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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점검90: 두 번째 덕산탁발화(德山托缽話)
하루는 재(齋)가 늦어지자(晚), 덕산이 탁발(托缽: 발우를 들고)하며 법당(法堂)으로 내려갔다.
이때 설봉이 반두(飯頭: 공양을 짓는 소임)을 맡았는데, 그것을 보고서는 곧 말했다.
“종도 울리지 않고 북소리도 나지 않았는데, 이 늙은이가 발우를 들고 어디로 가는가?”
덕산은 말없이 머리를 숙이고 방장실로 돌아갔다.
설봉이 (이것을) 암두에게 말하자, 암두가 말했다.
“저(大小) 덕산이 말후구를 모르는구나.”
덕산이 듣고는 시자로 하여금 암두를 불렀는데, 암두가 방장실에 이르자 곧 물었다.
“그대는 노승을 긍정하지 않는가?”
(이에) 암두가 그 말에 대해 밀계(密啟: 비밀하게 열다)하였다.
덕산이 다음날 상당하였는데, 평소와는 같지 않았다.
암두가 승당(僧堂) 앞에서 박수를 치며 크게 웃으며 말했다.
“늙은이가 말후구를 알았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기쁘구나. 이후로는 천하 사람들이 그를 어찌하지 못하리라. 비록 그렇지만 3년뿐이로다.”(과연 삼년에 입적하였다.)
雪峰在德山會下作飯頭。一日齋晚。德山托缽下至法堂。(時雪峰作飯頭。見便云。這老漢。) 峰云。鐘未鳴鼓未響。這老漢。托缽向什麼處去。山無語低頭歸方丈。雪峰舉似巖頭。頭云。大小德山。不會末後句。山聞令侍者喚至方丈問云。汝不肯老僧那頭密啟其語。山至來日上堂。與尋常不同。頭於僧堂前。撫掌大笑云。且喜老漢會末後句。他後天下人。不奈他何。雖然如是。只得三年。(師果三年而沒。)
이 화두가 한국의 선에서 유명해지게 된 계기는 성철큰스님이 『본지풍광』에서 첫 번째로 제시한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여기에 대해 일찍이 성철스님은 말했다.
“대중이여, 이들 공안을 총림에서 흔히들 논란하지만은 산승의 견처로 보니, 덕산 삼부자가 말후구를 꿈에도 몰랐고 설두의 사족은 지옥에 떨어지기 화살과 같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말후구인가?
물소가 달을 구경하니 문채가 뿔에서 나고
코끼리가 뇌성에 놀라니 꽃이 이빨 사이에 들어간다.”
『벽암록』에서 원오스님은 말했다.
「명초스님이 덕산스님을 대신해 (설봉에게) 말하기를, ‘돌돌(咄咄: 쩝쩝)! 몰처(沒處)로 가라. 몰처(沒處)로 가라.’라고 한 것에 대해 설두 중현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저 독안용(獨眼龍: 명초의 별명)이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원래 다만 이 안에 있었을 뿐으로 덕산이 저 무치대충(無齒大虫: 이빨 없는 호랑이)이라는 것을 전혀 몰랐다. 만약 암두가 알고서 타파하지 않았다면 어찌 어제와 오늘이 같지 않음을 얻었겠는가?
모든 사람은 말후구를 알고자 하는가? 다만 늙은 오랑캐가 지(知)했다고는 해도 늙은 오랑캐가 회(會)했다고는 하지 못한다.”」
雪竇顯舉明招謙代德山語云。咄咄沒處去沒處去。云。曾聞說個獨眼龍。元來只在者裏。殊不知德山是個無齒大虫。若不是巖頭識破。怎得今日與昨日不同。諸人要會末後句麼。只許老胡知。不許老胡會。
이상에서 보듯이 설두스님은 ‘덕산은 무치대충이며, 암두가 이를 알고서 타파해주었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설두스님은 곧 『벽암록』에서 100개의 화두에 100개의 송고(頌古)를 붙인 분이다.
저 암두스님을 알지 못하고서 어찌 설두스님을 알 것이며, 설두스님을 알지 못하고서 어찌 말후구에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설두 정은 말했다.
“명초는 단지 앞으로 향하는 것만을 알았을 뿐, 뒤로 물러나는 것은 알지 못하였다. 설두가 이처럼 평을 했어도 참으로 회(會)하기란 어렵다고 하리라. 그렇다면 말후구를 결국 어떻게 회(會)해야 하는가? 악! 악!”
雪竇正云。明招只知向前不知退後。雪竇漝麼批判不妨難會。祇如末後句畢竟作麼生會。乃喝一喝。
참으로 ‘회하기란 어렵다’고 한 것은 곧 ‘온전히 알기 어렵다’는 말이다. 이는 곧 저 암두스님이 ‘다만 3년뿐이다’라고 한 것과 관련이 있다. 예로부터 이 ‘덕산탁발화’의 왜곡은 그 어떤 화두보다 심하다고 했다. 따라서 자세히 살피는 눈이 없다면 어찌 스스로 역시 왜곡을 피해갈 수 있으리오.
위산 철 스님은 말했다.
“암두(의 저 말)은 마치 높은 절벽의 바위가 갈라지자 곧장 짐승들이 백리까지 도망을 쳐서 종적을 감추는 것과 매우 흡사하다. 만약 (암두가) 덕산을 도량(度量: 저울과 잣대)으로 깊이 밝히지 않았다면 어찌 어제와 오늘이 같지 않음이 있었을 것인가?”
溈山哲云。巖頭大似高崖石裂。直得百里走獸潛蹤。若非德山度量深明。怎得昨日與今日不同。
이것은 결국 이 말후구를 밝히는 것이 그만큼 어렵고 험난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참고로 취암 진스님은 말했다.
“덕산과 암두에게 일장령(一狀領: 한 장의 칙령)이 지나갔다. 설봉은 천오백 선지식을 거느릴만한 땅에 있었다.”
翠巖真云。德山巖頭一狀領過。雪峰一千五百人善知識地在。
어째서 저 저 덕산 스승과 사형 암두는 한 차례 벌을 받았는데, 도리어 사제인 설봉스님은 천오백 명의 선지식들을 일깨울 수 있는 자리에 있다고 했을까? 이것은 다음의 구절과도 통한다.
복룡 장스님은 말했다.
“말후구에서 덕산, 암두, 설봉이 모두 벗어나지 않는다.”
곧 악! 악! 하고는 말했다.
“대장부라면 마땅히 진왕(真王: 참된 왕)이 되어야 한다. 어찌 거짓으로써 하리오.”
伏龍長云。末後句德山巖頭雪峰總跳不出。乃喝一喝云。大丈夫當為真王。何以假為。
보는 안목에 따라서는 ‘벗어나지 않는다’는 구절을 ‘벗어나지 못했다’라고 단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거짓으로 한다’는 것은 곧 참으로 말후구를 드러내지 못함을 지적한 것이다.
이상의 취암 진스님과 복룡 장스님의 구절은 그 자리에서 한발자국도 옮기지 않은 채로 말후구를 드러내고자 했기에 이처럼 터무니없이 모호하게 보일 수도 있는 표현을 끄집어낸 것이다. 이는 곧 ‘사승자강(師勝資強)은 도리어 저 덕산부자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고 하겠다.
일찍이 고봉 원묘스님은 말했다.
“불조(佛祖)의 기연(機緣: 기틀과 인연)과 고금의 공안(公案)에 있어서 그 가운데의 왜곡됨이 이것보다 더한 것은 없다. 혹 말하기를, ‘암두의 지혜가 스승을 능가하였기에 뜻을 밀계했다’라고 하는데, 하늘 가득한 허물과 만겁에 미칠 재앙을 범하고 있음을 전혀 모르고 있다. 자 말해봐라. 이익과 손해가 어디에 있겠는가?”
손뼉을 치며 크게 웃으며 말했다.
“시자는 분명히 기억해두라. 30년 후에 어떤 사람이 증명할 것이다.”
高峰妙云。佛祖機緣古今公案。其中[言*肴]訛無出於此。或謂巖頭智過於師。故有密啟其意。殊不知犯彌天之咎萬劫遭殃。且道利害在什麼處。撫掌大笑云。侍者分明記取。三十年後有人證明。
원묘선사의 이 지적은 매우 날카롭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결국 암두스님과 덕산스님은 전혀 간격이 없다는 것인가? 만약 다음을 살필 수 있다면 그 간격이 있는지 없는지 또한 볼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한 스님이 흥양양(興陽讓)화상에게 물었다.
“대통지승불(大通智勝佛)이 십겁(十劫) 동안을 도량에 앉아있었지만 불법(佛法)은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는데, 불도(佛道)를 이루지 못할 때는 어떠합니까?” 이에 대답했다. “그 물음이 매우 그럴듯하구나.” 이에 다시 물었다. “이미 도량에 앉았는데, 어째서 불도를 이루지 못한 것입니까?” 이에 답하였다. “부처를 이루지 못해서이다.”
興陽讓和尙因僧問大通智勝佛十劫坐道場佛法不現前, 不得成佛道時如何. 讓曰其問甚諦當. 僧云旣是坐道場, 爲甚麽不得成佛道. 讓曰爲伊不成佛.
여기서 ‘어떠합니까?’라고 한 물음은 그 자초지종에 어떻게 되는지를 묻는 말이다. 참고로 인터넷에서는 ‘너도 부처를 이루지는 못하느니라.’라고 번역하기도 하였다. 잘 살펴야 하리라.
여기에 대해 『무문관』의 무문혜개스님은 평창하였다.
“늙은 오랑캐가 지(知)했다고 해도 늙은 오랑캐가 회(會)했다고 하지는 못한다. 범부가 지(知)하면 곧 성인이고 성인이 만약 회(會)하면 곧 범부이다.”
無門曰 只許老胡知 不許老胡會 凡夫若知 卽是聖人 聖人若會 卽是凡夫
여기에서 지(知)와 회(會)의 차이가 무엇일까? 반듯이 이것을 풀어낼 수 있어야 하리라. 만약 이것을 꿰뚫는다면 다음의 구절도 살필 수 있으리라.
암두스님은 말했다.
“설봉이 비록 나와 함께 같은 가지에서 나왔지만 나와 함께 같은 가지에서 죽지는 않았다. 말후구를 알고자 한다면 다만 이것일 뿐이다(雪峰雖與我同條生 不與我同條死 要識末後句 祇這是).”
무엇이 같은 가지에서 나온 것이고 무엇이 같은 가지에서 죽지 않는 것인가? 암두스님은 지금 만약 누군가가 이 구절을 제대로 꿰뚫는다면 틀림없이 말후구의 뜻 역시 꿰뚫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철스님이 말후구에 대해 호국수징스님의 말을 인용하여 대신 답한 것은 참으로 좋았다고 하겠다.
한 스님이 호국 수징(護國守澄)스님에게 물었다.
“무엇이 본래심입니까?”
“코뿔소가 달을 가지고 논 것으로 인해 콧잔등에서 뿔이 생기고
코끼리가 천둥소리에 놀라니 꽃이 상아로 들어간다.”
舉僧問護國澄禪師。如何是本來心。
國云。犀因翫月紋生角。象被雷驚花入牙。
이는 곧 북치고 피리를 불기는 쉬워도 바람에 임해 특별한 곡조를 푸른 하늘에 펼치기란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또한 텅 빔을 받들고 메아리를 맞이하는 자라면 덕산을 잘못 지나치고 강함을 누르고 약함을 부축하는 자라면 틀림없이 암두를 매몰하리라는 한 것과 같다는 것이다.
끝으로 여기에 대한 게송들을 음미해보자.
말후구를 알지 못함이여
덕산 부자(父子)가 크게 소홀하였다.
좌중(座中)에는 또한 강남객(江南客)이 있었으니
술잔 앞에서 자고새 노래를 불러서는 안 된다. (천동 각)
末後句會也無。德山父子太含糊。
座中亦有江南客。莫向樽前唱鷓鴣。(天童覺)。
‘크게 소홀했다’는 것은 말후구가 험난하여 명명백백하게 드러내는 것이 쉽지 않음을 지적한 것이다. 누가 강남객이며 그는 무슨 말을 하는가?
‘술잔 앞’이란 곧 그가 아직 번뇌의 술에 취해있다는 것이며 ‘자고새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곧 그윽한 꽃 속에서 노래한다는 것이다.
늠름한 서리바람이 몰아치는 땅은 차갑고
늙은 어부가 낚싯줄을 던지는 오호(五湖)는 온화하다.
금린(錦鱗)이 파닥이며 파심월(波心月: 파도 중심의 달)을 흩으니
사륜(絲綸)을 거두고 고탄(古灘)에 오른다. (보봉 상)
凜凜霜風戛地寒。漁翁擲釣五湖寬。
錦鱗觸散波心月。收取絲綸上古灘。(寶峰祥)。
처음 두 구절은 덕산과 암두를 말한 것이고, ‘금린이 파심월을 흩는다’는 것은 설봉스님이 소리친 것을 말하고, 사륜(絲綸)이란 임금의 명령을 적은 문서를 뜻한다. ‘사륜(絲綸)을 거둔다’는 것은 황권적축(黃券赤軸)을 거둔다는 것이고, ‘고탄에 오른다’은 곧 붉은 계수나무에 영양이 뿔을 걸었다는 것이다.
한 차례 퍼붓는 표독함을 듣고 모두 잃었는데
몸이 그 가운데 있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
80세 늙은이가 과거장(場屋)에 들어감은
참으로 아이들 장난도 아니다. (경산 고)
一撾塗毒聞皆喪。身在其中總不知。
八十翁翁入場屋。真誠不是小兒嬉。(徑山杲)。
‘모두 잃었다’는 것은 독고(毒鼓)소리를 들었다는 것이다.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은 대통지승불에게 불법이 현전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참으로 아이들 장난도 아니다’라고 한 것은 암두가 밀계한 뜻을 말한 것을 가리킨다.
설봉은 공개적으로 (덕산을) 불러 (방장으로) 돌아가게 했고
암두는 밀계에 힘을 썼다.
과연 다만 삼년뿐이었으니
도적의 입이 원래 칙령이다. (전우 유)
雪峰公然喚回。巖頭密啟有力。
果然只得三年。賊口元來是敕。(典牛游)。
‘도적의 입이 원래 칙령’이라고 한 것은 일찍이 등불이 불인 줄 알았다면 옆집에서 불을 빌려 밥을 지으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덕산탁발화여!
고개를 숙이고 사람을 두려워했다.
삼가촌(三家村) 사람이
취해서는 오랑캐 종(廝)을 욕한다. (솔암 종)
德山托缽話。低頭得人怕。
三家村裡人。醉後胡廝罵。(率庵琮)。
저 늠름함은 차가운 서리바람과 같았는데 무엇이 두렵고 부끄러웠을까? 취해서는 오랑캐 종을 욕함이여, 이 일은 원래 말과 구절에서 찾지 못한다는 것이다.
끝으로 한 자 보탠다.
말후구여
아침에는 삼천이고 저녁에는 팔백이다.
종도 치지 않고 북도 울리지 않음이여
원래 천이백 선지식을 거느리는 자의 말이다.
고림선원에서 취산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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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범부가 지하면 성인이고 성인이 회하면 범부이다 (합장)
나와함께 같은 가지에서 나왔지만 나와함께 같은가지에서 죽지는 않았다
말후구를 알고자한다면 다만 이것일뿐이다 (합장)
덕산은 말없이 머리를 숙이고 방장실로 돌아갔다ㆍ
합장 ㆍ합장ㆍ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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