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정 초기의 언론 현황
1945년 9월 11일 미 제24군사령관 하지 중장은 한국 기자들과 첫 회견 자리에서 미국식 언론의 자유를 천명하고, 한국 언론도 미국 언론처럼 대중을 이끄는 데 힘써 달라고 했다. 미국식 언론을 신생 한국에 심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정계는 좌파 세력이 뭉쳐 빠르게 좌경화하고, 언론계도 진보적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좌파 논조가 강해졌다. 국토는 미군과 소련군이 분할하여 점령하면서 미군은 미국식으로 남한을, 소련군은 소련식으로 북한을 통치하기에 이르렀다.
우파 세력은, 신문 제작의 기본인 인쇄 시설을 좌파 세력에게 선점당하여 신문 발행이 어려워졌다. 10월 11일 아놀드 미 군정장관이 ‘인민공화국’을 부인하자 매일신보는 이를 반박하고, 미군정은 2일 간 정간 처분을 내리는 것으로 응수했다. 10월 20일에는 신문을 접수하고, 주주총회를 열어 제호를 ‘서울신문’으로 바꾸면서 새 출발을 했다. 미군정 질서라는 새로운 언론 질서가 자리를 잡았다.
미군정의 언론 정책에 따라 새로운 신문이 속속 창간됐다. 미군정이 시작되면서 9월 19일 서울에서 권오직(權五稷)이 ‘해방일보’, 9월 22일 서울에서 장도빈(張道斌)이 ‘민중일보(民衆日報)’, 9월 25일 서울에서 ‘동방신문(東方新聞)’, 10월 1일 전주에서 ‘전라민보(全羅民報)’, 10월 4일 서울에서 이종렬(李鍾烈)이 ‘동신일보(東新日報)’, 10월 5일 서울에서 정인익(鄭寅翼)이 ‘자유신문(自由新聞)’, 김제영(金濟榮)이 ‘신조선보(新朝鮮報)’, 10월 7일엔 인천에서 고주철(高珠澈)이 ‘대중일보(大衆日報)를 냈다.
10월 9일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解放日報)’가 나오고 10월 10일 광주에서 선미봉(宣美峰)이 ‘광주일보(光州日報)’, 10월 11일 서울에서 김승학(金承學)이 ‘독립신문(獨立新聞)’, 대구에서 김영보가 ‘영남일보(嶺南日報)’, 10월 24일 ‘조선문예신보(朝鮮文藝新報)’, 11월 1일 ‘중앙신문(中央新聞)’, 11월 10일 ‘대공일보(大公日報)’, 11월 25일 ‘대동신문(大東新聞)’이 나오는 등 서울 시내에만 30개가 넘는 신문이 발행되고, 이들은 강한 정치색을 보였다.
1940년대 일제가 폐간한 ‘조선일보(朝鮮日報)’가 11월 23일 복간되고, ‘동아일보(東亞日報)’는 12월 1일 복간됐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일제 식민지하의 사시(社是)를 그대로 계승하여 광복된 신생 한국에서 신문을 발행했다. 이때 다른 신문은 주로 선동을 위해 발행됐지만 질과 양에서 미흡하여 그 영향력은 미미했다.
일제치하에서는 반일과 항일을 애족이자 애국으로 이해하였다. 일제 총독에 대한 저항은 애국으로 이어졌다. 일제에 대한 냉소적· 비협조적인 자세와 자조적· 비타협적인 행동은 기사에서 은유적이고 우회적인 방식으로 나타났다. 아울러 일제를 비판하거나 평론하는 기사는 한국 독자의 사랑을 받았다. 일제에 저항하던 언론의 기질, 냉소주의, 자조주의, 식민지 언론의 특성 등 저항적이고 권력 비판적인 한국 언론 활동의 전통은 해방이 되고서도 오랜 기간 이어졌다.
1945년은 감격스런 해방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언론도 새로운 시대를 구가하면서 새 신문들이 창간되고, 일제 시대의 신문도 복간되는 격동의 해였다. 하지만 언론인 테러가 잇달아 일어나 사회는 불안했다. 언론계에서 좌파가 기선을 잡았으나 민족 진영의 언론도 곧 전열을 정비하고 입지를 강화해 나갔다.
정계는 좌우파로 갈리고 물가는 치솟고 사회는 불안하였다. 언론계는 이를 그대로 반영하듯 흥분하고 좌우 논조로 서로의 주장을 강조하는 ‘정론신문(政論新聞)’ 역할을 수행했다.
좌우파의 대립, 선동
진보 세력과 민족 진영 세력 간의 갈등은 점점 깊어갔다. 1945년 12월 25일 모스크바 미·영·소 외무장관 회담에서 소련 외상이 ‘조선신탁통치안’을 제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온 나라는 ‘반탁’과 ‘친탁’으로 분열되고, 언론계도 둘로 갈라져 논조를 분명히 했다. 자유로운 표현은 이를 더욱 가열시켰다.
12월 말, 동아일보 송진우 사장이 피살되고 같은 날 우파 청년들이 조선인민보 사옥을 습격했으며, 1월 2일에는 사옥에 수류탄을 던져 시설을 일부 파괴했다.
1946년 1월 2일 조선공산당이 신탁 통치를 지지하면서 좌우익이 격렬하게 대립했다. 언론계는 이른바 진보적 민주주의 노선을 지지하는 회색 내지 좌파 신문의 독무대가 되다시피 한 미군정 초기를 지나 ‘신탁 통치안’을 에워싸고 좌우가 대립했다. 좌는 우를 ‘반동 신문’, 우는 좌를 ‘매국 신문’이라고 성토했다. 같은 해 1월 7일 좌파 청년들이 대동신문 사옥을 습격했다.
1946년 1월 16일 미·소공동위원회 첫 예비 회담이 서울에서 열리고, 좌우익이 따로 3·1절 행사를 하기에 이르렀다. 언론계도 반탁과 친탁 노선으로 분열되며, 곧 우익 언론과 좌익 언론으로 뿌리를 내리게 됐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한성신문, 대동신문, 대한독립신문, 민중신문 등은 노선을 분명히 나타냈고, 조선인민보, 자유신문, 해방일보, 서울신문, 중앙신문, 현대일보, 독립신문, 중외신문 등은 찬탁 논조를 지켰다. 같은 해 5월 15일 해방일보를 찍던 조선정판사가 위조 지폐를 발행하다가 발각돼 5월 18일 미군정이 신문 발행 정지 처분을 내렸다.
언론의 흥분 시대이며 특히 좌익지의 홍수 시대인 정론지 시대였다. 하지만 미군정 당국은 1946 5월 29일, 신문과 정기 간행물 허가제인 신문·잡지 등 정기 간행물에 관한 미군정 법령 제88호를 공포하고 신문을 규제하기 시작했다. 미군정의 언론 정책이 변했다.
우파 신문의 약진
미군정은 법령 제88호를 공포하자마자 무책임한 언론을 단속했다. 허위보도를 한 좌파 신문 ‘인천신문(仁川新聞)’과 서울신문의 인천 특파원 등 40 여 명을 검거하고 우파 신문 대동신문도 무기한 정간 처분했다. 이어 자유신문, 조선인민보의 관계자를 체포했다. 1946년 8월 8일엔 조선인민보 홍증식 사장과 김오성(金午星) 편집국장을 선동죄로 구금했다. 8월 18일에는 전라남도의 좌파지 ‘호남신문’을 폐간하고, 9월 6일 조선인민보, 현대일보, 중앙신문을 발행 정지 처분했다.
좌파 언론인을 검거하고 좌파 신문을 규제하자, 좌파 세력의 선동· 파괴 활동이 더 늘어났다. 1946년 9월 7일 조선공산당의 간부 박헌영(朴憲永). 이주하(李舟河), 이강국(李康國)의 체포령이 내려지고 좌파 신문은 정치 선동에 앞장섰다. 인쇄 노조가 파업하고 철도, 전화, 전신, 전기가 마비됐다. 학원가에서는 동맹 휴학이 일어났고 10월 1일 대구에선 폭동이 일어나 극도로 혼란에 빠졌다.
1946년은 해방의 감격과 흥분이 서서히 사라지고 혼란과 갈등이 심화되면서 좌우익이 극렬한 대립을 한 한해였다. 언론계도 좌경지가 주도하는 분위기에서 우일 민족지가 일어났다. 좌경지가 쇠퇴하면서 좌우익지가 대립하는 상황으로 변했다.
1947년이 되면서 새로운 신문이 계속 나왔다. 우파지 ‘세계일보(世界日報)’와 ‘민중일보(民衆日報)’가 나왔고, ‘문화일보(文化日報)’, ‘대중신문(大衆新聞)’, ‘우리신문’, ‘광명일보(光明日報)’, ‘노력인민’, ‘중외신문(中外新聞)’, ‘독립신보(獨立新報)’, ‘국제일보(國際日報)가 좌파지로 나타났다. 좌우파 신문 간의 암투와 테러가 이어지고 언론계의 주도권 쟁탈전은 더욱 치열해졌다.
이런 와중에도 1947년 4월 5일 곽복산(郭福山)이 새 시대의 우수한 언론인을 양성하기 위하여 서울 을지로 7가에 조선신문학원을 창설하여 주목을 받았다.
1947년 7월 19일 여운형(呂運亨)이 암살당하고 8월 1일 우파의 신문 기자 조직 조선신문기자협회가 결성되면서 좌우파 언론간 힘 겨루기는 좌파 우세에서 우파 우세 쪽으로 기울었다. 민족 진영 언론의 논조가 활기를 띄었다. 해방 후 줄곧 한국 언론을 주도하던 좌파의 영향력이 꺾이고 우파 언론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8월 11일 미군정 당국은 남로당 당수 허헌(許憲)을 검거하면서 남한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불법이라고 선언했다. 이 조치로 남한의 모든 좌파 신문은 지하로 들어가고 좌파 언론인은 우파 신문에 위장 취업하여 미군정에 대한 비난을 지속했다.
미·소공동위원회, 국내 주둔 외국군 철수 문제, UN 감시 아래 전조선 총선거 실시 문제 등이 제기됐고 1947년 10월 20일 미·소공동위원회 소련측 대표가 철수했다. 11월 중순 유엔 총회는 “조선에서 총선거를 통해 정부를 수립하고, 정부가 수립된 뒤에 미·소 양국군이 철수한다"는 결의를 했다.
우파는 이승만(李承晩) , 김성수(金性洙)가 주축이 돼 유엔총회 결의를 환영했고, 중도파는 김구(金九)가 주축이 돼 전면적인 반대를 하고, 좌파도 맹렬히 반대했다. 동아일보의 장덕수(張德秀) 취제역이 12월 2일 자택에서 피살됐다.
좌익과 우익의 극한 대립은 계속되고, 이런 양상은 언론에 그대로 반영되면서 1947년이 저물어갔다.
1948년이 되면서 유엔총회는 2월 26일 “조선에서 가능한 지역에 총선거를 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여 남한만 따로 단독 정부를 수립하는 방안이 급류를 타기 시작하고 신탁 통치 없이 한국을 독립시키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2월 8일 창간한 ‘평화일보(平和日報)’가 표준형 대판으로 신문을 제작하자 다른 신문도 이에 따랐다.
4월 19일 김구와 김규식(金奎植)이 북한으로 가서 남북 협상에 참여했으나 남북간 군사적 긴장은 더 높아만 갔다.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항쟁이 일어나고 군대가 개입하여 희생이 커진 후 12월 말에야 진압됐다.
남북이 대립한 혼란 속에서도 처음으로 총선거가 실시돼 5월 10일 좌파의 선거 저지 운동과 좌파 언론의 선동에도 불구하고 제헌 국회의원을 선출했다. 5월 31일 제헌 국회를 개원하고 이승만을 의장으로 선출했다.
4월 28일 좌파지인 ‘독립신보’의 고경흠(高景欽) 주필과 배은수(裵恩受) 편집국장을 체포했다. ‘조선중앙일보’와 ‘신민일보’ 간부를 체포한 5월 8일 동아일보 편집국과 공장이 방화로 불탔다.
제헌 국회는 7월 17일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하여 선포하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므로써 3년 간의 미군정은 막을 내렸다.
일본식 제작법, 미국식 이론
1945년 8월 15일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3년 간은 그야말로 격동기였다. 해방과 더불어 새 신문이 줄이어 창간되고, 조선일보와 동이일보가 복간되면서 한국 언론은 스스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식민지 언론 사상에 시달리고 길든 언론이, 미군과 함께 상륙한 미국식 자유주의 언론 사상과 신문 이론을 접하게 되고, 일본을 통해서 접할 수 있던 서구 문물을 미국이라는 창구에서 직접 접했다. 그것도 고급 문화가 아니라 미국 군인을 통한 GI 문화와 선교사를 통한 종교 문화를 먼저 받아들였다.
좌우파 간의 언론 대결은 민족 분열의 일상으로 치닫고, 정치 테러는 폭력과 암살로 이어졌다. 더욱이 남한에는 제지를 생산할 수 있는 시설이 없었고 전력 공급이 부족하여 신문지 공급이 원활하지 못해 신문을 제작하지 못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타블로이드판 한 장(양면 2쪽)으로 사회가 필요로 하는 정보를 제공하고 논평을 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해방이 되면서 신문을 제작할 줄 아는 사람은 일제 시대 식민지 일본 언론에 종사하던 사람들이었고, 이들이 일본 신문 시설을 접수하여 신생 한국의 신문을 제작하는 주역이 됨으로써 일본 언론 문화가 우리나라에 고스란히 남았다. 언론 이론과 사상은 미국식이, 실무는 일본식 그대로 남는 묘한 언론 문화가 탄생하였다. 일본식 신문 제작 방법과 미국식 신문 이론이 접목하게 된 것이다.
19세기 말 개화기에 외국 문물을 소개하고 이를 도입하는 창구가 되다시피 한 신문이 이제는 새로운 국제 질서와 서구의 언론 사상을 받아들였다.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언론이 수행하여야 할 역할에도 눈 뜨게 됐다. 일제 시대에 일본에 저항하는 일이 곧 민족을 위하는 일이고, 애국하는 일이라고 믿었던 언론에 저항의 대상이던 일본 제국주의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선망의 대상으로서 해방자 미국이 들어섰다.
좌파 신문의 몰락
한 나라의 독립은 국가 창업으로 이어진다. 창업은 스스로 할 때 자생할 수 있는 역량이 생기고 독창적인 문화가 만들어진다. 외세의 힘으로 더욱이 국제 정세의 세력 균형이라는 틈새에서 이루어 질 때 이러한 자생력이 발휘되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린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독립 선언이 이루어진 지 한 달도 못 된 9월 9일 평양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들어 서고 남과 북의 대결 구도가 분명히 드러났다.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자 좌파지는 도태되고 우파지가 주도권을 장악했다. 이 때 신문은 대개 타블로이드판이고 활자가 인쇄소 활자여서 신문마다 그 모습이 달랐다.
정부가 수립된 후인 9월 22일엔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 공포됐다. 10월 22일 전라남도 여수에서 제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켜 순천으로 확대되고, 광주까지 진출하여 전라남도 남부 일대거 무법 천지로 변하고, 경찰 가족과 민족 진영 인사가 학살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군대가 동원돼 진압하는 과정에서 언론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좌익지 독립신보는 자취를 감추고, 좌익 경향의 신문은 그 성격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평화일보, 국제신문, 국민신문 등 새로 창간된 신문은 민족 진영 편에 섰다. 대한민국 정부가 자리를 잡으면서 좌익 성향의 언론인과 좌파 신문사는 집중 단속 대상이 되어 제재를 받았다. 신문은 우파 일색이 3다. 좌파계 신문인은 지하로 들어가 계속 사회 혼란을 조장하다가 잠적하고 창간 신문은 우파 민족 진영 편에 섰다. 해방된 지 3년이 되고, 대한민국이 건국되면서 언론계는 우파 민족 진영이 주도했다.
1948년 후반부터 소형판인 타불로이드판을 벗어나 표준형 대형판(倍大版)을 인쇄하여 발행, 비로소 오늘날과 같은 신문의 모습을 갖췄다.
새로운 신문 판도
신생 대한민국의 언론계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한성일보 등 4대 중앙지가 주류가 됐다. 그러나 제주도와 여수· 순천 사건은 완전히 수습되지 않고, 한라산과 지리산으로 들어간 빨치산이 준동하는 가운데 어수선한 1948년은 저물었다.
1949년 1월 14일 ‘세계일보’의 발행 허가가 광무신문지법의 적용을 받아 취소돼 파문을 일으켰다. 같은 해 5월 18일 남로당에 포섭된 국회의원을 구속하는 ’국회 프락치 사건’이 터지고, 6월 15일 서울신문이 주주총회를 통하여 정부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던 김구가 6월 26일 현역 군인에게 피살되고, 6월 29일 미군은 군사 고문단 500명만 남기고 마지막으로 철수했다.
한반도는 남북의 군사력이 38선에서 대치하고 국지전이 잦아지면서 긴장 상태가 높아졌다. 정부는 ‘남북 협상’을 반대하는 성명을 내고, 남로당과 좌파 정당, 단체를 불법화하며, 중학교에 학도호국단을 결성하고, 남북 교역을 공식으로 금지했다. 병역법이 제정되고 12월엔 첫 징병 검사를 실시했다.
남북이 첨예하게 대립한 가운데 물가는 올라가고 정계는 여당과 야당으로 갈라지며 언론도 이에 따라 여당과 야당으로 갈라져 논설을 전개하였다. 좌우파로 나뉘어졌던 언론은 여야의 편에 서서 활동했다. 신문은 증면하면서 구독자 확보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자 경영이 궤도에 오르고 광고 수입이 오르게 됐다. 건국 후 1년, 신생 대한민국은 좌파 언론을 몰아내고 민족 진영의 언론이 설 자리를 마련했다. 정론 신문에서 정보를 얻는 기능을 인식하고 다양한 정보와 평론을 통해 올바른 정보와 의견을 제시하는 여론 신문의 역할을 하기 시작하였다.
1950년이 되면서 농촌에서는 연내에 시행하기로 한 농지개혁에 집중되고, 정계는 민주국민당이 제출한 내각책임제 개헌안과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신경을 스는 가운데 전운(戰雲)이 서서히 한반도를 뒤덮었다. 5월을 국회의원 선거로 보내고, 6월 19일 제2대 국회를 개원했다. 이 사이 북한은 조만식(曺晩植)과 남쪽에서 남로당 할동을 하다가 구속된 김상룡과 이주하를 교환하자고 제의했다. 이를 정부가 받아들이고 언론이 이 사실을 크게 보도하는 사이에 시간이 흘러가고, 6월 25일 전쟁이 터졌다.
반공의 선봉 전시판 신문
해방 후 5년, 남과 북이 독립한 지 2년도 되기 전에 한반도는 한국 역사상 가장 피해가 컸던 ‘6· 25 전쟁’에 휩싸였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20분, 북한 인민군은 소련제 120미리 야포와 T34 탱크, 야크 전투기를 앞세우고 25일 개성, 26일엔 동두천을 거쳐 의정부를 점령했다. 28일 새벽에는 인민군 탱크가 미아리고개를 넘어와 시내를 질주하며 서울을 완전히 점령해 버렸다. 오래 전부터 준비한 치밀하고 전격적인 작전이었다.
정부와 군은 전투 상황과 전쟁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은폐· 조작하였다. 신문은 이를 확인할 틈도 없이 정부의 발표문을 그대로 보도했다. 26일 10시, 인민군이 개성과 동두천을 점령하고 계속 서울을 향해 남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방장관은 전투 상황을 발표하고, 신문은 이를 믿고 그대로 받아 “국군 일부 해주 돌입”, “국군 정예 북상 총반격 해주시를 완전 점령”이라고 대서 특필하여 허위 보도하는 촌극을 벌였다.
“북진 통일”을 외치던 대통령이나 “아침은 해주에서 먹고,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라고 호언하던 국방장관은 중공군에서 편입된 실전 경험이 풍부한 조선 의용군 출신의 북한 인민군과 신설된 인민군이 소련제 무기로 무장한 고도의 군사 훈련을 받은 집단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인민군에게 서울을 배앗긴 정부는 임시로 수원으로 천도했다. 그러나 인민군의 기세의 눌려 다시 대전으로 옮겼다. 긴급 소집된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6월 27일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즉시 38도선 이북으로 철퇴할 것을 결의했다. 이 결의에 따라 일본에 주둔하던 미군이 한국으로 긴급히 출동하고 사태는 급박하게 돌아갔다.
정부는 27일 이미 대전으로 옮겨 갔고 국군과 정부를 믿은 서울시민은 대혼란에 빠졌다. 질주하는 군용차와 포성에 놀란 서울 시민들이 피난길에 나서고, 서울에서의 신문 활동은 그날 저녁으로 끝났다. 신문사 사원들은 시설을 그대로 둔 채 뿔뿔히 흩어졌다. 다음 날 한강대교가 폭파되고 서울은 고립됐다.
서울의 신문사들은 흩어져 대전, 대구, 부산으로 피난을 가고, 전시 신문 체제로 들어갔다. 7월 3일부터 국방부 정훈국과 제휴하여 대전과 대구에서 전시 호외를 발간하여 서울에 공중 살포햇다. 7월 10일 성조지(The Stars & Stripes) 특파원 어니 필리와 INS 특파원 제이 리처드스가 대전 북방에서 종군 취재 중 순직하여 최초의 종군 기자 희생자가 나오며, 잇따른 외국 기자의 순직이 보도됐다.
인천상륙작전 감행, 중공군 개입
주저항선이 낙동강 전선으로 후퇴하여 교두보를 확보하고 있는 상황에서 신문 활동이 원만할 수는 없었다. 서울의 신문은 대구와 부산으로 피난하여 현지 신문의 협조를 얻어 임시 신문을 발행하고 가판으로 시민의 궁금증을 풀어 주는 데 만족해야만 했다.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 상륙작전을 계기로 전세가 역전되고 9월 28일 서울을 탈환했다. 9월 19일 ‘인천신보’가 유엔군이 상륙한 인천에서 창간됐다. 언론인들은 서울로 돌아와 9월 28일 국민일보가 수복판을 발행하고, 10월 1일엔 서울신문, 10월 4일에는 동아일보와 경향신문의 속간호가 나왔다. 전시신문들이었다.
유엔군은 10월 19일 평양을 탈환하고 계속 북진하여 압록강에 이르고 두만강을 향해 북상했다.
이 무렵 10월 1일 대구에서 ‘대구매일신문’, 10월 7일 광주에서 ‘전남일보’, 10월 15일 전주에서 ‘전북일보’가 창간됐다. 서울에서 동아일보가 수북 후 복간됐고, 11월 1일 ‘코리아 타임스(The Korea Times)’가 창간됐다. 11월 1일 수복된 평양에서 정훈국 기관지로 최태응(崔泰應)이 ‘평양일보’를 발행, 12월 20일까지 냈다.
11월 11일 대전에서 ‘대전일보’, 11월 26일 ‘문화시보’가 창간됐고, 11월 29일 평양에서 민재정이 ‘서북경향신문’을 창간, 12월 1일까지 발행했다. 1950년 12월 7일 대한신문기자협회를 결성하고 회장에 오종식(吳宗植)을 선임했다.
신문들은 통일이 눈앞에 온 것처럼 감격하여 흥분된 기사로 지면을 메웠다. 그러나 10월 25일 중공군이 개입해 전선은 다시 남하했다. 38도 선상에서 머물던 전선은 1951년 1월 1일 중공군의 공세로 남하하고, 1월 3일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옮겨갔다. 1·4 후퇴다. 서울의 신문들은 전화를 피해 다시 남쪽으로 피난을 갔다. 이 때부터 임시 수도 부산은 전시의 정치, 경제, 사회 활동의 중심이 되고, 언론도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1951년 서울에서 피난 온 신문들은 부산의 ‘국제신보’, ‘부산일보’, ‘민주신보’, ‘자유민보’의 인쇄 시설을 이용하여 신문을 제작했으나 한국언론의 주역은 부산 지역 신문이 담당했다. 서울에서 피난 온 신문은 명맥을 유지하는 데 그쳤다. 1951년 1월 8일 경향신문과 1월 10일 동아일보가 부산에서 본지를, 경향신문이 대구에서 전시판을, 3월 12일 서울신문이 부산에서 본지를 속간했다.
1951년 2월 11일 국군과 유엔군이 다시 서울에 들어오고 전선이 북상하자 2월 27일 정부는 피난민 귀향 요강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서울로 올라 온 신문들은 다시 전시판을 제작했다.
1951년 3월 15일 서울신문이 서울에서 진중신문을 발행하고, 3월 24일 조선일보가 수원에서 임시 전시판을 발행했다. 그러나 4월 24일 중공군의 춘계 공세에 밀려 서울을 떠나면서 전시신문도 중단되고 말았다. 곧 유엔군의 반격으로 전선은 서부 전선을 제외하고 다시 38선 이북으로 올라가 교착 상태에 들어가면서 소모전이 시작됐다. 1951년 6월 23일 소련의 유엔 대표 말리크가 ‘한국 정전안’을 제안하고, 예비 회담을 거쳐 7월 10일부터 휴전회담이 열리면서 전선은 소강 상태에 들어갔다.
이러한 전황 중에도 1951년 5월 21일 ‘시사통신’이 창간되고 5월 22일 ‘경인일보’, 6월 23일 ‘중앙통신’, 7월 10일 ‘상공통신’, 8월 24일 ‘중도일보’, 10월 1일 ‘대구경제신문’, 10월 5일 ‘국제통신’이 창간됐다. 이 때 신문들은 반공 일색으로 전황 보도에 역점을 두었다.
수원에서 나온 진중신문(陣中新聞)의 위력
중공군이 서울까지 남진하여 한때 는 오산 등지까지 내려 왔으나 곧 후퇴하여 서울시내는 거의 무인지대로 변했다. 이 때 서울 등지에서 피난 온 시민들은 수원(水原) · 평택 등지에서 많이 주저물러 앉았다. 조선일보의 성인기(成仁基)를 비롯한 몇몇 기자들은 1951년 3월 중순부터 수원에서 라디오 한 대를 유일한 무기로 진중신문을 발행하였다.
전후방의 연락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오로지 보도정신에 불타오르는 기자도(記者道)에서 사랑하는 처자의 생사조차 서로 모르면서도 그날 그날 등사판, 그후 인쇄된 소형신문을 발행하여 전황과 국내외의 동향을 보도하였다.
이것이 당시 수원 일대에 운집된 수많은 피난민들의 유일한 희망이 돼 찍는대로 가두판매가 성행하였다. 그후 조선일보의 굳건한 독자기반이 된 수원은 이 때 진중신문의 발행으로서 쌓아진 것이었다.
한편 서울신문도 1951년 4월 15일부터 편집부국장 김영상 등이 서울에 들어와서 정부의 환도전 처음으로 국배판(菊倍判) 2면(4호 활자) 신문을 발행하여 일부 남아 있었던 서울시민들을 기쁘게 하였다. 이때 역시 뉴스에 굶주렸던 극소수의 서울시민들은 너나할 것 없이 이 간단한 진중신문에 전 신경을 집중하여 한 끼의 밥은 못먹더라도 신문 한장 만은 사서 봐야 되겠다는 열의에 가득차 있었다.
각지(各紙)의 신문 발행 중 특히 수원의 조선일보와 환도전 서울시내에서의 서울신문, 이 두 진중신문은 출중한 것으로 한국 언론인들의 꺾일 줄 모르는 투지를 단적으로 나타낸 하나의 표본이었다. 진중신문은 뉴스 보도의 사명과 임무가 그 얼마나 귀중하고 또 필요한 것이었는지를 뼈저리게 알게 만들었다.
내일의 생명을 보장 못하는 전란 와중에서도 국내외 뉴스를 갈구하는 국민의 모습은 그대로 내일의 생명과 희망을 추구한 투쟁력이기도 했다. 수원에서와 같이 보도의 위력을 발휘한 때도 드물었다.
반독재 투쟁· 민주 언론의 보루 피난신문
정전 회담이 진행되는 사이에 임시 수도 부산에서는 정치 활동이 다시 활발해졌다. 이승만 대통령이 임기를 1 년 앞두고 정부는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1951년 11월 국회에 상정하고, 1952년 1월 국회는 이 개헌안을 투표에 부쳐 19표 대 143표로 부결시켰다. 이와는 별도로 국회는 재적의원 3분의 2의 서명으로 책임내각제 개헌안을 내놨다. 정부와 국회는 정면 대결하게 되고 사태는 험악해졌다. 정부는 5월 26일 부산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헌병이 국회의원을 구속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른 바 부산 정치 파동이다.
5월 29일 김성수 부통령이 이에 반발하여 사표를 냈다. 정부는 이른바 ‘발췌개헌안’이라는 제3의 개헌안을 마련하고, 이 개헌안은 1952년 7월 4일 강제로 출석한 국회의원들이 무장 경관의 감시 속에 기립 표결로 가(可) 163표, 기권 3표, 반대가 한 표도 없이 통과됐다. 7월 28일 계엄령이 해제되고 새 헌법에 따라 8월 5일 정· 부통령 선거를 실시하여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재선됐다.
1952년 전선에선 정전 회담이 지지부진하고, 후방에서는 이승만이 대통령 재선을 위한 정쟁으로 시끄러울 때 국민은 전쟁으로 파괴된 생활 터전을 손질하고 복구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1952년 3월 19일 국회에서 ’광무신문지법’ 폐기를 가결하여 4월 4일 공포하고, 4월 20일 ‘동양통신’이 창간됐다. 5월 26일 경향신문이 테러단의 습격을 받아 시설이 파손되고, 8월 1일 동아일보는 배대판 2면을 발행했다. 9월 4일 ‘산업경제신문’이 창간되고 12월 21일 중국어신문 ‘한화일보’가 창간됐다.
1953년 2월 15일 화폐가 개혁되고, 3월 5일 소련의 스탈린이 사망하자 정전 회담은 활기를 되찾고 재개됐다. 휴전 회담이 성사될 기미를 보이자 이승만 대통령은 외교전을 벌였다. 4월 18일 전국기자대회를 개최하고 회장제를 위원장제로 개정하고 위원장에 오종식을 선임했다. 6월 1일 ‘대구일보’, 6월 4일 ‘세계통신’이 창간됐다.
6월 18일 반공 포로가 석방되고, 세계 여론이 일자 7월 12일 한미방위조약 체결에 한국과 미국이 동의했다. 7월 14일 미국, 영국, 프랑스 외무장관이 “중공이 재침하면 평화 회복을 위한 조치를 강화한다”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이런 저런 우여곡절을 겪은 후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 협정이 조인됐다.
아로서 공산군 180만명, 한국군과 유엔군 18만명이 피해를 보고, 민간인 60여만명이 사망, 부상당한 동족상잔의 전쟁이 3년 32일 만에 일단락됐다. 북한에서 수백만명이 남쪽으로 내려오는 민족 대이동이 전개됐다. 총성은 멎었지만 국토는 부산과 대구를 제외하고는 초토화됐다. 산업 시설은 철저하게 파괴돼 전쟁의 상처로 남았다. 언론 활동의 기반이 되는 사회는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아 진통을 겪었다. 신문 제작 시설도 부서지고, 신문 시장도 제대로 형성되지 못했다. 용지 수급도 잘 안 되는 데다 광고량도 격감하여 신문 경영은 더욱 어려워졌다.
1950년대 초반의 언론은 전시하 언론이어서 ‘우리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흑백 논리가 지배했으며 철저히 반공산주의 물결 위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비상 시국의 전시 언론이었다.
폐허에서 새로 출발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을 하고, 이어 8월 9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조인되자 정부는 8월 15일 서울 환도를 발표하면서 전쟁으로 파괴된 시설을 복구하고 후유증을 처리하는 데 힘을 쏟았다. 정부 환도와 더불어 서울의 전국지들도 돌아왔다.
정부는 공비 소탕, 불순분자와 전쟁 중 부역자 처리, 파괴된 국가 시설 복구, 전쟁으로 시달린 국민의 민생 문제에 매달리고, 새로운 국가 건설에 관심을 모았다.
1953년 8월 15일 광복절과 정부 수립 기념일을 맞아 ‘코리안 리퍼블릭(The Korean Republic)’이란 영자 신문이 창간되고, 9월 7일 ‘자유신보’가 발간됐다. 정계는 여당과 야당으로 개편되면서 신생 국가 대한민국의 의회 정치가 천천히 뿌리를 내려갔다. 언론도 새 출발을 다짐하고. 이에 따른 새로운 시련이 시작됐다.
2. ‘6·25 전쟁’ 전후의 경기지방 신문
경기도는 6·25전쟁을 맨 먼저 겪은 지역이다. 6·25 전쟁 전까지 경기도에서 발간된 일간신문은 인천 소재의 ‘대중일보’, ‘인천신문’, 수원 소재의 ‘화성매일신문’이었다.
1946년 2월 1일 인천에서 창간된 인천신문은 6·25 전쟁 발발과 함께 자연 폐간됐고, 1948년 수원에서 창간된 화성매일신문은 6개월 정도 발행하였으나 1949년 5월 15일자에 북한의 조국통일민주주의민족전선에 대한 기사를 다루었다는 이유로 같은 해 6월 6일 군정법령 88호 위반으로 폐간됐다.
1) 대중일보
1945년 10월 7일 인천에서 창간된 대중일보는 전쟁 중이던 1950년 9월 19일 부사장 송수안이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제호를 ‘인천신보’로 변경했다. 송수안은 배재중학교를 졸업해 1936년 조선시보사 인천지사장, 매일신보사 인천지사장 등을 역임한 인물이었다. 인천신보는 타블로이드 2면 혹은 그보다 적은 크기로 발행했는데 당시 시민들에겐 유일한 전황보도지였다. 1·4 후퇴로 부산으로 피난가서 1951년 4월 11일 속간호 제96호를 발행하였다.
인천 수복 후 다시 돌아와 1959년 7월 보급망을 호남지방까지 확장하기 위해 제호를 기호일보(畿湖日報)로 변경했는데 곧이어 1960년 7월 경기매일신문으로 제호를 바꾸었다. 1962년 7월 언론시설 설치기준에 따라 현대식 윤전기를 도입, 사옥을 신축했으며 지면도 종전의 2면에서 4면으로 증면 발행했다.
2) 인천일보
‘인천일보’는 1952년 3월 발행인 김병윤(金秉胤) ,편집인 맹헌(孟憲), 인쇄인 채호(蔡浩)로 발행허가를 받고 같은 해 8월 1일 인천시 신포동 11번지에서 창간됐다. 1953년 창간 1주년을 계기로 타블로이드판에서 지면을 표준형으로 확대 발행하고 자영 인쇄공장도 확보했다.
1956년 6월 발행인 김병윤이 부산에서 복귀하여 그 때까지 현실적으로 신문사 운영권을 맡고 있던 맹헌으로부터 판권을 인수하려고 했지만, 맹헌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김병윤· 맹헌 양자가 판권을 놓고 소송이 벌이던 1주일 여 동안 인천일보의 제호로 양측에서 다른 내용의 신문을 발행하기도 했다. 재판에서 승소항 김병윤은 인천시 관동 2가에 새로 사옥을 마련, 인쇄시설을 갖춘 다음 제호를 ‘경인일보’로 변경해 발행했다. 당시 운영진은 사장 김병윤, 주간 김길봉, 편집국장 김윤환, 총무국장 이옥산이었다.
1957년 6월 김길봉 주간이 부사장 겸 주필이 되고 같은 해 10월 최성연이 편집국장이 됐다.그 후 채호가 사장이 됐다가 5·16 군사쿠데타 이후 이옥산이 사장이 됐으나 포고령에 의한 시설기준 미달로 창간 9년 만에 자진 폐간했다.
3) 수원신문
‘수원신문’은 1952년 8월 27일 등록됐다. 당시 경기도청이 수원에 임시로 머물고 있어 수원은 상당수의 신문인, 문화예술인들의 집결지였다. 수원신문 발행인은 구철회였고 타블로이드판 4면 격일간으로 발행됐다. 수원신문 사장은 이해익, 부사장 겸 주필 구철회, 주간 이희춘, 업무국장 정인회, 편집국장 서재학, 편집부장 이필갑, 기자 조용중, 오양동, 민규호, 김영수 등이었다.
이해익은 개성 출신으로 4·19혁명 이후 농림부장관을 지낸 사람으로 창간 무렵 경기도지사를 그만 둔 상황이었다. 부사장 겸 구철회는 민주일보를 거쳐 한성일보 정경부장 등을 지낸 기자 출신이었다.
4) 인천공보· 주간인천· 주간경기
주간지 ‘인천공보’는 1953년 1월 10일 당시 인천시장 표양문을 발행인으로, 부사장 최병환을 편집인으로 출범했다. 인천공보는 인천시정을 시민에게 홍보하는 기관지였지만 일반 기사를 제공하는 보도기능도 담담했다. 1954년 11월 27일 인천공보는 판형을 신문판형으로 바꾸고 시와 단편소설 등 문예작품과 상업광고도 실어 시민들에게 호평을 샀다. 그러나 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제호가 ‘재건인천’으로 변경되고 성격도 본래의 기관지로 돌아갔다.
민간 주간지 ‘주간인천’은 1954년 4월 12일 발행인 임영균, 편집인 김응태 명의로 첫 선을 보였다. 주간인천은 인천에서 발행되는 유일한 민간 주간지로 독자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창간 당시 주필은 고일, 주간 권성오, 정치부장 김상봉, 문화부장 김양수였다. 주간인천은 지령 305호를 끝으로 창간 6년 만에 종간되었다. 그러나 주간인천 운영진들은 이후 일간지 ‘인천신문’으로 재창간했다.
주간경기는 1953년 9월 14일 한긍주가 수원에서 창간했다. 발행소는 남창동 53번지였다. 주간경기는 서울의 타 신문사 공장에서 인쇄한 것을 주1회 혹은 격주로 발간했다.
무릇 한국의 신문은 19세기 말 개화운동의 가장 구체적이면서 상징적인 결실이었다. 조선이 열강 여러 나라와 수호 조약을 맺기 시작하던 때를 전후로 처음 간행돼 외국의 문물을 국민에게 소개하고 한편으로 외세의 침략에 저항하는 이중 기능을 수행한 현대사의 중심이었다. 1896년 4월 7일 서재필이 최초의 민간 신문 ‘독립신문’을 창간한 일은 정치적인 변혁과 사회 운동사 관점에서도 혁신적인 의의를 부여할 수 있지만, 국어 운동사에도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독립신문이 한글 전용으로 신문을 제작하여 그 이후에 나타난 한말의 여러 민간 신문이 이를 뒤따르게 되고, 한글이 공용 문자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정부가 서재필의 신문 발행을 지원한 것은 개화와 국가 발전을 위해서 신문을 발간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을 일찍부터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일본인이 발행하던 ‘한성신보’와 대항하겠다는 의도도 있었다. 한성신보는 독립신문보다 1년 전에 창간돼 일본의 침략을 합리화하는 논조로 발행하다가 을미사변 때는 명성황후 시해의 비밀 근거지로도 활용되고, 독립신문이 창간된 직후인 4월 17일자 지면에는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 을 비웃는 내용의 ‘동요’라는 것을 실어 국민을 격분케 하였다.
한국의 신문은 1910년부터 1945년까지 ‘한일합방과 민족지의 소멸’, ‘3·1 운동과 민족지의 재생과 발전’, ‘일제의 침략과 민족지의 재소멸’이라는 수난기를 겪었다. 8·15 해방을 맞이했어도 그 기쁨은 순간적이었다. 1948년 남과 북에 각각 독립된 정부가 수립됐고 군대가 창설됐다. 1950년엔 처참한 남북 간 전쟁이 일어났고 그 전쟁과 고통은 60년이 된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6·25 전쟁’을 전후한 역사의 비극은 본고(本稿)가 기술하였듯 언론 현장에서도 뚜렷이 나타났다. 1960년 전후부터 근래까지 각종 신문, 월간지, 잡지 등이 경기지방에서 다수 창간하고 방송사가 설립됐으나 생략하였다. *
<참고 문헌>
* 2001년 3월 방일영문화재단 발행, 한국문화예술총서 『우리신문 100년』(차배근· 오진환· 정진석· 이광재· 임준수· 신인섭 지음)
* 1987년 2월 일조각(一潮閣) 발행, 『한국신문사(韓國新聞史)』(최준·崔埈 지음)
* 2009년 12월 경기도사편찬위원회 발행, 『경기도사』제9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