가리키는 자침마냥 ‘아버지의
서재’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서재’라는 장소의 무서움을 깨닫기까지 사십 년 가까운 세월이 걸렸다. “애들은
가라”는 어른들의 엄포가 실없는 엉너리가 아님을 너무도 늦게 알게 된 것이다. 아버지의 서재의 모방이거나 확장일 뿐, 나는 영영 나만의 ‘서재’같은 것은 갖추지 못할 것이다.
마치 ‘나만의’ 인생 같이 것이 애초에 없었고, 아버지의 못 다 이룬 의욕의 ‘연장’으로서의 수행성의 흐름만이 나를 거쳐 유유히 흘러갈 뿐이듯.
아, 그러나, 내 아비 역시도 그 아비의 서재를 훔쳐본 죄로 인해 이번
생을 통으로 그 죄값을 치르는 일에만 집중하고 계실 뿐일 터. 그렇다면 항상 미완으로 남고야말 이 모든 '의욕'의 역사를 기획한 ‘최초의 아비’와 그이의 손끝에서 빚어진 ‘최초의 서재’가, 나와 내 아비들의 '개체없음'이라는 사건의 발단인
셈인데, ‘최초의 아비와 그 서재’라는 기원은 이미 아득한
神話이니, 여태 사람인 나는 내 답답한 심중을 절절히 토로할 아무런 대책이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아버지의 서재 속에서, 무수한 아비들이 품었을 간절한 바램들의 누적과 응축으로 인해 미로가 되어버린 '장소' 안에서, 재바르게 빠져나갈 오솔길 하나도 얻지 못한 채 하 세월 방황케 된 내 어리석은 처지에 관한 '변'이 이리도 궁색하니, 내 아비(들)의 서재 속으로 서러운 몸을 숨기며 그림자 속 한시절을 다시 도모하는 일밖에, 달리 '탈출'의 묘수가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