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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일기31권, 연산 4년 9월 6일 신축 3번째기사 1498년 명 홍치(弘治) 11년
김종직의 문집을 중국에 가지고 간 성절사 조위 등을 국문하는 일에 대해 의논하다
성절사(聖節使) 조위(曺偉), 서장관(書狀官) 정승조(鄭承祖)가 의주(義州)에서 잡혀오니, 명하여 빈청(賓廳)에서 국문하게 하고, 이어서 전교하기를,
"조위가 중국에 갈 적에 김종직의 문집을 싸가지고 갔다 하니 국문하라."
하였다. 조위는 말하기를,
"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과 화도연명시(和陶淵明詩)는 모두가 기롱과 풍자를 가탁한 것이었으나, 실로 그것이 국조(國朝)의 일에 범촉(犯觸)되는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만약 그것이 부도(不道)한 문자인 줄을 알았다면 어찌 감히 그 글을 써서 성종(成宗)께 올렸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종직의 글은 권오복·권경유도 모두가 그것이 기의(譏議)의 작품임을 알면서도 함께 찬성하였다 하는데, 조위만이 어찌 모를 리가 있겠느냐."
하였다. 윤필상 등이 아뢰기를,
"상의 하교가 지당하옵니다. 조위는 큰 선비인데, 어찌 그 글이 부도(不道)한 것인지를 몰랐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하였다. 필상 등이 아뢰기를,
"마땅히 형신(刑訊)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정승조(鄭承祖)도 또한 이수공(李守恭)·강경서(姜景敍)·정희량(鄭希良)과 죄(罪)가 같사오니, 당연히 곤장 1백 대를 때려서 천리 밖으로 내쳐야 하옵니다. 그러나 지금 조회(朝會)를 정지하고 있는 마당에 궐정(闕庭)에서 형장(刑杖)을 쓴다는 것은 불가하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조위 등을 의금부에 하옥시키고, 광릉(光陵)에 다녀온 뒤를 기다려서 형장 심문하도록 하라."
하였다.
○聖節使曺偉、書狀官鄭承祖, 自義州拿來, 命鞫於賓廳, 仍傳曰: "偉赴京時, 齎金宗直集而去, 鞫之。" 偉云: "宗直 《弔義帝文》及和陶淵明詩, 皆假托譏諷, 實不知其爲犯觸國朝事也。 若知其爲不道之文, 則何敢書其文, 以獻成宗乎?" 傳曰: "宗直之文, 權五福、權景𥙿皆知其譏議, 而作共贊之, 偉何獨不知乎?" 尹弼商等啓: "上敎允當。 偉大儒, 何不知其文爲不道耶?" 傳曰: "奈何?" 弼商啓: "當刑訊矣。 鄭承祖亦與李守恭、姜景叙、鄭希良同科, 當決杖一百、流三千里, 然今當停朝, 不可於闕庭用刑杖。" 傳曰: "下偉等義禁府, 待光陵行幸後刑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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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五福ㆍ權景裕ㆍ李穆ㆍ許磐
성호전집 제8권 / 해동악부(海東樂府)
바위 아래 잠자다〔巖下宿〕
매계(梅溪) 조위(曺偉)는 자가 태허(太虛)이고 벼슬이 호조 참판까지 이르렀으며, 점필재(佔畢齋)의 처남이다. 성종(成宗)이 공에게 점필재의 문집을 편찬하라고 명하였는데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첫머리에 수록하였다. 무오년(1498, 연산군4)에 유자광(柳子光)이 연산군(燕山君)에게 참소하기를 “조위가 〈조의제문〉을 제일 앞에 실은 것은 자못 의도가 있는 짓입니다.” 하니, 임금이 크게 진노하였다. 당시 공은 하정사(賀正使)로 명나라에 조회 갔다가 아직 돌아오기 전이었는데, 임금은 강을 건너오면 즉시 참수하라고 명하였다. 공의 일행은 요동(遼東)에 도착해서야 이 소식을 들었다. 공의 서제(庶弟) 조신(曺伸)이 요동에 점을 잘 보는 추원결(鄒源潔)이란 자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으므로 가서 길흉을 물었다. 그 사람은 점사(占辭) 한 구절만 써 주었다.
천 층의 파도 속에서 몸을 뒤쳐 빠져나오나 / 千層浪裏翻身出
모름지기 바위 아래에서 세 밤을 자게 되리라 / 也須巖下宿三宵
조신이 돌아와 공에게 알리니, 공이 말하기를 “앞 구절은 화를 면한다는 말인 듯싶은데 뒤 구절은 해석하기 어렵네.” 하며 함께 근심하였다. 행차가 압록강 가에 도착하자 관인이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고는 일행이 모두 놀라서 실색하였으나, 강을 건넌 뒤에 정승 이극균(李克均)이 구원해 주어 단지 잡아와 추문하기만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일행이 기뻐하며 다행으로 여겼다. 그제야 점쟁이의 시의 뜻을 깨달았지만 아무튼 뒤 구절의 의미는 풀지 못하였다.
결국 죽지 않을 수 있었지만 곤장을 맞고 순천(順天)에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병으로 죽은 뒤 김산(金山) 고향으로 돌아와 묻혔다. 갑자년(1504)에 임금이 이전의 죄를 추록(追錄)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하고 시신을 끌어다 묘소 앞의 바위 아래에 3일 동안 놔두게 하고 시신을 거두어 장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니, 비로소 점사(占辭)의 두 구절이 모두 들어맞았다는 것을 기억하게 되었다.
긴 밤 닭소리조차 없어 하늘이 망망한데 / 大夜無晨天茫茫
원혼이 슬피 곡하니 단풍 숲 어둔 곳이라 / 怨魂哀哭楓林黑
듣건대 사자가 시신을 욕보였다고 하니 / 傳聞使者僇死屍
가련쿠나, 유골이 허옇게 길거리에 놓였네 / 可憐遺骨當道白
사람 궁리론 몰라도 귀신은 먼저 알아서 / 人謀不覺鬼先知
훗날 바위 아래서 잠잔다고 말을 했었지 / 說道他時巖下宿
압록강 놀란 물결에는 묻히지 않았는데 / 鴨水驚波埋不得
구천에 남산의 석곽 견고하지 못했네 / 九泉未錮南山石
한줌 흙이 된 황량한 언덕의 흙무덤을 / 一杯荒原土饅頭
공공연히 파내어 관머리를 찍어 내었네 / 公然發出前和斲
어느 핸가 목동이 꿈에 들어왔는데 / 何年牧兒入人夢
백대 뒤의 조의제문 참으로 큰 실수였지 / 百代追弔眞一錯
남긴 글이 갑자기 불길에 던져졌으니 / 遺篇倏變作火焰
한꺼번에 곤산의 옥까지 다 타버렸네 / 一道燒盡崑山玉
춘풍에 꽃 필 때나 가을 잎 떨어질 때 / 春風花開秋葉落
먹구름 가랑비 뿌릴 때 한스러움 끝이 없네 / 雲冥雨霏恨何極
명철하여 몸 보호함 성인이 경계한 바인데 / 明哲保身聖所戒
아아, 그대 철없는 탁영객이여 / 嗟汝小兒濯纓客
[주-D001] 바위 아래 잠자다 : 이 내용은 김정국(金正國)의 《사재집(思齋集)》 권4 〈척언(摭言)〉, 정희량(鄭希良)의 《허암유집(虛庵遺集)》 속집(續集) 권3 〈척록(摭錄)〉 등에 실려 있다.[주-D002] 조위(曺偉) : 1454~1503.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태허(太虛), 호는 매계(梅溪),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일찍부터 시재가 뛰어났으며 1474년(성종5) 문과에 급제한 뒤 사가독서에 뽑혀 지평, 승지,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초기 사림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김종직(金宗直)의 문집을 편찬했다는 이유로 무오사화 때 유배되어 죽었다.[주-D003] 단풍 숲 : 두보(杜甫)의 시 〈이백을 꿈에 만나다〔夢李白〕〉에 “이백의 혼이 풍림의 푸른 숲에서 와서 변방의 어두운 곳으로 돌아왔네, 그대는 지금 죄망에 걸렸는데 어떻게 날개가 있어 날아왔나.〔魂來楓林靑 魂返關塞黑 君今在羅網 何以有羽翼〕”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는 조위의 억울한 혼을 두고 말한 것이다.[주-D004] 압록강 …… 않았는데 : 조위가 사신에서 돌아올 때 압록강에서 죽을 뻔했지만 살아남았던 일을 말한다.[주-D005] 구천에 …… 못했네 : 《한서(漢書)》 권50 〈장석지전(張釋之傳)〉에 이르기를 “문제(文帝)가 패릉(霸陵)에 이르러서는 ‘아아, 북산(北山)의 돌을 가지고 곽(槨)을 만들고 모시 솜을 잘라서 그 사이에 채워 넣으며, 또다시 옻칠을 한다. 그러니 어찌 무덤을 파낼 수 있겠는가.’ 하자, 장석지가 아뢰기를 ‘가령 그 속에 갖고 싶은 물건이 들어 있으면 비록 남산처럼 굳게 해도 오히려 틈이 있을 것이며, 그 속에 갖고 싶은 물건이 없으면 비록 석곽(石槨)이 없더라도 또 어찌 근심하겠습니까.’ 하였다.”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조위가 묻혔던 무덤의 관이 파헤쳐졌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주-D006] 어느 …… 들어왔는데 : 목동은 진한(秦漢) 교체기의 초 의제(楚義帝)를 말한다. 항우(項羽)가 기병한 후 범증(范增)의 계책을 따라 민심을 회유하기 위해 초 회왕(楚懷王)의 손자 심(心)을 찾았다. 그는 민간에서 남의 양을 치는 목동이 되어 있었는데, 백성들의 여망을 따라 그를 세우고 초 회왕이라 불렀다. 후에 항우에 의해 의제로 추존되고 시해되었다. 《史記 卷7 項羽本紀》 목동이 남의 꿈에 들어왔다는 것은 의제가 김종직의 꿈에 나타난 것을 말한다.[주-D007] 백대(百代) …… 실수였지 : 김종직이 의제의 꿈을 꾸고 깨어나 의제를 추조(追弔)하고 항우를 비난하는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었는데, 사후에 이 글이 사초(史草)에 실리자 글 중 의제는 단종(端宗)을, 항우는 세조(世祖)를 비유한 것이라는 비판이 일어나 무오사화의 불씨가 되었다. 성호는 김종직이 〈조의제문〉을 지은 것 자체가 잘못된 일이었다고 본 것이다. 《佔畢齋集戊午事蹟 事蹟》[주-D008] 한꺼번에 …… 타버렸네 : 《서경》 〈윤정(胤征)〉에 “불이 곤륜산 등성이를 태우면, 옥과 돌이 모두 불탄다.〔火炎崑岡 玉石俱焚〕”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세상이 어지러워져 현우 선악(賢愚善惡)이 똑같이 해를 입게 됨을 비유한 말이다.[주-D009] 탁영객(濯纓客) :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을 말한다.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이며, 시호는 문민(文敏)이다. 김종직의 문인이자 급진적인 사림파로 훈구파의 부패를 극력 공격하였다. 단종의 모후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을 복위하자고 청하고 〈조의제문〉을 사초(史草)에 실었다는 이유로 무오사화 때 능지처사를 당하였다. 성호는 김일손이 조심성 없이 이런 빌미를 주어 당시 사림이 화를 입게 되었다는 시각으로 본 듯하다.[주-D010] 嗟汝小兒濯纓客 : 대본에는 ‘嗟汝小兒’ 다음에 ‘三字缺’이라고 되어 있으나, 필사본에 의거하여 ‘濯纓客’을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성애 (역)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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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필재집(佔畢齋集) 김종직(金宗直)생년1431년(세종 13)몰년1492년(성종 23)자계온(季昷), 효관(孝盥)호점필재(佔畢齋)본관선산(善山)시호문충(文忠)
佔畢齋集戊午事蹟 / 事蹟 / 戊午史禍事蹟
弘治十一年戊午 燕山四年 七月。史禍起。柳子光啓燕山。論以大逆。卽令剖棺。家被籍沒。貞夫人文氏。定屬雲峯縣。夫人卽斷髮服喪。其在謫中。常歎曰。家翁平生志節。天日照臨。死得謬禍。是亦關於世運。但當順受而已。更無怨尤之辭。在謫九年。節操愈勵。一不啓齒。人皆敬服。 子嵩年。時年十三歲。陜川郡安置。以年未滿。免刑禍。是月十七日。傳旨。金宗直。草茅賤士。世祖朝。登第。成宗朝。擢置經筵。久在侍從之地。以至刑曹判書。寵恩傾朝。及其病退。成宗猶使所在官。特賜米穀。以終其年。今其弟子金馹孫所修史草內。以不道之言。誣錄先王朝事。又載其師宗直
吊義帝文。其辭曰。
丁丑十月日。余自密城道京山。宿踏溪驛。夢有神人。被七章之服。頎然而來。自言楚懷王孫心。爲西楚伯王項籍所弑。沉之郴江。因忽不見。余覺之。愕然曰。懷王。南楚之人也。余則東夷之人也。地之相去。不翅萬有餘里。世之先後。亦千有餘載。來感于夢寐。玆何祥也。且考之史。無投江之語。豈羽使人密擊。而投其尸于水歟。是未可知也。遂爲文以吊之。惟天賦物則以予人兮。孰不知其遵四大與五常。匪華豊而夷嗇兮。曷古有而今亡。故吾夷人又後千祀兮。恭吊楚之懷王。昔祖龍之弄牙角兮。四海之波殷爲衁。雖鱣鮪鰍鯢曷自保兮。思網漏以營營。時六國之遺祚兮。沉淪播越僅媲夫編氓。梁也南國之將種兮。踵魚狐而起事。求得王而從民望兮。存熊繹於不祀。握乾符而面陽兮。天下固無尊於芊氏。遣長者以入關兮。亦有足覩其仁義。羊狠狼貪擅夷冠軍兮。胡不收以膏齊斧。嗚呼。勢有大不然者。吾於王而益惧。爲醢醋於反噬兮。果天運之蹠盭。郴之山磝以觸天兮。景晻曖而向晏。郴之水流以日夜兮。波淫泆而不返。天長地久恨其曷旣兮。魂至今猶飄蕩。余之心貫于金石兮。王忽臨乎夢想。循紫陽之老筆兮。思螴蜳以欽欽。擧雲罍以酹地兮。冀英靈之來歆云。
其曰祖龍。秦始皇也。宗直。以始皇比世廟。其曰求得王以從民望兮者。王。楚懷王孫心。初。項梁欲誅秦。求孫心以爲義帝。宗直。以義帝比魯山。其曰羊狠狼貪擅夷冠軍兮者。宗直。羊狠狼貪。指世廟。擅夷冠軍。指世廟誅金宗瑞。其曰胡不收以膏齊斧者。宗直。指魯山胡不收世廟云云。其曰爲醢醋而反噬兮者。宗直。謂魯山不收 世廟。反爲世廟醢醋云云。其曰循紫陽之老筆兮。思螴蜳以欽欽者。宗直。以朱子自處。其心作此賦以擬綱目之筆。馹孫贊其文曰。
以寓忠憤。
念我世廟大王。當國家危疑之際。奸臣謀亂。禍機垂發。誅除逆徒。宗社危而復安。子孫相繼。以至于今。功業巍巍。德冠百王。不意宗直與其門徒。譏議聖德。至使馹孫誣書於史。豈一朝一夕之故。陰蓄不臣之心。而歷事三朝。予今思之。不覺慘懼。其議刑名以啓。七月二十七日。頒赦。敎曰。恭惟我世祖惠莊大王。以神武之姿。當國家危疑。群奸盤據之際。沉幾睿斷。戡定禍亂。天命人心。自有攸屬。聖德神功。卓冠百王。增光祖宗艱大之業。貽厥子孫燕翼之謨。繼繼承承。式至今休。不意奸臣金宗直。包藏禍心。陰結黨類。欲售兇謀。爲日久矣。假托項籍弑義帝之事。形諸文字。詆毁先王。滔天之惡。罪在不赦。論以大逆。剖棺斬屍。其徒金馹孫,權五福,權景𥙿。朋奸黨惡。同聲相濟。稱美其文。以爲忠憤所激。書諸史草。欲垂不朽。其罪與宗直同科。並令凌遅處斬。馹孫又與李穆,許磐,姜謙等。誣飾先王所無之事。傳相告語。筆之於史。李穆,許磐。並皆處靳。姜謙。决杖一百。籍沒家產。極邊爲孥。表沿沫,洪瀚,鄭汝昌,茂豊副正揔等。罪犯亂言。姜景敍,李守恭,鄭希良,鄭承祖等。知亂言而不告。並决杖一百。流三千里。李宗準,崔溥,李黿,李胄,金宏弼,朴漢柱,任煕載,康伯珍,李繼孟,姜渾。俱以宗直門徒。結爲朋黨。互相稱譽。或譏議國政。謗訕時事。煕載。决杖一百。李胄。决杖一百。極邊附處。宗準,崔溥,李黿,宏弼,漢柱,伯珍,繼孟,姜渾等。並决杖八十。遠方附處。而流人等。並定烽燧庭爐干之役。修史官等。見馹孫等史草。而不卽啓。魚世謙,李克墩,柳洵,尹孝孫等。罷職。洪貴達,趙益貞,許琮, 許琮。甲寅已卒。必是許琛。 安琛等。左遷。隨其罪之輕重。俱已處决。謹將事由。告于宗廟社稷。顧余寡昧。剪除姦黨。戰惧之念旣深。而喜幸之心益切。肆於今七月二十七日昧爽以前。強竊盜及關係綱常外已决正未决正。咸宥除之。敢以宥旨前事。相告語者。以其罪罪之。於戲。人臣無將。旣伏不道之罪。雷雨作解。宜霈惟新之恩。故玆敎示。想宜知悉。云云。
弘治十七年甲子 燕山十年 九月。縉紳禍再起。加罪金宏弼,朴漢柱諸人。
正德二年丁卯。中宗大王二年 追雪被罪諸賢之寃。藝文館奉敎金欽祖,鄭忠梁,待敎李希曾,金瑛,檢閱權橃,李泳,鄭熊,尹仁鏡,尹止衡等。上䟽。大槩。戊午修史之官。徒以私嫌。不顧公議。陰囑大臣。使之挑怒。子光從而唱之。同議密啓。終致大禍。是則陰欲掩過。而卒不得掩。更使暴揚於當日。累及於後世。一以毀萬世史家之法。一以啓人主喜殺之心。罪當不原。而賞反及焉。臣等。不勝痛悒。比來。皆以戊午之禍爲戒。士氣摧絶。臣等。非以馹孫等爲惜。深恐史家之法。從此盡廢。而萬世之公論泯滅云云。傳曰。金宗直,金馹孫等辭連被罪者。果有曖昧。復其爵。其餘。並皆追 贈。其時推官尹弼商,盧思愼,柳子光等賞賜之物及戊午史局事泄人。令日記廳考啓。是年。改葬于密陽大洞舊宅後山庚坐甲向之原。 上特命廩其妻。搜訪其子孫錄用。子嵩年。連除集慶殿參奉,東部參奉。嵩年遭禍之餘。不喜名利。以母夫人命謝恩。未幾。棄官居鄕。事母盡其孝。鄕人及士林。至今稱道。參奉娶主簿孫筍茂之女。府尹永裕。其祖也。有子三人。曰綸。有文行。早世。曰維。娶參奉崔弼孫女。曰紐。娶持平李伸女。先生文集抄本廿餘卷。蕩爲煙燼。尙有亂稿。閣在樑上。家人以爲不祥之物。又擧而投之火。傍有人就烈焰中。鉤取一二編。纔免全燬。今存者。十未二三。甥康仲珍。篋而藏之。戊午後二十二年庚辰。謀諸邑宰。俾壽于梓。南衮作序文。禮曹以先生所居之鄕。講道之處。置立祠宇。春秋仲月。官爲致祭事。報議政府。政府啓請。依 允。金山景濂書院,密陽禮林書院,善山紫陽書院,咸陽栢淵書院,開寧德林書院成。
점필재집 문집 부록 / [사적(事蹟)] / 무오사화 사적(戊午史禍事蹟)
홍치 11년 무오(1498) 연산군(燕山君) 4년.
7월에 사화가 일어났다. 유자광(柳子光)이 연산군에게 아뢰어 대역(大逆)으로 논죄(論罪)함으로써 즉시 부관참시(剖棺斬屍)하게 하였고, 집은 적몰(籍沒)되어 정부인(貞夫人) 문씨(文氏)는 운봉현(雲峯縣)에 정속(定屬)되었다. 부인은 즉시 머리를 깎고 복상(服喪)하였다. 그는 적중(謫中)에 있으면서 항상 탄식하여 말하기를 “가옹(家翁)의 평생의 지절(志節)은 천일(天日)이 밝게 비추어 아는 바인데, 죽은 뒤에 잘못된 화를 입으니, 이 또한 세운(世運)에 관계된 것이고 보면 의당 순종하여 받을 뿐이다.” 하고, 더 이상 원망하는 말이 없었다. 9년 동안 적중에 있으면서 절조(節操)를 더욱 힘써 한 번도 이를 드러내어 웃은 적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경복(敬服)하였다.
아들 숭년(嵩年)은 이 때 나이 13세로 합천군(陜川郡)에 안치(安置)되었는데, 나이가 차지 못했다는 이유로 형화(刑禍)를 면하였다.
이 달 17일에 내린 전지(傳旨)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종직(金宗直)은 초야의 천사(賤士)로 세조조(世祖朝)에 등제(登第)하고 성종조(成宗朝)에는 경연(經筵)에 발탁되어 오랫동안 시종(侍從)의 지위에 있다가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이르러서는 총은(寵恩)이 조정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가 병으로 물러감에 미쳐서는 성종께서 오히려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특별히 미곡(米穀)을 내려서 그 여생을 잘 마치게 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지금 그의 제자인 김일손(金馹孫)이 수찬한 사초(史草) 안에서 부도(不道)한 말로 선왕조(先王朝)의 일을 속여 기록하고, 또 자기 스승인 종직의 조의제문(吊義帝文)을 기재하였다.
그 조의제문에 이르기를 ‘정축년 10월 일에 내가 밀성(密城)으로부터 경산(京山)을 경유하여 답계역(踏溪驛)에서 자는데, 꿈에 한 신인(神人)이 칠장복(七章服)을 입고 헌걸찬 모습으로 와서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초 회왕(楚懷王)의 손자 심(心)인데, 서초패왕(西楚霸王) 항적(項籍)에게 시해되어 침강(郴江)에 빠뜨려졌다.」 하고는, 언뜻 보이다가 이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꿈을 깨고 나서 깜짝 놀라 말하기를 「회왕은 남초(南楚) 사람이고, 나는 동이(東夷) 사람이니, 지역의 거리는 만여 리뿐만이 아니요 세대의 선후 또한 천여 년이나 되는데, 꿈자리에서 서로 만나게 되었으니, 이것이 그 얼마나 상서로운 일인가. 또 사서(史書)를 상고해 보면 강(江)에 던졌다는 말은 없는데, 혹시 항우(項羽)가 사람을 시켜 비밀히 격살(擊殺)하여 그 시체를 물에다 던져버렸던가. 이것을 알 수가 없다.」 하고, 마침내 글을 지어서 조문하기를,
하늘이 사물의 법칙을 부여해 사람에게 주었으니 / 惟天賦物則以予人兮
그 누가 사대와 오상을 준행할 줄을 모르리오 / 孰不知其遵四大與五常
중화엔 풍부하고 이적엔 인색한 게 아니거니 / 匪華豐而夷嗇兮
어찌 옛날에만 있었고 지금엔 없으랴 / 曷古有而今亡
그러므로 나는 동이 사람이요 또 천 년 뒤의 오늘에 / 故吾夷人又後千祀兮
삼가 초 나라의 회왕을 조문하노라 / 恭吊楚之懷王
옛날 진 시황이 포학을 자행하여 / 昔祖龍之弄牙角兮
사해의 물결이 검붉은 피바다를 이루니 / 四海之波殷爲衁
상어나 미꾸라지도 어찌 스스로 보전하랴 / 雖鱣鮪鰍鯢曷自保兮
그물을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다하였네 / 思網漏以營營
이 때 산동 육국의 후사가 된 사람들은 / 時六國之遺祚兮
침몰하고 방랑하는 고작 필부 편맹들뿐이었네 / 沈淪播越僅媲夫編氓
항량은 남쪽 초 나라 장수의 후예로서 / 梁也南國之將種兮
어호를 뒤따라 대사를 일으키어 / 踵魚狐而起事
임금을 찾아 얻어서 백성의 소망을 따르니 / 求得王而從民望兮
웅역에게 끊어진 제사를 다시 보존했도다 / 存熊繹於不祀
제왕의 상서를 쥐고 왕위에 오르니 / 握乾符而面陽兮
천하에 진실로 천씨보다 더 높은 이 없었고 / 天下固無尊於芊氏
장자를 보내어 관중을 들어가게 하였으니 / 遣長者以入關兮
또한 족히 인의로운 마음을 볼 수 있었네 / 亦有足覩其仁義
양과 이리처럼 탐포하여 멋대로 관군을 멸족시켰는데 / 羊狠狼貪擅夷冠軍兮
어찌 그를 잡아다가 처형하지 않았던가 / 胡不收以膏齊斧
아 형세가 대단히 어긋난 것이 있었으니 / 嗚呼勢有大不然者
나는 회왕을 위하여 더욱 두려웁도다 / 吾於王而益懼
끝내 배신한 자에게 시해를 당하였어라 / 爲醢醋於反噬兮
과연 천운이 크게 어긋났도다 / 果天運之蹠盭
침강 가의 산은 우뚝이 하늘에 치솟았는데 / 郴之山磝以觸天兮
햇빛은 침침하여 저물녘을 향하였고 / 景晻曖而向晏
침강의 물은 밤낮으로 흘러가는데 / 郴之水流以日夜兮
물결은 넘쳐 흘러 되돌아오지 않도다 / 波淫泆而不返
한스러워라 천지는 장구하여 언제 다하랴마는 / 天長地久恨其曷旣兮
그 넋은 지금까지도 떠돌아다니리라 / 魂至今猶飄蕩
나의 충심은 금석을 뚫을 만하기에 / 余之心貫于金石兮
왕께서 갑자기 몽상에 나타났도다 / 王忽臨乎夢想
자양의 노련한 필법을 따라 / 循紫陽之老筆兮
마음 설레며 공경히 사모하여 / 思螴蜳以欽欽
술잔 들어 땅에 부어서 제사지내니 / 擧雲罍以酹地兮
바라건대 영령은 내려와 흠향하소서 / 冀英靈之來歆
했다.’ 하였다.
그런데 조룡(祖龍)이란 진 시황(秦始皇)을 가리킨 말로서, 종직(宗直)이
진 시황을 세묘(世廟)에 비유한 것이고, ‘왕(王)을 찾아 얻어서 백성의 소망을 따랐다.’는 데의 왕은 바로 초 회왕(楚懷王)의 손자 심(心)을 가리키는데, 처음에 항량(項梁)이 진(秦) 나라를 멸망시키려고 손자 심을 찾아서 의제(義帝)로 삼았으므로, 종직이
의제를 노산(魯山)에게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종직이 ‘양과 이리처럼 탐포하여 제멋대로 관군(冠軍)을 멸족시켰다.’고 하였는데, ‘양과 이리처럼 탐포하다.’는 것은
세묘를 가리킨 말이고, ‘멋대로 관군을 멸족시켰다.’는 것은 곧
세묘가 김종서(金宗瑞) 죽인 것을 가리킨 말이다. 그 ‘어찌 그를 잡아다가 처형하지 않았던가.’라는 것은 종직이
‘노산이 어찌하여 세묘를 잡아 죽이지 않았던가.’의 뜻으로 말한 것이고, 그
‘배신한 자에게 시해되었다.’는 것은 종직이 ‘노산이 세묘를 죽이지 않음으로써 도리어 세묘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이른 것이다. 그리고 그
‘자양(紫陽)의 노련한 필법을 따라서 마음 설레며 공경히 사모한다.’는 것은 종직이 주자(朱子)로 자처하여 그의 마음에 이 부(賦)를 지어서 주자의 《강목(綱目)》에 비긴 것이었다.
그런데 김일손(金馹孫)이 그 글을 찬양하여 말하기를 ‘이것으로
충분(忠憤)을 부쳤다.’고 하였다.
생각건대, 우리 세조 대왕께서는 국가가 위의(危疑)한 즈음을 당하여, 간신(奸臣)이 난(亂)을 획책함으로써 화기(禍機)가 거의 일어날 무렵에 역도(逆徒)들을 죽여 제거함으로 인하여 종사(宗社)가 위태로웠다가 다시 편안해져서, 자손들이 서로 계승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니, 그 공업(功業)이 높고 높으며 그 덕(德)이 백왕(百王)에 으뜸가는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 종직이 자기 문도(門徒)와 더불어 성덕(聖德)을 비난하고, 심지어는 일손으로 하여금 그런 글을 사서(史書)에다 속여 기록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일조일석(一朝一夕)에 생긴 일이겠는가. 남몰래 불신(不臣)의 마음을 품고서 세 조정을 내리 섬겼으니, 내가 지금 생각하매 나도 모르게 참혹하고 두렵구나. 그 형명(刑名)을 의논하여 아뢰어라.”
그리하여 7월 27일에 반사(頒赦)하였다. 그 반사의 교지(敎旨)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세조 혜장 대왕(世祖惠莊大王)께서는 신무(神武)의 자용(姿容)으로 국가가 위의(危疑)스럽고 뭇 간신(奸臣)들이 굳게 자리잡고 있는 때를 당하여 침착한 살핌과 슬기로운 결단으로 화란(禍亂)을 평정함으로써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절로 붙일 곳이 있게 되었으니, 그 성신(聖神)한 공덕(功德)은 백왕(百王)에 으뜸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조종(祖宗)의 간대(艱大)한 사업에 광채를 더하고, 자손(子孫)들을 도와서 편안하게 하는 계책을 끼쳐줌으로 인하여 자손들이 서로 계승하여 오늘날의 태평 성대에 이르렀다.
그런데 뜻밖에 간신 김종직이 화심(禍心)을 품고 은밀히 당류(黨類)를 결합하여 흉악한 꾀를 부리려고 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래서 항적(項籍)이 의제(義帝)를 시해한 일에 가탁하여 이를 문자(文字)로 드러내서 선왕(先王)을 헐뜯었으니, 그 하늘에 닿는 죄악을 용서할 수 없으므로, 대역(大逆)으로 논죄하여 그를 부관참시(剖棺斬屍)하라.
그리고 그의 문도인 김일손(金馹孫), 권오복(權五福), 권경유(權景裕)는 서로 간악한 붕당(朋黨)을 지어 같은 무리끼리 서로 도와서 그의 글을 충분(忠憤)이 격앙된 바라고 칭미(稱美)하여 이를 사초(史草)에 써서 먼 후세에까지 전하려고 하였으니, 그 죄는 종직과 같은 등급이므로, 모두 능지처참(凌遲處斬)하도록 하라. 김일손은 또 이목(李穆), 허반(許磐), 강겸(姜謙) 등과 함께 선왕께서 하지 않은 일까지 속여 꾸며서 서로서로 말을 전하여 그것을 사초에 기록하였으니, 이목, 허반은 모두 처참(處斬)하고, 강겸은 결장일백(決杖一百)하고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하여 극변(極邊)으로 보내서 노복으로 삼도록 하라.
표연말(表沿末), 홍한(洪翰), 정여창(鄭汝昌), 무풍부정 총(茂豐副正摠) 등은 난언죄(亂言罪)를 범하였고, 강경서(姜景敍), 이수공(李守恭), 정희량(鄭希良), 정승조(鄭承祖) 등은 난언(亂言)하는 것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았으니, 모두 결장일백하여 유삼천리(流三千里)하도록 하라.
이종준(李宗準), 최보(崔溥), 이원(李黿), 이주(李胄), 김굉필(金宏弼), 박한주(朴漢柱), 임희재(任熙載), 강백진(康伯珍), 이계맹(李繼孟), 강혼(姜渾)은 모두 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결성하여 서로 칭찬하고, 혹은 국정(國政)을 비난하고 시사(時事)를 비방하기도 하였으니, 임희재는 결장일백하고, 이주는 결장일백하여 극변에 부처(附處)하라. 이종준, 최보, 이원, 김굉필, 박한주, 강백진, 이계맹, 강혼 등은 모두 결장팔십하여 원방(遠方)에 부처하되, 이 유배된 사람들에게는 모두 봉수정로간(烽燧庭爐干)의 역(役)을 정하도록 하라.
수사관(修史官) 등은 김일손 등의 사초를 보고도 즉시 아뢰지 않았으니, 어세겸(魚世謙), 이극돈(李克墩), 유순(柳洵), 윤효손(尹孝孫) 등은 파직하고, 홍귀달(洪貴達), 조익정(趙益貞), 허종(許琮) 허종은 갑인년에 이미 죽었으니, 필시 허침(許琛)일 것이다., 안침(安琛) 등은 좌천(左遷)하라. 그 죄의 경중(輕重)에 따라 모두 이미 처결하고, 삼가 사유(事由)를 가지고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에 고하였다.
생각건대 나는 과매(寡昧)한 사람으로 간당(奸黨)을 제거하고 나니, 두려운 생각이 이미 깊은 한편 기쁘고 다행스러운 마음이 더욱 간절하다. 그러므로 지금 7월 27일 어둑새벽 이전까지의 강도(强盜), 절도(竊盜) 및 강상죄(綱常罪)에 관계된 죄인 이외의 죄수들에 대해서는 형(刑)이 이미 결정되었거나 결정되지 않은 자를 막론하고 모두 용서하여 석방하라. 이들에 대하여 감히 유지(宥旨) 이전의 일로써 서로 고어(告語)하는 자에 대해서는 그 죄로써 벌줄 것이다.
아, 인신(人臣)은 군왕에 대하여 반역의 뜻도 품을 수 없는 것이기에 그들은 이미 부도(不道)의 죄를 받았으니, 천지(天地)가 풀리어 뇌우(雷雨)가 이르듯이 의당 새로운 은택을 널리 펴야 하겠으므로, 이와 같이 교시(敎示)하노니, 자세히 알아서 실천하도록 하라. ……”
홍치 17년 갑자(1504) 연산군 10년.
9월에 사화(士禍)가 재차 일어나서 김굉필, 박한주 등 여러 사람에게 가죄(加罪)하였다.
정덕(正德) 2년 정묘(1507) 중종 대왕(中宗大王) 2년.
죄를 입은 제현(諸賢)들의 원통함을 추후하여 신설(伸雪)하였다. 이 때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 김흠조(金欽祖)ㆍ정충량(鄭忠梁), 대교(待敎) 이희증(李希曾)ㆍ김영(金瑛), 검열(檢閱) 권벌(權橃)ㆍ이영(李泳)ㆍ정웅(鄭熊)ㆍ윤인경(尹仁鏡)ㆍ윤지형(尹止衡) 등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무오년에 수사관(修史官)들이 한갓 사적인 혐오 때문에 공의(公議)를 돌아보지 않고 은밀히 대신(大臣)에게 촉탁하여 그의 노염을 돋구고, 유자광(柳子光)이 따라서 이를 창화하여 함께 의논해서 밀계(密啓)함으로써 끝내 대화(大禍)를 불러온 것이니, 이는 곧 은밀히 과실을 가리려다가 끝내는 가리지 못하고 도리어 과실이 당일에 폭양(暴揚)되어 만세 후까지 누가 미치게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만세의 사가(史家)의 법칙을 훼손시키고 한편으로는 임금의 사람 죽이기 좋아하는 마음을 열어놓았기에, 그 죄가 의당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인데 상(賞)이 도리어 미쳤으니, 신들은 몹시 분개함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요즘에는 모두 무오년의 화(禍)를 경계하여 사기(士氣)가 매우 꺾이었습니다. 신들은 김일손 등을 애석하게 여겨서가 아니라, 사가의 법칙이 이로부터 모조리 폐해짐으로써 만세의 공론(公論)이 없어져버릴까 매우 염려하는 바입니다. ……”
하였다. 그러자 전교하기를,
“김종직, 김일손 등 사련(辭連)으로 죄를 입은 사람들은 과연 애매한 점이 있으니, 그들을 복관(復官)시키고, 그 나머지는 모두 추증(追贈)하도록 하라. 그리고 그때의 추관(推官)인 윤필상(尹弼商), 노사신(盧思愼), 유자광(柳子光) 등에게 상사(賞賜)한 물품과 무오년에 사국(史局)의 일을 누설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일기청(日記廳)으로 하여금 상고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이 해에 밀양(密陽) 대동(大洞)의 구택(舊宅) 뒷산 경좌 갑향(庚坐甲向)의 언덕에 개장(改葬)하였다.
상(上)이 특명으로 그 부인에게 늠료(廩料)를 지급하고, 그 자손들을 찾아서 녹용(錄用)하도록 하여, 아들 숭년(嵩年)이 집경전 참봉(集慶殿參奉), 동부 참봉(東部參奉)에 연해서 제수되었다. 그러나 숭년은 화를 당한 나머지 명리(名利)를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모부인(母夫人)의 명령에 따라 사은(謝恩)을 하고 나서 얼마 안 되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모친을 섬기면서 효성을 다하였으므로, 향인(鄕人) 및 사림(士林)들이 지금까지 칭도하고 있다.
참봉은 주부(主簿) 손순무(孫筍茂)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부윤(府尹) 손영유(孫永裕)가 바로 그의 조(祖)이다. 아들 3인을 두었는데, 윤(綸)은 문행(文行)이 있었으나 요절하였고, 유(維)는 참봉 최필손(崔弼孫)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며, 유(紐)는 지평(持平) 이신(李伸)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선생의 문집(文集) 초본(抄本) 20여 권이 모두 불타버렸으나, 오히려 남은 난고(亂稿)가 들보 위에 쌓여 있었는데, 가인(家人)이 상서롭지 못한 물건이라 하여 이를 또 불 속에 던져버리자, 곁에 있던 사람이 활활 타는 불 속에서 1, 2편(編)을 꺼냄으로써 겨우 완전히 태워버림은 면하였다. 그래서 지금 보존된 것은 10분에 2, 3도 안 되는데, 선생의 생질 강중진(康仲珍)이 이를 상자 속에 저장해 두었다가, 무오년으로부터 22년 뒤인 경진년(1520, 중종15)에 읍재(邑宰)와 상의하여 판각(板刻)하도록 하였고, 남곤(南袞)이 서문(序文)을 지었다.
그리고 예조(禮曹)에서는 선생이 살았던 고을과 강도(講道)하던 곳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봄, 가을의 중월(仲月)이면 관(官)에서 치제(致祭)할 일로 의정부(議政府)에 보고하니, 의정부가 계청(啓請)하여 상이 윤허했으므로 금산(金山)의 경렴서원(景濂書院), 밀양(密陽)의 예림서원(禮林書院), 선산(善山)의 자양서원(紫陽書院), 함양(咸陽)의 백연서원(柏淵書院), 개령(開寧)의 덕림서원(德林書院)이 이루어졌다.
[주-D001] 사대 : 세상 만물을 이루는 근본이 되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 네 가지를 말한다.[주-D002] 오상 : 인간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리, 즉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을 가리키는데, 전하여 오륜(五倫)의 뜻으로 쓰인다.[주-D003] 항량은……후예로서 : 항량은 곧 초(楚) 나라의 명장(名將)인 항연(項燕)의 아들이며 항우(項羽)의 숙부(叔父)이기도 한데, 그가 진(秦) 나라 이세(二世) 초기에 진섭(陳涉) 다음으로 항우와 함께 군대를 일으키어 진군(秦軍)과 싸우면서, 한편으로는 초 회왕(楚懷王)의 손자 심(心)을 민간에서 찾아다가 초 회왕으로 삼았었는데, 초 회왕은 뒤에 다시 항우에 의해 의제(義帝)로 추대(推戴)되었다가 끝내는 항우에 의해 시해되고 말았다.[주-D004] 어호 : 어백 호구(魚帛狐篝)의 준말로, 즉 진(秦) 나라 이세(二世) 초기에 가장 먼저 거사(擧事)하였던 진섭(陳涉)을 가리킴. 진섭이 거사하기 직전에 대중을 유혹시키기 위하여 비단에다 붉은 글씨로 ‘진승왕(陳勝王: 승〈勝〉은 이름이고, 자가 섭〈涉〉임)’ 이라 써서 몰래 남의 그물에 든 고기의 뱃속에 넣어두고 그 고기를 사다가 삶아 먹은 군졸이 그것을 보고 매우 괴이하게 여긴 일과, 또는 총사(叢祠) 안에 밤중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여우의 울음 소리로 울면서 외치기를 “대초가 일어나고 진승이 왕이 되리라.[大楚興 陳勝王]”고 하여, 대중의 여론을 조성했던 데서 온 말이다.[주-D005] 웅역 : 주 성왕(周成王) 때 사람으로, 초(楚) 나라 시봉조(始封祖)이다.[주-D006] 천씨 : 초(楚) 나라의 성(姓)이다.[주-D007] 장자를……하였으니 : 장자는 관후장자(寬厚長者)의 준말로, 즉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을 가리키는데, 그가 처음 초 회왕으로부터 먼저 관중(關中)에 들어간 사람을 관중의 왕으로 삼겠다는 약속을 받고 항우(項羽)와 길을 나누어서 진(秦) 나라를 공략하여, 항우보다 먼저 관중에 들어가 진왕 자영(秦王子嬰)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관중을 조용히 평정하였던 일을 이른 말이다.[주-D008] 관군 : 초 회왕의 상장군(上將軍)인 경자관군(卿子冠軍) 송의(宋義)를 가리키는데, 그는 항우에게 기습 살해당하고 멸족(滅族)까지 당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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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필재집(佔畢齋集) 김종직(金宗直)생년1431년(세종 13)몰년1492년(성종 23)자계온(季昷), 효관(孝盥)호점필재(佔畢齋)본관선산(善山)시호문충(文忠)
佔畢齋集佔畢齋年譜 / 年譜 / 佔畢齋先生年譜 艮翁李公。因璞齋所編。更加校正。
景泰四年癸酉。端宗大王元年 先生二十三歲。春。中進士。冬。行醮禮。是歲。始遊太學。讀周易。探性理之源。流輩多敬服。
景泰五年甲戌。端宗大王二年 先生二十四歲。先公廬墓時。大有所傷。病且瘦。先生憂傷。作籲天賦。先公以成均司藝。出爲星州敎授。先生與仲氏。往省焉。仍留黌序。讀書。携諸子。入禮夫子廟。見大聖以下四聖十哲。皆塑以土。歲月旣遠。或目亡而指缺。或冠倒而笏墜。黯黲如入古寺。見千歲偶人。先生愕然不敢指視。以爲大聖大賢。如有靈。其肯依此而受享乎。於是。咎始作者之無稽。遂作賦。遺諸子。俾改以栗主。朝廷聞而陳啓。改造位版。賦辭載集中
景泰六年乙亥。世祖大王元年 先生二十五歲。先生與伯氏。俱中東堂試。
景泰七年丙子。世祖大王二年 先生二十六歲。三月日。丁先公憂。饘粥哭泣。絶而復甦。行葬禮于密陽府西六里高巖山粉底谷。從先志也。先生與伯仲氏廬墓。誠孝純至。鄕閭感化。是年正月。會試將迫。先生與伯氏。告辭堂下。先公執酌而祝曰。汝兄弟取高第而還鄕。吾復何憂。敢以此酌。爲汝輩福。先生平日。雖大戚。未嘗於膝下見涕。恐傷親之心。及玆。不覺泫然。遂偕計赴京。伯氏得上第。先生下第。還鄕。未及里門。而黃澗路上。聞此大酷。蒼天蒼天。其有是耶。先祖先祖。其有是耶。執酌之祝。耿耿在耳。是先公永訣之言也。思之當時之涕。亦天誘其衷。使之無離左右也。而未免爲利祿所羈。乃竟違去。以至於斯。極惡極逆。俾誰任其咎耶。茶毒茶毒。人世有何樂而獨全耶。載彝尊錄
天順元年丁丑。世祖大王三年 先生二十七歲。先生不脫絰帶。寢苫枕木。䟽糲以食。侍奠之暇。自廬所。每朝夕。來省母夫人而返。雖隆寒暑雨。不懈也。
吊義帝文曰。丁丑十月日。余自密城道京山。宿踏溪驛。此說恐誤。先生私淑於家。獨推圃隱先生。卓然自立於頹波。不爲習俗所移。而能從聖制。以致自盡之誠。則豈有居憂出入之理乎。
天順二年戊寅。世祖大王四年 先生二十八歲。服闋。搆數間屋。曰明發窩。鷄鳴。正衣冠。先謁家廟。次省母夫人。退而端坐。講究經傳。孜孜不已。悼先公至德茂行。不大顯於世。手撰一錄。名之曰彝尊錄。先之以譜圖。次之以紀年。又次之以師友。平生莅官行事與夫訓戒之辭。家廟祭儀之可法者。纖悉具載。無有遺失。無意擧業。伯氏白母夫人。勸之以赴擧。是年秋。中別擧初試。伯氏病癰。醫云。蚯蚓汁良。先生先嘗以進。果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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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일기 30권, 연산 4년 7월 17일 辛亥 2번째기사 1498년 명 홍치(弘治) 11년김일손의 사초에 실린 김종직의 조의제문에 대한 왕의 전교와 신하들의 논의
○傳旨曰: "金宗直草茅賤士, 世祖朝登第, 至成宗朝, 擢置經筵, 久在侍從之地, 以至刑曹判書, 寵恩傾朝。 及其病退, 成宗猶使所在官, 特賜米穀, 以終其年。 今其弟子金馹孫所修史草內, 以不道之言, 誣錄先王朝事, 又載其師宗直 《弔義帝文》。 其辭曰:
丁丑十月日, 余自密城道京山, 宿踏溪驛, 夢有神披七章之服, 頎然而來, 自言: "楚懷王 孫心爲西楚霸王所弑, 沈之郴江。" 因忽不見。 余覺之, 愕然曰: "懷王 南楚之人也, 余則東夷之人也。 地之相距, 不啻萬有餘里, 而世之先後, 亦千有餘載。 來感于夢寐, 玆何祥也? 且考之史, 無沈江之語, 豈羽使人密擊, 而投其屍于水歟? 是未可知也。" 遂爲文以弔之。 惟天賦物則以予人兮, 孰不知尊四大與五常? 匪華豐而夷嗇, 曷古有而今亡? 故吾夷人, 又後千載兮, 恭弔楚之懷王。 昔祖龍之弄牙角兮, 四海之波, 殷爲衁。 雖鱣鮪鰍鯢, 曷自保兮, 思網漏而營營。 時六國之遺祚兮, 沈淪播越, 僅媲夫編氓。 梁也南國之將種兮, 踵魚狐而起事。 求得王而從民望兮, 存熊繹於不祀。 握乾符而面陽兮, 天下固無大於芈氏。 遣長者而入關兮, 亦有足覩其仁義。 羊狠狼貪, 擅夷冠軍兮, 胡不收而膏齊斧? 嗚呼! 勢有大不然者兮, 吾於王而益懼。 爲醢腊於反噬兮, 果天運之蹠盭。 郴之山磝以觸天兮, 景晻愛以向晏。 郴之水流以日夜兮, 波淫泆而不返。 天長地久, 恨其可旣兮, 魂至今猶飄蕩。 余之心貫于金石兮, 王忽臨乎夢想。 循紫陽之老筆兮, 思螴蜳以欽欽。 擧雲罍以酹地兮, 冀英靈之來歆。
其曰: ‘祖龍之弄牙角。’ 者, 祖龍秦始皇也, 宗直以始皇比世廟。 其曰: ‘求得王而從民望。’ 者, 王, 楚懷王 孫心, 初項梁誅秦, 求孫心以爲義帝, 宗直以義帝比魯山。 其曰: ‘羊狠狼貪, 擅夷冠軍者。’ 宗直以羊狠狼貪指世廟, 擅夷冠軍, 指世廟誅金宗瑞。 其曰: ‘胡不收而膏齊斧?’ 者, 宗直指魯山胡不收世廟。 其曰: ‘爲醢腊於反噬。’ 者, 宗直謂魯山不收世廟, 反爲世廟醢腊。 其曰: ‘循紫陽之老筆, 思螴蜳以欽欽。’ 者, 宗直以朱子自處, 其心作此賦, 以擬《綱目》之筆。 馹孫贊其文曰: ‘以寓忠憤。’
念我世祖大王當國家危疑之際, 姦臣謀亂, 禍機垂發, 誅除逆徒, 宗社危而復安, 子孫相繼, 以至于今, 功業巍巍, 德冠百王。 不意宗直與其門徒, 譏議聖德, 至使馹孫誣書於史, 此豈一朝一夕之故? 陰蓄不臣之心, 歷事三朝, 余今思之, 不覺慘懼。 其令東西班三品以上, 臺諫、弘文館, 議刑以啓。" 鄭文炯、韓致禮、李克均、李世佐、盧公弼、尹慜、安瑚、洪自阿、申溥、李德崇、金友臣、洪碩輔、盧公裕、鄭叔墀議: "今觀宗直 《弔義帝文》, 非唯口不可讀, 目不忍視也。 宗直當世祖朝, 從仕已久, 自謂才高一世, 而不見納於世廟, 遂懷憤懟之心, 托辭於文, 譏刺聖德, 語極不道。 原其心, 與丙子謀亂之臣何異? 當論以大逆, 剖棺斬屍, 明正其罪, 以雪臣民之憤, 實合事體。" 柳輊議: "宗直不臣之心, 罪不容誅, 宜置極刑。" 朴安性、成俔、申浚、鄭崇祖、李季仝、權健、金悌臣、李季男、尹坦、金克儉、尹殷老、李諿、金碔、金敬祖、李叔瑊、李堪議: "宗直假托夢妖, 詆毁先王, 大逆不道, 宜置極典。" 卞宗仁、朴崇質、權景祐、蔡壽、吳純、安處良、洪興議: "宗直懷二心, 不臣之罪已甚, 依律斷之爲便。" 李仁亨、表沿沫議: "觀宗直 《弔義帝文》及所指之意, 罪不容誅。" 李克圭、李昌臣、崔璡、閔師騫、洪瀚、李均、金係行議: "宗直罪犯, 所不忍言, 依律文論斷, 以戒人臣懷二心者。" 鄭誠謹議: "宗直陰懷是心, 臣事世廟, 凶惡不測, 宜置重典。" 李復善議: "宗直作《弔義帝文》, 在丁丑十月, 則蓄不臣之心久矣。 觀解釋弔文之言, 非徒耳不忍聞, 抑亦目不忍見。 其身雖死, 其惡可追, 宜從叛臣之律論斷, 則宗直地下之鬼, 必稽首甘心伏辜矣。" 李世英、權柱、南宮璨、韓亨允、成世純、鄭光弼、金勘、李寬、李幼寧議: "今觀宗直文, 語極不道。 論以亂逆何如?" 李惟淸、閔壽福、柳廷秀、趙珩、孫元老、辛服義、安彭壽、李昌胤、朴權議: "宗直 《弔義帝文》, 語多不道, 罪不容誅。 然其人已死, 追奪爵號, 廢錮子孫何如?" 從文炯等議。 御筆抹執義李惟淸等, 司諫閔壽福等議, 以示弼商等曰: "宗直大逆已著, 而此輩議之如此, 是欲庇之也。 安有如此痛恨之事? 其就所坐處, 拿來刑訊。" 時諸宰及臺諫、弘文館皆在坐, 忽有羅將十餘人持鐵鎖, 一時走入, 宰相以下莫不錯愕起立。 惟淸等受訊杖三十, 竝供無他情。
연산군 4년 무오(1498) 7월 17일(신해)
04-07-17[02] 김일손의 사초에 실린 김종직의 조의제문에 대한 왕의 전교와 신하들의 논의
전지하기를,
“김종직은 초야의 미천한 선비로 세조조에 과거에 합격했고, 성종조에 이르러서는 발탁하여 경연(經筵)에 두어 오래도록 시종(侍從)의 자리에 있었고, 종경에는 형조 판서(刑曹判書)까지 이르러 은총이 온 조정을 경도하였다. 병들어 물러가게 되자 성종께서 소재지의 수령으로 하여금 특별히 미곡(米穀)을 내려주어 그 명을 마치게 하였다. 지금 그 제자 김일손(金馹孫)이 찬수한 사초(史草) 내에 부도(不道)한 말로 선왕조의 일을 터무니없이 기록하고 또 그 스승 종직의 조의제문을 실었다. 그 말에 이르기를,
‘정축 10월 어느 날에 나는 밀성(密城)으로부터 경산(京山)으로 향하여 답계역(踏溪驛)에서 자는데, 꿈에 신(神)이 칠장(七章)의 의복을 입고 헌칠한 모양으로 와서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초(楚)나라 회왕(懷王)의 손자 심(心)인데, 서초 패왕(西楚霸王)에게 살해 되어 빈강(郴江)에 잠겼다.」 하고 문득 보이지 아니하였다. 나는 꿈을 깨어 놀라며 생각하기를 「회왕(懷王)은 남초(南楚) 사람이요, 나는 동이(東夷) 사람으로 지역의 거리가 만여 리가 될 뿐이 아니며, 세대의 선후도 역시 천 년이 휠씬 넘는데, 꿈속에 와서 감응하니, 이것이 무슨 상서일까? 또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강에 잠겼다는 말은 없으니, 정녕 항우(項羽)가 사람을 시켜서 비밀리에 쳐 죽이고 그 시체를 물에 던진 것일까? 이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고, 드디어 문(文)을 지어 조문한다.
하늘이 법칙을 마련하여 사람에게 주었으니, 어느 누가 사대(四大) 오상(五常) 높일 줄 모르리오. 중화라서 풍부하고 이적이라서 인색한 바 아니거늘, 어찌 옛적에만 있고 지금은 없을손가. 그러기에 나는 이인(夷人)이요 또 천 년을 뒤졌건만, 삼가 초나라 회왕을 조문하노라. 옛날 조룡(祖龍)이 아각(牙角)을 농(弄)하니, 사해(四海)의 물결이 붉어 피가 되었네. 비록 전유(鱣鮪), 추애(鰌鯢)라도 어찌 보전할손가. 그물을 벗어나기에 급급했느니, 당시 육국(六國)의 후손들은 숨고 도망가서 겨우 편맹(編氓)가 짝이 되었다오. 항양(項梁)은 남쪽 나라의 장종(將種)으로, 어호(魚狐)를 종달아서 일을 일으켰네. 왕위를 얻되 백성의 소망에 따름이여! 끊어졌던 웅역(熊繹)의 제사를 보존하였네. 건부(乾符)를 쥐고 남면(南面)을 함이여! 천하엔 진실로 미씨(芈氏)보다 큰 것이 없도다. 장자(長者)를 보내어 관중(關中)에 들어가게 함이여! 또는 족히 그 인의(仁義)를 보겠도다. 양흔 낭탐(羊狠狼貪)이 관군(冠軍)을 마음대로 축임이여! 어찌 잡아다가 제부(齊斧)에 기름칠 아니했는고. 아아, 형세가 너무도 그렇지 아니함에 있어, 나는 왕을 위해 더욱 두렵게 여겼네. 반서(反噬)를 당하여 해석(醢腊)이 됨이여, 과연 하늘의 운수가 정상이 아니었구려. 빈의 산은 우뚝하여 하늘을 솟음이야! 그림자가 해를 가리어 저녁에 가깝고. 빈의 물은 밤낮으로 흐름이여! 물결이 넘실거려 돌아올 줄 모르도다. 천지도 장구(長久)한들 한이 어찌 다하리 넋은 지금도 표탕(瓢蕩)하도다. 내 마음이 금석(金石)을 꿰뚫음이여! 왕이 문득 꿈속에 임하였네. 자양(紫陽)의 노필(老筆)을 따라가자니, 생각이 진돈(螴蜳)하여 흠흠(欽欽)하도다. 술잔을 들어 땅에 부음이어! 바라건대 영령은 와서 흠향(歆饗)하소서.’
하였다. 그 ‘조룡(祖龍)이 아각(牙角)을 농(弄)했다.’는 조룡은 진 시황(秦始皇)인데, 종직이 진 시황을 세조에게 비한 것이요, 그 ‘왕위를 얻되 백성의 소망을 따랐다.’고 한 왕은 초나라 회왕(懷王)의 손자 심(心)인데, 처음에 항량(項梁)이 진(秦)을 치고 심을 찾아서 의제(義帝)를 삼았으니, 종직은 의제를 노산(魯山)에게 비한 것이다. 그 ‘양흔 낭탐(羊狠狼貪)하여 관군(冠軍)을 함부로 무찔렀다.’고 한 것은, 종직이 양흔 낭탐으로 세조를 가리키고, 관군을 함부로 무찌른 것으로 세조가 김종서(金宗瑞)를 베인 데 비한 것이요. 그 ‘어찌 잡아다가 제부(齊斧)에 기름칠 아니 했느냐.’고 한 것은, 종직이 노산이 왜 세조를 잡아버리지 못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 ‘반서(反噬)를 입어 해석(醢腊)이 되었다.’는 것은, 종직이 노산이 세조를 잡아버리지 못하고, 도리어 세조에게 죽었느냐 하는 것이요. 그 ‘자양(紫陽)은 노필(老筆)을 따름이여, 생각이 진돈하여 흠흠하다.’고 한 것은, 종직이 주자(朱子)를 자처하여 그 마음에 부(賦)를 짓는 것을, 《강목(綱目)》의 필(筆)에 비의한 것이다. 그런데 일손이 그 문(文)에 찬(贊)을 붙이기를 ‘이로써 충분(忠憤)을 부쳤다.’ 하였다.
생각건대, 우리 세조 대왕께서 국가가 위의(危疑)한 즈음을 당하여, 간신이 난(亂)을 꾀해 화(禍)의 기틀이 발작하려는 찰라에 역적 무리들을 베어 없앰으로써 종묘 사직이 위태했다가 다시 편안하여 자손이 서로 계승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니, 그 공과 업이 높고 커서 덕이 백왕(百王)의 으뜸이신데, 뜻밖에 종직이 그 문도들과 성덕(聖德)을 기롱하고 논평하여 일손으로 하여금 역사에 무서(誣書)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이 어찌 일조일석의 연고이겠느냐. 속으로 불신(不臣)의 마음을 가지고 세 조정을 내리 섬겼으니, 나는 이제 생각할 때 두렵고 떨림을 금치 못한다. 동ㆍ서반(東西班) 3품 이상과 대간ㆍ홍문관들로 하여금 형을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정문형(鄭文炯)ㆍ한치례(韓致禮)ㆍ이극균(李克均)ㆍ이세좌(李世佐)ㆍ노공필(盧公弼)ㆍ윤민(尹慜)ㆍ안호(安瑚)ㆍ홍자아(洪自阿)ㆍ신부(申溥)ㆍ이덕영(李德榮)ㆍ김우신(金友臣)ㆍ홍석보(洪碩輔)ㆍ노공유(盧公裕)ㆍ정숙지(鄭叔墀)가 의논드리기를,
“지금 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보오니, 입으로만 읽지 못할 뿐 아니라 눈으로 차마 볼 수 없사옵니다. 종직이 세조조에 벼슬을 오래하자, 스스로 재주가 한 세상에 뛰어났는데 세조에게 받아들임을 보지 못한다 하여, 마침내 울분과 원망의 뜻을 품고 말을 글에다 의탁하여 성덕(聖德)을 기롱했는데, 그 말이 극히 부도(不道)합니다. 그 심리를 미루어 보면 병자년에 난역(亂逆)을 꾀한 신하들과 무엇이 다르리까. 마땅히 대역(大逆)의 죄로 논단하고 부관 참시(剖棺斬屍)해서 그 죄를 명정(明正)하여 신민의 분을 씻는 것이 실로 사체에 합당하옵니다.”
하고, 유지(柳輊)는 의논드리기를,
“종직의 불신(不臣)한 그 심리는, 죄가 용납될 수 없사오니 마땅히 극형에 처하옵소서.”
하고, 박안성(朴安性)ㆍ성현(成俔)ㆍ신준(申浚)ㆍ정숭조(鄭崇祖)ㆍ이계동(李季仝)ㆍ권건(權健)ㆍ김제신(金悌臣)ㆍ이계남(李季男)ㆍ윤탄(尹坦)ㆍ김극검(金克儉)ㆍ윤은로(尹殷老)ㆍ이집(李諿)ㆍ김무(金珷)ㆍ김경조(金敬祖)ㆍ이숙함(李叔瑊)ㆍ이감(李堪)은 의논드리기를,
“종직이 요사한 꿈에 가탁하여 선왕을 훼방(毁謗)하였으니, 대역 부도(大逆不道)입니다. 마땅히 극형에 처해야 하옵니다.”
하고, 변종인(卞宗人)ㆍ박숭질(朴崇質)ㆍ권경우(權景祐)ㆍ채수(蔡壽)ㆍ오순(吳純)ㆍ안처량(安處良)ㆍ홍흥(洪興)은 의논드리기를,
“종직이 두 마음을 품었으니 불신(不臣)한 죄가 이미 심하온즉, 율(律)에 의하여 처단하는 것이 편하옵니다.”
하고, 이인형(李仁亨)ㆍ표연말(表沿沫)이 의논드리기를,
“종직의 조의제문과 지칭한 뜻을 살펴보니 죄가 베어 마땅하옵니다.”
하고, 이극규(李克圭)ㆍ이창신(李昌臣)ㆍ최진(崔璡)ㆍ민사건(閔師蹇)ㆍ홍한(洪瀚)ㆍ이균(李均)ㆍ김계행(金係行)이 의논드리기를,
“종직의 범죄는 차마 말로 못하겠으니, 율문에 의하여 논단해서 인신(人臣)으로 두 마음 가진 자의 경계가 되도록 하옵소서.”
하고, 정성근(鄭誠謹)이 의논드리기를,
“종직이 음으로 이런 마음을 품고 세조를 섬겼으니, 그 흉악함을 헤아리지 못하온즉 마땅히 중전(重典)에 처해야 하옵니다.”
하고, 이복선(李復善)이 의논드리기를,
“종직이 조의제문을 지은 것이 정축년(丁丑年) 10월이었으니, 그 불신(不臣)의 마음을 품은 것이 오래이었습니다. 그 조문(弔文)을 해석한 말을 살펴보니, 비단 귀로 차마 들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역시 눈으로도 차마 보지 못하겠습니다. 그 몸이 비록 죽었을지라도 그 악을 추죄(追罪)할 수 있사오니, 마땅히 반신(叛臣)의 율에 따라 논단하소서. 종직의 귀신이 지하에서 반드시 머리를 조아리며 달갑게 복죄(伏罪)할 것입니다.”
하고, 이세영(李世英)ㆍ권주(權柱)ㆍ남궁찬(南宮璨)ㆍ한형윤(韓亨允)ㆍ성세순(成世純)ㆍ정광필(鄭光弼)ㆍ김감(金勘)ㆍ이관(李寬)ㆍ이유령(李幼寧)이 의논드리기를,
“지금 종직의 글을 보오니, 말이 너무도 부도(不道)하옵니다. 난역(亂逆)으로 논단하는 것이 어떠하옵니까?”
하고, 이유청(李惟淸)ㆍ민수복(閔壽福)ㆍ유정수(柳廷秀)ㆍ조형(趙珩)ㆍ손원로(孫元老)ㆍ신복의(辛服義)ㆍ안팽수(安彭壽)ㆍ이창윤(李昌胤)ㆍ박권(朴權)이 의논드리기를,
“종직의 조의제문은 말이 많이 부도(不道)하오니, 죄가 베어도 부족하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이미 죽었으니 작호(爵號)를 추탈하고 자손을 폐고(廢錮)하는 것이 어떠하옵니까?”
하였는데, 문형 등의 의논에 따랐다. 어필(御筆)로 집의(執義) 이유청(李惟淸) 등과 사간(司諫) 민수복(閔壽福)의 논의에 표를 하고, 필상 등에게 보이며 이르기를,
“종직의 대역이 이미 나타났는데도 이 무리들이 논을 이렇게 하였으니, 이는 비호하려는 것이다. 어찌 이와 같이 통탄스러운 일이 있느냐. 그들이 앉아 있는 곳으로 가서 잡아다가 형장 심문을 하라.”
하였다. 이때 여러 재상과 대간과 홍문 관원이 모두 자리에 있었는데, 갑자기 나장(羅將) 십여 인이 철쇄(鐵鎖)를 가지고 일시에 달려드니, 재상 이하가 놀라 일어서지 않는 자가 없었다. 유청 등은 형장 30대를 받았는데, 모두 다른 정(情)이 없음을 공초하였다.
【원전】 13 집 318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왕실-국왕(國王) / 역사-편사(編史) / 역사-고사(故事) / 사법-탄핵(彈劾) / 변란-정변(政變) / 어문학-문학(文學)
[주-D001] 서초 패왕(西楚霸王) :
항우(項羽).
[주-D002] 사대(四大) 오상(五常) :
사대(四大)는 천대(天大)ㆍ지대(地大)ㆍ도대(道大)ㆍ왕대(王大)를 이름이요, 오상(五常)은 오륜(五倫)을 이름.
[주-D003] 조룡(祖龍) :
진 시황(秦始皇).
[주-D004] 웅역(熊繹) :
주 성왕(周成王) 때 사람인데 초(楚)의 시봉조(始封祖)임.
[주-D005] 건부(乾符) :
천자의 표시로 갖는 부서(符瑞).
[주-D006] 미씨(芈氏) :
초(楚)나라의 성.
[주-D007] 양흔 낭탐(羊狠狼貪) :
항우(項羽)를 비유함.
[주-D008] 관군(冠軍) :
경자 관군(卿子冠軍).
[주-D009] 제부(齊斧) :
정벌하는 도끼임. 천하를 정제한다는 뜻에서 나옴.
[주-D010] 해석(醢腊) :
젓과 포.
[주-D011] 진돈(螴蜳) :
충융(沖瀜)과 같은데, 포외(怖畏)의 기운이 넘쳐서 안정하지 못한다는 뜻임.
[주-D012] 노산(魯山) :
단종.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역) | 1974
운뢰(雲罍) : 구름 무늬를 그린 술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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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4)(莊子(4)) 第1章 安炳周, 田好根, 金炳錫 2008
而孝未必愛라 故로 孝己憂하며 而曾參이 悲하니라 木與木이 相摩則然하며 金與火 相守則流하며 陰陽이 錯行 則天地大絯하야 於是乎에 有雷有霆하며 水中에 有火하야 乃焚大槐하나니라 有甚憂함에 兩陷而無所逃라 螴蜳不得成하나니라 心若縣於天地之間하야 慰... ... 일어난 것’을 ‘兩也’로 표현한 대목과 유사하다(林希逸).
螴蜳不得成두렵고 아찔하여 마음의 안정을 이룰 수가 없음. 螴과 蜳은 모두 기가 안정되지 못한 모양. 蜳은 ‘아찔할 돈’. 成玄英은 “螴蜳은 깜짝 놀람과 같다[螴蜳 猶怵惕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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佔畢齋集戊午事蹟 / 事蹟 / 戊午史禍事蹟
弘治十一年戊午 燕山四年 七月。史禍起。柳子光啓燕山。論以大逆。卽令剖棺。家被籍沒。貞夫人文氏。定屬雲峯縣。夫人卽斷髮服喪。其在謫中。常歎曰。家翁平生志節。天日照臨。死得謬禍。是亦關於世運。但當順受而已。更無怨尤之辭。在謫九年。節操愈勵。一不啓齒。人皆敬服。 子嵩年。時年十三歲。陜川郡安置。以年未滿。免刑禍。是月十七日。傳旨。金宗直。草茅賤士。世祖朝。登第。成宗朝。擢置經筵。久在侍從之地。以至刑曹判書。寵恩傾朝。及其病退。成宗猶使所在官。特賜米穀。以終其年。今其弟子金馹孫所修史草內。以不道之言。誣錄先王朝事。又載其師宗直
吊義帝文。其辭曰。
丁丑十月日。余自密城道京山。宿踏溪驛。夢有神人。被七章之服。頎然而來。自言楚懷王孫心。爲西楚伯王項籍所弑。沉之郴江。因忽不見。余覺之。愕然曰。懷王。南楚之人也。余則東夷之人也。地之相去。不翅萬有餘里。世之先後。亦千有餘載。來感于夢寐。玆何祥也。且考之史。無投江之語。豈羽使人密擊。而投其尸于水歟。是未可知也。遂爲文以吊之。惟天賦物則以予人兮。孰不知其遵四大與五常。匪華豊而夷嗇兮。曷古有而今亡。故吾夷人又後千祀兮。恭吊楚之懷王。昔祖龍之弄牙角兮。四海之波殷爲衁。雖鱣鮪鰍鯢曷自保兮。思網漏以營營。時六國之遺祚兮。沉淪播越僅媲夫編氓。梁也南國之將種兮。踵魚狐而起事。求得王而從民望兮。存熊繹於不祀。握乾符而面陽兮。天下固無尊於芊氏。遣長者以入關兮。亦有足覩其仁義。羊狠狼貪擅夷冠軍兮。胡不收以膏齊斧。嗚呼。勢有大不然者。吾於王而益惧。爲醢醋於反噬兮。果天運之蹠盭。郴之山磝以觸天兮。景晻曖而向晏。郴之水流以日夜兮。波淫泆而不返。天長地久恨其曷旣兮。魂至今猶飄蕩。余之心貫于金石兮。王忽臨乎夢想。循紫陽之老筆兮。思螴蜳以欽欽。擧雲罍以酹地兮。冀英靈之來歆云。
‘정축년 10월 일에 내가 밀성(密城)으로부터 경산(京山)을 경유하여 답계역(踏溪驛)에서 자는데, 꿈에 한 신인(神人)이 칠장복(七章服)을 입고 헌걸찬 모습으로 와서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초 회왕(楚懷王)의 손자 심(心)인데, 서초패왕(西楚霸王) 항적(項籍)에게 시해되어 침강(郴江)에 빠뜨려졌다.」 하고는, 언뜻 보이다가 이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꿈을 깨고 나서 깜짝 놀라 말하기를 「회왕은 남초(南楚) 사람이고, 나는 동이(東夷) 사람이니, 지역의 거리는 만여 리뿐만이 아니요 세대의 선후 또한 천여 년이나 되는데, 꿈자리에서 서로 만나게 되었으니, 이것이 그 얼마나 상서로운 일인가. 또 사서(史書)를 상고해 보면 강(江)에 던졌다는 말은 없는데, 혹시 항우(項羽)가 사람을 시켜 비밀히 격살(擊殺)하여 그 시체를 물에다 던져버렸던가. 이것을 알 수가 없다.」 하고, 마침내 글을 지어서 조문하였다.
하늘이 사물의 법칙을 부여해 사람에게 주었으니 / 惟天賦物則以予人兮
그 누가 사대와 오상을 준행할 줄을 모르리오 / 孰不知其遵四大與五常
중화엔 풍부하고 이적엔 인색한 게 아니거니 / 匪華豐而夷嗇兮
어찌 옛날에만 있었고 지금엔 없으랴 / 曷古有而今亡
그러므로 나는 동이 사람이요 또 천 년 뒤의 오늘에 / 故吾夷人又後千祀兮
삼가 초 나라의 회왕을 조문하노라 / 恭吊楚之懷王
옛날 진 시황이 포학을 자행하여 / 昔祖龍之弄牙角兮
사해의 물결이 검붉은 피바다를 이루니 / 四海之波殷爲衁
상어나 미꾸라지도 어찌 스스로 보전하랴 / 雖鱣鮪鰍鯢曷自保兮
그물을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다하였네 / 思網漏以營營
이 때 산동 육국의 후사가 된 사람들은 / 時六國之遺祚兮
침몰하고 방랑하는 고작 필부 편맹들뿐이었네 / 沈淪播越僅媲夫編氓
항량은 남쪽 초 나라 장수의 후예로서 / 梁也南國之將種兮
어호를 뒤따라 대사를 일으키어 / 踵魚狐而起事
임금을 찾아 얻어서 백성의 소망을 따르니 / 求得王而從民望兮
웅역에게 끊어진 제사를 다시 보존했도다 / 存熊繹於不祀
제왕의 상서를 쥐고 왕위에 오르니 / 握乾符而面陽兮
천하에 진실로 천씨보다 더 높은 이 없었고 / 天下固無尊於芊氏
장자를 보내어 관중을 들어가게 하였으니 / 遣長者以入關兮
또한 족히 인의로운 마음을 볼 수 있었네 / 亦有足覩其仁義
양과 이리처럼 탐포하여 멋대로 관군을 멸족시켰는데 / 羊狠狼貪擅夷冠軍兮
어찌 그를 잡아다가 처형하지 않았던가 / 胡不收以膏齊斧
아 형세가 대단히 어긋난 것이 있었으니 / 嗚呼勢有大不然者
나는 회왕을 위하여 더욱 두려웁도다 / 吾於王而益懼
끝내 배신한 자에게 시해를 당하였어라 / 爲醢醋於反噬兮
과연 천운이 크게 어긋났도다 / 果天運之蹠盭
침강 가의 산은 우뚝이 하늘에 치솟았는데 / 郴之山磝以觸天兮
햇빛은 침침하여 저물녘을 향하였고 / 景晻曖而向晏
침강의 물은 밤낮으로 흘러가는데 / 郴之水流以日夜兮
물결은 넘쳐 흘러 되돌아오지 않도다 / 波淫泆而不返
한스러워라 천지는 장구하여 언제 다하랴마는 / 天長地久恨其曷旣兮
그 넋은 지금까지도 떠돌아다니리라 / 魂至今猶飄蕩
나의 충심은 금석을 뚫을 만하기에 / 余之心貫于金石兮
왕께서 갑자기 몽상에 나타났도다 / 王忽臨乎夢想
자양의 노련한 필법을 따라 / 循紫陽之老筆兮
마음 설레며 공경히 사모하여 / 思螴蜳以欽欽
술잔 들어 땅에 부어서 제사지내니 / 擧雲罍以酹地兮
바라건대 영령은 내려와 흠향하소서 / 冀英靈之來歆.’
[주-D001] 사대 : 세상 만물을 이루는 근본이 되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 네 가지를 말한다.
[주-D002] 오상 : 인간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리, 즉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을 가리키는데, 전하여 오륜(五倫)의 뜻으로 쓰인다.
[주-D003] 항량은……후예로서 : 항량은 곧 초(楚) 나라의 명장(名將)인 항연(項燕)의 아들이며 항우(項羽)의 숙부(叔父)이기도 한데, 그가 진(秦) 나라 이세(二世) 초기에 진섭(陳涉) 다음으로 항우와 함께 군대를 일으키어 진군(秦軍)과 싸우면서, 한편으로는 초 회왕(楚懷王)의 손자 심(心)을 민간에서 찾아다가 초 회왕으로 삼았었는데, 초 회왕은 뒤에 다시 항우에 의해 의제(義帝)로 추대(推戴)되었다가 끝내는 항우에 의해 시해되고 말았다.
[주-D004] 어호 : 어백 호구(魚帛狐篝)의 준말로, 즉 진(秦) 나라 이세(二世) 초기에 가장 먼저 거사(擧事)하였던 진섭(陳涉)을 가리킴. 진섭이 거사하기 직전에 대중을 유혹시키기 위하여 비단에다 붉은 글씨로 ‘진승왕(陳勝王: 승〈勝〉은 이름이고, 자가 섭〈涉〉임)’ 이라 써서 몰래 남의 그물에 든 고기의 뱃속에 넣어두고 그 고기를 사다가 삶아 먹은 군졸이 그것을 보고 매우 괴이하게 여긴 일과, 또는 총사(叢祠) 안에 밤중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여우의 울음 소리로 울면서 외치기를 “대초가 일어나고 진승이 왕이 되리라.[大楚興 陳勝王]”고 하여, 대중의 여론을 조성했던 데서 온 말이다.
[주-D005] 웅역 : 주 성왕(周成王) 때 사람으로, 초(楚) 나라 시봉조(始封祖)이다.
[주-D006] 천씨 : 초(楚) 나라의 성(姓)이다.
[주-D007] 장자를……하였으니 : 장자는 관후장자(寬厚長者)의 준말로, 즉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을 가리키는데, 그가 처음 초 회왕으로부터 먼저 관중(關中)에 들어간 사람을 관중의 왕으로 삼겠다는 약속을 받고 항우(項羽)와 길을 나누어서 진(秦) 나라를 공략하여, 항우보다 먼저 관중에 들어가 진왕 자영(秦王子嬰)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관중을 조용히 평정하였던 일을 이른 말이다.
[주-D008] 관군 : 초 회왕의 상장군(上將軍)인 경자관군(卿子冠軍) 송의(宋義)를 가리키는데, 그는 항우에게 기습 살해당하고 멸족(滅族)까지 당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1997
其曰祖龍。秦始皇也。宗直。以始皇比世廟。其曰求得王以從民望兮者。王。楚懷王孫心。初。項梁欲誅秦。求孫心以爲義帝。宗直。以義帝比魯山。其曰羊狠狼貪擅夷冠軍兮者。宗直。羊狠狼貪。指世廟。擅夷冠軍。指世廟誅金宗瑞。其曰胡不收以膏齊斧者。宗直。指魯山胡不收世廟云云。其曰爲醢醋而反噬兮者。宗直。謂魯山不收世廟。反爲世廟醢醋云云。其曰循紫陽之老筆兮。思螴蜳以欽欽者。宗直。以朱子自處。其心作此賦以擬綱目之筆。馹孫贊其文曰。以寓忠憤。
念我世廟大王。當國家危疑之際。奸臣謀亂。禍機垂發。誅除逆徒。宗社危而復安。子孫相繼。以至于今。功業巍巍。德冠百王。不意宗直與其門徒。譏議聖德。至使馹孫誣書於史。豈一朝一夕之故。陰蓄不臣之心。而歷事三朝。予今思之。不覺慘懼。其議刑名以啓。七月二十七日。頒赦。敎曰。恭惟我世祖惠莊大王。以神武之姿。當國家危疑。群奸盤據之際。沉幾睿斷。戡定禍亂。天命人心。自有攸屬。聖德神功。卓冠百王。增光祖宗艱大之業。貽厥子孫燕翼之謨。繼繼承承。式至今休。不意奸臣金宗直。包藏禍心。陰結黨類。欲售兇謀。爲日久矣。假托項籍弑義帝之事。形諸文字。詆毁先王。滔天之惡。罪在不赦。論以大逆。剖棺斬屍。其徒金馹孫,權五福,權景𥙿。朋奸黨惡。同聲相濟。稱美其文。以爲忠憤所激。書諸史草。欲垂不朽。其罪與宗直同科。並令凌遅處斬。馹孫又與李穆,許磐,姜謙等。誣飾先王所無之事。傳相告語。筆之於史。李穆,許磐。並皆處靳。姜謙。决杖一百。籍沒家產。極邊爲孥。表沿沫,洪瀚,鄭汝昌,茂豊副正揔等。罪犯亂言。姜景敍,李守恭,鄭希良,鄭承祖等。知亂言而不告。並决杖一百。流三千里。李宗準,崔溥,李黿,李胄,金宏弼,朴漢柱,任煕載,康伯珍,李繼孟,姜渾。俱以宗直門徒。結爲朋黨。互相稱譽。或譏議國政。謗訕時事。煕載。决杖一百。李胄。决杖一百。極邊附處。宗準,崔溥,李黿,宏弼,漢柱,伯珍,繼孟,姜渾等。並决杖八十。遠方附處。而流人等。並定烽燧庭爐干之役。修史官等。見馹孫等史草。而不卽啓。魚世謙,李克墩,柳洵,尹孝孫等。罷職。洪貴達,趙益貞,許琮, 許琮。甲寅已卒。必是許琛。 安琛等。左遷。隨其罪之輕重。俱已處决。謹將事由。告于宗廟社稷。顧余寡昧。剪除姦黨。戰惧之念旣深。而喜幸之心益切。肆於今七月二十七日昧爽以前。強竊盜及關係綱常外已决正未决正。咸宥除之。敢以宥旨前事。相告語者。以其罪罪之。於戲。人臣無將。旣伏不道之罪。雷雨作解。宜霈惟新之恩。故玆敎示。想宜知悉。云云。
弘治十七年甲子 燕山十年 九月。縉紳禍再起。加罪金宏弼,朴漢柱諸人。
正德二年丁卯。中宗大王二年 追雪被罪諸賢之寃。藝文館奉敎金欽祖,鄭忠梁,待敎李希曾,金瑛,檢閱權橃,李泳,鄭熊,尹仁鏡,尹止衡等。上䟽。大槩。戊午修史之官。徒以私嫌。不顧公議。陰囑大臣。使之挑怒。子光從而唱之。同議密啓。終致大禍。是則陰欲掩過。而卒不得掩。更使暴揚於當日。累及於後世。一以毀萬世史家之法。一以啓人主喜殺之心。罪當不原。而賞反及焉。臣等。不勝痛悒。比來。皆以戊午之禍爲戒。士氣摧絶。臣等。非以馹孫等爲惜。深恐史家之法。從此盡廢。而萬世之公論泯滅云云。傳曰。金宗直,金馹孫等辭連被罪者。果有曖昧。復其爵。其餘。並皆追贈。其時推官尹弼商,盧思愼,柳子光等賞賜之物及戊午史局事泄人。令日記廳考啓。是年。改葬于密陽大洞舊宅後山庚坐甲向之原。上特命廩其妻。搜訪其子孫錄用。子嵩年。連除集慶殿參奉,東部參奉。嵩年遭禍之餘。不喜名利。以母夫人命謝恩。未幾。棄官居鄕。事母盡其孝。鄕人及士林。至今稱道。參奉娶主簿孫筍茂之女。府尹永裕。其祖也。有子三人。曰綸。有文行。早世。曰維。娶參奉崔弼孫女。曰紐。娶持平李伸女。先生文集抄本廿餘卷。蕩爲煙燼。尙有亂稿。閣在樑上。家人以爲不祥之物。又擧而投之火。傍有人就烈焰中。鉤取一二編。纔免全燬。今存者。十未二三。甥康仲珍。篋而藏之。戊午後二十二年庚辰。謀諸邑宰。俾壽于梓。南衮作序文。禮曹以先生所居之鄕。講道之處。置立祠宇。春秋仲月。官爲致祭事。報議政府。政府啓請。依允。金山景濂書院,密陽禮林書院,善山紫陽書院,咸陽栢淵書院,開寧德林書院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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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계집(藍溪集) 표연말(表沿沫)생년1449년(세종 31)몰년1498년(연산군 4)자소유(少游)호남계(藍溪), 평석(平石)본관신창(新昌)특기사항김종직(金宗直)의 문인.
藍溪先生文集卷之二 / 附錄 / 史禍首末
佔畢齋金先生。嘗作弔義帝文。門人金濯纓馹孫。爲史官。書其文於史草。至燕山戊午。凶奸柳子光。李克墩等。因此搆禍於士林。先是。子光遊咸陽郡。作詩揭板。畢齋之守咸陽也。撤而焚之曰。何物子光。乃敢懸板。子光銜之。克墩立朝。與成俊有傾軋之習。濯纓之爲獻納也。上疏劾之。克墩以全羅監司。當成廟之喪。不進香京師。載妓而行。濯纓又直書于史。及修成廟實錄。時克墩爲堂上。見史草書己惡甚悉。私請改而不從。甚銜之。及見書光廟朝事。載弔義帝文。欲封其史草以啓。藉以爲禍胎。一日。屛人語摠裁官魚世謙曰。馹孫誣毀先王。臣子見如此事。不聞於上可乎。吾意謂封其史草以啓。則吾屬無患矣。世謙愕然不答。乃謀于子光。子光攘臂曰。此豈遲疑之事乎。卽往見盧思愼,尹弼商, 畢齋門人李穆。嘗上疏論弼商之罪。 韓致亨。先敍受恩世祖。不可忘之意動其心。然後乃言其事。俱詣差備門。呼都承旨愼守勤。守勤之爲承旨也。臺諫侍從。以爲外戚得權之漸。力諫其不可。 耳語良久。乃啓之。燕山猜暴。不喜學文。故尤惡文士曰。要名凌上。使我不得自由者皆此輩也。常鬱鬱不樂。欲一施快。而未得其釁。聞子光等所啓。大喜。以爲忠於國家。奬待特厚。命於南賓廳設鞠。令內豎金子猿掌出納。餘不得與聞。子光以獄事自任。於座中大言曰。今日是朝廷改排之時。須有如此大處置。不宜尋常以治之也。每於子猿傳敎時。必進前。曲爲恭謹之態。若將申謝之爲者。子光猶慮治獄漸弛。日夜謀所以鍛鍊。一日。自袖中出一卷書。摘其中弔義帝文與述酒詩。遍示諸推官曰。此皆指世廟而作。自爲註釋。逐句解之。令王易知。仍啓曰。宗直詆毀我世祖。宜論以大逆。其所爲文。不宜流傳。幷皆燒毀。王從之。子光欲乘王怒。爲一網打盡之計。目弼商等曰。此人之惡。凡爲臣子。不共戴天之讎。當究問其黨與。一切鋤去。然後方得淸明。不爾則餘黨復起。禍亂之作不久矣。思愼搖首止之曰。武靈何至爲此言也。獨不聞黨錮之事乎。禁網日峻。士流無所容迹。而漢隨以亡。淸論之亡。非國家之福。武靈何言之謬耶。當初吾輩所啓。爲史事耳。今枝葉蔓引。不干於史事者。囚繫日衆。無乃非吾輩本意乎。子光不悅。及定罪之日。思愼議獨不同。子光作色詰之。各以其意而啓之。王從子光等議。七月十七日傳旨。金宗直草茅賤士。世祖朝登第。成宗擢置經筵。久在侍從。寵恩傾朝。及其病退。猶使所在官。特賜米穀。以終其年。今其弟子金馹孫所修史草內。以不道之言。誣錄先王朝事。又載其師弔義帝文曰云云。從子光句釋 念我世廟大王。當國家危疑之際。奸臣謀亂。禍機垂發。誅除逆徒。宗社危而復安。子孫相繼。以至于今。功業巍巍。德冠百王。不意宗直與其門徒。譏議聖德。至使馹孫。誣書於史。此豈一朝一夕之故。陰蓄不臣之心。而歷事三朝。予今思之。不覺慘懼。其議刑名以啓。告宗廟文略曰。豈意奸臣潛懷不軌。假托古事。播諸文字。群凶黨附。誣詆聖德。亂逆不道。罪大惡極。告社稷文略曰。搆爲誣辭。非毀聖德。罪在不道。宜伏大辟。七月二十七日頒赦敎曰。恭惟我世祖惠莊大王。以神武之姿。當國家危疑。群奸盤據之際。沈幾睿斷。戡定禍亂。天命人心。自有攸屬。聖德神功。卓冠百王。增光祖宗艱大之業。貽厥子孫燕翼之謨。繼繼承承。式至今休。不意奸臣金宗直。包藏禍心。陰結黨類。欲售凶謀。爲日久矣。假托項籍弑義帝之事。形諸文字。詆毀先王。滔天之惡。罪在不赦。論以大逆。剖棺斬屍。其徒金馹孫,權五福,權景𥙿。朋奸黨惡。同聲相濟。稱美其文。以爲忠憤所激。書諸史草。欲垂不朽。其罪與宗直同科。幷令凌遲處斬。馹孫又與李穆,許磐,姜謙等。誣飾先王所無之事。傳相告語。筆之於史。李穆,許磐。幷皆處斬。姜謙決杖一百。籍沒家產。極邊爲奴。表沿沫,洪瀚,鄭汝昌,茂豐副正摠等。罪犯亂言。姜景敍,李守恭,鄭希良,鄭承祖等。知亂言而不告。幷決杖一百。流三千里。先生配慶源 李宗準,崔溥,李黿,李胄,金宏弼,朴漢柱,任煕載,康伯珍,李繼孟,姜渾。俱以宗直門徒。結爲朋黨。互相稱譽。謗訕時事。煕載。決杖一百。李胄。決杖一百。極邊付處。李宗準,崔溥,李黿,金宏弼,朴漢柱,康伯珍,李繼孟,姜渾等。幷決杖八十。遠方付處。而流人等。幷定烽燧庭爐干之役。修史官等。見馹孫等史草。而不卽啓。魚世謙,李克墩,柳洵,尹孝孫等罷職。洪貴達,趙益貞,許琛,安琛等左遷。隨其罪之輕重。俱已處決。謹將事由。告于宗廟社稷。顧余寡昧。翦除姦黨。戰懼之念旣深。而喜幸之心益切。肆於今七月二十七日昧爽以前。強竊盜及關係綱常外。已決正未決正。咸宥除之。敢以宥旨前事相告語者。以其罪罪之。於戲。人臣無將。旣伏不道之罪。雷雨作解。宜霈維新之恩。故玆敎示。想宜知悉。左議政韓致亨等進賀箋。略曰。豈意逆儔敢肆反側。假託妖妄。用售不軌之心。傳播文史。自速莫大之罪。大小共憤。臣民咸讎。覆載難容。豈天誅之可逭。雷霆旣震。致陰慝之旋消云。是日晝晦。雨下如注。大風從東南起。拔木飛瓦。城中人庶。莫不顚仆股慄。子光意滿氣得。揚揚而歸家。自是威行中外。朝廷視如毒蛇。莫敢忤其意。儒林氣喪。重足累息。學舍蕭然。數月之間。無有讀誦聲。
附畢齋弔義帝文
丁丑十月日。余自密城道京山。宿踏溪驛。夢有神人。被七章之服。頎然而來。自言楚懷王心。爲西楚霸王項籍所弑。沈之郴江。因忽不見。余覺之愕然曰。懷王。南楚之人也。余則東夷之人也。地之相去。不啻萬有餘里。世之先後。亦千有餘載。來感于夢寐。玆何祥也。且考之史。無投江之語。豈羽使人密擊。而投其尸于水歟。是未可知也。遂爲文以弔之曰。
惟天賦物則以予人兮。孰不知其遵四大與五常。匪華豐而夷嗇兮。曷古有而今亡。故吾夷人又後千祀兮。恭弔楚之懷王。昔祖龍之弄牙角兮。四海之波殷爲衁。雖鱣鮪鰌鯢曷自保兮。思網漏而營營。時六國之遺祚兮。沈淪播越僅嫓夫編氓。梁也南國之將種兮。踵魚狐而起事。求得王以從民望兮。存態繹於不祀。握乾符而面陽兮。天下固無尊於芊氏。遣長者而入關兮。亦有足覩其仁義。羊狠狼貪擅夷冠軍兮。胡不收以膏諸斧。嗚呼勢有大不然者。吾於王而益懼。爲醢腊於反噬兮。果天運之蹠盭。郴之山磝以觸天兮。景晻曖而向晏。郴之水流以日夜兮。波淫溢而不返。天長地久恨其曷旣兮。魂至今猶飄蕩。余之心貫于金石兮。王忽臨于夢想。循紫陽之老筆兮。思螴蜳以欽欽。擧雲罍以酹地兮。冀英靈之來歆。
濯纓贊其文曰。以寓忠憤。
子光逐句釋之曰。祖龍。秦始皇也。以比於世廟。其曰。求得王以從民望者。王。楚懷王孫心也。初項梁欲誅秦。求孫心以爲義帝。宗直以義帝比魯山。以羊狠狼貪指世祖。以擅夷冠軍。指誅金宗瑞。其曰。胡不收云云。指魯山胡不收世祖也。其曰。爲醢腊云云。謂魯山不收世廟。友爲醢腊也。其曰。循紫陽云云。宗直以朱子自處。作賦以擬綱目之筆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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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友爲醢腊也->반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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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漢集卷之二十五 / 跋尾 詔制考 / 署理國務勑 正德
准爾署理本國大小庶務。以國王體統行事。益敦孝睦。以繫羣望。朕將有後命。
右武宗皇帝勑書。正德元年。恭僖王入承大統。請命于皇朝。明年。陪臣盧公弼。歸自京師。武宗降勑以諭之。先是。廢主燕山君。暴虐無道。昭惠王太妃韓氏薨。不服三年。黜先聖孔子以下廟主。以太學爲游宴所。發金宗直,南孝溫墓。戮其屍。殺名卿大夫士。不可勝數。革弘文館,司諫院。以絶言路。知中樞府事朴元宗等。以慈順王太妃尹氏命廢之。乃立恭僖王。於是追復宗直等官。奉先聖孔子以下廟主。還于太學。宗直字季溫。以經術。事康靖王。爲吏曹參判。無所建明。宏弼作詩譏切之。宗直不悅。自是宏弼。貳於宗直。然宗直深於文章。康靖王作環翠亭。命宗直而爲之記。刻置亭壁。弘治五年。宗直卒。謚曰文簡。臣以謂金文簡公戮及骸骨。而孔子以下廟主。見黜於學。逮復官爵。而廟主得還於學。是文簡公與先聖。同其屈伸也。或以公弔義帝文爲可疑。然公登第。在惠莊時。未嘗立上王之朝。則與六臣者亦異矣。豈比上王於義帝邪。
강한집 제25권 / 발미(跋尾) 조제고(詔制考) / 국무를 서리하게 한 칙서 정덕〔署理國務勅 正德〕
“그대에게 본국의 크고 작은 서무(庶務)를 서리(署理)하도록 허락하노니, 국왕의 체통(軆統)으로 행사하되, 더욱 효도와 화목을 돈독히 하여 백성들의 신망에 부응하라. 짐이 뒤에 다시 명을 내리겠노라.”
위는 무종황제(武宗皇帝)의 칙서(勅書)입니다. 정덕(正德) 원년(元年)에 공희왕(恭僖王 중종)이 입승대통(入承大統)하여 황조(皇朝)에 고명을 청하였습니다. 이듬해에 배신(陪臣) 노공필(盧公弼)이 경사(京師)에서 돌아올 때, 그 편에 무종이 칙서를 내려 효유하였습니다.
이에 앞서 폐주(廢主) 연산군(燕山君)이 포학무도하여 소혜왕태비(昭惠王太妃) 한씨(韓氏)가 훙(薨)하였을 때에는 삼년복을 입지 않았고, 선성(先聖) 공자(孔子) 이하의 묘주를 퇴출하고 태학(太學)을 잔치하며 노는 장소로 만들었으며, 김종직(金宗直)ㆍ남효온(南孝溫)의 묘를 파내어 그 시신을 목베고, 훌륭한 경ㆍ대부ㆍ사(卿大夫士)를 이루 다 셀 수 없이 죽였고, 홍문관(弘文館)ㆍ사간원(司諫院)을 혁파하여 언로를 막았습니다. 그러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박원종(朴元宗) 등이 자순왕태비(慈順王太妃) 윤씨(尹氏)의 명으로 연산군을 폐위하고 공희왕(恭僖王)을 세웠습니다. 이에 김종직 등의 관직을 다시 회복시켜 주고 선성(先聖) 공자 이하의 묘주를 받들어 태학에 돌려놓았습니다.
김종직의 자는 계온(季溫)입니다. 경술(經術)로 강정왕(康靖王)을 섬기었습니다. 그런데 이조 참판이 되어 건명(建明)하는 바가 없자 김굉필이 시를 지어 통렬하게 비판하니, 김종직은 좋아하지 않았고, 이로부터 김굉필은 김종직과 틈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김종직은 문장에 조예가 깊었습니다. 강정왕은 환취정(環翠亭)을 세우고 김종직에게 기문을 지으라고 명하여 그 기문을 정자의 벽에 새겨 두었습니다. 홍치(弘治) 5년에 김종직이 세상을 뜨니 시호는 문간(文簡)입니다.
신이 생각건대 김 문간공(金文簡公)이 부관참시를 당하고 공자(孔子) 이하의 묘주들이 태학에서 퇴출되었다가 김종직의 관작이 회복되고 묘주가 태학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니 이는 문간공이 선성과 굴신(屈伸)을 함께 한 것입니다. 어떤 이는 공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의심을 살 만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공이 과거에 급제한 것은 혜장왕(惠莊王 세조) 때여서 일찍이 상왕(上王 단종)의 조정에는 선 적이 없으니, 여섯 명의 신하들과는 경우가 또한 다릅니다. 그러니 어찌 상왕을 의제에 비유하였겠습니까?
[주-D001] 서리(署理) : 결원(缺員)이 생겼을 때 직무를 대리하는 것, 또는 대리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주-D002] 입승대통(入承大統) : 임금에게 아들이 없을 때 가까운 왕족 가운데 한 사람이 후사가 돼 임금의 대를 잇는 것을 말한다.[주-D003] 노공필(盧公弼) : 1445~1516. 본관은 교하(交河), 자는 희량(希亮), 호는 국일재(菊逸齋), 영의정 사신(思愼)의 아들이다. 1466년에 문과에 급제, 병조ㆍ이조ㆍ예조의 참의(參議)를 역임한 후 도승지(都承旨)ㆍ대사헌으로 승진했고, 이어 6조(曹)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고, 참찬(參賛)ㆍ찬성(贊成)에 올랐다. 갑자사화(甲子士禍) 때는 무장(茂長)으로 장배(杖配)되었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우찬성(右贊成)에 영경 연사(領經筵事)로 특진하였다. 이듬해 중종의 승습(承襲)을 청하러 명나라에 간 사절이 승인을 못 받고 있을 때 재차 사절로 가서 명제(明帝)의 승인을 얻고 귀국,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다.[주-D004] 소혜왕태비(昭惠王太妃) 한씨(韓氏) : 성종(成宗)의 어머니이자 연산군의 조모이다. 영의정 한확(韓確)의 딸로 태어나, 수양대군(首陽大君)의 맏며느리가 되었고, 수양대군이 조선의 7대 왕인 세조로 즉위하자 세자빈에 간택되어 수빈(粹嬪)에 책봉되었으나, 남편이 갑자기 죽은 뒤 세자빈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시동생인 예종이 즉위 후 13개월 만에 죽고 둘째 아들이 조선의 9대 임금인 성종(成宗)으로 즉위하자 다시 궁에 들어가 대비로 생활하였다. 성종이 즉위한 후 세자의 신분으로 죽은 아버지를 덕종(德宗)으로 추존하자 왕후에 책봉되어 소혜왕후(昭惠王后)가 되었고, 이어 인수대비(仁粹大妃)에 책봉되었다. 며느리이자 연산군의 생모가 되는 윤씨가 왕비 시절 성종의 얼굴을 할퀴는 사건으로 내쫓기고 사사되는 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고 연산군의 왕위 계승에도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연산군과는 갈등을 빚었다고 알려져 있다.[주-D005] 소혜왕태비(昭惠王太妃) …… 않았고 : 인수대비가 죽자 연산군은 할머니의 제사를 왕이나 왕비의 격식이 아닌 그보다 한 단계 아래인 왕세자빈 격식이 합당하다고 조정 대신들에게 하문하였다. 그 이유는 덕종(의경세자:인수대왕대비의 남편이자 연산군의 할아버지)의 장례가 왕세자의 장례로 치루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의정 유순 등이 “덕종대왕의 상례로 치루면 주상 전하(연산군)의 본명(本命)을 범하게 된다.”는 이유로 반대하였고, 연산군은 덕종보다는 조금 높게 하고 예종비 안순왕후보다는 조금 낮게 하라는 타협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 또한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히자 결국 연산군은 인수대비의 장례를 안순왕후와 같은 상제에 의한 왕후의 격식으로 치루되, 상제를 27일로 단축하게 하였다. 《燕山君日記 10年 4月 27日》[주-D006] 선성(先聖) …… 만들었으며 : 연산군은 성균관이 궁궐 후원에 접하여 있어 궁내에서 유연(遊宴)하는 것을 유생들이 본다는 이유로 금표(禁標)를 세워 후원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올라가는 것을 금하였다. 문묘가 금표(禁標) 안에 들었으므로, 선성(先聖)의 위판(位板)을 철거하여 태평관(太平館)으로 옮겼다가 다시 의정부(議政府)와 종학(宗學)ㆍ장악원ㆍ서학(西學) 등지로 옮겼다. 《燕山君日記 10年 7月 10日, 11年 6月 7日, 11年 1月 25日》[주-D007] 김종직(金宗直) …… 죽였고 : 1498년(연산군4) 김일손(金馹孫) 등 신진 사류가 유자광(柳子光) 중심의 훈구파(勳舊派)에게 화를 입은 무오사화(戊午士禍)를 말한다. 1498년 《성종실록》을 편찬하자, 실록청(實錄廳) 당상관(堂上官)이 된 이극돈은, 김일손이 사초에 삽입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일을 비방한 것이라고 하여, 선비를 싫어하는 연산군에게 고하였다. 연산군은 김일손 등을 심문하고 이와 같은 죄악은 김종직이 선동한 것이라 하여, 이미 죽은 김종직의 관을 파헤쳐 그 시체의 목을 베었다. 사림파 김일손ㆍ권오복(權五福)ㆍ이목(李穆)ㆍ허반(許盤)ㆍ권경유(權景裕) 등은 선왕(先王)을 무록(誣錄)한 죄를 씌워 죽이고, 정여창(鄭汝昌)ㆍ강겸(姜謙)ㆍ이수공(李守恭)ㆍ정승조(鄭承祖)ㆍ홍한(洪澣)ㆍ정희랑(鄭希良) 등은 난을 고하지 않은 죄로, 김굉필(金宏弼)ㆍ이종준(李宗準)ㆍ이주(李胄)ㆍ박한주(朴漢柱)ㆍ임희재(任熙載)ㆍ강백진(康伯珍) 등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붕당을 이루어 〈조의제문〉의 삽입을 방조한 죄로 귀양 보내는 등 많은 사림파 인사들이 희생되었다.[주-D008] 홍문관(弘文館) …… 막았습니다 : 연산군은 즉위 초부터 생모인 폐비 윤씨의 복권과 추숭에 대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성균관과 양사에 포진한 사림파 인사들은 사후 백 년간 언급하지 말라는 성종의 유명을 내세워 연산군의 생모 추숭 시도를 반대하였다. 이 때문에 신료들과 연산군과의 사이에 감정적 갈등이 일어났는데 특히 연산군은 사림파 관료들의 직간(直諫)을 귀찮고 번거롭게 여겨 경연과 사헌부를 축소하는 한편 사간원ㆍ홍문관ㆍ예문관 등을 없애버리고, 정언 등의 언관직도 혁파 또는 감원을 했다.[주-D009] 박원종(朴元宗) : 1467~1510. 본관은 순천(順天)이고 자는 백윤(伯胤)이며, 시호는 무열(武烈)이다. 1486년 무과에 급제했다. 1492년 성종의 특지(特旨)로 동부승지에 발탁되었고, 연산군 때 평성군(平城君)에 봉해지고 도총부 도총관(都摠管)을 겸직했다. 1506년 연산군을 폐하고 중종을 옹립하는 반정(反正)을 주동, 정국 공신(靖國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1508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주-D010] 자순왕태비(慈順王太妃) 윤씨(尹氏) : 1462~1530. 성종의 계비이자 중종의 생모인 정현왕후(貞顯王后)를 말한다. 본관은 파평(坡平), 우의정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 윤호(尹濠)의 딸이다. 1473년(성종4) 대궐에 들어가 처음 숙의(淑儀)에 봉하여졌고, 1479년 6월 연산군의 생모인 왕비 윤씨가 폐위되자 이듬해 11월에 왕비로 봉하여졌다.[주-D011]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 세웠습니다 : 연산군을 몰아내고 진성대군(晉城大君) 이역(李懌)을 왕으로 추대한 이른바 중종반정(中宗反正)을 의미한다. 이조참판 성희안과 지중추부사 박원종 등이 주도하였고 정변이 성공하자 진성대군의 친어머니인 윤대비(尹大妃)를 경복궁에서 만나 허락을 얻어 연산군을 폐하고 강화 교동에 안치하는 동시에, 이튿날인 9월 2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진성대군을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주-D012] 김종직 …… 주고 : 중종 2년에 김종직의 복작(復爵)과 추증(追贈)이 이루어진 것을 말한다.[주-D013] 건명(建明) : 정사(政事)를 밝게 일으켜 세우거나 의견을 제시하여 명확하게 밝히는 것을 말한다.[주-D014] 김종직은 …… 생겼습니다 : 김굉필 등 제자들은 스승인 김종직이 훈구파에 맞서 조정을 바로잡아 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오히려 이조 참판(吏曹參判)라는 중직에 임용되고서도 건의 하나 올리지 않는 것에 실망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제자인 김굉필은 한 편의 시를 지어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김종직의 현실 타협적인 처세를 완곡하게 비판했다. 시는 다음과 같다. “도는 겨울에 갖옷을 입고 여름에 시원한 것을 마시는 데 있거늘 비를 걷고 홍수를 멈추게 함을 어찌 다 잘할 수 있으리오? 난초도 세속에 심으면 결국은 변질되니 뉘라서 소는 밭을 갈고 말은 타고 다니는 짐승임을 믿어주리까?[道在冬裘夏飮氷, 霽行潦止豈全能? 蘭如從俗終當變, 誰信牛耕馬可乘?]” 그러자 김종직이 이에 화답하기를 “분에 넘치게 관직이 경대부에 이르렀으나 임금 바로잡고 세속 구제함을 내 어찌 능히 하랴? 이로써 후배로 하여금 오졸함을 비웃게 했으니 구구한 권세의 벼슬길에는 나설 것이 못되는구나.[分外官聯到伐氷, 匡君救俗我豈能? 從敎後輩嘲迂拙, 勢利區區不足乘.]”라고 하였다. 이때의 일로 김굉필은 김종직과 틈이 갈라져 끝내 사제 간의 정을 회복하지 못했다고 알려져 있다. 《秋江集 卷7 雜著 師友名行錄》[주-D015] 강정왕은 …… 두었습니다 : 성종이 창경궁(昌慶宮)의 통명전(通明殿) 북쪽에 정자 하나를 꾸며 친히 환취정(環翠亭)이라 이름짓고, 좌부승지(左副承旨) 김종직(金宗直)을 시켜 기문(記文)을 지어 바치게 하였다. 《成宗實錄 15年 7月 5日》 김종직이 지은 〈환취정기〉는 《점필재집》 문집 제2권에 있다.[주-D016] 조의제문(弔義帝文) : 항우(項羽)에게 죽은 초나라 회왕(懷王), 즉 의제(義帝)를 조상하는 내용의 글로, 김종직이 1457년(세조 3)에 밀성(密城)에서 경산(京山)으로 가는 길에 답계역(踏溪驛)에서 자다가 의제(초나라 懷王)를 만나는 꿈을 꾸고 깨달은 바가 있어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金馹孫)이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사초(史草)에 기록하고는 “김종직이 조의제문을 지어 충분을 은연중 나타냈다.”라고 하고, 또 사관 권경유(權京裕)ㆍ권오복(權五福)이 김종직의 전을 지어 사초에 싣고 “김종직이 〈조의제문〉을 지어 충의(忠義)를 분발하니 보는 사람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라고 하였는데, 1498년(연산군4) 《성종실록》이 편찬될 때 당상관 이극돈(李克墩)이 김일손이 기초한 사초에 삽입된 김종직의 〈조의제문〉이라는 글이 세조의 찬위를 헐뜯은 것이라고 하면서 문제가 촉발되었다. 결국 이 글은 “김종직이 세조를 헐뜯은 것은 대역무도(大逆無道)”라는 여론을 이끌어내어 김일손 등 많은 유신들을 추국하여 죽이고 김종직이 부관참시되는 등 무오사화(戊午士禍)로 비화되었다.[주-D017] 여섯 명의 신하들 : 1456년(세조2)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죽은 6명의 신하, 즉 박팽년(朴彭年)ㆍ성삼문(成三問)ㆍ이개(李塏)ㆍ하위지(河緯地)ㆍ유성원(柳誠源)ㆍ유응부(兪應孚) 등 이른바 사육신(死六臣)을 말한다.
ⓒ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 박재금 이은영 홍학희 (공역) | 2018
[주-D016] 조의제문(弔義帝文) : 항우(項羽)에게 죽은 초나라 회왕(懷王), 즉 의제(義帝)를 조상하는 내용의 글로, 김종직이 1457년(세조 3)에 밀성(密城)에서 경산(京山)으로 가는 길에 답계역(踏溪驛)에서 자다가 의제(초나라 懷王)를 만나는 꿈을 꾸고 깨달은 바가 있어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金馹孫)이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사초(史草)에 기록하고는 “김종직이 조의제문을 지어 충분을 은연중 나타냈다.”라고 하고, 또 사관 권경유(權京裕)ㆍ권오복(權五福)이 김종직의 전을 지어 사초에 싣고 “김종직이 〈조의제문〉을 지어 충의(忠義)를 분발하니 보는 사람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라고 하였는데, 1498년(연산군4) 《성종실록》이 편찬될 때 당상관 이극돈(李克墩)이 김일손이 기초한 사초에 삽입된 김종직의 〈조의제문〉이라는 글이 세조의 찬위를 헐뜯은 것이라고 하면서 문제가 촉발되었다. 결국 이 글은 “김종직이 세조를 헐뜯은 것은 대역무도(大逆無道)”라는 여론을 이끌어내어 김일손 등 많은 유신들을 추국하여 죽이고 김종직이 부관참시되는 등 무오사화(戊午士禍)로 비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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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28권 / 경상도(慶尙道) / 성주목(星州牧)
【역원】 답계역(踏溪驛) 주 북쪽 10리에 있다. 안언역(安偃驛) 주 남쪽 28리에 있다. 무계역(茂溪驛) 무계진(茂溪津) 동쪽에 있다. 설화역(舌火驛) 화원현(花園縣) 서쪽 5리에 있다. 고평역(高平驛) 팔거현(八莒縣) 서쪽 5리에 있다. 인화원(仁化院) 주 동쪽 8리에 있다. 사원(蛇院) 주 남쪽 34리에 있다. 동안원(東安院) 동안진(東安津) 언덕에 있다. 공배원(公排院) 주 동쪽 25리에 있다. 이동원(李同院) 주 남쪽 42리에 있다. 약보원(若寶院) 주 북쪽 2리에 있다. 광대원(廣大院) 주 서쪽 20리에 있다. 인원(引院) 화원현(花園縣) 남쪽 20리에 있다. 대야원(大也院) 주 북쪽 29리에 있다. 봉서원(鳳棲院) 팔거현 북쪽 15리에 있다. 숭유원(崇儒院) 팔거현 북쪽에 있다. 예전 이름은 독유(獨儒)인데, 관찰사 손순효(孫舜孝)가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원(院)에 다락이 있다. 다른 이름은 척이(斥異)다. 유원(柳院) 팔거현 남쪽 5리에 있다. 작원(鵲院) 팔거현 남쪽 10리에 있다. 흥왕원(興王院) 화원현 서쪽 1리에 있다. 사읍제원(沙邑梯院) 가리현(加利縣) 동쪽에 있다. 다품원(多品院) 주 북쪽 11리에 있다. 월항원(月恒院) 주 북쪽 18리에 있다. 퇴계원(退界院) 주 서쪽 25리에 있다. 관음원(觀音院) 주 남쪽 22리에 있다. 통신원(通信院) 주 동쪽 30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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述酒
【作者】陶渊明 【朝代】魏晋
重离照南陆,鸣鸟声相闻;秋草虽未黄,融风久已分。素砾皛修渚,南嶽无馀云。豫章抗高门,重华固灵坟。流泪抱中叹,倾耳听司晨。神州献嘉粟,西灵为我驯。诸梁董师旅,芊胜丧其身。山阳归下国,成名犹不勤。卜生善斯牧,安乐不为君。平王去旧京,峡中纳遗薰。双陵甫云育,三趾显奇文。王子爱清吹,日中翔河汾。朱公练九齿,闲居离世纷。峨峨西岭内,偃息常所亲。天容自永固,彭殇非等伦。
译文 注释
重黎之光普照南国,人才众若风鸣相闻。秋草虽然尚未枯黄,春风早已消失散尽。白砾皎皎长洲之中,南岳衡山已无祥云。豫章与帝分庭抗礼,虞舜已死只剩灵坟。心中悲怨叹息流泪,倾听鸡鸣盼望清晨。国内有人献上嘉禾,四灵祥瑞为我所驯。叶公帅军讨伐白公,白公兵败已丧其身。献帝被废犹得寿终,恭帝虽死不得存间。卜式善牧恶者辄去,安乐失职不为其君。平王东迁离开旧都,中原皆被匈奴入侵。司马昌明已有后嗣,三足乌显成宋代晋。王子吹笙白日仙去,正午遨翔汾河之滨。陶朱修炼长生之术,隐居避世离开纠纷。高高西山夷叔所居,安然仰卧为我所钦。天人之容永世长存,彭祖长寿难与比伦。
赏析
述酒(1)[说明]这首诗约作于宋武帝永初二年(421),陶渊明五十七岁。晋元熙二年(420)六月,刘裕废晋恭帝司马德文为零陵王,自己称帝,改国号为宋,改年号为永初。次年九月,以毒酒授张袆,使鸩王。袆自饮而卒。继又令士兵越墙进毒酒,王不肯饮,士兵以被褥闷杀之。故陶渊明此诗以“述酒”为题。诗中运用隐晦曲折的语言反映此事,表达了诗人对篡权丑行的极大愤慨,同时也表现出诗人不肯与当权者同流合污的抗争精神。重离照南陆,鸣鸟声相闻(2)。秋草虽未黄,融风久已分(3)。素砾皛修渚,南岳无余云(4)。豫章抗高门,重华固灵坟(5)。流泪抱中叹,倾耳... 诗词名句网>>
作者介绍
陶渊明(约365年—427年),字元亮,(又一说名潜,字渊明)号五柳先生,私谥“靖节”,东晋末期南朝宋初期诗人、文学家、辞赋家、散文家。汉族,东晋浔阳柴桑人(今江西九江)。曾做过几年小官,后因厌烦官场辞官回家,从此隐居,田园生活是陶渊明诗的主要题材,相关作品有《饮酒》《归园田居》《桃花源记》《五柳先生传》《归去来兮辞》等。 百科详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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佔畢齋集卷之十一 / 詩 / 和陶淵明述酒 幷序
余少讀述酒。殊不省其義。及見和陶詩湯東澗註疏。然後知爲零陵之哀詩也。嗚呼。非湯公。劉裕簒弑之罪。淵明忠憤之志。幾乎隱矣。其好爲瘱詞者。其意以爲裕方猖獗。于時不能以容吾力。吾但潔其身耳。不可顯之於言語。自招赤族之禍也。今余則不然。生於千載之下。何畏於裕哉。故畢露裕㐫逆。以附湯公註䟽之末。後世亂臣賊子。覽余詩而知惧。則竊比春秋之一筆云。
鼎鐺猶有耳。人胡不自聞。君臣殊尊卑。乾坤位攸分。奸名斯不軌。赤族無來雲。當時馬南渡。神州餘丘墳。天心尙未厭。有若日再晨。處仲首作孼。王敦 狼子非人馴。蘇峻 蚩蚩遺臭夫。斅兒戕厥身。桓溫父子 四梟者何功。天報諒殷懃。婉婉安與恭。乃是劉氏君。蒼天謂可欺。高挹堯舜薰。受禪卒反賊。史氏巧其文。諉以四靈應。宗岱且祠汾。僞命雖能造。世亂當紛紛。好還理則然。劭也蔑天親。述酒多隱辭。彭澤無比倫。
점필재집 시집 제11권 / [시(詩)] / 도연명의 술주시에 화답하다[和陶淵明述酒] 병서(幷序)
내가 젊어서 도연명의 술주시(述酒詩)를 읽고 자못 그 뜻을 알지 못했다가, 뒤에 화도시(和陶詩)에 대한 탕동간(湯東澗 동간은 송 나라 탕한(湯漢)의 호임)의 주소(註疎)를 본 다음에야 영릉(零陵)을 위한 애시(哀詩)임을 알게 되었다. 아, 탕공이 아니면 유유(劉裕)의 찬시(簒弑)한 죄와 연명(淵明)의 충분(忠憤) 어린 뜻이 거의 숨겨질 뻔하였다. 그 은어(隱語)를 쓰기 좋아한 것은 바로 그의 생각에 유유가 이 때에 한창 날뛰는지라 나의 힘이 용납될 수가 없는 형편이니, 나는 다만 몸이나 깨끗하게 할 뿐이요, 언어(言語) 가운데 그런 일을 드러내서 멸족(滅族)의 화를 자초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던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나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천 년 뒤에 태어났는데 유유에게 무엇이 두렵겠는가. 그러므로 유유의 흉역한 행위를 다 드러내서 탕공의 주소 끝에 부치노니, 후세의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나의 시를 보고 두려워 할 줄을 알게 된다면 이 또한 삼가 《춘추(春秋)》의 일필(一筆)에 견주는 바이다.
솥에도 오히려 귀가 있는데 / 鼎鐺猶有耳
사람이 어찌 듣지를 못하리오 / 人胡不自聞
임금과 신하는 존비가 달라서 / 君臣殊尊卑
하늘과 땅의 자리가 나누어졌네 / 乾坤位攸分
간악한 이름은 반역을 한 때문이라 / 奸名斯不軌
멸족되어 후손이 끊어져버리고 / 赤族無來雲
당시에 사마씨는 남으로 건너갔으니 / 當時馬南渡
중원에는 무덤만 남았을 뿐이었네 / 神州餘丘墳
천심은 아직 떠나지 않았기에 / 天心尙未厭
마치 새벽이 두 번 온 듯했는데 / 有若日再晨
처중이 맨처음 난을 일으키었고 / 處仲首作孼
왕돈(王敦)이다.
이리 새끼는 길들일 수 없었으며 / 狼子非人馴
소준(蘇峻)이다.
악명을 남긴 어리석은 사나이는 / 蚩蚩遺臭夫
자식에게 그 몸을 죽게 하였네 / 斅兒戕厥身
환온(桓溫)의 부자(父子)이다.
네 올빼미가 무슨 공이 있으랴 / 四梟者何功
하늘의 보답을 참으로 자상했도다 / 天報諒殷懃
온화하였던 안제와 공제는 / 婉婉安與恭
바로 이 유씨들의 임금이었는데 / 乃是劉氏君
푸른 하늘을 속을 수 있다고 여겨 / 蒼天謂可欺
높이 요순의 훈풍을 끌어댔으나 / 高把堯舜薰
선위를 받는게 끝내는 역적이였네 / 受禪卒反賊
사씨는 글을 교묘하게 꾸미어 / 史氏巧其文
사령이 응했다고 핑계를 대서 / 諉以四靈應
태산에 봉선하고 분음에 제사하니 / 宗岱且祠汾
거짓 천명을 만들 수는 있으나 / 僞命雖能造
세상의 혼란은 의당 분분하였지 / 世亂當紛紛
천리란 본디 순환하길 좋아하기에 / 好還理則然
소가 마침내 천친을 멸하였도다 / 劭也蔑天親
술주시에는 은어도 하많으니 / 述酒多隱辭
도 팽택에겐 비할 자가 없겠구려 / 彭澤無比倫
[주-D001] 영릉(零陵) : 진 공제(晉恭帝)를 말함. 유유(劉裕: 남조 송 태조〈南朝 宋太祖〉임)가 원희(元熙: 공제의 연호) 원년에 공제를 폐하여 영릉왕으로 삼았다가 그 다음해에는 마침내 공제를 시해하고 제위(帝位)를 찬탈하여 국호를 송(宋)으로 했었다.[주-D002] 당시에……건너갔으니 : 삼국(三國) 시대 위(魏)의 명장인 사마의(司馬懿)의 손자 사마염(司馬炎)이 끝내 위 나라를 찬탈하여 서진(西晉)을 세웠으나, 사대(四代) 째인 민제(愍帝)에 이르러 한(漢)의 유요(劉曜)의 침략을 받아 서진은 완전히 멸망되었고, 당시 낭야왕(瑯琊王) 사마예(司馬睿)가 강남(江南)의 건강(建康)으로 쫓겨가서 즉위하여 그가 바로 동진 원제(東晉元帝)가 되었던 사실을 이른 말이다.[주-D003] 처중이……난을 일으키었고 : 처중은 왕돈(王敦)의 자인데, 그는 진 원제(晉元帝)를 도와 공을 세웠으나, 뒤에 공을 믿고 제멋대로 권력을 부리면서 마침내 난을 일으켰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병사했다. 《晉書 卷九十八》[주-D004] 이리 새끼는……없었으며 : 소준(蘇峻)을 가리킴. 그는 진 원제를 도와 공을 세우고 관군장군(冠軍將軍)이 되었는데, 성제(成帝) 때에 반역하여 관군(官軍)을 차례로 물리치고 임금을 석두성(石頭城)에 내쫓기까지 하였으나, 끝내 도간(陶侃) 등의 군대에게 패하여 죽었다. 《晉書 卷一百》[주-D005] 자식에게……죽게 하였네 : 악명을 남겼다는 것은 곧 진(晉) 나라 환온(桓溫)이 위권(威權)이 극에 달하자, 반역 할 생각을 품고서 일찍이 말하기를 “사나이가 백세에 좋은 명성을 전하지 못할 바엔 또한 악명이라도 만 년에 남겨야 한다.”고 한 데서 온 말인데, 그는 끝내 은밀히 찬탈을 꾀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병사하였다. 그의 아들 환현(桓玄)은 또한 막대한 권력으로 안제(安帝)에게 선위(禪位)를 받고 제호(帝號)를 참칭(僭稱) 했다가 유유(劉裕)에게 패하여 죽었다. 《晉書 卷九十八ㆍ九》[주-D006] 네 올빼미 : 올빼미는 어미새를 잡아먹는다 하여 악인(惡人)을 비유한 말이고, 또는 걸출한 위인을 비유하기도 하는데, 여기서의 넷이란 바로 위에서 말한 왕돈(王敦)ㆍ소준(蘇峻)ㆍ환온(桓溫)ㆍ환현(桓玄)을 가리킨다.[주-D007] 사령 : 인(麟)ㆍ봉(鳳)ㆍ귀(龜)ㆍ용(龍)을 말하는데, 사령이 나타나는 것은 곧 제왕(帝王)이 출현할 상서라고 한다.[주-D008] 분음에 제사하니 : 한 무제(漢武帝) 때 분음에서 보정(寶鼎)을 얻고 나서는 감천궁(甘泉宮)에 분음사(汾陰祠)를 세워 제사를 지낸 데서 온 말인데, 전하여 천자의 의식을 뜻한다.[주-D009] 소가 마침내……멸하였도다 : 소는 남조 송 문제(南朝宋文帝)의 장자(長子)로 일찍이 황태자에 책봉된 유소(劉劭)를 가리키는데, 뒤에 부왕(父王)을 무고(巫蠱)한 사실이 발각되어 폐태자(廢太子)가 되어서는 마침내 시역(弑逆)을 자행하여 스스로 즉위하였으나, 의병(義兵)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사가(史家)에는 원흉(元凶)으로 지목되었다. 《宋書 卷九十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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佔畢齋集戊午事蹟 / 事蹟 / 戊午史禍事蹟
弘治十一年戊午 燕山四年 七月。史禍起。柳子光啓燕山。論以大逆。卽令剖棺。家被籍沒。貞夫人文氏。定屬雲峯縣。夫人卽斷髮服喪。其在謫中。常歎曰。家翁平生志節。天日照臨。死得謬禍。是亦關於世運。但當順受而已。更無怨尤之辭。在謫九年。節操愈勵。一不啓齒。人皆敬服。 子嵩年。時年十三歲。陜川郡安置。以年未滿。免刑禍。是月十七日。傳旨。金宗直。草茅賤士。世祖朝。登第。成宗朝。擢置經筵。久在侍從之地。以至刑曹判書。寵恩傾朝。及其病退。成宗猶使所在官。特賜米穀。以終其年。今其弟子金馹孫所修史草內。以不道之言。誣錄先王朝事。又載其師宗直吊義帝文。其辭曰。
丁丑十月日。余自密城道京山。宿踏溪驛。夢有神人。被七章之服。頎然而來。自言楚懷王孫心。爲西楚伯王項籍所弑。沉之郴江。因忽不見。余覺之。愕然曰。懷王。南楚之人也。余則東夷之人也。地之相去。不翅萬有餘里。世之先後。亦千有餘載。來感于夢寐。玆何祥也。且考之史。無投江之語。豈羽使人密擊。而投其尸于水歟。是未可知也。遂爲文以吊之。惟天賦物則以予人兮。孰不知其遵四大與五常。匪華豊而夷嗇兮。曷古有而今亡。故吾夷人又後千祀兮。恭吊楚之懷王。昔祖龍之弄牙角兮。四海之波殷爲衁。雖鱣鮪鰍鯢曷自保兮。思網漏以營營。時六國之遺祚兮。沉淪播越僅媲夫編氓。梁也南國之將種兮。踵魚狐而起事。求得王而從民望兮。存熊繹於不祀。握乾符而面陽兮。天下固無尊於芊氏。遣長者以入關兮。亦有足覩其仁義。羊狠狼貪擅夷冠軍兮。胡不收以膏齊斧。嗚呼。勢有大不然者。吾於王而益惧。爲醢醋於反噬兮。果天運之蹠盭。郴之山磝以觸天兮。景晻曖而向晏。郴之水流以日夜兮。波淫泆而不返。天長地久恨其曷旣兮。魂至今猶飄蕩。余之心貫于金石兮。王忽臨乎夢想。循紫陽之老筆兮。思螴蜳以欽欽。擧雲罍以酹地兮。冀英靈之來歆云。
其曰祖龍。秦始皇也。宗直。以始皇比世廟。其曰求得王以從民望兮者。王。楚懷王孫心。初。項梁欲誅秦。求孫心以爲義帝。宗直。以義帝比魯山。其曰羊狠狼貪擅夷冠軍兮者。宗直。羊狠狼貪。指世廟。擅夷冠軍。指世廟誅金宗瑞。其曰胡不收以膏齊斧者。宗直。指魯山胡不收世廟云云。其曰爲醢醋而反噬兮者。宗直。謂魯山不收世廟。反爲世廟醢醋云云。其曰循紫陽之老筆兮。思螴蜳以欽欽者。宗直。以朱子自處。其心作此賦以擬綱目之筆。馹孫贊其文曰。以寓忠憤。念我世廟大王。當國家危疑之際。奸臣謀亂。禍機垂發。誅除逆徒。宗社危而復安。子孫相繼。以至于今。功業巍巍。德冠百王。不意宗直與其門徒。譏議聖德。至使馹孫誣書於史。豈一朝一夕之故。陰蓄不臣之心。而歷事三朝。予今思之。不覺慘懼。其議刑名以啓。七月二十七日。頒赦。敎曰。恭惟我世祖惠莊大王。以神武之姿。當國家危疑。群奸盤據之際。沉幾睿斷。戡定禍亂。天命人心。自有攸屬。聖德神功。卓冠百王。增光祖宗艱大之業。貽厥子孫燕翼之謨。繼繼承承。式至今休。不意奸臣金宗直。包藏禍心。陰結黨類。欲售兇謀。爲日久矣。假托項籍弑義帝之事。形諸文字。詆毁先王。滔天之惡。罪在不赦。論以大逆。剖棺斬屍。其徒金馹孫,權五福,權景𥙿。朋奸黨惡。同聲相濟。稱美其文。以爲忠憤所激。書諸史草。欲垂不朽。其罪與宗直同科。並令凌遅處斬。馹孫又與李穆,許磐,姜謙等。誣飾先王所無之事。傳相告語。筆之於史。李穆,許磐。並皆處靳。姜謙。决杖一百。籍沒家產。極邊爲孥。表沿沫,洪瀚,鄭汝昌,茂豊副正揔等。罪犯亂言。姜景敍,李守恭,鄭希良,鄭承祖等。知亂言而不告。並决杖一百。流三千里。李宗準,崔溥,李黿,李胄,金宏弼,朴漢柱,任煕載,康伯珍,李繼孟,姜渾。俱以宗直門徒。結爲朋黨。互相稱譽。或譏議國政。謗訕時事。煕載。决杖一百。李胄。决杖一百。極邊附處。宗準,崔溥,李黿,宏弼,漢柱,伯珍,繼孟,姜渾等。並决杖八十。遠方附處。而流人等。並定烽燧庭爐干之役。修史官等。見馹孫等史草。而不卽啓。魚世謙,李克墩,柳洵,尹孝孫等。罷職。洪貴達,趙益貞,許琮, 許琮。甲寅已卒。必是許琛。 安琛等。左遷。隨其罪之輕重。俱已處决。謹將事由。告于宗廟社稷。顧余寡昧。剪除姦黨。戰惧之念旣深。而喜幸之心益切。肆於今七月二十七日昧爽以前。強竊盜及關係綱常外已决正未决正。咸宥除之。敢以宥旨前事。相告語者。以其罪罪之。於戲。人
臣無將。旣伏不道之罪。雷雨作解。宜霈惟新之恩。故玆敎示。想宜知悉。云云。
弘治十七年甲子 燕山十年 九月。縉紳禍再起。加罪金宏弼,朴漢柱諸人。
正德二年丁卯。中宗大王二年 追雪被罪諸賢之寃。藝文館奉敎金欽祖,鄭忠梁,待敎李希曾,金瑛,檢閱權橃,李泳,鄭熊,尹仁鏡,尹止衡等。上䟽。大槩。戊午修史之官。徒以私嫌。不顧公議。陰囑大臣。使之挑怒。子光從而唱之。同議密啓。終致大禍。是則陰欲掩過。而卒不得掩。更使暴揚於當日。累及於後世。一以毀萬世史家之法。一以啓人主喜殺之心。罪當不原。而賞反及焉。臣等。不勝痛悒。比來。皆以戊午之禍爲戒。士氣摧絶。臣等。非以馹孫等爲惜。深恐史家之法。從此盡廢。而萬世之公論泯滅云云。傳曰。金宗直,金馹孫等辭連被罪者。果有曖昧。復其爵。其餘。並皆追贈。其時推官尹弼商,盧思愼,柳子光等賞賜之物及戊午史局事泄人。令日記廳考啓。是年。改葬于密陽大洞舊宅後山庚坐甲向之原。上特命廩其妻。搜訪其子孫錄用。子嵩年。連除集慶殿參奉,東部參奉。嵩年遭禍之餘。不喜名利。以母夫人命謝恩。未幾。棄官居鄕。事母盡其孝。鄕人及士林。至今稱道。參奉娶主簿孫筍茂之女。府尹永裕。其祖也。有子三人。曰綸。有文行。早世。曰維。娶參奉崔弼孫女。曰紐。娶持平李伸女。先生文集抄本廿餘卷。蕩爲煙燼。尙有亂稿。閣在樑上。家人以爲不祥之物。又擧而投之火。傍有人就烈焰中。鉤取一二編。纔免全燬。今存者。十未二三。甥康仲珍。篋而藏之。戊午後二十二年庚辰。謀諸邑宰。俾壽于梓。南衮作序文。
禮曹以先生所居之鄕。講道之處。置立祠宇。春秋仲月。官爲致祭事。報議政府。政府啓請。依允。金山景濂書院,密陽禮林書院,善山紫陽書院,咸陽栢淵書院,開寧德林書院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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佔畢齋集佔畢齋年譜 / 年譜
天順元年丁丑。世祖大王三年 先生二十七歲。先生不脫絰帶。寢苫枕木。䟽糲以食。侍奠之暇。自廬所。每朝夕。來省母夫人而返。雖隆寒暑雨。不懈也。吊義帝文曰。丁丑十月日。余自密城道京山。宿踏溪驛。此說恐誤。先生私淑於家。獨推圃隱先生。卓然自立於頹波。不爲習俗所移。而能從聖制。以致自盡之誠。則豈有居憂出入之理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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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 제4권 / 단종조 고사본말(端宗朝故事本末)
금성(錦城)의 옥사와 단종의 별세
정축년(1457) 가을에 금성대군 유(瑜)가 순흥 부사(順興府使) 이보흠(李甫欽)과 더불어 거사하기를 꾀하다가 얼마 안 되어 발각되었다. 종친과 재집(宰執)과 대간이 법으로 처치하기를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여러 번 청하니, 유(瑜)에게는 사사(賜死)를 명하고 한남군(漢南君) 어(𤥽)와 영풍군(永豐君) 전(瑔)과 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 등은 모두 극변에 안치하여 금고(禁錮)하였다. 《해동야언》
○ 처음에 유가 순흥에 이르러 매양 이보흠과 함께 만나기만 하면 강개하여 눈물을 흘렸다. 《해동야언》에 말하기를, 산호(珊瑚) 갓끈을 이보흠에게 주고 거사를 꾀하였다. 비밀리에 남쪽 인사들과 결탁하여 노산을 복위시킬 계획을 하는데, 하루는 유가 좌우를 물리치고 이보흠을 불러서 격문을 초하게 하고 격문이 한 구절만 전하는데,“천자를 끼고 제후에게 명령하니, 누가 감히 좇지 않으랴” 하였다. 장차 순흥의 군사와 남쪽의 모의에 참여한 자를 발하여 노산을 맞아서 계립령(鷄立嶺)을 넘어 순흥에 옮겨 모시고 영남을 호령하여 조령(鳥嶺)과 죽령(竹嶺)의 두 길을 막고서 복위할 계책을 세웠다. 순흥 관노 급창(及唱)으로 있는 자 가 벽장 속에 숨어서 엿듣고 금성의 시녀를 사귀어 그 격문을 훔쳐 가지고 서울로 달려 올라갔다.기천(基川)지금의 풍기 현감이 그 말을 듣고 말을 서너 번이나 갈아타고 빨리 쫓아가서 그 격문을 빼앗아 가지고 먼저 서울에 들어가서 고변하여 드디어 큰 공을 얻고, 유와 이보흠은 모두 잡혀 죽었다. 《순흥 야사(順興野史)》에는 이보흠이 사람을 띄워 서울에 달려가 고변을 하게 하고, 이보흠이 또 이어 말을 달려 올라가 고변하였는데,처음에는 자수한 것으로 면하였다가 필경은 격문을 초한 죄로 베임을 당하였다. 유가 안동(安東) 옥에 갇혀 있는데, 하루는 알몸으로 빠져나가서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금부도사와 부사가 놀라고 두려워서 종을 울리고 사람을 동원하여 수색하였다. 한참만에 유가 밖에서 들어오면서 담소하기를, “너희들이 수가 많으나, 만일 내가 도망한다면 추격하지 못할 것이다.그러나, 여러 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한 사람 죽는 것이 편하다.” 하였는데 한 사람이란 것은 자기를 가리킨 것이다. 의관을 정제하고 걸상에 걸터앉으니 금부도사가 말하기를, “전패(殿牌)에 절을 해야 한다.” 하고, 서쪽으로 향하여 절을 하게 하였다. 유가 말하기를, “우리 임금은 영월에 계시다.” 하고, 드디어 북으로 향하여 통곡 사배하고 죽음에 나가니, 여러 사람들이 불쌍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조정에서 유의 이름을 《선원록(璿源錄)》에서 삭제하였다. 뒤에 도로 복적을 명하였다. ○ 《병자록》 《논사록》
그때, 좌찬성 신숙주가 홀로 아뢰기를, “작년에 이 개의 무리가 노산을 복위시킨다는 명목으로 모의하였고, 지금 유가 또 노산과 영(瓔)을 꾀어서 변란을 일으키려고 하였으니, 노산은 편안히 두어서는 안됩니다.” 하였다. 세조가 이르기를, “의정부에서 반드시 다시 와서 청할 것이니,다시 의논하여 시행하자” 하였다. 조금 있다가 영의정 정인지ㆍ좌의정 정창손ㆍ이조 판서 한명회 등이 와서 신숙주와 함께 아뢰기를, “노산이 반역자의 주인이 되었으니, 편안히 두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세조가 이르기를, “노산을 이미 군으로 강봉하였으니, 폐하여 서인을 만드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실록》
○ 양녕대군 제(禔) 등이 소를 올려 아뢰기를, “전날 간흉의 변에 노산이 참여하여 종사에 득죄 하였고, 유가 군사를 들어 모반하여 장차 노산을 끼고 종사를 위태하게 하려 하였으니, 죄악이 차고 넘쳐 천지에 용납할 수 없으니, 대의로 결단하여 전형(典刑)을 바르게 하소서.” 하였다. 《실록》
○ 종친부ㆍ의정부ㆍ충훈부ㆍ육조가 아뢰기를, “노산군이 종사에 득죄하였으므로, 근일에 어지러운 말을 하는 자는 모두 노산으로 구실을 삼고 있다. 지금 만일 법으로 처단하지 않으면, 부귀를 도모하고자 하는 자가 빙자하여 난을 꾸밀 것이니, 용서할 수 없고, 유는 천하의 대역죄인이니, 개인적인 은혜로 법을 굽혀 용서할 수 없다.” 하였다.임영대군(臨瀛大君) 요(璆)가 정창손의 옆으로 가서 말하기를, “어(𤥽)ㆍ선(瑔)ㆍ송현수는 유(瑜)와 죄가 같으니, 혼자 살릴 수 없습니다.” 하였다. 세조가 이르기를, “여러 신하의 뜻은 잘 알겠으나, 따르지 않는 것은 내가 착해서가 아니다. 박덕한 처지로서 어찌 감히 다시 골육을 해치는 일을 할 수 있는가. 죄가 있더라도 오히려 보전하여야 하거늘,어찌 어(𤥽)ㆍ선(瑔) 같은 죄 없는 무리까지 이르랴. 이것은 여러 신하의 계책이 틀린 것이니, 속히 물러가서 나의 헤아림을 기다리라.” 하였다. 《실록》
○ 정인지 등이 또 상소하여 유의 처벌을 청하니, 세조가 유(瑜)에게 사사를 명하고, 영(瓔)ㆍ어(𤥽)ㆍ선(瑔)ㆍ송현수의 죄는 의논하지 말라 하였다. 정인지 등이 다시 아뢰자, 이르기를, “불가하다. 예전 사람이 ‘그 괴수는 죽이고 따라다닌 자는 다스리지 말라’는 말을 하였고, 또 성인은 너무 심한 일을 하지 않았다. 지금 만일 모두 법으로 처리하면 너무 심하니, 송현수만 교형에 처하고, 나머지는 모두 논하지 말라.” 하였다. 《실록》
○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를 사사하였다.
부원군의 부인 민씨(閔氏)를 시월에 정부 상소로 인하여 교형에 처하였다. 《해평가승》
○ 혜빈(惠嬪) 양씨(楊氏)는 한남군 어와 영풍군 선의 어머니로서, 단종에게 젖을 먹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모자가 한꺼번에 죽었다. 《해평가승》
○ 순흥부를 혁파하여 기천(基川)ㆍ영천(榮川)ㆍ봉화(奉化)에 나누어 붙였다. 순흥에 사는 사람들이 말[辭]에 연루되어 도륙을 당하니 죽계(竹溪)의 물이 모두 붉어졌다. 금성이 처음 귀양왔을 때에 경내에 무재(武才)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금은을 싸서 비단 주머니에 넣어 봉하여 집으로 보내고,그 사람이 와서 사례하면, 책에 이름을 적게 하여 심복을 삼았다. 일이 발각된 뒤에 조정에서 〈당여록(黨與錄)〉을 찾으려고 사람을 시켜 순흥 읍내 근처의 땅을 팠으나 마침내 찾지 못하였다. 《노릉지(魯陵誌)》
순흥을 혁폐(革廢)하니, 거민(居民)들의 노래에 이르기를, “은행나무가 다시 살아나면 순흥이 회복되고, 순흥이 회복되면 노산이 복위한다.” 하였는데, 그 뒤 이백 삼십여 년 만에 순흥부 동쪽에 나무 은행(銀杏) 가 홀연히 살아나서 자랐다. 항간에서 전하기를,“예전에 이 나무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민요가 있었다.” 하였다. 얼마 후에 민원으로 인하여 다시 순흥부를 설치하였고, 그때에 신 규(申奎)의 상소가 있어 단종의 위호를 회복하였으니, 그 말이 과연 맞았다. 《성호사설(星湖僿說)》
○ 동학사 《혼기(魂記)》에 쓰인 사람은 유(瑜)ㆍ정종(鄭悰)ㆍ송현수(宋玹壽)ㆍ최면(崔沔)ㆍ최시창(崔始昌)ㆍ이수정(李守禎)ㆍ박수량(朴遂良)ㆍ임진성(任進誠)ㆍ박윤(朴潤)ㆍ홍적(洪適)ㆍ이상손(李祥孫)ㆍ권완(權完)ㆍ이귀(李貴)ㆍ김충(金忠)ㆍ인평(印平)ㆍ유대(柳岱)ㆍ윤기(尹奇)ㆍ김득상(金得祥)ㆍ길유선(吉由善)ㆍ최찬(崔璨)ㆍ조희(曺熙)ㆍ서성(徐盛)ㆍ김옥겸(金玉謙)ㆍ허수(許遂)ㆍ홍구성(洪九成)ㆍ홍옥봉(洪玉峰)ㆍ최승손(崔承孫)ㆍ최자척(崔自滌)ㆍ진유번(陳有蕃)ㆍ조유례(趙由禮)ㆍ목효지(睦孝智)ㆍ성문치(成文治)ㆍ이문(李聞)ㆍ이례숭(李禮崇)ㆍ신경지(申敬之)ㆍ맹지(孟之)ㆍ중지(仲之)ㆍ근지(謹之)ㆍ내관 엄자치(嚴自治)였다.
○ 10월 24일에 노산군을 사사하였다. 《병자록》에는 유시(酉時)에 죽었다고 쓰여짐
그때에 조신들이 노산을 처형하여 그에게 향한 백성의 마음을 단념시키자고 청하였는데, 사관이 기록하기를, “노산이 듣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하였다. 《해동야언》
○ 수상 정인지가 백관을 거느리고 노산을 제거하자고 청하였는데, 사람들이 지금까지 분하게 여긴다. 《대동운옥》
○ 그 죄를 논한다면, 정인지가 으뜸이 되고 신숙주가 다음이다. 《죽창한화(竹窓閑話)》
○ 말하는 자가 이르기를, “정인지가 곧은 절개는 있다.” 하여, 《필원 잡기(筆苑雜記)》 같은 데서는 그 사람됨을 대단히 칭찬하였으나, 노산이 상왕으로 별궁에 있을 때에 정인지가 소를 올려 청하기를, “일찍 노산 죽이기를 도모하여 후환을 막자.” 하였다. 조금 있다가 영월로 옮기게 하고 뒤이어 처형을 행하였으니 참으로 간흉의 우두머리라 하겠다. 《축수록》
○ 사약을 내릴 때의 공사(公事)는 금부에 있다. 《논사록(論思錄)》
○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사약을 받들고 영월에 이르러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으니, 나장(羅將)이 시각이 늦어지다고 발을 굴렀다. 도사가 하는 수 없이 들어가 뜰 가운데 엎드려 있으니, 단종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나와서 온 까닭을 물었으나, 도사가 대답을 못하였다. 통인(通引) 하나가 항상 노산을 모시고 있었는데,스스로 할 것을 자청하고 활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앉은 좌석 뒤의 창문으로 그 끈을 잡아당겼다. 그 때 단종의 나이 17세였다. 통인이 미처 문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아홉 구멍에서 피가 흘러 즉사하였다. 시녀와 시종들이 다투어 고을 동강(東江)에 몸을 던져 죽어서 둥둥 뜬 시체가 강에 가득하였고,이날에 뇌우(雷雨)가 크게 일어나 지척에서도 사람과 물건을 분별할 수 없고 맹렬한 바람이 나무를 쓰러뜨리고 검은 안개가 공중에 가득 깔려 밤이 지나도록 걷히지 않았다. 《병자록(丙子錄)》
노산이 항상 객사(客舍)에 있으므로, 촌 백성들로서 고을에 가는 자가 누(樓) 아래에 와서 뵈었는데, 해를 당하던 날 저녁에 또 일이 있어 관에 들어가다가 길에서 만나니 노산이 백마를 타고 동곡(東谷)으로 달려 올라가는지라 길가에 엎드려 알현하며, “관가께서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하고 물었더니,노산이 돌아다보며 말하기를, “태백산으로 놀러간다.” 하였다. 백성이 절하며 보내고 관에 들어가니, 벌써 해를 당하였다. 《영남야어(嶺南野語)》
○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가 옥거리[獄街]에 왕래하며 통곡하면서 관(棺)을 갖추어 이튿날 아전과 백성들을 거느리고 군 북쪽 5리 되는 동을지(冬乙旨)에 무덤을 만들어서 장사지냈다 한다. 이때 흥도의 족당들이 화가 있을까 두려워서 다투어 말리매 흥도가 말하기를, “옳은 일을 하고 해를 당하는 것은 내가 달게 생각하는 바라.” 하였다. 《영남야언》 《병자록》
사기에 말하기를, “노산이 영월에서 금성군의 실패를 듣고, 자진하였다.” 하였는데, 이것은 당시의 여우나 쥐 같은 놈들의 간악하고 아첨하는 붓장난이다. 후일에 실록을 편수한 자들이 모두 당시에 세조를 종용(慫慂)하던 자들이다. 《계유 실록》이라는 것에 대개 이러한 내용이 많다.혹은 말하기를, “노산의 무덤을 충의배(忠義輩)들이 몰래 파서 법물(法物)에 의거하여 이장하였다.” 하나, 이것도 공연한 말이다. 다만 고을 사람들이 지금까지 애통하게 여겨 제물을 베풀어서 제사지내고 길흉ㆍ화복에 이르면 모두 묘소에 나가서 제사지냈다. 부녀자라도 오히려 전하기를, “정인지 같은 간적 놈들에게 핍박받아 우리 임금으로 하여금 제 명에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다.”고 하였다.슬프다, 옛부터 충신ㆍ의사가 반드시 대가 세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당시에 임금을 팔고 이익을 꾀하던 무리들은 반드시 자기 임금을 혹심한 화란에 몰아넣고야 마음에 쾌감을 느꼈으니 이런 자들을 엄흥도에 비하여 보면 어떠한가. 촌 부녀자나 동네 아이들은 군신의 의리도 알지 못하고 직접 흉한 변고를 보지 못하였건만, 지금까지 분하게 여겨 자기도 모르게 그런 말이 새어 나오고 전하니, 사람의 본성이란 속이기 어려운 것을 알 수 있다 하겠다. 《음애일기(陰崖日記)》
○ 노산이 해를 입자, 명하여 강물에 던졌는데, 옥체가 둥둥 떠서 빙빙 돌아다니다가 다시 돌아오곤 하는데, 가냘프고 고운 열 손가락이 수면에 떠 있었다. 아전의 이름은 잊었으나, 그 아전이 집에 노모를 위하여 만들어 두었던 칠한 관이 있어서 가만히 옥체를 거두어 염하여 장사지냈는데 얼마 안 되어 소릉(昭陵 단종의 어머니 능)의 변이 있어 다시 파서 물에 던지라고 명령하였다. 아전이 차마 파지 못하고 파는 척 하고 도로 묻었다. 《아성잡설(鵝城雜說)》 《축수록》
○ 노산이 영월에서 죽으매, 관과 염습을 갖추지 못하고 거적으로 초빈을 하였다. 하루는 젊은 중이 와서 슬피 울고 스스로 말하기를, “이름을 통하고 구휼을 받은 정분이 있다.” 하며, 며칠을 묵다가 하루저녁에 시체를 지고 도망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산골에서 불태웠다.” 하고, 혹자는 말하기를, “강에 던졌다.” 하여, 지금의 무덤은 빈 탕이요 가묘라 하니,두 말 중에 어떤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점필재(佔畢齋)의 글로 본다면, 강에 던졌다는 말이 틀림없다. 그러면, 중은 호승(胡僧) 양련(楊璉)의 무리로서, 간신들의 지휘를 받은 자인가. 영원히 한이 그치랴. 혼이 지금까지도 떠돌아다닐 것이니 참으로 슬프다. 《송와잡기(松窩雜記)》
○ 11월에 종부시(宗簿寺)가 아뢰기를, “노산과 영(瓔)과 어(𤥽)와 선(瑔)은 죄가 종사에 관계되니, 속적(屬籍)을 마땅히 끊어야 합니다. 자손도 아울러 종친록(宗親錄)ㆍ유부록(類附錄)에서 삭제하소서” 하매, 그대로 하였다. 《금석일반》
○ 중종(中宗) 11년 병자년(1516) 10월 저녁 강연(講筵)에 《예기(禮記)》를 강의하다가 의논이 진 여공(秦麗公)에 미쳤다. 참찬관 김 굉(金硡)이 말하기를, “연산(燕山)이 종사에 득죄하였으니, 속적에서는 당연히 끊어야 하지마는 제사를 끊는 것은 육친을 친하게 여기는 도리에 해로울 것 같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폐주(廢主)뿐 아니라,노산군도 후손이 없는데, 이 분에게도 제사를 지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여러 사람에게 물어보는 계제에 아울러 의논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였다. 사경(司經) 기준(奇遵)이 말하기를, “노산은 죄가 폐주와 같지 않으니, 지금 만일 제사를 지낸다면, 성덕(聖德)에 후한 처사입니다” 하였다. 중종이 이르기를, “《무정보감(武定寶鑑)》을 보았는데, 노산의 일은 오래 전에 관계된 일이라 의논할 수 없다.” 하였다.중종이 선정전(宣政殿)에 좌정하여 대신에게 차례로 물은 즉, 정광필(鄭光弼)이 아뢰기를, “노산의 일을 오늘 상감께서 하문 하시니, 이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세조가 처음 즉위하던 때의 일을 후세에 경솔하게 고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중종이 이르기를, “노산의 일은 나도 역시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노라” 하였다.김안국(金安國)의 말은, “노산과 연산이 폐위된 것은 같으니, 아울러 옛날 예를 상고해서 하여야 마땅할 것입니다” 하였다. 아침 강연에 시독관(侍讀官) 채침(蔡忱)은 아뢰기를, “노산의 후사를 세우는 일을 대신들이 말하기를, ‘노산은 연대가 멀어서 후사를 세울 수 없다.’ 하였는데, 폐하고 세우는 것으로 본다면, 노산이 정사에 어둡고 유약하여 대임을 감당하지 못한 것 뿐이요,종사에 득죄한 것은 아닌데, 어찌 연대가 먼 것을 핑계하여 후사를 세우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 외로운 혼이 의탁할 곳 없는 것을 불쌍히 여긴다면, 마땅히 후사를 세워야 합니다” 하였다. 기준의 말은, “만일 후사를 세운다면, 국가의 운수가 연장될 것이요, 성덕 또한 지극하실 것입니다. 예전에는 제왕의 후손 없는 이만 제사지낼 뿐 아니라, 대부의 후손 없는 자까지도 제사지내서 의탁할 곳이 있게 하였는데,하물며 임금이 되었던 분으로서 외롭게 의탁할 데가 없다면, 어찌 성조(聖朝)의 누가 아니겠습니까. 하늘에 있는 조종(祖宗)의 혼령으로 본다면 모두 똑같은 자손인데, 혹시라도 의탁할 데 없는 고혼(孤魂)이 있다면 어찌 편안하겠습니까” 하였다. 정광필은 아뢰기를, “노산ㆍ연산의 후사를 세우는 일이 전일에 《예기》를 강하다가 일이 발단되었는데, 신의 생각으로는 상감께서 그 제사를 끊기지 않게 하셨으면 합니다.노산이 신주가 없으니, 지금 신주를 조성하고 또 묘택(墓宅)을 영조(營造)하려면, 사세가 심히 어렵습니다. 예관을 시켜 마련하여 제사가 끊어지지 않게 하면 국가의 뜻이 후할 것입니다” 하였다. 중종이 이르기를, “노산의 일은 선조(先朝)에도 어렵게 여겼으나, 다시 생각하여 보면, 득죄하였더라도 고혼이 되어 의탁할 곳 없는 것이 차마 못할 일이니, 종친으로 하여금 후사를 삼는 것이 어떠한가.” 하였다.김응기(金應箕)가 아뢰기를, “종친은 불가하니, 촌수 밖의 소원(遠疏)한 사람으로 다만 사명일(四名日)에만 제사지내게 하되, 노산과 연산을 똑같은 예로 하게 하소서.” 하였다. 신용개(申用漑)가 아뢰기를, “일이 심히 중대하고 의논이 각각 다르니, 상세히 처리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11월에 사관을 보내어 대신에게 의논하니,유순(柳洵)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그 일이 중대하니, 경솔히 의논할 수 없습니다.” 하였고 송일(宋軼)은 의논하여 아뢰기를, “임금께서 재량하실 것이요, 경솔히 말할 수 없습니다.” 하였으며, 박열(朴說)과 송천수(宋千壽)는 의논하여 아뢰기를 “후사를 세워 그 제사를 받드는 것이 실상 선왕의 끊긴 대를 이어 주는 의(義)에 해당합니다.” 하였다.전교하여 이르기를, “비록 다시 의논하지 않더라도 마땅히 스스로 결단하겠고, 만일 부득이 후사를 세우게 된다면, 마땅히 친속으로 해야 하겠는데, 노산과 연산이 이미 속적(屬籍)이 끊어졌으니, 만일 먼 일가 중에 관직 없는 자로 후사를 삼는다면, 습직(襲職)이 또한 곤란하고 습직을 못하면 그 제사가 오래지 않아 도로 끊어질 것이다.만일 부득이하면, 대신의 아뢴 바와 같이하여 국가가 제사를 베풀면 영구히 흠향하여 폐하지 않을 것이다. 후사를 세움은 불가하니, 예조에 말하여 절목을 마련하여 아뢰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의거할 바가 없으므로, 후사 세움을 어렵게 여겼더니, 지금 송씨(宋氏)ㆍ신씨(愼氏)가 모두 생존하여 있으니, 각각 스스로 후사를 세우게 하라.” 하였다. 《조야기문(朝野記聞)》 ○ 홍문관과 예조에서 널리 옛 제도를 상고하여 동서반 이품 이상이 의논을 드렸다.
노산 부인 송씨가 그 때에 안일원(安逸院)에 우거하고 있었다. 마침내 의논이 일치되지 않아 파하고, 다만 송씨ㆍ신씨 생존시에 관가에서 제수를 공급하였다.
○ 전교하기를, “노산 묘에 치제하는 절목을 마련하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묘소에는 사명일에 제사를 행하되, 묘소 있는 곳의 수령을 시켜서 준비하여 행하게 하고, 가묘에는 사중일(四仲日)ㆍ사명일ㆍ기일(忌日)의 제물은 왕후의 부모에게 치제하는 예에 의하여 행하고, 묘지기는 여섯 호(戶)로 정함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등록(謄錄)》
○ 12월에 우승지 신상(申鏛)을 보내 노산군 묘에 치제하였는데 그 제문에 “내가 혼령과 사람의 주인이 된 지가 이제 열두 해가 되어간다. 덕은 비록 적다 하나, 베푸는 것이 다를 수 없다. 멀리 생각건대 의로운 무덤이 아득하게 동쪽 가에있어 향화(香火)가 쓸쓸한 지가 거의 육십 년이 되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매, 참으로 슬프다. 멀고 아득한 인사에 어떤 것도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무너진 것을 수축하는 시기에도 운수가 있으니, 이는 밝으신 열조(列朝) 성왕(聖王)이 나의 마음을 달램이라, 조정 신하들에게 물어 의논하니, 여러 사람의 말이 같으니, 하늘과 사람의 뜻이 일치함이라, 비로소 폐하였던 전례를 거행하노니 묘를 지키는 사람을 두고 사시에는 제전(祭奠)을 시행하겠다.이런 사유를 가지고 신하를 보내 이것을 고하노니, 바라건대 나의 정성스러운 마음을 헤아려 보잘것없는 제물이라도 흠향하기 바라노라.” 하였다. 《동각잡기》 《국조보감》
25일에 신상이 복명하여 아뢰기를, “본 고을의 고로(故老) 전 호장(戶長) 엄주(嚴籌)ㆍ신귀손(辛貴孫) 엄 속(嚴續)과 양인(良人) 지무작(智無作)과 관노 이말산(李末山)이 합사하기를, ‘군 북쪽 5리 동을지(冬乙旨)에 동향한 고분이 실제로 노산의 산소인데, 묘가 길가에 있어서 무너져서 높이가 겨우 두 자 쯤 됩니다.여러 무덤이 곁에 늘어져 있는데, 고을 사람들이 임금의 산소라 전칭하고, 어린아이들도 식별하고, 또 여러 무덤은 모두 돌을 옆에 늘어놓았는데, 이 묘만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당초에 해를 당하던 날에 진무가 와서 형에 임해서 핍박하여 자살케한 뒤에 시체를 밖에 버려 두어서, 그 고을 수령과 시종하던 사람들이 감히 거두어 염하지 못하는 것을,그 고을 수리(首吏) 엄흥도란 자가 즉시 와서 곡하고 관을 갖추어 염습하였습니다. 마침 어떤 관노가 만들어 화재가 무서워서 고을 옥에 갖다둔 것이 있으므로, 그것을 가져다 썼으며 다른 말썽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즉시 이에 땅에 장사지냈다고 합니다.’” 하였다. 《음애일기》
○ 중종 13년 무인에 좌승지 권벌(權橃)과 우승지 김정국(金正國)이 노산과 연산의 후사를 세워야 한다는 견해를 극진히 의논하여 아뢰기를, “세종이 광평(廣平)과 금성(錦城)으로 방번(芳蕃)ㆍ방석(芳碩)의 후사를 삼았고, 옛적에 무왕(武王)이 주(紂)의 아들 무경(武庚)을 봉해 주었고,우리나라에서도 숭의전(崇義殿)을 세웠으니, 무왕이 상(商) 나라에 대하여, 또 우리나라가 고려조에 대해서도 오히려 제사를 끊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물며 노산과 연산은 한때 임금으로 임하였는데, 영원히 제사를 끊는다면 전하의 인(仁)에 심히 손상됩니다.” 하였다. 그 때에도 여러 의논이 분분하여 마침내 시행하지 못하였다. 《조야기문》
그때, 노산 부인 송씨가 아뢰어 노비와 재물과 집을 정미수(鄭眉壽)의 아내에게 전하기를 청하였다. 정원(政院)이 그로 말미암아 아뢰기를, “노산군 부인이 정미수로 시양자(侍養子)를 삼았는데, 정미수가 이미 죽었고 또 후사가 없으니 정미수의 아내가 만일 죽는다면 노산군의 제사를 주관할 사람이 없어, 심히 참담합니다.다시 대신으로 하여금 후사 세울 일을 의논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였다. 김정국이 처음으로 이 의논을 내다 전교하기를, “송씨의 소원이 정미수의 아내에게 주는데 있으니, 후사를 세우는 것을 다시 의논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장릉지(莊陵志》
○ 송씨가 동문(東門) 밖에 있는 가대와 노비에 대한 문서를 만들어 정미수에게 주었고, 정미수가 죽은 뒤에 별도로 그 아내에게 주어서 문서가 두 장이 있었는데, 직접 도장을 찍었다.단종이 복위된 뒤에 정운희(鄭運熙 정미수의 후손)가, 지금은 사가에 둘 수 없으니, 계문을 올려 조치해달라는 뜻으로 예조에 말하였다. 예판 최규서(崔奎瑞)가 아뢰어 주달하매, 숙종이 이르기를, “나라에서 조치할 만한 일이 아니다.” 하고, 그대로 그 집에 두라고 명령하였다. 《장릉지》
○ 중종 16년 신사년(1521) 6월 4일에 영빈(英嬪) 송씨가 승하하니, 전교하기를, “노산 부인 송씨 상사는 의거할 만한 전례가 없으니, 마땅히 왕자군 부인의 호상 예수(禮數)에 의거하여 예관으로 하여금 상고하여 아뢰라.” 하였다.예조의 회계(回啓)로 말미암아 전교하기를, “부의는 완산군 부인의 예에 의하고, 다만 역청칠(瀝靑漆)을 한 관곽을 각 일부씩 더 제급(題給)하고 3년 동안의 제수는 소찬으로 올리라.” 하였다. 예조가 대군 부인의 예에 의거하기를 아뢰어 청하니, “그대로 하라.” 하였다. 《장릉지》
○ 중종 34년 기해에 한산(韓山) 군수 이약빙(李若氷)이 상소하여 노산ㆍ연산을 위하여 후사 세우기를 청하매, 대신이 아뢰기를, “간사한 의논을 꺼내니 극히 흉참하다.” 하여, 잡아다가 국문하자고 청하였다. 똑같은 일에 대하여 전후의 조정 의논이 서로 배치됨이 이와 같았다. 《사재척언(思齋摭言)》 《동각잡기(東閣雜記)》
○ 중종 신축년 노산이 돌아간 뒤로 영월 군수 중에 갑자기 죽는 사람이 많아서 죽은 자가 일곱 세상에 흉한 땅이라고 전해졌다. 이때에 이르러 박충원(朴忠元)이 폐해진 뒤 기용되어 다른 데에서 쫓겨났다 하였다.영월 군수가 되었다. 곧 결정하게 제물을 갖추어 제사 지냈더니 마침내 무사하였다. 다른 데에는 그날 밤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하였다. 그 제문에서, “왕실의 맏이요, 어리신 임금으로 다른 데에는 인명(仁明)한 임금이요, 왕실의 맏이라 하였다. 마침 비색(否塞)한 운수를 당하시어 바깥 고을[邑] 혹은 군(郡) 로 손위(遜位) 하시었으니, 한 조각 청산(靑山)에 만고의 고혼(孤魂)이 누워있네, 바라건대 강림(降臨)하시어 향기로운 제수를 흠향하소서” 하였다. 지금까지 사시 제사 이 글을 쓴다고 한다. 《유천차기(柳川箚記)》
○ 선조 정묘에 보은(報恩) 현감 조헌(趙憲)이 소를 올려 노산의 후사를 세우고 육신을 정표(旌表)하자고 청하니, 대신(臺臣)이 탄핵하여, 윤허하지 않았다. 《조야기문》
○ 선조 초년에 한림 김성일(金誠一)이 상소하여, 노산 묘를 봉축하고 육신의 벼슬을 회복하자고 청하였는데, 그 뒤에 명하여 노릉(魯陵)을 봉식(封植)하고 육신의 후손을 녹용한 것이 대개 공의 발단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김학봉(金鶴峰)의 묘비문〉
○ 선조 2년 기사에 경연에서, 말이 문종의 체천(遞遷)하는 일에 미쳤다. 기대승(奇大升)이 아뢰기를, “노산이 즉위하고 세조가 수상이 되어 어린 임금을 보좌하는데, 노산이 세조에게 교서를 주어 이르기를 ‘나는 성왕(成王)이 주공(周公)을 대하던 그 격식으로 숙부를 대접할 터이니 숙부도 또한 주공이 성왕을 보좌하던 그 격식으로 과인의 몸을 도우라’ 하였으니,대개 노산이 세조에게 주공과 같이 행동하기를 바랐는데, 천명이 세조에게로 돌아갔다.” 하였다. 선조가 이르기를, “옛 일을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다만 《무정보감(武定寶鑑)》을 보면 세조가 선위를 받은 것과 황보인ㆍ김종서ㆍ성삼문ㆍ박팽년이 처벌을 받은 일이 소소하게 실려있다.” 하였다. 다시 아뢰기를, “대강은 보감에 실려 있으나, 당시 사람들이 기록한 것이 있습니다.” 하니, 선조는 “모두 말하여 보라.” 하였다.대승이 또 아뢰기를, “성삼문의 일이 발각된 것은 그 뜻이 상왕을 복위하려 함이었는데, 세조가 ‘상왕이 참여해서 알고 있었다’ 하여 영월로 옮긴 것이었습니다.” 하였다. 선조가 이르기를, “평상시에는 궐내에 있었는가?” 하니, 대승은 “창덕궁에 있었다 하며, 영월로 옮긴 뒤에 정인지가 영상으로 배관을 거느리고 처치하기를 청하니, 금부도사를 보내어 사약을 내렸는데,당시에 영월 사람 엄모(嚴某)가 그 일을 기록하여 감추어 두었다 합니다. 대개 처치를 청한 것은 지난날 역사에도 없는 일인데 이를 감행하였으니, 한때에는 비록 명상(名相)이라고 일컬었으나, 지금은 사람들이 좋지 않게 여깁니다. 성종 초년에 문소전(文昭殿)의 방의 수가 갖추어지지 못하여 감히 문종의 신주를 체천하려 할 때에 성종이 여러 신하들을 불러 물으니 신하들이 말을 꾸며서 대답하였다 합니다.조종조(祖宗朝)에서 일을 잘하였다면 만세라도 고치지 않는 것이 마땅하지만, 만일 미진한 일이 있으면 고치는 것이 해롭지 않습니다. 태조가 정몽주(鄭夢周)를 죽였는데, 태종이 포창하여 증직하였고, 태조가 왕씨를 모조리 죽였는데 태종이 숭의전(崇義殿)을 세웠고, 세조가 소릉을 내버렸는데 중종이 능을 다시 세웠습니다.” 하였다.임금이 반문하기를, “무슨 물건을 내버렸는가?” 하니 대승이, “이것은 신자가 차마 아뢸 수 없는 말입니다. 재궁(梓宮 임금의 관(棺))을 내버린 것 같습니다. 소릉을 회복하고 나서 노산에게도 치제하였습니다.” 하였다. 《논사록(論思錄)》
○ 선조 9년 병자년(1576)에 헌관(獻官) 가승지(假承旨) 행 호군(行護軍) 유운(柳埍)을 보내어 노산묘에 제사지냈다. 《유천차기(柳川箚記)》
○ 선조 13년 경진년(1580)에 강원 감사 정철(鄭澈)이 장계하기를, “도내 영월군에 노산군의 묘가 있는데, 나무하고 소치는 아이들이 서로 모여들고 하여 길 가는 사람이 슬피 탄식합니다. 신은 엎드려 생각건대, 노산군이 예전에 한 나라에 임어(臨御)하여 임금의 도가 있으니, 낮추어 봉하여 군을 삼았다 하더라도,묘도(墓道)의 의물(儀物)은 신분에 따라 본래 합당한 제도가 있는데 천한 사람의 묘와 다름이 없으니, 슬픕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전지를 내리시어 그 묘를 다시 쌓고 표석을 세움에 있어 한결같이 예장(禮葬)의 법식에 의거하면, 예법으로 헤아려 보더라도 잘못됨은 없을까 합니다. 옛부터 제왕은 패망한 나라의 임금에게 반드시 후하게 장사지냈으니,항우(項羽)같은 원수의 경우에도 고황(高皇)이 노왕(魯王)의 예로 장사하였고, 건문(建文)같이 혁명으로 쫓겨간 이도 성조(成祖)가 천자의 예로 장사하였으니, 두 제왕의 훌륭한 처사입니다. 지난번 병자년에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였으니, 그 마음씀이 심히 후합니다. 이제 일품의 전례를 써서 노산의 묘를 수축하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하면 옛 일을 원용하여 오늘날 일을 논함에 실로 합당합니다.” 하였다.장계를 예조에 내리니, 예조가 회계하기를, “노산이 비록 위호(位號)는 깎였으나 봉작은 그대로 있는데, 의물(儀物)이 갖추어지지 못하고 묘도가 황폐하니 듣는 자가 슬퍼하고 마음 아파합니다. 지난번 병자년에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여 고혼을 위로하니, 온 나라 사람들이 감동하여 모두 성명(聖明)의 하신 일이 보통사람의 만 배 이상임을 알았는데 매우 특별한 마음에서 나왔음을 압니다.많은 시일이 지나서 나무꾼과 목동이 서로 찾아드니, 묘를 봉축하고 표석을 세우고 특별히 향화(香火)를 내리시어 조종조에서 미처 하지 못한 예전을 행하시면 참으로 인정에 합당할까 합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대신이 의논하라.” 하였다. 영의정 박순(朴淳)ㆍ좌의정 노수신(盧守愼)ㆍ우의정 강사상(姜士尙)이 의논하여 아뢰기를,“예조의 공사에 의하여 특별히 궐전(闕典)을 거행하시는 것은 실로 성덕(盛德)을 펼치는 일입니다.” 하였다. 이에 또 전교하기를, “대신의 의논에 의하여 묘를 봉축하고, 표석을 세우고, 근신을 보내어 치제하라.” 하였다. 《본도등록(本道謄錄)》
○ 신사년(1581) 여름에 정철의 장계를 말미암아 명령하기를, “묘를 봉하고 표석을 왕자묘의 예와 같이 세우고, 승지 이해수(李海壽)를 보내어 치제(致祭)하되, 가까운 고을의 공물(貢物)을 적당히 덜어내어 제수(祭需)로 충당하라.” 하였다. 《유천차기》
그때, 정철의 장계로 말미암아 영역(瑩域)을 수축하고 표석을 세워 표시하고 3호(戶)를 시켜서 묘를 지키게 하였다. 역사를 마치던 날에 역사를 감독한 수령 등과 자리를 같이 하였는데, 정철이 말하기를, “이번 이 역사에 대하여 사람들이 어떻다 하는가.” 하고 물으니, 모두 말하기를, “상공이 이 논의를 세우고 성상(聖上)께서 이를 따랐는지라,위 아래가 다 한결같이 천년 만에 한 번이나 오는 때라고 합니다.”고 하였다. 이천(伊川) 군수 유인지(柳訒之)가 홀로 말이 없으므로, 정철이 까닭을 물으니, 인지가 말하기를, “노산이 저승에서, 곤룡포(袞龍袍)를 입고 평천관(平天冠)을 쓰고 육신의 무리처럼 충의 있는 선비들이 좌우에 늘어서서 모시며 보좌(寶座)를 옹위하고 있을 터인데, 어째서 돌을 세우고 표시하여 억지로 노산묘라고 일컫는가?” 하니, 만좌(滿座)가 말이 없었다. 《장빈호찬(長貧胡撰)》
○ 을유에 김륵(金玏)이 이 고을 군수가 되었는데, 감사 정곤수(鄭崑壽)에게 청하여 비로소 제청(祭廳) 3간과 재실과 부엌간을 묘 옆에 짓고 위패(位牌)를 봉안하여 노산군 신주라고 쓰고, 부인 송씨 위패를 배향하여 세시에 제사를 드렸다. 《유천차기》
○ 선조 34년 신축일에 조우인(曹友仁)이 노산과 연산의 후사 세우는 일에 대하여 상소하니, 이항복(李恒福)이 논의하기를, “역대 제왕에 있어 이와 같은 처지가 심히 많은지라, 이미 행한 제도와 이미 정한 논의가 있을 것이니 신이 감히 절충(折衷)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백사집(白沙集)》
○ 선조 36년 여름 계묘일에 형조 참판 박동량(朴東亮)이 강원 감사로 있다가 갈려 와서 입시하여 아뢰기를, “노산묘가 덤불 우거진 숲 속에 끼어 있어서 도끼질을 금하지 못하고, 향화가 끊긴 지 오래되었습니다. 중종이 승지 신상(申鏛)을 보내어 치제하다가 그 뒤에는 빠뜨렸으니, 마땅히 이를 슬피 여겨 폐했던 제전을 다시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였다.선조가 이를 옳게 여겨 드디어 우부승지 정혹(鄭㷤)에게 명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였는데, 제문에 기록하기를, “생각건대, 임의 유택(幽宅) 황야(荒野) 구석에 있도다. 국가가 어려운 일이 많아 향화를 거행하지 못하고 이따금 관원을 보내어 치제했으나 지금은 그것마저 폐해졌으니, 옛날을 생각하여 마음 더욱 슬퍼진다. 종련(從聯)을 걷어치우고 대신 잔을 올리노니 혼령이여 지각이 계시거든 이르러 흠향하시라.” 하였다. 《노릉지》
○ 광해(光海) 2년 경술년(1610) 7월에 예조 판서 이정구(李廷龜)가 논의하여 아뢰기를, “노산군 묘가 영월에 있는데, 네 명절에 그 품관(品官)을 시켜서 대강 제사라고 베풀지마는 제사 의식이 엉성하여 격에 맞지 않고, 부인의 묘는 양주(楊州) 풍양(豊壤)에 있는데, 향화가 끊어지고 나무하고 소 뜯는 것을 금하지 못합니다.예로부터 제왕은 비록 멸망시킨 나라의 임금에게도 향사(享祀)를 성대하게 바치는 전례(典禮)가 있으니, 우리 조정의 숭의전(崇義殿)이 또한 그 일례입니다. 따로 두어 칸 사당을 세워서 두 분의 신주를 모시고 매년 한식과 두 기일(忌日)에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모시고, 분묘는 별달리 봉식(封植)하여 묘지기를 더 두고, 관에서 제물을 준비하여 연산군과 같은 규모로 시행함이 어떠합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좋다.” 하였다.또 아뢰기를, “영월과 양주, 분묘 있는 곳에 먼저 예관을 보내어 치제하고 사당은 삼청동(三淸洞)같이 정결하고 외진 곳에 지세를 보아서 속히 건축하되, 숭의전의 예에 의하여 위패를 만들어 모시고, 봄ㆍ가을 중간 달[월중]에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모시고, 내관으로 수직(守直)하게 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그대로 하여도 좋으나,다만 사당을 도성 안에 세우는 것이 마땅하냐 않으냐는 것을 다시 대신들과 의논하라.” 하였다. 분부대로 대신들과 의논하여 아뢰기를, “대신 이원익(李元翼)ㆍ이항복(李恒福)ㆍ윤승훈(尹承勳)ㆍ한응인(韓應寅)ㆍ이덕형(李德馨)ㆍ심희수(沈喜壽) 등이 의논하기를, 사당은 묘 옆에 세우는 것이 편하기는 하나, 도성 안에 세우는 것은 타당한지 모르겠다 합니다.” 한즉, 또 다시 전교하기를,“대신의 의논에 의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사당을 묘 옆에 세우면 내관(內官)이 수직하기가 어려우니, 기자전(箕子殿)의 예(例)에 의하여 참봉 두 사람을 보내어 수직하게 하고, 제관은 본도에서 정하여 보내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하라.” 하였다. 정곤수와 김륵이 지은 제청과 재실은 옛 건물에 단청(丹靑)만 칠하고 위패를 모시고, 부인 송씨도 함께 제사하였다.
○ 예조 참의 이지완(李志完)을 보내어 치제하였는데, 그 제문은 다음과 같다. “생각건대, 동쪽 고을 궁벽한 산협이오, 군이 잠든 그 유택(幽宅)은 고을 옆에 있는지라, 황량(荒凉)하고 고절(孤絶)하여 듣고 봄에 안타깝다. 선왕이 마음 아파 여러 차례 제사지내니, 새로 왕위를 이은 나도 또한 추감(追感)함이 간절하여, 유사(有司)에게 명을 내려 모든 절차를 갖춰놓고 예관을 보내어 술잔을 드리오니, 혼령이여 계시거든 흠향하시라.” 하였다. 《월사집》 《노릉지》
예전에 묘 좌편에 금몽암(禁夢庵)이 있었는데, 불에 타버렸으므로, 군수 김택룡(金澤龍)이 중을 불러서 고쳐지었는데, 무릇 열 다섯 칸이다. 그 이름을 고쳐 노릉암(魯陵庵)이라 하여 분묘와 사당을 지키게 하고 나무하고 소먹이는 것을 금하게 하였다. 감사가 사유를 갖추어 조정에 올리니 회답하여 이르기를, “오대산 사고(史庫) 수직(守直)의 예에 의거하여 일체 침범하지 못하게 하고 영구한 규칙으로 삼으라.” 하였다. 《등록(謄錄)》
○ 효종(孝宗) 4년 계사년(1653)에 부제학 김익희(金益熙)가 아뢰기를, “조종조에 있어서는 노산군 묘에 승지와 예조당상을 보내어 치제한 때가 간혹 있었는데, 근래에는 오래도록 폐해졌으니 조종조의 고사에 의거하여 거행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좋다.” 하고, 드디어 예조참의 김좌명(金佐明)에게 명하여 치제하였는데, 그 제문에 이르되,“혁제(革除)할 당시에는 나이 어린 임금이라, 천명이 돌아가는 곳이 있어 산협으로 옮겨졌다. 아득히 먼 땅에 외로운 무덤이 큰 강가에 있도다. 여러 조정이 봉식(封植)하여, 영(靈)을 모시며 향사를 빠뜨리지 않고 제수를 올리다가 난리를 겪은 뒤로는 옛 법을 못 지켰으므로, 황량한 옛터에 풀만 무성하고 날을 택일하고 예관에 명을 내려 깨끗한 제물로 명복을 비옵노라.” 하였다. 《등록(謄錄)》
○ 현종(顯宗) 3년 임인에 부제학 조복양(趙復陽)이 아뢰기를, “전부터 재앙을 만나면 노산묘에 치제하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하였다. 현종이 예조로 하여금 “상고하여 처리하라.” 하니, 예조가 아뢰기를, “여러 조정에서 덕으로 행한 일이요, 특별히 재앙을 만나야 거행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였다. 대신에게 의논한 뒤에 예조 참의 조석윤(趙錫胤)을 보내어 치제하였는데,그 제문에 이르기를, “어릴 적에 왕위에 올라, 얼마 안가 손위하였으니 왕실의 많은 사건들은 옛일이 되었도다. 외로운 저 무덤이 궁곡(窮谷)에 누웠도다. 고을에서 받든 제사격식이 있었으며, 관원 보내 제사함은 선왕 때부터인데, 근년에 빠뜨렸으니 내 마음에 못 잊노라. 영월의 산이 황량하니 혼령이 진정으로 머무를 곳이 아니로다.이번 장마 물에 묘가 무너짐이 없었던가. 예관(禮官)에게 명을 내려, 맑은 술잔 드리노니, 혼령이여 지각이 있거든 이르러 흠향을 하시오.” 하였다. 《등록》
○ 현종 9년 무신년(1668) 감사 정익(鄭榏)의 장계로 인하여, 달마다 본 군에 쌀 한 섬씩을 제급(題給)하여 참봉의 번드는 양식으로 하고, 참봉 두 사람이 보름 전후로 나누어 차례로 번들게 하였다.
○ 숙종 원년 을묘년(1675)에 감사 조성(趙䃏)의 장계로 인하여 뗏장을 다시 입혔다.
○ 숙종 5년 기미년(1679)에 대사헌 윤휴(尹鑴)의 아뢴 바에 의하여 예조 참의 민취도(閔就道)를 보내어 치제하였다.
○ 숙종 7년 신유년(1681) 7월에 경연관(經筵官) 이민서(李敏敍)의 제의로 명을 내려 노산군을 노산대군으로 추봉하고, 8월에 우부승지 송창(宋昌)을 보내어 치제하였다.
○ 숙종 17년 신미년(1691)에 육신의 복관(復官)으로 인하여 임금이 이르기를, “노산묘에도 치제의 거행이 없을 수 없다.” 하여, 곧 가까운 신하를 보내어 전례에 의거하여 거행하였다. 이상은 모두 〈노릉지 보유(魯陵志補遺)〉에 있음
ⓒ 한국고전번역원 | 이일해 이식 (공역) |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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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 9권, 세조 3년 10월 9일 기해 2번째기사 1457년 명 천순(天順) 1년금성 대군이 순흥에 안치된 후 역모를 꾸민 안순손 등을 처벌하다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이유(李瑜)가 순흥에 안치(安置)된 뒤로부터, 다른 뜻이 있어 기관(記官)860) 중재(仲才)와 품관 안순손(安順孫)·김유성(金由性)·안처강(安處强)·안효우(安孝友)와 군사 황치(黃緻)·신극장(辛克長)과 향리(鄕吏) 김근(金根)·안당(安堂)·김각(金恪) 등에게 뇌물을 주어, 중재의 아들 호인(好仁)을 시켜, 옛 종[奴] 정유재(鄭有才)와 그의 무리인 범삼(凡三)·석정(石丁)·석구지(石仇知)·범이(凡伊) 및 풍산 관노(豐山官奴) 이동(李同)을 불러, 군사를 일으킬 것을 공모하고, 각각 병장을 휴대하게 하였으며, 또 부사(府使) 이보흠(李甫欽)에게 금정자(金頂子)와 산호 입영(珊瑚笠纓)을 주고, 또 말하기를, ‘공(公)은 근일에 반드시 당상관(堂上官)이 될 것이다.’고 하였는데, 이보흠이 이를 받지 않으니, 이유(李瑜)가 말하기를, ‘마땅히 다른 날 이를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노산군(魯山君)이 영월(寧越)로 내려갔다는 것을 듣고, 거짓 말하기를, ‘유모(乳母) 소비(小非)가 내 첩자(妾子) 오을망(吾乙亡)을 발로 차서 거의 죽게 되었으므로, 이보흠과 중재(仲才)를 청하여 들여 이를 신문(訊問)하기를 청한다.’고 하고, 인하여 이르기를, ‘군주가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하는데, 내가 어찌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겠는가? 청컨대 공(公)은 군병을 모아서 나와 더불어 오늘 밤에 곧장 영천(榮川)을 공격하여, 영천에서 호응하지 않으면 군법(軍法)으로 종사(從事)하고, 즉시 안동(安東)으로 향하면, 안동은 나의 가동(家僮)이 모여 사는 곳이므로 2, 3천의 병사는 얻을 수 있을 것이니, 이를 호령하면 누가 감히 따르지 않겠는가?’ 하고, 드디어 절제사·처치사(處置使), 제읍의 수령·교수관(敎授官) 등의 성명을 기록하고, 칼을 빼어 이보흠을 위협하여 서명(署名)하게 하고, 취각(吹角)과 타각고(打角鼓)를 시켜 빨리 인신(印信)과 군기(軍器)를 취득하라고 독촉하고, 종이를 중재에게 주어 패자(牌子)861) 를 발급하여 군사를 모으게 하고, 스스로 맹세하는 글을 지어 이르기를, ‘간신(姦臣)이 정권(政權)을 마음대로 하고, 종친이 유도해 도와서 주상(主上)을 방출(放黜)하고 사직(社稷)을 전복(顚覆)하였으니, 한마음으로 광구(匡救)하되, 만일 두 가지 마음을 가지면, 천지의 신기(神祇)와 사직(社稷)·종묘(宗廟)의 신이 날로 이에 감림(監臨)할 것이다.’ 하고, 이보흠·중재(仲才)와 더불어 같이 서명(署名)하여 맹세하기를 요구하고, 드디어 이보흠에게 정자(頂子)·입영(笠纓) 및 단자의(段子衣)를 주었습니다. 이어서 견고한 갑옷[甲]을 찾으니 이보흠이 없다고 사절하였으나, 유가 다시 안동(安東)에 철갑(鐵甲)을 요청하고 이보흠과 더불어 의논하기를, ‘지금 풍기 군사(豐基郡事)를 죽령(竹嶺)으로 보내고, 문경 현감(聞慶縣監)은 초점(草岾)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길을 끊게 하고, 그 오는 자를 거절하지 않으면, 본도에서 종사(從仕)하는 자는 처자(妻子)를 잊지 못하여 바람에 쏠리듯이 올 것이니, 인하여 군사를 모집한다면 성사(成事)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보흠이 일찍이 거짓으로 진양(鎭穰)862) 한다 일컬으고, 맹인(盲人) 석경(石敬)을 유(瑜)에게 보내어 유를 달래어 말하기를, ‘전조(前朝)의 왕자가 젊어서부터 중[僧]이 되어 화(禍)를 면한 자가 자못 많았다.’ 하고, 또 중[僧] 나부(懶夫)에게 묻기를, ‘유(瑜)가 이 고을에서 평생을 마치겠는가? 장차 서울로 돌아가겠는가?’ 하니, 나부가 대답하기를, ‘허몽상(虛蒙相)863) 이 있다.’고 하여, 이보흠이 이를 유에게 말하니, 유가 말하기를, ‘내가 계양군(桂陽君)864) 의 연고로 죄를 얻고 왔는데, 근래에는 위문하지도 않으니 일이 헤아리기 어려운 데에 있다. 너도 또한 두려워할 만하다. 너는 옛날 이용(李瑢)865) 과 서로 아는 사이였는데 마침 지금 이 고을에 수령이 되었고, 나도 또한 이곳에 왔지만 지금은 죄의 유무도 묻지 않고 좌죄(坐罪)한다.’ 하니, 이보흠이 말하기를, ‘정난(靖難) 때는 그 사태가 매우 급하여 간혹 신문(訊問)하지 않고 저죄(抵罪)한 자가 있었다.’고 하였으니, 유가 이보흠과 더불어 모역(謀逆)한 것이 매우 명백합니다. 그 중재(仲才)·호인(好仁)·정유재(鄭有才)·석정(石丁)·범삼(凡三)·석구지(石仇知)·범이(凡伊)·이동(李同)·안순손(安順孫)·김유성(金由性)·안처강(安處强)·안효우(安孝友)·황치(黃緻)·김근(金根)·신극장(辛克長)·안당(安堂)·김각(金恪)은 모두 각각 승복(承服)하였으니, 다 능지 처사(凌遲處死)하고, 법에 의해 연좌(緣坐)케 하며, 재산은 적몰(籍沒)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안순손·황치·김유성·안처강·안효우·신극장은 처참(處斬)하되, 연좌하지 말게 하고, 이보흠·김근은 장(杖) 1백 대에 유(流) 3천리에 처하고, 김각은 장 1백 대에, 안당은 장 80대에 처하며, 석경은 논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이때 죄를 범한 자는 무지(無知)한 소민(小民)이 많았는데, 간사한 사람들이 속이고 미혹(迷惑)하여 정상이 의사(疑似)한 자도 또한 있었다. 임금이 조율장(照律狀)866) 을 의정부에 내려 이를 의논하게 하니, 모두 그 일이 반역(反逆)에 관계되었으므로 감히 가볍게 의논하지 못하고 거의 무거운 법전을 따랐는데, 신숙주(申叔舟)는 말하기를,
"성상의 뜻이 어찌 많이 사람을 죽이겠는가? 마땅히 정상을 살펴 죄를 정해야 한다."
하였다. 이로써 생명을 온전히 한 자가 많았다.
[註 860]기관(記官) : 조선 왕조 때 지방의 하급 관리.
[註 861]패자(牌子) : 지위가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주는 공문서. 패지(牌旨).
[註 862]진양(鎭穰) : 기도하여 사기(邪氣)를 물리치는 것.
[註 863]허몽상(虛蒙相) : 헛되이 일을 당할 상.
[註 864]계양군(桂陽君) : 세종의 제2서자(庶子).
[註 865]이용(李瑢) : 안평 대군.
[註 866]조율장(照律狀) : 죄를 법률에 비추어 그 형을 매기어 임금에게 아뢰던 장신(狀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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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 9권, 세조 3년 10월 16일 병오 1번째기사 1457년 명 천순(天順) 1년종친 등이 노산군과 금성 대군의 처벌을 건의하였으나 헤아리는 중이라고 하다국역원문.원본 보기
종친(宗親) 및 의정부(議政府)·충훈부(忠勳府)·육조(六曹)에서 아뢰기를,
"노산군(魯山君)이 종사(宗社)에 죄를 지었는데, 근일에 난언(亂言)하는 자들이 모두 노산군을 빙자하여 말합니다. 옛날에 태자 부소(扶蘇)888) 를 사칭한 자가 있었고, 또한 위태자(衛太子)889) 의 사건도 있었습니다. 이제 만약 법에 두지 않는다면 부귀를 도모하려고 하는 자들이 이것을 빙자해 난리를 일으킬 것이니, 용서할 수 없습니다. 이유(李瑜)는 천하의 대역(大逆)이니 사사로운 은혜로써 법을 굽혀 이를 용서하는 것은 불가(不可)합니다."
하였다. 임영 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가 정창손(鄭昌孫)에게 나아가서 더불어 말하기를,
"이어(李𤥽)890) ·이전(李瑔)891) ·송현수(宋玹壽)도 유(瑜)892) 와 죄가 같은데, 홀로 살게 하는 것은 불가(不可)하니, 모름지기 아울러 계청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정창손이 좌우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어(𤥽)·전(瑔)의 일은 우리들이 처음에 비록 의의(擬議)하지 못하였지만, 아울러 계청하는 것이 옳다."
하고, 드디어 즉시 죄를 청하니, 임금이 어찰로 대답하기를,
"삼가 군신(群臣)들의 뜻을 알았으나, 듣지 않는 것은 내 스스로의 성덕(盛德)을 위하여서가 아니다. 지극히 박덕(薄德)하고 무덕(無德)한데 어찌 감히 골육을 죽이는 일을 다시 하겠는가? 죄가 있는 자도 오리려 이를 보전하는데, 어찌 어(𤥽)·전(瑔)과 같이 죄없는 무리에게까지 이른단 말인가? 이는 군신들의 계책이 잘못된 것이다. 속히 물러가서 내가 끝까지 헤아리기를 기다리도록 하라."
하였다. 정창손 등이 다시 아뢰기를,
"신 등은 이미 성상의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소위 골육을 상해한다는 것은, 이런 것을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옛말에 있기를, ‘사사로운 은혜로써 공의(公議)를 폐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청컨대 대의(大義)로써 결단하소서."
하니, 임금이 전교하기를,
"전번 글에 이미 다 말하였으니, 다시 고쳐서 말할 것이 없다. 경 등은 속히 물러가라."
하였다. 정창손 등이 다시 아뢰기를,
"천하의 국가를 위하여 상벌(賞罰)이 큰 것인데, 이러한 것을 여러 사람에게 보이는 것은 불가합니다. 대역부도(大逆不道)는 의혹스런 죄가 아닌데, 다시 어찌 헤아려서 생각하겠습니까? 청컨대 속히 결단하소서."
하니, 임금이 전교하기를,
"바야흐로 헤아려 생각하는 중이니, 가볍게 논의할 수 없다."
하였다.
[註 888]부소(扶蘇) : 진(秦)나라 시황(始皇)의 맏아들.
[註 889]위태자(衛太子) : 한나라 무제(武帝)의 태자. 난을 일으켰다가 처형당했음.
[註 890]이어(李𤥽) : 한남군(漢南君).
[註 891]이전(李瑔) : 영풍군(永豐君).
[註 892]유(瑜) : 금성 대군(錦城大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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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 9권, 세조 3년 10월 27일 정사 3번째기사 1457년 명 천순(天順) 1년의금부 도사 최계남을 박천에 보내 이보흠을 교살하다국역원문.원본 보기
의금부 도사 최계남(崔季男)을 박천(博川)으로 보내어, 이보흠(李甫欽)을 교살(絞殺)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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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 10권, 세조 3년 11월 18일 무인 4번째기사 1457년 명 천순(天順) 1년노산군·금성 대군 등의 자손들을 종친록과 유부록에서 삭제토록 하다국역원문.원본 보기
종부시(宗簿寺)에서 아뢰기를,
"노산군(魯山君) 및 이유(李瑜)977) ·이영(李瓔)·이어(李𤥽)·이전(李瑔)·정종(鄭悰) 등은 그 죄가 종사(宗社)와 관계되므로 속적(屬籍)978) 을 마땅히 끊어야 합니다. 청컨대 아울러 자손까지도 종친록(宗親錄)과 유부록(附錄錄)에서 삭제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註 977]이유(李瑜) : 금성 대군(錦城大君).
[註 978]속적(屬籍) : 문무 백관이나 종친이 속해 있는 관청의 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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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직의 조의제문 연산군일기
연산군일기 , 연산군 4년 무오(1498) 7월 17일(신해)
○傳旨曰: "金宗直草茅賤士, 世祖朝登第, 至成宗朝, 擢置經筵, 久在侍從之地, 以至刑曹判書, 竉恩傾朝。 及其病退, 成宗猶使所在官, 特賜米穀, 以終其年。 今其弟子金馹孫所修史草內, 以不道之言, 誣錄先王朝事, 又載其師宗直 《弔義帝文》。 其辭曰:
丁丑十月日, 余自密城道京山, 宿踏溪驛, 夢有神披七章之服, 頎然而來, 自言: "楚懷王 孫心爲西楚霸王所弑, 沈之郴江。" 因忽不見。 余覺之, 愕然曰: "懷王 南楚之人也, 余則東夷之人也。 地之相距, 不啻萬有餘里, 而世之先後, 亦千有餘載。 來感于夢寐, 玆何祥也? 且考之史, 無沈江之語, 豈羽使人密擊, 而投其屍于水歟? 是未可知也。" 遂爲文以弔之。 惟天賦物則以予人兮, 孰不知尊四大與五常? 匪華豐而夷嗇, 曷古有而今亡? 故吾夷人, 又後千載兮, 恭弔楚之懷王。 昔祖龍之弄牙角兮, 四海之波, 殷爲衁。 雖鱣鮪鰍鯢, 曷自保兮, 思網漏而營營。 時六國之遺祚兮, 沈淪播越, 僅媲夫編氓。 梁也南國之將種兮, 踵魚狐而起事。 求得王而從民望兮, 存熊繹於不祀。 握乾符而面陽兮, 天下固無大於芈氏。 遣長者而入關兮, 亦有足覩其仁義。 羊狠狼貪, 擅夷冠軍兮, 胡不收而膏齊斧? 嗚呼! 勢有大不然者兮, 吾於王而益懼。 爲醢腊於反噬兮, 果天運之蹠盭。 郴之山磝以觸天兮, 景晻愛以向晏。 郴之水流以日夜兮, 波淫泆而不返。 天長地久, 恨其可旣兮, 魂至今猶飄蕩。 余之心貫于金石兮, 王忽臨乎夢想。 循紫陽之老筆兮, 思螴蜳以欽欽。 擧雲罍以酹地兮, 冀英靈之來歆。
其曰: ‘祖龍之弄牙角。’ 者, 祖龍秦始皇也, 宗直以始皇比世廟。 其曰: ‘求得王而從民望。’ 者, 王, 楚懷王 孫心, 初項梁誅秦, 求孫心以爲義帝, 宗直以義帝比魯山。 其曰: ‘羊狠狼貪, 擅夷冠軍者。’ 宗直以羊狠狼貪指世廟, 擅夷冠軍, 指世廟誅金宗瑞。 其曰: ‘胡不收而膏齊斧?’ 者, 宗直指魯山胡不收世廟。 其曰: ‘爲醢腊於反噬。’ 者, 宗直謂魯山不收世廟, 反爲世廟醢腊。 其曰: ‘循紫陽之老筆, 思螴蜳以欽欽。’ 者, 宗直以朱子自處, 其心作此賦, 以擬《綱目》之筆。 馹孫贊其文曰: ‘以寓忠憤。’ 念我世祖大王當國家危疑之際, 姦臣謀亂, 禍機垂發, 誅除逆徒, 宗社危而復安, 子孫相繼, 以至于今, 功業巍巍, 德冠百王。 不意宗直與其門徒, 譏議聖德, 至使馹孫誣書於史, 此豈一朝一夕之故? 陰蓄不臣之心, 歷事三朝, 余今思之, 不覺慘懼。 其令東西班三品以上, 臺諫、弘文館, 議刑以啓。" 鄭文炯、韓致禮、李克均、李世佐、盧公弼、尹慜、安瑚、洪自阿、申溥、李德崇、金友臣、洪碩輔、盧公裕、鄭叔墀議: "今觀宗直 《弔義帝文》, 非唯口不可讀, 目不忍視也。 宗直當世祖朝, 從仕已久, 自謂才高一世, 而不見納於世廟, 遂懷憤懟之心, 托辭於文, 譏剌聖德, 語極不道。 原其心, 與丙子謀亂之臣何異? 當論以大逆, 剖棺斬屍, 明正其罪, 以雪臣民之憤, 實合事體。" 柳輊議: "宗直不臣之心, 罪不容誅, 宜置極刑。" 朴安性、成俔、申浚、鄭崇祖、李季仝、權健、金悌臣、李季男、尹坦、金克儉、尹殷老、李諿、金碔、金敬祖、李叔瑊、李堪議: "宗直假托夢妖, 詆毁先王, 大逆不道, 宜置極典。" 卞宗仁、朴崇質、權景祐、蔡壽、吳純、安處良、洪興議: "宗直懷二心, 不臣之罪已甚, 依律斷之爲便。" 李仁亨、表沿沫議: "觀宗直 《弔義帝文》及所指之意, 罪不容誅。" 李克圭、李昌臣、崔璡、閔師騫、洪瀚、李均、金係行議: "宗直罪犯, 所不忍言, 依律文論斷, 以戒人臣懷二心者。" 鄭誠謹議: "宗直陰懷是心, 臣事世廟, 凶惡不測, 宜置重典。" 李復善議: "宗直作《弔義帝文》, 在丁丑十月, 則蓄不臣之心久矣。 觀解釋弔文之言, 非徒耳不忍聞, 抑亦目不忍見。 其身雖死, 其惡可追, 宜從叛臣之律論斷, 則宗直地下之鬼, 必稽首甘心伏辜矣。" 李世英、權柱、南宮璨、韓亨允、成世純、鄭光弼、金勘、李寬、李幼寧議: "今觀宗直文, 語極不道。 論以亂逆何如?" 李惟淸、閔壽福、柳廷秀、趙珩、孫元老、辛服義、安彭壽、李昌胤、朴權議: "宗直 《弔義帝文》, 語多不道, 罪不容誅。 然其人已死, 追奪爵號, 廢錮子孫何如?" 從文炯等議。 御筆抹執義李惟淸等, 司諫閔壽福等議, 以示弼商等曰: "宗直大逆已著, 而此輩議之如此, 是欲庇之也。 安有如此痛恨之事? 其就所坐處, 拿來刑訊。" 時諸宰及臺諫、弘文館皆在坐, 忽有羅將十餘人持鐵鎖, 一時走入, 宰相以下莫不錯愕起立。 惟淸等受訊杖三十, 竝供無他情。
04-07-17[02] 김일손의 사초에 실린 김종직의 조의제문에 대한 왕의 전교와 신하들의 논의
전지하기를,
“김종직은 초야의 미천한 선비로 세조조에 과거에 합격했고, 성종조에 이르러서는 발탁하여 경연(經筵)에 두어 오래도록 시종(侍從)의 자리에 있었고, 종경에는 형조 판서(刑曹判書)까지 이르러 은총이 온 조정을 경도하였다. 병들어 물러가게 되자 성종께서 소재지의 수령으로 하여금 특별히 미곡(米穀)을 내려주어 그 명을 마치게 하였다. 지금 그 제자 김일손(金馹孫)이 찬수한 사초(史草) 내에 부도(不道)한 말로 선왕조의 일을 터무니없이 기록하고 또 그 스승 종직의 조의제문을 실었다. 그 말에 이르기를,
‘정축 10월 어느 날에 나는 밀성(密城)으로부터 경산(京山)으로 향하여 답계역(踏溪驛)에서 자는데, 꿈에 신(神)이 칠장(七章)의 의복을 입고 헌칠한 모양으로 와서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초(楚)나라 회왕(懷王)의 손자 심(心)인데, 서초 패왕(西楚霸王)에게 살해 되어 빈강(郴江)에 잠겼다.」 하고 문득 보이지 아니하였다. 나는 꿈을 깨어 놀라며 생각하기를 「회왕(懷王)은 남초(南楚) 사람이요, 나는 동이(東夷) 사람으로 지역의 거리가 만여 리가 될 뿐이 아니며, 세대의 선후도 역시 천 년이 휠씬 넘는데, 꿈속에 와서 감응하니, 이것이 무슨 상서일까? 또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강에 잠겼다는 말은 없으니, 정녕 항우(項羽)가 사람을 시켜서 비밀리에 쳐 죽이고 그 시체를 물에 던진 것일까? 이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고, 드디어 문(文)을 지어 조문한다.
하늘이 법칙을 마련하여 사람에게 주었으니, 어느 누가 사대(四大) 오상(五常) 높일 줄 모르리오. 중화라서 풍부하고 이적이라서 인색한 바 아니거늘, 어찌 옛적에만 있고 지금은 없을손가. 그러기에 나는 이인(夷人)이요 또 천 년을 뒤졌건만, 삼가 초나라 회왕을 조문하노라. 옛날 조룡(祖龍)이 아각(牙角)을 농(弄)하니, 사해(四海)의 물결이 붉어 피가 되었네. 비록 전유(鱣鮪), 추애(鰌鯢)라도 어찌 보전할손가. 그물을 벗어나기에 급급했느니, 당시 육국(六國)의 후손들은 숨고 도망가서 겨우 편맹(編氓)가 짝이 되었다오. 항양(項梁)은 남쪽 나라의 장종(將種)으로, 어호(魚狐)를 종달아서 일을 일으켰네. 왕위를 얻되 백성의 소망에 따름이여! 끊어졌던 웅역(熊繹)의 제사를 보존하였네. 건부(乾符)를 쥐고 남면(南面)을 함이여! 천하엔 진실로 미씨(芈氏)보다 큰 것이 없도다. 장자(長者)를 보내어 관중(關中)에 들어가게 함이여! 또는 족히 그 인의(仁義)를 보겠도다. 양흔 낭탐(羊狠狼貪)이 관군(冠軍)을 마음대로 축임이여! 어찌 잡아다가 제부(齊斧)에 기름칠 아니했는고. 아아, 형세가 너무도 그렇지 아니함에 있어, 나는 왕을 위해 더욱 두렵게 여겼네. 반서(反噬)를 당하여 해석(醢腊)이 됨이여, 과연 하늘의 운수가 정상이 아니었구려. 빈의 산은 우뚝하여 하늘을 솟음이야! 그림자가 해를 가리어 저녁에 가깝고. 빈의 물은 밤낮으로 흐름이여! 물결이 넘실거려 돌아올 줄 모르도다. 천지도 장구(長久)한들 한이 어찌 다하리 넋은 지금도 표탕(瓢蕩)하도다. 내 마음이 금석(金石)을 꿰뚫음이여! 왕이 문득 꿈속에 임하였네. 자양(紫陽)의 노필(老筆)을 따라가자니, 생각이 진돈(螴蜳)하여 흠흠(欽欽)하도다. 술잔을 들어 땅에 부음이어! 바라건대 영령은 와서 흠향(歆饗)하소서.’
하였다. 그 ‘조룡(祖龍)이 아각(牙角)을 농(弄)했다.’는 조룡은 진 시황(秦始皇)인데, 종직이 진 시황을 세조에게 비한 것이요, 그 ‘왕위를 얻되 백성의 소망을 따랐다.’고 한 왕은 초나라 회왕(懷王)의 손자 심(心)인데, 처음에 항량(項梁)이 진(秦)을 치고 심을 찾아서 의제(義帝)를 삼았으니, 종직은 의제를 노산(魯山)에게 비한 것이다. 그 ‘양흔 낭탐(羊狠狼貪)하여 관군(冠軍)을 함부로 무찔렀다.’고 한 것은, 종직이 양흔 낭탐으로 세조를 가리키고, 관군을 함부로 무찌른 것으로 세조가 김종서(金宗瑞)를 베인 데 비한 것이요. 그 ‘어찌 잡아다가 제부(齊斧)에 기름칠 아니 했느냐.’고 한 것은, 종직이 노산이 왜 세조를 잡아버리지 못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 ‘반서(反噬)를 입어 해석(醢腊)이 되었다.’는 것은, 종직이 노산이 세조를 잡아버리지 못하고, 도리어 세조에게 죽었느냐 하는 것이요. 그 ‘자양(紫陽)은 노필(老筆)을 따름이여, 생각이 진돈하여 흠흠하다.’고 한 것은, 종직이 주자(朱子)를 자처하여 그 마음에 부(賦)를 짓는 것을, 《강목(綱目)》의 필(筆)에 비의한 것이다. 그런데 일손이 그 문(文)에 찬(贊)을 붙이기를 ‘이로써 충분(忠憤)을 부쳤다.’ 하였다. 생각건대, 우리 세조 대왕께서 국가가 위의(危疑)한 즈음을 당하여, 간신이 난(亂)을 꾀해 화(禍)의 기틀이 발작하려는 찰라에 역적 무리들을 베어 없앰으로써 종묘 사직이 위태했다가 다시 편안하여 자손이 서로 계승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니, 그 공과 업이 높고 커서 덕이 백왕(百王)의 으뜸이신데, 뜻밖에 종직이 그 문도들과 성덕(聖德)을 기롱하고 논평하여 일손으로 하여금 역사에 무서(誣書)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이 어찌 일조일석의 연고이겠느냐. 속으로 불신(不臣)의 마음을 가지고 세 조정을 내리 섬겼으니, 나는 이제 생각할 때 두렵고 떨림을 금치 못한다. 동ㆍ서반(東西班) 3품 이상과 대간ㆍ홍문관들로 하여금 형을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정문형(鄭文炯)ㆍ한치례(韓致禮)ㆍ이극균(李克均)ㆍ이세좌(李世佐)ㆍ노공필(盧公弼)ㆍ윤민(尹慜)ㆍ안호(安瑚)ㆍ홍자아(洪自阿)ㆍ신부(申溥)ㆍ이덕영(李德榮)ㆍ김우신(金友臣)ㆍ홍석보(洪碩輔)ㆍ노공유(盧公裕)ㆍ정숙지(鄭叔墀)가 의논드리기를,
“지금 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보오니, 입으로만 읽지 못할 뿐 아니라 눈으로 차마 볼 수 없사옵니다. 종직이 세조조에 벼슬을 오래하자, 스스로 재주가 한 세상에 뛰어났는데 세조에게 받아들임을 보지 못한다 하여, 마침내 울분과 원망의 뜻을 품고 말을 글에다 의탁하여 성덕(聖德)을 기롱했는데, 그 말이 극히 부도(不道)합니다. 그 심리를 미루어 보면 병자년에 난역(亂逆)을 꾀한 신하들과 무엇이 다르리까. 마땅히 대역(大逆)의 죄로 논단하고 부관 참시(剖棺斬屍)해서 그 죄를 명정(明正)하여 신민의 분을 씻는 것이 실로 사체에 합당하옵니다.”
하고, 유지(柳輊)는 의논드리기를,
“종직의 불신(不臣)한 그 심리는, 죄가 용납될 수 없사오니 마땅히 극형에 처하옵소서.”
하고, 박안성(朴安性)ㆍ성현(成俔)ㆍ신준(申浚)ㆍ정숭조(鄭崇祖)ㆍ이계동(李季仝)ㆍ권건(權健)ㆍ김제신(金悌臣)ㆍ이계남(李季男)ㆍ윤탄(尹坦)ㆍ김극검(金克儉)ㆍ윤은로(尹殷老)ㆍ이집(李諿)ㆍ김무(金珷)ㆍ김경조(金敬祖)ㆍ이숙함(李叔瑊)ㆍ이감(李堪)은 의논드리기를,
“종직이 요사한 꿈에 가탁하여 선왕을 훼방(毁謗)하였으니, 대역 부도(大逆不道)입니다. 마땅히 극형에 처해야 하옵니다.”
하고, 변종인(卞宗人)ㆍ박숭질(朴崇質)ㆍ권경우(權景祐)ㆍ채수(蔡壽)ㆍ오순(吳純)ㆍ안처량(安處良)ㆍ홍흥(洪興)은 의논드리기를,
“종직이 두 마음을 품었으니 불신(不臣)한 죄가 이미 심하온즉, 율(律)에 의하여 처단하는 것이 편하옵니다.”
하고, 이인형(李仁亨)ㆍ표연말(表沿沫)이 의논드리기를,
“종직의 조의제문과 지칭한 뜻을 살펴보니 죄가 베어 마땅하옵니다.”
하고, 이극규(李克圭)ㆍ이창신(李昌臣)ㆍ최진(崔璡)ㆍ민사건(閔師蹇)ㆍ홍한(洪瀚)ㆍ이균(李均)ㆍ김계행(金係行)이 의논드리기를,
“종직의 범죄는 차마 말로 못하겠으니, 율문에 의하여 논단해서 인신(人臣)으로 두 마음 가진 자의 경계가 되도록 하옵소서.”
하고, 정성근(鄭誠謹)이 의논드리기를,
“종직이 음으로 이런 마음을 품고 세조를 섬겼으니, 그 흉악함을 헤아리지 못하온즉 마땅히 중전(重典)에 처해야 하옵니다.”
하고, 이복선(李復善)이 의논드리기를,
“종직이 조의제문을 지은 것이 정축년(丁丑年) 10월이었으니, 그 불신(不臣)의 마음을 품은 것이 오래이었습니다. 그 조문(弔文)을 해석한 말을 살펴보니, 비단 귀로 차마 들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역시 눈으로도 차마 보지 못하겠습니다. 그 몸이 비록 죽었을지라도 그 악을 추죄(追罪)할 수 있사오니, 마땅히 반신(叛臣)의 율에 따라 논단하소서. 종직의 귀신이 지하에서 반드시 머리를 조아리며 달갑게 복죄(伏罪)할 것입니다.”
하고, 이세영(李世英)ㆍ권주(權柱)ㆍ남궁찬(南宮璨)ㆍ한형윤(韓亨允)ㆍ성세순(成世純)ㆍ정광필(鄭光弼)ㆍ김감(金勘)ㆍ이관(李寬)ㆍ이유령(李幼寧)이 의논드리기를,
“지금 종직의 글을 보오니, 말이 너무도 부도(不道)하옵니다. 난역(亂逆)으로 논단하는 것이 어떠하옵니까?”
하고, 이유청(李惟淸)ㆍ민수복(閔壽福)ㆍ유정수(柳廷秀)ㆍ조형(趙珩)ㆍ손원로(孫元老)ㆍ신복의(辛服義)ㆍ안팽수(安彭壽)ㆍ이창윤(李昌胤)ㆍ박권(朴權)이 의논드리기를,
“종직의 조의제문은 말이 많이 부도(不道)하오니, 죄가 베어도 부족하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이미 죽었으니 작호(爵號)를 추탈하고 자손을 폐고(廢錮)하는 것이 어떠하옵니까?”
하였는데, 문형 등의 의논에 따랐다. 어필(御筆)로 집의(執義) 이유청(李惟淸) 등과 사간(司諫) 민수복(閔壽福)의 논의에 표를 하고, 필상 등에게 보이며 이르기를,
“종직의 대역이 이미 나타났는데도 이 무리들이 논을 이렇게 하였으니, 이는 비호하려는 것이다. 어찌 이와 같이 통탄스러운 일이 있느냐. 그들이 앉아 있는 곳으로 가서 잡아다가 형장 심문을 하라.”
하였다. 이때 여러 재상과 대간과 홍문 관원이 모두 자리에 있었는데, 갑자기 나장(羅將) 십여 인이 철쇄(鐵鎖)를 가지고 일시에 달려드니, 재상 이하가 놀라 일어서지 않는 자가 없었다. 유청 등은 형장 30대를 받았는데, 모두 다른 정(情)이 없음을 공초하였다.
【원전】 13 집 318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왕실-국왕(國王) / 역사-편사(編史) / 역사-고사(故事) / 사법-탄핵(彈劾) / 변란-정변(政變) / 어문학-문학(文學)
[주-D001] 서초 패왕(西楚霸王) : 항우(項羽).[주-D002] 사대(四大) 오상(五常) : 사대(四大)는 천대(天大)ㆍ지대(地大)ㆍ도대(道大)ㆍ왕대(王大)를 이름이요, 오상(五常)은 오륜(五倫)을 이름.[주-D003] 조룡(祖龍) : 진 시황(秦始皇).[주-D004] 웅역(熊繹) : 주 성왕(周成王) 때 사람인데 초(楚)의 시봉조(始封祖)임.[주-D005] 건부(乾符) : 천자의 표시로 갖는 부서(符瑞).[주-D006] 미씨(芈氏) : 초(楚)나라의 성.[주-D007] 양흔 낭탐(羊狠狼貪) : 항우(項羽)를 비유함.[주-D008] 관군(冠軍) : 경자 관군(卿子冠軍).[주-D009] 제부(齊斧) : 정벌하는 도끼임. 천하를 정제한다는 뜻에서 나옴.[주-D010] 해석(醢腊) : 젓과 포.[주-D011] 진돈(螴蜳) : 충융(沖瀜)과 같은데, 포외(怖畏)의 기운이 넘쳐서 안정하지 못한다는 뜻임.[주-D012] 노산(魯山) : 단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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佔畢齋集 佔畢齋年譜 / 年譜
佔畢齋先生年譜 艮翁李公。因璞齋所編。更加校正。
天順元年丁丑。世祖大王三年 先生二十七歲。先生不脫絰帶。寢苫枕木。䟽糲以食。侍奠之暇。自廬所。每朝夕。來省母夫人而返。雖隆寒暑雨。不懈也。吊義帝文曰。丁丑十月日。余自密城道京山。宿踏溪驛。此說恐誤。先生私淑於家。獨推圃隱先生。卓然自立於頹波。不爲習俗所移。而能從聖制。以致自盡之誠。則豈有居憂出入之理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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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필재(佔畢齋) 〈조의제문(弔義帝文)〉 明齋批判
일두선생유집(一蠧先生遺集) 정여창(鄭汝昌)생년1450년(세종 32)몰년1504년(연산군 10)자백욱(伯勗)호일두(一蠧)본관하동(河東)시호문헌(文獻)
성종 9 1478 무술 成化 14 29 4월, 李深源ㆍ南孝溫 등과 함께 昭陵에 대한 일로 任士洪 등의 탄핵을 받다.
성종 11 1480 경자 成化 16 31 성종이 성균관에 유지를 내려 ‘經學에 밝고 행실이 닦여진 선비’를 추천토록 하여, 이에 제일로 천거되다.
성종 13 1482 임인 成化 18 33 花開洞으로부터 南原 中方里로 尹孝孫을 방문하여 함께 「朱書」를 강론하다.
성종 14 1483 계묘 成化 19 34 진사시에 합격하여 成均館에 입학하다.
성종 17 1486 병오 成化 22 37 모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廬墓하다.
성종 19 1488 무신 弘治 1 39 蟾津江 어귀에 岳陽亭을 짓고 讀書, 講道하고 吟詠하며 생활하다.
성종 20 1489 기유 弘治 2 40 4월, 金馹孫과 함께 頭流山을 유람하다. ○ 晉州의 姜渾을 방문하여 詩文을 논하고, 함께 密陽의 金宗直을 찾아 뵙고 가르침을 받다.
성종 21 1490 경술 弘治 3 41 趙孝仝, 尹兢의 천거로 昭格署參奉에 제수되다. 소를 올려 사양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다. ○ 12월, 文科 別試에 합격하다. 김일손의 천거로 예문관 검열이 되다. ○ 侍講院 說書가 되다.
김일손(金馹孫)생년1464년(세조 10)몰년1498년(연산군 4)자계운(季雲)호탁영자(濯纓子), 이당(伊堂), 운계은사(雲溪隱士), 소미산인(少微山人), 영귀학인(咏歸學人), 와룡초부(臥龍樵夫), 반계거사(磻溪居士)본관김해(金海)시호문민(文愍)
성종 11 1480 경자 成化 16 17 3월, 양친을 따라 雲溪로 돌아가다. ○ 9월, 密陽에서 居喪中인 金宗直에게 학문을 배우다. 이때 金宏弼ㆍ鄭汝昌 등 12명과 神交를 맺다.
성종 12 1481 신축 成化 17 18 2월, 김종직에게 韓愈의 글을 배우다. ○ 7월, 남효온과 龍門山을 유람하다. ○ 8월, 原州의 酒泉山으로 元昊를 방문하다.
성종 13 1482 임인 成化 18 19 10월, 庭試에 응시하여 두 兄의 장원급제를 위해 병을 핑계하고 退場하다. 이때 두 형이 1, 2등을 하다.
성종 14 1483 계묘 成化 19 20 9월, 부친상을 당하다. ○ 11월, 淸道 水也山에 장사 지내다.
성종 17 1486 병오 成化 22 23 봄, 淸道郡學이 되다. ○ 8월, 生員ㆍ進士가 되다. ○ 10월, 文科覆試에서 〈中興策〉으로 장원하다. ○ 12월, 承文院正字가 되다.
성종 18 1487 정미 成化 23 24 1월, 홍문관 정자가 되다. ○ 4월, 부인상을 당하다. ○ 9월, 부모 봉양을 위해 晉州牧學이 되다.
성종 19 1488 무신 弘治 1 25 3월, 牧使 慶太素 및 遊官諸公 21人과 矗石樓에서 修禊하고 序를 짓다. ○ 7월, 병을 핑계로 敎授職을 그만두다. ○ 9월, 舊室의 동편 臥龍峯 아래에 雲溪精舍를 세우고 이에 ‘臥龍樵夫’로 號를 삼다.
성종 20 1489 기유 弘治 2 26 4월, 藍溪에 가서 鄭汝昌을 방문하고 함께 頭流山을 유람하다.〈頭流紀行錄〉
점필재집(佔畢齋集) 김종직(金宗直)생년1431년(세종 13)몰년1492년(성종 23)자계온(季昷), 효관(孝盥)호점필재(佔畢齋)본관선산(善山)시호문충(文忠)
세조 4 1458 무인 天順 2 28 상을 마치다. ‘明發窩’를 짓고 경전을 연구하다. ○ 「彝尊錄」을 手撰하다. ○ 가을, 別擧初試에 합격하다.
성종 1 1470 경인 成化 6 40 즉위 후 처음 개설한 經筵의 應選者 19인에 들다. ○ 6월, 藝文館修撰 知製敎가 되다. ○ 일본사신 藺上人을 전송하러 薺浦에 나가다. ○ 겨울, 모친 봉양을 위하여 咸陽郡守가 되다.
성종 3 1472 임진 成化 8 42 봄ㆍ가을로 鄕飮酒儀와 養老禮를 시행하다. ○ 8월, 〈遊頭流錄〉과 〈觀海樓記〉를 짓다. ○ 鄭汝昌ㆍ金宏弼이 와서 수학하다.
성종 5 1474 갑오 成化 10 44 茶種을 심어 供上하다. 〈茶園詩〉를 짓다.
성종 6 1475 을미 成化 11 45 十考를 받아 通訓大夫에 오르고, 承文院事가 되다. ○ 郡人이 生祠堂을 세우다. ○ 〈申文忠公文集序〉를 짓다.
성종 7 1476 병신 成化 12 46 7월, 모친 봉양을 위하여 善山府使가 되다. ○ 〈尹先生祥詩集序〉를 짓다.
성종 10 1479 기해 成化 15 49 12월, 모친상을 당하다.
성종 11 1480 경자 成化 16 50 「彝尊錄」을 再撰하다.
성종 12 1481 신축 成化 17 51 楊浚ㆍ楊沈ㆍ洪裕孫이 와서 수학하다.
성종 13 1482 임인 成化 18 52 2월, 상을 마치다. 金驥孫ㆍ金馹孫이 와서 수학하다. ○ 3월, 金陵舊居로 돌아오다.
명재유고 제31권 / 잡저(雜著) / 수록(手錄)
○ 점필재(佔畢齋)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읽은 적이 있는데, 뜻이 있어서 쓴 것이 분명하였다. 게다가 그 문집에 있는 〈도연명의 술주시에 화답하다[和淵明述酒]〉와 〈고풍 두 수[古風二首]〉 - 하나는 양 간문제(梁簡文帝)를 두고 읊은 시이고, 하나는 당 문종(唐文宗)을 두고 읊은 시이다. - 와 홍연(弘演)에 대해 읊은 시 같은 여러 작품을 살펴보면 모두 우연히 쓴 것이 아닌 듯하다. 가만히 생각건대, 이 노인이 만약 탕왕(湯王)이나 무왕(武王)을 그르게 여기는 뜻이 있었다면 차라리 김열경(金悅卿)이 한 것처럼 했어도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세조 기묘년(1459, 세조5)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참판에까지 이르렀으면서 이런 말들로 비유하여 뜻을 시에 드러내었으니, 그렇다면 이는 예양(豫讓)의 이른바 ‘신하가 되어 두 마음을 품은 자[爲人臣懷二心者]’라 할 수 있다. 또한 부끄러워할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 점필재의 〈아들을 장사 지내고 쓴 시[葬子詩]〉에, “나는 지금 흙덩이 베고 명발와에 있으며[吾方枕塊明發窩] 선원은 은총 입어 고향에 돌아왔는데[源乃蒙恩返鄕曲]”라고 하였고, 또 〈단비가 내린 것이 기뻐서 지은 시[喜雨詩]〉의 서(序)에, “옛날 선친의 상중에 있을 때 큰 가뭄이 들었는데, 노비들이 굶주리며 초근목피로 연명하였다. 이에 〈가난으로 고통 받는 시[食貧詩]〉를 지어 그 일을 기록하였다. 지금은 선비(先妣)의 상중에 있는데, 가뭄으로 인해 전답이 더욱 심하게 황폐해졌다. 그러다가 6월 14일에 큰비가 내려 응천(凝川)의 물이 벌창해졌기에 이를 기뻐하여 지은 것이다.……” 하였다. 옛날에 상중에는 “말을 할 때 수사를 부려 꾸미지 않는다.[言不文]” 하였으니, 우환 중에 시를 짓는 것이 예에 있어 타당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근래 들으니, 어떤 한 유생(儒生)이 상중에 시를 지었다가 사람들에게 그 사실이 드러나서 몇 년 동안 고초를 겪었다고 하는데, 요즘 사람들이 남을 책망하기 좋아하고 남의 단점을 들추어내기 좋아하는 것은 미워할 일이지만, 예교(禮敎)가 분명한 점은 눈여겨볼 만한 일이다.
○ 점필재가 《이준록(彝尊錄)》을 지었는데, 제1은 보도(譜圖)이고 제2는 기년(紀年)이며, 제3은 사우(師友) - 은문(恩門)과 대과(大科)ㆍ소과(小科)의 동방(同榜)들을 모두 수록하였다. - 이고 제4는 사업(事業)이니, 매우 상세하고 완비되어 있어 선조(先祖)의 행적을 기록하는 글의 본보기가 될 만하다. 그러나 자손록(子孫錄) 가운데 자신의 두 형을 빼놓은 것이 문제이다. 그들의 어머니가 비록 쫓겨나기는 하였지만 그 자식은 당연히 형제의 항렬에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아울러 그들의 기록을 빼 버렸으니, 매우 사리에 어긋나는 듯하다. 위의 두 조목과 아울러 이 조목까지 《점필재집》을 보면 기록이 있다. 21일에 쓴다.
明齋先生遺稿卷之三十一 / 雜著 / 手錄
去歲孟冬。余將南來。適錦里李丈來過。臨別語之曰。年少須愼言。余敬受之。自料余未曾以口過聞於李丈。而今以此見敎者。蓋見余輕浮故也。到星村。與黃周卿同宿。夜周卿謂曰。昨陪兪,李二丈。遊神都。鼎坐少憩。語及仁卿。李丈曰。吾黨後輩。近甚寂寥。此子忽能自樹。甚慰人意。然賢輩相見。須責勵勸勉之云。余慙無以爲應。到萬松。與權次仁同宿。次仁曰。曩見兪丈曰。尹拯之事吾輩誤矣。當以尊公言爲正。余於是極知師友之惓惓於不肖也。何修可以稱塞其相愛之盛意乎。是以尋常偸惰放倒。忽一念至。未嘗不惕然愧懼。汗流浹背也。適讀論語小註。朱子曰。今人都不去自修。只靠師友說話之語。益知自治之功。爲不可疏。而烏頭之力。爲不可恃也。遂識之以爲循省警責之資。辛卯四月旣望。在聞喜書。
粗知讀書者。孰有暴棄之心哉。只緣志不堅苦。或氣昏體倦。不能振奮。或雜宂經心。漸成廢抛。凡此二病。拯實有焉。吳楸灘詩曰。不是全然無意者。如何長作舊時人。豈不大可懼哉。願以今日爲始。一日之間。凡有所看破。有所思得。有所聞見。切於受用者。並隨事箚錄。以自考課。庶幾有所程式。放過時少。而存在時多也。匪警滋荒。匪識滋漏。實是眞至之言也。乙未八月十七日。謹識。
又因校正理學通錄謄本。戒之曰。汝性緩。而凡事粗率。何也。雖性敏者。不可倥傯。況和緩。無不及之理乎。
嘗讀佔畢齋弔義帝賦。明是有意而發。及考其集如和淵明述酒及古風二首。一詠梁簡文。一詠唐文宗。 及詠弘演等作。皆似不偶然。竊謂此老若有非湯,武之志。則寧如金悅卿所爲。無不可者。乃以光廟己卯登第。官至伐氷。而顧以此等言語。形於吟詠。豫讓所謂爲人臣懷二心者。不亦可媿歟。
葬子詩曰。吾方枕塊明發窩。源乃蒙恩返鄕曲。又於喜雨詩序曰。昔居先公憂。大旱。奴婢飢食草木。於是作食貧詩。以記之。今方居先妣憂。旱荒尤甚。六月十四日大雨。凝川水漲。喜而有作云云。古者居喪。言不文。憂中作詩。未知於禮何居。近聞有一儒生。以喪中作詩。見發於人。數年坎軻。今人之工訶喜訐。雖可惡。而禮敎之明。則可見矣。
作彝尊錄。第一譜圖。第二紀年。第三師友。恩門及大小科同年。皆收錄 第四事業。甚詳且備。可爲紀狀之法。但子孫錄中。闕其二兄。其母雖黜。其子則當序于兄弟之列。而並絀之。恐甚乖當。並上二條。看佔畢集有記。二十一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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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필재집(佔畢齋集) 김종직(金宗直)생년1431년(세종 13)몰년1492년(성종 23)자계온(季昷), 효관(孝盥)호점필재(佔畢齋)본관선산(善山)시호문충(文忠)
佔畢齋集彝尊錄 / 佔畢齋集彝尊錄上 子通訓大夫前善山都護府使宗直撰 / 先公譜圖第一
*金叔滋 1389 1456 金滋 善山 子培 江湖 文康
先府君諱叔滋。字子培。初諱滋。中司馬後加叔。進士公第一子也。餘見紀年文遺行錄 ○公先娶谷山人韓變之女。生宗輔,宗翼及尙州金仲老妻。以進士公之命出之。庚子歲。娶密陽朴夫人。生宗碩,宗裕,宗直及信川康惕妻,驪興閔除妻。○中直大夫司宰監正諱弘信。驪興閔氏夫人。是朴夫人之考妣也。監正公之考諱天卿。中正大夫三司左尹。後贈嘉善大夫工曹參判。祖諱仁杞。贈通政大夫僉知中樞院事。曾祖諱允貞。贈中直大夫禮賓寺尹。妣遂寧魏氏。贈貞夫人。高麗監察御史文愷之曾孫也。閔氏夫人考諱暐。三司左尹。祖諱瑞明。昌禧宮錄事。曾祖諱日仟。追贈奉翊大夫版圖判書。妣密陽孫氏。常滿庫主簿諱應良之女也。監正公少與兄彥忠。俱以武材顯名。遇知於本朝太宗焉。世宗卽位元年六月。命將討對馬島。公以左軍知兵馬使。先登沒於陣。無子。唯我母夫人耳。孽子根生奉遺衣。葬於密陽府東丹場里。閔氏先卒。葬密陽府西五里粉底谷。○宗碩娶金海人司直裵𥜚之女。金海君元龍之玄孫。光州人正言盧異之外孫也。宗碩癸酉年秋。中進士及生員。丙子年春任元濬榜登第。補成均直學。庚辰三月。卒于京。年三十八。返葬于密陽府西五里兀惠谷。子二人。緻丁酉年進士。縯庚子年進士。緻娶河濱人主簿李世蕃之女。生子庾信。○宗裕娶安東人司醞署令權恢之女。一齋先生漢功之玄孫。正言盧異之甥女也。宗裕癸酉秋。中進士試。仕爲靑松敎授官。子三人女一人。長繪娶別侍衛鄭希英之女。次綬。次紘。○宗直娶昌寧人蔚珍縣令曺繼門之女。高麗尙書李琚之後。繕工監正河濱李好信。其外祖也。宗直癸酉春。進士。己卯春。高台鼎榜登第。丙申秋。拜本貫善山府使。侍母令人而赴任。己亥十二月二十一日。令人卒。奉柩返葬于粉底谷。子三人。繶,緄,紞。緄娶弘文館修撰海平金孟性之女。皆早世。女二人。長適生員全州柳世湄。生二子。星輔,星弼。○康惕以別侍衛。累至彰信校尉。生二子一女。長伯珍娶司直朴從林之女。生一女。伯珍壬辰春。中生員。丁酉春甲科第三人。今爲典牲署直長。次仲珍。庚子春。中生員,進士試。○閔除早死。子熲娶奉化縣監慶州李柃之女。生二男。
嗚呼。我金氏。自高麗時。淪於民伍者甚久。良醞公振起以後。逮今五葉矣。而入譜圖者。落落如晨星。且以科第出身者。纔吾家數人而已。尙未至於碩大顯隆。其有待也歟。何天之慳嗇若是耶。雖然。天若不遺我先祖父積累之勤。苟使子孫食其報焉。則余無德矣。且已遲暯矣。不能當之。其於諸子姪輩。庶有望焉。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7월 28일 丁未 4번째기사 1392년 명 홍무(洪武) 25년 / 문무 백관의 관제
성균관(成均館)은 학교ㆍ이업(肄業) 등의 일을 관장하는데, 대사성(大司成) 1명 정3품이고, 좨주(祭酒) 1명 종3품이고, 악정(樂正) 2명 정4품이고, 직강(直講) 1명 정5품이고, 전부(典簿) 1명 종5품이고, 박사(博士) 2명 정7품이고, 순유 박사(諄諭博士) 2명 종7품이고, 진덕 박사(進德博士) 2명 정8품이고, 학정(學正) 2명, 학록(學錄) 2명 정9품이고, 직학(直學) 2명, 학유(學諭) 4명 종9품이고, 서리(書吏) 2명 9품인데, 거관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