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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후 인간의 처지를 결정하는 것 / 선악 간 어느 편이 우세한가..
사후 인간의 처지는 단순히 선행과 악행의 양적 총합이나,
선악 간 비중이 어느 쪽으로 기우는가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
여기서 ‘어느 편이 우세하다’는 개념을
양적인 비율로 오해하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결코 수치적 비율로 설명하지 않는다.
선이 우세하다는 것은 51퍼센트 대 49퍼센트와 같은
계산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의 내면을 궁극적으로 다스리는
중심사랑(지배적 사랑)이 무엇인가의 문제다.
먼저 기본 원리를 보자.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본질은 그의 사랑이라고 말한다.
‘사람은 그의 사랑이며, 그 사랑이 그의 생명이다.’
DLW 1
또 다른 곳에서는 ‘사람은 그가 사랑하는 것과 하나가 된다.’
고 한다. AC 6872
여기서 기준은 양이 아니라 정체성이다.
무엇이 중심인가, 무엇이 지배하는가가 핵심이다.
천국과 지옥을 다루는 부분에서도 그는 말한다.
‘사람은 그 지배적 사랑(dominant love)에 따라
천국이나 지옥에 속한다.’ HH 56
그리고 그 지배적 사랑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의 총합이 아니라,
그 사람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해 사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선이 우세하다.’는 것은
선한 생각이나 행동이 조금 더 많다는 뜻이 아니다.
그 사람 안에서 궁극적 목적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가 기준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수많은 약점과 실패를 가지고 있어도
그가 진심으로 죄를 죄로 인정하고,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의지하여
그 악을 적극적으로 대적하고 멀리하려 투쟁한다면,
그의 지배적 사랑은 실천적 방향상 선의 영역으로 정렬된다.
반대로 겉으로 선한 행동이 많아도
그 중심이 자기 영광이나 지배욕이라면, 지배적 사랑은 악이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도 말한다.
‘주님은 사람 안에 남아 있는 선을 보존하시며,
그것이 그를 지배하도록 하신다.
그러나 사람이 악이 지배하도록 하면 선은 변방으로 밀려난다.’
AC 5893의 요지
여기서 ‘지배’라는 표현이 중요한데 그 이유는
사랑은 항상 하나가 중심에 서면
나머지는 그 주변으로 정렬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의 지배적 사랑이 어떠한지
그 기준은 어떻게 판별되는가.
그것은 시험의 순간에 드러난다.
평온할 때는 선과 악이 섞여 보인다.
그러나 이해관계가 걸렸을 때, 손해가 따를 때, 체면이 깎일 때
그 사람이 무엇을 택하는가가 중심 사랑을 드러낸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과정에서
인간 안의 ‘사랑’이 정렬된다고 설명한다. AC 9334
이 정렬이 완성되면,
선이 중심에 서고 악은 주변에 억제된 상태로 남는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악이 전혀 없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스베덴보리는 사람 안에는 죽을 때까지
악의 경향이 남아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지배하지 않으면,
그리고 사람이 그것에 동의하지 않으면
그 악은 통제 아래에 있게 된다. DL 68
천국의 천사들도 자신이 본래 악한 존재였음을 인정한다.
다만 그들의 지배적 사랑이 바뀌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51퍼센트라는 식의 계산은 적절하지 않다.
어떤 사람은 겉보기에는 선이 30퍼센트,
악이 70퍼센트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30퍼센트가 그의 진짜 중심이라면,
그리고 그가 그 방향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중심사랑(지배적 사랑)은 선이 우세한 것이다.
반대로 겉보기 선이 80퍼센트여도
그의 중심이 자기 사랑이면, 악이 우세하다.
이것은 양의 문제가 아니라 왕좌의 문제다.
무엇이 왕좌에 앉아 있는가의 문제다.
다만 여기서 오해를 막아야 한다.
‘나는 방향만 맞으면 된다.’는 식으로
외적 행위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스베덴보리는 외적 삶이
내적 사랑을 굳힌다고 반복해서 말한다. DL 4
중심 사랑(지배적 사랑)은
실제 선택과 행동을 통해 강화되거나 약화된다.
방향이 진짜라면 삶에서도 점진적 변화가 나타난다.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동의의 방향은 선 쪽으로 유지된다.
결론적으로 선이 우세하다는 것은
선이 그의 중심(지배적) 사랑이 되었다는 뜻이며
그것은 계산으로 측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사람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사랑하며, 무엇을 위해 살고,
무엇을 죄로 인정하며, 무엇을 포기하지 않는가에 의해 판별된다.
주님은 인간의 일시적 실패나 수치적 균형이 아니라
그 사람의 중심 사랑과 방향을 보시며,
남아 있는 작은 선이라도 보존하여
그것이 지배하도록 조용히 배열하신다. HH 56, AC 5893 DL 68
천국과 지옥 479
‘나의 수많은 경험으로 증명된 것은
죽은 뒤에 인간은 곧 자신의 사랑이며 의지라는 사실이다..
사후에 인간이 곧 자신의 사랑이라는 사실은
지배적인 사랑과 일치하지 않는 모든 것들이 사후에는 제거되고
겉으로 보기에 떨어져 나간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모든 영들은 자기의 지배적 사랑 안에 있으면
그 사랑이 이끄는 대로 끌려간다.
영들은 자기가 끌려간다는 것을 아무리 또렷이 알고 있고
아무리 거부해야겠다고 생각해도 거기 저항하지 못한다..
세상에 있는 인간도 자신의 사랑에 의해 이끌리지만,
그가 영이 되면 이것이 더 심해진다.
그때는 자신의 사랑이 아닌 다른 사랑을 가장하거나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어떤 영이 다른 이의 사랑과 일치하게 행동하고 말할 때,
그 사람은 얼굴이 온전하고 밝으며 생기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그러나 타인의 지배적인 사랑에 반대되게 행동할 때,
그 사람의 얼굴은 흐려지기 시작하며 결국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세상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만
인간이 누군가로부터 관심을 거둘 때 그 사람이 더 이상
시야에 들어오지 않게 되는 것과 동일한 원리가 영계에서 일어난다..’
인간은 생애 동안 수많은 생각과 감정을 경험하지만
그 중심에는 언제나 자신을 가장 강하게 이끄는
핵심적인 욕구가 자리 잡고 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생명의 사랑'이라 칭하며
이 사랑이 선(이웃 사랑과 주님 사랑)을 향하느냐,
혹은 악(자기 사랑과 세상사랑)을 향하느냐에 따라
영혼의 무게중심이 결정된다고 설명한다.
사후에는 가식과 위선이 벗겨지므로
중립적인 상태에 머물지 않고 반드시 더 우세한 쪽으로
인력이 작용하게 된다.
사후 세계에서 인간의 처지를 결정하는 결정적인 요소는
지상에서 형성된 '지배적 사랑'이다.
지상에서의 인간은 사회적 평판이나 법적 구속력 때문에
악한 본성을 숨기고 선한 척 행동할 수 있다.
그러나 사후 '영들의 세계'라는 중간 상태에 진입하면
외면적인 인격(겉사람)은 서서히 사라지고
내면의 본질(속사람)이 표면으로 드러난다.
만약 내면 그의 중심(지배적) 사랑에 있어서
악이 선보다 미세하게라도 우세하다면 그 영혼은 결국
선한 것들을 거부하고
자신의 본성과 일치하는 악의 소굴로 향하게 된다.
여기서 ‘미세한 우세’ 라는 표현에 대해 잠깐 살피고 넘어가자.
HH 592항
‘주님께서 천국과 지옥을 둘 다 다스리지 않으시면
균형(Equilibrium)이 유지될 수 없다.
균형이 없다면 천국도 지옥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주 전체의 모든 것, 다시 말하면 자연계와 영계에 있는
모든 것은 균형에 의해 지탱되기 때문이다.
합리적인 사람은 누구나 이것이 옳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일 한쪽이 무게를 가하는데 상대편에서 전혀 저항하지 않는다면
양쪽 다 파괴되지 않겠는가? 영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만일 선이 악에 반작용을 가하며 끊임없이 그 폭동을 제압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이것이 신성 자체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으면
천국과 지옥은 둘 다 멸망할 것이고 그에 따라 전 인류도 멸망할 것이다.’
DP 23
‘주님께서는 천국과 지옥 사이의 균형을 통해
사람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결합을 이루게 하신다.
악과 거짓은 지옥에서 끊임없이 함께 뿜어져 나오고
선과 진리는 천국에서 끊임없이 함께 뿜어져 나온다.
우리 각자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그 균형 속에 머물러 있으며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생각하고, 의도하고, 말하고, 행동할 자유,
즉 우리가 개혁될 수 있는 자유를 주는 것이다.’
'미세한 우세'가 구원의 결정적 분기점이 되는 연산 과정은 이러하다.
첫째, 주님은 전 우주적 인력을 제압하여 내면을 '0'의 상태로 유지한다.
HH 592항에 따르면 지옥은
끊임없이 폭동을 일으키며 선을 압도하려 한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신성한 권능으로
이 악의 무게에 정확히 대응하는 반작용을 가하신다.
이로 인해 인간 내면의 저울은
어느 한쪽으로도 쏠리지 않는 완벽한 중립 상태가 된다.
주님이 이 거대한 힘의 전쟁을 막아주고 계시기 때문에
인간의 영혼은 외부의 강제력으로부터 보호받는
중립 지대를 확보하게 된다.
둘째, 중립 지대 안에서
인간의 작은 의지가 실질적인 변수로 작동한다.
DP 23항에서 설명하듯, 이 균형은
인간에게 ‘의도하고 행동할 자유’를 부여한다.
주님이 외부의 힘을 상쇄시켜 놓았기에 비로소 인간의 지극히
작고 미세한 의지의 움직임이 의미 있는 수치로 기록될 수 있다.
거대한 폭풍 속에서는 촛불 하나가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사방이 막힌 정적 속에서는 그 작은 불꽃의 흔들림이 전체의 방향을
결정하는 유일한 에너지가 되는 것과 같다.
셋째, 미세하게라도 우세해지는 순간 영적 귀속이 결정된다.
주님이 맞춰놓으신 '0'의 저울 위에서는
아주 작은 의지의 기울어짐이 전체의 성질을 규정한다.
인간이 자신의 악을 정당화하거나 즐기기로 마음먹어
저울을 아주 미세하게라도 악 쪽으로 기울게 하면,
그 영혼은 즉시 지옥의 영향권에 포착된다.
반대로 자신의 무력함을 시인함과 동시에 주님의 말씀과 진리를 무기 삼아
스스로 일어서듯 그 유혹에 적극적으로 저항한다면,
그 치열한 투쟁의 미세한 우세가 영혼을 천국의 영향력에 결합시킨다.
이는 양적인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주님의 질서에 자발적으로 순종하여
악을 대적했는가 하는 실천적 방향의 문제이다.
결국 '미세한 우세'임에도
그것은 지배적 사랑의 확정을 의미한다.
평형 상태에서 인간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그 미세한 무게추가
결국 지배적 사랑의 왕좌를 결정하는 것이다.
일단 어느 한쪽이 우세해지면 영혼은
그 성질을 자신의 생명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며,
이 방향성이 사후에 낡은 허물을 벗고 본연의 처소로 향하게 하는
최종적인 연산값이 된다.
인간의 본성은 악뿐이기에 주님의 전적인 다스림이 없다면
인간은 단 1초도 선을 선택할 자유를 가질 수 없다.
주님께서 우주 전체의 평형을 유지하시는 이유는
거창한 질서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름 없는 한 인간의 영혼 속에서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작은 틈을 만들어주기 위함이다.
자신의 악을 주님의 질서에 반하는 죄로 여겨 미워하고,
주님께서 힘을 주실 때 자발적으로 악에
적극 저항하며 멀리할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전 지옥의 폭동을 막아서며 그 자유의 공간을
수호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신의 무력함을 시인하고 스스로 하듯 진리를 붙들어
악을 대적하는 그 자발적인 영적 전투의 순간들을 위해,
온 우주의 균형을 조절하시는 주님의 치밀한 섭리는 경이롭다.
인간이 쥐고 있는 작은 자유는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라
신성 자체의 끊임없는 반작용이 만들어낸 은혜의 산물이다.
끝내 천국의 유입을 거부할 수 있는 자유 속에서도, 손을 묶어두지 않고
말씀의 진리를 선택하여 악과 맞서 싸우려 했던
그 능동적인 투쟁의 실천들을 위해
주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온 지옥의 무게를 홀로 견뎌내고 계신다.
인간의 부족함보다 회복시키시는 주님의 능력이
훨씬 더 크다는 사실에서 영혼은 가장 깊은 안식을 얻는다.
그러므로 인간으로는 미세한 우세일지 몰라도,
또 겉으로는 크나큰 욕망 중에 잠시 마음을 살필 수 있는
작은 여지(틈)일지 몰라도
그 속은 영원한 생명을 결정짓는 무게를 담고 있다.
주님께서 그 거대한 어둠의 폭동을 신성한 권능으로 제압하여
인간의 내면에 정밀한 평형 상태를 유지하시는 목적은 단 하나,
인간에게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선택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자유의 틈을 열어주시기 위함이다.
지옥은 모든 악이 하나로 연결되어
거대한 질량으로 영혼을 끌어당기고 있다.
인간의 힘으로는 이 인력을 단 1밀리미터도 거스를 수 없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 거대한 지옥의 총합을
정확히 맞대응하여 제압하시기에, 인간의 내면에는
모든 외부 압력이 사라진 '0'의 중립 지대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 정적 속에서 인간이 손을 묶어두지 않고 스스로 하듯 진리를 선택하여
악을 멀리하려 행하는 치열한 영적 전투는
비로소 천국적 고유속성을 형성하는 유효한 실천으로 기록되고,
주께서 수호하시는 자유의지는
지옥의 모든 하강 압력을 압도하는 결정권을 갖게 된다.
겉으로 보기에 인간의 의지는
거대한 욕망에 파묻힌 작은 불꽃같아 보이지만
주님이 마련하신 평형의 법칙 안에서
이 불꽃은 전체 시스템의 방향을 바꾸는 핸들과 같다.
지옥이 아무리 거대한 에너지를 뿜어내더라도
인간이 주님이 보존하신 평형의 공간 안에서 손을 묶어두지 않고
단호하게 생각과 행동을 제어하며
‘이것은 주님의 질서에 반하는 죄이므로 거부한다.’고 적극적으로 대적하는 순간,
지옥의 영향력은 그 영혼에 대한 법적 소유권을 상실한다.
즉, 인간의 미세한 우세는 그 자체의 질량이 커서가 아니라
주님의 무한한 신성과 연결되는 '접점'이기 때문에
지옥을 압도하는 지배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로 인해 인간의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미세한 선택이지만
사실 그 안에는 영혼의 본질을 최종적으로 규정하는
큰 힘이 내재하게 된다.
주님께서 인간의 영혼을 살피시는 기준은
겉으로 드러나는 거창한 결단이나 완벽함에 있지 않다.
주님은 평형 상태에서 발휘되는 인간의 실천적인 영적 전투를 보신다.
인간이 악한 겉사람의 유혹 속에서도 말씀의 진리를 붙들고
주체적으로 의지를 굳혀 결연히 악을 거부하고 멀리한다면,
그 자발적인 투쟁에 의해 획득된 미세한 우세가
영혼의 지배적 사랑을 천국적 질서로 재편한다.
이는 사후에 모든 낡은 옷을 벗어던지고
빛의 존재로 거듭나게 하는 핵심 연산값이 된다.
따라서 크나큰 유혹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주님이 주신 자유의지를 깨워 말씀의 진리로 무장하고,
스스로 하듯 적극적으로 악을 멀리하려 몸부림치며 영적 전투를 수행하는 것이
신앙인으로서 참으로 큰 축복이다. 주님은 인간의 그 능동적인 투쟁을 통로 삼아
온 지옥의 영향력을 끊어내시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은 악 외에 아무것도 아니기에
주님의 보호 없이는 단 한 순간도 빛을 향할 수 없지만
주님은 그 유약한 인간에게 '자유'라는 신성한 권능을 나누어 주셨다.
그러므로 스스로의 연약함에 절망할 필요가 없음은,
주님께서 이미 우리의 허물을 '낡은 의복'으로 분류하시고
중심의 그 작은 진심을 영원한 생명의 등불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지옥을 선택할 수도 있는 그 막강한 자유를 가졌음에도,
오직 주님을 바라보며
악을 거부하고 멀리하려는 인간의 결연한 저항과 투쟁을 위해
온 우주의 균형을 조절하시는 것이 주님의 세밀한 사랑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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