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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으로 쓰고, 사랑이라 읽는다
레위기 19:1-10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사순절 셋째주일이다. 코로나19가 모든 대륙을 위협하면서 세계보건기구(WHO)는 세계적 대유행을 선언하였다. 봄은 왔지만 눈부신 봄을 느끼기에 마음의 시야가 참 불편하다.
문득 생각나는 사람들에게 종종 안부를 묻는다. 한번은 백종윤 형제에게 전화를 걸어 “요즘 어찌 지내세요”라고 물었다. 그는 발로 뛰는 유능한 영업사원이다. 그는 “요즘은 텔레마케팅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어서 내게 “목사님은 어찌 지내세요?”라고 물었다. “보다시피... 나도 텔레마케팅 중입니다 ㅋㅋ.”
오늘은 가정예배에 참여한 어린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싶다.
다울아!
건이와 시후는 잘 지내니?
혜성이도 보고 싶구나.
(성빈이는 아직 중학생이 안 된 거지?)
지훈이, 휘준이, 휘서도 엄마와 잘 놀고 있는지 궁금하구나.
가정에서 드리는 영상예배 분위기는 어떤지 궁금하다. 사실 가정에서 드리는 예배기회도 오래가지 않을 테니, 이 기회에 식구끼리 모이는 가정예배 소중함을 경험하면 좋을 것 같다.
아주 오랜 전에 <민중의 교회>란 책을 읽었다. 남미의 해방운동 경험을 다룬 책이다. 저자는 처음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를 방문했는데, 날이 어두웠고 한다. 약속한 동네를 찾아가 사람에게 물었다. “성 베드로교회가 어디입니까?” 그랬더니 “오늘은 로페즈 씩 댁에서 모이는 데요”라고 했다고 한다.
저자는 웅장한 예배당만이 교회가 아니라 작은 가정집도, 한 인간의 삶도 하나님께 예배하는 현장이 될 수 있음을 배웠다고 한다.
사실 예배에서 중요한 것은 특별한 공간이 아닌 공동체이다. 예배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영적으로 드리는 것이고, 또한 공동체적으로 드리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자기만족을 위해 드리는 예배나, 과시용으로 드리는 예배라면 늘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1)
레위기는 우리에게 거룩함의 의미를 가르쳐준다. 무엇이 거룩한가? 거룩이란 단어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것’을 의미할 때 사용하는 개념이다. 예배는 예배드리는 나 자신이 거룩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기 때문에 거룩한 것이다.
레위기는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을까를 가르쳐 준다. 우리처럼 세속적인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부르고 친교 할 수 있을까를 일깨워 주는 것이다.
그 비결은 예배에 있다. 레위기는 참된 예배를 드리도록 한 규정이다. 예배는 사람 기분에 맞춰 드리는 것이 아니다. 행여 사람의 기분과 관심사에 따라 멋대로 해서는 안 된다. 예배의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고, 설교자도 아니다. 그러기에 예배자 자신이 바로 서야 한다.
우리는 주일예배를 드릴 때, 매번 자신을 돌아본다. 참회기도의 주체는 바로 나 자신이다. 내 죄와 허물을 내려놓으며 이렇게 고백한다.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는 주님의 뜻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실행하지도 못하는 죄인들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 때문에 우리는 번번이 용서받은 죄인으로 살아간다. 그런 마음과 믿음으로 예배할 그 때에 성전은 거룩하고, 성찬도 거룩하고, 예물도 거룩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내 모습도 거룩한 것이다.
레위기는 속죄의 책이다. 그만큼 죄를 용서받는 일은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우리는 늘 죄와 허물 가운데 살아간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거울로 보면 우리 자신은 얼마나 엉망인가? 얼마나 헝클어져 있는가? 우리 예배의 시작하는 자리에 참회와 사죄기도가 담겨있는 이유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살기를 다시 결심한다. 존 웨슬리는 “태산 같은 죄도 용서받은 죄는 먼지보다 더 가볍고, 털끝 같은 죄도 용서받지 못한 죄는 태산보다 더 무겁다”고 하였다.
오늘 설교 제목은 ‘거룩으로 쓰고, 사랑이라 읽는다’이다. 하나님이 우리로 거룩하심에 참여하도록 하신 뜻은 내 생활 속에서 사랑하며 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예배를 통해, 또 예배자의 삶을 통해 우리는 사랑을 배우고, 사랑하며 산다.
하나님은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또 시간을 구별함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닮고 또 사랑을 닮아감으로써 구별된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
2)
하나님과 관련된 단어 ‘거룩’은 그러기에 성경에만 나온다. 원래 거룩을 뜻하는 ‘카다쉬’는 ‘따로 떼어 놓다’, ‘구별하다’라는 의미이다. 한마디로 구별된 삶을 뜻한다. 구별된 삶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선택과 결단 그리고 책임이 뒤따른다.
거룩은 종교적 단어이지만, 종교인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은 특별한 사람만이 행하는 종교적 삶이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자녀들의 구별된 삶이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은 종교인처럼 사는 것이 아니다. 종교인인척하며 남보란 듯 사는 것은 위선적이다. 그래서 겉과 속이 다른 바리새인들이 비난을 받았다. 하나님의 자녀는 구별된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기에 거룩을 종교적 개념으로만 묶어둬서는 안 된다. 거룩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과 무관할 수 없는 생활언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나를 뭇 사람 중에서 따로 떼어내어 구별하셨다. 그리고 거룩한 삶을 살도록 분별하신다. 그리하여 나는 예배자로서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부름 받았다.
오늘 본문을 보라. 먼저 2절을 함께 읽자.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2).
“너희는 거룩하라”는 대 명제 아래 그 실천 내용을 소개한다. 예배용어로서 거룩과 함께 이어서 일상적인 실천의 내용을 담고 있다.
‘부모에게 경외하라. 안식일을 지켜라.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 합당한 예배를 드리라. 가난한 이웃과 나그네를 돌보라’(3-10).
이렇듯 거룩은 예배와 관련되었지만, 사랑의 윤리로 이어진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율법의 두 기둥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두 가지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거룩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모두 포함한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동전의 양면과 같기 때문이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성경은 ‘거룩하다’라고 쓰고, ‘사랑을 실천하다’라고 읽는다. 모름지기 종교적으로 거룩함을 추구한다면, 일상생활에서도 윤리적으로 모범적이어야 한다. 거룩은 하나님과 관계는 물론 이웃과 관계를 규정한다. 거룩은 하나님의 백성이 지녀야할 높은 윤리적 규범을 아우르고 있다. 한 마디로 사랑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람은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레위기에서 보듯 거룩한 삶은 예배와 이웃사랑을 모두 포함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은 참된 예배, 정결한 생활, 안식일 준수, 부모 공경, 가난한 자와 외국인 보호, 경제정의에 이르기까지 지극히 일상적이며, 포괄적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마땅하다. 그래서 성경에서 이웃사랑의 명령마다 같은 후렴구를 반복한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3, 4, 10).
3)
왜 레위기는 출애굽기 다음에 위치할까?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맨 처음 배워야 할 것이 거룩함이기 때문이다. 먼저 거룩한 예배이며, 또한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다. 그것이 율법의 핵심이다. 만약 내가 내 인생에서 진정한 출애굽을 꿈꾼다면 먼저 내가 드리는 예배를 개혁해야 한다. 그것은 동시에 내 삶을 개혁하는 일이다.
요즘 코로나19가 세계적으로 확산되어 큰 위협이 되었다. 3월 12일에 ‘세계적 대유행’(팬데믹)을 선언한 세계보건기구의 로고를 자세히 보라. 세계 지도 가운데 뱀 형상이 있다. 그 뱀은 여러 가지 해석이 있으나 모세가 높이 든 광야의 불뱀 형상이다(민 21:8-9).
이스라엘 백성은 몸은 출애굽을 했지만, 아직 믿음은 출애굽을 하지 못하였다. 애굽의 종살이로부터 해방된 백성이 되었지만, 지난 40년 광야 기간 중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하였다. 그들의 불평과 원망은 고질적인 병과 같았다. 악성 암과 같아서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였다.
결국 그들은 심판을 받아 불뱀에게 물려 죽게 되었다. 감염병의 위기에 처한 백성은 즉시 후회하였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였다. 생각 없이 범죄하고, 또 성찰 없이 회개하는 것이 버릇처럼 되었다. 죽음의 위기가 닥치자 그들은 다시 하나님을 찾았고, 모세에게 중보기도를 요청하였다.
백성의 뉘우침을 듣고, 하나님은 곧 바로 자비를 베푸신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내리신 처방 법은 장대 위에 매단 놋뱀을 바라보라는 것이었다. 장대 위에 들려있는 놋뱀을 바라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이며, 아주 단순하지만, 믿음의 출발이었다.
생명을 얻는 길은 장대 위의 놋뱀이 아니다. 놋뱀이 특효약이 아니다. 놋뱀을 바라는 보는 것은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생명의 길을 주신 하나님께로 진정으로 마음을 돌이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와 구원의 능력을 바라는 자는 생명을 얻을 것이다.
장대 위 놋뱀은 바라보아야 할 광야의 십자가였다. 광야에서 죽어가던 사람들이 그 놋뱀을 바라보고 생명을 얻었듯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은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그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는다.
WHO의 로고 한 가운데 장대 위의 뱀을 그리스 신화에서 근거를 찾기도 하지만, 그것은 민수기에 등장하는 장대 위의 뱀임에 틀림없다.
특별히 레위기는 거룩한 생활 가운데 ‘정결규정’을 강조한다. 놀랍게도 정결규정은 감염병의 예방과 사후처리에 대한 규정을 세세하게 다룬다. 일상적인 위생의 문제, 사회적 격리, 공동체의 안전, 트라우마에 대한 치유, 한 인간의 회복과 사회적 복귀 등이다.
정결규정에 담긴 한 인간을 소중히 여기는 사랑은 얼마나 성경적인가? 정결 규례는 차별, 배제, 혐오가 아니라 심지어 천형과 같은 나병도 회복될 수 있음을 정한 희망의 복음이다. 나병 환자를 만져주시는 예수님의 손길은 나병 환자에게 이미 구원 그 자체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는데, 그 첫 번째 간구가 ‘거룩’이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복된 예배자의 삶을 산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통해 여러 가지 삶의 문제, 위기, 고난을 돌아본다. 그리고 회개하고, 다시 결심하며, 희망을 품는다. 지금 예배를 성전에서 드리거나, 우리 집 거실에서 드리거나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거룩’이다.
과연 내가 드리는 예배는 진실한가, 참된가, 평안한가? 중요한 것은 제물의 크기가 아니다. ‘거룩한 산 제물’로 나를 주님께 드리는가의 문제이다. 내 삶은 정결하고 구별되었는가? 정의롭고 평화로운가?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인가?
오늘 너무 어려운 말씀을 드렸다. 미안한 마음에 어린이들에게 이야기 하나 들려주고 마치려고 한다.
요즘 어린이들도 ‘톰과 제리’를 보는지 모르겠다. 올해가 만화영화 ‘톰과 제리’가 등장한지 80주년이라고 한다. 얼마나 유명한 만화영화인지 남한과 북한의 어린이들이 모두 자라면서 보았다. 남한에서는 ‘깐돌이와 냐옹이’로, 북한에서는 ‘령리한 생쥐와 우둔한 고양이’란 제목으로 번역하였다. ‘톰과 제리’를 보면서 자란 부모세대도 이 만화영화가 어떻게 끝났는지 잘 모른다.
고양이 톰은 나이가 들어서 죽음을 맞이한다. 제리는 톰이 죽으니 당장은 좋아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너무 허전하였다. 그래서 주인은 눈치를 채고 톰과 비슷하게 생긴 고양이 한 마리를 구해와서 같이 지내게 하였다. 제리는 신이 나서 톰과 하듯 새 고양이를 놀리며 놀았다. 그런데 새 고양이는 톰이 아니었다. 그 고양이는 장난치는 제리를 단박에 낚아채서 잡아 먹어버렸다.
제리는 죽으면서 깨달았다. 그동안 톰은 나를 잡지 못한 게 아니라 못 잡는 척 해준거였구나. 그리고 제리는 죽어서 천국에 올라갔다. 그리고 제리를 기다리고 있던 톰을 다시 만나서 천국을 들었다 놓았다하며 시끄럽게 장난치고 놀았단다.
그렇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은 내가 잘나고 쓸 만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못 이기는 척, 못난 척 그렇게 양보하며 살지도 모른다. 그런 존재가 내 곁에 있다면 참 고마운 인생이다.
돌아보라. 하나님은 내가 온전해서 의로워서 나를 오래 참아주시는 것이 아니다. 나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려고 기억하지 못하는 척, 심지어 모른 척 하시는 것일 것이다. 거룩하시기 때문에 사랑하시기 때문에 더 참아 주고, 용서하고, 감싸주고, 이해해 주신다. 그러기에 우린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가리켜 ‘거룩으로 쓰고 사랑이라 읽는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평생 진실한 예배자로서 또 그에 합당한 사랑의 삶을 살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린다.
첫댓글 사랑하기 때문에 못 이기는 척, 못난 척 그렇게 양보하며 살아준 당신을 기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