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영숙의 한마디, 현숙의 결심
인자의 변화는 아주 작았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사람의 눈에는 보였다.
영숙은 그것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차렸다.
어느 날 점심 무렵이었다.
영숙은 시댁에 들렀다.
오랜만에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식사를 했다.
식사가 끝나고 차를 마시는 시간이었다.
현숙이 영숙에게 찻잔을 내밀며 물었다.
“요즘 갑철이는 회사 일 때문에 아주 바쁘지?”
“네. 바쁘기는 한데…….”
영숙이 잠시 말을 멈췄다.
현숙이 물었다.
“왜?”
“요즘은 회사 일보다 다른 일 때문에 더 생각이 많아 보여요.”
현숙의 눈빛이 달라졌다.
“무슨 일인데?”
영숙은 잠시 망설였다.
괜히 이야기를 꺼냈다가 가족들 사이에 또 다른 갈등을 만드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현숙도 알아야 할 것 같았다.
“어머니.”
“응.”
“태수 씨가 이제 언니를 좋아한대요.”
현숙의 손이 찻잔 위에서 멈췄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태수가?”
“네.”
영숙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갑철 씨가 그걸 무조건 반대하고 있어요.”
“갑철이가?”
“네.”
영숙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렇게까지 반대하는지는 저도 정확히 모르겠어요. 아마 인자 언니를 걱정해서겠죠.”
현숙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그럴 거야.”
영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머니…….”
“응.”
“인자 언니도 이제 자기 인생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현숙의 눈빛이 깊어졌다.
자기 인생.
그 말이 이상할 만큼 오래 마음속에 남았다.
영숙은 잠시 말을 고르다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제가 알기로는 인자 언니도 태수 씨가 가까이 오는 것 자체를 많이 부담스러워해요.”
현숙이 영숙을 바라보았다.
“태수가?”
“네.”
“왜?”
“갑철 씨와 태수 씨가 자기 때문에 서로 갈등하는 모습을 봤으니까요.”
영숙은 천천히 말했다.
“언니는 누군가가 자기 때문에 상처받는 것을 견디지 못해요.”
현숙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태수 씨가 다가오는 것도 거절하고 있어요.”
영숙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좋아서 싫은 게 아니라…….”
잠시 숨을 고른 뒤 말했다.
“또 다른 사람의 인생에 자신이 짐이 될까 봐 그러는 것 같아요.”
그 순간 현숙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 말이 가슴 깊은 곳을 찔렀다.
자신이 과거 인자에게 남긴 것이 무엇이었는지 갑자기 선명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영숙이 돌아간 뒤에도 현숙은 한동안 거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
창밖으로 오후 햇살이 기울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오래전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인자가 떠나던 날이었다.
어린 인자가 작은 가방 하나를 들고 집을 나서던 날.
그때 현숙은 자신이 옳다고 믿었다.
아들의 앞날을 위해서는 인자를 떼어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갑철이 공부에 집중해야 했고, 집안의 미래도 생각해야 했다.
당시 현숙에게 그것은 사랑이었다.
아들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한 사람의 인생이 조금 흔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날 자신이 흔들어놓은 것은 한순간의 감정이 아니었다.
한 소녀의 삶이었다.
인자는 어린 나이에 갑철의 곁을 떠났다.
그리고 그 뒤로 자신의 삶을 다시 세워야 했다.
갑철은 현숙이 원했던 대로 잘 자랐다.
좋은 학교를 나왔고, 동백그룹의 후계자로 성장했다.
회사도 커졌다.
집안도 평온했다.
겉으로 보면 아무것도 잃지 않은 삶이었다.
그런데 인자는 달랐다.
그 아이는 오랫동안 자신의 마음을 뒤로 미룬 채 살아왔다.
현숙은 그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아팠다.
오래된 빚 하나가 자리 잡은 것 같았다.
미안함이었다.
그날 저녁 현숙은 결심했다.
이번에는 자신이 나서야 했다.
인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인자야.”
“네, 어머님.”
“오늘 시간 괜찮니?”
“네.”
“그럼…… 잠깐 집에 올 수 있겠니?”
인자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워졌다.
“무슨 일 있으세요?”
현숙은 잠시 눈을 감았다.
“할 이야기가 있다.”
그날 늦은 오후.
인자가 저택에 도착했다.
거실 창문 너머로 붉은 노을이 길게 번지고 있었다.
인자가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현숙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인자야.”
“네.”
“태수 말이다.”
인자의 눈빛이 흔들렸다.
“네…….”
“태수가 너를 많이 좋아한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다.”
인자는 고개를 숙였다.
현숙이 물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인자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한참 뒤 입을 열었다.
“저는…….”
목소리가 떨렸다.
“이제 누군가 때문에 또 다른 사람이 상처받는 게 무서워요.”
현숙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갑철이도 그렇고…… 태수 씨도 그렇고…….”
인자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제가 행복해지는 것 때문에 누군가가 아파하는 게 싫어요.”
현숙의 가슴이 먹먹해졌다.
어쩌면 그런 생각을 인자의 마음속에 남겨놓은 사람이 바로 자신인지도 몰랐다.
현숙은 천천히 인자의 손을 잡았다.
“인자야.”
“네.”
“이제는 그렇게 살지 마라.”
인자가 고개를 들었다.
“평생 다른 사람 생각만 하면서 네 인생을 희생하지 마.”
인자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현숙의 목소리도 떨렸다.
“사랑받는 것도 네 권리다.”
인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현숙은 인자의 손을 꼭 잡았다.
“태수와 너…… 나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어머님…….”
“그 아이가 너를 바꾸려고 하더냐?”
인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럼 됐다.”
현숙이 말했다.
“태수는 네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현숙은 조용히 말했다.
“갑철이는 내가 설득하마.”
인자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제가 갑철 때문에…….”
“아니다.”
현숙은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내가 해야 할 일이다.”
현숙의 목소리가 깊어졌다.
“예전에는 내가 너희 둘 사이를 갈라놓았다.”
인자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겠다.”
현숙은 인자의 손을 놓지 않았다.
“너도 네 인생을 살아라.”
인자는 결국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한번 해볼게요.”
현숙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날 현숙의 마음속에서는 오래된 결심 하나가 완전히 달라지고 있었다.
과거에는 인자의 삶을 대신 결정하려 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이번에는 인자의 선택을 지켜주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제4장. 현숙의 마지막 중재, 그리고 새로운 결실
며칠 뒤.
현숙은 태수를 저택으로 불렀다.
태수가 서재에 들어서자 현숙은 창가에 서 있었다.
“태수 군.”
“네, 어머님.”
현숙이 천천히 태수를 바라보았다.
“네가 인자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태수는 잠시 숨을 고른 뒤 고개를 숙였다.
“네. 진심입니다.”
“얼마나 사랑하느냐?”
태수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제가 가진 것보다 인자가 행복한 것이 더 중요할 만큼 사랑합니다.”
현숙의 눈빛이 흔들렸다.
태수는 말을 이었다.
“제가 인자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잠시 말을 멈췄다.
“다만 인자가 힘들 때 곁에 있어 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덧붙였다.
“평생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현숙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내가 말이다…… 젊었을 때는 내가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했다.”
태수는 조용히 들었다.
“돈이 있으면 사람의 운명도 바꿀 수 있고, 부모가 마음먹으면 자식에게 가장 좋은 길을 만들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지.”
현숙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래서 인자를 내쳤다.”
서재 안에 긴 침묵이 흘렀다.
“그 아이가 울면서 돌아서던 뒷모습을…… 나는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현숙은 고개를 숙였다.
“갑철은 잘 자랐다. 회사도 잘됐고 우리 집안도 아무것도 잃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늘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살았다.”
태수가 조용히 말했다.
“늦지 않았습니다.”
현숙이 고개를 들었다.
“사과한다고 상처가 모두 없어지는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그 사람이 더는 혼자 그 상처를 안고 살게 하지는 않을 수 있으니까요.”
현숙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잠시 후 현숙이 물었다.
“태수 군.”
“네.”
“인자를 사랑하느냐?”
“네.”
“끝까지 사랑할 수 있겠느냐?”
태수는 망설이지 않았다.
“네.”
현숙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부탁하마.”
태수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아이를 행복하게 해다 오.”
태수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리고 내가 저지른 잘못 때문에 더는 너희들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마.”
며칠 뒤.
현숙은 갑철을 따로 불렀다.
갑철은 어머니의 얼굴을 보는 순간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어머니.”
“갑철아.”
“네.”
현숙은 아들을 한참 바라보았다.
“너도 이제 그만 마음의 짐을 내려놓거라.”
갑철의 눈빛이 흔들렸다.
“인자는 네가 평생 지켜줘야 할 사람이 아니다.”
갑철은 고개를 숙였다.
“자기 인생을 스스로 살아갈 사람이다.”
갑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뒤 물었다.
“어머니는…… 태수와 누나를 허락하시는 겁니까?”
현숙은 고개를 저었다.
“허락하는 게 아니다.”
갑철이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인자에게는 원래 자기 인생을 선택할 권리가 있었다.”
현숙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내가 예전에 그 권리를 빼앗았을 뿐이다.”
갑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날 밤 갑철은 태수를 찾아갔다.
두 사람은 마주 앉았지만,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십 년을 함께 살아온 친구 사이였기에 오히려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마침내 갑철이 먼저 입을 열었다.
“태수야.”
“응.”
“미안하다.”
태수가 고개를 들었다.
갑철은 한참 말을 고르다가 말했다.
“내가 너한테 화낸 게네가 미워서가 아니었다.”
“알아.”
“아니. 나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갑철이 씁쓸하게 웃었다.
“내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을 네가 데려가는 것 같아서 무서웠던 것 같다.”
태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갑철이 한숨을 내쉬었다.
“인자는 내 사람이 아니더라.”
태수가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누나도 자기 인생이 있는 사람이더라.”
갑철은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한다.”
태수가 그 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힘주어 잡았다.
“나도 끝까지 잘할게.”
두 사람의 손이 맞잡았다.
오랜 세월 함께해온 친구의 손이었다.
갑철이 말했다.
“우리 누나…… 정말 행복하게 해줘.”
“걱정하지 마.”
그날 두 사람 사이에 남아 있던 마지막 벽이 조용히 무너졌다.
그리고 몇 달 뒤.
따뜻한 봄날이었다.
동백그룹 산하 야외 예식장에는 하얀 꽃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푸른 잔디 위로 햇살이 내려앉았다.
꽃길 끝에 인자가 서 있었다.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인자의 얼굴에는 오랜 세월의 아픔 대신 평온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맞은편에는 태수가 서 있었다.
두 사람은 천천히 서로를 향해 걸어갔다.
하객들의 박수가 예식장을 가득 채웠다.
갑철과 영숙도 그 자리에 있었다.
갑철은 친구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영숙은 얼굴을 붉히며 인자를 바라보았다.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태수가 인자의 손을 꼭 잡았다.
“앞으로 좋은 날에도, 힘든 날에도 당신 곁에 있겠습니다.”
인자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저도 당신과 함께 걷겠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참으로 오래 돌아온 사랑이었다.
결혼식이 끝난 뒤 갑철이 태수에게 다가갔다.
“태수야.”
“응.”
“잘 부탁한다.”
태수가 웃었다.
“걱정하지 마.”
갑철은 인자를 바라보았다.
“누나.”
“응.”
“이제 정말 행복해야 해.”
인자는 눈물 속에서도 환하게 웃었다.
“고맙다, 갑철아.”
그 모습을 바라보던 현숙은 한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오래전 자신이 만들어놓았던 상처를 완전히 없앨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사람은 과거를 지울 수는 없어도 남은 삶으로 잘못을 조금씩 바로잡을 수 있다는 것을.
현숙의 눈가에 따뜻한 눈물이 맺혔다.
“이제는…… 행복해도 된다.”
그 말은 인자에게 건네는 축복이면서,
오랜 세월 죄책감 속에서 살아온 자신에게 건네는 용서이기도 했다.
바람이 불었다.
하얀 꽃잎들이 꽃길 위로 천천히 흩날렸다.
인자와 태수는 손을 맞잡고 새로운 삶을 향해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