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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710
12월20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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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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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kiovatciz9Y
[수원교구 윤영민 요셉 신부님 집전(하우현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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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젊은 시절의 고백>
한 선배 신부님의 젊은 신부 시절의 고백을 들으며 저 역시 뜨끔했습니다. 사제로 갓 서품 받고 열정에 가득 차 있던 시절, 참으로 바쁘셨답니다.
아침 미사, 주당 20시간 이상 되는 종교수업, 거기다 수녀님들 수업, 본당 미사 및 특강 등등으로 하루가 총알처럼 지나갔답니다.
이웃들에게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데 너무 바빠서 정작 자신은 하느님 말씀을 듣는 시간, 기도할 시간이 전혀 없었답니다. 언제 성당에 발을 들여놓았던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겨우 미사드릴 때뿐이었답니다.
어찌 그리도 지금 제가 겪는 체험과 똑같은 체험을 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 "우리가 사제가 된 가장 큰 이유는 예수님 곁에 앉아있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 곁에서 그분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기 위해 우리는 사제가 되었습니다. 그분의 말씀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는 사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 옆에서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을 위해서 봉사하기 위해 우리는 사제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 한번 루카 복음사가가 들려주는 성모님의 아기 예수 잉태 사화를 전해 듣습니다. 가브리엘 천사의 말을 전해듣고 난 마리아는 이렇게 응답합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잉태하고 낳던 시절,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던 시절부터 마지막으로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님의 시신을 품에 안으시던 순간까지 성모님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 한가지는 아들 예수를 주제로 한 묵상이자 기도였습니다.
성모님 역시 나약한 한 인간이었기에 아들 예수와 관련되어 끊임없이 솟아오르던 의혹을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특별히 인간적인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 할 예수 잉태의 순간, 그리고 아들 예수가 성장해 나가면서 겪게된 갖은 이해하지 못할 사건들 속에 성모님은 끊임없이 묵상에 기도를 거듭하십니다.
한평생 진지하게 침묵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하느님의 뜻을 찾아갑니다.
그 결과 성모님은 단순하고 소박하지만 탁월한 신앙의 모범생이 되십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일상 안에서 겪게 되는 갖은 의혹과 억울함, 이해하지 못함, 서운함 앞에서 성모님처럼 겸손하게 응답하고 기도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다시 한번 예수님 옆으로 다가가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비록 무엇이 진정한 하느님의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지만, 지금은 너무 어려워서 알아듣지 못한다 하더라도 언젠가 우리의 눈이 밝아져 하느님의 뜻을 명료하게 알아차릴 그 순간을 기다리며 다시 한 번 힘차게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신앙여정을 걸어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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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a-58Xeupip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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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 없으면 사랑도 못 한다?>
여러분은 능력이 없으면 사랑도 못 한다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긍정하시나요, 부정하시나요? 만약 능력을 돈으로 바꾼다면 어떨까요? 여러분이 여자라면 능력 없고 인물 좋은 사람과 능력은 있지만 외모가 좀 딸리는 남자 중에 누구를 택하시겠나요? 돈은 능력입니다. 하느님은 그러나 약하셨습니다. 인간이 되셔서 인간에 의해 처참히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그게 다일까요? 저는 사랑도 능력이 있어야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이 등장하십니다. 성모님은 강한 분이셨을까요? 성모님은 온 세상을 사랑하셨을까요? 그래서 성모님은 아무 저항도 없이 당신 아드님도 십자가에 내어주셔야 했습니다. 사랑은 약함인가요, 강함인가요? 약해지는 게 사랑인가요, 강해지는 게 사랑일까요?
치킨 프랜차이즈로 많은 돈을 벌고 백종원 대표의 골목식당처럼 ‘장사의 신’이란 유튜브를 진행하는 은현장 씨가 예전 씨름 선수 박광덕 씨를 방문한 내용이 조회수가 많이 나와 여러 편을 봤습니다. 박광덕 씨는 씨름으로 번 돈 15억을 사기 맞고 지금은 오산에서 작은 족발집을 운영하며 살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대학 보낼 때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죽을 고생을 하며 재기하였고 지금은 유튜브로도 돈을 벌며 어느 정도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은현장 씨는 어디를 방문하든 가게 사장이 나이가 많아도 존댓말을 쓰지 않습니다. TV에 나와서도 연예인들에게 쓴소리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덩치 큰 전직 씨름 선수에게는 존댓말을 씁니다. 처음엔 족발이 좀 심심하고 막국수가 너무 싱겁다는 말을 못 했습니다. 하지만 장사의 신은 거기서 멈출 수 없었습니다. 100만 원 상당의 많은 선물을 사 들고 다시 갑니다. 맞아 죽을 각오 하고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는 박광덕 씨에게 컨설팅해 줍니다. 박광덕 씨는 지금까지 자신이 하던 맛에 자부심이 있었지만, 거의 연예인급이 된 은현장 씨의 말을 잘 듣고 그대로 따라 해서 변화되었습니다. 누가 더 강한 사람일까요? 박광덕 장사일까요, 은현장 대표일까요? 누구도 박광덕 씨 앞에서 저런 솔루션은 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은현장 대표도 수백 억을 가진 자산가이지만, 그 앞에서는 약해졌습니다. 그에게 솔루션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사랑은 약해지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약하기 때문에 약해지는 것은 비굴함입니다. 사랑은 강한데 약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강해져야 합니다. 내가 하느님과 함께 계시고 그분이 나에게 은총을 계속 주시어 나는 못 할 게 없는 사람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누구에겐가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보통 갓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 분들을 보면 스마트폰에 온통 손주 사진입니다. 부모보다 더 좋아합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봅니다. 어떤 분들은 조부모는 아기에 대한 책임이 적어서 그렇다고 말합니다. 저도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젊은 부모들은 아기들이 사랑스럽기도 하지만,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부모들은 이미 자녀를 키워본 경력이 있습니다. 크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더 사랑스러운 것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유튜브에서 보면 낡아 버려진 오토바이 등을 재분해하여 새것처럼 만드는 과정을 올린 동영상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는 버려진 오토바이가 사랑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능력을 과시할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저는 잔인할 수 있어도 사랑과 능력은 비례한다고 봅니다. 능력이 있어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능력자이시기에 사랑이시기도 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라는 천사의 말을 믿으셨습니다. 그리고 천사가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라고 말한 것대로, 그분이 당신과 함께 계시며 은총을 주심을 믿으셨습니다. 나에게 능력 자체이신 분이 함께 계시며 능력을 주고 계신다면 그 은총을 받지 못하는 온 세상 사람들은 불쌍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온 세상을 사랑하는 게 가능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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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5년째 뉴욕에서 살면서 ‘의, 식, 주’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옷은 주로 ‘사제복’을 입고 있습니다. 다른 옷들도 입었지만 사제에게는 사제복이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교우들에게 이런 질문도 받곤 했습니다. “신부님은 이런 데 올 때도 사제복을 입으세요?”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할 때도, 아침에 산보할 때도, 모임의 자리에 갈 때도 즐겨 입는 옷은 사제복입니다. 사제복 덕분에 도움을 받은 적도 많았습니다. 뉴욕에서 운전면허 실기시험을 볼 때였습니다. 감독관은 천주교 신자였고, 제게 강복을 청했습니다. 저는 긴장하지 않고, 무사히 시험에 합격하였습니다. 공항에서 입국할 때였습니다. 입국 심사관이 신자였습니다. 저를 보고 환하게 웃으면서 ‘환영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식당에서 식사할 때입니다. 사제복을 알아본 교우들 중에는 미리 계산을 해 주는 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제복을 즐겨 입는 것은 도움을 받아서가 아닙니다. 그냥 사제복이 편하고,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머무는 곳은 신문사입니다. 1층은 사무실이고, 2층은 저의 숙소입니다. 다락방이라서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춥지만 제게는 비싼 뉴욕에서 편한 쉼터가 되고 있습니다. 가구를 움직이거나, 재배치하는 편이 아닙니다. 작년에 브루클린 교우들이 2층의 숙소에 있는 가구들을 말끔하게 재배치 해 주었습니다. 책상과 침대의 위치가 바뀌었는데 완전히 새로운 집이 되었습니다. 우중충했던 샤워커튼을 치우고 새로 샤워커튼을 달았습니다. 샤워 실이 호텔 급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았더라면 행복했을 것”이라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베들레헴에는 ‘예수님의 탄생 성당’이 있습니다. 성당의 지하에는 예수님께서 탄생하셨던 자리가 있습니다. 많은 순례자들이 줄을 서서 예수님의 탄생 자리에 경배하기 위해서 기다렸습니다. 비좁은 곳이지만 한국의 순례자들은 경배를 마친 후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성가를 부르곤 합니다. ‘145 - 27 33ave flushing NY 11354'는 언제나 저를 포근하게 맞이해주는 제 삶의 구유입니다.
입는 것과 머무는 곳은 큰 어려움이 없지만 먹는 것은 매일의 숙제입니다. 밥과 국 그리고 반찬을 준비해서 먹기도 했고, 죽을 데워서 먹기도 했습니다. 요즘은 아침에 주로 떡을 먹습니다. 혼자 먹다보니 간편하고, 쉬운 먹거리를 찾게 됩니다. 사목정보 11, 12월호에 먹는 것에 대한 좋은 글이 있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가톨릭의 식사 후 기도에서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라는 구절이 단순한 위령의 기도가 아님을 깨닫는다. 세상을 떠난 모든 만물은 나의 몸을 통한 거룩한 성찬이 되었다는 의미 역시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묵상 할 수 있기를, 그 죽은 만물의 몫과 은혜만큼 더 열심히 살 수 있기를 전구한다. 동학의 해월 최시형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천지의 녹인 줄 알면 반드시 식고(食告)하는 이치를 알 것이요, 어머니의 젖으로 자라는 줄 알면 반드시 효도로 봉양할 마음이 생길 것이다. 식고는 반포(反哺)의 이치요, 은혜를 갚는 도리니, 음식을 대하면 반드시 천지에 고하여 그 은덕을 잊지 않는 것이 근본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체성사를 제정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해 내어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드 이것을 받아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들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그렇습니다. 음식을 먹는 것은 단순히 연료를 주입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이 생명에게로 전해지는 은혜를 입는 것이고, 하느님의 은총이 주어지는 성사입니다. 이제 곧 주님의 탄생입니다. 주님께서는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너희 수고하고 힘든 자들은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나의 멍에는 편하고, 나의 짐은 가볍다.”라고 하십니다. 이제 곧 주님의 성탄입니다. ‘의, 식, 주’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이 있다면 따뜻한 마음으로 사랑의 손을 내밀면 좋겠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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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26-38: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탄생 예고가 이어지고 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28절) 이런 인사는 마리아에게만 주어진 인사였다.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28절) 주님께서는 마리아를 보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 태어남의 신비를 통해 마리아에게로 내려오신다. 마리아는 천사를 바라보던 그 자리에서 하늘의 심판관을 몸에 받아 모시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하느님께서는 한 처녀를 당신의 어머니로 만드셨고, 당신 여종을 어머니로 삼으셨다. 온 세상도 하느님을 품지 못하지만, 하느님은 온전히 그 품에 오시어 사람이 되셨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31절) 천사는 마리아에게 거룩한 신비를 드러내 줄 아기에 대하여 말한다. 마리아는 처녀로서 어머니가 될 것이다. 그 아기는 하느님의 아들이자 사람의 아들이 되실 분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세상을 다시 창조하실 분이시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34절). 이 물음은 동정 잉태라는 신비에 대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천사는 성령께서 마리아에게 내려오시어 잉태하리라고 한다. 마리아가 열매를 맺게 하신 분은 성령이시다.
마리아에게 내려와 그리스도를 잉태하게 하신 성령께서 이제는 새로운 피조물의 양식인 빵과 포도주에 내리시어,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거룩한 성찬례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어 믿는 이들의 몸이 되라고 우리를 부르신다. 마리아의 잉태는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요한 1,13) 성령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38절) 마리아는 하느님께 순종함으로써 하와의 불복종을 되돌려 놓는다. 그리하여 한 천사였던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첫 번째 처녀의 타락이 다른 천사의 말을 받아들인 처녀 마리아의 믿음으로 극복되고 있다. 마리아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 마리아는 평범한 한 시골 처녀였다. 우리와 같은 한 사람이고 평범한 삶을 사는 인간이었다. 그 마리아가 그렇게 하느님께 자신의 신앙을 고백할 수 있었다면, 우리도 마리아와 같이 고백하고 실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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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신앙인들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하다면 성모님께서는 하느님 자녀들의 모범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위대한 동의와 순종에 이르기까지 성모님께서 기울이신 노력도 함께 떠올려야 합니다. 처음에는 성모님께도 모든 것이 희미하셨을 것입니다. 갑작스러운 천사의 등장과 그가 던지는 인사말에 당황하셨고 두려움도 느끼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안심시킨 다음 천사가 전하는 내용은 더욱 충격적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분을 잉태하리라!’는 것입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에게 일어날 수 없는 일이고,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이었기에, 성모님께서는 천사의 말을 도무지 이해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지금 벌어지는 일들이 의미하는 바와, 그 안에 담긴 하느님 뜻을 찾고자 애쓰셨습니다. 천사의 등장과 인사말에 놀라면서도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곰곰이 생각하셨고, 의문스러운 점은 용기 있게 물으며 그분 뜻에 다가가고자 노력하셨습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이 있듯이,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이사 55,8-9). 그분의 깊으신 생각과 뜻을 우리 머리로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그 뜻을 찾는 노력을 멈추지는 맙시다. 성모님처럼 기도 안에서 끊임없이 묻고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완전한 이해에는 못 미치더라도 온전한 동의와 순종에는 조금 더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요?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라는 말씀처럼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 앞에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합시다. “당신의 뜻을 알게 하시고 그 뜻을 이루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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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의 탄생 예고>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루카 1,28-33)
여기서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라는 천사의 인사말은, 하느님께서 성모님을 특별히 선택하셨고 부르셨음을 전해 주는 말이기도 하고, 성모님이 그 특별한 은총을 받으신 것을 찬양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는 하느님께서 성모님께 은총을 가득히 내려 주셨다는 뜻이고,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는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는 것 자체가 큰 은총이라는 설명입니다. <이 말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너를 뽑으셨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기뻐하여라.”는 하느님께서 ‘하신 일들과 하실 일들’은, 성모님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에게 ‘큰 기쁨’을 주는 일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라는 말은, 천사가 하는 말 자체의 뜻은 알아들었지만, 자기가 왜 그런 ‘찬양’을 들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몰라서 놀랐다는 뜻입니다. <말 자체를 알아듣지 못했다면, 또는 이해하지 못했다면 놀라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이 인사말은, 인간이(신앙인이) 들을 수 있는 찬양 가운데에서 최고의 찬양입니다. 성모님은 자신이 하느님 앞에서 비천한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겸손한 분이었기 때문에(루카 1,48), 그런 ‘찬양의 말’을 듣는 것에 몹시 놀라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놀라지 마라”입니다. 이 말은, “무서워하지 마라.”라는 뜻이 아닙니다. 성모님은 천사의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놀라거나 무서워하지 않으셨고, 천사의 인사말을 무서워하신 것도 아닙니다. “왜 나에게 이렇게 엄청난 찬양을 하는가?”라고 의아해한 것뿐입니다.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는 ‘가득히 받은 은총’을 설명하는 말이기도 하고, 천사가 성모님을 찬양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말이기도 하고, 하느님께서 성모님을 특별히 선택하셨음을 다시 강조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31절-33절의 말은, 하느님께서 성모님을 뽑으신 이유, 뽑힌 성모님이 하시게 될 일, 그리고 예수님이 하시게 될 일들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일방적인 통보가 아니라, 성모님의 동의와 협조를 구하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메시아를 세상에 보내시려고 메시아의 어머니로 너를 선택하셨는데, 너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겠느냐?”> “큰 인물,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 다윗의 왕좌, 영원히 다스리다, 그분의 나라”라는 말들은 모두 ‘메시아’를 뜻하는 말인데, 성모님은 이 말들이 모두 메시아를 뜻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아들으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루카 1,34-38)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가 아니라, “동정녀인 제가 어떻게 아기를 낳을 수 있겠습니까?”입니다. <성모님은 “도대체 당신의 말이 무슨 뜻입니까?”라고 묻지 않으셨고, “그런 일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항의하지도 않으셨고, “제가 아기를 낳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금 바로 약혼자 요셉과 결혼을 해야 합니까?”라고 물으셨습니다.>
성모님이 그 모든 일들을 얼마나 이해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중요한 점은, 성모님의 질문은 응답할 준비를 이미 하고 있는 상태에서 ‘응답의 방법’을 묻는 질문이라는 점입니다.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은, 천사의 말을(하느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언제나 항상, ‘이해’보다 ‘믿음’이 먼저입니다. 바로 그 점에서도 성모님은 우리의 모범이 되시는 분입니다. 천사의 대답을 단순하게 요약하면, “하느님께서 다 알아서 하실 것이니 너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입니다. 성모님의 말씀에서 ‘바랍니다.’라는 말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저도 원합니다.”라는 뜻이고,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말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나도 원하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라는 말은, 천사가 성모님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다가, ‘응답의 말’을 듣고 나서 떠났음을 나타냅니다. 즉 성모님께서 충분히 심사숙고하신 다음에 자신의 자유의지로 응답하셨음을 나타냅니다. <어쩔 수 없어서 복종한 것도 아니고, 이해를 못하면서도 맹목적으로 복종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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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방삼민 가스발 신부님]
<매일 우리는 선택을 합니다.>
중국 제나라의 한 처녀에게 두 군데에서 중매가 들어왔습니다. 한 곳은 부자집 청년인데 키도 작고 못생겼습니다. 또 한 곳은 가난한 집 총각이지만 머리도 좋고 잘 생겼습니다. 쉽사리 결정을 내기가 어려웠죠.
처녀의 부모는 빨리 결정하라고 다그쳤지만 처녀는 얼굴만 빨개질 뿐 쉽게 결정을 하지 못했습니다. 기다리다 못한 처녀의 아버지는 딸에게 부끄러워 말을 하지 못하겠거든 소매를 걷어 의사를 표시하라며 가난한 집 총각이 좋으면 왼쪽 소매를, 부자집 총각이 좋으면 오른쪽 소매를 걷으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처녀는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보다가 양쪽 소매를 모두 걷었다고 합니다. 꽤나 욕심이 많은 처녀이었나 봅니다. 만일 그 처녀의 원대로 두 남자를 다 섬기고 살았다면 처녀의 앞날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오늘 복음은 또 다른 한 처녀 마리아의 선택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천사로부터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게 되리라는 예고를 받습니다. 물론 이 예고는 마리아의 수락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 아기는 위대한 분이 되어 지극히 놓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이렇게 간단히 표현되어져 있는 천사의 예고이지만 마리아에게는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위대한 분, 그것도 하느님의 아드님의 어머니가 된다는 영광 뒤에는 처녀 잉태라는 부담과 훗날 예언자 시메온의 예언처럼 그와 그의 아들이 겪어야 하는 수많은 고통에 대한 예고이기도 한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낳고 세속의 행복도 맛보고 산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한쪽을 얻으려면 한쪽을 버려야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마리아의 인격과 진가가 여기서부터 드러납니다. 마리아는 사람의 일보다 하느님의 일을 우선적으로 선택한 것입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함으로써 마리아는 자신이 하느님에게 속해 있고 하느님은 자신의 주인이시라는 점을 고백합니다.
또한 마리아의 동의는 자발적이며 자유로운 것으로서 마지못해 하는 수용이 아니였습니다.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잉태함으로써 겪어야 할 현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결코 쉽고 영광스러운 길만이 아님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우리도 일상의 삶에서 선택의 순간을 만납니다. 세속의 행복과 영원한 행복, 그 둘 중 우리는 무엇을 선택합니까? 솔직한 심정은 제나라 처녀의 경우처럼 이것도 저것도 다 가지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대가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제나라 처녀가 두 남자를 다 선택했다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없었으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 한 일입니다. 어느 한쪽을 선택하려면 다른 한쪽을 버려야 하고 그 버린 것이 아까운 것일수록 선택한 쪽의 삶은 더욱 가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선택의 순간에 마리아의 믿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의 본질은 하느님에게 있고 하느님은 우리의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제나라 처녀의 경우처럼 모두 가지려다 다 잃어버리지 말고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순종함으로써 영원한 행복을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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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웑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살면서 이런 질문을 할 때가 있습니다.
나자렛에서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마리아는 황당한 일을 겪습니다. 유대인들의 관습에는 결혼하기 전 약혼 기간을 일 년으로 잡고 신부 될 사람은 친정에서 살지요. 그러다가 혼인날에는 신랑이 친구들과 함께 신부를 맞으러 와서 그곳에서 잔치를 벌입니다.
가브리엘이라는 천사가 느닷없이 찾아와서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장 28절)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당시 마리아의 표정을 설명합니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루카 1장 29절)
그런데 가브리엘 천사는 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 1장 30-31절)
그렇게 말하는 가브리엘 천사에게 황당한 마리아는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 1장 34절)라고 반문합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장 35절.37절)
아시리아의 침입과 유다 침입과 더불어 아람 임금 르친과 북부 이스라엘 왕 페카가 연합을 해서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 옵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은 공포 분위기입니다. 이런 가운데 유다 왕 아하즈는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이 때에 이사야 예언자는 나타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면서 하느님께 표징을 청하라 이릅니다. 그러나 아하즈는 예언자에게 대답합니다. “저는 청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시험하지 않으렵니다.”(이사야 예언서 7장 12절)
그런 가운데 이사야 예언자는 더 강하게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다윗 왕실은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은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여 나의 하느님까지 성가시게 하려 합니까? 그러므로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이사야 예언서 7장 13절-14절)
밑도 끝도 없는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다.’라는 표징이 어떻게 유다 왕실에 이해 될 수 있었을까요?
이러한 표징이 나자렛의 결혼을 앞둔 요셉의 약혼자 마리에게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갑작스런 천사의 방문과 엄청난 예언의 말에 마리아는 놀랐지만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고 한 사실을 받아들이며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장 38절)라고 고백합니다.
유대왕 아하즈도 예언자의 말을 받아들일 상황이 아닐 정도로 주위의 상황이 위축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예언자의 예언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해도 하느님의 예언의 메시지는 그대로 진행되어 마리아에게 이른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획은 멈출 줄을 모르고 변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어리석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거기다가 교만으로 진실을 왜곡하기까지 하지요.아하즈도 받아들이지 못한 표징을 성모님은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그 표징을 구원으로 받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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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토 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은총이 가득한 이>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예고합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이사야 예언서 7장 14절)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이사야의 예고대로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 마리아에게서 예수님께서 잉태하게 된 경위를 말해줍니다.
그런데 주님의 탄생 예고는 성전 ‘성소’에서 전해진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와는 달리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았던 “이방인의 갈릴래아"(마태오 4장 15절)에 있는 작은 동네 나자렛의 시골 처녀의 ‘집’에서 전해집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거처를 성전 안이 아니라 사람들 가운데 두시게 됩니다.
그런데 천사의 인사말은 마리아가 이미 “은총이 가득한 이”(루카 1장 28절)였음을 말해줍니다. 곧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기 전에, 믿음으로 충만했음을 말해줍니다. 그리하여 즈카르야는 ‘의심’하여 자신의 목소리까지 잃어버리고 벙어리가 되었지만, 마리아는 ‘믿음’으로 응답하여 구원의 말씀을 품으셨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마리아는 몸으로 우리 주님을 잉태하시기 전에 마음으로 먼저 잉태하셨다."
또 즈카르야에게는 아기가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루카 1장 17절)이라는 ‘사명’이 예고되지만, 마리아에게는 아기가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외아드님”(루카 1장 35절)이라 불리게 될 것이라는 ‘신원’이 예고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성령께서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루카 1장 35절)으로 이루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마리아의 응답을 통해 드러납니다.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나이다.”(루카 1장 38절)
여기에서 드러나는 마리아의 ‘희망’에 대해서만 보고자 합니다. 이는 마리아 자신이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 그것을 저도 바랍니다.’라는 뜻입니다,
곧 그분의 희망을 희망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리아의 희망과 하느님의 희망이 같아진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원하신 바를 이루시도록 그분의 뜻에 승복하는 일이요, 그분의 뜻을 우리의 뜻으로 품고 자신의 희망이 아니라 그분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이요, 당신의 사랑을 이루시도록 우리 자신을 그분께 허용하고 수락하는 일이요, 그리하여 우리가 하느님의 희망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되고, 그분의 은총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되는 일입니다. 그렇게 그분이 하시는 일에 함께 일하는 협조자가 되는 일입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집으로 삼으십니다. 저희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시고 저희 안에서 사십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마리아와 함께 진정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의 희망이 있다는 이 사실이 말입니다. 우리를 희망하는 분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이 사실 말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큰 기쁨인지요! 내가 바로 하느님의 집이요 놀이터요 일터라니! 이는 마치 잠에서 깨어난 야곱의 “Eureka!”, 그 깨달음의 외침과 같습니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의 문이로구나.”(창세기 28장 17절)
오늘 우리는 참으로 기쁘고 행복합니다. 바야흐로 성탄의 기쁨이 몰려옵니다. 희망이 이미 수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바로 주님의 희망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희망이 진정,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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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샘 기도>
주님!
참으로 큰 기쁨입니다.
제 안에 사랑이 있다는 이 사실, 참으로 놀랍고 아찔한 감미로움입니다.
하오니 이제는 그 사랑에 승복하게 하소서.
항상 저를 향하여 있는 당신 사랑 안에 머무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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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1,31)
오늘 독서에 등장하는 아하즈 왕은 “스무 살에 임금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열여섯 해 동안 다스렸다. 그는 자기 조상 다윗과는 달리 주 그의 하느님의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지 않고, 이스라엘 임금들의 길을 따라 걸었다. 그는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쫒아내신 민족들의 역겨운 짓을 따라, 자기 아들마저 불 속으로 지나가게 하였다.”(2열왕16,2-3)는 사실을 열왕기 저자는 전하고 있습니다. 아하즈는 하느님을 믿지 않았고, 하느님께 불경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생각과 판단에 따라 강대국인 아시리아의 왕을 섬김으로써 아람과 이스라엘의 침략을 물리치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언자 이사야를 보내어 당신의 호의와 인자를 베푸시려 하였지만, 그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거역하였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하느님께 의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얄팍한 꼼수를 부렸던 것입니다. 그러자 다시 이사야 예언자를 보내시어, 오늘 우리가 들은 대로, “너는 주 너의 하느님께 너를 위하여 표징을 청하여라.”(7,11)고 하느님은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징조는 곧 예언의 성취와 약속의 진실성을 보장하는 하나의 증거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징조를 청하였다면 하느님께 대한 불신앙에서 확신에 가득한 신앙으로 바꿀 수도 있었으며. 이것이 그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을 믿지 않고 자기의 생각을 믿었기 때문에 오늘 독서에서, “저는 청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시험하지 않으렵니다.”(7,12)라고 말합니다. 그는 언뜻 듣기에 옳은 대답을 하는 듯 싶지만 기실 신명기(6,16참조)의 계명을 들어 자신의 불신앙을 포장한 겁니다. 아하즈는 하느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은 것입니다. 그의 마음은 완고하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가득하여 하느님의 말씀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내 이사야 예언자는 그의 속내를 꿰뚫어 보고 그에게 경고합니다. 다윗 왕실이 백성들을 그토록 학대하고도 마치 그것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하느님 앞에서 경건을 가장하고 불신앙으로 하느님의 은총마저 거절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며 하느님께서 몸소 징조를 보여 주시리라고 예언한 것입니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7,14) 물론 교회는 이사야의 이 예언이 바로 동정녀 마리아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시어 낳으시리라는 예언으로 믿어왔던 것입니다. 아하즈는 하느님의 생각과 뜻 보다 자기의 생각과 판단이 대단한 것처럼 여겼고, 자신이 직면한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결국 그러한 잘못된 생각과 판단으로 말미암아 폐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한 사람의 잘못된 생각과 판단으로 말미암아 유다는 아시리아의 종노릇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하즈와 달리 오늘 복음에서 어머니 마리아는 하느님께 대한 참된 신앙인의 기본자세가 어떠해야 하는 가를 존재와 삶을 통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마리아께서 은총을 가득히 받은 분이신 까닭은 주님께서 마리아와 항상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1,31)는 천사의 아룀에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1,34)라는 말씀은 믿지 못하겠다는 말씀이 아니었지요. 의심이 아닌 확인이 마리아에겐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천사는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1,36)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살다 보면 하느님께서 하신 일을 반사해 비춰 보여 주는 거울과 같은 존재가 필요합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천사로부터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1,37)는 확고한 언질을 듣고서, 자기의 생각과 뜻 보다 하느님의 생각과 뜻을 무엇보다 우선해서 살려고,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1,38)고 응답하셨습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 일이 없으시지만, 인간의 협력을 필요하며, 성모님의 응답으로 하느님께선 가장 탁월한 도구를 갖게 되셨고, 구원의 도구이신 마리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서막이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마음 깊이 다짐해야 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 앞에서 마리아처럼 우리의 마음가짐과 신앙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은 ‘자기의 생각대로’ 사는 게 가장 옳고 또한 그게 성숙한 성인의 자세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에게는 우리 ‘생각대로’ 사는 것이 바람직한 삶이거나 올바른 신앙생활은 아니라고 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어머니 마리아께서 본本으로 보여 주신 것처럼 ‘주님의 생각대로’,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아하즈의 불신앙을 통해서도 인류구원을 위해 임마누엘을 보내실 것을 예언하시고,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 말씀대로’, ‘주님 뜻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다짐을 더 굳게 하는 오늘이 되었으면 싶습니다.
이 점을 우리 마음에 깊이 새기길 바라면서 ‘황지우’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라는 시를 보냅니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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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종종 신부 중에 새벽 미사에 늦게 들어가는 분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물론 신부도 인간이기 때문에 새벽에 일어나지 못해서 늦게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매번 늦는다는 것입니다. 같은 신부의 관점에서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미사를 하기 전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평일 미사는 1시간 전에, 주일과 대축일 미사는 30분 전에 고해소 안으로 들어가서 성사를 주고 미사 준비를 합니다. 신자들이 고해성사를 보기 위해 들어오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이는 저의 미사를 위한 준비이고, 저의 정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급하게 미사에 헐레벌떡 들어가는 신부들을 안타깝게 생각했고, 그러면 안 된다면서 판단하기도 했습니다.
며칠 전, 주일 저녁 미사 때에 부랴부랴 제의방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고해소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곧바로 미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사제관 시계를 잘못 본 것입니다. 시계를 보고 아직도 한 시간이나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시계가 멈춰있었던 것입니다.
제대로 살지 못한다고 다른 신부를 비판하던 저였지만, 저 역시 그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전혀 그러지 않을 것처럼 자신 있게 말했지만, 저 역시 언제든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기 역시도 그렇게 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겸손함을 가지고 있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하느님도 심판하지 않는데, 뭐가 그리 잘 났다고 남을 비판하고 단죄할 수 있을까요? 이런 행동들이 하나의 습관이 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더 나아가 하느님에 대해서도 온갖 불평불만을 하면서 판단하고 있지 않습니까?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을 찾아가서 엄청난 소식을 전해줍니다. 바로 예수님 잉태 소식이지요. 이 세상을 구원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다는 커다란 기쁨입니다. 그래서 가브리엘 천사의 첫 마디가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 성모님의 지금 처지입니다. 당시는 결혼 전에 아기를 갖게 되면, 간음했다는 이유로 투석형을 당해 죽을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기쁜 소식이라 할지라도 거부할 수밖에 없으며, 하느님의 이런 선택은 잘못되었다면서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활동을 가로막지 않습니다. 여기에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활동은 무조건 함께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아셨던 것입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우리의 교만함으로 얼마나 많이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었을까요? 성모님과 같은 겸손함을 통해서만이 하느님의 활동에 함께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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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성령이시여 저를 송두리째>
루카 1,26-38 (예수님의 탄생 예고)
여섯째 달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성령이시여 저를 송두리째>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루카 1,35)
성령이시여
저에게 내려오시어
저를
송두리째
맘껏 가지소서
세상이 저를
빼앗아가지 못하게
성령이시여
저에게 내려오시어
저를
송두리째
밝히 사르소서
어둠이 저를
집어삼키지 못하게
성령이시여
저에게 내려오시어
저를
송두리째
고이 품으소서
탐욕이 저를
유혹하지 못하게
성령이시여
저에게 내려오시어
저를
송두리째
힘껏 휘감으소서
두렴이 저를
얽어매지 못하게
성령이시여
저에게 내려오시어
저를
송두리째
끝까지 이끄소서
의심이 저를
가로막지 못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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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먼저 믿어라>
믿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확인한 후 그에 대해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보지 않고도 그렇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믿기 위해 아는 것이 인간적이라면, 알기 위해 믿는 것은 신성에 가깝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명확히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마태 11,6).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 29)
성경을 보면, 즈카르야는 분향 제단에서 천사를 만나게 되는데 놀라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는 하느님의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즈카르야는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루카 1,18) 하고 그 메시지가 참되다는 것을 증명하는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이미 인생의 경험상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으니 웃기는 소리하지 마시오’라는 마음이 거기 있었습니다. 결국은 메시지가 이루어지는 날까지 벙어리로 지내야 하였고, 비로소 믿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천사를 만나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는 인사말을 듣게 되었는데 몹시 놀라면서도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곰곰이 생각하였습니다.
그런 다음에야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으려 하였습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 1,34) 하느님의 은총은 나의 공로로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은총을 주시고, 은총을 발견하느냐 못하느냐는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마리아의 질문은 곧 어떻게 해서 처녀가 어머니가 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우리의 물음이기도 합니다. 그에 대한 천사의 대답은 명확합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1,37)
믿음은 불가능한 일이 없는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하고 순종했습니다.
우리는 먼저 믿고 곰곰이 생각해야 합니다. 먼저 믿으면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기적이나 표징을 요구하지 말고 먼저 믿으면, 애당초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위대한 일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시련과 고통 안에서 더욱 빛나게 됩니다. 마리아의 대답은 바로 목숨을 내놓는 기도였습니다. 당시 시대 상황으로써는 처녀가 임신을 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지만 당신의 일을 인간과 더불어, 인간을 도구 삼아 하십니다. 인간의 자발적인 협력안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탄생은 하느님의 은총과 거룩한 어머니 마리아의 믿음 안에서 이루어진 열매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의 믿음에 따르는 순명을 통하여 예수님을 낳아드려야 할 때입니다.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는 만큼 우리의 믿음이 더해지길 희망하며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당신의 뜻이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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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동정 성모 마리아의 사랑의 성덕(聖德)>
-침묵, 경청, 순종-
“오! 다윗의 열쇠여,
이스라엘 집안의 홀이시여,
주께서 여시면 아무도 닫지 못하고, 닫으시면 아무도 열지 못하오니,
오시어 죽음의 땅과 어둠속에 앉아있는
우리를 결박에서 풀어 주소서.”
어제에 이어 주님께서 오심을 애절히 청원하는 대림 2부 넷째 날 12월20일, “오 다윗의 열쇠여”로 시작되는 “오! 후렴”입니다. 이런 희망의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으로 살아가는 대림시기입니다. 비단 대림시기만이 아니라 우리의 전생애가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의 기쁨이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인공은 동정 성모 마리아입니다. 역시 희망과 꿈의 마리아 성모님의 태몽입니다. 참으로 순수했던 옛 어머니들은 태몽도 많았는데 요즘의 어머니들에게는 태몽도 사라진 듯합니다. 얼마 전 자매들 피정지도 때 부른 성모님 은혜 노래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소녀들처럼 익숙한 노래인 듯 부르는 모습이 성모님처럼 참 아름다웠습니다.
매일 제가 배밭 사이를 산책할 때 마다 성가처럼 부르는 성모님 은혜입니다. 어머니 은혜를 성모님 은혜로 바꿔 부르는 노래로 벌써 강론에 인용하기 수차례이지만 부를 때마다 새롭습니다. 육신의 어머니는 떠났어도 영신의 어머니 동정 마리아 성모님은 영원합니다.
“높고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
나는나는 높은게 또 하나있지.
낳으시고 기르시는 성모님 은혜,
푸른하늘 저보다도 높은것 같애.
넓고넓은 바다라고 말들하지만,
나는나는 넓은게 또 하나있지.
사람되라 이르시는 성모님 은혜,
푸른바다 저보다도 넓은 것 같애.”
가톨릭 교회도 교리서에서 교회의 어머니이자 어머니인 교회로서 동정 마리아의 복된 신원을 분명히 밝힙니다.
“마리아는 교회의 전형이며, 어머니로서 또 동정녀로서 모범을 보여주신다. 교회는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히 받아들여 그 자신도 어머니가 된다. 실제로 교회는 복음선포와 세례로서, 성령으로 잉태하여 하느님에게서 난 자녀들을 불멸의 새 생명으로 낳는다. 교회는 또한 신랑에게 바친 믿음을 온전하고 깨끗하게 지키는 동정녀이다.”(교리서 507항)
오늘 제1독서 이사야 예언서에서도 동정녀를 통해 태어날 임마누엘 예수님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대림시기 오늘 복음을 통해 실현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과연 눈 밝으신 하느님께서 선택한 동정 마리아 성모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가 평생 모시고 살면서 보고 배울점은 무엇인지 오늘 복음에서 공부하고자 합니다.
첫째, 침묵입니다.
사랑의 침묵입니다. 침묵은 개방입니다. 침묵은 깨어 있음입니다. 침묵은 주님의 살아 있는 현존이자 관상입니다. 침묵은 현대인들에게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이라 일찍이 토마스 머튼은 갈파했습니다. 침묵을 잃어 날로 천박(淺薄)해지는, 즉 얕고 엷어져가는 삶들입니다. 새삼 침묵의 선택, 침묵의 훈련, 침묵의 습관을 통한 영성훈련의 필요성을 절감합니다. 사막에서 하느님을 찾았던 옛 구도자들은 한결같이 침묵과 고독을 사랑했습니다.
갈릴래아 나자렛 벽지에서 살았던 무명의 마리아, 얼마나 깊은 침묵과 관상의 사람이었는지 눈밝은 하느님께서는 당신 천사를 통해 친히 찾아 나섭니다. 하느님의 겸손이 감동적입니다. 참으로 침묵의 사람에게는 그 어디나 꽃자리, 나자렛입니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심지어 하느님도 탓할 수 없습니다. 마리아 성모님처럼 늘 깨어 침묵 중에 준비되어 있으면 주님은 당신 천사를 통해 친히 방문하십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제가 고백성사 시 보속으로 참 많이 써드리는 말씀 처방전 내용입니다. 이 처방전을 받았을 때 “보속이 아니라 보석입니다.” 기뻐 환호하던 어느 수녀님도 오늘 복음 강론 때마다 자주 인용하곤 합니다.
“은총을 가득히 받은 분”
마리아 성모님뿐 아니라 참으로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우리 신자들 모두의 복된 신원입니다. 기쁨의 샘이신 임마누엘 주님이 함께 계시기에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에 놀랐지만 즉시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지 곰곰이 생각하는 동정 마리아 성모님은 과연 관상의 대가, 렉시오디비나의 대가입니다. 침묵의 관상중에 이런 깨달음을 깊이 내면화하는 동정 마리아 성모님의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과연 관상의 대가, 렉시오디비나의 대가인 동정 마리아 성모님입니다. 이런 동정 마리아의 아름다운 침묵의 관상에 감동하신 하느님은 당신 천사를 통해 그 감동의 기쁨을 거듭 표현하며 예수님 탄생을 예고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둘째, 경청입니다.
사랑의 경청입니다. 경청을 위한 침묵이요 겸손의 표지가 경청입니다. 잘 듣는 경청은 대화나 기도시 우선적이자 기본적 필수요소입니다. 새삼 경청 역시 선택이자 훈련이요 습관임을 깨닫습니다. 영성생활에 참 중요한 경청의 훈련임을 깨닫습니다. 상담시도 조언이나 충고보다 잘 듣고 공감하며 위로와 격려하는 일이 절대적입니다.
침묵의 사람이자 경청의 사람, 동정 마리아에 대한 주님의 신뢰가 얼마나 깊은지 주님은 요셉에게 그랬듯이 마리아에게도 은밀한 비밀을, 당신 속내를 밝히십니다. 참으로 경청할 때 감정적 ‘반응reaction’이 아니 인격적 ‘응답respondence’의 대화가 펼쳐집니다. 두분간의 깊은 주고 받는 관상적 대화인 기도가 펼쳐집니다. 주님의 천사의 최종적 응답입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셋째, 순종입니다.
사랑의 순종, 믿음의 순종입니다. 자발적 사랑의 순종은 영성의 잣대입니다. 참 영성의 진위를 검증하는 잣대가 순종입니다. 정말 성숙한 사람이 순종합니다. 이래서 순종이 여정이요, 저물어가는 여정이 아니라 순종으로 여물어가는 여정인 것입니다. 새삼 순종 역시 선택이자 훈련이요 습관임을 깨닫습니다. 참 중요한 영성훈련이 순종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말 그대로 예스(yes)의 사람, 순종의 사람, 믿음의 사람, 동정 마리아 성모님입니다. 평생을 한결같이 이렇게 사셨습니다. 자발적 사랑의 순종에 하느님의 기쁨도 차고 넘쳤을 것입니다. 삶은 순종입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이요 이보다 크고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이래서 순종 역시 하느님의 일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상의 크고 작은 일에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충실할 때 마지막 순종의 죽음도 잘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육신의 어머니는 떠났어도 영혼의 어머니 마리아 성모님은 영원하십니다. 하느님은 성모님을 통해, 교회를 통해,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끊임없이 낳으시고 기르시며, 참사람이 되라 이르십니다. 참으로 평생 배워 훈련하여 습관화해야 할 침묵, 경청, 순종과 사랑의 성덕입니다. 주님을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를 끊임없이, 한결같이 영적으로 낳으시고 기르시며, 참사람이 되라 이르십니다.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랴? 누가 그 거룩한 곳에 설 수 있으랴?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헛된 것에 정신을 팔지 않는 이라네.”(시편 24,3-4ㄱ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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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사랑의 거처>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마리아께서 당신은 남자를 알지 못한다고 하시는데 저는 즉시 남자는 알지 못해도 하느님은 아는 분이시다는 묵상을 했습니다.
그렇다고 남자를 몰라야만 하느님을 안다고 얘기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남자만 알고 하느님을 모르는 여자가 있긴 하지만 남자를 몰라야만 하느님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이렇게 말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남자를 모르는 사람이 하느님을 더 잘 알 수는 있을 거라고. 물론 이것도 모두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다만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남편이 없는 여자와 처녀는 몸으로나 영으로나 거룩해지려고 주님의 일을 걱정합니다. 그러나 혼인한 여자는 어떻게 하면 남편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세상일을 걱정합니다. 이처럼 혼인하는 사람도 잘하는 것이지만 혼인하지 않는 사람은 더 잘하는 것입니다.”
사실 잘 아는 것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특히 사람은 사랑이 없이 잘 알 수 없고, 하느님은 더욱더 사랑 없이 잘 알 수 없습니다.
아무튼 마리아는 남자를 알지 못하기에 사랑이 갈리지 않았고, 그래서 하느님의 어머니 되기에 온전히 합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성모 무염시태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합당한 거처가 되도록 미리 축성하신 것 말입니다.
사랑이 우리에게도 오십니다.
사랑의 거처가 됩시다.
우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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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1,31)
<돌아와라!>
오늘 복음(루카 1,26-38)은 '예수님의 탄생 예고'입니다. 어제는 예수님에 앞서 파견되는 세례자 요한의 출생 예고를 들었는데, 오늘은 예수님의 탄생 예고를 듣습니다.
지난 월요일부터 전례표를 보면 '대림 제3주간 월요일'이라고 하지 않고 12월 18일이라고 하고, 12월 19일, 12월 20일……이라고 합니다. 이 숫자의 의미는 바로 '주님의 성탄이 임박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성탄이 임박한 이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바로 '청소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구유를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오시는 주님께서 내 마음 안에서 탄생하실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요즘 '판공성사'로 바쁩니다. 월요일에는 거창본당, 어제는 함양성당, 오늘은 울 본당인 합천본당에 판공성사가 있는 날입니다. 다른 본당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주님께서 허락해 주신 이 은총의 시간에 감사드리면서, 모두가 판공성사를 잘 보고 기쁜 마음으로 주님의 성탄을 맞이했으면 좋겠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늘 우리가 당신께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그리고 돌아오기만 하면 이유를 묻지 않으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탕자의 비유인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가 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돌아와라!"
고해소에 들어가기까지가 참으로 힘든 것 같습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두려워하지 말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로 나아가십시오. 그러면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모든 허물을 탕감해 주십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자매님(형제님)의 모든 허물을 다 받아주시고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새로운 마음으로 기쁘게 새 출발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가오는 성탄도 기쁘게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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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ZQdIliVVMl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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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 1, 31)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마리아는
말씀 안에서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만납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살아내는
힘을 얻습니다.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간직하고 있을
말씀 한 구절의
의미입니다.
빛이 되어
줄 수 있는
말씀의
탄생입니다.
말씀은
사람을
멀리하지
않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십니다.
말씀은
두려움을
이겨내는
희망의 참된
씨앗입니다.
말씀의 길은
순명의 길입니다.
순명 안에
진리도 있고
질서도 있습니다.
이것이
은총의
시작입니다.
말씀이
예수라는
이름을
지어 주십니다.
이름 속에
길이 있습니다.
예수라는
그 이름 위에서
시작되는
우리 믿음의
활약상입니다.
새로운
시대정신은
말씀이
사람이 되신
말씀의 순명에서
비롯됩니다.
말씀에
순명한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몸소 하실
일이십니다.
그 말씀이
우리에게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드리는
대림의
끝자락입니다.
기다림도
말씀이고
탄생도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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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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