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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의 미학,
그 경계와 경계 훔쳐보기
오차숙
프롤로그 - 통합적 감수성에 의해 조율되는 수필
문학이란 인간의 실체를 찾아 길을 떠나는 작업이다.
내면에 잠재된 진실의 체취를 찾아 어디론가 떠나는 여행이다. 인간의 가장 가까운 근원을 향해 근접해가며 희로애락의 삶의 뿌리를 조심스럽게 파헤치는 행위이다. 괭이로 황폐한 인간의 내면을 일구고 그 내면에 거름을 주며 의식의 싹을 틔워가는 과정이다. 숭고한 고통과 오색 빛깔의 갈등을 다스리며 인간의 내면을 컨트롤하는 작업이다.
그 중에서도 수필은 무의식 속의 자기를 찾아 여러 빛깔의 색들을 해부하며 빚어내는 고통의 흔적이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여 때로는 자신을 존중하고 때로는 자신을 자학하며 살아가게 하는 몸부림의 한 단면이다.
수필은 작가의 작품 속에서 여러 냄새의 향수를 찾아내어 새대성을 파악하기도 하고, 독자들과 정서적으로 합일을 이루려고 노력하며 그들의 대변자가 되기도 한다. 문자를 조율하여 이를 수단으로 삼아 현실을 기록하는 시대의 감시자이기도 하다.
철저한 고독의 시대, 자기응시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될 수 있는 한 여유로운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 그 처절함 속에서도 자기만족을 찾아 미지의 길을 헤매는 철새의 모습이기도 하다.
글쓰기는 영혼이 피 흘리는 작업이다. 작가의 내면에 서려 있는 무한한 혼란과 불안을 조절해 주는 고급스런 의사이기도 하다. 이때 자기 위안을 찾을 수 있고 나름대로 삶의 가치관도 정립되기 때문이다. 문명이 빠른 속도로 발달하는 시대성에 비례하여 인간은 정서적으로 빈곤해 가므로 정서의 결핍을 채우기 위한 비밀스럽고 고차원적인 행위로서 흙탕물 속에서 악취를 정화시키는 연꽃의 모습이기도 하다.
실체 없는 실체에 조급하게 쫓기는 시대지만 멸하지 않는 향기를 갖게 하고, 시대의 모순된 사회성에 분노를 느낄 때는 정로(正路)로 안내해 주며 자타의 욕구를 해결해 내는 마술이 회초리이기도 하다.
인간의 본질을 잃어가는 이때, 수필문학이 주는 정직성과 순수성, 그리고 아류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양심적인 작가의 생활, 이 모든 것은 독자들에게 큰 위안이 되어 어둠에서 헤매는 영혼을 살려내는 나침반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런 삶을 향한 간절함이 서려있는 글, 존재 자체에 대한 절실한 회의와 반성, 안개 자욱한 문학의 매력은 인생의 원초적 근원에서 죽음까지 장식해 주는 수필의 미학-그 경계와 경계 훔쳐보기-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작품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본론 - 추상적인 것과 구상적인 것, 관념적인 것과 즉물적인 것
①일탈은 환(幻)으로부터 온다. 원인을 알 것 같으면서도 원인이 잡히지 않는 고질병이 있다. 누대를 이어 천형처럼 뿌리내려 온 열성을 가한 우성 병독의 꽃나무, 알싸하고 환한 통증으로 내 몸에 만발한 이상 염색체, 찬란한 슬픔처럼 자주 내 삶의 근원을 흔들어 놓는, 환장할 그놈의 꽃나무가 내 몸에다 천개의 전구를 켜고 징글벨을 울려대는 순간이 있다. “너는 절대 나를 잡지 못해! 나는 네가 알지 못하는 속에 잠복해 있거든” 이렇게 약 올리면서. 놈의 정체를 캐기 위해 나는 나를 실험대에 올려놓고 전신을 해부한다.
-이인주의 [참을 수 없는 일탈, 그 일용할 작가의 양식]중에서-
이인주의 글은 무의식 속 풍경을 들여다보게 하는 작품이다.
내가 나를 만나기 위해, 내가 타인을 만나기 위해 전신을 해부하는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응시로부터 무의식적 영감을 통해 순간과 영원을 동시에 븥들고 있다. 겉과 안이 충돌하며 작가로서의 사명에 충실하고 내부적으로는 이름모를 파편들과 싸우면서 기발한 착상들을 소개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 작가는 사고의 폭, 상상의 폭이 넓어 심리적으로 무의식을 자유자제로 지배하며 초현실적 작품을 쓰고 있다. 글을 읽는 독자로서는 다소 당혹한 뉘앙스의 해석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정신적 일탈만이 작가로 가는 지를길, 일탈이라는 병을 통과한 후라야 작가로서의 정체성에 닿을 수 있다는 확신, 일탈만이 타자와 교감하는 순간이라고 거침없이 말한다. 일탈의 매력은 적도 동지로 전환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으므로, 이인주의 작품은 여러 수필가들에게 많은 메시지를 주고 있다. 작가의 길과 그 업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독서를 많이 하거나 생각을 많이 하게 되면 심리적으로 그 세계가 확장되고 사고의 안전망도 탄탄하게 구축된다. 느티나무처럼 내부가 튼튼해짐은 물론, 눈앞에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해 초연하게 바라볼 수 있어 바람 앞의 촛불처럼 허둥대지 않는다. 어떠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위기를 관리할 내공이 생겨 질서 정연하면서도 뜻하지 않은 작품들이 나오게 된다.
이인주의 작품은 기묘하면서도 사색적이다.
일단, 긍정 속에서도 현실에 대해 회의를 품으며 암호를 깔고 묘사했기 때문에 문장과 문장, 행과 행 사이에 묘한 수수께끼들이 나타난다. 모든 것을 추상적 관점에서 작업하면서도 정밀하게 숙고하며 내면의 세계를 참신하면서도 구성 있는 작품으로 형상화한다. 시적인 분위기, 또는 아이러니, 여러 가지 충격을 깨뜨리고 다시 태어나고자 하는 것이, 그의 글쓰기 작업이다.
자신의 상처를 조율해 세상에 드러냄으로써 독자를 울고 웃게 하는 현상들이 어떻게 보면 도발적이고 황당한 결과를 초래한다고 할 수 있지만, 작가로서의 그러한 감당은 당연한 것이라고 말한다.
강력한 충격, 참을 수 없는 일탈만이 작가들이 일용해야 할 양식임을 알 수 있다. 환(幻)과 환(丸)이라는 이중적 꽃나무 속에 포위당한 채 이승과 저승을 동시에 살아가야 함을 제시해 주고 있다.
②나는 문간에 서서 석류나무의 완성을 꼿꼿이 지켜보며 말을 잃는다. 나는 무엇을 하는가. 실종된 내 시, 홀연 덤벼드는 질긴 얽맴이 다시 갈증을 불러온다. 목마르다. 시종 침묵하던 어휘, 하나의 말이 종적을 감췄다. 터트려야 하는데, 석류처럼 파열해야 하는데 찾아지지 않는 언어. 석류나무는 자신을 파괴해 하늘같은 세상을 열었고, 나는 그가 낳아 놓은 세상에 반했다. 묻고 싶다. 나를 파열함으로써 쓰던 시의 완성은 가능한 것인지.
-김길웅의 [석류나무에 반하다] 중에서-
김길웅은 시적인 수필을 쓰는 사람이다.
이 시대 수필은 시 정신과 산문 정신이 적절하게 융합될 때 그 문학성이 드러난다.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문장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택한 소재를 메타포를 통해 유감없이 문학적으로 형상화시키며 피력할 때 탄력성이 있는 작품이 될 수 있다. 새로운 수필 세계를 구현하는 것은 시대적으로 볼 때 반드시 필요한 수필의 관건이기 때문이다.
김길웅의 [석류나무에 반하다]를 볼 때 그는 시인이 되지 않고서는 무의식 속에 마그마처럼 웅크리고 앉아있는 한(恨)이 소용돌이를 치며 안타까움을 많이 드러낼 작가다. 그가 반드시 시인이 되어야 함도 위 작품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앞마당에 즐비한 매화, 개나리, 목련, 감나무, 꽃단풍, 가시오가피, 참느릅나무, 그리고 가장 늦게 터져 나오는 석류나무를 상상해 볼 때 별천지가 따로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김길웅은 그곳에서 사색을 끌어내고 먼지 낀 정신을 닦아가며 문학적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다. 명작 한 편을 탄생시키기 위한 갈증 속에서 석류처럼 파열되는 순간을 고대한다. 그처럼 치열한 갈증 속에서 종적을 감춰버린 문학적 어휘를 찾기 위해 김길웅은 석류나무와 일심동체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석류나무의 극적 파열이 곧 김길웅의 시적 파열-완성의 경지-을 갈망하려는 그 과정이 남다르게 나타난다.
작품의 각 문장을 통해서도 파열하듯 쏟아지는 시적 언어들이 예사롭지 않다. 이처럼 시어를 사용하여 수필을 써내려갈 때 수필은 신변잡기라는 오명에서 벗어난 문학 중 문학이 될 수 있다.
③경수는 교무실에 자주 오는 자폐아이다. 경수는 아이들의 젖은 발자국이 남아있는 현관 바닥에 아예 뒹굴었다. 그것은 대답 없는 세상을 향한 슬픈 울부짖음이었으며, 살아가야할 세상에 대한 원망의 몸부림 같았다. (중략) 비는 더욱 세차게 쏟아졌다. 나는 현관을 나와 우산도 없이 빗속으로 들어갔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수직으로 쳐다보았다. 새까만 빗방울들이 나를 향해 마구 쏟아졌다. 슬픈 운명에 대한 원망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예리한 파편이 되어 내 몸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강기석의 [장마] 중에서-
작품 [장마]를 볼 때 표면상 드러나는 주제는 자폐증을 앓고 있는 경수의 쓸쓸한 모습을 그린 풍경화라고 할 수 있다.
강기석은 몸이 아픈 경수를 응시하면서 자신의 무의식을 응시하고 있다. 경수 같은 아이들의 행동은 주의력 부족과 순간적 충동성으로 과잉 행동을 표출하거나 주어진 일이나 놀이에 몰두하지 못하고, 처해진 상황을 조직적으로 완성해 내는 데 곤란을 드러내기도 한다.
교실 같은 곳에서도 다른 애들에 비해 차분하지 못하고 엉뚱한 행동을 하거나 자신이 행하는 행동에 대해 안절부절못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이런 행동은 원인에 대해서 명확하게 밝혀지진 않았으나 성숙 지체, 또는 복잡한 환경에 의한 자극으로 간혹 그 요인이 있을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다.
그럼 경수는 무엇을 향해 울부짖고 있는가. 경수가 살아가야 할 세상은 그 어떤 세상일까. 작품 [장마]속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강기석은 방패막이도 없이 자신도 모르게 빗속으로 들어간다. 그 역시 “슬픈 운명에 대한 원망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때문인가. 그럼 그들의 실체-그들의 마음-는 하나일까, 둘일까.
어쨌든 이 작품은 적막하게 내리는 빗소리를 통해 아이의 어두운 세계를 암시해주고 있다. 아이는 냉혹한 현실의 부조리에 대해 입도 떼지 않고 있으나, 불현듯 그 울음소리는 강기석에게 사랑의 마음으로 전의되고 있어 이 작품의 포인트로 다가온다. 강기석 역시 경수를 통해 무력감과 허탈감에 시달리며 그 무엇과 투쟁하는 모습이 엿보인다.
수필쓰기는 이처럼 안개 속에서도 인생의 단면과 경험, 특정한 사건이나 현실, 느낌과 견해를 진솔하게 기록하는 작업이다. 그것에는 미적 향기가 담겨져 있어 아름다운 인간미로 상대를 포용하는 부분들이 작품을 살려내게 된다. “…이내 멈추었다. 낯선 고요 속으로 빗소리가 스며들었다. 비는 더욱 세차게 쏟아졌다.”라고 하는 부분을 보더라도, 작가와 경수의 심리세계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 [장마]는 심리수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④나무관은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이미 토화(土花)되었는데, 명정이 그대로인 것은 나일론을 썼기 때문이라며 누군가 혀를 끌끌 찬다. (중략) “에고, 불쌍한 엄매 대신 이렇게 살아가고 있소! 인자 날 보셨응께… 편히 쉬소.” 젖 한 번 물려보지 못하고, 재롱 한 번 보지 못하고 신혼의 꿈을 접은 어미의 한이야 어이 풀 수 있었을까. 하얀 상복을 입고 머리를 어르듯 색동 수의를 조심스레 만지는 나이 든 딸의 눈길이 애처롭기만 하다. 어느새 갠 하늘가, 소나무 가지 끝에 허물처럼 걸린 낮달이 홀로 외롭다.
-박종규의 [색동 수의]중에서-
문학의 중요한 목표는 인생을 진솔하게 표현하는 데 있다.
특히 삶의 경계선인 ‘죽음’에 대한 예리한 관철을 하는 작가는 인생의 깊이를 알고 있는 사람이다.
화가 중에서도 현대 미술의 전설이라고 할 수 있는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을 보게 되면 삶은 곧 죽음의 영원 속에서 잉생이 완성되어가는 과정임을 짐작하게 한다. 낙엽이 떨어져 겨울이 되고 봄이 되듯이, 죽음의 위상은 위대하여 남은 자들에게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명제를 남겨준다. 이때 글 쓰는 작가는 기억과 역사, 백지 자체가 캔버스가 되어 그 형상을 그려나가게 되고, 결국 그 작품은 영혼의 치유제로 나타나 영혼의 상처,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져 준다.
박종규의 작품 [색동 수의]는 생멸(生滅)이 되풀이되는 우주 속에서 인생의 안타까움과 허무함을 느끼게 한다. 어린 자식에게 추유도 먹이지 못한 채 삶을 접어야 했으니, 삼베 수의가 아니라 색동 수의를 입어야 했으니, 50여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그 수의가 시신과 함께 산화되지 않아 남은 자의 가슴을 한 번 더 할퀴게 했으니, 그 운명의 파노라마를 수필이라는 장르가 아니면 무엇으로 현현하게 표현할까.
응시하는 자나 응시 받는 자가 합일되어 그 자체를 예술로 승화시켜가는 과정은 적막하면서도 소리 없이 피어나는 목련과 다르지 않은 느낌이다.
“어느새 갠 하늘가, 소나무 가지 끝에 허물처럼 걸린 낮달”의 형상으로 피어난 그 영혼은 홀로 외롭긴 하지만, 이제 딸은 어머니의 모습, 어머니는 딸의 모습을 미련 없이 보았으니, 서로가 남아있던 한을 어디론가 날려 보내고 승천해야 할 때가 아닌가.
⑤아버지도 그날 그 자리에서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로 그렇게 생을 마감했고 어느새 60년 세월이 흘렀다. (중략) 차라리 불법 남침을 감행한 저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다가 산화했더라면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었을 것이란 엉뚱한 생각도 자주 해 왔다. 성장기의 나는 악몽처럼 그날의 그 백사장가 아버지를 떠올리며 절통함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기 힘들었다. (중략) 비록 늦긴 했지만 아버지의 영혼을 위한 진혼제를 서둘러야 하겠다.
-강문석의 [전쟁의 참극 한 토막]중에서-
수필은 경험의 회고나 감상적 정서의 표출로 대중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다. 강문석의 [전쟁의 참극 한 토막]을 보게 되면 지적인 냉철함은 없어도 그것을 전제로 한 사고와 관철의 기록이 깔려있어 문학으로서 그 가치를 다하고 있다. 한국은 일제 치하에서 36년간 식민지 생활을 하였음에도 1950년 6월 25일 동족상잔으로 인해 정치, 경제, 이데올로기, 문화, 국토, 민족의 모든 것을 갈라놓은 비극을 맞이했다.
우리는 이 참혹함을 잊고 살아갈 때가 있지만, 마음속엔 현대사의 비극인 한국전쟁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전쟁은 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진영간의 대립 구조를 형성했으므로 어떻게 보면 세계사적 전환점으로서의 묘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 국민들은 애국심으로 뭉쳐 나라를 염려했으므로 언제부터인가 대한민국은 세계의 대열에 서있었다고 할 수 있다.
작가의 아버지는 6.25때 30대 중반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피난길 백사장에서 비통한 모습으로 삶을 마감한 아버지가 아니라, 차라리 그 아버지가 불법 남침한 자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다가 산화했더라면 그 아버지는 자신의 죽음으로 간주하고, ‘좀더 눈을 편히 감을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아들의 나라 사랑과 부모 사랑은 작품에 활기를 불어넣어준다. 아들은 절통함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분노가 차올라, 어떻게 하면 ‘아버지의 넋을 위로할 수 있을까’ 고심하기에 이른다.
그러한 울분은 “비록 늦긴 했지만 아버지의 영혼을 위한 진혼제를 서둘러야 하겠다”고 하며 작품을 마무리하는 대목이 수필의 맛을 고조시켜 준다.
⑥사람아, 시인이 되고 싶으냐? 아서라 장관도 빌딩도 결국에는 똥이 되고 마는 것이니, 너는 그런 밥통은 되지 말거라. 불치의 장 장 장에 피고름이 버글거리는 똥배를 두드리면서 권력의 진탕에 주둥이를 박은 채 한평생 황갈도를 헤매는 시인보다는 포롱포롱이라도 날아다니는 사람이 낫다. 거듭 말하거니와 비록 하찮아 보이는 작은 손짓이라 하더라도 날개를 잃지 말거라. 저 무한한 창공이 너의 것이다.
-배정인의 [날개] 중에서-
요즘은 모든 영역을 비롯한 문학 특히 수필에서도 급격한 변화의 양식을 가져오고 있다. 변화되는 시대 속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수필의 이론적 현상, 작품적 변모들이 다양하게 선을 보이며 충돌하고 있어, 실험수필 형태들이 포스트모더니즘적 의식, 초현실주의적 의식을 통해 독자 곁으로 다가가고 있다. 무의식적 발로를 통해서 쓰여진 작품 [날개]도 수필의 변화에 남다른 기여를 하고 있다.
“난다. 빛을 향해서. 붕뎅이 한 마리가 환희에 참 채 그 빛을 응시한다. 초록 섬이 밝혀질 동방의 빛을 상상하며 푸른 날개를 올린다.” 는 대목을 보더라도 메타포로 모든 것을 형상화시키고 있다. 문제는 바람을 몰고 그 주위를 휘돌며 폭격기로 변해버린다.
하지만 빛은 어둠보다 강하다. 어둠이 빛을 지배하는 것 같지만 결국 빛이 어둠을 지배한다. 한편으론 빛만 존재하는 세상은 어딘가 삭막하여 생물이 자라질 못한다. 배정인은 살의 공식을 아는 사람이다. 이제 작품 [날개]는 촛불이 꺼져 ‘미로 진탈증’을 앓기 시작하면서 “사람아, 시임이 되고 싶으냐”라는 거대한 질문을 내던진다.
세상은 빛과 어둠의 투쟁이다. 배정인의 [날개]를 감상하다 보면 그 자그마한 촛불이 주변을 정화시키며 대창보다 얇은 벽이지만 벽을 뚫고 나간다. 우수를 바라보는 어머니, 정숙한 어머니같이 상승을 지향하고 잇지만, 결국 피고름이 버글거리는 세상, 오염될 대로 오염된 세상에서 군자로 군림하며 똥을 만들어가는 세상에서, 작가는 암적인 존재를 찾아 추적을 거듭한다.
더 나아가 작가는 모든 것을 개체 변이와 이에 대한 선택에 따르는 것으로 정리하며 멀리 있을 때는 빛이지만, 가까이 다가가 그 안에 들어가면 불이 되어 날개를 태워버린다는 그 이중성을 고발한다. 암덩어리가 우리들의 의식세계를 암암리에 침투하면서 생활양식을 변화시키고 있음을 고발한다.
“사람 족에서 날개가 퇴화된 변종, 암이라는 변이된 인자에 몸이 변형된 것으로 보고 있다. 날개가 없어지면서 배가 만돌린처럼 커졌는데 그 배를 똥배라 하고 날지 못하는 그들을 시인이라 불렀다”라는 대복을 보더라도 황갈도 시인이 되지 않더라도 ‘날개를 잃지 않게 하소서’ 하는 절규만이 있을 뿐이다. 작품을 감상해 보면 포스트모더니즘에 기울어져있는 작가들을 보면 때때로 그 정서가 불안정하다는 생각이 든다.
대부분 오늘날의 정서-글로벌 시대에 맞닿아 있는 현대인의 의식세계-임에 틀림없다. 작가 배정인의 무의식의 외침을 듣게 하는 작품이다.
⑦어차피 개보다 못한 인간들이 많은 세상이다. 이게 어디 쥐약 놓은 자만 저주할 일인가. 결국 내 탓이다. 굴레에 얽매여 살아온 내 평생이 너무너무 싫어 백구에게만은 자유를 주고 싶었다. 매달아 놓고 키우지 않은 것이 백구를 죽인 꼴이 되고 말았다. 마당에 널린 백구의 흔적들을 지웠다. 많기도 하다. 밥그릇, 물그릇, 축구공, 테니스공, 곰돌이 인형... 방에 들어와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눈에 보이는 흔적을 지웠다고 머릿속의 흔적까지 지워질 리가 없다.
-안병태의 [백구] 중에서-
작품 [백구]는 세상에는 개보다 못한 인간이 많음을 지탄하는 작품이다. 안병태는 “덜렁이는 개는 키울지언정 인연에 대해 명상이 잠기는 개는 키우지 말라”고 한탄한다. 짐승이든 사람이든 서로가 관계 형성을 하고 살아가는 과정에서 진득하게 맺어진 정의 도타움이 얼마나 강한 것인가를 새겨보게 하는 작품이다.
정이 든 백구가 어느날 누군가가 쥐약을 놓는 바람에 죽어야 될 대상은 죽지 않고, 뜻하지 않게 죽었음을 알수 있다. 그러나 작품에는 몰인정하게 전하를 끊은 수의사를 비롯해 죽어가는 개를 보면서도 “쥐약을 먹었네요, 묶어 기르시지...” 하며 놀라울 것도 없다는 무표정의 이웃을 보더라도, 안타까움 속에서도 무언가 모호함이 서려있다.
그 대상이 쥐와 고양이라기보다는 무분별하게 각박해진 세상, 무언가 자신에게 정서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본인의 신경을 거슬릴 때는 언제나 쥐약을 놓을 수 있다는 인간의 묘한 심리현상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안병태는 이젠 보편화가 되어버린 세상 풍조를 인식하고 그 자체를 수용하며 모든 것은 대상의 잘못이 아니라, 개를 풀어놓은 자신 탓이라고 치부하게에 이른다.
시사하는 바가 많은 작품이다. 자신의 구속된 삶이 싫어서 사랑하는 백구에게만은 자유를 주고 싶었다는 대목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세상의 자유는 적지 않은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지나친 배려는 곧 그들을 사망의 길로 몰고 간다는 이론이 제기된 셈이다. 자신이 누리지 못한 것을 상대에게 누리게 하리라는 거대한 사랑이 큰 화를 발생하게 하는 세상임을 보여준다.
이 글은 무엇보다 세상이 위험한 수치에 도달해 있음을 풍자하고 있는 수필이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정은 정으로 남아있는 것, “눈에 보이는 흔적을 지웠다고 머릿속의 흔적까지 지워질 리가 없다”고하는 작가의 모습에서, 그래도 세상은 아직도 희망을 보여준다.
모든 인연을 회자정리로 돌리기에 잔인한 세상이지만, 이 작품은 안병태의 인간성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에필로그-장르 의식해체와 비전을 향한 주관적 모험
문학의 실체는 상상력이 풍부한 작가의 의식관이거나 정신적 발로라고 할 수 있다. 2010년 여름호 [수필세계]에 발표된 28편의 신작수필은 어느 작품 하나 소홀하게 창작된 것이 없다. 지면 관계상 일곱 명의 살펴보았지만 모든 작품들이 만만치 않다.
권화성의 [애정풍속도], 김선화의 [이름에 대한 변], 서숙의 [서울애상곡], 임만빈의 [불빛], 최영애의 [雲水曲月光香], 최태준의 [실명], 그 외에도 많은 작품들이 문학으로서의 수필 세계를 치열하게 보여주었다.
지면상, 대부분 남성 작가들의 작품세계만 살펴보았다. 다행히 각자 주제나 소재, 기법의 중복을 피하여 차별화되고 있었다.
예를 들어 ①초현실주의적 기법으로 일탈을 통해 작가의 정체성을 재확인 하려는 이인주의 작품, ②자연과 접목하며 시적 형상화를 위해 고심하는 김길웅의 작품, ③상대를 통해 자신의 무의식을 관철해 나가는 강기석의 작품, ④죽음과 삶에 대해 존재감을 실감하게 하는 박종규의 작품, ⑤가족의 아픔을 통해 전쟁의 실상을 재인식하게 하는 강문석의 작품, ⑥포스트모더니즘을 이용한 무의식의 춤 놀이를 하는 배정인의 작품, ⑦백구의 죽음을 통해 인간에게 일침을 가하는 안병태의 풍자적 작품들을 중심으로 살펴본 셈이다.
수필은 작가의 사상과 사물의 관계를 비약하여 무의식의 집을 만드는 정신적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손에는 만져지지 않지만 작가의 고통을 통해 타인의 상처를 감싸주는 치료사, 마술사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수필은 특히 절대자에게 의지하고 싶은 또하나의 신앙처럼 조심스럽게 나타나, 순간의 갈급함을 자기 최면에 걸리게 하며 만사를 포용할 수 있는 세상으로 드러난다. 수필은 존재에 대한 소망과 회의의 교차 속에서 삶의 진실과 방법을 모색하며 피 흘리는 몸짓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솟구쳐 오르는 감정을 절제하며 황폐한 마음과 정신을 살찌게 하는 이름모를 소산이고, 삶의 근원적인 차원에서 빚어져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하는 슬픈 유희이다. 정체불명의 삶이지만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삶의 가치관이 고양되고, 자신의 존재가치를 감지할 수 있으므로 내면의 성을 근엄하게 쌓을 수가 있다.
무의식을 바탕으로 한 실험에 가까운 작품과 일반화된 고유의 수필로 분리해 살펴보았지만, 요즘 많은 수필가들이 실험수필을 향해 도전하고 있다.
미술에서도 20세기부터 그 바람이 불었다. 미술 양식이자 예술의 새 지평을 열었던 초현실주의는 이론적이고 개념적인 성향이 강한 예술운동으로 문학, 회화에서 시작하여 전 예술 장르에 영향을 미쳤다. 사실 초현실주의는 양식이라기보다는 강령에 가까웠다. 그 강령에 따라 길이 남을 작품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내면의 우주를 시적, 철학적으로 표현하고 내면적 현실을 찾기 위해 꿈과 도취, 백일몽의 영역으로부터 환상적인 암호들을 심어놓은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하가 중에서도 막스 에른스트, 살바도르 달리, 르네 마그리트 역시 그 생애와 작품들이, 초현실주의 작품을 그렸으므로 충격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수필도 다를 바 없다.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그 어떤 너머의 세계를 그려낼 때 신선함이 존재한다. 그것은 가면을 쓸 때 진실을 향해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일까.
첫댓글 작품세계를 예리하게 파헤친 평론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