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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예수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니, 헤롯왕이 그 소문을 들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세례자 요한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났다. 그 때문에 그가 이런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하고,
15. 또 더러는 "그는 엘리야다" 하고, 또 더러는 "옛 예언자들 가운데 한 사람과 같은 예언자다" 하였다.
16. 그런데 헤롯이 이런 소문을 듣고서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살아났구나" 하고 말하였다.(마가복음6:14-16)
14. Now King Herod[a]heard about all this, because Jesus' reputation had spread everywhere. Some people were saying, “John the Baptist has come back to life! That is why he has this power to perform miracles.”
15. Others, however, said, “He is Elijah.”
Others said, “He is a prophet, like one of the prophets of long ago.”
16. When Herod heard it, he said, “He is John the Baptist! I had his head cut off, but he has come back to life!”
14. 예수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니, 헤롯왕이 그 소문을 들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세례자 요한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났다. 그 때문에 그가 이런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하고,
14. Now King Herod[a]heard about all this, because Jesus' reputation had spread everywhere. Some people were saying, “John the Baptist has come back to life! That is why he has this power to perform miracles.”
15. 또 더러는 "그는 엘리야다" 하고, 또 더러는 "옛 예언자들 가운데 한 사람과 같은 예언자다" 하였다.
15. Others, however, said, “He is Elijah.” Others said, “He is a prophet, like one of the prophets of long ago.”
오늘 본문은 예수의 이름으로 시작됩니다.
예수의 이름!
이 성경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신앙 고백했는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예수님에 대한 고백들은 전부 틀린 것들입니다.
죽은 요한 살아나서 예수님 안에서 활동하신다는 것도
예수님 안에 역사하는 요한도
엘리야도
또 예수님은 선지자 중의 하나도 아니셨습니다.
오늘의 내용은 사람들의 예수님에 대한 짝뚱 고백들이었습니다.
옆집 아저씨가 나이도 키도 비슷하니 우리 아빠라는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입에서는 예수하면 그리스도라는 고백이 저절로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 예수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또 이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관건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바른 고백이 생명을 이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은 예수께서 누구시냐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을 펴시면 가장 먼저 중요하게 다루는 것이 바로 이 주제입니다.
주님의 공생애가 시작되자 마귀가 이 주제를 들고 나왔습니다.
3. 그런데, 시험하는 자가 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마4:3)
예수님이 누구신가?
마귀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기적을 통해서 입증하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본격적으로 이 주제를 언급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미친 바다에 휩쓸려 그들이 죽게 되었을 때입니다.
41.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서로 말하기를 "이분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그에게 복종할까?" 하였다.(막4:41)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잔잔해진 바다를 보면서 그들이 했던 말입니다.
저 분이 누구신가?
우리 입에서는 예수 말하면 저절로 그리스도가 따라서 나오지만 성경에서는 그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모든 우여곡절을 겪고 나서 예수님을 제대로 고백한 것입니다.
가이샤랴 빌립보를 아실 것입니다.
거기에서 베드로는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게 되는데 그 때는 예수님의 공생애의 끝자락이었습니다.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
17.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시몬 바요나야, 너는 복이 있다. 너에게 이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시다.
18. 나도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세력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 내가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16:16-19)
이 본문을 보자면 성경이 베드로의 이 그리스도 고백을 얼마나 중요하게 다루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이 고백을 통해 베드로는 천국의 열쇠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또 이 고백이 얼마나 어려운 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 고백을 위한 어려운 과정은 필연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하나님의 아들이심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확증되실 것입니다.
공생의 시작 마귀는 쉬운 방식으로 이 고백을 끌어내라고 예수님을 유혹했던 것입니다.
3. 그런데, 시험하는 자가 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마4:3)
5. 그 때에 악마는예수를 그 거룩한 도성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자기 천사들에게 명하실 것이다.' '그들이 손으로 너를 떠받쳐, 너의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할 것이다' 하였다."(마5,6)
주님은 그런 쉬운 방식을 거부하신 것입니다.
역으로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의미를 모른 채로 너무 쉽게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흥회 때 박수를 치면서
드럼을 두들겨대면서 이성이 마비된 상태에서 그런 식으로 예수님의 이름 뒤에 그리스도를 붙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귀의 요구의 방식이 아닌가!
JMS 신천지 통일교.......
그들로 이 난리가 일어나는 것은 그리스도의 그 뜻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이름을 알리시기 위해 열두 제자를 사람들에게 보내셨습니다.
72인은 사람들에게 보내신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당시에 예수님의 그런 수고가 없었더라도 주님의 소문이 쫙 퍼졌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호락호락하지가 않습니다.
살다보면 우리가 밟고 있는 땅이 흔들리더니 산이 무너지고 그 산이 바다로 빠지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당장에 피난처가 필요한 순간들입니다.
아이고, 하나님.......
그런데 2,000년 전입니다.
한 사람이 가는 곳마다 그 하나님의 나라가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나병 환자가 낫고
중풍 병자가 걷고
귀신이 튀어 나가고
미친 바다가 잔잔 해지고
당시에 자신의 땅이 흔들리던 사람들은 그 소문이 나기도 전에 예수님의 소문에 촉각을 세웠던 것입니다.
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시며, 우리의 힘이시며, 재난이 있을 때에는 우리 곁에 계시는 구원자이시니,
2. 땅이 흔들리고 산이 무너져 바다 속으로 빠져 들어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는다.(시46:1,2)
무슨 말이냐면 세상에는 들을 필요가 없는 정보들이 수두룩하다는 것입니다.
필요 없는 정보들......
그런 정보는 귀에 대놓고 알려주어도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버렸을 것입니다.
젊은이들은 제 말에 화를 내겠지만 어떤 친구들은 연예인의 생일까지 외우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무엇 때문에 외우고 다녀!
우리 아이들이 연예인 생일 운운했다면 나는 아이에게 화를 벌컥 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교회의 말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오늘 교회가 전하려는 정보들이 연예인 생일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엄청난 비용이 드는 군청 앞에 성탄 장식
어느 목사 카페 교회 차린 것
누구나 죽음이라는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 교회가 그 영생의 문제가 아닌 커피 끓여놓고 음악 틀어놓고.......
교회가 소 기르는 것
예수님의 초청이 있는데 교회가 소도 사야하고 장가 가야하고
최 권능 목사님이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면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이 그날 밤에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괴로움에 며칠을 밤을 새우고 예수 귀신 쫓아 달라고 제 발로 교회를 찾아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의 한 마디에 하나님 나라의 실체가 그대로 드러나버렸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의 증거의 말씀에 그의 영혼이 흔들려버린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노비 문서를 다 태워버리고 하녀를 양딸로 삼고.......
그 일이 다 예수님의 이름을 듣고 일어난 일들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에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실체가 있었습니다.
교회가 천당과 지옥을 가르는 하나님의 말씀을 못 전하고 있습니다.
2,000년 전 예수님 당시 상속 문제를 현명하게 해결해 주는 것이 랍비들이 했던 일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당시 랍비 대해 왔듯이 자연스럽게 주님께 그 부탁을 했던 것입니다.
13. 무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내 형에게 명해서, 유업을 나와 나누라고 해주십시오."
14.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분배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15. 그리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조심하여, 온갖 탐욕을 멀리하여라. 재산이 차고 넘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눅12:13-15)
예수님의 호통은 “당신의 네비게이션에 잘못된 주소지 쳤소.”라는 지적이십니다.
성전 문 앞에 깡통을 두고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가 있었습니다.
6. 베드로가 말하기를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하고,
7. 앉은뱅이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는 즉시 다리와 발목에 힘을 얻어,
8. 벌떡 일어나서 걸었다.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다.(행3:6-8)
성경이 하나님 성전 앞에 깡통을 앞에 모셔둔 거지를 그려둔 것은 성전에 대한 신랄한 지적입니다.
이 앉은뱅이의 관심사는 깡통을 채울 동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손에 실제로 동전이 하나도 없던 사람 또 그것에 관심도 없었던 한 사람이 이 거지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이 사람이 먼저 한 것은 네가 원하는 돈은 나에게 없다는 선언입니다.
그리고 다른 것을 제시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거지의 소망은 오늘 저녁 굶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자신의 소망이 이루어져도 내일 아침에는 깡통을 찾아들고 미문 앞을 다시 찾아야 하는 소망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말하는 소망을 다른 것입니다.
이 앉은뱅이 거지가 일어나서 성전으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뛰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깡통의 돈과 예수님의 이름의 대결입니다.
그 사람의 입에서 그 예수님의 이름이 드러나자 그 거지가 벌떡 일어나더니 다음 날 아침에는 깡통 들고 미문 앞을 찾아가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란 그런 것입니다.
이런 일은 처음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 이름의 능력을 제자들을 통해 처음 경험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란 김 아무개 이 아무개의 뜻도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예수님의 이름이란 예수님의 실재를 이르는 것입니다.
그 분의 현재(God’s presence)를 이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교회에 앉아 있는 것도 바로 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예수님의 현재를 경험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달내 교회에서 예수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였습니다.
베드로가 성전 미문 앞에서 전했던 바로 그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저에게 무슨 능력이 있겠습니까?
저에게는 앉은뱅이를 일으켜 뛰게 할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제가 낙담에 빠진 여러분에게 희망을 주며 또 어떤 귀신을 몰아낸다는 것입니까?
제가 아닌 예수님의 이름이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단순한 예수님의 호칭에 불과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자 예수님의 현재 예수님의 실재하심이 그를 번쩍 일으키신 것입니다.
주님은 적극적으로 그 이름으로 구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14.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14:14)
제자들은 이 예수님 이름을 부르는 사람에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하게 하실 것입니다.
12.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요14:12)
사람들이 이 예수님의 이름에 촉각을 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현재하시는 경험 때문입니다.
물론 상속받은 재산을 제대로 분배해 달라고 예수님을 찾아갔다가는 호통을 당할 것입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의 한 번의 기도에 형님이 악몽을 꾸더니 동생에게 상속의 반을 제대로 챙겨주시는 기적을 요구한 것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주님은 나에게 왜 연예인의 생일을 묻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자신들이 모른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깡통에 돈 채우는 것을 제 소망으로 삼고 일찍 성전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이 중요한 것을 모릅니다.
“깡통의 돈이 중요하다. 무슨 예수님의 이름이냐!”
애굽에서 백성들이 400년 동안 대충 고난을 감수하면서 살았습니다.
애급 군인에게 회초리질을 당하면 그 날 저녁 등짝에 머큐롬을 바르며 이렇게 사는 것이 인생이나보다 했습니다.
발로 걷어차이면 엎어져서 애급 군인 앞에 빌었습니다.
그런데 바로가 아들을 낳는대로 죽이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이 일은 머큐롬 바르고 며칠 자고 나면 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하나님 이름을 부른 것입니다.
사람들은 웬만해서는 하나님을 부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때는 달랐습니다.
내가 이런 땅에 살 수 없는 것이구나.
아 이런 왕 밑에서 사람이 살 수 없는 것이구나.
내 자식의 죽음이 하나님을 부르게 하더니 그 부름이 출애급의 동기가 된 것입니다.
또 이 예수님의 이름에 촉각을 세우고 있던 사람은 헤롯이었습니다.
성경은 헤롯이 이 예수님의 이름을 들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이름을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가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사람들에게 폭력을 일삼는 독재자였지만 그는 하나님의 영적인 실재 앞에 두려움에 떠는 썩을 인간에 불과했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그는 육체는 죽일 수 있지만 영혼을 죽일 수 없는 자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독재자들에게 하도 당하다 보니 힘 있다는 모든 자들에게 의심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하늘에 절대자이신 예수님은 누구신가?
세상을 창조하시는 전능하신 능력을 가지셨으니 그도 횡포 하시는 왕은 아니신가?
특별히 예수님은 안식일 문제를 두고 당시의 지도자들과 많이 부딪히셨습니다.
이 때에 세상의 권력자들과 하늘의 능력이신 예수님 사이에 차이가 뚜렷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당시의 지도자들에게 평일날 길을 가다가 배고파서 밀이삭을 비벼 먹는 것은 문제시 안 했습니다.
하지만 배고팠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 규정을 어기면서 밀이삭을 비벼 먹었을 때는 가차 없었습니다.
23.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시게 되었다. 제자들이 길을 내면서, 밀 이삭을 자르기 시작하였다.
24. 바리새파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어찌하여 이 사람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2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렸을 때에,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를 너희는 읽지 못하였느냐?
26.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다윗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제사장들 밖에는 먹지 못하는 제단 빵을 먹고, 그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27.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28. 그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조차도 주인이다."(막2:23-28)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로써 배고픈 사람의 실존을 가장 우선에 두셨습니다.
사람이 고픈 배를 채우는데 다른 것을 따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종교가 이념이 되어서 사람을 괴롭히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가장 중요한 것을 여러분 자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탕자가 못된 짓을 하고 배고파서 집에 돌아왔을 때입니다.
그 때 이 탕자가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을 당한 것입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은 아버지의 대접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왔다고 잔치를 베푸셨습니다.
그럴 일이 아닌데.......
아버지는 확고하셨습니다.
그냥 그대로 집에 돌아오면 다 된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 당장 돼지 똥 냄새에 코를 내 두를 수 없는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목욕시키면 되니까!
그 존재 자체가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형은 동생의 실존이 아닙니다.
저 놈의 윤리가 형편이 없다고 아버지와 대판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주님 앞에 앉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헌금했냐 구제했냐 안식일은 제대로 지키냐 그것을 물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아 네가 이 교회 장의자에 앉아 있구나 그것을 참 기쁨으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에 무슨 일을 하시라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식사 준비 주차 정리 성가대 반사 뭐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존재를 그대로 하나님 앞에 앉혀두라는 것입니다.
3. 예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서 가운데로 나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4.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그들은 잠잠하였다.
5. 예수께서 노하셔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들의 마음이 굳어진 것을 탄식하시면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 사람이 손을 내미니, 그의 손이 회복되었다.(막3:3-5)
안식일의 규율이 우선이 아닙니다.
이 장애인의 슬픈 현실이 문제였습니다.
거기에 윤리 나부랭이가 끼어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도자들이 교리를 내세우면서 본말을 전도시킨 것입니다.
그 비참한 장애의 실존의 회복이 그들의 교리의 성취를 위해서 유보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 일에 대해 대노 하신 것입니다.
6. 그러자 바리새파 사람들은 바깥으로 나가서, 곧바로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를 없앨 모의를 하였다.(막3:6)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마치 아버지에게 대든 큰 아들과 같습니다.
저거 교리가 형편없다!
교리의 실천이 우선이냐 아니면 그 실존적인 필요를 채우느냐 이 문제로 그들은 예수님과 충돌한 것입니다.
이 문제는 예수님 편에 서느냐 예수님을 죽이는 편에 서느냐의 문제를 이르는 것입니다.
실존의 문제를 간과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무지의 결과입니다.
공산당이니 죽여도 된다는 것은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지금도 굶주린 북한의 동포들을 어떻게 할 것입니까?
굶어 죽어가는 백성들을 뒤로 두고 비만에 가까운 딸에게 수백 만원짜리 옷을 입혀서 나타나는 김정은은 아주 비정상입니다.
남이나 북이나 독재는 막상막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을 도와야 합니다.
북한에 죽어가는 동포가 있습니다.
그 김정은에 대해서도 당장에 죽일 놈이라고 멱살을 잡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랬다가는
28. 주인이 종들에게 말하기를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였다. 종들이 주인에게 말하기를 '그러면 우리가 가서, 그것들을 뽑아 버릴까요?' 하였다.
29. 그러나 주인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그것과 함께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마13:28,29)
이데올로기를 주장하며 적대로 몰고 가는 것은 본말을 전도시키는 일입니다.
남과 북이 불바다가 되는 일입니다.
그 일은 주님의 뜻을 완전히 역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데올로기로 사람 잡고 있습니다.
얼마 전 3.1절에 일장기를 단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목사입니다.
뉴라이트라는 이데올로기를 말하는 목사를 주의하십시오.
우리는 지금 실존을 중시하라는 주님의 계명 앞에 놓인 것입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이데올로기를 말하는 그 원로는 기독교를 빙자한 사업가에 불과합니다.
요즈음은 유명세를 이용해서 실버 사업을 잘 하고 있습니다.
그 목사로 인해 친일 문제가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는데 그가 능구렁이처럼 설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말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자신이 가진 윤리의 잣대를 가지고 동생을 향해 탕자는 굶어 죽어도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거역하는 악랄한 형의 소행입니다.
거지가 되었든지 과거에 무슨 일을 했든지 돼지 똥 냄새에 절었든지 돌아온 동생이라는 실존이 중요합니다.
특별히 기독인들이 무지하게 이데올로기를 주장하며 남과 북의 사람 죽이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에 따라서 자유 이념이 중요할 수도 있고 평등 이념이 중요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저는 둘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절반은 죽임당할 처지입니다.
인간 지가 무엇을 얼마나 안다고 제 지식을 절대시 하나!
실존이 중요합니다.
종말에는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사탄의 무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제 종교 이념을 실천하는 자들입니다.
여러분 JMS를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 단체의 이름이 기독교 복음 선교회입니다.
그들은 여지없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대놓고 그리스도를 역행하는 저질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이름을 사칭하는 그들에게 속아 넘어가는 경우 엄청난 불행을 당할 것입니다.
8.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는 속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는 '내가 그리스도다' 하거나 '때가 가까이 왔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따라가지 말아라.(눅21:8)
이 종말의 적그리스도에게 등장하는 것이 바로 예수의 이름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거짓 그리스도들이 믿는 사람들을 실족케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더 어이없는 일이 있습니다.
이 거짓 그리스도 이름을 통해 자기 자신을 속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국 돌이킬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잃고 천국 문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 일을 당할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이르지만 사탄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자기 기만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마 7:21~23)
내가 예수님의 이름을 수없이 부르다가 눈떠보니 지옥 가게 생겼더라는 것입니다.
그 일이 내게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21.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7:21)
주의 이름으로 많은 헌금을 하면서 내 잘난 척하려는 것이 아닌지 나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차라리 헌금을 일절 하지 말고 비난을 듣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 비난을 듣게 되면 일단 사람이 교만해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헌금 다 해놓고 정말 바보짓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들을 두고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23.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그런 것들도 반드시 했어야 하지만, 이것들도 소홀히 하지 말았어야 했다.(마23;23)
십일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존재의 문제입니다.
정의 자비 신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예수의 이름을 적대하는 경우를 목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기모순은 신약성경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65. 그 때에 대제사장은 자기 옷을 찢고, 큰소리로 "그가 하나님을 모독하였소. 이제 우리에게 무슨 증인들이 더 필요하겠소? 보시오, 여러분은 방금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들었소.
66.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하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대답하기를 "그는 사형을 받아야 합니다" 하였다.(마26:65,66)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들은 예수님을 적대하다가 막판에 그 말을 듣게 된 것입니다.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마 7:23)
하나님의 뜻인 자기 희생의 십자가를 감당하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국회의원 중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기독교인인 줄 몰랐습니다.
바이든을 날리면이라고 남을 속이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짓말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무당에게 안수하는 것은 목사가 할 일이 아닙니다.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은 자들에게 화해하라는 것은 뒤죽박죽을 만드는 일입니다.
그 뉴라이트 무리 뒤에 기독교 사업을 잘하는 가짜 목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정의와 사랑입니다.
제 사업하는데 예수님의 이름을 가져다 붙이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상관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자들에 동조하는 사람은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 거절당할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주님의 이름은 죄인을 하나님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주님의 이름을 널리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당시 헤롯 왕은 동생의 부인을 빼앗아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 일은 명백하게 하나님께 죄를 지은 것입니다.
왕의 타락은 국민에게 엄청난 위험입니다.
본훼퍼의 말과 같이 운전사가 미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친 운전사에게 우리의 생명을 맡기고 있습니다.
진정한 목자는 양을 위해 생명을 버릴 각오를 해야하는 것입니다.
요한이 왕에게 정치 발언을 했다면 그것은 국민의 생명 때문입니다.
요한이 경제를 말했다면 국민의 생명 때문입니다.
실은 왕에게 해야 할 말을 백성들은 모두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의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담보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주위에는 바이든을 날리면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만 득실거렸습니다.
아부하는 간신배들만 득실거렸습니다.
그래 놓고는 일요일이 되면 성경 들고 가서 교회 제일 앞 좌석을 차지하고 앉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을 알고 있던 요한은 이 왕의 잘못을 지적했습니다.
더욱이 놀라운 일입니다.
18. 요한이 헤롯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러 차례 말하였기 때문이다.(막6:18)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말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바로 이 문제가 잘못되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 사람을 대놓고!
그 잘못을 지적한 것입니다.
요한은 또 그 일을 반복해서 말한 것입니다.
그래도 헤롯은 요한을 옥에 가두고 죽이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헤롯도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었고 하나님의 사람인 요한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불행한 일이 생긴 장소는 그 호화판의 무도회장이었습니다.
그 호화판 문화가 그런 행위를 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들이 행복한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는 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백성을 죽음에서 건져주려던 요한이 그 호화판 무도회에서 죽고 만 것입니다.
그 요한이 죽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백성들의 예수님을 보는 입장과 헤롯의 입장은 전혀 상반되었을 것입니다.
백성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가장 먼저 생각해 낸 것은 그 분이 요한이었으면 한 것입니다.
그 요한의 영혼이 예수님 안에서 활동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백성들의 고백에는 또다시 요한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담겨 있습니다.
물론 이 요한은 예수님의 삶에 대한 중요한 암시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그 요한의 길을 가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하시다가 죽임을 당하실 것입니다.
정의를 부르짖는 사람들은 그런 죽음의 운명을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각오가 없이 하나님의 일은 불가능합니다.
저만 빌붙어서 살겠다고 바이든을 날리면이라고 박자 맞추어주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없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우며 회개가 그 전제 조건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는 죄인의 죄를 지적하지 않고는 버티어 낼 수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1. 그 무렵에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서, 유대광야에서 선포하였다.
2. 그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말하였다.(마3:1,2)
16. 그런데 헤롯이 이런 소문을 듣고서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살아났구나" 하고 말하였다.
16. When Herod heard it, he said, “He is John the Baptist! I had his head cut off, but he has come back to life!”
사람들은 예수님을 두고 요한이 다시 살아서 그 가운에 능력을 행하는 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엘리야나 아니면 다른 예언자 중 하나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에 따라서 예수님을 다양하게 고백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헤롯은 그 고백들 중에서 이 예수님에 대해 이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살아났구나"
“He is John the Baptist! I had his head cut off, but he has come back to life!”
섬뜩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헤롯이라고 여기시고 이 말을 속으로 중얼거려 보시기 바랍니다.
느껴지는 것이 없습니까?
이 고백은 헤롯이 요한을 죽인 다음 얼마나 두려움 속에 살고 있는지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는 그 전에는 요한이 혹시 하나님의 사람아닌가 했습니다.
그런데 요한을 목 베고 확실하게 안 것입니다.
요한은 분명히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니 의로운 사람만 보면 요한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가 밤에 제대로 발 뻗고 잠을 잘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평화로운 마음을 가지려면 범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법대를 다니는 똑똑한 청년입니다.
하지만 학비가 없어 휴학까지 해야 했습니다.
시골의 여동생과 어머니가 타는 연금에서 용돈을 받아 살아가고 있는데 방세는 몇 달이나 밀려 있었습니다.
그가 살던 슬럼가에 전당포 하나가 있었습니다.
한 노파가 운영했는데 그 녀는 가난한 자들이 들고 오는 물건에 푼돈을 쥐여주며 많은 이자를 매겼습니다.
하루라도 약속을 어기면 저당물은 처분해버리는 식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던 것입니다.
이 청년은 이런 사악한 노파를 죽이고 그 돈으로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그 일은 한 사람을 죽이고 수백 수천 명을 살릴 수 있는 일입니다.
그는 틀림없이 그 일이 옳다고 여기고 그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 노파를 죽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 이때 노파의 백치 여동생이 살인 현장을 목격한 것입니다.
도끼를 내리쳐서 그 녀까지 죽이고 말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여태껏 만나본 적이 없는 자신과 대면하게 된 것입니다.
그 날 아침의 자신은 공포에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노파를 죽이기 전에는 안 보였는데 영적인 현실이 손에 잡힐 듯이 뚜렷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떨면서 자신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그런 공포심이 엄습할 줄 그들은 미처 몰랐던 것입니다.
죄를 범해보고 알았습니다.
10. "하나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제가 들었습니다. 저는 벗은 몸인 것이 두려워서 숨었습니다" 하고 그가 대답하였다.(창3:10)
라스꼴리니꼬프는 사람을 죽이고 나서 하나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헤롯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물론 그가 요한을 죽이기 전에도 그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차마 죽이지 못하고 옥에 가두어만 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의인을 목을 베자 그 영적 현실이 한 발짝 뚜렷이 자신에게 다가온 것입니다.
여러분 며칠 전 신문을 보십시오.
전두환 손자에게 실은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그는 마약을 먹고 괴로워했습니다.
우리는 구경꾼에 불과하지만 그는 마약을 먹고 전신에 문신을 새겨도 전두환의 손자라는 쇠고랑을 벗을 길이 없습니다.
그 일이 전두환의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에게까지 일어나고 있습니다.
노태우 후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런데 노태후의 후손들은 돈만 내놓을 것이 아니라 요한의 목을 쳤던 그 군사 정보들도 다 털어놓아야 합니다.
아니면 쑈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대를 물리며 괴로워할 것입니다.
국사책에 그들의 이름이 기록될 것입니다.
당장에 현 정권의 바이든이 날리면으로 들렸던 기독교인들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적 실제에 두려워 떠는 날이 올 것입니다.
속히 그들의 잘못을 시인하는 길 외에 길이 없습니다.
백성들은 요한의 부활을 바라는 자였습니다.
하지만 헤롯은 요한의 부활을 두려워하는 자였습니다.
요한은 부활을 믿고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은 것입니다.
요한은 정의와 사랑의 잣대를 가지고 심판하실 하나님을 알며 그 나라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일을 선택한 것입니다.
라스꼴리니코프와 전두환은 사람 죽이고 나서 그 영적인 영역을 확인했지만 여러분은 사람을 죽이고 나서 그 영적인 현실을 확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하나님의 나라를 확인하는 중입니다.
그 일이 예배입니다.
그래서 시행착오(try and error)의 방식은 사탄의 방식입니다.
시행착오를 통해 진리를 확인했을 때는 이미 지옥에 발을 딛고 서 있는 때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죄인들에게 알려주겠습니다.
의인을 죽인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의인들은 죽어서도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14. 예수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니, 헤롯왕이 그 소문을 들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세례자 요한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났다. 그 때문에 그가 이런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하고,
14. Now King Herod[a]heard about all this, because Jesus' reputation had spread everywhere. Some people were saying, “John the Baptist has come back to life! That is why he has this power to perform miracles.”
15. 또 더러는 "그는 엘리야다" 하고, 또 더러는 "옛 예언자들 가운데 한 사람과 같은 예언자다" 하였다.
15. Others, however, said, “He is Elijah.” Others said, “He is a prophet, like one of the prophets of long ago.”
사람들 중에는 이제 예수님을 엘리야라고 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바알의 예언자 450 명과 갈멜산에서 대치했던 선지자였습니다.
왕이 주인을 죽이고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일을 단죄했습니다.
이 일을 조정한 것은 그의 부인 이세벨이었습니다.
백성들은 또 예수님을 선지자 중에 한 명이라고도 했습니다.
이 고백들이 예수님을 거부하는 고백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예수님을 인정한 것입니다.
아버지와 나이도 비슷하고 키도 비슷하니 옆집 아저씨를 아버지라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정확하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그들과 명확하게 다른 일을 하셨습니다.
주님이 하신 일로써 주님은 사람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무엇보다 중요하므로 주님께서 같은 문제를 두 번 질문하십니다.
27.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빌립보의 가이사랴에 있는 여러 마을로 길을 나서셨는데, 도중에 제자들에게 물으시기를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셨다.(막8:27)
사람들이 예수님을 두고 말하기를 세례 요한 엘리야 예언자 중에 한 분이라고 답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두 번째로 같은 질문을 제자들에게 하신 것입니다.
29.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막8:29)
그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사람들과 차이 나는 고백을 한 것입니다.
이 고백의 차이를 냉철하게 비교하라는 것입니다.
이 고백 후에 예수님을 그 행로를 바꾸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십자가의 고난의 길로 방향을 바꾸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 질문은 제자 대학 졸업 시험에 해당 되는 것입니다.
21. 그러나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행2:21)
그 구원 결정의 여부는 주의 이름을 부르느냐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물 위를 걸으셨습니다.
그 분은 다섯 개의 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 5,000 명을 먹이셨습니다.
그 분 앞에 서면 눈 멀고 귀 막힌 사람들도 한 손이 마른 사람도 문제가 안 되었습니다.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깨닫지 못 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그 분을 못 알아본 것입니다.
그것은 당시의 사람들의 문제이고 우리에게는 반대의 우려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하면 자동으로 그리스도가 튀어나오도록 교육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신 줄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리스도가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천지입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이름이고 예수가 그 분의 성인 줄로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뒤에 그리스도라는 말을 붙이지 못해서 하나님을 적대한 것입니다.
그 일이 이렇게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예수님의 이름 뒤에 생각없이 그리스도를 붙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백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내용성이 요한의 예수님의 안에서 활동을 이르는지, 엘리야의 내용성을 가졌는지, 선지자 중에 한 명의 내용성을 가졌는지 문제입니다.
도대체 내가 이해하고 있는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제대로 알기 위해 할 일은 우리의 기존의 사고를 버리는 일입니다.
하지만 잘못된 그리스도 관을 고집하니 이웃집 아저씨를 자꾸 아버지라고 부르는 실정입니다.
그 일은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승천하시기 직전까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교정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그들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그들은 이런 질문을 예수님께 한 것입니다.
6. 사도들이, 한자리에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었다. "주님, 주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나라를 되찾아 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행1:6)
이 질문은 제자들의 잘못된 그리스도관을 그대로 보여준 예입니다.
주님 그 악랄한 로마놈들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 정도 되었다면 이제는 그놈들의 손에서 우리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실 때가 된 것이 아닙니까?
그 일이 그리스도가 하실 일이 아닙니까?
제자들이 하나같이 핏대 세우면서 주장했을 때 주님은 전혀 다른 답을 하셨던 것입니다.
8.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행1:8)
“네가 성령을 받아보아라. 네 사고가 180° 뒤집어질 것이다. 너희는 너희의 원수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할 것이다. ‘우리 예수님 믿고 한 형제 되자.’”
여러분의 세상 욕구를 하나님의 소망과 3박자로 박자 맞추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기 위한다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을 받기 전에는 아무리 설명해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8.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다.
9. "하늘이 땅보다 높듯이, 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다.(사55:8,9)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인간의 뜻을 하나님의 능력을 빌어서 성취하겠다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거지 깡통을 채우려는 것입니다.
또 주님은 바로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전혀 다른 방식을 취하고 계심을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죽으시는 방식입니다.
그 죽음에서 생명을 보아야 하는데 인간의 편에서는 황당한 방식입니다.
자꾸 JMS가 생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이 헷갈리는 이유는 사람들이 기적을 신앙의 중요한 척도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기적을 쳐다보느라 성경을 볼 시간을 잃은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위대한 성 바울조차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기적을 일으킨다는 한 가지 이유로 더러운 사기꾼 성범죄자 그들을 추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9. 그 불법자가 오는 것은 사탄의 작용을 따른 것인데, 그는 온갖 능력과 표징과 거짓 이적을 행하고,
10. 또한 모든 불의한 속임수로 멸망 받을 자들을 속일 것입니다. 그것은, 멸망 받을 자들이 자기를 구원하여 줄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살후2:9,10)
예수님의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는 방식이 죽음이실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그는 우리를 위한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14. 하물며 영원한 성령을 힘입어 자기 몸을 흠 없는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야말로, 더욱더 우리들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여, 우리를 죽은 행실에서 떠나,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않겠습니까?(히9:14)
주님은 우리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죽임당하셔야만 하셨습니다.
그 일은 메시야에게 정해진 일이셨습니다.
죽으심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겟세마네에서 다른 기도 제목은 없으셨습니다.
오직 한가지 죽음의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39. 예수께서는 조금 더 나아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기도하셨다.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마26:39)
하지만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것을 사람들의 눈에 너무 비참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39. 지나가는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면서, 예수를 모욕하며
40. 말하기를 "성전을 허물고 사흘 만에 짓겠다던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너나 구원하여라.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하였다.
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율법학자들과 장로들과 함께 조롱하면서 말하였다.
42.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구나! 그가 이스라엘왕이시니,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라지. 그러면 우리가 그를 믿을 터인데!
43. 그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으니까,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으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시겠지."
44.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도 마찬가지로 예수를 욕하였다.(마27:39-44)
주님은 죽으시는 기적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을 완성하려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께 그 죽음을 부인하는 기적을 요구하며 그를 통해 그리스도를 입증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끝까지 이런 그릇된 그리스도의 내용성을 가지고 예수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입증하는 기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인을 위해서 의인이 죽으신 사건입니다.
그것은 희생 제물을 의미합니다.
그 무엇으로도 인간이 저지른 죄의 값을 치를 수 없습니다.
인간의 죄를 대속하실 제물은 오직 의인이신 하나님뿐 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희생의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그 죽음의 수용은 너무도 어려워서 제자들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21.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자기가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22. 이에 베드로가 예수를 꼭 붙들고 "주님, 안 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하면서, 예수께 항의하였다.
23.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셨다.(마16:21-23)
그리스도의 죽음을 부인하는 자가 사탄입니다.
두 번째 역사적인 부활만이 주님은 완전하게 그리스도로 입증하십니다.
나병 낫게 하고, 오병이어, 바다를 건너고 그런 기적들이 아닙니다.
4.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권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확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롬1:4)
하나님의 나들이심을 확정하는 사건은 부활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첫째 역사적인 죽으심 둘째 예수님의 역사적인 부활을 예수님의 모든 사건중에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구별한 것입니다.
3. 내가 전해 받은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드렸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과,
4.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경대로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셨다는 것과,(고전15:3,4)
첫째는 그 분의 죽으심입니다.
둘째는 그 분이 성경대로 다시 사셨다는 것입니다.
부활입니다.
이 두 가지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입증하는 역사적인 기적으로 여기시면 됩니다.
딴 기적을 따라갔다가 JMS를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기적들은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주변에서 일어난 기적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야 비밀을 지시하신 것은 이런 기적들에 대한 증거가 오히려 신앙의 방해 요소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런 기적을 베푸시고는 말하지 말라고 엄히 경고하셨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 두 사건을 두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임을 확증하는 사건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지적합니다.
그 일은 2,000년 전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이 목격했던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두 가지 사건만을 확실하게 기억하시면 됩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들을 놀라운 일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 안에 가장 많은 글을 남긴 사람이 바울입니다.
바울이 오직 예수님을 기록한 것인데 바울은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기적, 물 위를 걸으시 기적, 나병을 낫게 하신 기적...... 예수님의 일체 기적들에 대해 말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단 두 역사적인 사건만을 말합니다.
오직 그 분의 십자가에서 죽으심입니다.
오직 그의 부활하심입니다.
바울을 이 두 사건으로 예수님을 충분히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