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로 가의 아이들 -
어릴 적 고향집은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우리마을이란 동네 그림을 연상하면 된다 뒷산에 올라서면 군청 우체국 경찰서 소방서 은행...등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그러한 작은 고장이다 우리 집은 군청 바로 아래 신작로 가에 있었는데 동네꼬마들의 놀이터는 바로 신작로가 제격이었다 병원앞 오동나무 그늘에 땅따먹기 구슬치기 딱지치기하는 장소였고 스릴 있는 놀이로는 트럭이나 버스 뒤를 따라가며 매연가스를 마시는 재미였다 정류장은 없었지만 어쩌다 버스가 정차하고 막 떠나려는 그때 꼬마들이 우르르 몰려 자동차 뒤에 손을 붙잡고 따라간다 자동차가 속력이 붙어 더 이상 따라가지 못할 그때까지.. 누가 가장 오래 따라갈 수 있는지 모험심을 기르기도 하고 생각해보면 기절할 만큼 위험천만한 놀이였지만 우리들은 그리 즐기며 살았었다 지금 보면 고작 2차선 신작로에 불가한 좁은 골목이나 다름없는 길이었지만 그 길 넓이가 얼마나 아득해 보였는지 모른다 저만치 자동차가 달려오는데 신작로길을 가로질러 달려가는 놀이도 너무너무 재미있었다 이렇듯 목숨건 놀이를 하면서 자란 어린 시절이 있었기에 내 명줄은 타고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소독차가 지나가면 하얀 연기 따라 몰려 다녔었고 일년에 한두 번쯤 볼 수 있는 땅깎는차 (블도져?)가 우렁찬 소리로 길을 닦을라치면 어디서 몰려들었는지 신작로는 온통 꼬마들 세상이 되고 말았다 땅깎는차가 물러진 신작로를 깎고 지나가면 그 다음엔 자갈실은 트럭 뒷판이 올라가며 굵은 돌덩이들을 뿌리고 다녔다 이렇게 해주어야지 길이 패이지않고 잘다져져서 비가와도 진흙 창이 될 염려가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 길이 편편해졌지만 한동안은 울퉁불퉁한 도로의 불편함을 안고 살아야했다 그런 신작로길이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면서 콘크리트 포장 바닥으로 변했었다.
신작로 옆으론 더럽지 않은 도랑이 있었는데 비라도 와서 물이 불으면 종이배를 띄우며 놀았다 우리집 앞에서 배를 띄우고 신작로를 건너 고샅길로 접어들어 한참을 기다리면 신작로 아래로 관통하는 수로를 통해 배가 떠내려 왔었고 악동들은 종이배를 따라 먼 동네까지 원정 가기도 했었다 숨막히게 긴장감 있는 볼 꺼리는 뭐니뭐니해도 병원집 수술실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담을 딛고 올라 유리창안 가려진 커튼사이로 난 무서워 의사 간호사들 가운만 보았을 뿐 수술장면을 차마 보지는 못했지만 다른 아이들은 피도 보았고 꼬매는 모습도 보았다했다 또 떼어낸 수술 부위도 설명해주곤 했는데 무섭다 하면서도 그런 말하는 친구들의 용감성을 부러워하기도 했었다
장날이 되면 시골에서 몰려드는 장사꾼과 장보기꾼들로 길을 메웠다 그 사람들 지나가는 모습들을 보는 것도 흥미로워 은근히 장날이 기다려지기도 했다 달걀꾸러미(짚으로 짠) 끼고 가는 사람 갈치나 고등어를 통째로 지푸라기에 매달고 가는 사람 머리엔 쌀자루나 광주리를 이고 손도 대지않은채 여유롭게 다니는 사 람 닭을 메고 소를 몰고 달구지를 끌고 지게를 지고 나뭇짐을 이고 밭에서 바로 온 듯한 하얀 수건을 두른 아줌마 분단장 곱게 하고 까만 파마머리에 한복을 빼 입고 나온 새댁 한잔 걸치어 비틀거리는 아저씨 장날 한몫보려는 진짜로 장타령 부르던 거지들.... 우리악동들은 이런 풍물들을 보는 재미로 장날이면 더욱 뭉치었다
당시엔 양잿물로 빨래를 삶을 시절이었기에 양잿물 사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누런시멘포장 종이에 양잿물을 싸서 지푸라기로 묶어 대롱대롱 들고 다녔기에 우린 그걸 시골사람들 놀리는 놀이로 이용했다 누런시멘포장 종이에 돌멩이를 양잿물덩어리모양 넣고 지푸라기로 묶어 신작로 한곳에 던져두면 지나가는 행인들 거의가 남이 흘리고 간 양잿물인줄 알고 집어들고 가는 것이다 골목길에 숨어서 내다보기도 하고 아니면 길가 나무의자에 앉아 여유 있게 바라보며 쿡쿡 대던... 들키면 볼기짝 맞을 짓을 재미 삼아 하던 그런 어린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
gams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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