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와 꿀
최 순 태
고향집 오래된 사진첩에서 아버지가 젊은 시절 중절모를 쓴 모습을 보았다. 요즈음젊은이들은 중절모는 잘 쓰지 않고, 스포츠를 하거나 레저를 위한 용도로 모자를 주로 사용하고 있으나, 그 때는 많이 애용하였다.
농번기에 농부들은 푹푹 찌는 뙤약볕으로부터 더위를 피하고 머리를 보호하려고 밀짚모자를 쓰고 농사일을 하였다. 태양을 직접 쐬지 않는 동시에 시원하여 땀을 씻어주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평소에는 모자를 잘 쓰지 않는다. 직장에 다닐 때 일본에 다녀올 일이 있어서 여러 가지를 준비하던 중 아내가 모자도 필요하다며 근사하고 비싼 모자를 구입해 주었다.
나는 아내의 정성어린 모자를 쓰고 해외여행을 시작하였다. 먼저 오사카 간사이공항에 도착하여 오사카 성, 예전 일본 수도인 쿄토, 나라를 둘러보고 일본의 수도 동경(東京)의 동경도청 건물을 관람하고, 카나가와현에 들러 하코네 국립공원을 구경하였다.
그 공원은 지금도 화산활동을 하는 곳인데 곳곳에서 펄펄 끓는 온천수가 품어져 나오고 계란냄새가 나는 수증기가 자욱했다. 또한 온천물에 계란을 삶는 장면이 목격되었고, 곳곳에 유황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그런데 나는 내가 탄 버스에 모자를 두고 내리고 말았다. 가이드에게 얘기하니 수소문하여 찾아보겠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귀국하고 나서도 감감 무소식이었다. 다른 나라에서 잃어버린 물건을 찾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난생 처음 큰마음 먹고 산 모자가 내 곁을 떠난 순간이었다. 그 이후에도 등산을 하거나 체육대회에 모자를 쓰기도 하였으나, 그런 일에는 비싼 모자는 필요 없고 그 용도에 맞으면 그만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40주년이 되어 모교에서 전국 동기회모임을 할 때 은사님들을 모시는 뜻깊은 행사가 개최되었다. 서울, 부산, 대구 등에서 모인 동기들이 모교로 모여 들었다. 각 지역별로 각종 찬조가 들어왔다.
그 중 서울에 거주하는 친구가 동기들을 위해 멋진 골프용 모자를 선물하였다. 연한 회색인 그 모자는 왼쪽으로 약간 비딱하게 경사를 준 멋진 모자였다. 나는 이 모자를 쓰고 등산을 가거나, 야유회에 갈 때 즐겨 사용하였다.
아들도 좋아하여 밖에 나갈 일이 있으면 애용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집에서 갑자기 모자가 사라졌다. 궁금하여 아들에게 물어보니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잘 모른다고 하였다. 이제 모자는 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소유로 바뀌었다.
아들은 미안한지 “언젠가 집안 어디에서 나오겠지요.”하며 말은 하였으나, 어디에서 분실되었는지 모르는데 찾을 도리가 없었다. 이제 그 모자는 내가 남덕유산 등산과 거문도 관광할 때 찍은 사진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다.
모자 분실 사건 후 어쩌다 모자 이야기만 나오면 나는 아들에게 농담을 한다. “모자라고 하면 ○○○ 아니냐.”라고 놀려 주기도 한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할 때 마다 아내도 옆에서 거들기도 한다. 요즈음도 수시로 이러한 농담을 하여 집안의 분위기를 반전시키기도 한다.
어릴 때 농촌 집 담은 진흙을 개어 돌과 섞은 뒤 담 지붕을 짚으로 엮어서 만들었다. 짚으로 만든 지붕에 토종벌들은 벌집을 지어 부지런히 꽃을 돌아다니며 꿀을 따서 집으로 옮긴다.
우리들은 벌들이 모아놓은 토종꿀을 먹기도 하였는데 그 꿀맛은 양봉 꿀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달고 맛이 좋았다. 이러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던 나에게 지인이 토종꿀 한 병을 선물하였다.
귀한 꿀이라 조심스럽게 간수 하였는데 아이들이 만지다가 그만 병을 깨뜨리고 말았다. 주방에 꿀과 유리조각이 흩어져 엉망이 되었다. 급히 아이들이 다쳤는지 살펴보니 다행히 다치지는 않았다.
당시 경황이 없어서 주방을 닦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병과 꿀을 다 치우고 나니 없어진 꿀이 아까웠다. 내가 먹고 싶어도 이미 내 것이 아닌 것이다. 이때부터 우리 아이들은 별명이 “모자 하면 ○○○, 꿀 하면 ○○○"이다.
이렇게 나를 떠나버린 모자와 꿀은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서서히 잊혀졌다. 꿀은 양봉 꿀을 수시로 사다 먹으니 별로 생각나지 않았으나, 동기회 모임이 있을 때 내가 잃어버렸던 모자와 똑 같은 모자를 쓰고 나타나는 친구들을 보면 불현듯 모자가 생각난다.
모든 물건이나 자식들도 내 옆에 있을 때 소중하나 이미 떠나갔을 때 무용지물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새삼 새기고 있다. 요즈음 유행가에도 “있을 때 잘해, 후회하지 말고.”란 가사도 있지 않은가? 정녕 나는 그 모자를 다시 만날 수는 없는 것인가?(2019. 6. 2) (2019 문학예술 여름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첫댓글 누구나 살아가며 격을 수 있는 평범한 이야기를 실감나게 그려 주셨군요. 아끼고 소중한 물건이던 그렇지 않는 보잘것 없는 물건이든 본의 아니게 잃어버리면 한동안 무척이나 아깝고 마음이 쓰이는 것은 누구나 당연한 일입니다. 더욱이 내가 좋아하고 소중히 여기던 물건을 잃어버리면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경험을 저도 했습니다. 잃어버린 모자가 다시금 선생님을 찾아오길 기원하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모두 잊고 살고, 잃어버리고 살고, 그리고 내 곁에 있다해도 세월이 가면 없어지거나 버려지는 것,
그래서 따지고 보면 내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래전에 본 영화에서 여주인공이 절벽에 떨어뜨린 머리핀을 찾아 헤매던 기억이 납니다. 가게에서 흔히 파는것 인데도 어머니의 유품이라 소중하게 간직한다며. 누구에게나 추억이 깃든 물건이 있지요. 잘 읽었습니다.
모자와 꿀에 얽힌 사연을 리알하게 잘 묘사했습니다. 살아가면서 흔 히 겪을 수 있는 일이긴 힙니다만 경험자를 통해 들으니 더 재미있습니다. 모자를 잃고 아쉬운 마음을 농으로 돌리는 여유가 좋습니다.
흔히 잘 잊어버리는 것이 우산이고 다음이 모자일것 같습니다. 사모님이 선물한 모자이니 많이 섭섭했나 봅니다. 그러나 나의 품을 떠난것은 잊어버리는것이 마음편하겠지요. 잊어버리지 않아도 언젠가 나를 떠나갈 것들이니까요. 잘 읽었습니다.
사모님께서 사주신 모자를 일본여행중 잃어셨네요. 잃어버린 내 물건은 아주 조그만한 것이라도 아깝고 찜찜하지요.
저도 스위스 융푸라우 정상에서 사진을 찍다가 저도 금방사서 처음쓰고 있던 코오롱스포츠 등산모를 사진을 찍다가 눈이 쌓인 계곡아래로 바람에 날려 보냈지요.동양에서 산 모자를 서양계곡에 얌전히 갇혀있을 내 모자가 누군가가 이쁘게 쓰고 있으면 좋겠네요.
무엇이든 아끼던 물건을 잃어 버리면 한 동안 애통하여 생각이 나곤 하지요. 그러다 세월이 지나면 잊곤 하는데, 친구들과 같은 모자를 선물받으셨으니 친구들이 쓰고 오는 모자를 볼 때마다 더 생각나고 아까운 생각이 드시겠어요. 누구나 일생을 사는 동안 잃어버리고 사는 것이 얼마나 많을까요? 그나마 모자이니... 하고 위안을 삼으셔요. 재미잇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물건 하나도 다 인연이 있어 내게로 왔을텐데 잃어버렸을 때 특히 아쉬운 경우가 있더군요.. 모자와 꿀.. 오래 사용하지도 실컷 먹지도 못하고 떠나보낸 것들이 아쉽지만 가족간에 서로 배려하고 아껴주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몇번 있었습니다. 특히 제대로 사용도 못하고 잃어버렸을 때 더욱 아쉽고 속상합니다.그래도 아쉬운 마음을 농담으로 달래는 선생님의 여유가 삶의 지혜인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