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시 묘도 봉화산 지도
[여수시 묘도&이순신 대교] 지도
여수시 산 위치도
전남 여수시 묘도
묘도는 전라남도 여수시 묘도동에 딸린 섬으로 동경 127°43′, 북위 34°53′, 광양만의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면적 9.46km2, 해안선 길이 16.3km, 인구는 536가구 1,343명(2010년)이다.
지명 유래
섬 모양이 고양이와 같이 생겨서 섬 이름을 ‘묘도’, ‘고양이섬’이라 했다고 한다.
우리말 이름으로는 ‘괴섬’인데 이 지명은 창물 해변에 있는 암혈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 암혈을 ‘괴입(묘구)’이라 부르고 있다.
묘도(猫島)는 광양과 여천 사이의 광양만 중심부에 자리 잡은 섬으로 육지인 여천 월내에서 1.5km 떨어진 섬이다.
묘도는 총면적이 9.54km2로 광양만에서 가장 큰 섬으로 최고점은 봉화산(烽火山, 246m)이며, 구릉성 산지가 흩어져 있으나 중앙부와 남쪽은 경사가 완만하여 촌락과 농경지가 분포한다. 다섯 개 마을이 형성되어 있으며 현재 536세대에 1,343명(2010년 현재)이 살고 있다. 해안은 사빈 해안이 많고 간석지가 넓게 발달하여 있다.
묘도(猫島)의 묘 자는 고양이라는 뜻으로 인근에 있는 영취산 상봉에서 내려다보면 고양이와 독수리가 서로 먹이를 넘보고 있는 것 같아, 섬 모양이 고양이처럼 생겼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서씨 집안은 들어와 기를 펴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묘도의 지명은 우리말 이름으로 ‘괴섬’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창물 해변에 있는 암혈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 암혈을 ‘괴입(묘구)’이라 부르고 있다.
묘도는 역사적으로 이순신 장군이 왜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모두 물리친 곳이다. 현대사에는 가난을 물리치고 새로운 경제 대국으로 발돋움하는 모습을 중심에서 지켜보는 섬이다. 광양제철소를 바라보며 달리는 해안 도로. 묘도 북쪽에 위치한 금호도 일대에는 갯벌을 매립하여 광양제철소가 세계적인 규모로 건설되어 있다.
원래 묘도는 광양만을 비롯한 근해에서 굴·꼬막·피조개의 양식업이 활발하며, 멸치·장어·낙지·개불 등이 수확되었으나 30여 년 전부터 오염이 되기 시작하여 근래에는 소득이 거의 불가능해진 상태이다. 이곳 해안선을 따라 광양제철소와 컨테이너 부두를 마주보고 있는 묘도의 온동·도독·광양포 마을은 주 소득원이었던 바지락과 꼬막을 제대로 수확할 수 없게 되었으며, 온동 마을은 공장에서 나오는 악취와 소음, 분진 등으로 견디기 어려운 마을로 변해 갔다. 결국 마을은 섬의 남쪽 창촌 마을에 집중되어 있다.
묘도에서는 해마다 정월 대보름에는 마을 주민들이 모여 애용노래·가래질노래·술배노래·배치기소리 등의 흥겨운 노래와 더불어 민속놀이인 띠벳놀이라는 마을의 액을 태워 버리는 놀이를 즐긴다.
여수시 삼일면 월내항(묘도동 선착장)에서 묘도로 새벽 여섯 시부터 저녁 열 시까지 삼십 분 간격으로 운항하는 철부선 덕분에 묘도의 교통이 육지와 다를 바 없이 발달되어 있다. 도선비도 대경도처럼 저렴하여 자동차 3,000원, 사람 600원으로 다른 섬의 절반 가격으로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여수 삼일면 월내 선착장에서 묘도행 대형 차도선을 타고 묘도 선착장에 도착한다. 선착장 오른쪽으로 바다에는 몇 개의 교각이 들어서 있다. 다리 공사가 진행 중이다. 묘도동 선착장에서 바로 앞 묘도까지 이어지는 다리 공사다. 바로 이순신 대교의 일부가 될 것이다. 묘도와 선착장 사이에 조그마한 무인도가 있는데 도선장에서 무인도까지 교각이 일고여덟 개가 들어서 있다. 이 사이에는 교각이 촘촘히 박혀 있지만 무인도와 묘도 사이 바다에는 교각이 없다. 이 방향으로 배가 드나들기 때문일 것이다.
배에서 내리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태극기 물결이다. 묘도에서도 가장 번화가인 이곳은 태극기가 365일 휘날린다고 한다. ‘태극기 시범 마을’로 지정되어 지난 2001년에 마을 전체에 태극기를 달기 시작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마을 회관을 비롯하여 각 가정에 똑같은 6m 높이의 철제 국기 게양대를 만들었다.
묘도항에는 철부선을 비롯하여 제법 규모가 큰 어선들이 정박해 있다. 방파제에서 보면 건너편 해안 일대에는 여천단지가 보인다. 그 뒤로 보이는 산이 진달래로 유명한 여수 영취산이다.
해안 도로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또 다른 나루터인 포구가 있다. 움푹 들어간 나루터에는 조그마한 어선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안으로 더 들어가면 마을이 나타난다. 가운데는 논이고 그 주변으로 집들이 있는 전형적인 산촌 형국이다. 이곳이 행정 중심지인 묘도동이다. 주민 자치센터를 비롯하여 관공서와 학교 그리고 우체국 등이 들어서 있어 행정 중심지다운 이곳이 ‘창촌 마을’이다. 창촌 마을은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창업하게 된 후에 이곳에 마을을 형성하여 주민이 운집하며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특히 창촌이란 지명은 어느 때인지 상세하게 기록은 없으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에 이 충무공과 명나라 진인도독과 연관이 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이순신과 진인도독이 왜군 소서행장 막하 부대를 무찌르기 위해 이곳 성 도독에다 진을 치고 있으면서 육지로부터 곡식과 무기류 등을 현 묘도초교 터에다 창고를 만들어 보관해 오던 곳이라고 한다. 그 후 이곳 세 개 마을에서 나오는 오곡과 어패류, 건어물 등을 창고에 보관, 여수·순천 등지에 수송한 곳이라고 해서 창촌이라는 지명이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창촌 마을에서 고개를 넘어가다 보면 왼쪽에 공사 현장이 있는데 이곳이 다리와 다리를 잇는 접속 도로 구간이다. 이 공사장 왼쪽으로 내려가면 ‘광양포’라는 조그마한 마을이 있다. 예전에는 ‘갱개’라고 불렀다고 한다. 얕은 바다 즉 연안을 방언으로 ‘갱본’이라 부른다. 따라서 갱개는 바닷물이 들어와 포구를 만든 곳이다. ‘광양포’는 갱개의 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음차한 것이다.
도로를 따라 조금 더 가면 마을이 있는데 이곳이 ‘묘읍’이다. 지형적으로는 묘도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다. 이곳은 다른 마을과는 달리 대체로 평지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마을 앞은 바로 논이고 사방이 야트막한 산으로 둘러싸인 요지이다. 1450년경에 묘도의 고을과 넓은 해안을 끼고 있었다고 하여 고을 개포의 이름을 따서 ‘고을개’라 불러 오다 조선 말기 묘도의 세 개 촌락 중 가장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묘읍’이라 바꾸었다고 한다.
묘읍을 지나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길은 산 중턱을 구불구불 가로지른다. 어느 정도 달려가다 보면 주변에 공동묘지가 많이 보인다. 만입지의 갯벌은 방조제가 설치되어 논농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인동 장씨 세거지’ 표지석을 지난다. 이어 내리막길이 나타나는데 중간에 마을 표지석이 있고 그 뒤로 비석이 하나 있다. 이곳이 온동 마을이 시작되는 지점이고 뒤의 비석은 효부 기념비다. 광양군 골약면 장길포도 건너다보인다.
‘온동 마을’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1591년까지 ‘온돌’ 또는 ‘온돌포’라 불렸다. 이 마을이 구들방으로 부르게 된 것은 이곳에서 한옥을 짓게 되면 방에다 구들을 놓게 되는데 여기서 방독을 대량으로 생산하여 여수·여천지구에 구들장을 옮겨 사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마을은 산 아래로 길게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해안 도로가 길게 이어져 있다. 모두 고만고만한 집들. 마을 뒤에는 산 중턱까지 밭이다. 이곳에서는 마을 회관이 가장 최근의 건물이다. 이곳에는 다른 섬에서는 보기 힘든 스포츠센터도 있다. 온동 복지회관과 나란히 붙어 있는 스포츠센터는 단층짜리 하얀색 건물이다. 게다가 사진관도 있다.
제법 길게 이어진 해안 도로를 얼마 동안 지나니 또 다른 마을이 나타난다. ‘도독 마을’이다. 임진왜란 전적지로서 유명한 곳이다. 진인 도독이 주둔했다고 해서 도독 마을과 도독성이 있다. 이곳에서 이 충무공과 진인은 진을 치고 왜군의 소서행장과 그 부하들의 퇴진을 차단하여 왜군들을 모두 물리쳤다.
산 정상에 높이 2m, 길이 2km에 달하는 도독성이 남아 있다. 성 내에는 축구공처럼 둥글게 깎은 석탄이 뒹굴고 있고 석축과 포대를 설치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이곳 지형은 경사도 70도에 달하고 성내 면적의 70%가 돌밭으로 되어 있어 유사시에는 석전에도 대비한 듯하며 임진왜란 이전부터 전초기지로 이용했던 봉화대가 남아 있다.
방파제 끝에서 마을을 바라보면 도독 마을 뒤에 평암산이 솟아 있다. 동서로 길게 이어진 완만한 능선이다. 그리고 그 산 아래 서북 방향으로 계곡을 만들었고, 집들은 계곡을 벗어나서 해안에 치우쳐 있다. 남쪽만 산으로 막혔을 뿐이고 동서와 북은 활짝 열려 광양과 대면하고 있다.
도독 마을 왼쪽에 거대한 공사가 진행 중이다. 여수-묘도-광양간 여수 국가산업단지 진입도로 공사다. 2012년 세계박람회 개최 전까지 완공을 목표로 추진하고 있는 이 다리의 이름은 ‘이순신 대교’. 이 구간이 연결되면 현재 여수와 광양간 60km 거리를 오가는데 약 80분 정도가 소요되지만 다리가 완공될 경우 약 10km 정도로 거리가 단축되고 오가는 시간도 불과 1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이순신 대교의 양쪽 주탑의 높이는 덴마크의 그레이트벨트교(254m)보다 높은 세계 최고 규모인 해발 270m로 서울의 63빌딩(249m)보다 높다. 아파트 100층이 넘는 규모다. 주교각 사이의 거리인 경간이 1,545m이다. 이순신 장군의 출생 연도와 동일한 숫자로, 경간은 일본의 아카시 대교(1,991m)와 중국의 시호우멘교(1,650m) 등에 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로 길다.
2012년이면 완공될 광양만을 가로지르는 이순신 대교가 완공되면 섬을 다니던 도선이 없어질 것을 생각하니 선원들의 마음이 안쓰럽기만 하다.
관광 명소
도독성
봉화산 정상에 높이 2m, 길이 2km에 달하는 도독성이 남아 있다. 성 내에는 축구공처럼 둥글게 깎은 석탄이 뒹굴고 있다. 또한 성 주위에는 석축과 포대를 설치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이곳 지형은 경사도 70도에 달하고 성 내 면적의 70%가 돌밭으로 되어 있어 유사시에는 석전에도 대비한 듯하며 임진왜란 이전부터 전초기지로 이용했던 봉화대가 남아 있으며 현재도 산정에 올라가면 돌로 쌓아 둔 봉화터도 남아 있다. 구전에 의하면 왜군이 침입 시 한양까지 이 봉화산을 통하여 즉시 연락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