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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를 잇는 신앙(3)
2013년 8월 4일 / 대예배 / 눅 12:35-40
눅 12:35-40 / [준비하고 있으라]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고 항상 준비하고 있으라. 36) 마치 주인이 결혼 잔치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릴 때 곧 문을 열어 주려고 준비하고 있는 종처럼 되라. 37) 주인이 돌아왔을 때 이렇게 준비하며 기다리고 있는 종들은 복이 있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주인이 몸소 시중 드는 사람의 옷을 입고서 종들을 식탁에 앉히고 먹는 일을 시중 들 것이다. 38) 주인이 저녁쯤에 올는지 아니면 한밤중에 올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어느 때에 오더라도 준비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은 복이 있다. 39) 도둑이 언제 들어올지 알고 있었다면 대비하여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을 것이다. 40) 그러므로 너희도 언제나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지도 않은 때에 인자가 올 것이다.
▶ 로또 복권에 당첨되어 하루아침에 수십억의 돈을 받게 된 사람들이 먼저 하는 일은 전화, 휴대폰 다 바꾸고, 집을 옮기든지 잠적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사돈의 팔촌까지 찾아와 공돈 생겼으니 나눠 달라고 손을 내밀고, 여기 저기 자선단체들이 찾아 들어 얼굴을 감추고 살지 않으면 살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통계상으로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이 그 돈을 제대로 굴려 사업에 성공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많은 돈을 제대로 쓸 만한 준비가 되지 못해 그 돈으로 사치하고, 쾌락을 좇아 방탕하게 살아 오히려 돈 때문에 패가망신하고, 돈 때문에 가정이 파괴되고, 자식이 방탕한 삶을 살아 잘못되고, 형제간에 의가 끊어지는 경우가 많아 결국 ‘로또 복권에 당첨되면 행복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생각도 정답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을 받으려면 이렇게 하라는 성경에서 가르쳐준 말씀대로 하십시다. 그 중에 하나가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본문입니다.
◆ 본문 해설 /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형과 유업을 나누는 문제에 대해 중재를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는 재판장이나 물건을 나누는 자로 세움을 받은 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서 재물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의식주에 대해서 지나치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며 까마귀를 먹이시고 백합화를 입혀 주시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을 먹여주시고 입혀주시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고, 세상에 재물을 쌓지 말고 하늘창고에 쌓으라고 권고하셨습니다.
▶ 그리고 본문의 말씀처럼 어떠한 사람이 복이 있는지에 대하여 상세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을까요? 팔레스타인 지역의 사람들이 입는 옷은 길고 통이 넓습니다. 그들은 여행을 할 때나 활동할 때에 허리에 띠를 띠었습니다(출 12:11, 왕상 18:46, 왕하 1:8). 이러한 점에서 ‘허리에 띠를 띠라’는 것이나 ‘등불을 켜고 서있으라!’는 말은 재림의 주를 맞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라는 명령입니다.
팔레스타인에는 결혼식이 밤에 열렸기 때문에 주인이 밤늦게 돌아올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종들은 주인이 돌아오면 문을 열고 영접하기 위해서 자지 말고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비유를 통해 항상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 25:1-13). 예수님은 주인이 왔을 때에 그 종이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깨어 있는 종들을 위해 주인이 친히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힌 후에 수종을 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은 매우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주인이 혼인집에 다녀왔을 때에 종이 깨어 문을 열어준다고 해서 그 종을 대접할 주인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친히 주인이 종을 위해 수종을 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재림하실 때에 깨어서 영접하는 성도들을 극진히 맞아 주실 것이요, 그들은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계 20:4). 또한 예수님은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이 복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로마식 시간 계산은 밤을 4경으로 누었습니다(1경은 오후 6-9시, 2경은 9-12시, 3경은 12-3시, 4경은 3-6시). 그리고 유대식 시간 계산은 밤을 3경으로 나누었습니다(1경은 6-10시, 2경은 10-2시, 3경은 2-4시). 본문에 언급된 시간이 로마식인지, 유대식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주인이 돌아올 시간을 언급하고 있는 점과 그 시간이 기다리기에 매우 힘든 때라는 사실입니다. 늦은 밤이 되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수면을 취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세상의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사람들은 깊은 영적 수면에 빠져들기가 쉽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영적인 잠에 빠져서 세상 조류에 휩쓸려가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만 합니다(마 24:9-12 / 인간 풍조는 나날이 갈리어도 나는 내 믿음).
39-40절에서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고 하셨는데, 앞에서는 ‘깨어 있는 종들에 대한 복’이 강조되었다면, 여기에서는 ‘준비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경고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집 주인이 만일 도적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다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도 예수님의 재림은 갑자기 침입하는 도둑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예고 없이 일어납니다. 물론 주님의 재림일시를 정확히 아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림이 언제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매일 깨어 있어서 항상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살아가는 영적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시 130:6).
■ 유대인들은 2차 대전 후부터 유월절이 되면 온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아니마밈’의 노래를 부른다고 합니다. 아니마밈은 히브리말로 ‘나는 믿는다’라는 뜻입니다. 아니마밈의 가사는 “나는 믿는다. 나의 메시아께서 나를 돕기 위하여 반드시 찾아오리라는 사실을” 이 노래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만들어진 노래입니다. 하지만 주변의 동료들이 가스실로 불려가 죽어나가자. 가사가 더 추가되었습니다. “하지만 메시아는 때때로 너무 늦게 오신다.” 하지만 외과의사 직업을 가진 젊은이는 이 노래를 부르기를 거부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나를 구원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는 강력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하나님께 대한 강력한 믿음은 구약의 시편 139:8-10의 다윗의 노래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젊은이는 모두가 살기를 포기하고 자포자기의 모습으로 수용소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우연히 주은 유리조각으로 자신의 수염을 깎고 말끔히 단장된 모습으로 수용소 생활을 하였습니다. 가스실로 유대인들을 수용소로 이끌던 나치의 군인들은 깨끗하게 단장을 하고 있는 이 젊은이를 차마 가스실로 데려가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데려갔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그는 적은 수의 생존자들 중에 하나로 풀려나자 그는 아니마밈의 노래를 이렇게 고쳐 불렀습니다. “나는 믿는다. 나의 메시아가 나를 돕기 위해 반드시 나를 찾아오리라는 사실을. 그런데 사람들은 너무 서두른다. 사람들은 너무 서둘러 믿음을 포기한다.” 그 후 그의 일기가 세상에 공개되었는데, 그 일기 속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고통 속에서 죽음을 택하는 것은 가장 쉽고 가장 나태한 방법이다. 죽음은 그렇게 서두를 것이 못된다. 죽음 앞에서 살아 보려는 부활의 의지, 이것이 새로운 창조이다.” 매년 유월절이 되면 이 가정만은 이렇게 전혀 다른 아니마밈의 영가를 부른다고 합니다. 그는 수용소에서 매일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을지라도 하나님께 희망을 두고 있었습니다.
▶ ‘예비’란 헬라어에 보면 ‘미리 자격을 갖춘다, 미리 준비를 한다, 미리 표준을 맞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소망하는 성도들은 영적인 잠에서 깨어 그 나라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이 땅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이하기에 합당한 존재로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예비하여야 할까요? 슬기로운 여인들은 등과 기름을 준비함으로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 있었으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미련한 여인들은 가슴을 치며 후회하여도 신랑을 맞이할 수 없었습니다. 기다리기만 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 출가할 처녀는 신랑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하고, 가을에 추수를 기다리는 자는 봄에 씨를 뿌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3년 동안의 구령사업을 위하여 30년 동안 준비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구원받고 14년의 준비기간을 거친 후에 선교여행을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25년의 기다림 끝에 이삭을 낳았고, 야곱은 20년을 기다려 고향에 돌아왔고, 요셉은 13년의 기다림 후에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준비 없는 기다림은 헛수고일 뿐입니다.
1. 주님의 쓰심에 합당하게 순종하는 마음을 준비합시다.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가 되지 않아도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면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사실 요한복음 2장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예수님의 명령은 상식적으로 전혀 맞지 않는 명령입니다. 하인들이 어디에 물을 채웠습니까? 돌 항아리에 채웠습니다. 그런데 그 항아리는 결례 때 쓰는 물을 담는 항아리(미술적인 가치는 없고 모양은 없어도 잘 깨지지 않는 두툼한 항아리)입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모래와 먼지 같은 것이 많기 때문에 외출하고 나서 집에 들어오면, 항상 결례(潔禮 = 부정을 제거하고 정결케 하는 종교의식)통에 들어있는 물로 손과 발을 씻는 관습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언급된 결례통에 있는 물은 먹는 물이 아닌 약 2급수(물은 맑고 냄새가 나지 않지만, 마실 수는 없고 수영이나 목욕 등으로 사용하는 물) 정도이었을 것입니다. 혹 물이 귀한 나라이기에 3급수(물은 황갈색의 탁한 물이며 바닥에 모래나 자갈이 깔려있는 물로 수산용수 2급, 공업용수 1급으로 사용)였을지도 모릅니다.
포도주를 만들려면 좋은 통에 담으라고 해야 하는데, 예수님은 그 통에 물을 아귀까지 채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채우라고 하신 항아리는 조그만 항아리가 아니라 자그마치 80~120리터(4~6말) 이상의 물이 들어가는 큼직한 항아리입니다. 이런 항아리가 하나도 아니고 여섯이나 있었는데, 거기에 물을 채우려면 약 480~720리터(24~36말, 지게로 표현하면 12~18번 정도) 정도의 많은 양의 물을 채워야하는데 하인들은 묵묵히 순종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봅니다. 그 당시는 우리 시대와 전혀 다릅니다. 요즈음 집에는 부엌이나 뜰에나 어디서에나 수도꼭지가 있습니다. 물을 받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한 마을에 우물 하나 정도 있었습니다(요 4:6). 물을 길어 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또 우물이 깊어 작은 두레박으로 물을 길러 올리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두 세통 들어가는 돌 항아리 여섯에 물을 아귀까지 채운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도 하인들은 묵묵히 물을 길러서 아귀까지 채웠습니다. 그것도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다는 보장도 없는데 말입니다. 그러기에 정말 아름다운 순종입니다.
그리고 아귀까지 채우자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가져다주라’(8절)고 이상한 명령을 하십니다. 지금 하인들이 어디에 무엇을 담아 놓았습니까? 깨끗한 생수 통에 생수를 담아놓았습니까? 아닙니다. 손이나 발을 씻는 물이니 그리 깨끗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떠다가 연회장에 갖다 주라고 하십니다. 그렇다고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발을 씻는 물을 담는 통 속에 들어있는 깨끗하지도 않는 맹물을, 다시 말하면 아직까지 변하지 않고 먹지도 못하는 물을 퍼서 연회장에 갖다 주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자기네들의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순종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똑똑한 사람을 쓰시지 않고 순종하는 사람을 쓰시고 순종하는 사람을 축복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회사 최고 경영주의 입장에서 누구를 쓰겠습니까? 항상 잔머리나 굴리는 사람을 쓰겠는가, 아니면 비록 머리는 조금 부족하지만 오더를 내리는 것을 즉각 순종하는 사람을 쓰겠습니까?
■ 2002년 월드컵에서 극과 극을 달린 선수는 이운재선수와 김병지 선수입니다. 사실 월드컵을 하기 전, 오랫동안 한국 제일의 골키퍼는 김병지 선수였습니다. 그에게는 ‘골 넣는 골키퍼’, ‘축구에 패션을 도입한 선수’, ‘꽁지머리 선수’ 등의 여러 가지 별명이 붙었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거미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한 수 아래로 여기던 이운재 선수에게 자리를 빼앗겼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2001년 초, 홍콩에서 있었던 칼스버그컵 대회에서 자기 골문을 비워두고 중앙선까지 몰고 가다가 볼을 빼앗겨 골을 먹을 뻔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히딩크 감독은 대노했습니다. 김병지는 믿지 못할 선수다, 감독의 명대로 따르지 않는 선수라는 생각을 하게 되어 오랫동안 대표선수에서조차 탈락했습니다. 그러다가 간신히 월드컵에는 대표 선수로 뽑혔지만, 경기장에는 1분도 들어가지 못하고 벤치에 앉아 응원만 하는 응원 선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지금도 월드컵에서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이운재 선수는 히딩크 감독의 지시와 명령을 충실히 따랐습니다. 비록 그의 플레이는 김병지 선수에 비해 화려하지는 않지만, 감독을 안심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결국 그는 월드컵에서 크게 활약함으로 세계적인 골키퍼로서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이 일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스포츠 감독은 자기의 지시를 잘 따르는 선수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시에 순종을 잘 하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비록 명령이 이해가 되지 않아도 순종하면 주님의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던 이방인을 예수님은 사렙다 과부와 나아만을 꼽으셨습니다.
눅 4:25-27 / 예언자 엘리야가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 과부를 도운 일을 생각해 보라. 그 당시 3년 6개월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아 온 땅에 기근이 계속되던 때에 도움이 필요한 이스라엘인 과부가 많이 있었으나 엘리야가 보냄을 받은 것은 그들이 아니라 이방인 과부가 아니었느냐? 또한 엘리사는 도움이 필요한 이스라엘인 나병환자들이 많이 있었는데도 그들을 제쳐놓고 오히려 수리아 사람 나아만을 고쳐 주지 않았더냐?
예수님께서 사렙다(사르밧) 과부가 어떻게 순종하였기에 예를 드신 것입니까?
왕상 17:11-16 / 그 과부가 물을 가지러 성문 안으로 들어갈 때에 엘리야는 그 등 뒤에 대고 “떡도 좀 갖다 주시오!”하고 큰소리로 간청하였다. 12) 그러자 과부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확실히 살아 계심을 걸고 맹세하지만 우리 집에는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습니다. 이제 우리 집에 남은 것이라고는 항아리 밑바닥에 깔린 밀가루 한 움큼과 병에 묻은 기름 몇 방울뿐입니다. 나는 지금 나뭇가지를 주어다가 그 남은 것으로 마지막 떡을 구워 아들과 나누어 먹고 함께 죽을 작정이었습니다.” … 13) 그러나 엘리야는 과부에게 그 마지막 남은 것까지도 아끼지 않는 희생을 요구하였다. “그런 걱정은 하지 말고, 우선 그 손에 든 나뭇가지를 돌고 집으로 가서 내가 먹을 떡부터 구워 가지고 오시오. 그런 다음에 다시 들어가서 식구들이 먹을 떡을 구우시오. 이제부터 식량 걱정은 조금도 하지 마시오. 14)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가 다시 비를 내려 줄 때까지 밀가루도 바닥이 나지 않고 기름도 마르지 않을 것이다!’ 하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15) 사르밧 과부는 이때부터 엘리야의 말대로 따랐다. 그러자 세 사람이 매일 충분히 먹고 살게 되었다. 16) 주께서 엘리야에게 약속해 주셨던 것처럼 그 밀가루도 바닥이 나지 않고 그 기름도 마르지 않았다.
나아만 장군의 경우도 그러합니다. 그는 아람 나라 군대 장관입니다. 그는 왕에게 총애를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과 같이 그 인생에 아름다움이 시들어 떨어졌습니다. 그 당시 불치의 병인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그는 자기 아내의 계집종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에게로 왔습니다. 그는 자기의 생각대로 나름대로 계획이 있었습니다.
왕하 5:9-16 / 나아만은 마차를 타고 사마리아에서 길갈로 내려와 엘리사의 집 대문 앞에 멈추어 섰다. 10) 그러나 엘리사는 그를 만나주기는커녕 다른 사람을 내보내 말을 전하게 하였다. 위풍당당한 장군을 마치 천하고 불쌍한 거지처럼 취급한 것이다. “나아만은 요단강으로 내려가서 일곱 번 몸을 씻어라! 그러면 문둥병이 나아 살이 깨끗해질 것이다.” 11) 화가 치솟은 나아만은 당장 발길을 되돌리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그가 몸소 나와서 나를 영접하면서 자기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를 드리고 나의 온갖 상처를 어루만져서 이 문둥병을 고쳐 줄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런데 요단강에 가서 몸이나 씻으라니! 12) 다메섹에는 이스라엘의 어느 강보다 더 좋은 강들이 있지 않느냐? 레바논 산속에서 흘러나오는 아마나 강물과 헬몬 산속에서 흘러나오는 바르발 강물은 얼마나 맑고 시원하냐! 강물에 들어가 목욕해서 나을 병이라면 내가 거기서도 충분히 목욕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는 화를 내면서 고향으로 되돌아가려고 마차머리를 돌렸다. 13) 그러나 나아만의 부하들이 다가서며 말하였다. “만일 저 예언자가 이보다 더 어려운 일을 하라고 요구하였더라도 장군님은 틀림없이 그대로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겨우 가서 몸을 씻으면 깨끗해질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일단은 그대로 해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14) 그래서 돈 많고 권세 높은 나아만은 마음을 바꾸어 겸손히 요단강으로 내려가 엘리사가 명령한 대로 그 물에 일곱 번 몸을 씻었다. 그러자 그가 완전히 치료되어 그의 피부가 소년의 살결처럼 깨끗해졌다. 15) 그가 수행원들을 모두 거느리고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에게로 돌아와 그 앞에 서서 말하였다. “이스라엘 외에는 온 세상에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내가 이제야 알겠습니다. 그러니 감사해서 드리는 나의 선물을 받아 주십시오!” 16) 그러나 엘리사는 “내가 섬기는 여호와께서 확실히 살아 계심을 걸고 맹세하지만 나는 아무 것도 받지 않겠습니다.” 하고 거절하였다. 나아만은 그의 마음을 돌이켜 놓으려고 여러 번 애를 썼으나 엘리사는 여전히 어떤 선물도 받지 않았다.
때로는 선지자의 말이 전혀 이치에 맞지도 않는 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을 인간적인 대접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어린애도 이해하지 못할 소리를 합니다. 그러나 조금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나아만의 부하들이 “만일 저 예언자가 이보다 더 어려운 일을 하라고 요구하였더라도 장군님은 틀림없이 그대로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겨우 가서 몸을 씻으면 깨끗해질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일단은 그대로 해봐야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한 대로 행하기 어려운 것을 하라고 했다면 - 예를 들어 앞에 있는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지라 - 고 했다면 할 수 있었겠습니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일은 결코 우리가 못할 일은 아니라는 것을 늘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아만은 왜 엘리사가 자기에게 이렇게까지 했는지를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하였으나 깨닫고 난 후에는 평생토록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참고로 나아만이 요단강에 몸을 잠그자마자 병이 나은 것은 아닙니다. 7번을 순종했을 때에야 병이 완전히 치료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일곱 번까지 순차적으로 병이 고쳐진 것은 아닙니다. 기적이 일어나기까지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해 명령하신 요단강물에 7번을 목욕하라는 말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1~2번 해서 안 된다고 그만 둔다면 고침을 받겠습니까? 물론 처음에는 모양만 내도 고침을 받을 경우도 있겠지만 끝까지 순종해야 함을 잊지 마십시다.
2. 인내를 가지고 한 과정씩 … .
예수님은 아주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여기로부터 예수님의 이적의 명령의 말씀이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이적을 나타낼 때에는 원칙이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하여 순종을 요구하신다는 원칙입니다. 예수님은 능력을 직접 보이실 수도 있습니다. ‘물을 채우라’가 아닌 ‘포도주를 내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들의 순종을 요구하는 ‘물을 채우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가끔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이 원칙을 뛰어넘는 교만함을 범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포도주입니다. 우리에게 포도주를 주십시오. 그러면 그 포도주를 우리가 마시고 하나님의 일에 더욱 헌신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그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기적을 요구하는 우리들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음성은 이것입니다. “포도주가 떨어졌느냐? 먼저 물을 채우라. 포도주를 마시고 싶으냐?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구원의 은혜를 얻고 싶으냐? 먼저 주 예수를 믿으라. 앞을 보기를 원하느냐?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물을 가득 채우는 일은 우리가 해야 할 일임을 가르치셨고 그리할 때에 예수님은 우리가 준비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원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찾아 하십시다. 하인처럼 그 명령에 자발적으로 순종한다면 구세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기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구약의 말씀처럼 지금도 순종하는 사람에게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포도주를 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기도를 드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포도주를 주겠다는 말씀보다 물을 채우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 우리는 손 씻을 물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물이 아니라 포도주입니다.”
우리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현재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씀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하는 과정을 무시하려고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의 과정을 무시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열매만을 얻기 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예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마 13:31-33 / … 하늘나라는 어떤 사람이 자기 밭에 심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 겨자씨는 모든 씨앗 중에 가장 작은 것이지만 새들이 날아와 그 가지에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된다. 33) 어떤 여자가 밀가루 반죽 속에 누룩을 넣었더니 그 누룩이 온 덩이를 부풀어 오르게 하였다. 하늘나라는 이 누룩과 같다.
천국은 “겨자씨를 밭에 심어야 큰 나무가 되고, 누룩을 반죽 속에 넣어야 부풀어 오른다.”는 것입니다.
3. 희생을 통하여 풍성한 결실을 …
요 12:23 / …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는 것과 같이 나는 죽어야 한다. 내가 죽지 않고 그대로 있으면 밀알 하나가 그대로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내가 죽으면 한 알의 죽은 밀알에서 많은 밀알이 맺히듯이 새 생명들을 풍성하게 거두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예를 들면서 한 알의 밀알이 희생하면 풍성한 결실을 맺는다고 하셨습니다(요 12:24). 농부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을에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확천금(一攫千金)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일확=한번 거둠으로써, 천금=천개의 금을 얻다는 뜻으로 한 번 한 장사가 대박이 나서 돈방석에 앉는다는 말입니다.
크리스천은 이러한 꿈을 꾸면 안 됩니다. 땀 흘리는 사람이 형통합니다(시 128:2). 땀은 인생의 아름다움입니다(전 5:18). 주어진 사명에 최선을 다해서 애쓰고 수고하고 땀 흘리면 하나님이 그 땀의 결과를 거두게 하십니다. 땀은 정직합니다. 땀 흘리지 않으면 빈궁해집니다(잠 24:33). 땀 흘려야 할 때 흘리지 않으면,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과 같이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립니다. 그러나 반대로 땀 흘려도 성과가 나타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때 포기하면 안 됩니다. 이삭은 땀을 흘려 판 우물을 다투지 않고 다른 부족(部族)에게 양보했지만, 이로 인해 더 큰 복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창 26:24). 땀 흘리는 것은 절대로 수포로 돌아갈 수 없고, 때가 되면 반드시 풍성한 결실로 돌아옵니다.
눈물도 그렇습니다. 눈물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입니다. 슬픔이 아니라 기쁨입니다. 농사를 짓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비입니다. 때를 따라 비가 내리지 않으면 결실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6)라고 합니다. 결실과 눈물은 정비례합니다. 우리 인생도 눈물이 있을 때 성숙될 수가 있습니다. 농부의 손이나 어부의 손을 만져본 적이 있습니까? 그들의 손은 상처투성이입니다. 낫으로 베이고, 그물로 찢겨진 자국이 가득합니다. 그들의 피 흘림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생선, 쌀밥, 과일을 먹습니다.
예수님도 창에 찢기셔서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그 피가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피 흘림의 헌신이 있을 때 많은 결실을 맺게 됩니다. 그런데 악한 마귀는 어떻게든 방해하려고 합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피 흘리는 것을 싫어하게 하고 대충하라고 충동합니다. 이런 생각은 사단이 주는 생각입니다. 때로는 결실을 위해서 내 생명도 다 바쳐야 합니다. 결실을 위해서 피를 흘릴 때 황무지가 변하여 옥토가 됩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됩니다. 내 대(代)에서 거두지 못한다면, 내 후손의 때에서라도 분명히 거두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사람답게 희생하는 영적 농부가 됩시다.
■ 미국의 한 젊은이가 선교의 꿈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아내와 함께 아프리카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가 아프리카에 도저히 적응하지 못함으로 1년 뒤에 귀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젊은이는 선교의 사명을 버릴 수가 없어서 포도 주스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직접 선교는 못하나 재정적으로 선교를 돕자는 생각에서 입니다. 그의 이름은 웰치인데, 지금도 ‘웰치 포도 주스’가 미국 전역을 휩쓸고 있습니다. 그는 연간 2백만 달러를 선교비로 지출하는데, 그것은 그의 총수입의 절반이라고 합니다. 그가 열심히 버는 대로 선교를 하니 하나님께서도 아낌없이 그에게 부어주십니다. 그는 고백하기를 “나는 하나님께 붙잡혀 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내 안에 사신다.”고 했습니다.
4. 마음의 준비도 철저히 하십시오(살전 5:15-18)
운동에 있어서 기본기(基本技)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자세를 바로 잡고 교정하는 기본기 훈련에 많은 시간을 투자합니다. 신앙생활도 기본이 좋아야 열매를 많이 맺습니다. 신앙의 연륜과 탄탄한 기본기가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이 가지고 높은 지위에 있어도 기본이 잘못되어 있으면 남을 해롭게 하는 인생이 됩니다. 지혜의 사람 솔로몬은 전도서 12:13에서 인생의 본질이며 핵심인 결론으로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4절에서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우리가 남긴 우리의 모든 언어와 심사(心思)와 행위를 그대로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도 가릴 수도 없습니다. 교회도 기본기가 충실한 교회가 영적인 열매를 많이 맺습니다. 여기에서 열매 맺는 삶의 자세에 대해 바울은 몇 가지를 지적하였습니다.
살전 5:15-18 / 아무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마십시오. 그보다는 언제나 서로 선을 베풀도록 힘쓰십시오. 또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푸십시오. 16) 항상 기뻐하십시오. 17) 언제나 기도에 힘쓰십시오. 18) 어떤 처지에 있든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마십시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뜻입니다.
■ 어느 날 고든이라는 신학자가 산책하러 들에 나갔습니다. 밀밭 끝을 보니 펌프에서 물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같은 속도로 30분이 넘도록 펌프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신기한 생각에 고든은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가보니 펌프질을 하는 것은 사람이 아닌 마네킹이었습니다. 이 모습에서 고든은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닫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같은 속도로 쉬지 않고 펌프질을 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삶에 성령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작심삼일(作心三日)은 커녕 은혜받고 교회 문을 나가는 순간부터 말다툼을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셔서 끊임없이 은혜의 단비를 부어주시고 우리 삶에 기쁨과 능력과 감사를 충만하게 부어주시기에 날마다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하여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기뻐해야 할 이유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아 천국백성이 되고, 오늘 죽으면 천국에서 눈을 뜬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기뻐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가 없기 때문에 쉬지 말고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롬 8:28)고 하셨으매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만 붙잡으면 모든 것이 전화위복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선을 따르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맡겨진 일에 충성하십시다.
■ 1494년 이태리의 한 영주가 이른 새벽에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원 한 구석에 뭔가 인기척이 있었습니다. 둘러보니까 한 젊은 정원사가 나무로 만들어진 화분에 열심히 조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보게, 이런 일을 한다고 누가 임금을 더 주는 것도 아닌데, 이른 새벽부터 왜 조각을 하는 건가?” “저는 이 정원을 아주 사랑합니다. 정원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 저의 직무이므로 보수와 상관없이 저는 기쁘게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영주는 그 청년의 대답에 감동을 받았고, 그의 소원인 미술 공부를 후원해 주었습니다. 후에 이 청년은 르네상스(Renaissance)시대의 최고의 미술가가 되었습니다. 그 이름은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입니다.
어떤 형편과 처지이든지 감사하는 것이야말로 예수 믿는 사람의 삶의 표지(標識 / Mark)입니다. 우리가 나쁜 일을 만나도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과 주권적인 하나님의 능력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범사에 감사하라는 의미입니다(골 3:16-17).
골로새서는 사도바울이 감옥에서 쓴 옥중서신(獄中書信)입니다. 사도바울이 ‘감사’라는 명사와 동사를 46번이나 썼는데, 그 대부분이 옥중서신에서 사용했습니다. 그는 감옥 안에 있었지만 감옥 밖에 있는 성도들에게 감사해야 된다고 역설합니다. 애굽을 떠나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은 믿음이 부족한 데에서 나오는 불신과 불평으로 이런 쓴 뿌리를 뽑기 위하여 40년 동안을 광야에서 헤맸습니다.
■ 중국의 어느 왕이 부하에게 우물물을 길어 독을 가득 채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부어도 독에 물이 차지를 않습니다. 밑이 빠진 독이었습니다. 그래도 신하는 계속 물을 부었습니다. 어느덧 우물이 말라버렸어요. 그런데 그 바닥에 누런 것이 보여 꺼내 보니 큰 금덩어리였어요. 왕에게 그것을 가지고 가서 “폐하, 죄송합니다. 제가 열심히 하려고 했는데 독에 물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우물 바닥에서 이 금덩어리가 나왔습니다.” 왕은 웃으면서 “참 잘했다. 자네가 얼마나 충성하는지 보려고 깨진 독인 줄 알면서도 물을 채우라고 했네. 이 금덩어리는 자네같이 충성스런 사람들을 위해 준비한 것이니 자네가 가지고 가서 편안하게 잘 살게.”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그 부하가 “왕이 정신이 나갔어. 밑 빠진 독을 어떻게 채우라는 거야?” 불평을 했더라면 칭찬은커녕 금덩어리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기다리는 우리는 영적인 잠이나 게으름에 빠지지 말고 항상 깨어 일하는 자세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언제든지 ‘아멘’으로 대답하고 일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쓰심에 합당하게 예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언제 무슨 일을 맡겨도 감당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 한 청년이 존 워너메이커라고 하는 백화점 왕에게 찾아와 일거리를 하나 달라고 청했습니다. 워너메이커는 마땅한 일거리가 없다고 처음엔 거절하였습니다. 그래도 그 청년은 무엇이든 좋으니까 좀 시켜 달라고 간청합니다. 워너메이커는 할 수 없이 “일을 하려면 이 유리를 닦으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이 청년은 유리창을 닦기 시작했는데, 얼마나 정성스럽고 충성스럽게 일을 했던지, 워너메이커가 직원으로 채용했습니다. 그 청년은 무엇을 맡기든지 최선을 다해 충성하였습니다. 그 결과, 유리 닦는 청소부에서 시작한 이 청년이 나중에는 그 스토아의 매니저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명하신 일에 아름다운 마음으로 순종했습니까? 80% 정도의 1급수입니까? 60% 정도의 2급수입니까? 40% 정도의 3급수입니까? 20% 정도의 4급수입니까? 0% 정도의 오염된 못 쓰는 물입니까?
이왕이면 어린 사무엘(삼상 3:10 / 주님, 말씀하소서! 제가 듣고 있습니다!)이나 마리아(눅 1:38 /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대로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이 모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처럼 1급수의 순종을 보입시다.
▣ 성경 구절 2곳을 드리며 말씀을 마칩니다.
합 3:17-19 / 무화과나무는 싹도 내지 않고 포도 덩굴에는 열매가 없습니다. 올리브나무의 소출은 실망뿐이고 논밭의 곡식들은 먹을 것이 없습니다. 목장의 양 떼들은 모두 다 사라졌고 외양간에는 소 한 마리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렇더라도 나는 여호와 때문에 기뻐 뛰겠습니다. 나를 도와주겠다고 약속하셨으니 나는 즐거워하겠습니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 나의 힘이십니다. 그분이 나의 두 발을 암사슴의 다리와 같게 하시고 모든 산들의 위에서 안전하게 달리도록 힘을 주십니다.
히 10:35-38 / 여러분은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마음을 잃어버리지 마십시오. 장차 여러분이 받을 보상을 언제나 기억하십시오. 36)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것을 받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37)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실 날이 그다지 많이 지체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38) 하나님을 올바로 믿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주께 대한 믿음과 신뢰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만일 뒷걸음질 쳐 물러서려 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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