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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폐셜 66. '고구려비가 중원에 서있는 까닭은?' (2000.04.22.)
66회 : 고구려비가 중원에 서있는 까닭은?
고구려비가 중원에 서있는 까닭은?
방송일: 20000422 조회수 : 3890번 읽음
동영상 : 줄거리:
더빙용 원고
고구려 비가 중원에 서있는 까닭은?
방송/ 2000년 4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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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중원고구려비 25 1979년 4월, 한반도 한가운데서 1500여년 에 세워진 고구려비가 발견됐다. 중원구려비가
그것이다.
고구려의 비밀을 간직한 살아있는 역사. 왜 고구려인들은 중원에 고구려비를 세운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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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틀 고구려비가 중원에 서있는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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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1
#중원고구려비 옆에서
-지금 보시는 이 비는 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에 있는 중원고구려빕니다.
국보 제205호로 지정이 돼있습니다. 아주 단단한 화강석으로 돼있는데요. 높이는 어른 어깨 정도 144센티미터
정돕니다. 발견당시 이 비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된 이유는 이 비가 바로 고구려 비기 때문입니다.
중원고구려비와 광개토대왕 비는 고구려 사람들이 직접 자신의 손으로 써서 남긴 역삽니다.
광개토대왕 비는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 지금의 중국 집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중원고구려비는 우리나라 한가운데인 중원, 지금의 충청북도 충주시에 있습니다.
-중원은 고구려 수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곳에서 고구려비가 발견된 것입니다.
이 비를 한번 보십시오.
#'고려태왕'글자 불러오고
-'고려태왕'이라는 글자가 나옵니다. 흔히 문헌에 보면 고구려 국호를 고구려라고 부르기도 하고 고려라고
부른 것도 있습니다. 중원고구려 비에는 고구려 사람들이 자신들의 나라이름을 어떻게 불렀는지 알수 있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고려라는 글잡니다.
그리고 '태왕'이라는 것은 광개토대왕비에도 나오는데 클태, 임금왕, 그러니까 왕중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자신들의 왕을 태왕이라고 불렀습니다. 나라이름을 고려라고 부르고 고구려 왕을 태왕이라고
불렀습니다.
#비문서 관직명 불러오고
-그뿐 아닙니다. 여기보면 하부, 전부대사자, 전부대형, 수사, 주부, 발사자. 이것은 모두 고구려의 관직이름
입니다. 고구려의 관직이름이 이렇게 많이 나오기 때문에 중원고구려비는 고구려 연구에 빼놓을수 없는
사료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원고구려비가 발견당시부터 워낙 마모상태가 심하기 때문에 그 글자를 다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발견이후 학계에 일제히 주목을 받았지만 그 이후 더 이상의 연구가 진척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중원고구려 비가 발견되고 20여년이 지난 최근에 고구려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면서 이 비문을 해독
하는 작업에 다시 들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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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1
#입석마을로 z.i 10 예로부터 마을입구에 비석이 서있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입석마을.
#f.s 3 이 마을의 상징이었던 비가 바로 중원고구
려비다.
#비 살펴보고 13 지난 2월, 고구려 연구회는 본격적인 중원고구려비 재판독 작업에 들어갔다.
비가 발견된지 20년만의 일이었다.
@서길수 인터뷰...지금 고구려 비가 광개토대왕 비하고 딱 두 개뿐이다. 더구나 한반도에서 유일한 고구려비다.
그래서 고구려 연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아주 중요하다.
그런데 20년 동안 연구했지만 그 뒤로 진전이 거의 없었습니다.
#발견당시 자료화면 30 중원고구려비가 발견된 것은 지난 1979년. 충주에서 중원고구려비가 발견되자
학계는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고구려 연구 새장을 여는 획기적인 발견이었다.
이 비가 고구려비라는 사실을 처음 세상에 알린 정영호 교수는 지금도 당시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정영호 인터뷰...탁본을 했을 때 거기 고려라는 글자가 나오고 대왕이라는 글자가 나왔을 때 이건 고려대왕,
더구나 쭉 읽어나가는데 동이매금이라는 글자가 나왔다.
동이매금은 광개토대왕 비에밖에 안나왔다. 그래서 너무 놀랐고, 이것이 고구려 비임이 분명하다.
#탁본하고 15 비문해독을 위해 제일 먼저 탁본작업에 들어갔다. 탁본은 글자의 모양을 왜곡시키지 않고 그대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다.
#21년전 것과 탁본 비교 10 그러나 비문은 그동안 마모가 더 심해졌다.
발견당시 최초 탁본보다 선명도가 크게 떨어졌다.
#적외선 촬영 20 이번에는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해 보기로 했다. 군사용으로 사용되는 적외선 촬영을 시도하기로
한 것이다. 비문해독에 적외선 촬영을 한 것은 국내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기명 인터뷰...국내서는 최초로 고구려비에 대한 문자분석을 하게 됐다. 1600년전 처음 새겼을 때의 마모
상태와 많은 시간이 지나면서 색깔이 달리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실험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외관 2
#실내 16 탁본과 최첨단 방법으로 촬영된 글자를 모두 컴퓨터에 수록했다. 한자리에서 다양한 각도로 글자를
비교 분석하기 위해서다.
#모니터 상의 비석, 적외선, 현장 확인 글자 18
비문을 탁본한 글자와 적외선 촬영한 글자, 그리고 실제 비문의 글자를 비교해가며 판독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지금까지 읽지 못했던 글자를 새롭게 읽게 됐다.
#2.22 워크샵 현장 30 이 자료를 토대로 한국과 중국 일본의 학자들 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학술대회가
열렸다. 역사학자는 물론 금석문을 연구하는 학자들까지 참여한 가운데 글자 한 자 한 자에 대한 집중적인
분석이 시도됐다.
4박5일의 토론 끝에 드디어 새로 읽어낸 글자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새로 읽은 글자 불러오고 14 참석자 전원의 만장일치로 11자의 글자를 새롭게 읽어냈다.
20여년만의 발견이었다.
@서길수 인터뷰...이번에 석문과정에서 모두 23자를 새로 읽어냈다. 지금까지 아무도 못읽어내던 것인데,
그 가운데 11자는 모든 석문위원들이 동의했기 때문에 확실한 것이고,
나머지 12자는 몇몇 사람들이 의문제기해서 괄호안에 넣었는데 23자가 새로 발견됐다는 것은 200여자중 거의
10분의 1을 읽어냈기 때문에 이 자체가 성과라고 할수 있다.
#비에서 전부대형 나오고 8 뿐만아니라 4면가운데 글자를 읽지 못했던 두 면에서 글자가 확인됐다.
#'순'자 나오고 글자가 발견됨으로써 이 비가 4면비라는 사실이 명백해진 것이다.
@서길수 인터뷰...우측에서 고구려의 전부대형이라는 확실한 관직명이 나왔다는 것이 성과고,
뒷면이 글자가 있느냐, 없느냐로 상당히 오래 논란이 됐는데 거기서 '순'자가 밝혀져 4면비로 밝혀진 것이
성과다.
#비 한퀴 돌고 11 중원고구려비는 고구려의 역사를 다시 한번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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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2
#기본세트
-1500년이란 세월탓인지 너무 마모가 심해서 첨단장비를 동원해서도 이 비문을 해석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고려태왕 조왕' 글자 불러오고
-이번 조사과정에서 가장 성과로 뽑히는 것은 '고려태왕 조왕'이라는 글잡니다.
이 비가 서있는 위치가 중원인 것으로 봐서 고구려가 중원땅을 차지한 시기가 광개토대왕때와 장수왕땝니다.
이때는 고구려의 최전성깁니다. '고려태왕 조왕',즉 왕이 선왕을 할아버지로 부를수 있는 왕은 다름아닌
문자왕이었습니다. 장수왕은 그 이름과 같이 장수를 한 탓에 왕위을 이을 아들이 일찍 죽는 바람에 장수왕의
뒤를 이른 왕은 손자인 문자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나오는 조왕은 장수왕이고, 이 비가 만들어진
시기는 문자왕이라는 추정이 가능해지는 겁니다.
#광개토대왕비 나타나고
-이것은 중국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입니다. 중원고구려비에 비해 그 크기도 4배이상 차이가 나는데 여기에는
고구려의 건국신화를 비롯해서 광개토왕의 전쟁업적이 기록돼 있습니다.
#'매금' 글자 불러오고
-그런데 이 두비석에 똑같이 들어있는 글자가 있습니다. 바로 '매금'이라는 표현입니다.
이 매금은 고구려가 신라왕을 낮춰서 부르는 이름인데 이 두비석에 똑같이 신라왕을 매금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라는 고구려와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아주 단적인 증거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 '매금' 외에도 중원고구려비에는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알수 있는 구체적인 사실이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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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2
#정영호 교수 이야기 하고 18 중원고구려비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
#삼국사기 27 삼국사기에는 당시 고구려가 신라왕위 계승에 깊숙히 개입했음을 알수 있는 사건이 있다.
실성의 왕위계승과 복호의 인질 문제가 그것이다.
여기에 대해 삼국사기는 단순히 이 사실만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중원고구려비는 신라가 고구려에
조공을 바치는 종속관계였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전하고 있다.
@정영호 인터뷰...이 석비야말로 삼국사기에서 밝힐수 없는, 기록 하나없는 우리 고대사 가운데서 금자탑과
같은 그런 존재가 아닌가. 그래서 이 글자 하나 하나가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말해주는 중요한 석비다.
#책에서 z.o 15 -고구려와 신라의 조공관계를 연구하고 있는 서영수 교수. 중원고구려비에 나타난 조공관련
기록에 주목하고 있다.
#광개토왕비에서 '조공 글자 나오고 8
-광개토대왕비에도 '조공'이라는 표현은 나오지만 자세한 언급은 없다.
#향전상공 간절 7 -그러나 중원고구려비는 고구려 왕의 사신이 가져온 부절에 대해 예를 갖추는 부분이 있다.
@서영수 인터뷰...왕이 모든 권한을 다 가지고 있어서 대리해야 명령이 유효하다. 그래서 신표를 준다.
그것이 부절이다.
#부절 13 부절을 가진 사람은 왕이 파견한 특사라는 뜻이 된다. 부절은 외교적으로 당시 관례였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미지 10 중원고구려비는 고구려왕의 태자가 부절을 가지고 신라왕을 만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의복건립처 8 뿐만 아니라 조공이 이루어지는 특별한 장소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서영수 인터뷰...의복건립처라고 하는 데가 나온다. 이것이 중요한 의미는 고구려와 신라의 조공관계가 1회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건물을 만들어서 수시로 이런 일을 했다는 것이다. 이런 예가 우리나라 사료로는 유일한
것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18 이전에도 의복을 받는 조공장소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는 '책구루'라는 성을
설치하고 그곳에서 의복을 받아갔다.
이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에서도 특별한 조공장소가 있었던 것이다.
#글자 6 당시는 의복을 주고받는 조공관계는 곧 정치적인 상하관계를 의미한다.
#이미지 14 중원고구려비를 보면, 신라는 왕이 직접 와서 고구려 태자로부터 의복을 하사받았다.
이것은 고구려와 신라의 복속관계가 얼마나 골깊은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서영수 인터뷰...조공의 경우도 강도가 틀려요. 사신통해서 보낸다, 왕자 인질을 통해 보낸다,
여러단계가 있는데 국왕을 보내 바친다는 것은 완전히 예속된 것이다.
국왕이 상국에 신하가 됐음을 표시하는데, 중원고구려비는 신라매금이 직접 오고, 신라왕이 노객이라고 하는데
당시 신라는 예속지배를 받고 있었다고 할수 있다.
#호우총 14 중원고구려비에 나타난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는 신라의 왕릉에서도 발견 된다. 호우총에서는
광개토대왕에게 제사를 지내던 그릇인 호우가 출토됐다.
#호우 10 당시 신라는 고구려의 영향권 안에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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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3
#기본세트
-이 시기는 고구려 역사상 가장 전성기였던 광개토대왕이 전쟁왕으로서 영토를 확장하면서 고구려의 힘을
과시했다면 장수왕은 정치력을 기반으로 한반내에서 고구려의 위상을 굳혔습니다.
그렇다면 이 비를 새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비는 광개토대왕비의 축소판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입니다.
모양도 그렇고 내용도 고구려의 힘을 과시하는 것으로 돼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광개토대왕 비가 광개토대왕
의 업적을 전하는 것이라면 중원고구려비는 장수왕 시기의 빛나는 역사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장수왕은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기면서 남진정책을 폈습니다. 신라는 신하의 예를
갖추면서 조공을 했지만 백제는 달랐던 것 같습니다. 백제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를 통해 당시 내용을
알수 있습니다.
#국서 불러오고
-이 국서를 보면 백제를 고구려를 승냥이와 이리로 표현하면서 금연유죄, 연은 장수왕의 이름인데 이름을
부르면서 장수왕은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장수왕이 대신을 죽여서 국가를 어육으로 만들고 살육이 그치지 않고 있다. 백제가 고구려의 장수왕을 비방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백제 개로왕이 고구려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잘 말해주는 대목입니다.
북위가 고구려를 침략해주길 바라면서 보낸 국서는 오히려 화를 부릅니다. 당시 고구려는 최정성기였기 때문에
북위는 고구려를 침략할수 없었습니다.
개로왕이 북위에 국서를 보냈다는 사실을 알게된 고구려는 단숨에 백제를 침략해서 한성을 함락해버립니다.
이 전투에서 고구려군에게 생포된 개로왕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그리고 수도를 지금의 서울에서
공주로 옮기게 됩니다. 자, 이런 고구려의 적극적인 남진과 중원고구려비는 어떤 관계가 있는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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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3
#광개토대왕비 f.s 7 고구려의 정복전쟁 기사를 기록하고 있는 광개토대왕비에서 고구려의 남진의식을 엿볼수
있다.
#고견편사관 백신토곡 10 398년, 광개토대왕은 지금의 충청도와 강원도 일대의 군사로를 미리 개척한 것으로
추정한다.
#왕순하평양 10 또 이듬해에는 평양을 순시하는데, 이때 광개토대왕은 신라의 구원요청을 받는다.
#400년 전쟁 8 그리고 다음해, 고구려는 신라에 군사 5만을 출병시켜 신라를 구원한다.
#고구려 원정길 지도 13 2년전부터 닦아놓은 군사로를 따라 고구려는 단숨에 신라와 가야까지 진군한 것이다.
고구려의 남진은 이렇게 치밀하게 준비된 것이었다.
@이도학 인터뷰...고구려는 광개토왕때부터 남진의지가 확고하게 표출돼있었다. 그래서 평양성지역에 9개
사찰을 창건한 적도 있었고, 비문에도 나와있듯이 신라사신을 평양성에서 만나고 있습니다. 평양성은 광개토
왕때부터 고구려의 실질적인 수도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고 볼수 없다. 이런 선상에서 장수왕때와서 백제에
대한 공격이 더 적극적으로 되고 있고, 평양천도가 단행된다.
#평양시내 5 마침내 장수왕은 국내성에서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다.
#평양성으로 pan 19 평양천도는 고구려의 남진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다. 국내성에 비해 평양은 넓은 평야
지대로 비옥한 농토가 많고, 한반도 남쪽으로 진출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길목이다.
고구려는 평양성을 굳건하게 쌓고 본격적인 남진을 한다.
#삼국사기 5 그리고 지금의 충주까지 내려온다.
#국원성 18 삼국사기에 따르면 충주는 고구려때 국원성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국원성은 고구려가 한반도
남부를 경영하기 위해 충주지역에 세운 남진기지다.
#충주 항공 4 국원성의 중심은 어디일까.
#장미산성 12 충청대 장준식 교수는 국원성과 관련된 중요한 유적으로 장미산성을 꼽고 있다.
@장준식 인터뷰...우리나라에서 산성의 발달, 성곽의 발달은 고구려때부터 시작되니까 이 일대의 역사지리
적인 것으로 봐서 이것은 고구려때 축성된 것으로 보여지고.
#성벽 5 장미산성은 충주지역 방위에 전략적 요충지다.
#밭 돌아다니고 5
#토기 조각 줍고 10 장미산성 일대에서는 삼국시대 각종 토기와 기와조각을 지금도 쉽게 찾을수 있다.
#중앙탑으로 z.i 17 장미산성에서 불과 4킬로미터 떨어진 평야지대, 충주 탑평리 중앙탑 일대다. 중앙탑은
통일신라때 신라가 통일을 기념해서 세운 것인데, 장준식 교수는 이곳을 국원성의 치소로 보고 있다.
#중앙탑 10 중앙탑 주변에서 발견되는 대부분의 토기와 기와는 고구려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기와 꺼내고 14 그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기와다.
#기와 15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발견되는 고구려 기와인 '탑평리 기와'를 비롯해서 고구려와 신라,
고구려와 백제의 양식이 혼합된 기와가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장준식 인터뷰...이 기와는 색상이나 모양이 고구려 기와다. 그러나 백제적인 영향을 받아 상당히 부드러워
졌다. 그렇다면 중앙탑에서 출토된 이 기와는 바로 중앙탑은 통일 신라때 만들어진 것이지만 이것은 그
이전에 고구려 사람들이 정착했다는 증거다.
#중앙탑 z.o 9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현재 중앙탑 자리가 고구려 국원성의 중심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국원성 일대 표시 9 국원성은 장미산성을 방위 산성으로 하고, 평지에 중요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국내성 5 고구려의 도성배치는 산성과 평지성이 함께하는 구조다.
#비교 5 국원성도 고구려 수도였던 국내성과 관련이 깊다.
@이도학 인터뷰...국원성이라고 하는 것은 고구려의 두 번째 도성이름인 국내성과 같은 동급의 성이름이라고
할수 있다. 국내성이라고 할 때 국이라는 글자는 나라란 뜻이 아니고 성의 뜻이다. 내라는 말은 고구려말에서
토지를 가리키는 나, 양으로 같은 개념으로 볼수 있다. 국내성은 서울이다는 도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와 더불어서 국원성이라는 지명도 같은 것이다. 들원자를 썼는데 원자는 내, 나, 양이라는 고구려에서 토지를
번역해 놓은 것이기 때문에 국원성은 곧 국내성과 같은 동급의 성임을 가리키고 있다. 이것은 국원성 지역을
수도에 버금가는 지역으로 인식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비 t.u 16 국원성에 고구려는 비석을 세웠다. 신라와 형제의 나라로 영원히 하늘의 뜻을 같이 받들고자 했던
고구려. 고구려 남진의 의미를 알수 있는 대목이다.
@서영수 인터뷰...고구려가 신라를 구원해줬다고 막연하게 알았는데 바로 고구려가 신라를 형제지국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상하 상화, 화목이라는 것이 고구려 남진의 중요한 목표였던 것입니다.
#국원성 일대 pan 6 고구려가 남진을 위해 선택한 전진기지. 그곳이 바로 국원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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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4
#중앙탑 옆에서
-바로 이탑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에 통일을 기념하기위해 세운 중앙탑입니다.
이 탑이 세워져 있던 이 일대가 고구려의 남진기지로 추정되는 곳입니다. 탑이 있었다면 사찰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될 것인데, 이 일대에서는 사찰이 있었던 흔적을 발견할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일대에 형성됐던 마을은
고구려의 남진기지였던 국원성이라고 보는 견해가 제기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지역은 삼국이 모든 탐내는 그런 지역이었습니다. 고구려는 이곳에 국원성을 설치해서 남진기지로 활용했고,
신라가 이 지역을 장악했을때는 고구려지역과 백제지역을 다스리는 중심지인 중원경을 설치했습니다.
그만큼 이 지역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고구려는 이 자리를 중원고구려비를 세웠습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라고 볼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충주인 중원이 이렇게 중요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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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4
#pan 8 햇골산 길목에 있는 봉황리 마애석불군
#마애불 불상군 20 깍아지른 절벽위에 병풍처럼 불상이 늘어서있다. 한쪽 손을 턱에 대고있는 반가사유상은
한강유역에서는 처음 발견된 것이다. 허리가 잘룩한 협시보살, 어깨가 당당하고 눈두덩이가 불룩한 여래
좌상은 고구려 양식이다.
@장준식 인터뷰...길게 내려지는 주름치마 양식이라든지 특히 이 대좌가 삼각형을 뒤집어놓은 듯한 것은
고구려 금동불상이나 고구려 불상에서 많이 보인다. 사자상 배치나 이런 것은 북위계통의 영향을 많이 받은
고구려 불상에서 보이는 양식이다.
#금동불 광배 11 뿐만 아니라 충주지역에서는 고구려의 금동불 광배가 발견되기도 했다.
#한바퀴 돌리고 15 '상부'라는 고구려 관직이름과 함께 '건흥'이라는 장수왕의 연호가 적혀있다.
이 지역에서 고구려 유물이 이렇게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장준식 인터뷰...금동불 광배는 봉황리 마애불상군과 중원고구려비, 중앙탑 일대에서 출토된 고구려 적인
기와로 봤을 때 이 일대는 고구려의 군사적 시설은 물론 고구려 문화가 장기간 정착됐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충주 기점 지도 15 국원성이었던 충주는 교통의 요지였다. 고구려가 남하하는데 있어서 충주는 고대 교통로인
죽령과 계립령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온달산성 항공 16 죽령으로 이어지는 지점에 위치한 온달산성. 남한에 남아있는 고구려 성 가운데 그 모습이
가장 완벽하게 남아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걷고 17
#성벽 17 1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고구려 인들이 쌓은 성벽은 원래 모습 그대로 철통같다.
@윤수경 인터뷰...무게를 골고루 받아 1500년을 지탱한 것이죠. 고구려 사람들이 성 기술이 발달됐다는 것을
볼수 있고
#성벽 축조 방법 12 일반적으로 성벽 사이에 자갈을 넣어 쌓는 성과는 달리, 온달산성은 내부에도 꼼꼼하게
들여쌓기를 했다. 1500년을 버텨온 비결이 여기 있다.
#성벽 걷고 5 뿐만 아니라 고구려 성은 치가 발달해 있다.
#치 6 성벽의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곤경에 빠뜨리는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그래픽 8 치는 성곽기술이 발달한 고구려인들의 지혜였다.
#z.i 19 완벽한 축조방식으로 천혜의 요새였던 온달산성. 온달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이 성의 중요성은 온달이
출정하면서 남긴 말을 통해 자세히 알수 있다.
#온달전 18 온달장군은 계립현과 죽령서쪽의 땅을 차지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인다.
계립현과 죽령서쪽 땅, 그것은 바로 충주를 중심으로 한 중원을 말한다. 고구려에게 이 지역이 얼마나 전략적
으로 중요했는지 알수 있다.
#pan 10 죽령과 계립령을 최단거리에 넘을수 있는 교통의 요지였던 충주.
#항공 24 육로는 물론 충주의 수로는 한강으로 이어져 백제의 수도 한성으로 가는 길목이기도 했던 것이다.
@장준식 인터뷰...충주의 지리적인 위치는 한반도의 대략 중앙지역이다. 따라서 수륙양용의 교통로가 절대적
으로 확보가 되는 것입니다.
#강줄기 따라가본 항공 17 고구려와 신라, 백제로 이어지는 꼭지점이었던 충주. 고구려에게 이 지역 교통로
확보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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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5
#지도 불러오고
-중원이 이렇게 정치문화적으로 중요하게 된 이유도 교통때문이었습니다. 충주에도 백제수도 한성으로 이어
지는 한강수로가 있습니다. 또 지금의 죽령과 조령을 넘으면 신라를 최단거리로 갈수 있는 길목에 충주가
있습니다. 전략적으로 포기할수 없는 요충지인 셈입니다. 게다가 이 중원이 교통이 용이하다는 장점외에
또하나의 커다란 이점이 있습니다.
#돌맹이 보면서
-이 돌은 충주지방에서 많이 나는 돌입니다. 돌을 자세히 보십시오. 반짝거리지요? 이 돌은 그냥 돌이 아니라
철을 다량 함유하고 있는 철광석입니다. 고구려가 중원을 남진기지로 선택한 이유중의 하나가 바로 이 철이
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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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5
#단호사 안으로 들어가고 13 단호사에는 눈길을 끄는 유물이 있다.
#철불 28 보물 512호로 지정된 철불이다. 높이가 130센티미터,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인근의 대원사
철불과 그 모습이 거의 같다. 같은 시기, 동일인물이 두 구의 철불을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철불 분포도 8 우리나라에 있는 20여기의 철불 가운데 3기가 충주지역에 밀집해 있다.
#길에서 pan 7 충주는 우리나라 3대 철산지 가운데 한곳이다.
#올라가고 7 쇠곶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30년전만해도 철을 캐던 곳이다.
~현장음 살리고...여기 보면 산이 있었고, 노천광이다.
#산에서 t.d 15 지금은 폐광이 되었지만, 지금도 햇볕이 정면으로 들때면 바위가 반짝거릴정도로 돌에는 철이
다량 함유돼 있다.
~현장음 살리고...자석 붙이면 다 붙을겁니다.
#자석 붙이고 27 (보다가) 바위에 자석을 갖다대자마자 자석이 붙는다. 고대에는 철을 쉽게 구할수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길경택 인터뷰...이것이 고구려비가 있고, 중앙탑이 있는 가금면 중심지에서 시내쪽으로 기껏해야 2킬로미터
상관에 이런 광산이 있는거다. 만약 국원성이 가금면 인근에 있었다면 바로 철자원을 쉽게 얻을수 있는 곳이
주변에 많았다는 얘기죠.
#pan 9 인근의 이류면에서는 실제로 철을 제련했던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제철 흔적들 8 철광석을 녹여 철을 얻는 과정에서 생긴 제련로의 파편들이다.
#땅에서 돌 줍고 17 충주 일대에는 제련로로 보이는 곳이 43군데나 발견됐다. 제련이 상당히 성행했음을 알수
있다. 대부분이 고려시대이후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최근 고대유적이 발견됐다.
#석장리 유적 발굴 화면 15 우리나라에서 확인된 고대 제철 유적 가운데 최대규모인 진천 석장리 유적.
이곳에서는 제철로의 흔적이 발견됐다.
#박물관 유물 29 철이 녹으면서 흘러내린 흔적, 그리고 부서진 송풍관이 대량으로 발견됐다. 이 유물과 유적은
백제시대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진천지역에서 고구려 유적이 발굴될 가능성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동국여지 승람 25 진천이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던 흔적이 있기 때문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진천'이
고구려의 행정구역인 '금물로'였다고 적고 있다. 진천 지역이 고구려에 병합되어 고구려 통치를 받았음을 알수
있다.
@길경택 인터뷰...진천 석장리에서 이곳까지는 한시간 정도 거리고, 진천쪽은 철이 직접 나오는 것이 없다고
봤을 때 충주의 철이 옮겨간 과정으로 본다면 삼국시대 당연히 중주지역에도 철을 제련하던 제련소가 있었다고
봐야겠죠. 아직은 이 지역에 대한 집중적인 조사를 하지 못했기 삼국시대 제련로를 발견하지 못했던 것 뿐이죠.
#제련로 만들고 철광석 붓고 10
고대사회에서 철을 얻는 방법은 제련로를 통해서였다.
#풀무질 하고 14 제련로에 철광석을 집어넣고, 열을 가하는 방법이었다. 이때 풀무를 통해 바람을 넣어주는
것이 송풍관이다.
#깨내고 안에 철 보여 12 철이 녹으면 제련로 안에서 녹아내린 철을 얻을수 있다.
#철로 만든 무기류 유물 18 고대사회는 이렇게 얻은 철을 다시 가공해 각종 무기류를 만들었다. 이런 철제
무기의 생산이 국가의 성립을 가져왔고, 나라의 흥망을 좌우할 정도로 철은 중요한 자원이었다.
@이남규 인터뷰...고대국가가 성장하는 데 있어서 철을 어떻게 생산해서 그것을 보금하고,
어떻게 부국꽤하느냐, 부국을 기반으로 어떻게 강대국으로 발전시켜 나가느냐는 것이 고대국가 발전의 가장
핵심이라고 할수 있다.
#벽화의 궁수, 부월수, 창수 15 고구려는 철기문화의 선진국이었다. 고구려 벽화속에는 각종 철제무기로
무장한 병사들이 나타난다.
#중갑기병 15 철기문화로 군사력을 과시했던 고구려. 충주를 중심으로 한 중원의 철은 고대국가가 탐내는
중요한 자원이었다.
@이남규 인터뷰...삼국이 중원지방을 중심으로 각축을 벌였던 이유중의 하나로 철의 문제를 들수 있다.
중원은 한반도 내에서도 철의 잠재력이 많은 지역이기 때문에 이 지역 장악은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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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6
#기본세트
-교통의 요지이면서 무기생산에 꼭 필요한 철산지가 있는 중원지역. 중원의 중요성은 바로 여기 있습니다.
한반도로 남진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는 고구려에게 이 지역은 결코 포기할수 없는 지역이었을 것입니다.
#순흥고분
-지금 보시는 이곳은 경북 영주시 순흥 읍내리 고분입니다. 석축을 낮게 쌓고 흙으로 봉분을 만들었는데
고구려식 무덤입니다. 안으로 들어가 볼까요?
#고분안
-들어와 보니까 새그림도 있고, 연꽃 그림도 있다. 그런데 벽화가 너무 많이 훼손돼서 잘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무덤에 들어오는 입구에 수호신이 그려져 있습니다. 무서운 얼굴을 한 수호신이 버티고 있고,
한쪽에는 물고기 모양의 깃발을 들고 있는 수호신이 있습니다. 이런 그림들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쉽게
찾아볼수 있습니다.
#사신총 그김 불러오고
-지금 보시는 이 그림은 사신총 고분벽홥니다. 순흥벽화의 수호신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학자들은 순흥고분이 고구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순흥고분은 5세기, 장수왕
때로 추측하고 있는데 기록상으로도 순흥지역이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이곳 순흥지역의 고구려 지명이 '급벌산'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고분은 경상북도
순흥까지 내려왔다는 증거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고구려는 한반도 어느 지역까지 남하를 했던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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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6
#영남대 외관 2
#지도 펴고 8 고구려가 어디까지 남하했는지 알수 있는 지도가 있다.
#지도 30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고구려 강역도'다. 동국여지승람과 같은 사료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지도는
당시 지명과 고구려 지명을 함께 표기하고 있다. 여기에 표기된 고구려의 지명을 통해 고구려의 영역을 추정
해볼수 있다.
@성태규 인터뷰...이 지도는 아마 고구려 전성기 시대를 복원한 것으로 보이는데 남하한 지역이 동쪽으로 청하,
서쪽으로는 진천을 포함하는 충청도 지역까지 남하한 것으로 고구려 시대 중요한 지도로 사료가치가 있다.
#지도 30 이 지도에 따르면 백제와의 경계는 현재의 남양만에서 충북 진천일대, 신라쪽으로는 청하까지가
고구려의 강역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유적을 통해 살펴본 고구려의 영향권은 이보다 훨씬 남쪽으로 내려간다.
#차 달리고 7
#냉수리 15 포항 냉수리 고분은 1990년 도로공사 과정에서 세상에 알려졌다. 포항은 신라지역으로 알려진
곳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무덤이 발견된 것이다.
#냉수리 고분 내부 그래픽 25 지름 25미터, 높이 7미터의 무덤안은 돌로 만들어져 있는데 가운데 복도를
이루고 있다. (사이) 오른쪽에 방이 있고, 안쪽에 관을 놓았던 방이 따로 있다.
@박방용 인터뷰...고구려 고분에서 볼수 있는 특이한 묘제임이 밝혀졌다. 즉 돌방무덤 구조를 하고 있는데 들어
가는 널길 오른쪽에 측실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무덤 구조는 한강이남은 처음 밝혀진 것으로 무덤의 규모면
에서나 구조면에서 영락없는 고구려 고분 형태였다.
#냉수리 출토 토기 20 상당수의 유물이 이미 도굴된 상태지만 이곳에서 나온 유물은 대부분 고구려 것이었다.
부뚜막형 토기와 3중으로 겹쳐진 반형토기도 고구려 지역에서 출토되는 것들이다.
이 무덤의 주인은 고구려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다.
@박방용 인터뷰...이쪽 지역은 한때 고구려와 신라의 접경지대였고, 6세기 후반만 하더라도 고구려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던 그런 지역이었다. 따라서 이 고분의 주인공은 아무래도 고구려 계통의 사람이거나 아니면
이쪽 지역에 있는 사람이면서 고구려와 강한 접촉을 해서 고구려와 떼놓을수 없는 사람의 무덤이 아닌가 추측
된다.
#차 달리고 7 충남 연기군에서도 고구려 유적이 발견되고 있다.
#집 외관 3
#이야기 하고 15 향토사학자 임영수 씨는 연기지역이 고구려와 관련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연기읍지에는 개소문성이라는 기록이 있다.
#산으로 z.i 11 실제로 이 마을에는 소문산성이라는 유적이 세군데나 있다고 전해진다.
#걸어가고 30 금강상류지역인 부강을 사이에 두고 북쪽에 있는 이 산성은 많이 허물어져서 고구려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는 이곳이 고구려와 백제의 접전지였음을 알수 있다.
@임영수 인터뷰...금강 이쪽에 쌓은 산성이 고구려 사람이 쌓았다는 소문산성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강 건너에도 산성이 있는데 고구려 군사를 방어하기 위해서 쌓은 산성이라고 합니다.
#금강 z.o 9 금강 상류인 부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해 있는 두 산성은 연기지역까지 고구려 군이 내려왔음을
짐작할 수 있는 흔적이다.
#강따라 항공 10 그런데 최근에 이보다 더 남쪽에 있는 대전지역에서 고구려의 유적이 발견됐다.
#월평동 유적 출토 유물 25 대전 월평동 유적이 그것이다. 저온에서 구워 표면이 갈색을 띄고, 바닥이 평평한
토기편들은 고구려 토기의 특징이다. 백제지역으로 알려진 이곳에서 고구려식 토기편들이 대량으로 확인된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신영호 인터뷰...고구려 토기가 월평동 유적에서 발견됐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습니다. 과거 고구려의
영역 자체가 일반적으로 한강, 차령산맥 이북에 해당된다고 생각했는데, 물론 문헌상으로는 연기지역이나
중원을 경유했다는 기록이 보이지만 유물상으로는 월평동 유적이 가장 남단에 해당하기 때문에 고구려군이
대전지역까지 내려왔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토기라고 할수 있다.
#지도 4 최전성기, 한반도 남진정책을 폈던 고구려.
#색 칠해지고 9 551년 신라에 중원 지역을 빼앗기기 전까지 고구려는 한반도의 중심에 있었다.
@이도학 인터뷰...문헌에 나와있는 것보다 훨씬 남쪽 깊숙히 고구려 군대가 내려가서 거점을 확보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월평동 유적이나 개소문 성은 우리가 알고 있는 통념을 뛰어넘어 굉장히 깊숙히 고구려의
힘이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고, 이것은 지금은 충남 공주 목전에 해당하기 때문에 백제에 대한
군사적인 압박이 얼마나 심했는지 실감나게 전해주고 있다고 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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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7
#지도 불러오고
-동국여지승람과 같은 사서를 토대로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지도를 보면 고구려 전성기때인 장수왕때의
영역은 신라쪽으로는 흥해일대까지 백제쪽으로는 충북 진천군 일대까지 였습니다.
-그러나 드물게 남아있는 고구려 유적을 자세히 조사해보면 고구려의 영역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남쪽인 대전, 경주에서 불과 50킬로미터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포항 냉수리 지역까지였습니다.
당시에는 국경선이 지금처럼 분명하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고구려 전성기때 고구려가 직접 지배한 영역은
이정도로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신라토내 당주' 글자 불러오고
-하지만 고구려가 이렇게 직접 통치만을 했던 것은 아닙니다. 중원고구려비를 보면 '신라토내 당주'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당주라는 것은 고구려 군사가 주둔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신라영토내에 고구려 군사가
주둔해서 군사력을 행사할수도 있다는 의미도 있고, 그것은 신라가 고구려에 간접통치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반도 내에서 고구려의 영역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넓었던 것입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고구려 왕을 왕중의 왕이라는 뜻으로 '태왕'이라고 부르고, 다른 나라는 동이라고 부르면서
고구려 중심세계를 구축해 나갔습니다.
-1500년전 한반도의 패자였던 고구려. 중원고구려비는 한반도에서 고구려의 천하관과 남진의지를 전하고자
바로 여기에 서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