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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희문 밖 순교지와 순교자 영성
강석진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순교성지 새남터 본당 주임 신부
1. 시작하며
2. 광희문 밖 순교자들의 사료
3. 감옥생활과 순교 방식에 대한 천주교 신자들의 인식
4. 광희문 밖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
5. 광희문 밖과 천주교와의 관계
6. 마치며
[부록] 1846년 광희문 밖 순교자들의 행적
1. 시작하며
태조(大祖)5년(1396),한양에 도성이 창건될 때 세워진 광희문(光 罪門)은 ‘죽은 자와 연관이 있다. 우선 성안에 거주하던 이들이 사망하면 시신을 성 밖 묘지에 매장하기 위해서 장례 행렬이 나갔던 문(門)이었다. 그리고 광희문 밖은 조선시대에 옥살이하던 죄수들이 병사(病死), 장살(杖殺),교살(紋殺)되면 형졸들이 그 시신을 버렸던 곳이다. 그렇게 ‘죽은 자’와 관련된 광희문 밖은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와 관련하여 옥사한 천주교 신자들을 버린 장소였다. 특히 광희문 밖은 공동묘지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 버려진 이들 중에 천주교 신자들의 시신은 가족이나 동료 신자들이 수습하여 묻었다.
이처럼 박해시기 천주교 신자들의 시신이 버려지거나 묻힌 광희문 밖은 최근들어 천주교의 중요 한 순교지로 조명되고 있다. 2013년에는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공식적인 순례지로 지정했으 며,1 그 여파로 인해 이곳을 순례하는 이들이 늘어났다.2 그리고 광희문은 국가의 사적지(史績地)로 지정되어 있을 정도로 성곽과 성벽, 성문의 형태가 오늘날까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광희문은 천주교 박해와 관련하여 당시의 역사적 장소로 현장성을 그대로 보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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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톨릭평화신문』,제1230호(2013년 9월 1일).
2 가롤릭신문j,제2883호,2면(2014년 2월 23일): 제2887호’ 23면(2014년 3월 23일): 제2888호,27면(2014년 3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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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있기에, 이곳을 순례하는 이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중심으로 연구자는 ‘광희문 밖 순교지’3를 중심으로 그와 관련한 천주교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을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그동안 박해시기 순교자에 대한 연구 경향은 특정 순 교자 개인의 생애와 순교 사실을 밝히는 논문들이 주류를 이루었다.4 최근에 들어서야 순교자에 대해 ‘삶과 영성’ 혹은 ‘신앙 특성’을 다룬 논문들이 발표되고 있다.5 다시 말해서, 박해시기 순교자들의 생애와 순교 사실에 대한 연구는 꾸준히 이어져 왔지만, 순교지를 중심으로 그곳에서 순교한 이들의 삶과 신앙을 밝히는 연구는 부족한 실정이다. 그러므로 순교지를 중심으로 그와 관련한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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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박해시기에 천주교 순교자들의 시신을 버린 곳의 위치는 엄밀히 말하면 ‘광희문 밖’이었다. 그래서 국가 사적지로서 공식 명칭인 '광희문’과 차이를 두면서,순교지에 보다 더 강조점을 두는 의미로 필자는 ‘광희문 밖’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자 한다. 더불어 필자는 광희문 순교지에 대한 정확한 명칭으로는 ‘광희문 밖 순교(성)지’라고 주장한다.
4 전동천주교회 윤지충, 권상연 현양위원회,『한국 최초의 순교자:시성에 즈음한 윤지충, 권상연 학술심포지엄(2010),천주교 전동교회,2010 주명준, [天主敎의 全羅 道 傳來],탐구당,1998; 김성봉,「초남이 동정 부부,가톨릭출판사 2012; 정병설, 죽음을 넘어서-순교자 이순이의 옥중편지,민음사,2014; 방상근,「순교자 최창현 의 삶과 신앙,순교자의 삶과 신잉J(순교총서2),도서출판형제애,2014; 김정숙「순교자 강완숙과 초기 천주교 교회생활」, 순교자의 삶과 신잉J(순교총서2),도서출판 형제애,2014; 한건,「이경언의 옥중서간에 대한 고찰, 신앙과 삶 제9호,부산가톨 릭대학교출판부,2004; 여진천,「‘하느님의 종’ 최해성(요한》에 대한 연구,한국천주교회의 빛과 그림자, 디자인흐름 2010.
5 여진천,「한국 초기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 이성과 신방 제29호,수원가톨릭대학교,2005, 44~90쪽:「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교회사연 구j 제42집,한국교회사연구소,2013, 5~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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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삶과 신앙을 연구하려는 이 논문은 앞으로 한국 천주교회 안에 서 순교자 영성을 꾸준히 정립해 나가는 데 어느 정도 기여할 것으 로 본다.
본고의 연구 내용과 방법은 첫째는 박해시기 광희문 밖을 중심으로 천주교 신자들 중에 옥사한 후 이곳에 버려진 이들에 대한 사료들을 수집하고 정리할 것이다. 그리고 박해 이후 광희문을 중심 으로 천주교 박해와 연관된 자료들을 찾아서 그 내용들을 확인해 보고자 한다. 둘째는 박해시기 천주교 신자들이 가진 순교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을 살핀 후, 옥사자들이 겪는 인간적인 갈등과 내적인 고통을 주목해 볼 것이다. 셋째는 박해시기 동안 옥사한 후 광희문 밖에 버려진 순교자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삶과 신앙을 밝히 고자 한다. 넷째는 박해시기 이후, 광희문 밖 순교지가 신자들과 일반인들에게 어떻게 이해되어 왔는지를 살핌으로써 광희문 밖 순교지의 중요성을 다루게 될 것이다. 본고에서 광희문 밖 순교자 중에 교회 측 기록과 관찬 기록 사이에서 논란의 여지가 되는 인물에 대해서는 추후 연구와 검증 작업을 위한 여지로 남겨 둘 것이다.
2. 광희문 밖 순교자들의 사료
광희문 밖 순교지와 관련된 순교자들과 그들과 관련된 사료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광희 문 밖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은 1846년 박해 때 순교한 이들과 관련이 있다. 이 박해의 여파로 공식적으로 9명이 순교하였고, 그중에 한이형(韓麗事,라우렌시오,1799〜1846), 김임이(金任伊,테레사, 1811〜1846),이간난(李干菌, 아가타,1814〜1846)우술임(禹述任,우산나,1803〜1846),정철염(鄭鐵 熟,가타리나,1817-1846)등 5명이 옥사하였다. 그리고 옥사자들 가운데 한이형을 제외한 나머지 네 명의 여성 신자들의 시신은 광희문 밖에 버려졌다. 광희문 밖 네 명의 여성 순교자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1846년 박해 때 김대건(金大建,안드레아,1821-1846) 신부가 체포된 후에 현석문과 함께 붙잡힌 인물이었다.
1846년 박해 때 광희문 밖에 버려진 순교자들에 대해 언급된 관찬 사료는『일성록(터省錄)』과『포도청등록(捕盜廳騰緣)』이 있다.
『일성록』의 1846년 8월 1일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좌우포청이 사악한 학문을 배운 죄인을 처단한 내용 … 韓麗事과 李干菌,禹述任,金任伊, 鄭鐵魏 등 여성들은 여러 차례 주리를 트는 형 벌을 받았으나, 끝내 배교하지 않은 고로 함께 엄한 장형을 받고 죽었 습니다.6
또한『우포도청등록』1846년 8월 1일 기사에도 이와 유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우포도청이 사학죄인에 대한 처벌 방침을 아뢰다 右邊捕盜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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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일성록(B省緣)j 1846년 8월 1일 기사: 左右補應以邪學罪人酌處啓 … “韓廣事及李 女干閑 禹女述任 金女任伊 鄭女鐵酷等騰施半刑終不背敎故述:嚴杖致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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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 “韓麗후 및 여자 李干菌,여자 禹述任,여자 金任伊,여자 鄭鐵念 등에게 여러 차례 주리를 틀며 매질하며 갖은 방법으로 따져 물었는데,고집스럽기가 나무나 돌과 같아서 끝내 종교를 배반할 수 없다는 뜻으로 똑같은 말로 진술을 바쳤으므로,아울러 엄히 매질하여 죽음에 이르렀습니다.”7
위의 관찬 기록을 정리하면, 이당시 박해 당국자는 체포 되어 옥에 갇힌 다섯명의 천주교 신 자들에게 주뢰형과 매질을 통해 배교를 강요했다. 그러나 천주교 신자들은 끝까지 신앙을 지켰 고, 마침내 장형으로 처형되었다는 내용이다.
1846년에 순교한 광희문 밖 여성신자들에 대한 천주교측 기록은 이들의 시복과 관련하여 수집된 자료에 있다. 이 자료는 1846년 당시 충청도 수리치골에 은신 하고 있었던 페레올 주교의 지시 로 이루어진 것이다. 페레올은 이때에 수집된 자료들을 바탕으로 “병오박해 순교자 9인의 행적”을 정리한 후,이 기록을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있는 바랑(Jean Barran, 1798-1855)신부에게 보냈다.8 이자료 안에 광희문 밖 순교자로 네명의 여성 신자들에 대한 기록이 있었다.
또한 페레올은 현석문과 이재의(李在誌,토마스,1785~1868)가 수집해 놓은1839년 순교자 73명과 1846년에 순교한 9명을 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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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우포도청등록(右捕盜應騰錄)j 1846년 8월 1일 기사
8 원재연,「페레올 주교의 조선 입국 후 사목활동」, 교회사학j,수원교회사연구소,2008, 120~134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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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기해, 병오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9 이라는 프랑스어 보고서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보고서와「1846년 11월 3일 서한」을 동봉하여 홍콩에 있는 파리외방 전교회의 대표부로 발송하였다. 1847년 초에 이 보고서를 받은 홍콩 대표부는 당시 그곳에 머물러 있던 최양업(崔良業,토마스,1821〜1861)부제와 메스트르(Joseph Ambroise Maistre, 1808〜1857)신부로 하여금 프랑스 자료를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번역을 끝낸 보고서는 파리외방 전 교회 총본부로 보냈으며,그 보고서는 다시 교황청으로 발송이 되 었다.10 교황청에 발송된 그 보고서는 1839.1846년 박해 때 순교한 이들의 시복에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계속해서 광희문 밖 순교자들에 관한 사료는 1857년 3월 25일 에 주교로 서품을 받은 다블뤼(Marie Antoine Nicolas Davelu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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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기해, 병오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j의 정확한 라틴어 명칭은 다음과 같다. ActaMartyrum qui, saeviente persecutione annis 1839, 1840 et 1846, in Coreae Regno, pro Christi fide morti occubuerunt, a Carolo Hien et Thomas Y collecta, et a Thoma Tchoey diacono, ex versione gallica Reverendissimi Episcopi Bellinensis traductaj
10 차기진,「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선교활동의 배경」, 교회사연구』제14집,한국교회사연구소,1999, 50-51 쪽 1839년 .1846년 박해 때 순교한 82명의 행적 중에서 1839년 박해 때 순교한 73명의 행적은 최양업 부제가 번역했다 또한 1846년 박해 때 순교한 9명의 순교자에 대한 행적은 메스트르(Maistre, 李) 신부가 라틴어로 번역하였고,최양업이 보고서 뒤에 번역 후기를 기록해 놓았다 이 라틴어본 보고 서는 파리외방전교회 총본부의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냈고,르그레즈와 신부는 이틀 정리하여 로마 교왕청에 발송하여,예부성성은 이 보서를 접수하였다. 기해, 병오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 라틴어 본은 1839년 .1846년 순교자들의 시복 절 차 진행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그 결과 교황은 1857년에 1839년 순교자 73명과 광희문 관련 순교자 4명을 포함한 1846년 순교자 9명을 합해서 전체 82명의 조선 순교자를 가경자(可敬者,Venerabilis)로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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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1866)가 1858〜1859년 사이에 작성한 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ee』에도 있다. 이 시기에 다블뤼는 조선 순교자들 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면서 1846년 박해 때 순교한 이들의 행적에 대해서는「1846년」이라는 항목으로 따로 만들어 놓았다. 그는 이 항목 속에 1846년 박해의 진행 과정과 김대건 신부를 중심으로 광희문 밖 순교자들에 관한 내용을 기술해 놓았다.11
이어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사제인 달레(Claude Charles Dallet, 1829-1878)는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했던 선교사들의 서한과 시복 자료를 바탕으로 1872년부터 조선의 천주교회사 편찬 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2년 후 1874년에 달레는 상,하 2권으로 된『Histoire de L'Eglise de Cor즌e』의 집필을 마친 후,이를 책으로 출판하였다. 그 책의 내용 속에도 1846년 박해에 대한 기록과 함께 광희문 밖 순교자들에 대한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파리외 방전교회 소속 사제인 로네 (Adrien Charles Launay, 1853〜1927) 는 1925년 7월 5일, 79명의 조선 순교자의 시복을 준비하면서 조선에서 순교한 프랑스 선교사들과 한국 순교자들의 전기 ^Martyre frangais et coreens, beatifies en 1925』를 발간했다. °] 책은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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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다블뤼,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유소연 역,내포교회사연구소,2014, 401-402 쪽 “포도대장 임성구에게 이 사건이 맡겨졌고,그가 투옥된 사람들을 다루었습니 다. 그러나 그는 많은 사람들올 체포하려고 애쓰지 않았고 다만 고발된 교우들과 연루된 교우들 몇 명만 체포하기를 원했습니다. 마침내 음력 윤5월 17일에 여섯 명이 함께 체포되었습니다 포교들이 찾고 있던 교우들이 거의 다 붙잡힌 것입니 다 그 교우들은 현1석문1 가롤로,김임이 데레사,독이라고 불린 정 철염 가타리나,이간난 아가타 우술임, 수산나,그리고 오 바르바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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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 순교 복자들을 유럽 교회에 소개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12 그 책의 내용에는 순교복자로 선정된 광희문 밖 순교자들의 행적이 서술되어 있다.
계속해서 광희문 밖 순교자에 대한 매우 중요한 또 하나의 사료는『기해,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이다. 이 재판록은 1839 <846 년 순교자들에 대한 교구의 시복재판 내용이 담겨 있는 기록물이다. 이 시복재판은 1883년 3월 18일에 시작하여,1887년 4월 2일까지 진행되었으며,42명의 조선인 증언자들이 시복재판에 출석하였다. 이들의 증언 내용을 바탕으로 시복재판록이 발간되었다. 재판 록을 통해 1846년 박해 때 옥사한 이들이 광희문 밖에 버려졌다는 사실이 구체적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재판록에는 광희문 밖에 버려진 순교자들의 시신에 대한 처리 과정도 있다. 특히 재판록에 담긴 증언 내용은 진술이 구체적이며 신빙성이 높았다. 그 이유는 증언자들 대부분이 1846년 광희문 밖 순교자들과 직, 간접으로 긴밀하 게 연결되어 있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시복재판 증언자 김 가타리나(5〜10회차)는 광희문 밖 순교자 김임이의 이복동생이고,이 이사벨라(11〜12회차)는 이간 난의 동생이었다. 시복재판 증언자 이 글라라(25~26회차)는 자신의 형부가 당시 포도청의 포교(捕校)였기 때문에 1846년 광희문 밖 순교자들의 옥 중 생활을 자세히 들었다. 시복재판 증언자 변 아나스 타시아(33~36회차)는 광희문 밖 순교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던 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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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한국가톨릭대사전j 제4권,한국교회사연구소,2000, 2150-2151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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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 아내인 김 테레사와 시누이, 올케 사이였다. 시복 재판 증언자 한 바울라(58~59회차)는 광희문 밖 순교자 이간난에게 교리를 가르쳐 주고 입교를 시킨 인물이었다. 시복 재판 증언자 김 프란치스코(73〜82회차)는 1839년 당시에 조선 천주교회 안에서 중요한 밀사 역할을 한 인물 로 현석문과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 이처럼 시복 재판증언자들은 광희문 밖 순교자들과 가까운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증언은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증명해주는 내용 들이었다.
다음으로 광희문 밖 순교지와 관련하여 근처에 형성된 공동묘지에 묻힌 순교자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기해,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을 보면 1846년에 새남터에서 순교한 현석문의 시신 이장과 관련하여 증언자 김 프란치스코의 진술을 주목해 볼 수 있다.
그 시체를 교우들이 찾아 往十里 끝에 장사 지낼 때 죄인도 가서 참례하였으나 지금 그 산소 자리를 알 수 없습니다.13
이내용을 통해 새남터 형장에서 순교한 현석문의 시신을 교우들이 찾아내서 왕십리에 묻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광희문 밖에 형성된 공동묘지는 현재 왕십리 지역까지 분포 되어 있었다. 그 래서 순교자 현석문은 광희문 밖 순교지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어서『박순집 증언록』에는 1867년 광희문 밖에 버려진 순교자의 이름으로 송백돌(베드로)에 대한 다음의 기록이 나온다.14
제 오일 만에 獄中致命하옵고,그 시체는 동사하던 갖바치 오륙 인이 收屍하여 수구문 밖 성밑에 장사하니,나이 사십이 세요,자녀 사남매는 다 교우와 婚配하였삽나이다.15
송백돌(베 드 로)에 대한 기사는 1866년 박해 때 순교한 이들의 자료를 수집해 놓은『치명일기』에도 나온다.
「송 베드로,백돌」남묘 앞에 살던 사람이요,신 짓는 장색(匠色)이더니,무진(1868)정월 초8일에 김 경장이 불림에 잡혀 右捕廳에서 문답(교리)을 외우며 칼머리를 장단쳐 노래하여 같이 갇힌 교우를 위로하더니, 잡힌 후 5일에 獄中致命하니, 나이가 40세러라.16
『박순집 증언록』에 보면 송백돌(1826〜 1868)은 천주교를 믿지 않던 부친과 천주교 신자인 모친 사이에서 서울 남묘 앞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송백돌은 박순집의 아내와 자매인 임씨 여자 (시흥방아곶지 태생)의 남편으로 박순집과 동서 관계로 네명의 자녀를 낳았다. 또한 송백돌 은 당시 신자들 사이에서는 ‘송치명’ 이라고 불렸다. ‘치명’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보면,평소에도 위주치명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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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박순집,김영수 역,「박순집 증언록j,성황석두루가서원,2001, 68〜69쪽
15 박순집,『박순집 증언록j(I),앞의 책,68〜69쪽
16 뮈텔,『치명일기j 24, 성황석두루가서원,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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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갖바치(가죽신을 만드는 일)물주로 생계를 유지하였는데,박해가 일어나자 1868년 1월 8일, 포졸들이 3일 동안 송치명의 얼굴을 익힌 다음 그를 체포하였고, 5일 후에 우 포도청에서 42세의 나이에 옥중치명 하였다. 그후 그의 시신은 동료들이 수습하여 광희문 밖 무덤에서 장례를 치렸다고 한다.
그런데『우포도청등록』의 1867년 2월 19일자 공초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송백들(宋百풍)나이 45세,덕교(德橋)에 거주한다. 세례를 받고 사악한 세례명[邪號]을 지었다.
위의 공초는 당시 체포된 후 물고(物故)된 사람의 명단에 이어서, 배교자에 관한 기록 속에 들어 있는 내용으로 그 속에 ‘송백들’ 이라는 이름이 있다 그래서 송백돌에 대해서는 순교와 배교 문제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이며,상세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계속해서『박순집 증언록』에는 박순집과 8촌으로 1870년에 순교한 박 바오로(1820~1870)에 대한 기록이 있다.17
포청으로 들어간 지 삼일 만에 유직이가 시체를 찾아가라 하니, 그 처남이 수시(收見)하여 왕십리 끝에 묻었다 하오니,이 말은 그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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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박순집,『박순집 증언록j(I), 앞의책,66〜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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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외인에게 들었삽나이다. 치명할 때에 나이 오십 세오다.18
박 바오로에 대한 기사는『치명일기』에도 나온다.
「박 바울로」전생서 태생이요,박 베드로 순집의 8촌이라 병인 10월에 잡혀 집에서 배교하고 있더니,경오(庾午,1870)2월 초8일에 다시 잡혀 3일 후 포청에서 치명하니,나이 50세러라.19
박 바오로에 대해 살펴보면,그는 전생서 태생으로 22세(1842년)에 김 아가타(애오개 태 생)와 혼인하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1866년 10월에 포교에게 처음 잡혔을 때에는 배 교를 하였다. 그 이후 배교를 뉘우친 박 바오로는 1870년 2월 8일 다시 체포되었고, 마침내 2월 11일 50세의 나이에 옥중 치명하였다.
이상으로 광희문 밖 순교지와 관련하여 옥사한후 광희문 밖에 버려진 이들과 근처 공동묘지 에 묻힌이들에 대해 살펴 보았고, 다음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 째, 1846년 박해와 관련하여 광희문 밖 순교자에 대해서는 관찬 기록뿐 아니라 교회기록 에 도 많지않다. 그리고 남아 있는 자료 중에도 광희문 밖 순교자들은 김대건이나 현석문과 관련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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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박순집,『박순집 증언록(I), 앞의 책,66〜67쪽.
19『치명일기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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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된 후 옥사한 인물로 평가되어 왔다. 그런데『기해 , 병오 순교 자 시복재판록』을 통해서 광희문 밖 순교자들에 대한 다양한 자료 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광희문 밖 순교자들에 대한 새로운 약전의 서술 작업이 제기된다.
둘째,광희문 밖 순교지와 근처 공동묘지에 묻힌 현석문과의 관계이다. 그러나 현재 이 지역이 처한 주변의 지형적인 상황에서 볼 때, 광희문 밖 공동묘지 구역 전체를 순교지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이 문제는 앞으로 구체적인 연구 작업을 통해서 입장정리가 필요한 부분이다.
셋째,오늘날에 광희문 밖 순교자로 언급되는 인물들 중에 송백 돌의 경우는 교회 측 사료와 관찬 사료에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 이 부분 또한 계속되는 연구를 통해 밝힐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본다.
3. 감옥생활과 순교 방식에 대한 천주교 신자들의 인식
광희문 밖에 버려진 시신은 앞서 언급했듯이,옥사자와 관련이 있다. 20 그래서 이 장에서는 박해시기에 체포된 후 옥에 갇혀 죽음을 기다렸던 천주교 신자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살피고자 한다 우선 박해시기 천주교 신자들이 겪은 감옥생활에 대해서는 당시 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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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펠릭스 클레르 리델,유소연 역,다의 서울 감옥생활 1878-프랑스 선교사 리델의 19세기 조선 체험기,살림,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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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었던 페레올(Ferr은ol,1808~1853)의 서한 속에 기록되어 있다.
A-1. 감옥소는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안에 줄지어 선 여러 판잣집이 있다. 집을 드나드는 매우 작은 문은 있지만,창문은 전혀 없어서 햇빛이 거의 들어오지 못한다. 겨울에는 추위로,여름에는 더 위로 견딜 수가 없다. 바닥에는 거친 짚으로 엮은 멍석이 깔려 있다.
(좁은)감방 안에 갇힌 신자들이 하도 많아서 다리를 뻗을 수조차 없 다.21
A-2. 끔찍스러운 감방에서 당한 고통은 위에 언급된 고문보다 훨씬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고 신자들 모두가 증언했다. 왜냐 하면 매맞는 상처에서 홀러나온 피와 고름에 젖은 멍석이 이내 썩어서 사방에 퍼진 악취로 도저히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22
A-3. 그러나 신자들을 가장 가혹하게 괴롭힌 것은 굶주림이다. 다른 고문을 견뎌냈던 몇몇 사람들도 배고픔 앞에서는 견디기 어려웠다. 갇힌 신자들은 주먹만 한 분량의(삶은)좁쌀을 하루에 두 번밖에 받지 못했기 때문에,(배가 너무 고파서)깔고 누워 있던 썩은 멍석을 뜯어 먹기까지 할 지경이었다. 감옥 안에 이,벼룩,빈대가 어찌나 많았는지, 갇힌 신자들이 그것을 한 움큼씩 쥐어 잡을 정도였다.(그뿐 아니라)그들은(시장기를 달래려고)죽은 그것을 끔찍하게도 먹기까지 했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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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839년(기해)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73위》J, 페레올 주교 서한J,수원교회사연구소,2012, 681쪽
22 주21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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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1 의 내용은 조선시대에 감옥의 외형과 구조뿐 아니라,신자들이 감옥에서 겪은 고통스러운 상황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특히 이 사료에서 주목할 부분은 여름과 겨울이 되면 기온 변화로 인해 감옥생활의 고통은 가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감옥 안에서 거친 짚으로 엮어 놓은 바닥과 협소한 감방의 구조는 옥살이를 하는 이에게 심각한 불편함을 주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A-2의 내용은 체포된 천주교 신자들이 옥살이를 하면서 박해 당국자들로부터 심한 고문을 받았던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또한 신자들은 고문으로 인한 육체적 상처 등을 안고,감옥생활을 하였 던 것이다. 그리고 계속되는 옥살이와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대부 분의 천주교 신자들은 극심한 육체적 고통을 겪었음을 알 수 있다.
A-3의 내용은 감옥생활을 하는 신자들은 신체적 아픔뿐 아니라,굶주림에서 오는 인간적인 고통까지 겪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특히 배가 고픈 신자들 중에는 허기짐을 벗어나기 위해 썩은 멍석뿐 아니라 이와 벼룩 그리고 빈대까지 잡아먹었을 정도로 감옥생 활에서 극한의 고통을 연속적으로 겪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이처럼 페레올의 서한에 담긴 천주교 신자들의 옥살이 내용은 실제로 감옥 안에서 겪은 생활을 구체적으로 전해 주고 있다. 특히 옥살이는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정신적인 갈등과 불안, 공포를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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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앞의 책,約1~6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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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 겪었음을 알 수 있으며,옥사에 대한 두려움도 그중에 하나였 다 당시 신자들이 가진 옥사에 대한 공포는 박해시기 천주교 신자 들이 인식한 순교 방식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에 대한 내용은 다음 과 같다.
B-1. 충청도 내포 우편에 살던 원시장 베드로는 신해년(1791) 박해를 만나,겨울에 옥에 갇히었다가 얼어 죽어 초상이 났으니,본당 주교 들으시고 ‘그렇게 죽은 것이 비록 新首 당한 전라도 珍미의 윤지충과 권상연보다는 못하나 이 또한 순교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라 그는 이미 초臺前에 있어 복을 누릴 것이라’ 하셨나니라 이는 다름이 아니고 원시장 베드로가 비록 칼이나 곤장 같은 연장에 의해서 죽은것은 아니지만,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죽은 것이라고 판단하여 하신 말 씀이니, 나도 이 옥중에 있다가 마침내 능히 위주치사하면 또한 치명 칭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니 이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24
B-2. 그뿐 아니라 갇힌지 몇 달 혹은 몇 해 후에 옥에서 죽는 사람 들도 비록 그들의 목이 칼을 맞아 떨어지지 않았더라도 결단코 지옥에 가지 않을 것이니 이는 ‘비록 칼을 받아 죽지 않더라도 천주를 두려워하고 공경해 옥중에서 자기 생명을 잃은 사람은 환도 밑에서 치명해 넘어지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영원한 복을 얻을 것이다.’라고 성 치프리아노가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망하거나 천주를 배반하지 않도록 다들 조심합시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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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김영수 역,자책,흐름,2016, 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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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3. 과거에 체포되어 감옥에서 오랫동안 순교와 다름없는 고통을 당하다가 생을 마감한 신자가 몇 명 있었고,그 후에 그들이 있던 자리에 여러 명의 신자들이 들어가,투옥된 신자들과 이미 옥사한 이들의 수가 증가하였습니다.26
B-4. 그들 사이에 전염병이 돌아 여러 명이 죽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고결한 용사들은 그토록 비참한 상황 속에서 오로지 한 가지만 걱정했는데,망나니의 칼에 목이 잘리는(날이 오기)전에(감옥에서)병사하는 것을 걱정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날까지 살아남으려고 약을 복용했다.27
B-1 의 내용은 1801년 박해 때 체포되어 흥해(지금의 포항)로 유배를 간 천주교인,28 이 자신의 배교를 뉘우치며 쓴 글이다. 이 글에서 저자는 1792년에 옥사한 원시장(베드로,1732〜1793)과 1791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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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아드리앙 로네. 폴 데통베, 안응렬 역,「한국 순교자 103위 성인전j(상),가톨릭출 판사,2013, 179쪽
26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신부들과 사천,통킹,코친차이나 대목구에 보낸 서한」,앵베르 주교 서한j,수원교회사연구소,2011,255쪽
27「1839년(기해)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73위)」『페레을 주교 서한j, 앞의 책,683쪽 28.자책』앞의 책,해제.『사학징의(邪學懲義)』에 따르면 신유박해 당시 배교하고 홍해로 귀양을 간사람은 서울의 최해두와 전주의 박판남 두사람이다 그런데 양반이면서 지도급 인사였던 최해두와 달리 박판남은 유항검의 비부(牌夫)였다. 따 라서 천주교 교리에 깊은 지식이 있고,오늘날 준주성범(違主聖範》j으로 번역된 경세금서(輕世金書)』를 읽을 정도의 지식인이라면『자책』의 저자는 최해두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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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수된 윤지충과 권상연의 순교 방식을 비교하고 있다. 여기서 저자는 ‘참수형’을 받은 순교자의 순교 방식을 우위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다음 옥사자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들도 역시 ‘위주치 명僞초致命)을 했다면 순교자의 칭호를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B-2의 내용은 1839년 박해 때 당시 조선에 선교활동을 하던 모방(Pierre Philibert Maubant, 1803〜1839) 신부가 체포되기 직전, 자신들이 전교한 교우들에게 쓴 편지의 일부 내용이다. 그 편지에서 모방 신부는 박해 중에도 신자들이 신앙을 굳게 지켜내기를 당부하고 있다. 또한 편지의 내용 속에서 모방 신부는 성 치프리아노의 말을 인용하면서 순교 방식에 대해 언급하였다. 즉,모방 신부는 신자들에게 ‘체포된 후 옥중에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킬 것을 권고 하면서,옥사를 하는 신자인 경우에도 ‘참수를 당한 이들과 마찬가 지로 영원한 복을 받을 것’임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편지 내용을 통해 당시 신자들 사이에서는 체포되어 옥살이를 할 경우 ‘옥사’에 대 한 고민을 하고 있었고, 심지어 ‘옥사자’도 순교의 영광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갖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B-즈의 내용은 조선 제2대 교구장 앵베르-(Laurent-Joseph- Marius Imbert, 1797-1839) 주교가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의 지도 신부들과 사천,통킹, 코친차이나 대목구에 보낸 서한이다. 이 서한 에서 앵베르 주교는 ‘옥사자’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들도 ‘순교와 다름없는 고통을 당하다가, 생을 마감한 것’으로 인식하였다. 특히 앵 베르 주교는 당시에 옥사자의 숫자가 점차 증가하고 있다고 언급해 놓았다 그런데 이 서한에서 주목할 부분은 앵베르 주교가 옥사자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순교자’라고 규정하기보다는,“순교와 다름 없는 고통”이라고 표현한 사실이다. 이처럼 앵베르 주교가 보여 준 순교 방식에 대한 인식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그 시기에 ‘옥사’ 와 ‘참수형’이 비록 순교의 같은 효력을 지니고 있다고 말은 하지만, 그 가치에 있어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는 것을 더 우위시 하고 있 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B-4의 내용은 페레올 주교가 조선 순교자에 관한 행적을 수집 해 놓은 기록인「1839년(기해)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73위)」의 한 부분이다. 여기서 페레올 주교는 당시 옥에 갇힌 천주교 신자들 중 에는 ‘참수형에 대한 갈망’을 간직하고 있었으며,그로 인해서 옥에 갇혀 있는 이들은 자신들이 옥사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갖고 있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페레올 주교는 옥살이하는 신자들 중에는 끝까지 살아남아 참수형 받기를 희망하였고,오직 그 희망을 위해서 약을 복용한 사실까지도 기록해 놓았다.
지금까지 옥사한 후 광희문 밖에 버려진 이들의 모습을 주목해 보고자,박해시기 천주교 신자들이 선호했던 순교 방식을 주목해 보았다 그 결과 다음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박해시기에 천주교 신자들은 체포될 경우,박해 당국자 앞에서 신앙을 증거한 후 참수형을 받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최 고의 신앙 행위로 이해했다 그래서 체포된 천주교 신자들 중에는 참수형으로 순교할 원의를 가지고 옥살이를 했음을 알 수 있다.
둘째,박해시기 동안 천주교 신자들은 순교 방식 중에 참수형을 선호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서 감옥생활 중에 옥사하는 것에 대 한 두려움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체포된 천주교 신자들은 감옥생활에서 오는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옥사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정신적인 불안과 두려움을 가지고 생활하였음을 살펴볼 수 있 었다
이를 통해, 박해시기 천주교 신자들은 체포될 경우,박해 당국 자 앞에서 천주교 신앙을 증거한 후, 참수형을 받고 죽음을 맞이하 는 것을 참된 신앙인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 다 그래서 천주교 신자들은 순교 방식에 대해 ‘옥사’보다는 ‘참수’를 더 열망하였다2 9 이러한 사실은 결국 옥사한 후 광희문 밖에 버려 진 순교자의 죽음은 당시 신자들 사이에서 가장 두려워했던 죽음 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광희문 밖 순교자들은 박해시기 동안 가장 비참하고,처절한 죽음을 맞이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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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서종태,「남한산성의 형장과 천주교 신자들의 죽음」,『교회사학j 창간호,수원교회 사연구소,2004, 289~293쪽 참조. “박해기 신자들이 옥에서나 귀양살이 가는 도 중에 죽는 신자들의 이야기보다 참수형을 받아 죽은 신자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하였다는 말은 그들이 감옥에서 교수형이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죽는 것과 관장 에게 신문을 받다가 매 맞아 죽는 것보다 참수형을 받아 죽는 것을 더 영광스러 운 순교로 인식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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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광희문 밖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
이 장에서는 광희문 밖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을 통해 그들의 순교 자 영성을 밝히고자 한다. 순교자 영성은 ‘박해라는 매개체 앞에서 죽음의 결과를 예상하면서도 자신이 믿는 신앙의 가치에 따라 하느 님의 사랑을 증거한 순교자의 삶과 신앙을 영성적으로 밝히는 것’ 을 의미한다3 0 또한 순교자 영성은 벗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 을 내어놓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본받으며 살았던 순교자의 삶 과 신앙을 향주삼덕의 틀 안에서 밝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개 념 이해를 토대로 1846년 박해 때 순교한 광희문 밖 순교자들의 삶 과 신앙을 향주삼덕의 틀 안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믿음의 삶
1846년 박해와 광희문 밖 순교자의 순교자 영성을 밝히기 위해,천 주교 입교 배경과 신앙 활동 그리고 천주교 서적의 영향을 살펴보 고자 한다 우선 광희문 밖 순교자들의 천주교 입교 배경을 보면, 김임이는 태중 교우였다 이간난의 경우는 결혼한 뒤 과부가 되어 친정으로 돌아온 후,외할머니의 죽음과 유언을 통해 천주교를 알 게 되었다 그 후 이간난은 천주교 신앙에 대한 관심과 신자인 어머 니의 도움으로 주변에 살던 신자 집을 찾아가 교리를 배운 후,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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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강석진,「제물진두 순교자 행적과 순교 영성j, 누리와 말씀j 35, 인천가톨릭대학교,2014, 128〜129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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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余恒德,파치피코,1795〜1854) 신부에게 영세를 받았다 우술임 은 인천에 사는 천주교 신자 집안으로 시집갔으며,거기서 교리를 배워 신앙을 갖게 되었다. 정철염은 18세의 나이에 어머니로부터 천주교를 알게 되어 입교하였다 이처럼 광희문 밖 순교자들은 각 자 다른 방법과 계기로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하지만,그들은 천주 교 입교 직후부터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충실한 신앙인의 삶을 살 았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광희문 밖 순교자 들의 신앙 활동을 살펴보고자 한다. 당시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생활 지침은 ‘첨례’31 를 통해 알 수 있다. 이말의 뜻은 교회의 중요한 사건이나 인물들을 기념하는 축 일을 가리킨다. 그래서 신자들은 첨례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일상 안에서 첨례의 규칙을 생활화하고자 ‘첨례표’를 만들어 서 사용하였다 즉,신자들은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서 주일과 첨례 를 지키고자 1년 주기로 주일과 첨례 날짜를 기록한 첨례표를 제 작했고,생활 속에서 이를 실천하고자 했다 그리고 첨례표 안에는 주일이나 축일뿐만 아니라 신자들로서 지켜야 할 여러 가지 신앙지침이 기록되어 있었다. 특히 그 안에는 소재(小齋)와 대재(大 齋)를 지키는 날짜 등도 표시하므로,32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이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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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승정원일기 1791년 11월 12일 기사 참조. 기록상으로 볼 때,첨례표와 관련해서 가장 빠른 것은 1791년 권일신의 집에서 나온 신해첨례(辛友隨禮)j라는 책이다. 이것은 신해박해 당시 형리(刑吏)들이 양근의 권일신 집에서 압수한 것으로,이를 통해 조선의 신자들은 1791년 이전부터 첨례표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2 정진석,「금식재」,한국가톨릭대사전 2, 한국교회사연구소,1995, 1073쪽 소재 와 대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생각하며 온전히 자신을 그리스도께 봉헌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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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주었다.33
이처럼 신앙 지침을 통한 신앙생활 실천은 광희문 밖 순교자들 의 모습에서도 드러난다 김임이는 어릴 때부터 첨례표에 따라 교 회의 가르침을 지킬 정도로 신심이 깊었다 그녀는 신앙 안에서 부 모에게 효성을 다했고,주님을 언제나 마음속에 모시고자 노력하 였다. 그녀는 애주애인의 정신으로 철저한 신앙인의 삶을 살았기에 동료 신자들은 그녀에 대해서 ‘덕행이 거룩하고,표양이 아름답고, 착한 사람이며,교회의 가르침을 열심히 실천하는 신앙인’이라고 평 가하였다
이간난은 천주교 신앙에 입교한 후에 곧 자신의 동생뿐 아니라 친정 식구들에게 천주교 신앙을 전파했고,시댁 식구들에게도 천 주교 신앙을 권유하여 입교시켰다. 그녀는 평소에도 희생과 극기의 생활을 하였고,첨례표에 기록된 금식과 금육의 재(齋)를 지켰으며, 교회의 가르침을 충실히 실천하고자 노력하였다 특히 그녀는 주일 이나 축일이 되면 동료 신자들의 집을 찾아가서 그 교우와 함께 첨 례를 지내기도 하였다
우술임은 천주교에 입교한 후 충실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 였다 그녀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첨례표에 기록된 금육과 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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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위한 행위이다. 이것은 하느님에 대한 순종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데,이에 금식하여 절약한 음식으로 가난한 이웃들을 돕는 의미도 있 다 아울러 금식재(禁食齋)는 속죄와 정화,수행과 극기를 위한 적절한 방편이라고 도한다
33 방상근, 첨례표’를 통해 본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생활」,『교회사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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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를 지켰으며,부지런히 묵상하면서 자신의 죄를 진실로 통회하는 마음을 간직하며 살았다. 정 철염의 경우 어린시절, 양반집 주인의 모진 박해를 받을 때 마다 신앙으로 견디어 냈다. 그후 그녀는 서울로 도망쳐 올라왔을 때 에도 신앙생활 열심히 하였고, 과거 집주인의 박해로 인한 후유증에 온몸을 자유롭게 쓸수 없을 지경에 이르렸지만 첨례표에 따라 교회의 가르침을 독실하게 지키며 살았다.
이를통해서 광희문 밖 순교자들은 천주교 신앙에 입교한 후 부터 성실한 마음으로 신앙생활 에 임했다. 이들은 교회의 가르침이 기록되어있는 첨례표를 따라 대소재 뿐 아니라, 신자들이 지 켜야 할 신앙 지침을 충실히 지켰고, 그것을 철저히 실천하고자 노력 했음을 알수 있다.
다음으로 광희문 밖 순교자들의 신앙생활 중에 천주교 서적,다시 말해서 한글서학서에 대한 관심을 주목해보고자 한다. 1846년을 전 후로하여 당시 부녀자들과 평민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익히는데 기본적인 도움을 준것은 한글 교리서로 『주교요지』를34 비롯하여『성경직해광익(聖經直解廣益)』35 등이 있었다. 또한 한글 서학서는 독자층의 변동을 가져왔으며,36 아녀자들뿐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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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조광,『초선후기 서학서의 수용과 보급」, 민족문화연구j 제44호,고려대학교민족 문화연구소, 2006, 206-207쪽. 18세기 후반부터 천주교가 전파되는 과정 속에서 한글 서학서 가운데 대표적 책자로는 당시 천주교 신앙 실천에 있어서 중심이 되는 미사 때에 읽혀지는 4복음서를 최창현이 번역한「성경직해(聖經直解사와 한글로 된 천주교 교리서인 주교요지를 직접 저술하여 보급하기도 하였다.
35 조한건,「성경직해광익 연구,서강대학교 박사학위논문,2011.
36 조광,「조선후기 서학서의 수용과 보급」,앞의 글,217쪽. 1801년 박해 당시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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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들에게까지도 천주교가 전파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37 그리고 한글 서학서의 기능은 천주교 신자들에게 신심과 기도생활, 교리 등을 알게 해 주었다. 그리하여 한글 서학서는 신자들에게 천주교 신앙을 강화시켜 나가는 데 도움을 주었고, 동시에 하느님의 사랑을 증언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38
이러한 내용을 토대로 광희문 밖 순교자들의 경우를 살펴보면, 그들이 구체적으로 읽은 한글 서학서나, 특히 교리에 대한 이해 수준 등은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아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자신의 신앙생활을 강화하기 위해 한글 서학서를 탐독했던 인물로 김임이와 이간난이 있다. 김임이의 경우는 평소에도 한글 서학서를 읽고, 신앙의 발판을 삼음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강화시켜 나갔다 이간난 의 경우 처음에는 천주교 신앙에 대해서 호기심으로 접근한 후 입교한 다음 자신의 믿음을 강화하고자 한글 서학서를 부지런히 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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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압수하여 소각한 천주교 서적은 모두 120종 117권 199책에 이르렀다. 그 리고 이 가운데 한글로 쓰여진 책은 83종 11권 128책이었고,한문본은 37종 66권 기L책이었다. 1801년 탄압이 끝난 다음에는 한글 서학서 등의 간행에 관한 문제가 거의 나타나 있지 않다. 이 상황은 1836년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입 국한 직후에도 계속되고 있었다. 또한 선교사들이 1839년에 체포되어 사형을 당 한 후에도 책자의 인쇄 문제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논의가 없었다 이후 1846년 김 대건의 체포로 인한 탄압사건이 있었다. 아마도 이 시기 서학서의 생산은 전통적인 둥서(勝書)를 통해서 진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7 조광,「조선후기 서학서의 수용과 보급」,앞의 글,204쪽
38조한건,「병인사옥과 신자들의 대응」,『병인사옥, 병인양요, 병인박해』(병인순교 15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천주교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미간행 논문 집, 2016,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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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이처럼 광희문 밖 순교자들이 보여준 한글 서학서에 대한 관심은 그들이 천주교 교리를 습득하도록 이끌어 주었고,신앙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데 중요한 도구였다. 그러므로 광희문 밖 순교자들이 보여 준 한글 서학서에 대한 관심은 자신들의 신앙을 강화시켜 나가는 데 큰 힘이 되었고, 이는 그들이 순교의 길을 걷는 데 원동력이 되었다.
이상으로 광희문 밖 순교자들의 순교자 영성을 파악함에 있어서 천주교 입교 배경, 신앙 활동 내용, 한글 서학서의 영향 등을 살 펴보았다. 그리하여 다음의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광희문 밖 순교자들은 각자 다른 방법과 계기로 천주교에 입교하였으며, 그들은 입교 직후부터 충실한 신앙인의 삶을 살았다.
둘째,광희문 밖 순교자들의 신앙 활동은 기본적으로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첨례표에 나와 있는 신앙 지침 등을 철저히 지키고자 노력했다.
셋째,광희문 밖 순교자들은 신앙 강화를 위하여 한글 서학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천주교 교리를 올바로 습 득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2) 희망의 삶
광희문 밖 순교자들은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그들이 신앙을 통해 궁극적으로 간직했던 그 마음을 살펴보고자 한다. 박해시기 동안 많은 천주교 신자들은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신앙생활을 충 실히 하였다. 또한 그들은 신앙생활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있 었으며, 이를 삶을통해서 드러내며 살았다. 특히 이삶은 여성 신자들인 경우 동정과 수절의 삶 을 통해 나타났다.
조선에 천주교가 전래된 이후 신앙공동체가 형성되고, 신앙 실천의 훈련을 통해서 개인적으로 순결에 대한 지향을 가지는 이들이 생겨났다. 이당시 천주교가 가르친 정절의 의미에 대해서는 초기 교회 이래 널리 읽혀지고 있었던『천주실의(天主實義)』와『칠극(七完)』을 통해서 제시되었다.39 또한 완벽한 순결을 갈망하는 여성 신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책으로는『성년광익(聖年廣益)』,『성경직해 광익』등이 있었다.40 그 밖에도『성교요리문답(聖敎要理問答)』,『성교절요(聖敎切要)』,『아가타 성녀전기』등도 순결의 삶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영향을 끼쳤음을 확인할 수 있다.41
이러한 내용을 통해서 당시 신자들은 교회의 가르침이 순결, 정절을 강조하였고, 이를 고귀한 행위로 규정하고 있음을 알수있었다. 또한 신자들 사이에서는 정절이 아름다운 만큼 그 궁극적 표현인 동정(童貞)을 더욱 아름다운것으로 인식했다. 그래서 신자들 사이에서 동정 이란 결혼 적령기의 신자가 남성이나 여성을 불문하고 자신의 전체를 천주께 봉헌하여 독신 생활을 유지 하는 삶의 형식으로 수용하였다. 이러한 동정의 삶은 자신의 욕망과 욕심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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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판토하,七究,353쪽
40 조화선,「 성경직해j의 연구노 한국교회사논총,한국교회사연구소,1982, 256쪽
41 하태진,「초선 후기 이순이의 동정관 형성 과정」, 전북사학j 제37호,전북사학회,2010, 211〜2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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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를 뜻하며, 이 포기의 정신은 곧 천주를 위한 목숨의 포기 와도 연결될 수 있는 결단으로 받아들였다.42 그래서 천주교가 조선 사회에 전파되는 동안 많은 여성 신자들 중에서 동정생활을 하려는 이들이 생겨났고, 실제로 동정을 결심한 이들의 여성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결혼한 후 과부가 된 경우에 재혼보다는 수 절생활을 결심한 이들도 있었던 것이다.
이상으로 동정과 수절(守節)의 삶은 광희문 밖 순교자들에게서 살펴볼 수 있다. 김임이는 평소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며 자신을 봉헌한 성인, 성녀들의 삶을 본받고자 했으며, 자신도 성인들의 삶을 통해 하늘나라를 향한 희망의 마음을 간직하며 살았다. 이는 그녀가 17세의 나이가 되자 하느님을 섬기고 자신의 영혼을 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의 순결을 봉헌하고자 동정의 삶을 결심한 것에 서도 알 수 있다. 특히, 동정생활을 결심한 그녀는 가족들과 친지들 로부터 시집가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궁궐의 나인(內人)행세를 하였고, 실제로 궁궐에 들어가 3년 동안 삯바느질하면서 생활하였다.
과부였던 이간난과 우술임도 하늘나라를 위하여 수절의 삶을 결심하였다. 이간난의 경우 주변 사람들이 재혼을 권했지만, 그녀는 혼인 자체를 마다하였고, 오히려 신앙생활에 더욱 충실히 하였다. 이러한 이간난의 모습을 보고 동료 신자들은 ‘얼음처럼 맑고 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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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달레,『한국천주교회사j 중권,95쪽; 김정경,『초선후기 천주교 여신도들의 삶과 죽 음j, 여성이론j 제27호,도서출판여이연,2012, 212〜2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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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럼 깨끗한 사람’이라고 말하였다. 또한 이간난과 우술임은 수절의 삶을 지켜내기 위하여, 이간난의 집에 함께 살면서 공동생활을 하였으며 서로 도와주면서, 신앙을 철저히 지켜 나갔다.
이처럼 광희문 순교자들이 결심한 동정과 수절의 삶은 교회가 르침에 대한 철저한 실천이면서 동시에 하느님 나라를 위해 자신의 삶을 온전히 봉헌하는 새로운 삶의 실천이었다. 그리고 이 삶은 하늘나라를 위한 확고한 희망 안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광 희문 관련 순교자들은 동정과 수절의 삶을 통해 향주삼덕 안에서 드러나는 희망의 삶을 살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어서 광희문 밖 순교자들은 천주교 신앙 때문에 이미 크고 작은 박해를 직접 경험했다. 이간난의 경우 천주교 신앙 때문에 집 에서 쫓겨나 친정집으로 돌아가는 수모를 겪었지만, 그녀는 끝까지 자신의 신앙생활을 포기하지 않았다. 우술임의 경우 1828년에 일어난 지역의 박해로 관장에게 끌려갔다 그리고 임신 중인 그녀는 옥에서도 동료 교우들을 고발하라는 고문까지 받았다. 그 후 배교하지 않은 상태에서 옥에서 풀려나오자, 박해 때 순교의 기회를 놓친 것을 끊임없이 후회하며 살았다.
정철염의 경우 주인집 양반은 비신자였고,그녀에게 지속적으로 고통을 주었다. 특히 주인은 교회에서 금지하는 행위를 시키고 배교를 강요하였으며, 심지어 그녀를 자신의 첩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러나 정철염은 이에 굴복하지 않았고, 주인은 그녀에게 무수한 매질을 가했으며 심지어 몸을 불로 지지는 고문까지 하였다. 어느 때인가는 너무 심한 주인의 고문으로 그녀가 죽은 줄 알고 사람들이 집 밖으로 내다 버리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정철염은 하느님에 대한 신앙으로 그 모든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다.
이처럼 광희문 밖 순교자들은 가족 안에서 박해를 경험했고, 지역적 박해를 체험했으며,개인적으로도 모진 고통을 받았던 이들이었다. 그 후 이들은 1846년 박해 때 체포되어 옥중생활을 했고, 옥중에서도 고문과 매질을 당하면서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이를 통해 하늘나라에 대한 열망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 모든 고통을 극복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평소 삶 안에서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기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그들은 하느님에 대한 신앙 안에서 하늘나라에 대한 영원한 삶의 희망을 가지고 있었기에 자신의 신앙을 끝까지 지킬 수 있 었던 것이다.
계속해서 광희문 밖 순교자들이 평소 하느님 나라를 분명하게 고백하고,인식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준 것이 있었다. 그것은 조선에 천주교가 전파되던 때부터 신자들 사이에서 널리 유포된 성인들의 전기나 순교자들의 옥중 서한이었다. 이것들은 박해가 진행되는 동안 줄곧 천주교 신자들 안에서 순교에 대한 열망을 강화시켜 주었으며, 영원한 삶에 대한 확신을 갖도록 이끌어 주었다. 예를 들어 동정녀 심아기(바르바라 1783-1801)는 성인들의 생애에서 보았던 위대한 모범에 감동하여 결혼을 단념하고 하느님께 자신의 동정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43 문영인(文榮仁,비비안나,1776〜1801)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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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달레,『한국천주교회사j 상 한국교회사연구소,1987, 471-4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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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들의 전기를 읽고 그들을 본받으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그들을 따라 순교하려는 원의를 드러냈다.44
이러한 사례들은 당시 신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성인 공경의 마음에서 알 수 있다. 또한 이 당시에는 체포되어 옥에 갇힌 신자들 의 생활이 담긴 옥중 서한들도 널리 유포되었다. 그 대표적인 서한으로 윤지충이 쓴「죄인지충일기」와 이순이와 그 형제들이 쓴「옥중 서한」등이 있었다. 그리고 현석문을 중심으로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수집해 놓은『기해일기』등이 필사로 등사되어 신자들 사이에 전해졌다. 이러한 옥중 서한은 신자들로 하여금 박해 때 체포된 경우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는 데 큰 용기와 위로를 주는 계기가 되었다.
성인들의 전기나 옥중 서한 등은 광희문 밖 순교자들에게도 영 향을 주었다. 특히 김임이는 천주교 신앙을 통해 사주구령(事主救 靈)’,즉 ‘주님을 섬기며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며 착실하게 신앙생활을 실천하였다. 또한 그녀는 성인,성녀의 행적이 기록된 책을 읽었으며,성인들의 삶을 부러워하였고,성인들이 보여 준 삶의 모범을 마음속에 간직하며,그들의 삶을 본받고자 노력하였다. 이처럼 광희문 밖 순교자들은 평소 성인들의 전기와 옥중 서한을 통해서 하늘나라에 대한 확신과 순교에 대한 열망을 간직하며 희망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성인들의 전기와 옥중 서한이 주는 내용은 박해를 겪고 있는 신자들의 마음속에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을 간직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다.
이상으로 광희문 밖 순교자들의 순교자 영성을 파악함에 있어서 향주삼덕 중에 희망의 삶을 살펴보았다. 그리하여 다음의 결과 를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광희문 밖 순교자들은 하느님 나라를 위해 자신의 삶을 온전히 봉헌하는 마음으로 동정과 수절의 삶을 살았다.
둘째,광희문 밖 순교자들은 가족 안에서 경험했던 박해, 지역 안에서 경험했던 박해,그리고 개인적으로 자신의 주인에게 받은 박해를 경험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모든 박해 앞에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갈망과 신앙을 통해서 온전히 견디어 낼 수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셋째,광희문 밖 순교자들은 평소 성인들의 전기와 옥중 서한 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확신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망을 간직하며 살았다.
3) 사랑의 삶
믿음과 희망의 삶을 살았던 광희문 밖 순교자들이 이웃과는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박해시기 신자들은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일상 안에서 신자로서 모범적인 삶을 살고자 노력하였다. 그들은 교회의 가르침 중에서 모든 인간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하느님 앞에서 한 형제라는 사실을 중요하게 받아 들이며 살았다. 이러한 인식의 기초는 조선에 가장 널리 유포된 서학서로서『천주실의』에서 강조했던 내용에서 찾을 수 있다. 책의 내용 중에는 인간관계에 대해서 모든 사람은 “같은 아버지의 형제[同父之弟兄]”라고 규정했고,“만일 하느님이 만인의 아버지인 점에 비견된다면, 세상 사람들은 비록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차별은 있지만, 평등하게 모두 형제가 될 뿐이다”라고 하였다.45 『천주실의』에 담겨있는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는 한글 교리서인『주교 요지』에서도 똑같이 가르쳤다.46
이 가르침에 대해 광희문 밖 순교자들도 올바로 이해하고 받아들인 후 그 가르침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자 노력하였다. 김임이의 경우 동료 교우들 중에 초상(初喪)이 나면 그 집에 가서 죽은 이를 위해서 연도(諫騰)를 바치거나, 자기 손으로 친히 염습(強襲)까지 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평소 힘들고 궂은일이 있으면 솔선수범으로 맡았고, 희생과 봉사를 실천하였다. 특히 그녀는 동료 교우 중에 이문우가 순교하자, 그의 수양모(收養母)인 오(吳)바르바라를 돌보았다.
이간난과 우술임의 경우도 평소 공동생활을 하는 가운데 남을 도와주는 선행을 꾸준히 실천하였다. 우술임의 경우에는 신앙 안에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돌보는 데에 있어서는 자신의 것을 내어놓으며 헌신적인 봉사의 마음으로 살았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서 광희문 밖 순교자들은 당시 서학서의 가르침에 ‘하느님 안에서 모두가 다 한 형제’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고자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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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마테오 리치,「천주실의j, 429쪽
46 정약종,주교요지』,성황석두루가서원,198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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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이간난과 우술임의 관계에 대해 주목해 보면, 우선 시복재판의 증인인 김 프란치스코의 증언에서 살펴볼 수 있다. 김 프란치스코는 시복재판에서 ‘이간난은 우술임을 하인으로 삼아 함께 열심히 천주교 신앙을 지키는 것을 여러 번 가서 보았다’고 증언 하였다. 그런데 당시 이간난의 신분은 양인이며, 우술임의 경우는 양반이었다. 그런데 양반 계층인 우술임이 양인 계층인 이간난에게 ‘하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를 좀 더 자세히 확인하기 위해서는 우술임의 신앙 행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녀는 천주교 신앙에 대한 열의로 인해 동료 교우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을 만나는 누구에게나 만족을 주려고 애를 썼다. 또한 그녀는 평소에도 다른 이들의 시중을 들 수 있는 것을 기뻐하였고, 자신이 천하게 취급당하는 것 자체를 마치 대우받는 것처럼 받아들였으며, 남의 집에서 종살이하는 것을 만족해하였다. 양반 계층이었던 우술임은 천주교 신앙을 수용함으로써 자신의 양반 신분을 내려놓고, 자신을 낮추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광희문 밖 순교자들이 신분을 넘어 공동의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하느님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한 형제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들 안에서 드러난 사랑의 모습은 신분에 구애받음이 없이 서로에게 온전히 헌신하는 삶이었다.
계속해서 광희문 밖 순교자들은 김대건 신부 댁을 중심으로 교 희공동체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들은 김대건 신부가 사목활동을 하는 동안 직, 간접적인 도움을 주거나 헌신적인 배려를 했다 예를 들어 김대건이 사제서품을 받고 조선으로 들어오자 김임이는 김대건 신부 댁 안 복사 역할을 담당했고, 정철염은 하인으로 살았다. 특히 안 복사 일을 맡아 김대건 신부를 헌신적으로 돌보았던 김 임이에 대해 당시 동료 신자들은 ‘신앙인으로서 덕행이 초월한 사람’ 이라고 말했다. 그녀 역시 가까운 사람들에게 ‘박해로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면, 자신도 자수하여 김대건 신부를 따라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는 말을 하였다. 또한 하인으로 생활했던 정철염은 과거 주 인집에서 심한 박해를 받은 후유증으로 몸 상태가 정상적이지 않았지만, 하인의 생활을 묵묵히 실천했고,김대건 신부의 사목활동을 도와주었다.
이처럼 광희문 밖 순교자들 중에 김임이와 정철염은 김대건 신부의 안복사와 하인의 역할을 하면서 김대건 신부의 사목활동을 위해 헌신, 봉사의 삶을 살았다. 또한 김임이는 자신의 생명을 바칠 정도로 성직자에 대한 배려와 존경의 마음을 드러냈다. 이러한 신자들의 헌신적인 모습을 경험한 김대건 신부 역시 사제로 짧은 생을 살았지만, 신자들을 위해 최선의 사목활동을 하였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는 김대건 신부의 마음은 그가 쓴 서한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1846년 박해로 체포된 김대건은 감옥에서 쓴 편지 중에 광희문 밖 순교자들에 대해 “포교지를 위해 봉사하던 다섯 여 교우들”47 이라고 언급했다 이를 통해 김대건은 광희문 밖 순교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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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한국교회사연구소,「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서한j,한국교회사연구회,1996, 355쪽 “저는 마치 외국인처럼 체포되었습니다 서울에는 여러 신자들이 잡혀 있 었습니다. 곧 현(석문,玄親文) 가롤로도 포교지를 위해 봉사하던 다섯 여교우들 과 함께 체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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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회를 위해 봉사의 삶을 살았던 교우였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언급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으로 광희문 밖 순교자들에 대해서 이웃에 대한 사랑과 봉사의 모습 신분을 뛰어넘은 헌신, 교회공동체를 위한 배려와 삶의 모습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래서 다음의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광희문 밖 순교자들은 당시 서학서의 가르침인 ‘하느님 안에서 모두가 다 한 형제’라는 것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며 살았다. 그래서 그들은 평소에도 동료 신자들과 이웃들에게 헌신적인 사랑과 봉사를 실천하며 지냈다.
둘째,광희문 밖 순교자들 중에 양인 신분인 이간난과 양반 신분인 우술임은 신분이 다름에도 공동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함께 사는 동안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하느님 안에서 서로 한 형제로 살았다 이러한 모습은 신분에 구애받음이 없이 형제적 사랑으로 서로에게 헌신하는 삶을 가능하게 하였다.
셋째,광희문 밖 순교자들은 당시 김대건 신부를 중심으로 교회공동체 안에서 신앙생활을 이어 갔던 분들이다. 특히 그들은 김대건 신부가 사목활동을 할 때 그에게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주면 서 교회 성장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5. 광희문 밖과 천주교와의 관계
옥사한 천주교 신자들과 관련해서 박해시기 동안 광희문 밖 순교지에 대한 관심은 박해가 끝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866년 박해 때 광희문 밖에 버려진 천주교 신자들의 모습에 대해서는『병인치명사적』에도 묘사되어 있다.48 그리고 훙선대원군의 집권 전후에 대한 야사(野史)인『조선정감(朝鮮政鑑)』49 에도 천주교 신자들을 광희문 밖에 버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당초에 국법이 서교를 엄금하고 사학이라 지목하여, 신도를 잡으면 더러운 말로써 천주를 배반하는 맹세를 하도록 위협하여, 교를 배반 한 자는 문득 사(故)하였다. 이때에 와서 나라 안을 크게 수색하니 포승(捕織)에 묶인 자가 길에서 서로 바라보일 정도로 포청 옥이 만원(滿員)되어서 이루 재결(裁決)할 수도 없었다. 그 중에는 어리석은 백성, 어리석은 아낙,어린아이들, 철없는 자가 많았다. 포장이 민망하게 여겨서 교를 배반한다는 맹세를 하도록 타일렀으나,신도들을 듣지 않았다. 이에 형장(刑杖)으로 때려서 기어코 회개(梅改)시키고자 하니,피부(皮慮)가 낭자(浪籍)하게 터지고 피가 청위에까지 튀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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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병인치명사적』,19권 20쪽 20권 53~54쪽
491886년(고종23) 박제경(朴齊納)이 쓴 훙선대원군(興宣大院君) 집정 전후의 야사서(野史書)이다 혼히 조선정감j,또는『정감때라 약칭하기도 한다. 1만 7,500여 자에 이르는 한문체로서,헌종이 죽고 후왕을 결정하는 데에서부터 시작하여 개항 이전까지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원래 상, 하권으로 쓰여졌으나 하권은 출판되지 않았고,상권만이 1886년 일본 동경의 중앙당仲失堂)에서 발간되어 지금까지 전 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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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들이 문득 환호하기를, 혈화(교花)가 몸에서 나니 장차 천당(국堂)에 오르겠다 하였다. 포장도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드디어 옥 안에다 묶어 놓고 차례대로 목 졸라 죽였다. 죽일 때마다 능히 교를 배반하겠는가 물었는데 비록 어린아이들이라도 또한 그 부모를 따라서 천당에 오르기를 원하였다. 대원군이 듣고서 다 죽이도록 명하고 어린아이들만 사(敎)하였다. 시체를 수구문(水□門) 밖에다 버려서 산 같이 쌓이니 백성들이 벌벌 떨며 위령(威令)을 더욱 두려워하였다.50
그런데 이글들이 서술된 목적은 천주교 박해와 박해 책임자인 훙선대원군에 대해서 부정적인 모습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있어, 역사적 사실보다 과장된 부분이 많다. 그러나 글의 전체적인 내 용은 천주교 박해 진행과정과 신자들이 받은 고문, 옥중생활과 옥사자의 발생, 그리고 옥사 자들의 시신을 광희문 밖으로 버린 내용들은 당시에 일어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작성한 선교활동 보고서중 「1879년 보고서 」 에도 광희문 밖과 관련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1878년 2월,포장은 명령을 내려 교우 10명을 교살시켰다 형 집행은 감옥에서 비밀리에 시행되었고,그들의 시체는 관례대로 성문 밖에 내다 버려졌다 미리 소식을 들었던 서울 교우들은 급히 서둘러 그 소중한 시체들을 거두어다가,공경하는 베르뇌 주교와 1866년에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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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박제형,이익성 옮김,『朝鮮政鑑』(실학사상 독본 10), 한길사,1992, 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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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한 여러 다른 교우들이 안식하고 있는 산에 안치했다.51
「1879년 보고서」 에는 1877년에 체포된 후 교살로 옥사한 천주교 신자들의 시신을52 ‘ 관례대 로 성문 밖에 내다 버렸다’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관례대로 성문 밖에 내다 버린곳’은 광희문 밖 을 지칭한다. 그런 다음 보고서에는 광희문 밖에 버려진 순교자들의 시신을 신자들이 거두어 베르뇌를 비롯하여 동료 순교자들이 묻혀 있는곳에 안치 해 놓았다고 기록해 놓았다. 이내용은 추후 계속적인 연구작업을 통해 광희문 밖 순교자와 그들 시신의 이동 경로,그리고 순교자 들 의 시신을 공동으로 묻은 곳을 밝히는데 단서가 될 것이다.
이어서 선교사들의 「1881년 보고서」에도 광희문 밖과 관련하여 다음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C-1. 대원군이 후회하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여하튼 불교 승려의 중재로 1866년 이후 학살된 천주교 신자들의 영혼을 위해 불공을 올리게 했으니 말입니다. 이 세상을 강제로 떠나야 했던 가엾은 회한의 영혼들을 위로하기 위한다는 명목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천주교 신자들이 무죄했고, 비난받을 것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공식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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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한국교회사연구소,「1879년 보고서j, 서울교구연보j(I),한국교회사연구소,1984,12쪽
52 펠릭스 클레르 리델,유소연 옮김, 나의 서울 감옥생활 1878-프랑스 선교사 리델의 19세기 조선 체험기』,살림,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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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표명한 것입니다.53
위의 보고서 내용의 요지는 1866년 박해를 일으킨 훙선 대원군이 천주교를 박해 한 것에 대해 서 후회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원군은 박해로 인해 죽음을 맞이한 천주교 신자들의 영 혼을 위해 불교의 스님들에게 불공을 드리도록 지시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 박해로 인해 죽 음을 맞이한 천주교 신자들은 무죄하고, 비난 받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시기에 서술된 관찬 사료로『 포도청 등록 』 의 1881년 4월 24 기사에서는 앞선 보고서와 다른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다음의 기사 내용은 광희문 밖에서 불공을 드리는 행 위 때문에 스님들이 체포된 기록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C-2. 심문 내용
너희들은 광희문(光罪門) 밖에서 여러 날 음식을 마련하여 승려에게 공양하는 재(齋)를 지내고, 그 후에 또 시체를 묻어 주었다. 전하는 말을 듣자 하니 너희들이 실로 몇 해 전, 떼 지어 다니며 나쁜 짓을 한 사학(邪學)무리들에게 시식(施食)을 베풀어 주기까지 했다. …
학성(鶴聲)나이 28세 진술 … 일찍이, 저희 선산(先山)이 수구문(水디門)밖의 여러 무덤이 있는 곳에 있다고 듣긴 했으나 오래도록 살피고 돌보지 않았고 이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늘 속상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승려 진허(眞虛)가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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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앞의 책,「1881년 보고서」, 서울교구연보』(I),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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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말하기를, 수구문 밖에 죽은 자들이 널려 있는데 이들을 모두 모아 구덩이에 묻어 준 뒤 돌봐 줄 주인 없는 외로운 영혼을 위해 시식을 베풀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54
위의 이과 C - 2 의 내용은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사건에 대해 서로 다른 내용을 말하 있다. 스님들이 광희문 밖에서 불공을 드린 사건의 사실 관계에 대해서는 좀 더 많은 관련 자료를 수 집한 후 확인 작업을 해야 한다. 그러나 위의 사료를 통해서 드러난 분명한 사실은 천주교 박해 때 체포된 천주교 신자들과 그들이 옥사한 경우에 그들의 시신들이 광희문 밖으로 버려졌음은 확인할 수 있다.
광희문 밖 순교지에 대한 또한 다른 기사는 뮈텔(Gustave- Charles-Marie Mutel, 1854〜1933)이쓴 일기에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바로 식탁에서 사이로 남작이 황실 -지금의 왕실- 집안사람들이 그때는 모든 조선 사람들이 즐겨 먹는 미나리 크레송을 먹지 않는 이유를 알고 있는지를 내게 물어보게 했다. 나는 그 기이한 이야기는 모르며 그것도 까마득한 일이어서 잊어버렸다고 대답했다 … 1866년에 감옥에서조차도 교우들을 많이 처형해서 시체 더미들이 성벽 아래 시구문과 동대문 두 문 사이에 던져 버려져 있었다. 그런데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미나리 밭들이 있었다 거기서 시체 조각과 특히 두개 골들이 발견되어 옮겨졌다. 며칠 후 대원군이 그곳을 지나다가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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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포도청등록』1881년 4월 24일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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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보고 매우 충격을 받았고, 그때부터 그 야채는 다시는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55
뮈텔이 쓴 일기에 의하면,1924년 9월 4일 즈음에 일본의 교황 대사 마리오 자르디니(1877〜1947) 대주교가 조선을 방문했다. 그리고 교구장인 뮈텔은 교황 대사와 함께 조선 총독부에 가서 담화를 나누었는데,그내용을 일기에 적어 놓았다. 일기 내용은 일본 통역관 도바가 1866년 박 해 때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한 천주교신자들에 대해 언급 한것이다. 그이야기 중에 특히,옥사한 천주교 신자들은 시구문 즉 광희문 밖과 동대문 사이에 던져 버렸다는 사실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상으로 광희문 밖과 천주교와의 관계를 살펴보았고, 그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 째, 광희문 밖은 박해때 옥사한 천주교 신자들을 버린 곳이며, 박해 당시 뿐 아니 라 박해 가 끝난 다음에도 이곳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의 관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박해 이후 광희문 밖에 대한 관심은 박해 당국자의 잔인성과 순교로 인한 천주교 신자들의 처참한 모습이 묘사되는 공간으로 드러 났다.
둘 째, 박해 이후 프랑스 선교사들의 선교활동 보고서나 교구장이었던 뮈텔의 일기에도 광희문 밖에 대해서는 천주교 박해 상황을 직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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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뮈텔 주교 일기(1921〜1925), 한국교회사연구소,2008, 319〜320쪽 1924년 9 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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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장소로 언급되었다.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 광희문 밖 순교지는 박해시기를 전후로 하여 신자들뿐 아니라 일반 사람들에게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장소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6. 마치며
본고는 천주교 박해와 관련하여 광희문 밖 순교지를 중심으로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을 밝히고자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다음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광희문 밖 순교자와 관련하여 구체적인 사료들을 살펴보았다. 그결과 박해 시기와 관련 하 여 광희문 밖 순교자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들은 많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박해 이후,기해, 병오박해 때 순교한 이들의 시복재판 기록에서 광희문 밖 순교자들에 관한 중요한 자료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자료들을 통해 1846년을 중심으로 광희문 밖 순교자들에 대한 삶과 신앙을 새롭게 정리하는 약전 작업의 필요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광희문 밖 순교지 범위와 관련하여 왕십리 지역까지 공동묘지가 조성되어 있었던 그 당시의 모습을 살펴볼 때, 그 지역 전체를 순교지라고 보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광희문 밖 순교자 중에 순교자 ‘송백돌’의 경우 교회 측 사료와 관찬 사료 사이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부분들은 계속적인 연구를 통해 사실관계를 확인하고,밝힐 필요가 있다고 본다.
둘째,박해시기 동안에 천주교 신자들은 체포될 경우 신앙을 증거한 후에는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는 것을 최고의 신앙 행위로 이 해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래서 박해 당국자에게 체포된 천주교 신자들 중에는 옥사한 후에 자신의 시신이 광희문 밖으로 버려지는 것에 대해서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옥사’는 체포된 신자들에게는 육체적 고통의 상징일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 불안과 공포를 갖게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 확인을 통해 옥사한 후 광희문 밖에 버려진 순교자들의 경우 당시 신자들 사이에서도 비참하고 처절한 죽음의 상징이었음을 살펴볼 수 있었다.
셋 째, 본고는 광희문 밖 순교자들 의 삶과 신앙을 밝히고자 1846년에 옥사한 후 광희문 밖에 버려진 이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믿음, 희망, 사랑의 삶을 구분하여 살펴보았다. 그 결과 광희문 밖 순교자들은 천주교 신앙에 입문한 순간부터 신앙 안에서 철저히 살고자 노력 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그들 중에는 자신의 천주교 신앙을 강화해 나가고자 한글 서학서를 필독하며 지낸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모습들은 광희문 밖 순교자들이 믿음의 삶을 살아 나가는데 힘이 되었고, 순교의 길을 걷는 데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그 들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열망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갈망했으며,.그 방법으로 동정과 수절의 삶을 선택하며 살았다 이러한 인식은 그들로 하여금 일상 안에서 겪는 신앙과 관련한 여러 가지 박해 등을 극복하게 했고, 이를 통해 희망의 삶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평소 하느님 안에서 모두가 한 형제라는 인식을 가졌고,
이웃에게 사랑의 삶을 실천하며 살았음을 살펴보았다 이것은 결국 광희문 밖 순교자들이 천주교 신앙을 통해서 향주삼덕의 삶을 구 현하며 살았으며, 이 모든 것이 광희문 밖 순교자들의 영성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넷째, 천주교 신앙에 대한 박해 이후에 광희문 밖과 천주교와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그 결과, 조선에서 활동했던 선교 사들의 보고서나 교구장이었던 뮈텔의 일기를 통해서 광희문 밖 순교지는 천주교 박해 상황을 직간접적으로 주목할 수 있는 장소로 언급되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광희문 밖 순교지는 박해시기를 거치는 동안 신자들뿐 아니라, 박해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에게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장소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본고는 광희문 밖 순교자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삶과 신앙을 살펴보았다. 또한 옥사한 후 광희문 밖 순교지에서 버려진 이들은 박해 당시에 천주교 신자들 사이에서 ‘순교’에 대한 의구심까지 들었을 정도였다. 실제로 광희문 밖 순교지와 순교자들에 대한 관심이 최근에야 비로소 그 중요성이 확인될 정도로 배제되어 온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광희문 밖 순교지와 거기에 버려진 순 교자들의 삶과 신앙은 다른 성지 못지않게 순교자 영성의 풍부한 묵상 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현재는 광희문 밖 순교지는 외적인 성지화 작업으로, 경당과 몇 가지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서울 시내에서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찾아오는 성지 중의 하나가 되어 가고 있다. 그러므로 광희문 밖 순교지가 앞으로 이곳을 찾는 순례자들에게 ‘옥사 후 시신으로 버려. 진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공간’으로 자리를 잡아 나간다면,그곳은 한국 내 성지 중에 ‘가장 가난한 죽음을 맞 이한 이들을 만나는 공간’이 될 것임을 확신한다. 또한 이러한 노력이 꾸준히 지속될 경우, 광희문 밖 성지는 오늘날 대형화되는 순교 성지들과는 달리, 보다 깊이 있는 순교자 영성의 본질을 제시해 주는 공간이 될 것이다 이는 결국 ‘순교 성지의 영성화 작업에 한 발 더 나아가는 계기를 마련해 줄 것이라 생각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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