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표지의 책에선 식물의 맛이 나고 지구에 관한 책에선 보글보글 빗방울 소리가 나고 어 류에 관한 책에선 몇천 년 이어온 강물 소리가 난다
곤충에 관한 책에선 더듬이 맛이 나, 이내 물리지만
남쪽 책장은 마치 텃밭 같아서 수시로 펼쳐볼 때마다 넝쿨이 새어 나온다 오래된 책일수록 온갖 눈빛의 물때와 검정이 반들반들 묻어있다 두꺼운 책을 엄지로 훑으면 압력밥솥 추가 팔랑팔랑 돌아간다
침실 옆 책꽂이 세 번째 칸에는 읽고 또 읽어도 설레는 연애가 꽂혀 있다 쉼표와 느낌표 사 이에서 누군가와 겹쳐진다 그러면 따옴표가 보이는 감정을 챙겨 비스듬히 행간을 열어놓는다
새벽까지 읽던 책은 바짝 졸아서 타는 냄새가 났다
책 속에 접힌 페이지가 있다는 건 그 자리에서 눈의 불을 켜야한다는 것, 무엇보다도 일기장 이 제일 뜨겁다 그 안에는 태양이 졸아들고 별이 달그락거리면서 끓기 때문이다
책을 끓여 식힌 감상을 하룻밤 담가 놓았다가
여운이 우러나면 고운 체로 걸러내야 한다
그 한술 떠 삼키면
마음의 시장기가 사라진다
----------------------------------------------- 책은 책마다 맛이 다르다
책은 읽을 때마다 새로운 감동을 줍니다. 다시 보면 예전엔 이걸 왜 못 보았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초록 표지의 책에선 식물의 맛이 나고 지구에 관한 책에선 보글보글 빗방울 소리가 나고 어 류에 관한 책에선 몇천 년 이어온 강물 소리가 난다
다양한 책이 주는 느낌을 적어 두었군요. 식물 맛이 나는 초록 표지의 책, 비 내리는 이유를 적은 지구에 관한 책, 강물 속에 살고 있는 어류에 관한 책. 시인은 참 많은 책을 읽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책을 읽지 않았으면 이런 시가 나올 턱이 있나요.
곤충에 관한 책에선 더듬이 맛이 나, 이내 물리지만 생물 책은 읽기가 어려운가 봐요. 사실 전공자가 아니고서는 읽기가 쉽지 않죠.
남쪽 책장은 마치 텃밭 같아서 수시로 펼쳐볼 때마다 넝쿨이 새어 나온다 오래된 책일수록
온갖 눈빛의 물때와 검정이 반들반들 묻어있다 두꺼운 책을 엄지로 훑으면 압력밥솥 추가 팔랑팔랑 돌아간다
햇살이 비치는 창가에 있는 책장으로 담쟁이넝쿨이 올라오는 이미지가 보입니다. 오래된 책은 손때가 묻어서 반들반들 윤기가 나고요. 두꺼운 책을 읽으려고 하면 밥이 다 되는 것도 모르고 몰두할 때도 있죠. 저녁의 밥 익어가는 소리가 들리는듯합니다.
침실 옆 책꽂이 세 번째 칸에는 읽고 또 읽어도 설레는 연애가 꽂혀 있다 쉼표와 느낌표 사 이에서 누군가와 겹쳐진다 그러면 따옴표가 보이는 감정을 챙겨 비스듬히 행간을 열어놓는 다
이 부분을 읽으시는 분들은 아마도 고개를 끄덕끄덕하실 거예요. '설레는 연애'가 있으니까요. 첫사랑의 아릿함이 밀려옵니다. 쉼표와 느낌표 사이에 있는 그는 누구일까요? 그의 말이 들리는 듯, 하지만 생각해서는 될 일이 아니죠. 하필 여기가 침실이기도 하고요. 그저 비스듬히 빗겨둘 수밖에요.
새벽까지 읽던 책은 바짝 졸아서 타는 냄새가 났다 시의 제목이 '책을 끓이다'이니까 새벽까지 읽던 책은 졸아드는 국물처럼 느껴졌을까요?
책 속에 접힌 페이지가 있다는 건 그 자리에서 눈의 불을 켜야한다는 것, 무엇보다도 일기장 이 제일 뜨겁다 그 안에는 태양이 졸아들고 별이 달그락거리면서 끓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래야 합니다. 줄을 긋고 책을 접고 빗금을 치고 형광펜을 칠하죠. 일기장은 함부로 공개할 수 없는 것. 그 속에는 나의 민낯이 고스란히 들어있죠. 태양도 감히 들여다볼 수 없고 '별이 빛나던 밤'은 소녀의 꿈이 들썩거리던 대낮 같은 밤이었을 거예요.
책을 끓여 식힌 감상을 하룻밤 담가 놓았다가 책을 읽고 나면 여운이 남습니다. 진한 감동이 있죠. 그럴 때는 삭혀야 합니다. 내 몸 안으로 스며들게 해야 하죠.
여운이 우러나면 고운 체로 걸러내야 한다
책이 주는 감동을 잊을 수 없죠. 그 감동은 내 마음에 들여야 합니다.
그 한술 떠 삼키면
마음의 시장기가 사라진다
독서를 한 후의 감동으로 마음이 훈훈해집니다.
이 시는 독서를 왜 해야 하는가, 독서의 이유에 대해 가장 절절하게 알려주는 시입니다.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죠. 밥은 몸의 양식이고요. 그런 것들을 시인은 오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을 거예요. 시는 일상에서 나옵니다. 잔잔하게 다가오죠. 다만 사색하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만 오는 특별한 양식입니다. 이제 처서가 지났습니다. 아직은 여름이 쉽게 물러갈 생각이 없나 봐요. 시와 함께 하면 더위도 사라집니다. 올여름 신춘문예 시를 감상하느라 얼마나 시원하게 보냈는지 모릅니다. 가을도 겨울도 시와 함께라면 거뜬할 것 같습니다. 동참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