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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아메리카 현대예술: 현실의 예술소환과 미래예행연습
2021년 05월 19일 10:38 펑파이 뉴스 소스:이페어케이
1960년대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이후 칠레의 군사진압기 공포지대, 정치적 작품들이 관객몰이에 나섰다.빛의 원인은 작품에 있지 않다.전통미는 작성에 있다품행과 정보가 가지고 있는내재된 영향. 아프리카미국계 예술가 노먼루이스의 아메리칸 투텅'이라는 글을 올려 인종과 종교적 편견, 인종격리와 편집증의 상처로 돌아갔다.이런 이미지는 역사적 현실에 대한 예술의 소환이자, 그 미래의 변화에 대한 예행연습이다.
《아메리카 현대예술의 길: 1910~1960년 서반구예》술'은 20세기 미국, 남아메리카, 카리브 지역 국가들의 예술 발전을 소개했다.방향.
팝아트와 혁명
1969년, 쿠바의 '혁명 승리' 1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라울마르티네스 (Rall Martnenez, 1927~1995년) 컬러 판화 창작쿠바. 19591월, 피델카스트로의 군대 전복푸에르헨시오 바티스타 독재정권이 투쟁의 하이라이트는 195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다.카스트로와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카밀로 시엔푸르고스의 초상이 담긴 이 사진은 쿠바 사회·경제·정치 전반의 조정을 이끈 세 주역이다.
라울 마르티네스 '쿠바', 1969년, 22색사망 인쇄 148cm×92cm
쿠바 혁명은 이 책의 시간축 중 하나다.하지만 우리는 가장 주목한다.이것은 그림 그 자체입니다. 그림은 미국 전역의 예술 형식에 대한 흥미를 나타내는 바로미터입니다.이 예술 형식들은 유류를 찬동한다줄 그림의 유용과 일반적 사용광고와 관련된 시각전고를 각색하다.예술 현상이 널리 인식되다20세기 60년입니다.대대로 가장 특색 있는 시각 형식 중의 하나이다.팝아트는 앤디 워홀(Andy Warhol·1928~1987)과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1923~1997) 등 많은 예술가들에 의해 발전했으며, 그 뿌리는 영국의 예술가 리처드 해밀턴(Richard Hamilton·1922~2011)과 그의 동시대인 에두아르도 팔로지로 거슬러 올라간다.로지(1924~2005)는 1950년대 유행하는 광고 주제에 대한 패치워크와 병치 실험을 했다.포프의 이야기는 길고 복잡하여 동시에 통과할 수 있다아시아·유럽·라틴미에 있다대륙과 미국의 제작센터가 설명한다.
마르티네스는 예술가로서, 그의 직업 생활은 생동감 있는 자세에서 시작되었다.추상적인 패턴의 실천에서 그는 주의력을 포프의 담담한 색채와 중복된 형식에 돌렸다일상적인 문화를 미화하는 데.쿠바 혁명의 배경에는'일상문화' 관련정치선전, 국가시각경관에 없어서는 안 될 그룹성분, 특히도심지.
모든 쿠바인은 일상 생활에서 혁명 영웅을 대표하는 이미지를 볼 수 있다포스터와 광고판, 도시와 농촌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이미지.쿠바포도 강조해야 한다.일반 예술은 정치적 의지에 특히 주목한다코끼리는 20세기 6과 같다.0년대에 전 미주에서 발전했다.일어선 2차원과 3차원 예술 모델 표지금과 같은 형식이다. 재파서·아르헨티나·콜롬비아의 포프나 포프와 관련된 예술에서 사회적 메시지는 예술작품의 의미 위에 군림하거나 그 표상 아래 존재한다.라틴아메리카 예술가들은 일부 미국 팝 아티스트들처럼 지난 수십 년간의 예술 이데올로기와 선을 긋기는커녕 정치사회적 관점을 가장 중요한 위치에 놓고 있다.
앤디 워홀 《코카콜라(3)》, 1962년, 면포흰자 그림, 176.2cm×137.2cm.
1962년 앤디 워홀의 코카콜라(3년)북미 팝아트의 진수를 대표한다.일상 상업주의의 상징, 워홀이런 유행을 자주 연음하다재료의 형상은 반복해서 허위로 사용된다.다판화와 회화 중그 형태는 통상 예술을 대표한다가대 연속성과 중복성미련이 있다표현의 한 면은 음악 같은 다른 예술 분야에서도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필리프 글래스(약 1937년)의 작품들이다.앤디 워홀은 자신을 유명인과 상품의 모델로 만들었다.1960년대 이후 화가와 조각가들의 작품에서 예술가의 이미지는 그가 전 세계뿐 아니라 미주예술 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긍정한다.
베네수엘라의 조각가 마리솔 에스코바(Marisol) 에코바, 1930~2016년) 프랑스 태생 대부분시간은 모두 뉴욕에서 일한다.그녀의 예술은 그녀의 옳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라틴 아메리카 식민 시기조각상의 흥미와 그녀미국에서 흡수한 것이 많다.대시각 형식.622963년 흑연과 유채, 석고를 이용해 목조 앤디를 만든 마리소는 절친한 친구 워홀을 기리며 그의 명성을 기리고 그를 조각으로 싸서 그의 잘 알려진 간결한 언어 표현이 특징인 나른한 성격에 호응했다.
마리소 에스코바 《앤디》, 1962~1963년, 목판 위에 흑연, 유채, 석고화, 143.5cm×43.8 센티미터×57.2 센티미터.
마르셀 뒤샹은 소변기, 눈삽과 자전거 바퀴 등 세속물을 추앙했다이후 기성 재료를 사용한 것이 20세기 예술의 특징이다.그는 급진적이고 전복적이다다다이즘 조각 작품 다지기관념주의와 본 세기를 이루다후기 다른 표현 형식의 가장마지막. 콜롬비아의 예술가 비아트리스 곤살레스보고타 시장에서 구입한 값싼 금속이나 목재 가구를 담은 그림과 판화장치 작품으로 명성을 얻었다.그는 이 장치들을 그림으로 재설계해 대상 자체의 완전성을 유지하면서 원초적 용도를 없앴다.반면 이 작품들은 성상을 가리키거나 콜롬비아의 정치 궤적 중 유명한 역사적 순간을 가리키며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을 묘사한 평범한 장치들과 나란히 배치된다.
곤살레스 '성모', 1971년, 법랑채금속판과 나무질 가구 150cm×150cm×38cm휴스턴 미술 박물관
1971년 곤살레스는 《성모》에서 화장대를 사용하였다.의자 하나. 그녀는 금속 원판 위에 법랑칠을 해서 원색으로 그렸고, 화장하고 있었다.탁자 위에 라파엘로를 한 폭 그렸다.1513—1514올해의 유명한 그림 《의자 위》.의 성모'의 복제품,저명한 종교화를 풍자하다땅은 세속화되어 있고, 또한 이에 준한다.개인의 허영과 관련된 평범한 패밀리 장식품이 배경이다.이 작품은 다층적인 의미와 예술적 참고 가치를 가지고 있다.1960년대와 1970년대 곤살레스는 콜롬비아에서 가장 중요한 포프 시각어 실천자 중 한 명이었다.발견물이나 구매물 사용을 통해 다다이즘의 과거와 설치예술의 미래를 참고했다.그리고 이 작품의 구도는 자기소개서다.곤살레스는 뛰어난 예술사학자이자 예술평론가로 안데스 대학 등 컬럼비아 대학의 예술학과와 예술사.학과에 재직하였으며, 국립박물관 예술·역사수집관장을 지냈다.
로버트 라우젠버그 《하늘길》, 1964년, 표면에 유화를 띄웠다.실크스크린, 548.6cm×487.7cm.댈러스 미술관
시사 재난 정치 과학수사 예술사는 로버트 로젠버그(19252008년)의 하늘길을 구성한다.미국 예술가의 아이러니하고 때론 놀랍고 도발적인 상상력을 보여주는 천면유화와 실크 그리드다.1960년대 작품의 종합성은 발견물에 대한 초기 실험에서 비롯됐다.보통 하나의 받침대에 고정돼 있는데 받침대 자체가 일회용이다.복잡한 3차원 집합 예술을 조합(회화와 조각, 거리의 오물에서 수거한 것까지 포함)이라 부르는 것은 1950년대부터 시작돼 생각지도 못한 것을 혼란스럽게 병합하는 듯한 혁명적 의미를 갖는다.라우젠버그가 어느 시기 또는 20세기 중반 미국의 일회성 문화에서 그래픽과 물건을 고르는 자유감은 춤과 음악 공연부터 회화, 사진, 집합예술까지 표현에 깊숙이 관여한 데서 비롯됐다.
'천길'은 2차원 그래픽이지만 더 야심찬 3차원 작품에서 관찰할 수 있는 시공간 다양성의 모든 암시를 갖고 있다.3년 전 암살된 존 F 케네디의 몽타주 사진, 도시 파괴 모습, 그리고 1614~1615년 피터 폴 루벤스의 '거울 앞의 비너스'에 대한 반복은 라파엘로의 곤살레스 그림 유용을 연상케 한다.하늘길도 라우젠버그가 제32회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회화상을 수상한 바로 그해에 만들어져 찬반양론이 들끓었다.국제무대에서 팝아트의 패권을 과시하고 유럽을 배경으로 미국 예술이 부상하는 징표로 여겨진다.
예술은 국민을 위한다.
라우젠버그가 베네치아에서 상을 받은 지 2년 만에 아르헨티나의 다이내믹아트 및 설치미술가 훌리오 르 파크(1928년생)가 제33회 비엔날레에서 같은 상을 받는 등 미국 당대의 유행과는 사뭇 다른 작품이 됐다.레 파르크는 멘도사 출신이지만 부에노스아이레스 출신이다.1958년 파리로 이주하면서부터 그의 미학신조는 예술이 집단사업이라는 의미에 집중됐다.1960년 파리 시각예술연구팀(GRAV)에 참여한 레 파르크는 대서양 양안 출신의 다른 예술가 5명을 포함시켰다.미국과 프랑스를 배경으로 레이 파르크 작품의 영향을 살펴본 에스트렐리타 브로드스키는 다음과 같이 썼다.
레 파르크는 예술이 참여적이고 관객에게 힘을 주는 방식이라는 기본 이념이 파리로 이주하기 이전, 아르헨티나 성장기에 정립된 점…. 평론가는 그의 협력 노력과 빛의 요소 활용에 찬사를 보내지만 도발적인 사회·정치적 측면은 간과한다.
레이 파르크와 시각예술연구팀의 다른 구성원들의 예술작품은 관객의 참여가 필수적이어서 길거리에서나 박물관이나 갤러리에서나 볼 수 있다.1960년대 서양 예술가들이 현상학적 흥미와 전통재료와 비전통적 재료와 물질에 대한 체험적 접근에 응하면서 신체를 재구성하고 개조하는 방식으로서의 예술적 발상이 주요 문제가 되었다.
훌리오 라이 파르크 '연속이동등', 1960~1966년, 램프, 사이즈 조절 가능휴스턴 미술 박물관
1960~1966년 레이 파르크는 '연속 이동등'을 썼다.램프가 비추는 어두운 공간에서 깜빡이며 회전하면서 서로 반사되는 행성원소로 구성된 이동 장치다.관객마다 다른 방식으로 작품을 감지한다.금속판과 직사각형, 타원형이 공중을 돌며 춤을 출 때 관객의 감각도 변한다.레이 파르크는 전통 화이트큐브 갤러리를 능가하는 예술적 관람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사람들의 감각을 동원했다.이 작품은 고립된 개체가 아니라 변화하는 관람객이 관람해야 한다.예술가들이 보기에 '그룹 체험'의 개념은 시각 연극에서 참여자들을 자극하는 효과가 있으며, 이는 레이 파르크의 미학에 매우 중요하다.1960년대 그의 수많은 참여작품이 발전·보완돼 대서양 양안 문화권에서 늘어나는 공공의식을 증명했다.이들 작품의 창작 뒤편에서 집단적으로 감지되는 관념은 본래 혼란스러운 운동을 조직하는 한 방식이다.
1960년대에는 1968년 5월 프랑스 학생 봉기, 몇 달 뒤 멕시코시티 학생 봉기나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국제 대규모 시위 등으로 인한 상처와 불안에 직면해 보다 급진적인 사회활동으로 나아가는 대장정에서 정치적으로 더욱 첨예해졌다.당시 세계적으로 현실에 반항하거나 탄압에 반대하는 정치운동이 많이 생겨나면서 레이 파르크의 예술은 물론 미주·유럽·아시아 예술가들의 예술에 의미를 더했고, 예술은 집단 경험이라는 인식이 강해졌다.특정 운동과 관련된 작품(많은 남미 국가들이 군사독재 10년 동안 쓴 작품)이나 레이 파르크 같은 작품도 공동인식 사업에서 대중적 참여를 더 공허하게 표현하고 참여자의 의식을 정치나 사회적 억압을 뛰어넘는 영역으로 넓혔다.
환경과 국민 참여
1969년 독일계 베네수엘라 예술가 게르트루드 골드슈미트(19121994일명 게고)가 카라카스와 뉴욕에서 금속 파이프를 엮어 만든 복잡한 그물망을 방 안을 가득 채웠다.그녀의 설치 작품은 관객들을 경악하게 했다.베네수엘라 수도의 미술박물관과 뉴욕 미주관계센터(오늘의 미주협회)에 관람객이 모이는 곳은 '레티컬아(Reticularea)'가 처음 전시한 곳이다.스페인어로 된 '그물'에서 유래한 말로, 전선과 명주실을 연결해 만든 복잡한 네트워크를 일컫는 말로, 무소불위의 환경을 만든다.
게르트루트 골드슈미트(게고) 《그물망》, 1969년, 스테인리스 스틸 실, 가변 사이즈.사진은 파울루 가스파리니가 1969년 촬영한 것으로 카라카스 미술박물관 참가자들이 전시돼 있다.베네수엘라 카라카스 국립박물관 재단. © 게고 재단
관객은 그물 모양의 운동, 그림자와 빛의 소용돌이에 이끌리고, 갤러리 벽은 빛과 불멸 장치의 미묘한 이동 요소로 빛의 그림자 효과를 만들어낸다.관객은 라이 파르크보다 작품의 활력을 북돋우는 조력자가 된다.'그물'은 정적인 작품과 달리 관객이 참여해 부분적인 움직임으로 신체적 관여 효과를 낼 때 비로소 완전한 전체가 된다.예술사학자 모니카 아모어는 "망상물은 일종의 예술 생산 패러다임을 연습하고 조각 전통을 거부하고 선과 공간을 건축의 울타리와 조각(질량, 부피와 표면)의 기념성을 비판하는 수단으로 만들었다"고 긍정적으로 밝힌 바 있다.20세기 참여성과 신체적 지향에 관한 예술 이야기에서 이 시기의 많은 작품들이 제 상태로 전시되지 않고 있지만(항상 예술사적 유물로 등장하여 대중이 함께 호흡하지 못하는 것) 그 원초적 목적에 대한 기억은 그 작품들의 여운에 맴돌고, 우리의 상상 속에서 특정 시간과 장소에 대한 추억을 만들어낸다.
예술과 공포
게고의 '그물망'이나 라이 파르크의 '연속 이동등'이 감성적 형식과 모양, 그림자 네트워크로 우리를 사로잡았다면 1960년대 브라질·아르헨티나·우루과이·파라과이, 그리고 이후 칠레의 군사진압기 공포지대에서 정치적 작품들이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작품의 전통미가 아니라 작품 형식과 정보가 주는 내적 영향 때문이다.포르투갈계 브라질의 개념화가 아르투르 바리오(Artur Barrio·1945년생)는 가장 주목할 만한 예술가다.그는 전통예술의 실천양식과 예술 보급, 전시채널을 일부러 포기하고 황당하고 불안한 작품을 만들어냈다.1964~1985년 독재주의의 공포와 '후광'이 일상화된 브라질의 공포와 '후광'에 대한 직접적인 행동성명을 내놨다.
1960년대 말 1970년대 초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와 벨로오리존트 등에서 남추체 개념예술 창작의 오랜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활동 중 하나로 거리 관여 활동을 펼쳤다.그의 전체 프로젝트명은 '정경'이다.그의 비상업적이고 비현장적인 작품 중 가장 악명 높은 것은 트로카스(trouxas)다.보자기에 든 물건은 생활폐기물, 버려진 옷, 짐승 가죽, 뼈, 치아, 그 밖의 어떤 저질 물건의 조합일 수 있다.모든 물건은 동물의 피가 묻은 찢어진 천에 싸인 채 길모퉁이나 공원에 몰래 놓아 행인들의 공포와 조바심을 불러일으킨다.행인들은 때로 어리둥절해하며 그 소포를 쳐다보거나, 그 옆을 재빨리 지나쳐 미지의 공포 장치일 수 있다.
아르투르 바리오 《DEFL의 정경+S+ 스트리트》(DEFL Situa)의 사진, 1970년 4월.리우데자네이루.
바리오가 '시트' 프로젝트를 위해 찍은 사진들은 피보따리를 닥치는 대로 맞닥뜨린 행인들의 조바심을 보여준다.사진작가는 보통 바리오 자신이다.정체불명의 물체 주변에 모인 사람들 틈에 섞여 그들을 본 행인들과 은밀히 사진을 찍어주던 그는 이런 행동이 창작에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라고 생각했다.이런 피보따리는 군사통치하의 브라질에서 사람들이 대부분 비참한 공포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힘 있게 은유한다.그 자리에 남아 썩거나 아예 도시폐기물청운대에 의해 처리되기도 한다.그 중 어느 것 하나라도 보존할 생각이 없는 예술가는, 피보리가 분해되는 것이 그 창작의 기본 특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번에 미래를 돌아보는 마지막 가는 길에 다시 한번 걸출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예술가 노먼 루이스(199091979년)에게 안내한다.루이스는 추상예술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루이스는 뉴욕에서 주로 예술학습을 받고 직업을 발전시켰다.1960년대 초 그는 뉴욕의 짧지만 영향력 있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예술가 단체의 주요 멤버였다.이 단체는 나선화랑 회원이기도 하다.1963년 맨해튼 그리니치 빌리지에 설립된 나선갤러리는 로마르 베르덴과 헤일 우드라프(두 예술가 모두 3장에서 논의)를 포함한다.
노먼 루이스 '아메리칸 토템', 1960년 유화, 188cm×114.3cm.노먼 루이스 가든 판권 소유.
마지막으로 책은 슬프고도 예시적인 현실을 보여준다.이 책 독자가 사회정치 분야에서 겪는 현실은 1910년대 말 삶의 많은 부분을 주도하게 될 것이다.'아메리칸 토템'은 단일하고 도깨비처럼 감춰진 인물을 통해 인종과 종교적 편견, 인종격리와 편집증의 트라우마적 광경으로 돌아간다.이 작품과 1960년대 초 일련의 관련 작품은 루이스의 인물 복귀에 중요한 예이며,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미주 유색인종이 직면한 어려움과 사회적 장애에 대한 지속적인 초조함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검은색 바탕에 적백색의 복합생물이 우리 앞에 우뚝 서 있는데, 그 형태는 여러 면과 앞뒷면의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이 캐릭터의 두드러진 특징은 머리에 새겨진 원뿔형과 얼굴을 가리는 흰색 머리띠나 가면이다.그의 눈이 구멍을 통해 관중을 지켜보고 있는 것만 보일 뿐 3K3당의 사악한 위협을 암시하고 있다.
1960년대 초 루이스는 미국 역사의 어느 시점을 택해 이런 위협적인 생물의 작품과 다른 작품을 만들었다.당시 사형은 흑인에게 공포의 유령이었다.마지막 '공식 기록'이 있는 사형이 1968년 발생했지만, 인종적 요인에 의한 끔찍한 고문과 죽음이 그 후 몇 년 동안 극비리에 진행돼 온 것은 거의 확실하다.이 이미지는 노먼 루이스와 모든 흑인이 상상하는 억압자들이 주는 불길한 위협을 보여준다.아메리칸 토템은 1964년 린든 존슨 대통령의 민권법안 서명과 1968년 4월 4일 민권 지도자 마틴 루서 킹 박사가 살해되기 전 몇 년간 그렸다.아메리칸 토템은 1965년 셀마에서 앨라배마주 몽고메리까지 이어진 민권대행진 1960년대 초 미국 남부 각지의 자유 라이딩으로 인종격리가 심한 사회에서 버스 앞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분투했던 기억 1965를 회고했다.지난해 8월 캘리포니아주 백인도로 순경이 흑인 운전자를 불법 체포해 일으킨 로스앤젤레스 와츠 폭동 등 수백 건의 사건이 있었다.이런 사건들은 2000년대 초반 20년 동안 상연될 정도로 상처와 초조함이 가득했다.'흑인의 목숨도 생명' 운동 등 농성은 최근 몇 년 새 많은 진전을 이뤘지만, 동시에 세대에 걸쳐 사회정치 분야에서 권위 있다고 자부하는 관료들에 의해 최소한으로 평가절하되고 있다.
루이스의 이미지는 역사적 현실에 대한 예술의 소환이자, 그의 미래 변화에 대한 예행연습이다.그러나 이것은 사회의 한 계층뿐 아니라 서반구 주민 모두를 겨냥한 명백한 반항의 그림이다.여전히 폭력·강요·조소·편견·배제와 맹목적 배척 등 '토템'을 상대해야 하는 사회계층은 수많은 인류 동포를 희생시키는 대가로 소유권과 지배권을 주장하고 있다.
《아메리카 현대예술의 길: 1910~1960년 서반구 예술》[美]에드워드 설리번 作 중핑 역
중국 화보 출판사 2021년 4월
(이 글은 책 후기 '미래로'에서 발췌한 것으로, 삭제된 것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