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양귀비
청호
꽃을 좋아하는 분이 두메양귀비라고 하며 가져다 준 씨앗을 뿌렸다. 정작 핀 것은 개양귀비였다. 이른 아침이면 가녀린 꽃대에 한 송이씩 피는 꽃은, 진주홍 얇은 습자지 같았고 선명한 색깔은 싱그러웠다. 꽃이 진 후 씨앗을 맺은 것은 흡사 작은 연밥 같이 예뻐서 뜻밖의 기쁨이었다.
처음에는 파란 잔디 위에 보이는 주홍색이, 내가 쓰던 한지 조각이 줄 알았다. 가까이 가서 보았더니 개양귀비 꽃잎이었다. 오후가 되면 한 잎 한 잎 힘없이 떨어지는 단 하루의 영화(榮華)였다.
마치 착하고 아름다운 젊은 사람이 세상을 떠나는 것 같았다. 개양귀비 꽃잎을 볼 때면 ‘속절없는 사람과 허망한 사랑.’ 이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하루 만에 지는 꽃은 비슷한 계절에 피는 원추리도 있다. 한 꽃대에 여러 봉오리가 맺혔다가 차례로 피고 져서 개양귀비 같은 안타까움은 없다.
나도 한 때는 금방 피고 지는 꽃이 좋았다. 이십대 때, 어머니께선 집 옥상에 해마다 꽃과 호박을 심고 잘 가꾸셨다. 가을이면 늙은 호박이 몇 덩이나 영글어 보는 사람들은 부러워했다.
어느 날 옥상에서 빨래를 널다 마주친 어머니께 ‘저기 주홍색으로 핀 꽃 이름이 무엇이냐’고 여쭈어 보았다. 오십대 중반이던 어머니께선 ‘한련’ 이라고 하시며, 늦가을까지 오래오래 피어서 좋은 꽃이라고 하셨다.
시간 앞에 오만 방자한 청춘이던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 꽃은 빨리 지는 것이 매력 아니예요? 그렇게나 오래 피면 지루해서 어떡해요.”
사춘기에 접어들며 시간이 만드는 늙어가는 모습에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아름다움이 변해 가는 것은 차라리 죽음보다 참혹하다는 생각을 하던 시절이었다.
얼마 전 영산홍이 만발한 마당에서 몇 사람이 꽃을 구경할 때였다. 꽃의 개화기간을 이야기 하는데 어떤 사람이 내가 한 말과 똑 같은 말을 했다.
“내가 젊을 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지요. 아직 청춘이라 그래요. 청춘은 자신이 꽃이라서 다른 꽃이 필요 없어서 그렇게 말하죠.”
내 말에 함께 있던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이제는 잠시 피고 지는 꽃이 아쉽다. 어머니가 즐겨 심던 한련, 백일을 핀다는 배롱나무나 초여름부터 서리가 내릴 때 까지 피는 분홍 바늘꽃을 많이 심는다. 비록 눈에 띄도록 아름답지 않아도 오래도록 피는 것을 보면 그지없이 대견하고 고맙다.
이젠 나도 나이가 들었고, 연세 높으신 어른이 돌아 가셨을 때 ‘편히 하셨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았다.
세월이 흐를수록 이 세상은 영혼의 성숙을 위해 배우러 온 학교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개양귀비가 지듯 가졌던 것을 잃고 배우는 것도 있었다. 어떤 일은 받아들이지만 어떤 상실은 죽음과도 같은 아픔을 겪어야 한다.
아내는 암수술을 마쳤는데, 약혼을 한 막내아들이 중앙선을 넘어온 트럭으로 사고를 당한 경우를 보았다. 화장터에서 비통하게 우는 늙은 아버지를 그냥 보고 서 있을 수가 없어서 안고 있었다. 결코 회복 할 수 없는 상실의 아픔을 온 몸으로 느꼈기 때문이었다.
사람이나 상황이 시간 앞에 무상하지 않은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이 세상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진리를 배우지 않으면, 불행할 수밖에 없는 쓸쓸한 자각을 한다. 이 자각으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며 겸손하게 된다. 더 시간이 가면 나쁜 일이 좋아지는 무상을 보게 되기도 한다.
모든 존재에게 해당되는 진리가 진정 내 것이 되려면 치러야 할 대가가 있었다. 내게 남은 삶의 앞에 병과 사(病死)가 설령 추루하게 만들지라도 무상을 알게 해 준 쓴 값으로 여기리라.
젊은 시절에는 아름다웠을 모습이지만 이제 얼굴에 빛이 사라져 가고 있는 사람을 볼 때가 있다. 육신의 아름다움 대신 늙어가는 얼굴 속에 영혼이 맑게 빛나는 사람도 있다. 그럴 때 열심히 살아 온 그 손이 잡아 보고 싶고, 살아 온 세월에 존경을 표하고 싶다.
꽃은 잠시 피고 져야 좋다고 했던 교만한 청춘도 이제 시들어 가고 있다. 나는 어리석어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이 중요했다. 내가 개양귀비 꽃잎처럼 일찍 흩어졌더라면 미처 몰랐을 일이다.
이제 무상의 다른 모습도 알았다. 물질로 이루어진 현상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도 바뀌는 무상이 있었다. 긴 시간을 살며 알게 된 것이어서 세월이 스승이다
꽃이 진 자리마다 맺고 있는 무성한 열매가 예쁘다.
* 개양귀비 꽃말 : 약한 사랑, 덧없는 사랑
청호스님 에세이 <내안의 풍경>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