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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있음직한 젊은 시절의 한 대목을 자전적 에세이식으로 정리하여 문학지에 실은바 있습니다. 반향이 괜찮은 듯 하여 감히 카페에 올려 보았습니다.
스토리가 다소 길긴 하지만 시간내어 일별해 주시면 영광으로 간직 하겠습니다.
기억속에 묻어둔 이야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임종호)
한 여름날 작열(灼熱)하던 태양의 열기가 식어지고 싱그러움을 과시하던 잎새들도 어느덧 고적한 가을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젊은 날의 추억들 한갖 헛된 꿈이라. 윤기 흐르던 머리 이제 자취 없어라 지난날을 더듬어 은발 내게 남으리」젊은 날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 연인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되새겨 보는 미국 민요 ‘은발’이 연상되는 계절이기도 하다.
언제까지나 고을 줄만 알았던 얼굴에 주름이 늘어나고 윤기 흐르던 검은 머리엔 어느새 백발이 성성해 오고 있다. 세월은 모나지도 둥굴지도 않으며 머무르지도 걸리지도 않고 그저 무심한 강물처럼 흘러 가는 것 같다.
오늘은 왠지 오랫동안 가슴속에 간직해 둔 추억의 여정을 떠나보고 싶다. 돌이켜보면 나에게 있어서도 한때 이야기속의 주인공 같은 시절이 있었다.
모진 가난과 낙후로 이어진 암울하던 시절의 농촌환경에서, 외지로 고등학교에 갈 수 있다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선택된 축에 속했다. 나는 오로지 공부를 열심히 해서 부모님 은공에 보답 하고자 하는 다짐과 일념으로 가득차 있었다. 한편 할머니로부터 이어받은 교회 출석도 학교 공부 못지 않게 중시 하였고 또한 성가대 봉사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화사한 어느 봄날이었다. 청순함과 미모를 겸비한 인상에, 여고생쯤으로 보이는 한 소녀가 환상의 주인공처럼 등장 하였다. ‘알퐁스도데’가 쓴 ‘별’의 주인공 ‘스테파네트’를 연상케 하는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다. 대구가 고향인 그녀는 시내 초등학교 교사로 초임 발령을 받아 근무하게 되었고, 교회에서는 성가대 지도와 반주를 맡아줄 것이라고 소개 되었다. 김은혜 선생이라고 했다. 반가웠다. 어쩌면 반가운 정도를 넘어 경사라도 난 듯 은밀히 설레었다고 기억된다. 학교 선생이라고는 하지만 그 당시로는 사범학교나 간호학교등 고등학교 과정만 수료하면 초등학교 교사가 될 수 있었다.
김선생은 그때 나보다 한살 위인 열아홉이었다. 그녀에 대한 인상을 떠올려 보면, 지금도 눈에 선연하여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을 것 같다. 아직 소녀티를 벗어나지 못한 듯 앳되 보였으며, 얼굴이 희고 청초한 이미지에 단아하게 정돈된 듯 기품이 있어 보였다. 또한 음악적 재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문학적인 소양도 돋보였으며, 교회에서도 온통 총애를 받았다.
어느날 우연히 김선생과 나는 창가에 서서 독서에 관한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것을 계기로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는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독서 얘기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컸지만 긴밀한 분위기를 공유할 수 있었던 것 같아 가슴이 뛰기도 하면서 어느덧 그녀에게 매료되어 가고 있었다.
그후 나는 밤잠을 설치면서 세계명작 위주의 독서에 열중하게 되었다. 환심을 사고 싶었던 설레임에 빠져들어 한껏 의욕을 앞세웠다. 그러나 다른 한편 학교공부에 상당한 지장을 초래하게 될 것 같아 다소 갈등이 생기기도 하였다.
이런저런 궁리 끝에 세계명작 해설 위주로 요약 정리된 단행본을 구입하여 독파하게 되었으며, 그 변변치 못한 편력(遍歷)을 내세워 마치 정본을 섭렵한 듯 과시 하기도 하였다.
놀라는 듯한 김선생의 표정에 고무되어 독서에 더욱 열중하게 되었다. 인정을 받고 싶었던 심사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김선생은 전후 사정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한것같고, 더구나 대견하다는 식으로 격려를 보내 주기도 하였다.실상을 들켜 버린것 같아 조금은 부끄럽기도 하다.
만나는 횟수가 거듭될수록 서로에 대한 향심(向心)은 더욱 긴밀해져 가고 있었다. 처음 누나 같이 생각되던 친밀감 수준에서 이성에 대한 연정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중학생인 동생과 같이 자취를 하는 형편이라 비록 궁색은하였지만 가진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아낌없이 주고 싶은 심정으로 가득차 있었다.
김선생도 학교 관사에서 자취를 하였다. 그당시로서는 고급품에 상당하는 땅콩, 박하사탕, 깨엿, 사과등 다과류를 사들고 자취방에 잠깐씩 들리기도 하였고, 공휴일 같은 때는 친히 음식을 만들어 가지고 찾아 주기도 하였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가 있을 무렵이면 푸짐하게 먹을 거리를 사서 들여 놓곤 했다. 그런때는 시험공부에 지장이 있을까 싶어서인지 방안에까지 들어오지 않고 훌쩍 가버리곤 해서 한동안 아쉬움과 여운이 이어 지기도 하였다.
언젠가는 오르간을 배워 보라고 제안 하였으나 극구 사양하였다. 기본 정도는 해두면 좋을 것이라고 설득하듯 몇 차례 권하는 바람에 못이긴 채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어느새 피아노교본 ‘바이엘’을 준비해 와서 사진관으로 데려 갔다. 교복과 학생모를 착용한 채 나란히 사진촬영을 했다. 의욕을 북돋우고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며 기념촬영까지 유도했던 것 같다. 다소 소질이 있었던지 진도가 빠른 편이었다. 어쩌면 김선생의 격려와 칭찬에 힘입어 열의를 기울인 결과였을 것이다.
날이 갈수록 오르간을 배우는 시간보다 얘기를 나누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서로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런 현상으로 나타났던 것 같다
.한편 학교 공부에 대한 강박감이 엄습하여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있었지만 때로는 수업 시간에도 집중이 안되고, 칠판 글씨 위에 그녀의 얼굴이 겹치면서 확대되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 김선생에게 고스란히 사로잡혀 가고 있었다. 그 여파로 공부에 상당한 지장이 초래되고 있었던 것 같다.
공부로 부모님께 보답하고자 하는 일념이 흔들리고 있다는 자책감으로 점점 마음이 무거워지고 있었다. 궁리끝에 오르간 배우는 것을 일단 중단 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이를테면 국면 전환을 모색해 본 셈이었으나, 내심으로는 달라진 것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여름방학을 맞이하게 되었다. 콤파스로 크게 원을 그려 하루의 일과표와 한달 계획서를 작성하여 벽에 붙여 놓기도 하였으나, 용두사미에 그치고 말았다. 실천할 수 없는 과도한 계획서를 만들어 본 셈이었다.
몇일 후 편지가 왔다. 열번을 넘게 읽었는데도 읽을수록 뭉클하게 감동이 느껴졌다. 모기떼들이 부산을 떠는 한 여름밤에 호롱불 등심(燈心)을 돋우며 밤늦도록 고치고 찢고 하면서 답장을 썼다. 아마 그때 부모님 보시기에는 공부에 열중하는 모습으로 비춰졌을 것이고 내심으로는 대견 스럽기 조차 하셨을 것이다. 부모님께서 그때 눈치 채셨다면 어떤식으로개입 하셨을까? 어쩌면 아시면서도 모른척 하셨을까? 방학 동안에 기다림으로 면면한 편지 왕래가 수 차례 더 이어졌다. 어떤 충만감으로 채워지고 있는 듯 하였다.
나는 이따금 높은 산등성에 올라 가물가물하게 먼 하늘 아래를 그려 보기도 했다. 가까이서 반갑게 손짓하는 환상을 떠올리며 아련한 감상에 빠져들기도 하였다. 단풍이 곱게 물든 어느 가을날 산등성에 올라 빨갛게 익은 야생초 열매를 따다가 그녀에게 건네 주었을 때, 소중한 보석인양 마냥 좋아하던 모습은 지금도 인상깊게 떠오르고 있다.
바람이 몹시 찬 어느 겨울밤 이었다.
종종 그랬듯이 성가연습을 마치고 김선생 자치방에까지 바래다 주었다. 날씨가 너무 추우니 오늘은 몸을 좀 녹여 가지고 가라는 호의에 반은 끌리듯 따라 들어갔다. 아랫목만 따뜻한 집인 듯 하였다. 이불속에 발을 넣으라는 것이었다. 사양하다 못해 발을 넣었다. 발과 발이 닿았다.
나는 감전이라도 된 듯 반사적으로 다리를 걷어들여 쑥스러워 지기도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당시로서는 순수한 남녀 관계를 표상(表象)으로 삼고 있었던 때이다. 이를 테면 신체 접촉이 용인(容認)되지 않는 이성 교제만이 진선진미한 것으로 통념화 되어 있던 시절이었다. 뒤돌아 보면 바보 스러웠던 것 같기도 하고 풋풋한 향수로 추억 되기도 한다.
유난히 추웠던 그 겨울이 가고 희망이 약동하는 새봄이 왔다. 대대로 물려받은 가난의 틀을 쉽게 벗어날 수는 없었지만, 거리에는 생동감과 활력이 넘치는 것으로 느껴졌다. 그것은 객관적인 정황이라기 보다 내 마음의 투사(投射) 현상이였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때 김선생이 내마음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어서 그런 느낌이 가능 했음직하다. 그림자만 봐도 설레이고 이름만 들어도 감동이 되었던 터라 주변 상황이 긍정적으로 비춰 졌던 것 같다.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연모하게 되면 그 감정이 다른 대상에게도 긍정적으로 전이(轉移) 되는 것일까?
시간은 잠시도 쉬지 않고 모든 것을 변모시켜 같은 현실속에 계속 머물러 있기를 허용치 않는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 했던가!
김선생이 자기집과 가까운 대구로 전근되어 간다는 것이다. 대놓고 남들에게 내색은 할 수 없었지만 망연자실(茫然自失)한 심경이었다. 교회에서 성가대 추최로 송별회를 해 주었다. 교회에서 많은 아낌을 받아왔던 터라 아쉬움이 가시지 않았다. 그간의 노고에대한 격려와 덕담을 나누던중 분위가 바뀌어 노래를 들어보는 순서로 넘어갔다. 김선생에 앞서 나에게 먼저 기회가 주어졌다. 나는 ‘메기의 추억’을 불렀고, 김선생은 ‘한떨기 장미꽃’과 ‘친구의 이별’을 불렀다.
「나는 못 떠나겠네 나의 포근한 자리, 발걸음 돌리지 못해 여기 나는 잠자리...」 「친구 내친구 어이 이별 할거나, 친구 내친구 잊지 마시오...」 석별의 정조(情調)를 띤 서정적 음율과 호소력 있는 가창력이 심금을 울렸다.
김선생은 감정이 복바치는 듯 박수 소리를 뒤로한 채 밖으로 훌쩍 나가 버렸다. 숙연한 분위기가 감돌자 사람들이 나를 응시하고 있는 듯 하여 당혹스러웠다. 처음 맞이해본 별리(別離)의 정한(情恨)은 애틋했다.
사랑이 빛이라면 이별은 그림자 일까?
연모의 정이 깊을수록 이별의 아쉬움은 크다고 했다. 정들지 않으면 별리의 애틋함도 없겠지만, 이별을 염려하여 정드는 것을 마다할 수도 없지 않으랴...
누군가가 이르기를 「사랑의 고뇌처럼 심오한 것은 없고, 사랑의 슬픔처럼 찬란한 것은 없으며, 사랑의 괴로움처럼 감미로운 것은 없다」라고 했거니와, 사랑으로 인한 번뇌는 지극하여 애련(愛戀)의 소용돌이에 한번 깊숙이 빠져들면 좀처럼 헤어나기 어려움에도, 인간은 어쩌면 천만가지의 다른 즐거움보다 이 고통의 길을 선택하여 감연(敢然)히 뛰어들고 싶어하는 충동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흔히 사랑이라는 말을 운위(云謂)할 때 찬연한 무지개 색상이나 달빛 흐르는 창가에서의 연가와 같은 감미로운 환상을 떠올려 보지만, 사랑은 얻어서 즐겁고 기쁘기만 한것이 아니라 상실의 고통과 번뇌가 예정되어 있고, 더구나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는 비련으로 종지부를 찍게 될 때엔 지극한 정한이 평생을 두고 사무칠수 있기에, 사랑은 차라리 웃음보다 눈물에 더 가깝다고 말한다면 역설일까?
이튿날 아침 일찍 김선생은 내 자취방에 들렸다.
재회를 기약할 수 없는 작별의 시간이 온 것이다. 만남, 이별, 재회등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해 생각나는대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말과 글을 통해 희비애락의 감정이나 생각을 표현하지만, 문자언어보다 절실한 것은 표정언어와 신체언어(body language) 가 아닐까? 때로는 침묵을 통해 화려한 언변보다 더 호소력 있는 멧세지를 담아낼 수도 있는 것 같다.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것 보다 서로의 눈망울을 응시(凝視)하는 것만으로도 만감이 교차하는 심중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김선생이 새로운 임지인 대구로 떠날 시간이 되었다. ‘이제 헤어지면 언제 또 만나 볼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궁색한 이유를 내세워 가까스로 조퇴를 하고 기차역까지 나갔다.
이미 여러 사람들과 고별사를 나누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리지 않을까 의식하면서 다소 거리를 두고 담담한 척 하였지만, 은연중 김선생에게로 시선이 맞춰지고 있었다. 김선생도 나를 가시권(可視圈)에 잡아두려고 표시안나게 마음쓰는 것 같았다. 이윽고 기차가 도착했다. 다른 사람들의 부산한 제스추어에 비해 나는 목례(目禮)를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조금이나마 더 잡아두고 싶었지만 어찌하랴! 기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망연한 심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몇일 후 학교로 편지가 왔다. 설레임과 기대감을 속으로 가라 앉히고 개봉을 자제했다. 집에 돌아와 펼쳐보니 만감을 담은 사연으로 가득차 있었다. 나도 만지장서(滿紙長書)격으로 답신했다. 그후 편지 왕래가 중요 일과처럼 이어졌다.
고등학교를 졸업후 당시 시골학교 수준으로는 제법 상당하다는 서울 장안의 한 대학에 특차로 합격했다. 무려 38:1의 경쟁이었다. 등록후 다니는 시늉은 했지만 경제적 여건도 여의치 않았고 딴은 학교도 당초 기대치에 썩 미치진 않았다. 소위 일류대학이 아니면 내키지 않았던 것 같다.
최고를 지향하여 최선을 다해 보자고 뜻을 모으고 고심하던 차에 마음에 드는 대학을 목표로 재수를 하기로 작정했다. 그때까지 편지 왕래를 중단하기로 제의했다. 뿐만 아니라 공부에 지장이 있을 법한 것은 모두 자제 하기로 했다.
내 나름으로는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지 못했다. 새로운 가능성을 입증해 보이고 싶었는데 면목이 없었다. 의욕만 앞세워 성취를 기대했으나 우물안의 개구리격이 되었던 것 같아서, 자성(自省)하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되돌아 보게 되었다. 그후 김선생은 동생을 통해 내 주소를 알아내고 격려의 뜻을 담은 편지를 수차 보내와서 답장을 쓰기도 하였으나, 나는 의기소침해 있었던 터라 중간에 몇번씩 단절이 되었다.
옛날 부여성 성문지기의 딸은 연모의 정을 나뭇잎에 새겨 바람결에 띄웠더니, 사모하는 연인에게 기적같이 전달 되었다는 이야기를 곁들여 주기도 하여 몇 번 씩이나 애틋한 생각에 잠기곤 했다.
그럭저럭 적잖은 나이가 되었다. 공연히 무심한 세월을 탓하기도 하면서 군에 입대했다. 대구에서 신병훈련을 마치고 대전 병참학교로 가게 되었다. 동료들은 특과라고 부러워들 했는데 나로선 별로 수긍이 가진 않았다. 다만 신병훈련에 비해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좋았다.
다시 김선생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김선생이 살고 있는 대구에서 훈련을 받게 된 것이 좋았다.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 나마 격려해 주는 듯 하여 큰힘이 되었다. 훈련을 마치고 기차로 ‘대구역’을 벗어날 때 몇 번 씩이나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는 투의 사연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곧이어 답신이 왔다. 장기간의 무소식에 대하여 원망하는 투의 내용이 강조되고 있었으나, 전편(全篇)의 행간(行間)엔 반가움의 뜻을 담은 그리움의 정조(情調)가 풍기고 있었다. 특히 ‘대구역’을 몇차례 배회(徘徊)하다 돌아왔다는 사연도 덧붙여 가슴이 찡하기도 했다.
병영(兵營)에서도 성탄절은 축제 분위기로 설레이게 된다. 라디오에서 캐롤송이 울려 퍼지면 병사들은 무언가 좋은 소식이 올 것 같은 기대감을 가져보기 예사다.
때마침 나에게 큼직한 소포가 왔다고 특종 뉴스를 보도하듯 전달해 주었다. 내무반은 경사라도 난 듯 박수를 치며 축제 분위기를 띄우고 있었다. 강요에 가까운 공개 개봉 제의를 마다할 상황이 못되어 흔쾌히 응하기로 했다. 기대감과 불안감이 겹치는 가운데 소포를 끌렀다. 땅콩, 박하사탕, 깨엿, 사과등이 들어 있었다.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자취 생활을 하던 고교시절 김선생이 이따금씩 자취방에다 살며시 넣어주곤 하던 품목이었다. 그때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편지 내용의 공개는 극구(極口) 꺼리고 싶었으나, 열화같은 호기심을 가라 앉히기 어려웠다. 드라마틱한 사연이라도 공개되어 썰렁한 병영의 분위기를 재미있게 바꾸어 주었으면 하는 기대 심리가 잠재되어 있었던 것 같다.
정갈한 글씨, 세련된 문장, 낭만적인 분위기 설정에 동화되어 일제히 감명을 받고 있는 듯 했다. 나는 졸지에 스타로 부상한 듯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 내무반의 건조한 분위기는 한때 나마 즐겁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반전(反轉)되어 정겨운 웃음꽃을 피우기도 했다.
애환과 곡절이 많았던 군대 생활도 어느덧 30개월이 지나고 제대를 6개월 앞두게 되었다. 「비바람이 불어도 설한풍이 몰아쳐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라고 자조(自嘲)섞인 푸념을 하며, 제대를 갈망해 온 30개월이었다.
모두들 제대만 하면 당장 비상천(飛上天)이라도 할 것처럼 포부를 털어 놓고 있는 것은, 통제와 타율의 영역을 하루속히 벗어나고 싶은 심정으로 이해 해야 할 것 같다. 세월이 빠르다고 하는데 군복무 기간은 기나긴 터널을 관통하는 여정인 것만 같았다.
울적한 기분이 들어 어떤 새로운 소식이라도 있었으면 하고 기다려지는 차제에 때마침 김선생에게서 편지가 왔다. 봉투가 여느때 보다 두툼하기도 하여 특별한 사연이 담겨있을 것 같은 기대감으로 부풀어 있었다.
마치 보물을 찾듯 자자구구 음미하며 읽어내려 갔다.
글씨는 한글자 한글자 조각을 한 듯 아로새겨져 있었고, 문장은 적절히 은유법을 구사하는 등 주옥(珠玉) 같았으나, 내용은 최후의 통첩같은 무게로 전달 되었다. 어머니와 오빠가 진작부터 결혼을 재촉해 왔다는 것이다. 금년 봄을 넘기면 큰일이라도 날 듯이 몰아세워 몸둘 바를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전후 사정이나 맥락으로 보아 어머니와 오빠선에서는 이미 유력한 대상을 물색해 놓은 듯 했고, 당사자인 그녀로서는 아직 유보적인 입장인 듯 감지(感知) 되었다. 이른바 결혼에 대한 나의 관점을 타진해보고 최종 결정을 내리려 하는 입장에 놓여 있는 듯 했다. 이를테면 우리는 서로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는 셈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결혼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여건을 조금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기약도 없이 마냥 기다리라고 제의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당초부터 결혼을 염두에 두고 연심(戀心)을 지녀온 것은 아니었지만, 단절감에서 오는 허탈과 충격은 적지 않았다. 이로 인해 한동안 불면의 밤을 지새우기도 하면서 애써 수습한 연후 정중한 어조로 답장을 썼다.
「서로의 처지와 갈길이 다른 것 같으니 우리의 인연도 이제 여기서 막을 내려야 할 것 같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게 마련이겠지만, 비록 시야로부터 멀어져 있을 수 밖에 없드라도 마음으로 부터는 멀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앞으로 영영 상면할 기회가 안올 수도 있겠지만 내 기억속에서는 언제나 지고지순(至高至純)한 모습으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내용으로 쓴 것 같다.
얼마후 그녀로부터 다시 편지가 왔다. 구구절절 아쉬움으로 연면한 사연이 아로새겨져 있어 숙연함이 느껴졌다.
「미완성으로 끝날 수 밖에 없는 인연을 그지없이 애석하게 생각하며 그 동안 그리움을 주고받은 사연은 소중한 추억으로 오래오래 간직할 것」이라는 류의 애틋한 뜻을 담은 사연이었다. 그리고 휴가 올 기회가 있다면 잠깐이라도 한번 만나 봤으면 좋겠다는 내용도 덧붙였다.
제대를 3개월정도 앞두고 마지막 휴가를 얻게 되었다. 김선생을 한번 만나볼 생각으로 대구로 향했다. 사전에 약속을 하지 않았으나 다행이 학교로 전화 연결이 되었다. 놀라움과 반가움이 교차되고 있는 듯한 목소리였다. 예고 없이 불쑥 나타나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신경이 쓰이기도 했다. 아무튼 그녀와의 재회를 목전에 앞두게 되어, 무슨 말부터 해야 될지를 생각하면서 기대감과 긴장감이 엇갈리고 있었다. 그 동안 세월이 흘러 많이 변했을 거라고 생각 하면서도 하얀 투피스 차림에 긴머리를 한 소녀의 이미지를 그리고 있었다. 내 기억속에 각인(刻印)되어 있는 잔영(殘影)의 영향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셈이었다.
상상을 하고 있는 동안 창 너머로 그녀가 보이고 있었다. 오랜만에 감격스러운 재회가 이루어지게 될 참이었다. 설레임과 긴장감을 표시 안나게 진정시켜야 했다.
그런데... 상상으로 그려본 모습과 실상의 차이는 크게 마련일까? 청순한 소녀의 이미지는 찾아볼 수 없고 성숙한 여인의 모습으로 변모되어 있었다. 당연한 귀결이라 생각하면서도 세월이 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동공(瞳孔)이 크게 열린다고 하던가! 김선생은 나를 커다란 눈으로 맞이해 주었다. 우리는 한동안 표정만 주고 받을 뿐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말이 별로 필요치 않았다. 화려한 수사(修辭) 보다 더 절실한 메시지를 침묵과 오감(五感)을 통해 교감할 수 있었다. 절절한 상봉 분위기가 정돈되고 대화가 이어지기 시작하였다. 지난날의 일들을 되돌아 보면서 절실하게 감회를 나누었다.
나는 신체접촉을 금기(禁忌)로 여겨왔던 터이지만 정신과 신체, 몸과 마음 어느 한쪽이 지나치게 강조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며, 특히 따뜻한 마음이 녹아있는 자연스러운 신체접촉이라면 어느정도 용인되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도 해 보게 되었다.
결혼 문제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가 자못 궁금하여 화제를 바꾸도록 유도해 보았다. 표정이 금세 심각하게 반전되어 가고 있었다. 망설이는 듯 입을 열었다. 얼마전에 약혼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곧 결혼을 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예상했던 대로라고 생각하며 애써 태연한 채 하였지만, 내심으로는 아직까지 유보상태로 있어 주기를 바라는 심리가 내재되어 있었던 것 같다. 일순간 상실감이 엄습해 왔다. 마치 패잔병(敗殘兵) 같은 처지로 전락(轉落)한 듯 난감했다. 곤혹스러움을 벗어나기 위해 침을 삼키며 애써 마음을 가다듬어야만 했다.
이를테면 「김선생을 너무 미화하는 것은 착각일 수 있다. 더 이상 미련에 매달려 연연하지 말자. 그녀 못지 않은 이상적인 반려자가 어딘가에 또 있을 것이다」라는 쪽으로 마음을 바꾸어야 될 것 같았다. 어쩌면 이솝우화의 한 대목 중, 포도나무에 높이 달린 포도송이를 쳐다보면서 아쉬워하고 있던 여우가, ‘저 포도는 시다’라는 구실을 끌어내어 포기하고 있는 모습과 비슷할 수도 있겠지만...
창밖에는 어둠이 드리우고 있었다. 그날이 마침 수요일이어서 김선생은 수요일 예배 반주를 맡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붙잡아 놓을 수 없었다. 못다한 얘기를 나누면서 교회까지 꽤 먼 거리를 걸어서 가기로 했다.
그때 무슨 얘기를 나눈지는 잘 기억나지 않으나 허공을 디디며 걸었던 것 같다. 더 이상 같이 걸을 길이 없어서 거기서부터 각자의 행로를 택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손을 흔들어 작별을 고하고 서로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연신 뒤를 돌아보기도 했다. 그때 마침 어디선지 애조를 띤 유행가 가락이 들려왔다. 「못견디게 괴로워도 울지 못하고 가는 님을 웃음으로 보내는 마음~ 내가슴의 이상처를 그누가 달래주리 울어라 열풍아 밤이 새도록...」
인간에게는 다행이 망각이라는 장치가 있어, 정신적으로 안정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애련(哀戀)을 훌훌 털고 평정심(平靜心)을 회복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그 동안 수수로웠던 심회(心懷)를 가다듬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미련에 무엇을 더 보태려 함인지 나도 모를 일이다. 내 마음의 화폭에 김선생의 이미지를 너무 인상적으로 그려 놓았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싶다.
결혼을 앞두게 되었다. 그 동안 김선생과 주고 받은 편지 100여통과 몇장의 사진을 재산 목록처럼 간직해 오던 중, 더 이상 미련에 연연해선 안될 것 같아서 한줌의 재와 연기로 날려 보냈지만, 연심(戀心)에 사로 잡혔던 그리움은 세월이가도 지워지지 않는 무늬로 남게 되는 것 같다.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KBS TV프로를 가끔 시청 하다가 김선생을 한번 만나보는 가상 시나리오를 엮어 보기도 했다. 그러나 기억속에 각인(刻印)된 그때의 모습은 찾아볼 수 조차 없을지도 모를 것이다.
피천득 선생은 그의 수필 ‘인연’에서 「그리워 하는데도 한번 만나고는 못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라고 후회 했듯이, 김선생과 세번째 만나게 되면 나 역시 후회하게 될 것 같아, 차라리 뇌리속에 아련한 모습으로 고이 간직해 두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청년은 희망에 살고, 중년은 현실에 살며, 노년은 추억에 산다”라고들 한다. 아무런 기약도 없이 헤어져서 지금은 까마득하게 멀어져버린 그녀이지만, 이 땅위 어디인가에 함께 숨쉬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좋다.
조락(凋落)을 제촉하듯 오늘은 찬비 내리고 스산한 바람이 분다. 바람결에 흩날리는 낙엽을 원망해 보기도 하고, 낙조(落照)를 바라보며 눈물겨워 하던 옛어른들의 모습이 남의 얘기가 아닌 듯 싶다. 그것은 “인생을 다시한번 시작해 볼 수 있다면..”하는 탄식에 가까운 비원(悲願)과 절규일 것으로 생각된다.
「멀지않아 인생 후반부에 이르러 무의미하게 살았던 지난날을 후회로 지새우지 않기 위하여, 오늘 하루를 뜻 있게 살아야 한다」라고 일러 주시던 고교시절의 선생님 말씀이 오늘 따라 절절하게 메아리 치는 듯 하다. 기억속에 묻어둔 추억의 여정을 끝내면서 불현듯 떠오르는 그리움을 신경림의 ‘가을비’로 달래 보고자 한다.
「젖은 나뭇잎이 날아와
유리창에 달라붙은 간이역에는
차시간이 되어도 손님이 없다.
플라타너스로 가려진 낡은 목조찻집
차 나르는 소녀의 머리끝에서는
풀냄새가 나겠지.
오늘 집에 가면 헌 난로에 불을 당겨
따끈한 차한잔을 마셔야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