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양명 50살 소흥에서 明德의 목적이 親民에 있다는 明德親民의 일사(一事) 뜻 설명
2019년 4월 24일
왕양명이 47살부터 50살까지 강서성에 머물면서 도적들을 소탕하고 주신호 반란을 진압하였습니다. 동시에 지역사회의 안정을 위하여 많은 선후(善後)대책을 실행하였습니다. 지역사회를 안정시키는 많은 정책을 다른 관원들을 비롯하여 지역 인사들과 상의하여 실행하였습니다. 이러한 실제행정경험은 50살에 지은 「大學古本(傍釋)」에서 강조한 친민(親民) 뜻에 잘 나타나있습니다. 다시 말해 “명덕(明德)과 친민(親民)은 동일한 하나의 일(一事)이며(明德、親民,只是一事。)” 주자학처럼 둘로 나눌 수 없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친민 뜻을 잘 보여주는 자료로서 장악의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왕양명이 여요현에서 소흥에 돌아와서 이듬해부터 아버지 삼년상을 치르던 어느 시기에 복건성 혜안현(惠安縣) 출신 장악(張岳, 1492-1553)을 만나서 깊이 토론하였다고 합니다. 왕양명은 “명덕공부의 목적이 친민에 있다.(明德工夫,只在親民。)”고 주장하였습니다.
여덟 글자씩의 두 말은 왕양명 일생의 학술에서 가장 중요한 선언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왕양명이 “명명덕과 친민은 나 자신을 수양하고 동시에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것(明明德、親民,猶修己、安百姓。)”이라고 말하였듯이 나를 위한 학술과 남을 위한 사업 둘이 하나라고 설명한 것입니다. 왕양명이 50살 이후에는 남을 위한 사업 관점에서 양지를 많이 설명합니다. 소위 자리(自利)와 이타(利他) 두 공덕이 원만하길 바라는 길로 나섰습니다.
왕양명은 일찍부터 주자학의 잘못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50살 이전에는 학생들에게 정좌공부를 강조하여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50살(1521) 8월 하순에 아버지 계신 소흥에 도착하고 다시 고향 여요현에도 들렀습니다. 이때부터는 주로 양지를 설명하는 강연을 하였고 정좌를 잘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항상 친민 관점에서 양지를 설명하였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왕양명 일생의 학술을 두 단락으로 나눈다면 마땅히 50살에 친민을 강조한 시기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왕양명이 오래 살면서 친민을 구체적으로 더욱 실천하였다면 양명학이 더욱 원만하고 성숙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친민사상이 구체적인 경세(經世)정책 또는 경제(經濟)정책으로 실현되지 못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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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岳,『張岳小山類稿』,卷六,「與郭淺齋憲副」︰
明德、親民之說,往歲謁陽明先生於紹興,如‘知行’、‘博約’、‘精一’等語,俱蒙開示,反之愚心,尚未釋然。
最後,先生忽語曰︰“古人只是一個學問,至如‘明明德’之功,只在‘親民’。後人分為兩事,亦失之。”某愯然,請問。
先生曰︰“‘民’字通乎上下而言,欲明‘孝’之德,必親吾之父,欲明‘忠’之德,必親吾之君,欲明‘弟’之德,必親吾之長。親民工夫,做得透徹,則己之德自明,非‘親民’之外,別有一段‘明德’工夫也。”
某又起請曰︰“如此,則學者固有身不與物接時節,如‘戒慎乎其所不睹,恐懼乎其所不聞’,‘相在爾室,尚不愧於屋漏’。又如『禮記』‘九容’之類,皆在吾身不可須臾離者,不待親民,而此功已先用矣。先生謂︰‘明德工夫,只在親民,不能無疑。”
先生曰︰“是數節,雖不待親民時已有此,然其實所以為親民之本者在是。”
某又請曰︰“不知學者當其不睹不聞之必戒慎恐懼,屋漏之必不愧於天,手容之必恭,足容之必重,頭容之必直等事,是著實見得自己分上道理合是如此,工夫合當如此,則所以反求諸身者,極於幽顯微細,而不敢有毫髮之曠闕焉。是皆自明己德之事,非為欲親民而先此以為之本也?如其欲親民而先此以為本,則是一心兩用,所以反身者必不誠切矣。故事父而孝,事君而忠,事長而弟,此皆自明己德之事也。必至己孝矣忠矣弟矣,而推之以教家屬國天下之為人子、為人臣、為人弟者,莫不然矣,然後為親民之事。己德有一毫未明,固不可推以親民,苟親民工夫有毫髮未盡,是亦自己分上自有久闕,故必皆止於至善,而後謂之‘大學之道’,非謂明德工夫只在親民。必如老先生之言,則遺卻未與民親時節一段工夫,又須言所以為親民之本以補之,但見崎嶇費力,聖賢平易教人之意,恐不如是也。”
先生再三鐫誨曰︰“此處切要尋思。公只為舊說纏繞耳,非全放下終難湊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