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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7월 5일 '새만금~신시도~무녀도' 부분개통.
바닷길을 자전거로 라이딩 할 수 있게 된.,고군산군도.
총 8.8km 중 4.4km 개통으로 50분 단축된 '군산 ~신시도'
과거, 뱃길로 1시간 30분 거리였지만
현재, 승용차로 40분 거리로 단축된 것,
2018년까지 '장자도 ~ 선유도' 구간까지 완공 예정이다.
미개통 구간까지 연결되면.,보다 활성화 될 고군산군도.
전북 고군산군도 연결도로가 부분개통된 이후에
육로를 통해 섬에 방문한 관광객들이 밀물에 고립.
조난사고가 발생하고 있어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군산해양경비안전서는 2017년 1월 16일 오후 2시31분께
군산시 옥도면 무녀도 앞 '쥐똥섬' 인근 김모씨(45·여·인천) 등
4명이 밀물에 고립돼 출동한 해경과 구조지원 어선(안성호)이 구조.
김씨 등 일행 4명은 육로를 통해 무녀도에 방문했다가
썰물 때 드러난 해변 길에서 관광 중 밀물이 들어오자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고립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앞서 지난 달 12일에도 정모씨(58·경기도 군포시) 등
2명이 같은 자리에서 밀물에 고립되는 등 육로를 통해
방문한 고군산군도에서 최근 고립사고가 빈번하게 발생.
해경은 물길이 오가는 위치를 알지 못하고 들뜬 마음에
간만의 차가 큰 서해 특성을 잊고 겪게되는 사고로 간주.
"낯선 섬을 방문할 경우 당일 물때를 확인해 줄 것"을 당부.
군산항.,현재 & 1899년.
군산시(群山市)
전북 북서부 해안에 있는.,군산시(680.76 km²)
'금강 & 만경강' 하구 군산반도 & 고군산군도 등.
금강과 만경강 하구 넓은 간척지에 펼쳐진 충적평야.
1899년 군산항이 개항되면서 서해안 항구도시로 성장.
2008년 새만금군산경제자유구역청이 개청하였다.
시청 소재지는 조촌동이고, 행정구역은 1읍 10면 16동.
가구 114,155 (2015년 9월), 인구 278,505 명 (2015년 9월)
동쪽으로는 전북 익산시,
서쪽으로는 서해,
남쪽으로는 전북 김제시,
북쪽으로는 금강 경계로
서천군과 접하고 있다.
'금강 & 만경강' 하구로 둘러싸인 군산반도와
서해 고군산군도 도서지역들로 이루어져 있다.
군산 부근은 차령산맥의 침강으로 고군산군도와
많은 도서군이 흩어져 매우 복잡한 해안을 이뤘으나,
금강의 조수작용으로 토사가 퇴적되어 옥구반도가 형성.
각각 북부와 남부를 지나 서해로 유입되며
넓은 평야지대가 발달한 곡창지대.,옥구군.
1995년 1월 옥구군은 군산시에 통합 후 폐지.
'옥구반도' 옛 지명은 '군산반도'로 바뀌었다.
바다로 돌출된 곡창지대 옛 옥구군 옥구반도.
현재, 군산시 옥구읍, 옥도면, 회현면, 옥산면,
옥서면, 개정면, 대야면, 성산면, 임피면, 나포면,
서수면 등 1개읍 10개면 73개 동리가 이 지역에 해당.
옥구군이 위치했던 지역은
옛 옥구현과 옛 임피현이 합해
이뤄진 옥구반도는 옛부터 곡창지대.
이곳 주민들은 군산반도를
지금도 "옥구반도"라 부른다.
1487년 군산진 옆에 조창인 군산창이 설치되어
전주 등 7개 고을의 조세를 수납하는 조운 중심지.
조선시대 군산은 전라도 호남평야 중심지.,옥구현.
금강·만경강 양하천의 충적토(沖積土)에 덮여 있어
구릉 기복은 있으나 대평야로 전라도 중요 곡창지대.
시내의 낮은 도상(島狀) 구릉지는 섬이었던 부분이다.
그러나, 시가 정리로 인하여 대부분이 평탄화되고
시 서남단과 시·군계 부근에 다소 기복이 있을 정도.
지질은 대부분 결정편암계, 해안선 굴곡이 완만하고
해안선 부근에 해발200m 이상인 산들이 산재해 있다.
섬은 63개가 있으며, 이중 유인도가 16개, 무인도가 47개.
해안선은 363.9km.
연평균 강수량 1202mm,
일일 최대 강수량은 261.1㎜
(기록상으로는.,1979년 8월 5일),
1시간 최대 강수량은 59.8㎜
기록상으로는.,1975년 9월 20일.
연평균 기온은 12.8℃,
일일 최고기온은 36.9℃
기록상으로.,1994년 7월 24일.
일일 최저기온 -14.5℃(1971년 1월 6일),
연평균 풍속 4.1㎧로 2월 ~ 4월에 북서풍이 강하게 불고,
해안지역이라 안개가 자주 발생, 해무로 연간 평균 41일.
겨울 대륙성 고기압 확장시 돌풍현상과 소나기성 눈. 폭설.
서해바다와 접해있어 해양성 기후특성을 보이고 있다
군산시 행정 구역은 1읍 10면 16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읍·면 지역을 제외한 군산시 면적은 33.11 ㎢
일제시대 당시 미곡수출항으로 번성하였으나,
1960년대 이후 산업화시기 발전에 뒤쳐지게 되어
1차산업, 식품공업 위주 미미한 산업구조를 갖고있다.
1990년대 이후 중국의 경제성장과 더불어
중공업 위주의 2차산업이 주를 이루고 있다.
현대중공업· 한국GM· 두산인프라코어·타타대우
·OCI 등 대규모의 중공업 관련 공장이 가동 중이다.
2018년 완공 목표로 건설중인 새만금 산업단지에
OCI와 삼성이 신재생에너지 산업에 투자를 진행·계획.
호남평야 중심을 이루는 곳으로 전형적인 쌀농사 지역.
주요 농산물은 쌀·나맥 등이다.
서해 호어장에 임하여 어업 성행.
성어기에는 목포 등 남해안에서 조기떼를 따라
올라온 고깃배들이 어청도 근방에서 고기를 잡아
대부분 군산으로 집결하여 어시장은 성황을 이룬다.
고군산군도· 동중국해 등 연근해에서
조기·새우·삼치·홍어·갈치 등이 잡히고,
조개류· 미역· 김 등의 양식업도 성행하며,
옥구읍·회현면·옥서면 해안지대에 염전 개발.
특산물로 가물치, 마른꽃새우, 냉동대하,
멸치액젓, 물외장아찌, 흰찹쌀, 보리쌀 등.
고군산군도(古群山群島)는 군산시 옥도면이 관할.
무녀도, 선유도, 신시도 등 유인도12, 무인도 46개.
몇몇 섬은 새만금 방조제 및 연도교로 이어져 있다.
<히로쓰 가옥>
근대사 영화 촬영지로 유명한., 신흥동 일본식 가옥.
일제강점기 군산 포목상 히로쓰가 건축한 2층 목조가옥.
'2014년 영화 타짜 배경무대로 사용되어 더욱 유명해졌다.
<근대 박물관, 근대 건축관, 근대 미술관>
군산시 근대 박물관, 근대 미술관, 근대 건축관은
자녀 역사체험학습장으로 부모들에게 인기가 높다.
근대 박물관에서는 일제 강점기 역사물 연극도 진행.
<은파 호수공원>
본래, 농업용 저수지 중심으로
인근 작은 산들을 포함한 약 2,6km².
1985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된.,호수공원.
순환도로가 완공되어 누구나 자동차를 타고
'아흔아홉 구비' 은파 주변을 구경할 수 있다.
<이성당빵집>
1920년부터 전통을
이어온., 빵집이다.
이성당(李盛堂)은 군산시 중앙로 1가에 위치.
일본인이 '이즈모야' 라는 화과자점으로 영업.
1945년, 해방 후, 한국인이 현재 상호로 바꿨다.
국내 있는 제과점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
서울특별시 서초동 '햇쌀마루' 분점을 운영 중.
일본어 "빵"의 어원은 포루투칼어 '팡(pao)'에서 유래.
일본 개화기 조총을 전수한.,포루투칼 무역상인들 흔적.
임진왜란 때 조선 백성들을 서양에 판 포루투칼 노예상인들.
그후, 일본은 극악무도한 그들을 추방하고
네델란드 무역상들을 맞이하여 개화기를 연다.
일본에 해양정책, 서구문명을 전수한.,네델란드.
네델란드인들이 전수한 빵은.,"카스테라".
그후, 일본이 더욱 발전시켜 만든.,빵이다.
구한 말, 개화기, 고종이 좋아했던.,카스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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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사>
일본식 사찰로 아직도 기능을 유지하는 유일한 곳.
여담으로 100년에 한번씩 피는 토란꽃이 있다는 곳.
1909년 일본인 조동종 승려 금강선사(錦江禪師) 개창.
일본불교는 1877년 부산 개항과 함께
일본정부 요청에 의해 들어오기 시작.
1904년 군산에도 포교소를 개설하였다.
1911년 조선총독부는 일본불교 포교를 위한 사찰령 발령.
일본인 승려 우치다(內田佛觀)가 '금강사' 포교소를 개설.
1913년 현재 위치에 사찰을 지었고, 1932년 대웅전을 건축.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사찰.,금강사.
'1941~1945' 태평양전쟁 때.,긍강사.
1955년 승려 남곡이 동국사로 개칭,
1970년 대한불교 조계종 선운사 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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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은 대외 수출항으로써 발달하였기 때문에
배후지와의 육로 교통이 일찍부터 발달하였으며
특히 호남고속도로가 전주와 익산 사이를 달리고
전주∼군산 간 도로 확장으로 교통이 더 편리해졌다.
철도는 군산선이 2008년 1월 1일 장항선 편입
장항-군산 간 철길이 단선으로나마 이어지면서
새마을, 무궁화호 '익산, 대천, 천안, 서울' 운행.
새마을호 왕복 8회, 무궁화호 왕복 9회.
군산항은 국내 항구와 중국과도 연락되고
군산공항에서는 제주 노선이 운행되고 있다.
군산공항은 연 263천 여행객, 물동량은 6,570톤.
군산 외항은 무역물자, 내항은 황해 도서와 연결
군산항은 토사의 퇴적이 심하여
1926년부터 호안축조(護岸築造)와
도수제(導水堤) 축조공사를 행하였다.
그래도 토사의 퇴적으로 대형선박의 출입이 불편
서남방 8㎞에 1 2만t급 선박용 외항계획 공사 완료.
군산항은 일제강점기에 쌀 수출항으로 성장한 이후
전라북도의 공업발전 부진으로 해운 운송실적이 미미.
1990년대에 들어 수입을 중심으로 물동량이 크게 증가.
1992년 전년 3,353 t에 비해서 633만 6594 t., 운송 실적.
군산외항은 최대 2만t급 선박 12척이
동시에 머무를 수 있게 건설되었고,
자동차 전용부두 등 4개 부두가 있다.
현재 옥도면에 비응 관광어항이 신설
중국 옌타이(烟台)와 칭다오(靑島) 직항.
10만 톤급 선박 60척 접안할 새만금 신항만.
도로는 서해안고속도로가 지나가며,
새만금 - 포항간 고속도로가 건설 중이고
금강하굿둑을 통해 서천군으로 갈 수 있다.
철도 - 장항선 : 군산역, 대야역, 임피역
군산시 시내버스
군산고속버스터미널
군산시외버스터미널
대야공용버스터미널
중국의 석도 ↔ 군산시 간
국제여객선이 운항 중이다
고속도로 : 서해안고속도로 (군산 나들목, 동군산 나들목)
국도 : 4호선, 21호선, 26호선, 27호, 29호선, 국도 제77호선
지방도 : 706호선, 709호선, 711호선, 718호선, 지방도 제744호선
드라마
빙점(KBS2,1990년)
파도 (SBS,1999년)
불꽃놀이 (MBC,2006년)
고맙습니다 (MBC,2007년)
엄마가 뿔났다 (KBS2,2008년)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 (MBC,2010년)
제빵왕 김탁구 (MBC,2010년)
빛과 그림자 (MBC,2011)
자매도시
대한민국 경상북도 김천시
대한민국 대구광역시 동구
대한민국 전라남도 여수시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강남구
대한민국 충청북도 제천시
대한민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동작구
미국 워싱턴 주 터코마
중화인민공화국 산둥성 옌타이
인도 마하라슈트라 주 핌프리친치와드
인도 자르칸드 주 잠셰드푸르
캐나다 온타리오 주 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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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군산군도.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고군산 군도.
야미도, 신시도, 선유도, 방축도, 무녀도,
장자도, 명도, 말도 등 유인도16. 무인도 52.
“산이 무리 지어 있다”군산(群山).,고군산군도.
과거, 서해안 해상 물류 유통의 거점지역.,선유도.
새만금 사업 완공 후, 국제적 관광지역으로 발돋움 중.
‘고군산 군도’ 지명은
중심 선유도에서 유래.
선유도였던 군산도가 고군산 군도로 바뀐 이유는
'고려 말~조선 초' 왜구의 침략이 극에 달했던 시절
조선 태조가 금강과 만경강을 따라.,침입하는 왜구를
방어하고자 수군부대 만호영을 군산도(선유도)에 설치.
그런데, 군산도 만호영은 처음에 효과를 보았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왜구가 섬을 우회해 내륙을 공격.
세종 때 군산도 수군을 금강 입구인 진포(군산)로 이전.
수군부대 이전때 진포가 군산진이 되고
군산도는 옛 古를 붙여 고군산으로 개칭.
이는 곧, 조선 수군이 해체되었음을 의미.
고군산 지명은
'일제 강점기를
의미하는.,지명.
이후, 고군산은 중심 선유도 만이 아닌
인근 전체 섬들을 지칭하는 명칭이 된 것.
'고군산군도'는 일제강점기 잔재 지명이다.
'고군산군도 중심.,'선유도 & 무녀도'.
진봉반도 남서쪽 32㎞.,선유도(仙遊島).
‘고군산군도 8경’ 중심부를 이루는 곳이다.
명사십리, 망주폭포, 평사낙안 등.,‘선유 8경’.
'무당이 장구를 치는 모양의 섬' 무녀도(巫女島).
그 옆에 '장구 모양' 장구도 & 술잔처럼 생긴 섬 하나.
무당이 술상을 차려놓고, 춤을 추는 형상 같아.,무녀도.
그러나, 무녀도 옛 지명은
'바쁘게 몸 놀려서 서둘지 않으면
먹고살기 힘든 섬'이란 뜻 지명.,'서들이'.
무녀도는 근해 멸치, 새우 등을 잡고 굴, 김을 양식.
김은 가을철 추석 무렵부터 포자를 발에 붙여서 양식.
포자를 뿌린 후 보름이 지나면 양식장의 김 채취가 가능.
'굴, 김' 양식장에서 본격 채취는 매년
11월 경부터 이듬해 3월까지 계속 일한다.
겨우내 고기잡고 그물손질하고.,굴, 김 양식.
무녀도 당산에서 음력 정월 길일에 당제(堂祭).
현재 군산군도에서 무녀도에만 유일한 초분 1기.
40년전 남자분의 초분인데 본래 매장을 하였으나
집안 우환이 끊이질 않아 초분으로 모셨다고 한다.
무녀봉 동쪽 2부 능선에 위치한 초분은 2년에 한번씩
이엉을 바꾸어주며 정성껏 관리하여 보존 상태가 양호.
1936년 '중앙' 5월호 발표 작., 김동리 무녀도(巫女圖)
'무속과 개신교' 대립을 통한 무녀의 운명을 그린.,소설.
옛날이나 지금이나 토속적인 민간신앙이 강한.,도서지역.
원래, 당집이 있었던.,무녀도(巫女島).
물고기밥이 된 영혼의 한을 풀어주던.,섬.
'먹고 살기 힘든 섬'이라 무녀가 떠났던걸까?
무녀도는 여름철 뙤약볕 염전에서 소금을 생산.
풍랑 철에도 근해 어장에서 근해 멸치, 새우잡이.
봄에서 가을까지 틈틈히 농사짓기 바쁜 섬 주민들.
섬 주민들은 일년 내내 하루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을 해도 먹고 살기 힘들었다는데
조선 말, 부정부패 관리들은 신선놀음 한 곳.
구한 말, 부정부패 관리 흔적인.,'선유 8경'.
조선시대.,'수군 주둔지 & 조운선 항로 기착지'
'신선놀음' 선유도 & '춤추는 여인의 섬' 무녀도.
선유8경 '명사십리' 선유도해수욕장.
군산의 선유도는 '선녀가 누워 있는 자태'.
조선의 국운이 기울었음을 의미하는.,지명.
조선시대 구한 말, 일제강점기까지도
부정부패 관리 및 일제의 수탈에 시달린
섬 주민들에게 삶의 터전이던.,고군산군도.
새만금방조제가 건설된 이후부터는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도서 주민들도 많다.
도시에게는 한없이 아름답기만 한.,고군산반도.
환태평양 지진대 화산폭팔, 해일 영향권.
아득한 옛날에는 고군산반도에 속한 육지.
세월이 흘러 고군산군도로 변한.,도서지역.
옛 섬주민들의 애환이 가득한 곳이며
수많은 전설을 품고 있는.,고군산군도.
...............'고군산군도' 배로 가는 길.............
군산 외항 여객 터미널에서 선유도 행 배를 타고
신시도 임시선착장에서 고군산도행 배를 갈아탄다.
여객선은 금강의 두 수문장이라 할 수 있는
군산의 수시탑과 장항의 LG금속 굴뚝이 마주 보는
서해에 들어선 후 군산을 뒷전에 두고 배의 우측으로
첫 번째 섬이 대죽도이고 바로 뒤에 나타나는 섬이 유부도.
천연기념물 검은머리물떼새 서식지.,유부도.
군장 산업 단지 공사로 육지가 될 예정이다.
유부도를 지나 좌측으로 10년 전 섬이었던
내초도, 오식도, 노래섬, 멍애섬, 띠섬, 비응도 등.
군장 산업 단지 공사로 육지가 된 모습으로 이어져있다.
새만금 방조제를 옆으로 끼고 달리다
'선유도선착장'에 도착하면.,고군산도.
...................................................
옛날에 선비와 부인이 아들 하나 두고 살던.,장자도.
어느해, 남편이 한양으로 과거를 보기 위하여 떠나자
부인은 매일 산에 올라 남편이 금의환향 하길 기다렸다.
하루는 남편이 장원급제 후, 돌아온다는 소식.
부인은 아들은 등에 업은채 산마르로 달려 올라가
남편이 타고오는 배가 속히 오길 기다리고 있었단다.
드디어 학수고대하던 남편이 나타났지만
남편은 등과도 못하고 새부인 소실까지 맞아
아들까지 낳아서 장자도 본가로 데리고 왔던 것.
그것을 보고 크게 상심하여 돌아선 순간,
등에 업고 있던 아기가 힘을 쓰는 바람에
그자리에서 선채로 돌로 변했다고 전한다.
지금도 '장자 할매바위' 위에는
새끼줄, 흰천이 가끔 둘러져있다.
여기에 소원을 빌면, '아들을 낳거나
소원성취 한다.'는 민간신앙 때문이다.
장자할매바위 인근에 폐가로 버려진.,집.
옛날에는 당집이었을까?
장자 할매바위 집터일까?
장자할매바위에는 또 다른 전절이 전한다.
남편 과거급제 뒷바라지에 정성을 쏟은.,부인.
"이번에 낙방하면 과거는 그만 포기해야 할까봐."
그러한, 남편을 달래 한양으로 과거 보러가게 한 후
남편이 속히 금의환향 하기만을 밤낮없이 기도한.,부인.
한양으로 올라간 남편은 과거에 낙방한 후, 오갈데가 없자
사대부집 외동딸의 글선생으로 들어가 데릴사위가 되었단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후에야, 과거급제한 남편이
소실을 대동하고 본가에 들어오자, 그 모습을 본 부인.
'그 자리에서 그만 돌이 되었다.'는.,장자 할매바위 전설.
일설에는 부인이 술상까지 차려들고
남편을 마중나갔는데 소실과 함께 오는
모습을 보고 서운한 마음에 그 자리에서
주저앉은 채 그만 돌이 되었다고도 전한다.
장자도에서 10리쯤 뭍에서 가까운.,횡경도.
능선 한가운데 송곳처럼 솟은.,횡경 할배바위.
선유도 옆 장자도 할매바위와 한쌍을 이루는.,전설.
할배바위는 망건을 쓴 채 먼 바다를 바라보는 모습.
횡경도에서 보면, 장자 할매바위는 아이를 업은 형상.
소실을 대동한채 배를 타고 오는 남편에 실망한 부인이
아이와 함께 돌로 변하자 남편은 부인에게 미안한 마음뿐.
남편은 차마 다가갈 수가 없었기에 배에서 내려 횡경도에 올라
먼발치로 바라보다가 반대편으로 돌아앉은채 돌이 되었다고 한다.
횡경도에서 8m 높이로 우뚝 솟은 선박의 길잡이., 할배 바위.
장자도 할매바위와는 한쌍이라 장자 할배바위라고 부른단다.
또한, 거북이가 목을 빼고 있는듯한 거북 바위는 일명 자라여.
횡경도는 고군산 군도 수산업의 중심지이며
조기·삼치·갈치·전광어 등 난해성 어종이 많다.
거북바위 중심으로 낚시 관광객들이 모여드는 곳.
선유도를 중심으로 한 섬 중에서 유일한 무인도.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에 있는.,횡경도(橫境島).
'대동여지도'에 적혀있는 섬의 이름은.,횡건(橫建).
군산항은 하구에 있어 강과 바다의 혼합 지역.
죽도·개야도·유부도 등이 방파제 역할을 하지만,
유부도 간석지가 있어, 북쪽과 남쪽 수도로 나뉜다.
현재 길이 18㎞ 남쪽 수도가 항로로 더 빈번히 이용.
밀물, 썰물의 조차(潮差)는
사리때 5.4m, 조금때 2.6m.
조류(潮流)는 군산항 입구에서
3~4노트(5.4~7.2㎞/시간)이다.
바다에 접한 북서부는 겨울에 북서 계절풍 영향권
남쪽은 육지가 돌출해 파랑의 영향이 비교적 작다.
썰물때 파랑이 없고,
밀물때 파랑이 커지며
항만은 풍속 41.3m/초,
파고 2.2m에 견디도록 설계.
고군산 군도 경제는 어업, 관광수익으로 운영.
김, 미역 등의 양식 어장이 큰 규모를 차지하며
주민들은 양식업과 함께 어선을 이용한 계절 어업.
1월에는 조기와 박대,
2월에는 광어와 쭈꾸미,
3월에는 꽃게, 도다리,
4월에는 장대,
5월에는 꽃게,
7월에는 서대,
8월에는 조기, 꽃게
9월에는 조기, 갈치, 박대,
11월에는 농어 등을 잡으며
멸치 잡이, 멸치젓갈, 액젖 등
고군산군도 주민의 경제수입원.
새만금 방조제 완료 이후
선유도는 관광 명소로 부각.
신시도는 어촌 체험마을 조성.
2013년 선유도해수욕장(7.5~8.18) 방문객.,6만494명.
지난해 같은 기간 5만3,545명보다 6,949명이 늘어난 것.
고군산 군도 미래는 새만금 방조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2015년 고군산군도 연결 도로가 완공되면
고군산군도는 군산 발전을 이끄는 성장 동력.
자연경관이 잘 보존된 관광명소가 될 수 있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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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수산업중심지
고군산 군도.,어전 어업.
'전통 어로 방법' 어전어법 중심지.,고군산군도.
어전(漁箭)이란 '정치어업(定置漁業)'전통 어로 방법.
간만의 차이를 이용하여 물고기를 함정에 빠뜨려 포획.
어전은 우리나라의 서해안과 남해안 지역에서 유독 발전.
그 이유는 이들 지역이 어전의 필수 조건을 갖춘 때문이다.
필수 조건이란 이 지역이 조수 간만의 차가 큰 지역이라는 점,
넓은 갯벌, 반도형 굴곡 해안선이라 어전어업 최상의 지역조건.
고군산군도 어전은 그 방법과 종류가 독특하여
조선시대 서해안 어전의 한 지류를 형성하였다.
어살(어전) 김홍도 作
죽방령.
어전(漁箭)은 기존에 정치어업(定置漁業).,전통 방법.
어량(魚梁), 어기(漁基), 어장(魚腸), 방렴(防簾) 등 별칭.
강변이나 해안에 고정 구조물을 만들어 물고기를 잡는 어법.
어전의 큰 특징은 밀물과 썰물을 이용한다는 점이다.
즉, 밀물때 들어온 물고기를 함정에 빠뜨려 잡는 어법.
고군산군도는 육지의 토사 유입이 많아 수심이 얕고
간만의 차가 심하여 간조 시 광대한 갯벌 지대가 형성
해안선이 복잡하고 도서, 하천이 많아 수산물의 은신처.
많은 어족의 산란장과 서식장으로 어전 어업이 성행한 곳.
고군산군도 어전 어업에 대한, 조선 시대 기록을 보면
‘호남에 어살이 3분되어 있으니 울타리 길이가 600파에서
최소 300파에 이르며 어살에 부과하는 세율이 가장 높은 곳.
위도가 그 다음,
영광, 무안, 만경이 그 다음,
무장, 홍덕, 고부, 옥구가 그 다음’
일제 강점기 주목망(柱木網), 홍선망(引船網),
어전, 중선망(中船網) 등은 꾸준히 행해졌지만
조선 총독부에서 어업 생산량 증대 방안 일환으로
일본에서 유입된 어구 어법의 보급을 꾸준하게 추진.
그 결과 점진적으로 일본의 어로 방법이 보편화 되었다.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어세 납부 실적.
개항 이후 전라, 충청 양 지역의 경우를 보면,
충청도 지역보다는 전라도 지역의 어세가 월등.
그중 고군산 군도 인접 지역의 어세가 비교적 많다.
일제 강점기 해세 규모는
삼남 지방(三南地方) 중에서
충청도가 적고 전라도가 많았다.
그 해세 규모는 『균역 해세』 실시 당시
즉 140년 전에 비해서는 감소된 것이었으니
고군산군도 어전의 규모가 컸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호황을 누리던 서해안 수산업과 어전은
해방 후, 선박어업 발달과 어족자원 부족으로 쇠퇴.
1970년대에는 전통 어전어법이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신시도..............................
교육기관으로는 신시도초등학교가 있다.
2010년 인구는 373(남 218, 여 167), 세대수 144.
취락지역은 섬의 남서쪽 만입부에 집중되어 있다.
토지이용 현황은 논 0.10㎢, 밭 0.09㎢, 임야 3.85㎢.
주요 농작물로는 쌀·고구마·양파 등이 생산된다.
멸치·바지락·주꾸미 등이 어획되며 김 양식업 활발.
선유8경 등을 조망할 새만금 전망대가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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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시도는 고려 초, 곽씨노인 설화가 전해온다.
부안땅 하서면 장신포 어촌에 곽씨(郭氏)노인이
과부며느리와 손자 하나를 데리고 단란하게 살았다.
그 마을 부근에는 자그마한 고을이 셋이 있었다.
어느날 한 도사가 찾아와 그 노인에게 일러주는 말.
"뒷산 장군석으로 깍아 세운 돌사람 코피가 흐르는 날.
부근 일대가 바다가 될 것이니 주의하여 살펴보고 있다가
코피가 흐르면 지체없이 멀리 타관으로 피난가야 안전할 것."
그 도사는 사라진 후 노인은 손자를 등에 없고
매일 장군석 코피가 흐르는지 살피고만 있어서
며느리는 어리석고 우습다고 생각되던 어느 날에
시아버지 몰래 장군석 코에 빨간 물감을 칠하였다.
이것을 본 노인은
“바로 그때가 왔다.”
피난가길 재촉하였다.
며느리는 자기가 한일이라고
웃기만 하고 떠나기를 거부하여
노인은 손자만 데리고 멀리 떠났다.
그 무렵, 노인이 거주하던 마을은 물론
부근에 3 고을까지 망망대해로 변했으며
이때 바다에서 솟아오른 섬들이.,고군산군도.
그 노인이 그 땅에 영주하면서
그후, '곽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설화가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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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씨노인의 설화 속에서
시대적인 배경은.,고려 초.
'현풍 곽씨' 시조.,곽경(1568~1633).
혹, 설화 시대적배경이 조선시대 아닐까?
조선왕조실록에 1,900 여건.,지진 관련기록들.
.
1518년(중종 13) 5월 15일 지진은 매우 심각.
유시(酉時:오후 6시경) 세차례 지진이 있었다.
그 소리가 마치 성난 우레 소리처럼 커서
人馬가 모두 피하고, 담장과 집들이 무너지고,
성첩(城堞)이 떨어져, 도성 안 사람들이 모두 놀라
당황하여 안색을 잃고 어찌할 바를 몰라 밤새도록 노숙.
제 집으로 들어가지도 못하니,
노인들은 "옛날에 없던 일이다."
조선팔도 모두 다 마찬가지였다.
'1392년(태조 1)~1863년(철종15)'까지 472년간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지진 건수는 무려 1,900 건
1년에 4회 꼴로 삼국시대나 고려시대보다 빈도가 높다.
이것은 조선시대 지진 발생이 증가했다기보다는
지진 관측이 정밀해지고 보고 체계가 확대된 때문.
조선시대 천문현상과 지변을 관측하는 관청.,관상감.
천재지변 사항을 정리하여 남긴 기록.,관상감일기.
실록을 편찬할 때는 사관들이 쓴 사초(史草)와 함께
'각 관청의 업무일지'시정기를 참고하였는데, 시정기인
관상감일기에 기록된 지진관련 내용이 실록에 포함된 것.
상이 이르기를, “요즈음 한재가 심한데
이제 또 지진이 있으니 매우 놀라운 일이다.
재앙은 일어나는 것은 반드시 연유가 있는 것,
내가 어둡고 미련해 그 연유를 알지 못하겠노라.”
남곤이 아뢰기를, “신이 처음 들을 때에
심신이 놀랐다가 한참 만에 가라앉았으니,
놀랍고 두려우실 것은 말할 것이 없습니다.
요즘 경상·충청 두 도(道)의 서장(書狀)을 보니
모두 지진이 있었다고 보고하였는데, 서울의 지진이
이렇게 심한 것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옛날 사서를 보면
한나라 때 농서(隴西)에 지진이 일어나 1만인이 깔려 죽은 일.
이것이 늘 큰 변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 지진도 가옥을 무너뜨리지 않았습니까?
땅이 고요함을 지키지 못하고 진동하니 큰 변괴.
상께서 즉위하신 뒤로 사냥이나 토목 공사나
성색(聲色)에 빠진 일이 없고, 아랫사람이 또한
성의(聖意)를 받들고 국사에 마음과 힘을 다하여
‘태평 시대’라 할 수 없어도 ‘소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재변이 하루하루 더 심각하니,
신은 고금과 학문에 널리 통하지 못하여
재변이 일어나는 원인을 알 수 없습니다.”
상이 이르기를, “오늘의 변괴는 더욱 놀랍고 두렵다.
항상 사람을 쓰는 데 잘못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있는데,
친정이 겨우 끝나자 곧 큰 변이 일어났고 또 오늘의 친정은
보통 때 친정과 다른 재변이니 이 때문에 더욱 두려운 것이다.”
上曰 近者旱災已甚 今又地震,
甚可驚焉 災不虛生 必有所召.
予之暗昧 罔知厥由 南袞曰
“臣初聞之 心神飛越 久之乃定 況上意驚懼 固不可言
近見慶尙忠淸二道書狀 皆報以地震 不意京師地震 若此之甚.
竊觀古史 漢時隴西地震 萬餘人壓死 常以爲大變.
今日之地震 無奈亦有傾毁家舍乎?
夫地 靜物 不能守靜而震動 爲變莫大焉.
自上卽位之後 無遊佃土木聲色之失 在下之承奉聖意
亦皆盡心國事 雖不可謂太平 亦可謂少康 而災變之來
日深一日 臣非博通 未知致災之根本也
上曰 今日之變 尤爲惕懼 常恐用人失當
而親政纔畢 仍致大變 且今日之親政
又非如尋常之親政 而致變如此
尤爲惕懼者此也
얼마 있다가
또 처음과 같이
지진이 크게 일어나
전우(殿宇)가 흔들렸다.
상이 앉아 있는 용상은
마치 사람의 손으로 밀고
당기는 것처럼 흔들렸다.
첫번부터 이때까지 무릇 세 차례 지진이 있었는데
그 여세가 그대로 남아 있다가 한참만에야 가라앉았다.
이때 부름을 받은 대신들은
집이 먼 사람도 있고 가까운 사람도 있어,
도착하는 시각이 각각 선후(先後)가 있었으나
오는 대로 곧 입시하였는데. 영의정 정광필이 아뢰길,
“지진은 전에도 있었지마는
오늘처럼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이것은 신 등이 재직하여 해야 할 일을
모르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것입니다.”
未幾 地又大震如初 殿宇掀振
上之所御龍床 如人以手
或引或推而掀撼 自初至此
凡三震 而其餘氣未絶
俄而復定 時承召大臣等
以家遠近 來有先後
而來卽入侍
領議政鄭光弼曰
地震前亦有之
然未有如今日之甚者
此臣輩在職 未知所爲而若是也
조광조가 신진 사림파의 핵심으로 등장하여
개혁정치가 추진되던 1518년(중종 13) 5월 15일.
실록에서는 당시 지진 발생이 매우 심각했음을 기록.
조정에서는 긴급대책회의.
중종은 즉각 대신들을 소집.
예조판서 남곤 등이 입시하자 중종은
지진 발생의 원인을 대신들에게 물었다.
두번째 글은 중종과 신하들의 긴급회의 대화.
위의 기록에서 중국 역대의 대지진을 언급한 것이다.
지진 발생 원인을 정치에서 찾으려 한 점이 주목된다.
조선 '세종~연산군' 해상(무역)정책이 활발했던 시기.
중종 재위 때 명나라 압력으로 해금정책을 편.,전환 시기.
중종이 소집한 긴급대책회의 대화 기록이 이를 대변해준다.
곽씨노인의 설화에 비해
고군산군도 화산 폭팔에 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훗날, 임진왜란 중인 1594년 한양에 지진이 일어나자
선조는 왕세자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줄 뜻을 비쳤다.
선조는 지진의 원인을 자신의 부덕의 소치라고 생각한 것.
조선시대 한양의 지진 흔적들이 많은 곳은
북한산 인수봉 설교벽능선 아래.,골짜기 일대.
기원 전 소서노가 올라 도읍을 정했다는.,부아악.
2천년 역사의 '서울' 지진 흔적을
시대 별로 볼 수 있는.,설교벽 계곡.
세종 재위 때 관상감 '태양관측소'.,보현봉
세종의 어명으로 수양대군 일행이 올랐던 곳.
지금은 조선시대 지진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2011년 3월 11일 일본
진도 9의 강진과 쓰나미.
세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일본의 태평양 해역 인공섬 오키노도리시마.
근래에, 후지산 규모 해저 화산이 치솟은 해역.
1518년(중종 13) 5월 15일 지진은 매우 심각.
'현풍 곽씨'시조.,곽경(1568~1633).,그당시 설화.
고군산군도가 가라앉고 섬들이 솟아올랐다는.,내용.
1518년 고군산군도에 지진 해일이 일어난 후에도
곽경(1568~1633)이 노인일 때, 화산이 폭팔한 설화.
고군산군도 몇몇 섬은 생성시기가 조선시대인것 같다.
조선 중기에서 임진왜란 전후 아닐까?
'곽씨 노인' 설화의 고향., 신시도(新侍島)
'신시도 ~ 비응도' 지질조사가 필요한 구간.
.
.........고군산군도 해저유물.......
고군산 군도 일대 해저 유적으로는
십이동파도· 야미도· 비안도 해저 유적.
먼저 십이동파도는 두 차례의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도자기를 포함한 선체 등 8,743점 14편이 수습되었다.
야미도는 세 차례 발굴조사 실시.
발굴 조사 과정에서 수습된 유물은
청자류와 기타 유물을 포함해 4,867점.
마지막으로 비안도는 다섯 차례 조사를 실시.
청자와 목재류를 포함해 3,191점이 수습되었다.
십이동파도에서 수습된 청자류는
대접, 완, 접시, 뚜껑, 병 등이 있으며,
이 중 접시류와 대접의 출토양이 가장 많다.
청자류와 더불어 다량의 목제가 함께 확인되었는데
이러한 목제류는 청자 운반선의 부속구로 확인되었다.
야미도에서 인양된 청자는 대부분
조질 청자로 대접과 접시가 주종이다.
3차 발굴에서는 자기와 도기도 인양되고
선체편과 같은 목제류는 확인되지 않았다.
청자는 대부분 대접과 접시류이며
소량으로 청자 완과 잔이 확인되었다.
비안도에서 수습된 청자류 대접, 접시, 잔, 뚜껑,
발, 합 등.,긴급 탐사와 다섯 차례 발굴 조사를 통해
인양된 청자의 수량은 대접이 1,119점, 완 22점, 발 1점,
접시류 1,236점, 잔류 308점, 뚜껑 217점, 합 11점.,총 2,934점
십이동파도 수습 유물 중에는
선박의 부속구가 있는데 저판(底板),
만곡부 종통재(彎曲部縱通材), 선수재(船首材),
나무 못 등, 확인된 부속구를 토대로 배를 복원한 결과
전장 14m, 폭 5.5m 규모 고려 선박인 전통 한선(傳統韓船)
고군산 군도 일대에서 확인된 해저 유적은
그동안 베일에 가려있던 고려 시대 군산 지역의
해양 문화를 밝히는데 있어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특히, 십이동파도에서 수습된 선체편을 통해
고려 시대 한선(韓船)의 발전과정과 선제 구조를
비교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서 평가되어지고 있다.
또한. 청자 주변에서 완충재 등을 수습할 수 있었는데,
이를 통해 선적 방법과 포장 방법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청자 그릇을 포개 번조하며 서로 붙지 않도록
그릇 사이에 놓았던 내화도 비짐이 그대로 남아 있어
가마에서 꺼내어 바로 포장· 선적한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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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동파도는 행정 구역상 군산시 옥도면 연도리.
12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고 1960년대 초기까지는
사람이 살았지만 현재 무인도로, 군산항 서쪽으로 약 30㎞,
고군산 군도의 서쪽 끝 말도에서 약 26㎞.
섬의 동쪽으로 군산시, 북서쪽으로 어청도,
남동쪽으로 비안도, 서남쪽으로 서해가 있다.
곽씨노인의 설화 속에서
시대적인 배경은.,고려 초.
왕건이 고려를 개국할때 일까?
아니면, 그 이후일까?
고려 仁宗11년(1133년)에 송나라에서
다른 7명의 學士와 함께 고려조에 들어와
최고관직 門下侍中을 지내고, 金紫光祿大夫의
爵位와 포산군 封號를 받으시니 포산(현풍)곽씨 시조.
현풍 곽씨는 고려 인종 때 宋에서 귀화한 郭鏡을 시조.
청주 곽씨는 신라 헌강왕 때 侍中을 지낸 郭祥을 시조.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최근에 생성된 섬은
'비양도'로 비정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新增東國輿地勝覽)
“瑞山(서산)은 고려 목종 5년 6월에
산이 바다 한가운데에서 솟아나왔다.
산에 네 구멍이 뚫리고 용암이 솟아나와
닷새 만에 그쳤는데, 그 물이 모두 엉기어
기왓돌(瓦石)이 되었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
목종 10년에는 상서스러운 산이
바다 가운데 솟아나왔다.”라고 기록.
현재. 서산을 비양도에 비정하고 있다.
동경 126°14′, 북위 33°24′.,비양도.
한림읍 웅포리 해안에서 3㎞ 지점.
면적 0.59㎢, 해안선 길이는 3.15㎞.
신시도는 군산에서 서남쪽 22해리에 있는 섬.
섬 주변에 정치망 어업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고군산 군도 어전어업의 종류와 현황을 보면
개야도, 선유도, 신시도, 선유도, 장자도, 비안도,
두리도, 말도 등 8 섬에서 여러 종류의 어전이 발견.
그중 독살이 발견된 섬은 개야도 비안도, 내초도
나머지 섬들은 주로 어살 및 주목망을 이용 하였다.
이 지역에서 이용된 어전은 독살과 어살
그리고 주목망과 개막이 등을 꼽을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대형 어전인 어살과 주목망이 주류.
고군산군도 인근지역 어전설치 환경을 확인해보면
서해안 지역 중에서 가장 크고 대규모로 행해졌으며
어전의 명칭 및 형태의 지역적 특징이 강하게 나타난다.
'디지탈군산문화대전'
'이유미' 글에서.,발췌.
..............................
군산 해역에는 유인도 16, 무인도 51.,총 67.
섬 인구는 1.7%, 면적은 군산시 면적의 5.9%.
주요 유인도는 개야도 ·죽도· 연도 ·어청도·
야미도·신시도·선유도·무녀도·장자도·대장도·
관리도· 방축도· 명도· 말도· 비안도· 두리도 등.
주요 무인도는 오도· 부도· 역경도· 치도· 십이동파도·
닭섬·송도· 흑도· 가막도· 백포섬· 단등도· 투도· 신시도 2, 3
솔섬· 정경도 1, 2· 소야미도· 서도· 무능도· 장구도·주삼도 1, 2, 3·
앞삼섬· 쥐섬· 소횡경도· 단도 1, 2·
보농도· 광대도· 계도 1, 2· 직도 1, 2·
덕산도· 악도· 치두도· 사당도· 북력도·
남가력도 등이 있고 새만금 방조제 33km
새만금 개통 후 '비응도~야미도~신시도~
북가력도~변산반도' 구간이.,육지와 연결.
새만금 방조제
'전북 김제시, 군산시, 부안군' 새만금 방조제.
동진강(東津江)과 만경강(萬頃江) 하구 일대에
새만금 간척사업은 총길이 33㎞, 총 면적 401㎢.
김제시 구역은 광활, 죽산, 만경, 청하,
성덕, 부량, 진봉 등 7개면이 포함된다.
새만금 방조제는 세계에서 가장 긴 방조제.
네덜란드 자위더르 방조제(32.5㎞)보다 길다.
새만금’이란 명칭은 김제·만경 방조제를 더 크게,
더 새롭게 확장한다는 뜻말로서.,'금만'평야 + '새'
'김제평야와 만경평야'를 아울러 일컫던.,'금만평야'.
2009년 7월 23일 발표한 ‘새만금 종합계획’을 통해
농업, 산업, 관광, 환경 및 물류 중심 복합 도시개발.
동북아 경제 중심지로 도약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1991년 8월 13일 정부가 새만금사업 시행계획을 확정.
전라북도는 용지 매수 및 어업권 보상 업무를 담당하고,
농림수산식품부 사업시행 주체로 한국농촌공사 시행 담당.
1991~2009년 2조 6606억(보상 4696억 포함) 사업비.
내부 개발은 2009~2020년까지 시행한다는 계획이다.
'1991년 11월 16일~1994년 7월 25일' 제1호 방조제 준공.
2001년 5월 25일 정부 방침에 대한 세부 실천 계획이 확정.
2001년 8월 6일 신시배수갑문 기전 공사를 시작,
2002년 3월 13일 가력배수갑문 기전 공사를 준공.
2003년 12월 30일 총 33㎞ 최종 연결공사를 하였고,
2006년 5월 방조제 도로높임 및 성토 공사를 하였다.
2008년 12월 내부 개발 기본 계획을 수립하였다.
2009년 7월 23일 새만금 종합 실천 계획 수립을 통해
새만금 개발 방향을 다목적 복합 용지 개발 위주로 전환.
국토의 외연적 확장과 농어촌 발전 기반 조성, 수자원 확보,
지역 종합개발, 간척농지 개발 및 쾌적한 복지 농어촌 도시건설.
대규모 갯벌매립을 함으로써 갯벌 생태계 파괴, 수산 자원의 고갈,
해양오염 증가 등 환경문제가 발생하는 문제점을 드러낸.,새만금사업.
최근 김제지역에서는 새만금 지구의 행정구역
설정 문제가 지역의 가장 큰 쟁점으로 떠올랐다.
새만금 간척사업 전에 바다는 공유 수면으로
3개 시·군의 어민이 자유롭게 어로 활동을 하여
해양 경계선이 의미가 없었으나, 최근 육지화로
김제시는 37㎞ 해안선이 사라져 내륙 도시로 변모.
새만금 지구의 행정구역 결정 시점에서
설정 기준을 해양 경계선을 적용할 것인지,
육지 경계선을 적용할지 군산·부안 지역과 갈등.
지금의 해양 경계선을 기준으로
행정구역을 설정하면 군산 71.1%,
부안 15.7%, 김제 13.2%로 설정된다.
2006년 4월 새만금 방조제 끝물막이 공사 후,
김재시는 새만금 지구가 육지나 다름없으므로
하천, 산으로 육지 경계선을 적용해야한다고 주장.
정부는 새만금 사업을 지역 개발 차원을 넘어
대한민국의 성장 동력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새만금 사업이 지역경제 발전촉진 및
세계적인 명품 도시로 발전하기 위해서
외국 기업의 투자를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대형병원, 학교 등 기본시설 구축이 중요하다.
새만금 지역 농업 용지(8570㏊)는 연구·시험 단지,
첨단 시설 원예 단지 및 대규모 농업 회사 단지 등.
첨단 수출 농업 전진 기지로 2020년까지 개발할 계획.
새만금 방조제 명소화 사업’은 바다의 만리장성
새만금 방조제를 세계적인 관광 명소로 개발하고
휴양· 숙박, 생태·체험, 해양활동, 위락시설 등 조성.
민간투자 개발효과가 높은 신시도 휴게시설[5.5㏊]
리조트 개발 사업(3호 방조제구간 다기능 부지 195㏊)
'2014년~2018년' 본격적인 리조트 운영을 목표로 개발.
‘방수제 건설사업’은 홍수 때 내부 토지 보호를 위해
담수호와 내부 토지를 구분하는 제방을 쌓는 사업으로
'농업용지와 신재생 에너지' 구간 68.2㎞는 2015년 완료.
방수제 길이 68.2㎞ 중 49.5㎞는 2010년에 착수.
공사 중이며, 나머지 18.7㎞는 2011년도에 착수.
새만금 개발총괄 중앙 행정기관.,새만금 개발청.
2013년 9월 12일부터 세종시에서 업무를 시작하고
새만금개발청 세종시 입주는 업무특성 고려 후 결정.
새만금개발청은 새만금 관련 개발사업을 총괄하게 된다.
즉 6개 정부부처와 전라북도로 분산된
새만금 사업 개발 기능을 하나로 통합하여,
새만금을 종합· 체계적으로 육성하는 전담 체계.
새만금개발청 출범으로 서울시 면적의 2/3 규모인
401㎢ 새만금지역의 효과적인 관리가 보다 체계화되고,
미진한 투자 유치 및 기반시설 설치에 정부 지원도 본격화.
소관 부처별로 추진하던 복합 도시,
관광·레저, 산업 단지 등에서 탈피하여,
사업의 총괄·조정, 계획 수립, 사업 관리 및
새만금 위원회 사무 지원 등을 통합·수행한다.
농업용지는 농림 수산 식품부가,
새만금 수질 대책은 환경부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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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월 29일 이명박 정부
새만금 신도시 이름.,'아리울'
물을 뜻하는 ‘아리’ + 울타리 '울'
2004년 서울시 수돗물 아리수에서 따온 말
고구려가 한강을 지칭한., '아리수(阿利水)'
'동북아 경제, 관광 중심' 아리수 신도시 플랜.
광개토대왕 비문 등에 기록된.,'아리수(阿利水)'
일명, '광개토(대왕) 신도시 플랜'이라고 하였다.
새만금방조제 롤모델.,'네덜란드 자위더르 방조제'
경인아라뱃길 사업은 우리 민족의 오랜 숙원사업.
이명박 서울시장 재임때 우리나라 최초 뱃길 조성
홍수피해 방지, 친환경 물류혁신, 친수 문화공간조성
우리나라 녹색성장 원동력
목적이었던.,'경인아라뱃길'.
네델란드 방조제 일대
해상풍력발선소.,지멘스.
...........'네덜란드 자위더르 방조제'.............
새만금 방조제(33km) 보다 500m 짧은 32.5km.
새만금 방조제 이전까지 세계 최장의 방조제였다.
2004년 연간 5백만 관광객, 1조 2천억원의 관광수입.
새만금 사업과 규모가 비슷한 자위더르 간척사업은
국민합의 3년(1929 ~ 1932)만에 방조제 공사를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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