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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빙점] 자양화
현관에 여자 게다와 아이들 신발이 가득 있었다. 무용 연습장 쪽에서 샤미센 소리가 들려왔다.
“자, 하나 둘 셋. 손은 그대로 하고 목을…….”
또랑또랑한 다쓰코의 목소리가 활짝 열려 있는 연습장 쪽에서 들려왓다. 미소를 지으며 귀를 기울이고 있던 나쓰에는 그냥 돌아갈까 하고 생각했다. 그녀는 사온 수박을 부엌에 놓아두고 돌아가려고 복도로 올라섰다. 뜨거운 햇볕을 받으며 걸어온 나쓰에의 볼에는 땀이 솟아 있었다. 이렇게 무더운 날 다쓰코는 요케도 무용을 가르치고 있다고 감탄하면서 바로 오른쪽에 있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선반에서 그릇을 꺼내 수도꼭지를 틀어 물을 받았다. 문득 눈앞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나쓰에는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들여다보았다. 그때 거울 속에 한 여자의 모습이 비쳤다. 다쓰코의 제자인 줄 알고 나쓰에는 무심코 돌아보았다.
“날시가 덥군요. 수박을 여기 넣어 두겠어요.”
하고 말하던 나쓰에는 흠칫 놀랐다. 제자일 거라고 생각한 그 여자는 검은색 선글라스를 쓴 낯선 여자였다. 그녀는 말했다.
“아, 실례했습니다. 아무도 안 계신 줄 알고 그만…..”
여자는 다리를 끌 듯이 하고 손을 앞으로 뻗으면서 나쓰에가 서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저….혹시 당신은?”
나쓰에는 그 여자를 빤히 바라보면서 물었다.
“저 마쓰사키라고 해요.”
나쓰에는 뒷걸음을 치듯이 몸을 비스듬히 하며 유카코 앞에서 비켜섰다.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집이었다. 유카코는 나쓰에를 그다지 수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물을 드릴까요?”
컵이 있는 쪽으로 손을 뻗어 더듬거리고 있는 유카코에게 나쓰에가 말했다
“고마워요. 오늘은 날씨가 덥군요. 연습하기 힘드시겠어요.”
“네.”
컵에 물을 따라 유카코에게 주면서 나쓰에는 애매하게 대답했다. 유카코가 나쓰에를 다쓰코의 제자인 줄 잘못 안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연습을 마친 두세 명의 제자들이 부엌으로 들어왔다.
“아유, 목말라……..너무 덥다!”
젊은 주부로 보이는 여자가 말했다. 나쓰에는 슬며시 거실로 들어갔다.
유카코를 본 나쓰에는 이대로 그냥 돌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다쓰코는 대체 언제 유카코를 집으로 데려왔을까? 자신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은 데 대해 나쓰에는 의아심을 품었다. 그녀는 다쓰코에게 유카코를 아사히가와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한 적은 있었다. 그렇더라도 미리 한 마디 얘기라도 있어야 할 게 아닌가. 더구나 데려온 이상 알려 줬어야 옳았다. 평소의 다쓰코답지 않다고 생각하며 나쓰에는 똑바로 앉아 다쓰코를 기다렸다.
거실 한쪽에 흰 커버를 씌운 방석이 7,8개 쌓여 있었다. 연습을 마친 제자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복도를 지나갔다. 나쓰에는 긴장된 얼굴로 그 발소리를 듣고 있었다. 창 너머로 보이는 뜰 한 구석에는 커다란 자양화가 여러 송이 피어 있었다. 나쓰에는 자양화의 차분히 가라앉은 듯한 분위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그 자양화도 지금의 나쓰에의 마음을 가라앉혀 주지는 못했다.
‘혹시…….’
모르고 있는 건 자기 혼자만이 아닐까? 게이조는 진작부터 유카코가 이 집에 온 것을 알고 있지 않을까? 아니, 이미 만났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단지 상상에 그칠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어서 빨리 다쓰코를 만나 확인하고 싶었다.
연습장에서 다시 샤미센 소리가 들려왔다. .몇 사람의 제자들이 돌아가나 했더니 다시 연습장으로 드러가는 모양이었다. 나쓰에는 초조한 마음으로 시계를 보았다. 벌써 네 시가 가까웠다. 이제 곧 저녁 식사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라고 생각했으나, 나쓰에는 역시 집으로 돌아갈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녀는 옆에 있는 수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돌렸다. 신호가 대여섯 번 울리고 나서 요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코니? 오늘 엄마가 늦을지도 모르는데 저녁 준비를 좀 해주겠니?”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딱딱한 목소리였다. 그래서 나쓰에는 더욱 불쾌했다.
“네, 그럴게요. 무얼 만들어 놓을까요?”
“아무거나 좋아. 튀김이나 콩소메 정도면 되지 않겠니?”
“그 정도라면 저도 할 수 있어요. 어머니, 지금 어디 계세요?”
부드러운 요코의 말에 나쓰에는,
“다쓰코네 집이야.”
하고 말하고 나서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요코, 마쓰사키 유카코 씨가 이곳에 와 있어. 넌 알고 있었니?”
“마쓰사키라면 저 도요토미 온천의……?”
“그래…..하지만 아버지께는 잠자코 있어. 쇼핑 갔다가 늦어진다고만 얘기해.”
“알겠어요. 걱정마세요.”
수화기를 내려놓고 나서 나쓰에는 약간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래서 축축하게 땀이 밴 가슴께를 손수건으로 닦아 내고 나서 남편에게도 전화를 걸어 볼까 하고 생각했으나 그만두기로 했다. 남편에게는 직접 얘기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야, 오랜만이군요.”
고등학교 미술 교사인 구로에가 폴로 셔츠의 단추를 풀면서 들어왔다. 나쓰에는 약간 눈살을 찌푸렸다.
“요코는 뭘 하고 있나요?”
구로에는 쾌활하게 말하며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덕분에 요코도 별고 없어요. 선생님도 언제나 좋으시죠?”
요코의 고등학교 선생이었기에 나쓰에도 이 정도의 인사는 해야만 했다.
“무척 덥군요, 오늘은. 다쓰코 씨는 아주 열심이에요. 날씨가 이렇게 더운데도. 귀한 손님에게 차도 내놓지 않고…..냉장고라도 열어 보고 올까요?”
구로에는 이렇게 말하고 부엌으로 갔다. 얼마 후 그는 쟁반에 수박을 받쳐 들고 돌아왓다.
“먹을 게 있었네요.이거 그다지 차지는 않은 것 같지만 좀 드시죠.”
앞에 놓인 수박을 보고 나쓰에는 놀라며 구로에를 쳐다보았다.
“그다지 달 것 같지는 않군요. 그냥 드세요. 역시 수박은 본고장 거라해요. 하지만 아사히가와의 수박이 맛이 들 무렵에는 홑옷만으로는 추울 때니까요.”
구로에는 나쓰에가 갖고 온 수박인 줄도 모르고 제멋대로 지껄였다.
나쓰에는 자신이 갖고 온 수박을 다쓰코보다 먼저 먹을 수는 없었다.
“여름방학이라 집에 처박혀 있기보다는 여기 오는 게 더 좋아요. 오늘은 좋은 완두콩이 있길래 콩밥을 먹고 싶어 갖고 왔어요.”
“선생님은 아직 독신이세요?”
“다쓰코 씨 같은 여자를 만났으면 좋겠는데, 여자란 존재가 좀 귀찮아서……부인, 수박이 미지근해집니다. 별로 달지도 않은데 미지근해지면 더 맛이 없어요. 어서 드시죠.”
“고마워요. 그런데 선생님, 아까 부엌에서 앞을 보지 못하는 여자분을 보았는데…….”
“아, 유카코 씨 말인가요? 다쓰코 씨의 전속 안마사예요.”
구로에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래요? 언제부터 이곳에…..”
“글쎄요, 축제 전이었으니까 아직 열흘도 못 돼요.”
“어머, 열흘 전부터요?”
“그런데 오늘은 아무도 밥할 생각을 하지 않네요. 하는 수 없지. 내가 식모 노릇을 해볼까.”
구로에는 먹고 난 수박 쟁반을 들고 거실을 나갔다.
‘너무해, 열흘이 넘었다면서…….’
나쓰에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연습장으로 가 보았다. 연습장에는 아직 4,5명의 제자들이 무대 앞에 앉아 있고 무대에서는 다쓰코와 두 소녀가 우산을 들고 춤을 추고 있었다. 둥근 무늬가 있는 우산을 손에 든 다쓰코가 몸을 굽히고 무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실개천에 내리를 이슬비를 쳐다보고 있는 게이샤(일본 기생)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다쓰코의 주위에는 정말로 비가 내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유카다 차림의 다쓰코는 단아한 게이샤처럼 보였다. 그야말로 예술의 힘이었다.
춤을 추고 있는 다쓰코를 보고 있노라면 나쓰에는 감히 범접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그저 친한 친구인 다쓰코가 아니라 예술의 경지에 오른 후지오 다쓰코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두세 차례 연습을 마친 후에 제자들이 정중히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그때까지 나쓰에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다쓰코는 허리띠 사이에 한 손을 가볍게 끼고 다가왔다.
“오래 기다렸니? 언제 왔어?”
나쓰에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벌써 한 시간도 더 됐어.”
“미안! 뭐야? 불만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다쓰코는 나쓰에의 어깨를 툭 쳤다.
“너무해, 다쓰코!”
“뭐가?”
“뭐라니? 마쓰사키 일 말이야.”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거실보다 연습장 쪽이 바람이 잘 통해.”
다쓰코는 이렇게 받아넘기고 나쓰에를 무대 앞으로 데리고 갔다.
“편히 앉아.”
다쓰코는 나쓰에에게 얇은 방석을 권하고 다리를 옆으로 뻗고 앉았다. 제자가 차가운 사이다와 물수건 두 개를 가지고 왓다.
“선생님, 구로에 선생이 완두콩 밥을 지어 놓으셨어요.”
하고 말한 그 제자는 뭐가 그리 우스운지 어깨를 들먹이며 웃었다.
“그거 맛있겠는데. 너희들이 수고를 덜었구나.”
그 제자는 구로에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계속 웃으면서 물러갔다.
“다쓰코, 마쓰사키는 언제 이곳으로 왔어?”
“아직 열흘도 안 돼.”
“왜 말해주지 않았어?”
“그 여자가 당분간 아무한테도 알리지 말아 달라고 했어.”
“어머!”
자신은 다쓰코와 친구 사이이다. 다쓰코가 자신의 마음보다도 유카코의 마음을 존중하는 것이 나쓰에는 불만스러웠다.
“그리고 말이야, 나쓰에, 그 여자의 일에 대해서는 선생님이나 나쓰에도 모른 체하고 있는 게 좋지 않아?”
“하지만 아사히가와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한 건 바로 나야.”
“하지만 나쓰에, 난 부탁을 받고 데려온 게 아니야.”
“그게 무슨 말이야? 네 말은…….”
“그러니까 경위를 말하자면 이런 거야. 넌 분명히 그 여자를 데려다 달라고 말했어. 두 손 모아 합장까지 하면서 말이야. 하지만 난 처음부터 그 여자를 이곳에 데려올 생각은 없었어. 그 여자도 그렇게 간단히 오려고 하지 않ㅇ르 거라고 생각했고……눈이 보이지 않았다면 그대로 내버려두려고 했지만……”
나쓰에는 토라진 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다쓰코 혼자서 도요토미 온천으로 간 것은 20일쯤 전이었다. 무라이와 게이조의 이야기를 듣고 유카코가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여자라는 생각도 들었다. 다쓰코는 연습장을 제자들에게 맡기고 열흘 동안 휴가를 갖기로 했다. 열흘간이면 적어도 유카코의 생활이나 심경을 대충 알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다쓰코에게는 결단력과 더불어 그런 신중함도 있었다.
도착한 날 밤에 다쓰코는 당장 유카코를 불렀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유카코에게 몸을 주무르게 했다. 안마가 끝난 후에 다쓰코가 말했다.
“당신은 한 가지 일에 정신을 몰입하는 사람이군요. 주무르는 걸 보면 알 수 있어요. 내일 밤에도 와 주세요.”
칭찬을 받은 유카코는 잠시 쓸쓸한 웃음을 얼굴에 띄웠다. 이튿날 밤 유카코는,
“손님은 특별한 직업을 가진 분이군요.”
하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왜요?”
“인품이 보통 부인과는 달라요. 그리고 몸도 탄력이 있고요……”
“고마워요. 춤을 추고 있어요.”
“그렇군요. 무용 선생님이신가요? 저도 옛날에 춤을 배운 적이 있어요. 하지만 그건 사할린에서 살 때였어요. 지금은 다 잊어버렸죠.”
“그래요? 사할린에서 귀환했군요. 우리 모두 다 전쟁 때문에 곤욕을 치렀지요.”
“선생님도 공습이니 뭐니 해서…….”
“아주 고생했어요. 사랑하던 사람이 감옥에서 죽었고요.”
“어머, 옥사하셨군요?”
유카코는 주무르던 손을 멈췄다.
“사상범이었나요?”
“물론이에요. 하지만 뭐 대단한 사람은 아니었어요. ‘이 전쟁은 반드시 지게 되어 있어. 말로는 성전(聖戰)이라고 말하지만 일부 인간들의 이권 때문에 일으킨 거지. 그걸 어째서 국민들은 모르고 있는지’하고 말했을 뿐이에요. 지금 세상 같으면 누구나 하는 말인데…..작은 눈을 갖고 있었지만 세상을 잘 꿰뚫어보고 있었어요.”
담담한 어조였으나 다쓰코의 심정이 유카코의 가슴에 스며드는 듯했다.
“난 그 사람의 아이를 낳았어요. 금방 죽어 버렸지만…..”
“선생님, 저한테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다쓰코의 이야기에 유카코도 자기 신상 얘기를 꺼냈다. 이미 다쓰코가 알고 있는 이야기였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유카코의 입을 통해 듣는 것은 애처로운 일이었다.
“여자란 참 가엾은 존재군요.”
다쓰코는 다 듣고 나서 감회가 깊은 듯이 말했다. 그 날 밤 이후로 유카코는 다쓰코에게 흉금을 완전히 털어놓게 되었다. 다쓰코에게는 원래 남들에게 의지하게 하는 무엇이 있었다.
유카코는 어렸을 때의 추억과 사할린에서 귀환했을 때 고생했던 이야기를 하고 다쓰코의 권유에 따라 함께 온천에 들어가기도 했다. 다쓰코는 다쓰코대로 점심 식사를 함께 하자고 권하기도 하고 유카코가 귀환한 와쓰카나이까지 데리고 가기도 했다. 그리고 한 번이라도 좋으니 꼭 가보고 싶다는 유카코의 말을 기억해 두었다가 사로베쓰 평야의 원생 화원에도 데리고 갔다.
일주일이 지났을 때, 다쓰코는 내일 돌아가야겠다고 유카코에게 말했다.
“돌아가시려구요, 선생님?”
유카코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얼굴까지도 창백했다.
“돌아가야지요.”
다쓰코는 일부러 무뚝뚝하게 말했다.
“부탁이에요. 하룻밤만 더 묵고 가세요. 저는 선생님과 헤어지는 것이 괴로워요.”
안마사가 손님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괴로운 건 나도 마찬가지예요. 별 지장이 없다면 우리 집에 가서 내 전속 안마사가 되어 주었으면 해요.”
“네? 정말이세요, 선생님?”
유카코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내가 왜 거짓말이나 농담을 하겠어요?”
이미 다쓰코는 자신이 게이조나 무라이와 잘 아는 사이라는 말도 했었다. 유카코는 잠시 생각하다가,
“선생님, 함께 가겠어요.”
하고 두 손으로 바닥을 짚더니 목놓아 울었다.
유카코는 오랫동안 남에게 의지하는 것을 모르고 살아왔다. 자신은 천애 고아로 일생을 마칠 줄 알고 체념하고 있었다. 여러 해 동안 쌓인 외로움이 지금 눈물로 분출된 것이었다.
“일이 그렇게 된 거야, 나쓰에. 그러니까 나와 그 여자는 친구가 된 거지.”
“친구……..?”
나쓰에는 미심쩍은 듯이 말했다.
“난 그 여자에게 샤미센이라도 가르쳐서 좀더 의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려고 해. 여자 혼자 산다는 것이 어떤 건지 나도 혼자라서 잘 알고 있어.”
나쓰에는 다쓰코와 자기 사이가 갑자기 멀어진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 여자를 소개해 줄 테니 이층으로 올라가지 않을래?”
계단을 올라서자 샤미센 소리가 멎었다. 다쓰코는 구슬발을 손으로 헤치고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손님이 오셨군요, 선생님?”
방안에서 유카코의 목소리가 들렸다.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나쓰에는 망설이다가 방으로 들어갔다.
“원장님 부인이에요, 유카코.”
“네?”
유카코는 어깨를 움찔했다. 나쓰에는 그런 유카코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가 말했다.
“오랜만이에요…….”
유카코도 당황한 듯이 머리를 숙였다.
“죄송해요.”
“유카코 씨가 사과할 거 없잖아요?”
“하지만……여러 가지로 걱정을 끼쳐 드려서…..”
유카코는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나쓰에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유카코, 지금 부인에게도 유카코와 난 앞으로도 계속 함께 살게 되었다고 말했어요. 여기는 이제 당신 집이니까 아무것도 꺼릴 거 없어요. 그 누구한테도 말이에요. 다만 남의 남편을 좋아하거나 해서는 안 돼요. 난 그런 도둑고양이 같은 짓은 딱 질색이에요.”
마지막 말은 나쓰에한테도 들려주고 싶은 말이었다.
“죄송해요, 사모님….하지만 전 원장님 손 한 번 잡아본 적도 없어요. 원장님은 휼륭하신 분이에요.”
“뭐가 훌륭하다는 거야, 그저 그렇지. 안 그래, 나쓰에?”
다쓰코의 말에 나쓰에는 웃을 수가 없었다.
“눈이 불편해서 큰일이네요. 다쓰코, 병원엔 아직 안 데려갔어?”
“그것도 지금 생각 중인데, 가을 연습 때문에 도쿄에도 가야 하고….그때 유카코도 함께 도쿄의 병원에 데리고 가려고 해.”
“어머, 도쿄에?”
나쓰에는 샘이 났다. 다쓰코가 무엇 때문에 이처럼 유카코를 소중히 여겨야 할까. 유카코에게 그럴 만한 자격이 있냐고 묻고 싶었다.
“아사히가와에도 이케다 선생이나 훌륭한 안과 의사가 많이 있잖아?”
“그건 알고 있지만, 그쪽 선생의 아들이 안과 의사야. 무엇보다도 유카코를 혼자 두고 도쿄로 갈 수는 없잖아? 여러 가지로 걱정이 돼서 그래.”
여러 가지로 걱정이 된다는 대목에 다쓰코는 힘주어 말했다 나쓰에는 할 수 없이 웃었다.
“그래, 참, 나쓰에도 요코를 데리고 같이 가면 어떨까. 치가사키에 가보고 싶지 않아? 나도 너와 함께 여행하고 싶어.”
“어머니는 오늘 늦으신대요.”
요코는 언제나 나쓰에가 하듯이 게이조의 옷 갈아입는 것을 거들려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괜찮아, 요코. 혼자서 갈아입어도 돼…..”
넥타이를 풀어 주려고 하는 요코의 얼굴이 너무 가까이 있어 게이조는 당황했다.
“괜찮아요. 어머니 대신인데요, 뭘.”
요코는 천진스럽게 게이조의 넥타이를 풀어 주었다. 요코의 입김이 게이조의 볼을 부드럽게 스쳐갔다. 게이조가 와이셔츠를 벗자 요코는 곧 유카다를 그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어머니는 물건 사러 갔니?”
“자세히 여쭈어 보지 않았어요.”
나쓰에가 없으면 역시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게이조는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하시겠어요, 아버지?”
“아니, 괜찮아.”
나쓰에가 집에 없으니 샤워를 할 기분도 나지 않았다. 게이조는 욕실의 수도꼭지를 틀었다. 미지근한 물이 조금 나오더니 찬 물로 바뀌었다.
손을 씻고 거실에 돌아오자 요코가 석간을 갖고 왔다.
“어떻게 알았지, 요코?”
“어머, 어머니가 언제나 하시는 일을 흉내내고 있을 뿐인걸요.”
“그래?”
요코 말대로 그것은 나쓰에가 날마다 하고 있는 일이었다. 아내인 나쓰에가 하는 일에 대해 자신은 어느새 공기처럼 느끼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게이조는 요코가 시중 들어 주는 일 하나하나에 신선한 기쁨을 느끼고 있는 자신을 돌이켜보았다.
“그래요, 아버지. 어머니는 여성의 본보기세요. 요즘도 아버지께 양말을 신겨 드리잖아요. ‘석간을 갖다 드리고 차를 내놓고’ 하면서 어머니는 때때로 혼잣말로 확인하실 때가 있는 걸요.”
“그래? 어머니가 그렇게까지 신경을 쓰고 있나?”
요코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아직 여섯 시 조금 전이었다.
“글쎄. 곧 오겠지?”
게이조는 석간을 폈다.
“더위 때문인지 교통사고 기사뿐이군.”
부엌에서 요코가 뭐라고 대답한 것 같았다. 교통사고 기사를 보다가 문득 미쓰이 게이코의 그 후 경과가 어떤지 게이조는 걱정이 되었다.
요코가 차를 갖고 왔다. 뜨거운 엽차였다. 더울 때는 뜨거운 차가 좋다는 나쓰에의 의견에 따라 게이조는 병원에서도 뜨거운 차를 마셨다.
“늦는구나, 어머니는.”
“어머, 아버지가 돌아오신 지 아직 15분도 되지 않았어요.”
게이조는 쓴웃음을 지었다. 분명히 한 시간 이상 나쓰에의 귀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게이조는 다시 석간을 폈다.
‘혹시………’
무라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게이조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요코, 어머니는 혹시 다쓰코 씨 집에 간 게 아닐까?”
요코는 가슴이 뜨끔했다. 나쓰에는 다쓰코의 집에서 전화를 걸어 유카코가 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게이조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글쎄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하지는 못한다고 생각했다.
“다쓰코 씨 집에 전화를 한 번 걸어보렴.”
나쓰에는 다쓰코의 집에 들렀다고 핑계를 댈지도 모른다. 게이조는 나쓰에가 무라이를 만나고 있는 것으로 단정지었다. 요코는 게이조를 흘끔 바라보고는 망설이면서 수화기를 들었다. 그런 요코의 모습을 게이조가 지켜보고 있었다. 요코는 천천히 다이얼을 돌렸다. 도중에 잘못 돌려서 다시 돌렸다. 통화중이었다.
“통화중이에요, 아버지.”
요코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명랑하게 말했다.
“그래? 통화중이야?”
게이조도 정면 대결을 모면한 듯한 기분이었다. 나쓰에가 다쓰코의 집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확실한 것을 알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알고 싶지 않기도 했다. 그러나 몇 분도 지나지 않아서 게이조는 다시 말했다.
“요코, 다시 한번 전화를 걸어봐.”
“아버지, 오늘은 좀 이상하신 것 같아요.”
“내가?”
“네. 아버지는 지금까지 어머니가 늦게 돌아오셔도 침착하게 기다리셨잖아요? 서재에 올라가 책을 읽거나 하시면서 말이에요.”
게이조는 다시 쓴웃음을 짓고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나이 탓인가보다. 나이를 먹으면 성미가 급해진다니까…….”
“아녜요, 아버지는 아직 젊으세요.”
“하지만 벌써 쉰이 다 되었다. 요코.”
게이조는 요즘 드렁 거울을 들여다볼 때마다 흰 머리카락이 부쩍 많아졌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주위 사람들이 머리가 검다고 부러워했으나, 그것도 40대의 일이었다. 정말 자신은 나이를 먹은 탓에 아내의 귀가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자기 딴에는 아직 젊다고 자부하지만 어느새 자신의 육체와 정신이 노인축에 끼게 된 듯한 허무한 느낌이 들었다.
“고아원에 다녀왔다고?”
나쓰에에게서 들은 말을 지금까지 가슴속에 숨겨 두고 있었다.
“네.”
갑자기 고아원 말을 꺼내자 요코는 부끄러워했다.
“어땠니, 고아원은?”
“글쎄요. 한 마디로 말하면….함부로 부모가 될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 함부로 부모가 되지 말라 이거야? 이거 아픈 델 찌르는 걸.”
“저 말이에요, 그곳에 가보고 점점 인간이 무서워졌어요. 오빠와도 얘기했지만, 인간이란 참으로 죄가 많은가봐요, 아버지.”
요코는 식탁 위에 엎어놓은 식기를 제대로 놓으며 말했다.
“응, 그래. 아버지는 말이야…….”
말하다 말고 게이조는 요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뭔데요?”
“아니, 아버진 말이야, 나 자신의 죄 때문에 진정으로 괴로워할 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게이조는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고 딴 소릴르 했다. 사실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요코, 네가 자살하려고 한 후로 아버지는 정말 괴로웠어. 나 자신의 죄가 많은 인간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꼈어. 그리고 그 죄를 얼마나 용서받고 싶었는지 몰라. 요코도 유서에 죄를 용서해 달라고 썼지?’
그러나 이 말은 요코의 상처를 건드릴 것 같아 차마 할 수 없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아버지. 때로는 스스로에게 죄가 많다고 괴로워한 적도 있지만, 요즘은 오히려 남의 죄만 눈에 띠는 거예요. 고아원을 돌아봐도 그렇게 제 출생을 생각해도…..”
“그건 무리가 아니야. 요코는 죄를 지은 적이 없으니까. 그리고 죄라는 말은 우리 보통 사람에게는 실감이 나지 않아. 별로 이렇다 할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태평스럽게 살아가거든. 참, 죄에 대해 얼마 전에 서점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지.”
일주일쯤 전에 게이조는 서점에 갔었다. 요즘은 서점에 가면 흔히 종교 서적 코너에 들러 보는 버릇이 생겼다. 게이조가 우연히 발견한 글은 기독교 잡지에 실린 수필이었다.
“어떤 사람이 목사에게, ‘나에겐 죄가 없다. 그런데 어째서 기독교는 인간을 모두 죄인 취급하느냐? 대체 어떻게 된 거냐?’ 하며 따졌던 모양이야. 그러자 목사가 ‘그럼 저 큰 돌을 이곳까지 옮겨다 주지 않겠소?’ 하고 뜰안의 돌을 가리켰어. 그 사나이는 무짠지를 눌러 놓는 돌의 갑절 정도나 되는 그 커다란 돌을 애써 옮겨 놓았어.”
까마귀가 둥지로 돌아왔는지 숲 쪽에서 시끄럽게 울고 있었다.
“목사는 다시 그 큰 돌과 같은 무게의 조약돌을 날라 오라고 말했어. 사나이가 조약돌을 잔뜩 모아 가져갔더니 목사는 이번엔 그 조약돌을 본래의 자리에 가져다 놓으라고 했어. 사나이는 난처했지. 큰 돌은 어디서 가져왔는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지만, 많은 조약돌들은 본래 어디에 있었는지 알 턱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조약돌은 하나도 본래의 자리에 갖다 놓지 못했어.”
“재미있는 얘기군요.”
다 듣고 나서 요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말하잠녀 사람을 죽였다거나 강도짓을 했다면 그건 우리에게 큰 돌이 되는 거지. 그리고 거짓말을 하고 화를 내고 남을 미워하거나 욕하는 따위의 일상 생활의 다반사는 조약돌인 셈이야. 그건 인간으로서는 어떻게도 처리할 수 없는 거야.”
게이조는 문득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여섯 사람이 입원한 병실에 당뇨병을 앓고 있는 어떤 할머니가 있었다. 그런데 의사의 허락도 받지 않고 어느 날 느닷없이 퇴원해 버렸다. 이유는 같은 병실의 젊은 여자들이 자신과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환자들의 말에 의하면 전혀 말을 걸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고 했다. 흔히 젊은 사람들끼리 이야기하고 할머니는 대화 상대로 삼지 않았을 뿐이라고 했다. 젊은 환자들은 할머니에게 무관심했다. 그 무관심이 할머니에게 참을 수 없는 소외감을 주었던 것이다. 이것이 한 집안의 경우라면 가출로 나타나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살에까지 이를지도 모른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행동하는 것도 이 할머니에게는 회초리로 얻어맞는 것보다 괴로웠던 거이다.
젊은 여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신에게는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들에게는 그 행위는 앞에서 말한 조약돌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미워하거나 욕하는 적극적인 죄도 세상 사람들은 다반사로 생각하고 있다. 하물며 무관심 같은 것은 의식조차 하지 못한다.
게이조는 자신이 수많은 크고 작은 돌을 날마다 쌓아 온 듯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방대한 돌산에 도사리고 앉아서 자신에게는 죄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정말 무서운 일이야.”
게이조는 그 할머니와 환자들의 이야기도 요코에게 들려주며 감개무량한 듯이 말했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게이조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요코가 얼른 현관으로 나갔다.
“늦었어요. 어머, 당신 먼저 식사하시지 않고……”
나쓰에는 명랑한 표정이었다.
“응.”
게이조는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는 나쓰에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나쓰에는 요코에게 눈을 찡긋 하며 어깨를 움츠리고는 환히 웃는 얼굴로 게이조를 바라보았다.
“여보, 다쓰코가 도쿄에 간대요. 나더러 치가사키의 아버님 댁에 함께 가자는 거예요.”
“아니, 다쓰코 씨 집에 갔었소?”
게이조는 무심코 나쓰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당연하잖아요. 제가 갈 곳이 그곳밖에 더 있어요?”
“그래? 난 그런 줄 몰랐소.”
게이조는 금세 기분이 풀렸다. 요코는 나쓰에가 무엇 때문에 미리 자기 입을 막았을까 하고 생각하며 속은 듯한 기분으로 콩소메를 그릇에 담고 있었다.
“여보, 치가사키에 가도 괜찮지요?”
나쓰에는 응석이라도 부리듯이 게이조의 옆으로 다가앉았다.
“응, 괜찮겠지. 하지만 지금은 날씨가 너무 더워요. 아사히가와도 오늘은 32도였다니까.”
“아니, 지금 말고 9월 지나서요. 요코, 너도 같이 가자.”
나쓰에는 쇼핑 꾸러미를 풀더니,
“자, 이건 네 스커트야.”
아고 옷을 펼쳐 보였다. 흰색에 가까운 미색 바탕에 엷은 푸른색의 작은 구슬 무늬가 잇는 것이 차분해 보였다.
“어머, 멋져요. 어머니, 고마워요.”
요코는 기쁜 듯이 말했다. 그런데 나쓰에의 태도가 어딘지 이상해 보였다. 요코는 그것이 이상하게 마음이 걸렸다.
“이봐, 요코, 너도 치가사키에 같이 가자꾸나. 그땐 새로 슈트를 맞춰 줄게.”
나쓰에는 연신 명랑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혼자 계시게 되잖아요.”
“괜찮아. 아버니는 때로 독신 생활로 돌아가 보는 것도 좋아.”
“그래요. 다카기 씨도 아직 독신이잖아요. 당신도 가끔 혼자서 편히 쉬는 게 좋을 거예요.”
게이조의 것으로는 넥타이를 사 왔다. 나쓰에는 그 넥타이를 살짝 매어서 게이조의 가슴에 대어 보았다. 그런 거동도 평소의 나쓰에와는 달랐다. 게이조도 그런 나쓰에를 의식하고 있었다. 아기는 열이 나기 전에 보채거나 떠들어댔다. 그와 비슷한 현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게이조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식사가 시작되자. 나쓰엔느 재미있는 듯이 웃었다.
“요코, 구로에 선생이 말이야. 엄마가 다쓰코 주려고 사갖고 간 수박을 그런 줄 모르고 엄마에게 먹으라며 갖다 주지 않겠니. 별로 달지 않지만 어쩌고 하면서 말이야. 어찌나 우습던지…..”
“어머.”
요코도 웃었다.
“여전해요, 다쓰코네 집은. 오늘 구로에 선생이 밥을 지었지 뭐예요. 언제나 별의별 사람들이 다 드나들고 있다니까요.”
나쓰에는 게이조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응, 그래?”
더 이상 게이조는 나쓰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았다. 나쓰에가 돌아온 것으로 충분했다.
“우린 넷이 여행할 거예요. 나와 다쓰코, 요코, 그리고 너머지 한 사람은 누구일 거라고 생각하세요?”
“응, 그것도 괜찮겠지.”
이야기를 듣고 있지 않던 게이조는 엉뚱한 대답을 했다.
“싫어요. 당신 제대로 듣지도 않으시고……”
“그래? 응 튀김 정말 맛있군.”
게이조는 식은 가리비 튀김을 입에 넣으며 말했다.
“튀김으로 얼버무리려고요! 여보, 저하고 다쓰코, 요코, 그리고 또 한 사람과 여행한다고 말했잖아요?”
“또 한 사람이라니 누구 말이오?”
“모르시겠어요?”
“모르겠는데.”
하고 말한 다음 게이조는 혹시 무라이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라이는 도쿄를 여행할 만큼 한가하게 병원을 비울 수는 없을 것이다.
“당신도 아시는 분이에요.”
“다카기인가?”
“아녜요.”
“누구든지 상관없소, 난.”
게이조는 밥공기를 요코에게 내밀었다. 요코는 게이조가 가엾어 보였다. 지금 이렇게 말하기 위해 어머니는 자기더러 잠자코 있으라고 당부했나 싶어 요코는 서운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렇다고 나쓰에의 심정에 동정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정말로 누구라도 괜찮으세요?”
좀 놀리듯이 나쓰에는 게이조를 바라보았다.
“응.”
왠지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긴 했다. 예상한 대로 역시 무라이일지도 모른다. 무라이는 억지로라도 휴가를 얻어 다른 의사에게 맡겨 놓고 동행할 심산일지도 모른다. 그래, 다쓰코 집에 무라이가 와 있었을지도 모른다.
“여보, 또 한 사람은 말이에요, 물론 여자예요. 다쓰코의 집에 있는 사람이에요.”
나쓰에는 조심스럽게 게이조의 안색을 살폈다.
“그렇다면 다쓰코 씨 제자들 중 한 사람인 모양이군.”
게이조는 어느새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어머, 정말 모르겠어요? 마쓰사키 유카코예요.”
“뭐요? 마쓰사키?”
게이조는 무심코 큰소리로 반문했다.
나쓰에는 남편의 놀라는 표정을 만족스러운 듯이 바라보았다.
“그래요. 유카코는 이제 다쓰코와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었어요.”
“언제부터?”
“사실 전 어이가 없ㅇ요. 다쓰코가 너무하다고 생각되지 ㅇ낳으세요? 특별히 제가 부탁해서 데려온 게 아니라는 거예요. 하지만 그렇더라도 당신이나 저한테 전화 한 통쯤은 걸어 주었어야 하지 않겠어요?”
나쓰에는 게이조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원망스러운 듯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