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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해설
몸에 새긴 자연과 시간의 문신
민용태 | 스페인 왕립 한림원 위원, 고려대 명예 교수
김성순 시인은 몸으로 시를 쓴다. 몸으로 직접 체험한 것을 시로 쓴다. 그녀의 일상이 바로 그녀의 시다. 꽃 가꾸기를 좋아하고 자칭 "꽃에 미친" 시인이 김 시인이다. 그래서 그녀의 시에는 꽃냄새와 함께 살 냄새가 난다. 자연에 그을리고 시간에 씻겨간 깊은 문신 자국이 새겨진 어머니의 사랑 냄새. 그것은 가없는 바다 냄새이다. "엄마의 바다"는 이렇게 속삭인다:
온갖 역경 이겨낸 벼랑 끝 늙은 소나무에 기대서서
하염없이 먼 수평선 바라보시던 엄마의 바다는 얼마나 넓을까
엄마의 바다는 얼마나 깊을까
수많은 세월 바다는
기쁨이다 눈물이다 엄마의 뜨거운 가슴이다
일렁이는 엄마의 깊이다
해동을 기다리며 창밖으로 먼 산 바라보는
엄마의 주름진 눈동자에 하얀 파도가 일렁인다
하얀 갈매기가 춤을 춘다
땅거미가 내리고 금방 비가 올 것 같은 저녁 무렵의 바다
오늘 엄마의 바다가 나를 울린다.
「엄마의 바다」 부분
자식들의 희로애락을 속으로 삭이고 가꾸어온 엄마의 가슴 속에는 세월의 바다가 일렁인다. 오늘 "해동을 기다리며 창밖으로 먼산 바라보는 / 엄마의 주름진 눈동자에 하얀 파도가 일렁인다" 객지에 간 자식들은 어떻게 살까, 참 보고 싶구나. "하얀 갈매기가 춤을 춘다" 그러나 그 모습은 벌써 “금방 비가 올 것 같은 저녁 무렵의 바다"이다. 금방 세월의 물결에 휩싸여 묻힐 것 같은 애잔한 모습. 고요하지만 아픈 그 모습이 오늘 나를 울린다.
그런 어머니 아버지의 지혜 하나가 아이들의 명을 길게 하려면 길가의 개처럼 아무렇게나 키우라는 좌우명이었다. 자연과 인간이 질긴 생명력으로 끈질기게 버틸 줄 알아야 오래 산다는 생각이었다. 김 시인은 "개망초'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한다:
화분마다 돋아난 불청객
뽑고 또 뽑아도 질긴 생명
하얀 꽃 피워내는
그 안쓰러운 의지
햇볕 뜨겁고 긴 이름난
하늘하늘 수줍은 미소로 날 보러왔네
송이송이 앙증스런 하얀 꽃잎
그림자 질 때까지 헤아리다가
벌 나비도 집 찾아 날갯짓하는
저녁놀 고운 석양빛에
눈부신 그 하얀 예쁜 꽃
명 길라고 하늘할아버지 개망초라 이름 지었나.
「개망초」 부분
어머니의 딸이 또 어머니가 되고 자식 키우고 꽃 가꾸다 보면 처음엔 불청객이라 미웁기만 하던 개망초가 끝내 어머니의 미소를 가꾼다. 버린 자식이 효도한다고 했던가. 노자는 등굽은 나무가 마을을 지킨다고 했다. 모두 출세나 명예보다는 끈질긴 생명력을 찬양하는 양생(養生)의 미학이다. “햇볕 뜨겁고 긴 여름날 / 하늘하늘 수줍은 미소로 날 보러왔네 / 송이송이 앙증스런 하얀 꽃잎 / 그림자 질 때까지 해아리다"
먹고 산다고 시달리고 아이들 키우며 마음고생 하다 보면 문득 거울 속에 낯설고 무서운 얼굴이 보인다. 김 시인은 "거울 앞에서”, “당신 누구세요?" 묻는다:
문득 거울을 보다가
그 속에 비친 모진 얼굴에 깜짝 놀란다
덕지덕지 얼룩진 세월의 때
의욕을 상실해버린 핏기 없는 옷
여자 뒤로 피곤한 옷가지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다.
아무리 우겨도 마음속 청춘은 없고
정직한 거울이 비웃고 있을 뿐
무릎걸음으로 거울 앞으로 다가가
마법의 거울 앞에 선 마녀처럼 묻는다
당신 누구세요? 어디서 왔어요?
「거울 앞에서」 부분
평생 얼굴 하나는 자신 있다고 살았던 인생에 어느새 "세월의 때가 덕지덕지 끼었다. 알아볼 수가 없는 얼굴에 깜짝 놀란다. 자신의 얼굴이 무섭기까지 하다. 너무 놀라 엉금엉금 기어간다. 도저히 자기라고는 믿을 수 없는 얼굴 앞에서 묻는다. “누구세요? 어디서 왔어요?"
한 번 늙으면 회춘이 어디 있는가. 봄이 오면 눈물만 난다. “눈과 눈물 봄”은 그런 아픔이 봄 눈에 묻어난다:
창밖에 가로수 앙상한 가지
봄이 오면 새 잎 피는데
내 마음속 앙상한 고목이여
잔설 위에 다시 눈이 내리고
내 얼굴에 다시 눈물 흐르고
행복한 기억도 눈물이다.
눈은 눈물이다 눈은 봄이다
이 혹한 지나가면 봄은 오는데
눈물 속에 갇혀버린 나의 봄이여.
「눈과 눈물 봄」 부분
살다보면 시간과 우주 속에 길 잃은 나그네가 나만 아니다. 문득 길 모퉁이로 사라지는 길고양이가 내 모습이다. 어디 그뿐인가. 청승맞게 한밤중에 빈 하늘에 떠 있는 달 또한 내 모습이다. 누가 누구를 나무라겠는가. 여기 저기 사랑에 굶주린 중생들이 떠돌아다닌다. 길가에 떨어진 달빛이 길고양이를 쓰다듬는다:
달빛이 꺾여 비춘 골목에
길고양이 숨어있다
반짝이는 눈빛 포망에 걸린 빵조각
인기척에 놀라 담장 너머로 사라지고
달빛 등진 내 그림자나
보다 먼저 골목을 나선다.
달은 우주의 길고양이
비가 내리지 않는 비의 바다엔 옥토끼도 떠나고
끝없는 짝사랑 지구바라기
햇빛을 주워 먹고 야윈 몸 추슬러
밤새 창밖에서 사랑 구걸하다가
지친 얼굴로 성당 종탑위에 걸터앉아
어슬렁어슬렁 먹이 찾는 길고양이
차가운 등 허리 쓰다듬는다.
「달과 길고양이」 전문
부부 사이는 가장 가까우면서 가장 먼 사이라고 했던가. 자식 낳고 살다보면 내 살처럼 가까운데, 문득 떠나거나 죽으면 너무 먼 사람이 내 곁에 있었다. 인생은 참으로 알수없는 것. "당신과 살면서"에는 당연한 것처럼 같이 살았던 당신과 나 사이가 갑자기 타인처럼 멀어보일 때 새삼 놀란다:
반백년을 넘게 살면서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두 눈을 부릅떠 보지만 (중략)
찬 기운 스산한 대숲사이 빠져나온 겨울바람
무얼 쫓아가는지 황량한 벌판으로 달려 나가고
수많은 세월이 흘러간 당신과 나 사이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호호 입김 불며 열심히 안경알을 닦는다.
「당신과 살면서」 부분
이유야 어찌 되었든 늘 함깨한 사람이 띠난다는 깃은 이해할 수 없는 아픔이다. "시울 역에서"는 만남과 헤이짐의 꽃과 가시가 교차한다:
그리움은 발이 크다
누구 발자국인지 모른
서울역 로비 수많은 발자국을 지우는 청소부
밀대가 지나면 또 다른 발자국이 찍히고
발자국이 지워지면 또 다른 발자국이 남고
지우개로 흑판을 닦듯 그렇게 수없이
싹싹 지웠다고 믿었던 내 기억의 서울역
당신이 스쳐간 역 한편에 멍울진 그리움
꽃 진 자리 마른 꼬투리 속의 까만 씨앗
오랫동안 닫았던 마음 빗장을 열고
해묵은 상자 속 당신의 편지를 꺼내본다
눈받에 찍힌 지워진 발자국처럼
감아도 감아도 안으로 파고드는 그리움의 무니여
오늘도 서울역에 만나고 헤어지는 발자국
바쁜 일상 속에 모두 잊고
그 곳을 지나가는 내 눈의 백미러에는
안으로 안으로 파고드는 선인장 가시가 아프다
「서울역에서」 전문
구체적으로 당신이 그럴 줄 몰랐다. 사랑할 때는 언제고 떠날 때는 언제인가. 그래서 서울역은 항상 만원이다. 반가움과 그리움... 특히 그리움과 아픔이 “안으로 안으로 파고 드는 선인장 가시"이다
어느날 문득 당신이 산으로 가겠다고 한다. 세상 다 살고 무슨 스님? 당신이 하는 말이 농담인 줄 알았다:
유난히 음주가무를 즐기던 사람
뛰어난 유머 감각으로 인기를 끌던 사람
체중보다 자존심이 더 무거운 사람
맛집을 줄줄이 꿰고 미식가로 소문난 사람
사람이 홀연히 속가(俗家)를 떠났다
농담인 줄 알았다
어울리지 않게 혼잣말처럼
‘산에서 살고 싶다'할 적엔
많은 세월이 흐른 뒤
바람결에 들려온 소식은
운무 자욱한 계곡 위
운판소리에 새들 영혼 잠들고
목어가 헤엄치는 골짜기 삼백년 고찰
회색빛 장삼자락에 휘감기는 예불소리 낭낭하다
호젓한 산길 푸드득 차오르는
산새소리에 놀란 다란쥐치림
뛰는 심장소리 내 귀를 후볐다
무엇이 그를 끌어 당겼을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미로를 헤매는 아이처럼
대웅전 날렵한 처마 끝에서 흰구름 유혹하는
풍경소리 따라 나도 모르게
자석에 이끌리듯
내 발길 산사로 간다
「산사로 가는길」 전문
그러나 다시 보면 산으로 간 사람만 스님이 된 게 아니다. 김성순 시인의 시에는 갑자기 성칠 스님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가 비치고 있다. 세상 만물을 보고 어둠과 밝음을 함께 보는 분별심을 초월한 대자대비한 마음이 햇살처럼 비친다. 그녀의 시도 기운도 심산유곡을 굽이쳐 내리는 폭포수처럼 맑고 거칠 게 없다. "해는 해다"를 보자:
아침에 솟아오르는 해를 보고
경외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구는 두 손을 모으고 소원을 빌고
누구는 벅찬 희망으로 심장이 뛴다
해는 저 깊은 바다에서 솟아오르고
해는 저 높은 산속에서도 솟아나오고
해는 드넓은 사하라사막에서도 떠오르고
해는 빌딩 숲속에서도 튀어나오고
해는 막 출가한 동자스님의 머리 위에서도 솟고
해는 어제 죽은 이가 묻힌 무덤 위에서도 봉긋이 뜨고
해는 부자의 식탁 위에서도 뜨고
해는 가난한 이의 찌그러진 숟가락 위에서도 뜨고
해는 자궁에서 막 탈출한 아이의 어머니 가슴속에서도 뜬다
누가 해를 뜨겁다고 말하는가
누가 해를 붉다고 말하는가
누가 해는 아침에 뜬다고 말하는가
누가 해는 하나라고 말하는가
누가 밤에는 해가 없다고 말하는가
누가 어제 뜨는 해와 오늘 뜨는 해와
내일 뜨는 해가 같다고 말하는가
해는 머리위에서 놀고
해는 가슴속에서 놀고
해는 등위에서 놀고
해는 발아래에서 놀고
해는 물위에서 놀고
해는 물속에서 놀고
해는 나무위에서 놀고
해는 땅속에서도 놀고
해는 여럿이 놀기도 하고
해는 혼자서 놀기도 하고
해는 달과 놀기도 하고
해는 별과 놀기도 하고
저만치 멀어진 그림자를 보며
농부는 가래를 챙기고
어부는 그물을 걷으며
해바라기는 고개를 숙인다
서산에 지는 해를 보고
경외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구는 두 손을 모으고 감사기도를 하고
누구는 눈물을 흘리며 절망하기도 하고
여기 해가 뜰 때 지구 저편엔 어둠이고
여기 어둠일 때 지구 저 편엔 해가 뜬다
해는 해다.
「해는 해다」 전문
오쇼 라즈니쉬는 "사랑을 알면 신을 알 필요가 없다"라고 말한다. 사랑은 스스로 나를 버리고 너에게로 몰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너는 내가 되고 나는 네가 된다. 여기 뚜렷한 에고(ego)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사랑이 갈증보다 심한 목마름으로 온몸을 아우를 때가 있다.
생각해보면 관습과 타성과 일 속에서 일생을 허비하고 나이와 무거움과 사막만 보상으로 집어졌다. 알아보기 쉽게 젊음도 가고 온갖 병과 갈등과 고독이 나를 에워쌀 때, 나는 그동안 무엇을 하며 살아왔는가. 무엇을 하겠다고 발버둥쳤는가... 이제야말로 나의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하고 싶은 나의 보든 에고가 바닥나도록 참 삶에 빠져들고 싶은 목마름이 나를 침범한다. 나에게 시가 찾아온다:
사랑이 얼마나 달콤한지 모른 채
사랑이 얼마나 향긋한지 모른 채
사랑이 얼마나 포근한지 모른 채
사랑이 얼마나 뜨거운지 모른 채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른 채
사랑이 얼마나 아픈지도 모른 채
순정 하나로 순종을 배우고
존중의 미덕으로 면사포를 썼다
설렘으로 기다림을 배우고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새벽녘 유성처럼 다가와 말라비틀어진
까만 눈물로 운명과 숙명 위에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그린다
황사바람 불어와 가슴에 모래언덕 쌓이고
허구의 모래성 수없이 쌓다 허물다 또 쌓는다
누가 저 사막에 녹색 씨앗 뿌릴까
불면에 지친 시야엔 파도만 출렁출렁
누가 저 바다에 방파제를 쌓을까
허우적허우적 등대도 없는 밤바다 아득선 수평선
악어 이빨 같은 하얀 포말이 끝없이 밀려오고
허우적허우적 오아시스 없는 사막 길 잃은 낙타 한 마리
휘어진 낙타 등 사이로 해는 기우는데
바다도 사막도 끝난 곳
사랑,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사랑, 아직 시작도 아니 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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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랑, 아직 시작도 아니 한」 시집(4부) 게재를 모두 마치게 되어 감회가 깊습니다.
시인 수연 김성순님께 감사드립니다~
석경님!~~그동안 보잘것 없는 제 시를 올려 주시느라
넘넘 수고 많으셨습니다 결코 짧지 않은 작품해설까지
옮기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