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손 모으는 합장은 화합의 출발이자 평등의 예
절 문서 도롱이 벗는 정선의 작품 눈길 헤치며 도착한 율곡 이이에 합장 예로 맞이하는 스님들 모습 상대 대한 예의 중시한 옛 어른들 초파일 합장 거부 정치인과 비교 겸재 정선 作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 下 사문탈사’, 33.1×21.2㎝, 1741년, 간송미술관. 올해 사월초파일 부처님오신날, 전국의 모든 사찰들에는 수많은 참배객들이 방문해 연등을 켜고 관욕행사를 하면서 아기 부처님 탄생을 축하했습니다. 불교미술연구자인 저는 평소 사찰을 방문하고 불상과 불화를 친견하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지만 왠지 부처님오신날의 사찰 방문은 특별한 감흥을 느끼곤 합니다. 수많은 연등에 담겨진 발원과 소원지에 적힌 간절한 소망들을 보면서 현대인이 이런 소망을 기원하고 의지할 수 있는 곳이 우리 사찰 말고 또 어디에 있을까 싶습니다. 사찰을 방문한 수많은 민초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가족의 소박한 기원이 이뤄지도록 함께 기도하는 의식은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한 번도 멈춘적 없는 한국불교의 위대한 전통이자 불교가 여전히 이 땅에 있어야 하는 존재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올해 부처님오신날 봉축법요식 뉴스 끝에 정말 언짢은 소식 하나를 접했습니다. 한 정당의 대표가 봉축법요식에 참석하고도 합장을 거부하고 아무런 예도 표하지 않았다는 뉴스입니다. 부처님오신날 봉축법요식에 참석했다는 것 자체는 분명 부처님 탄신을 함께 축하하기 위함이었을 텐데 부처님을 향해 절도 아니고 기본예절인 합장조차 거부하였다니 정말 믿을 수 없는 뉴스였습니다.
그분은 기독교인으로 아주 활발히 종교활동을 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진 분입니다. 본인도 종교인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종교행사에서 참석해 기본적인 예의조차 거부하는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정말 뭐라 비판하기조차 부끄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뉴스를 접하고 생각나는 그림이 한 점 있습니다. 바로 겸재 정선의 ‘사문탈사(寺門脫蓑)’입니다.
건물 지붕에도 눈이 있고 땅과 나무 위에도 눈이 쌓인걸 보니 겨울입니다. 큰길 옆 도랑에 물이 유유히 흐르는데 큰 판석 한 장으로 다리를 놓았습니다. 노거수가 울창한 어느 절 문 앞에 방금 판석 다리를 건너 소를 타고 온 선비가 도착했습니다. 사찰에서는 선비가 매우 중요한 손님인지 젊은 스님 두 분이 달려나와 양쪽에 서서 선비의 도롱이를 받기위해 손을 벌리고 있습니다. 이 모습에서 이 그림의 제목이 왼쪽에 적혀있는데 사문탈사, ‘절 문에서 도롱이를 벗다’ 입니다. 문에서는 스님이 합장을 하며 선비에게 예를 표하고 있고 안쪽에는 노스님까지 나와 선비를 맞이하려 기다리고 있습니다. 조용했던 산사가 선비의 방문으로 갑자기 분주해진 모양입니다.
사찰의 모습은 왠지 우리가 자주 보던 사찰의 모습과는 조금 다른 모습입니다. 문 옆으로 행랑채가 달려있는데 이런 건축형태는 조선후기 왕릉이나 원(園)을 관리하고 제사를 지낸 재궁(齋宮) 건물의 모습으로 어느 원당이나 원찰인 조포사(造泡寺)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조포사는 왕릉이나 원에서 쓰는 제수물품을 공급하는 역할을 맡은 사찰입니다.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이들 사찰은 능침사(陵寢寺), 원당사찰(願堂寺刹) 등으로 지칭되었는데, 조선후기에는 지위가 점차 하락하면서 명칭 또한 조포사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원당사찰들은 대부분 왕릉이 많은 경기도에 있었는데 현재 그림과 같은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곳은 화성의 용주사입니다. 화성 용주사는 헌륭원의 재궁사찰로 삼문 옆으로 행랑채가 연결되어 있어 그림 속 사찰 입구와 같은 형태입니다.
그렇다면 눈을 헤쳐 가며 산사에 온 선비는 누구이고 왜 이곳에 온 걸까요? 그 이유는 그림 뒤에 붙은 겸재의 평생지기인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 1671~1751)의 편지에 적혀있습니다. 겸재가 큰아들 편에 그림을 사천에게 보내고 제화시를 받아 돌아가는 날 아침 자고 일어나니 눈이 온 세상에 가득 쌓여 있었습니다. 마음 같아선 당장 겸재에게 달려가 설경을 함께 즐기고 싶으나 율곡 이이 선생이 소를 타고 눈 덮인 산사를 찾아갔던 고사를 이야기하며 그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려달라는 편지를 겸재에게 보냈습니다. 이 편지의 내용으로 소를 타고 절을 찾은 선비가 바로 율곡 이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율곡 이이가 언제 어느 절에 찾아갔는지 정확히 알려지진 않았지만 이이 선생은 불교와 인연이 깊습니다. 13살 때 아버지를 잃은 이이는 16살 때 너무나 사랑했던 어머니 신사임당마저 세상을 떠나자 크게 상심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묘 옆에서 시묘살이를 하던 중 우연히 접한 불교서적에 흥미를 느껴 삼년상을 치루고 금강산 절에 들어가 1년간 불교의 선학을 공부하면서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했고 학문의 시야도 넓혔습니다.
그렇다고 율곡 선생이 불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뼛속까지 유학자입니다. 아마도 눈 덮인 산사를 찾아온 이유도 불공 때문이 아니라 마음을 터놓고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스님을 만나기 위해서 일 것입니다. 그런 이이를 스님은 합장의 예로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님과 유학자의 진솔한 만남. 차이보다는 상대에 대한 이해와 존중을 중시했던 옛 어른들의 모습입니다.
합장(合掌)은 글자로만 본다면 손바닥을 합한다는 뜻이지만, 두 손바닥을 모은다는 뜻은 나와 너, 무와 유, 안과 밖이 하나라는 의미입니다. 상대가 나와 둘이 아니라는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의 표현인 것입니다. 상대에게 당신을 해할 무기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서양식 악수와는 그 출발부터 다른 인사법입니다. 그래서 유학자들에게 핍박이 극도로 심했던 조선시대에 유학자를 만나도 또 천한 기녀를 만나도 똑같이 합장의 예로 인사했던 것입니다. 합장은 바로 화합의 출발이자 평등의 예인 것입니다.
‘합장이위화 신위공양구 성심진실상 찬탄향연복(合掌以爲花 身爲供養具 誠心眞實相 讚嘆香煙覆). 손바닥을 합해 꽃 한 송이 만들고 이 몸으로 공양의 도구를 삼아서 성심을 다하는 진실한 마음으로 찬탄의 향 연기를 가득 채우오리다.’ 합장게(合掌偈).
손태호 동양미술작가, 인더스투어 대표
출처 :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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