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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의 첫날이다.
가을은 깊어가고, 예전에 읽었던 책의 내용들, 예전에 찾아갔었던 여행지에서의 추억이 떠오른다.
우연히 옛날에 써두었던 톨스토이 관련글, 여기에 톨스토이가 1908년에 남긴 육성까지 담아두어서
쾌재를 부르지 않을 수 없기에 여기에 소개한다.
톨스토이가 전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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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은 톨스토이 서거 100주년이 되는 해다. 톨스토이는 러시아 작가 가운데도 한국 문단에 막강한 영향을 끼쳤던 대문호였다.
1910년대에 일본에 유학중이었던 춘원 이광수는 톨스토이의 작품을 접한 뒤 톨스토이와 같은 크리스천이 되고자 했다. 이광수 초기 작품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것은 기독교 사상이다. 이광수는 톨스토이 사망 20주년을 맞아 브나로드 운동의 일환으로 장편소설 <흙>을 썼다.
이광수가 주축이 되었던 브나로드 운동은 심훈의 <상록수>, 이무영의 <흙의 노예> 박영준의 <모범 경작생> 김유정의 <소낙비><만무방><봄․봄> 같은 농촌소설들이 나오게 된 디딤돌이 되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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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여름, 모스크바에 있는 톨스토이 공원과 톨스토이 집-박물관을 찾아 갔다. 톨스토이 공원은 풍성하고도 높직한 나무들이 숲을 이룬, 조경이 잘된 화단을 갖고 있었다. 대로를 앞에 두고, 공원 전면에는 3단의 화강암( 88톤)을 수직으로 이어붙인 톨스토이의 거대한 석상이 있었다. 톨스토이 공원 앞길은 ‘톨스토이 거리’라 불리었다. 톨스토이 집-박물관은 공원으로부터 걸어서 6~7분 가량이 걸렸다.
톨스토이의 집-박물관은 벽돌색의 높은 담장과 상대적으로 작은 출입구를 가졌고 ‘톨스토이 박물관’이란 명패가 부착되어 있었다. 작은 출입구를 지나 정원으로 들어서자 짙은 오렌지 빛의 2층 목조 건물이 나타났다. 정원에 있는 나무들은 모두 톨스토이가 손수 심은 것들이었다. 톨스토이는 1882년부터 20년간 이곳에서 살았고, 1921년부터 이곳은 일반에게 공개되기 시작하였다.
아래 사진은 톨스토이가 직접 흙을 퍼다가 쌓아 만든 높이 20m 지름 40m 정도 되는 동산
( 사진 설명: 작은 동산으로 올라가는길은 휘돌아가기, 동선을 늘이기 위한 전략이었으리라. 톨스토이는 이 동산에 올라서 작품을 구상하고는 했다고 한다. 동산에서 동행들과 한담중이다. 아래 사진, 왼쪽사진의 왼쪽 중간 사이로 톨스토이의 저택이 내려다 보인다. 오른쪽 사진은 박물관에서 나에게 톨스토이의 음성을 녹음할 수 있도록 도와주던 부인).
( 사진 설명: 하단 사진 왼쪽은 가족들의 작은 휴게실, 오른쪽 사진은 계단 모서리에 있던 자전거는 톨스토이가 직접 조립해서 타고다니던 자전거, 톨스토이는 67세 무렵 자전거 타기를 배웠다고 한다. 상단의 인물사진을 제외한 모든 사진들은 인터넷
L. Tolstoi's Khamovniki Memorial Estate, Moscow - Tripadvisor 에서 퍼온 것이다. )
여기서 밝혀야 될 것은 톨스토이가 20년간 살던 집-박물관과는 달리, 이곳에서 가까운 크루셰프 만시온(Krushchev Mansion)에 ‘톨스토이 박물관’이 있다는 것이다.
1911년 톨스토이 사망 1주년을 기념하여 톨스토이 집을 방문했던 레닌의 명령으로 톨스토이 관련 자료들을 수집, 1939년에 개관된 곳이 ‘톨스토이 박물관’이다. 모두 ‘톨스토이 박물관’이란 이름을 갖고 있지만, 톨스토이가 가족들과 함께 살던 집은 편의상 ‘집-박물관’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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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생애는 소설보다도 더 극적이다. 톨스토이는 1828년 모스크바로부터 남쪽으로 160km 떨어진 야스나야 폴랴나의 영지에서 톨스토이 백작 댁의 4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두 살 때 어머니를,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이후 고모들의 손에서 양육되었다. 형제자매는 4남 1녀였지만, 1남과 3남은 요절하고, 둘째 형은 이기적이었으며 유일한 여동생 마리아는 상냥했지만 결혼 생활이 실패하자 평생을 수도원에서 살았다.
톨스토이의 젊은 시절은 방황과 방탕의 연속이었다. 카잔대학을 중퇴하고, 상속받은 농지를 경영하지만 경험부족으로 실패, 모스크바로 가서 방탕에 빠지고 도박판에서 큰 빚을 지기도 했다. 이후 코카사스로 가서 하사관 임관시험에 합격, 포병으로 현역에 입대했다. 그는 이곳에서 전투에 투입되기도 하고, 창작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자주 창녀굴을 찾거나 도박판을 출입했다. 특이한 것은 그의 문학적 명성이 이 시기부터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군에서 제대한 톨스토이는 전업 작가로의 길을 선택한다. 그는 해외여행과 창작 생활, 유부녀와의 연애, 도박으로 인한 파산 등을 경험한다.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처럼 중증의 도박 중독자였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도 그는 농민을 위한 학교를 세워 운영했다.
톨스토이가 결혼한 것은 그의 나이 서른네 살(1862) 때였다. 아내 소피아는 열여덟 살이었다. 톨스토이는 어린 아내를 지극히 사랑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13남매가 태어났지만 5남매는 일찍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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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오렌지 빛 목제 2층 건물인 톨스토이의 집 안으로 들어섰다. 이 집에는 16개의 크고 작은 방이 있고 톨스토이를 존경하는 이들이 톨스토이를 찾아와 토론과 낭독회와 콘서트 모임을 가졌었다고 한다. 시인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철학자인 니체, 릴케와 니체의 연인이었던 문필가 루 살로메, 러시아의 작가인 체홉, 그리고 고리키도 이 집으로 톨스토이를 찾아왔었다.
현관에는 50대 전반의 중년 부인이 앉아 있다가 우리에게 가죽으로 된 큼직한 슬리퍼를 신발위에 신으라고 했다. 가죽 슬리퍼를 신발 위에 신는 것은 까다롭고 귀찮은 작업이었다.
먼저 1층에 있는 가족들의 식당으로 들어갔다. 톨스토이가 그의 아내와, 그리고 8남매(3명의 딸과 5명의 아들)와 함께 둘러앉아 식사를 하던 식탁이 있었다. 흰 식탁보가 덮인 식탁에는 당시 톨스토이 가족들이 사용하던 하얀 사기에 청색 꽃무늬가 그려진 식기들이 종류별로, 가족 수효에 따라 놓여 있었다. 톨스토이가 앉았던 의자, 아내 소피아와 자녀들이 앉았던 목제 의자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술을 즐기던 톨스토이의 자리 앞에는 작은 술잔이 하나 놓여 있었다. 가족 수효에 따른 의자 말고도, 가족들의 식사를 시중들던 하녀의 자리도 있었다.
식당 벽에는 큰딸 타치아나가 그린 둘째 딸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타치아나는 미술에 재능이 있었다. 타치아나의 스승은 레핀으로 그는 후에 미술 아카데미를 세운 유명한 화가였다.
거실 한쪽 구석에는 로얄 피아노 한 대가 놓여 있었다. 첫 아들 세르게이가 연주하던 피아노였다(톨스토이의 육성이 나오기 전, 피아니스트가 연주한 전주곡은 이 피아노를 이용한 것이라 한다).
톨스토이의 침실로 들어갔다. 예상과는 달리 톨스토이의 침대는 작았다. 사진 속의 텁석부리 톨스토이는 대인으로 보였다. 그의 작품을 읽으면 그 작품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굵고 나지막하고 따뜻했다. 작품의 규모가 크기에 톨스토이는 거구의 사람이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 톨스토이의 체구는 비교적 작았다고 한다. 키는 165cm 안팎이 되었을까.
침실에는 톨스토이가 입던 옷이 있었다. 어두운 갈색 바탕에 동일 계통색으로 조화를 이룬 색동옷이었다. 톨스토이의 침실 옆에는 7살 때 죽은 막내아들의 방, 막내가 쓰던 작은 침대가 있었다. 연이어 아이들의 공부방, 하인들의 작업실이 있었다.
방마다 각기 다른 노부인들이 지키고 앉아 있었다. 건물 내부 벽을 이용한 진열장에는 톨스토이가 직접 직조하고 디자인해서 입었던 모피를 안감으로 댄 옷이 있었다. 손수 양털로 천을 짜고, 디자인을 하고, 봉제를 했다는 외투- 톨스토이는 유능한 의상 디자이너이고 봉제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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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대부터 20여 년간 이 집에서는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모스크바 생활을 하게 된 톨스토이는 손수 만든 양가죽 외투를 걸치고 나무꾼들과 함께 모스크바 변두리의 야산에서 나무를 해오곤 하였다고 한다.
이 무렵 톨스토이는 궁핍한 서민들의 삶을 직접 목격하면서 불평등한 사회에 대한 노여움을 품고 있었다. 가난한 서민들을 위해서 그의 재산을 모두 나누어 주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아내와의 갈등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가족을 위해 재산을 지키려는 소피아와, 기독교적 이념을 실현시키기 위해 자신의 재산을 포기하려는 톨스토이와의 갈등은 격렬했다.
그 결과 톨스토이는 아내가 관리하던 재산과 전집의 출판 권리를 모두 아내에게 이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무렵 집필된 것이 <인생론> <크로이첼 소나타> <바보 이반 이야기>이다. 톨스토이는 부당한 사회에 대한 노여움을 직설적인 논문들을 통하여 발표하기도 했다.
흔히 세계 3대 악처 가운데 한 사람으로 톨스토이의 아내를 꼽는다. 톨스토이는 지독한 악필이었다. 톨스토이의 글씨를 독해할 수 있는 사람은 소피아뿐이었다. 톨스토이가 악필로 쓴 모든 원고를 소피아는 정서해서 출판사로 보내고 이를 관리했다.
<크로이첼 소나타>는 발표 즉시 검열에 걸려 판금조처 당했지만, 입소문을 통해 이 작품을 알게 된 사람들은 필사본을 통해서 읽었다. 심지어 황제와 황후들까지도 필사본으로 <크로이첼 소나타>를 읽었다. 소피아는 러시아에서 금지된 남편의 이 작품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프랑스에서 출판했다.
소피아는 남편에게 유능하고도 충실한 비서였고 사업 경영자였으며 여덟 명의 자녀들에게는 자상한 어머니고 한 집안을 이끌어 가야하는 가장이었다. 톨스토이는 치유 불능의 도박 중독자, 현실인식이 결여된 이상주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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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층으로 올라갔다. 역시 노부인이 방을 지키고 있었다. 우리를 본 그녀는 낡은 카세트 녹음기를 틀었다. 발명왕 에디슨은 축음기를 발명한 직후 러시아에 있는 톨스토이에게 축음기를 선물로 보내주었다. 톨스토이의 목소리는 에디슨이 보내온 축음기에 녹음되었다. 톨스토이가 사망하기 2년 전의 일이었다.
당시의 축음기는 톨스토이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우리는 그 축음기에 담겼던 톨스토이의 목소리를 다시 녹음테이프에 옮긴 소리를 듣게 되었다. 1908년에 녹음된, 다시 카세트테이프에 옮겨진 톨스토이의 목소리는 카랑카랑하고 쇳소리가 나면서도 윤택했다.
“ 자 나의 친구들이여. 항상 저에게 오십시오, 저는 항상 당신들을 반길 것이고 항상 당신들을 좋아할 것입니다. 내가 당신들에게 바라는 것은, 공부하십시오. 언제나 공부를 하게 되면 미래가 밝아질 것입니다. 항상 공부 하십시오. 그리고 안녕히 계십시오. 나는 당신들을 사랑합니다.”
톨스토이가 전하는 말- ‘공부하라, 항상 공부하라’는 말은 그가 진정으로 사랑하고 존경했었던 한 위대한 이의 말을 연상 시킨다. ‘깨어 있어라, 항상 준비하고 깨어 있어라’ 하던…….
톨스토이가 전하는 말의 앞뒤를 장식한 음악 연주자는 당시 모스크바 음대 교수이며 유명한 피아니스트 홀든 베이저, 녹음 당시 연주에 사용되었던 그랜드 피아노가 이층 거실 한 구석에 전시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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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년 톨스토이와 소피아 사이의 갈등은 첨예했다. 톨스토이는 그의 저작권 전체를 공개하고 토지도 농도들에게 분배하겠노라고 했다. 분노한 소피아는 가출했고 이에 톨스토이는 양보하여 1881년 이후의 모든 작품의 저작권만을 공개하겠다고 신문지상을 통해 발표했다.
1890년대 이후 톨스토이는 빈민구제 활동에 전념하고 모든 창작을 포기하는 대신, 논문을 통해 사회적 모순을 고발하고 무저항주의를 주장했다. 톨스토이는 군대를 악으로 보고 있었다. 이것은 곧 병역거부 운동으로 이어졌다. 당시 반러시아 정교회에 속하는 두호볼 교도들이 집단적으로 병역을 거부하게 된 것이다.
톨스토이는 이들의 카나다 이주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여러 나라에 구호금을 호소하는 한편, 그 자신도 원고를 팔아 이주 자금을 마련하고자 했다. 그래서 절필 십년 여 만에 창작에 매달리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장편 <부활>이었다.
<부활>은 1899년 3월부터 12월까지 주간지 『니버』에 연재되었다. 톨스토이 나이 71세 때의 작품이다. 이 작품의 삽화를 그린 사람은 소설가 파스테르나크의 부친 레오니드 파스테르나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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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집필실- 이층에서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모서리에 있었다. 도어를 열자 창밖으로 숲이 보이는 자그마한 방이었다. 창쪽을 향해 방의 왼편 벽에 바투 붙인 자그마한, 투박한 모양새의 목제 테이블, 그 앞에 다리가 짧은 목제 의자가 있었다. 만년의 톨스토이는 시력이 떨어지면서 테이블과 눈과의 거리를 좁히고자 의자 다리를 잘라냈다. 안경알의 도수를 높이는 대신 의자의 다리를 잘라낸 톨스토이, 작가란 그렇게 엉뚱한 발상을 밀고 나가는 사람들인가.
방안 오른 편 안쪽에 침대 겸용의 검은 소파와, 안락의자 5개가 자리 잡고 있었다. 자그마한 방안, 자그마한 목제 테이블 위에서 위대한 작품 <부활>이 태어났다.
<부활>은 네프류도프와 카츄샤의 뼈를 깎는 반성을 통한 부활에 초점을 맞추면서 동시에 당시 러시아의 정치 사회 교육 종교 법률 등 제반 분야에 걸친 모순과 불합리를 지적하고 비판, 고발한 작품이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처음 게제 될 당시 검열에 걸려 550여자가 삭제되었다. 러시아 정교회는 1901년, 교회를 비판했다하여 톨스토이를 파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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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실에서 나와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벽 쪽에 자전거 한 대가 전시되어 있었다. 톨스토이가 손수 조립한 자전거였다. 놀라운 것은 톨스토이가 처음 자전거를 배워서 즐겨 타기 시작한 때의 나이가 67세였다는 것이다. 새로운 것에 대한 거인의 호기심은 망설임이 없었다. 톨스토이가 직접 만든 가죽장화, 직접 직조해서 만든 가죽잠바도 전시되고 있었다. 톨스토이는 생필품 대부분을 손수 만들어서 사용했다.
톨스토이가 살던 집안을 한 바퀴 둘러보고 바깥으로 나왔다. 문득, 톨스토이의 육필원고를 보지 못했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가이드와 함께 다시 집안으로 들어가 관리인에게 육필원고를 보여 달라고 했다. 대부분의 톨스토이 육필원고는 톨스토이 박물관에 가 있다고 했다.
관리인은 별도로 그가 보관하고 있던 엽서 2배 정도 크기의 종이에 기록된 톨스토이의 육필을 꺼내서 보여주었다. 깨알보다도 작은 글씨들, 그나마 포개 써진 글씨들. 그 말미에 1889. 12. 26이란 날짜가 기록되어 있었다.
당시 상류사회의 풍조가 개성적인 필체를 고집해서 그렇게 고약한 필체가 유행이었다고는 해도, 톨스토이의 그것은 심각했다. 아내 소피아만이 그 글씨체를 알아보고 남편의 초고를 정서해서 출판사로 보냈다는 말에 실감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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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 빛 건물에서 나와 정원 깊숙이 숲 사이로 들어갔다. 눈앞에 높이 20미터 지름 40미터 정도의 나지막한 언덕- 톨스토이가 직접 흙을 퍼 날라서 쌓았다는 동산이 있었다. 동산으로 오르는 길은 나선형으로 위를 향하고 있었다. 동산에 오르자 무성한 숲 사이로 톨스토이의 짙은 오렌지 빛 목재 2층집이 보였다.
톨스토이가 만들어 놓은 긴 통나무 의자에 앉아 보았다.
사회의 불평등에 분노하면서 자신의 재산을 내놓고 농노들을 해방 시켜 토지를 나누어 줄 것을 계획하던 곳, 아내와 가족들과의 불화 속에서 끓어오르는 섭섭함과 슬픔을 홀로 가라앉히던 곳, <부활>을 집필하면서 때로 사색에 잠기던 곳, 톨스토이가 생명을 불어넣어 그려나가던 네프류도프와 카추샤, 톨스토이가 보았던 두 젊은 연인의 환한 웃음, 그들이 들었던 부활절 교회당의 종소리가…… 내 귀에도 들려왔다.
MP3의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거기에 녹음해 두었던 톨스토이의 목소리를 다시 들었다.
“ 자 나의 친구들이여. 항상 저에게 오십시오, 저는 항상 당신들을 반길 것이고 항상 당신들을 좋아할 것입니다. 내가 당신들에게 바라는 것은, 공부하십시오. 언제나 공부를 하게 되면 미래가 밝아질 것입니다. 항상 공부 하십시오. 그리고 안녕히 계십시오. 나는 당신들을 사랑 합니다”
* 본 원고는 2010년 작성한 것입니다.
* 톨스토이의 육성은 1908년, 에디슨이 보내온 축음기에 녹음된 것을 다시 카세트 테이프에 옮겨 담은 까닭에 음질이
고르지 못합니다.
*톨스토이의 생애와 문학에 대한 많은 부분은 정창범 교수의 『톨스토이』(건국대출판부, 1996)를 참고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