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강릉 농상(農商) 축구 정기전
1940년대 초,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때부터 시작된 강릉농고(農高/1928년 개교)와 강릉상고(商高/1938년 개교)의 축구 정기전은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에피소드도 많다.
일제 때 조선총독부에서는 한국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불순한 일(독립운동)을 모의한다고 의심하여 무조건 막았고, 무지막지한 탄압으로 악명이 높았지만 이 강릉의 농상 축구정기전과 강릉 단오제는 막지 못했다고 한다.
강릉 사람들은 유독 축구를 좋아해서 어찌 보면 고등학교 아이들 축구인데도 대회가 열리는 날이면 점잖은 갓쟁이 영감님들은 물론 심지어 아낙네나 할머니들까지도 시장보따리를 머리에 인 채 운동장으로 모여들곤 했다.
두 학교는 영동지방을 대표하는 라이벌 축구팀이었고 실력도 막상막하였다. 뿐만 아니라 전국대회에서도 항상 상위권을 유지하였다. 그러니 두 학교는 영동지방의 맹주 자리를 놓고 죽기 살기로 대회에서 이기려고 했던 것 같다.
축구시합이 절정에 오르면 두 학교의 선배들이나 학부형들은 물론 선생님들까지도
‘저 9번 새끼 까 버려!!’, ‘밟아 버려!!’
등 살벌한 소리도 서슴지 않아서 당시 중학생이던 우리를 놀라게 했다.
또 양교는 응원전이 볼만 했는데 특히 카드섹션을 잘했다. 농고의 심벌은 호랑이, 상고의 심벌은 독수리였는데 나중에 보니 서울의 고연(高延)전과 꼭 닮았다. 또 두 학교의 브라스 밴드도 굉장히 잘했는데 시합 내내 학생들의 함성 소리와 밴드소리, 징, 꽹과리 소리로 시내가 떠들썩했다.
시합이 열리는 날은 밴드부의 힘찬 행진곡에 맞추어 전교생이 시내 대로(大路) 한가운데를 줄맞추어 행진하여 남산 밑 공설운동장으로 가는데 경찰들이 나와서 차들이 다니지 못하게, 길옆에 정차하여 학생들 행렬이 지나갈 때까지 움직이지 못하도록 지켜 서 있다.
일사 분란한 카드섹션은 몇 개월에 걸쳐 연습을 하곤 했는데 정말 멋졌다고 생각된다. 시골 노인네들은 축구 경기 내용보다는 오히려 이 카드섹션을 보려고 모여들었던 것 같다.
매년 대회가 열리면 승부에 집착한 나머지 두 학교 간에는 싸움이 대판 벌어지고는 했는데 한 해도 싸움 없이 그냥 지나가는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시합이 시작되기 전부터 응원전이 과열되기 시작하여 서로 야유를 하다가는 상대방 응원단석으로 쳐들어가기도 하는데 가까스로 떼어 말려 시합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두 학교는 앙숙도 그런 앙숙이 없을 정도로 정말 견원지간(犬猿之間)이나 다름없었다.
어른들은 물러나 지켜보고 학생들이 싸움판을 벌였는데 좀 심하게 싸웠다. 2~30명 씩 몰려다니며 몽둥이와 돌팔매를 서슴지 않아서 시내 가게들은 문을 닫고 철시를 해야 할 형편이었다. 두 학교의 졸업생들은 차마 같이 나서지는 못하고 전투(?)에 나서는 후배들한테 술을 먹인다든지, 몽둥이를 공급한다든지... 아무튼 2~3일 동안 한바탕 난리를 겪고 나서야 잠잠해 지곤 했다.
경찰들도, 어른들도 그냥 말리는 시늉만 할 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는데 그러다 보니 학생들은 더욱 신이 나서 날뛰고....
이 양교의 싸움이 어쩌면 강릉지방의 문화가 되어버린 듯 했다.
시장 상인들이고 농촌 사람들이고 모여 앉으면 올해는 농고 애들이 밀렸다더라. 상고 애들 몇 명이 다쳐 병원으로 실려 갔다더라.... 등 오히려 얘깃거리로 삼고 즐겼던 것 같다.
싸움 없이 그냥 지나가는 해가 있으면 사람들은 의아하게 여기며 서운하다는 표정들을 감추지 않았다.
농상 축구 정기전은 매년 5월 단오제 행사 중의 한 종목으로 치러졌는데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였던가 좀 험악하기는 했지만 무사히 경기를 마쳤는데 그 해는 농고가 졌었던지 농고 형들이 상고 놈들 그냥 안둔다고 설치기 시작하자 담임선생님은 우리들을 운동장 주변에 얼씬거리지 말고 빨리 집으로 가라고 서둘러 귀가를 시켰다.
다음 날, 아무 것도 모르고 등교를 했는데 교문까지 가지도 못하고 중간 골목길에 선생님과 고등학교 형들이 서 있다가 오늘은 휴교라고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멋도 모르고 돌아 서면서 나중 들으니 양교 학생들이 서로 상대방 학교로 쳐들어 간 모양이었다.
학생들은 학교를 지키는 ‘수비군’과 상대방 학교로 쳐들어가는 ‘공격군’으로 나누어 몽둥이, 곡괭이, 삽 등으로 무장하고 나섰는데 우리 학교도 교문에서 대치중이었던 모양이다.
시내의 골목길에서도 마주치면 몽둥이고 돌맹이고... 닥치는 대로 후려갈기고 집어던지니 대형 유리창이 깨어지고, 밀리는 학생들이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오니 문짝이고 뭐고 망가지는 통에 시내의 가게들이 모두 셔터를 내리고 노점상들도 모두 피신했다고 한다.
농고 돌격대가 상고 교문을 부쉈다는 둥, 병원에 몇 명이 실려 갔다는 둥.......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어이가 없는 노릇이다. 나는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 진학과 동시에 가족이 서울로 이사를 왔는데 어언 50년이 지났으니 그 이후의 자초지종은 잘 모르겠다.
언제였는지 양교의 싸움이 하도 극심하니 강릉시장이 나서서 농상 축구 정기전을 아예 없애버렸다고 한다.
그 이후 강릉상고는 강릉제일고등학교로 교명을 바꾸고 인문고가 되었고, 강릉농고는 중앙고등학교로 교명이 바뀌며 농공고등학교로 바뀌었다.
그러나 오랜 역사의 농상 축구 정기전을 되살려야 한다는 시민들의 의견이 많아 두 학교는 합의가 되어 지금은 다시 열린다고 하는데 그 옛날의 열정이 지금도 있는지, 지금도 싸움판이 벌어지는지는 잘 모르겠다.
두 학교의 정기전은 많은 부작용을 낳기도 했지만 우리나라 축구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그 이후 주문진 수산고등학교도 축구를 잘해서 합류했다.
강릉상고(제일고)에서 배출한 축구선수 중에 국가대표로 활약한 설기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