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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9:1]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에서 떠나 요단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시니...."
이 말씀을 마치시고 - 마태븍음의 주요 골격을 이루고 있는 다섯 설교의 다섯 종결문구중의 네번째 것으로 앞장의 설교가 끌났음을 의미하는 문구이다. 이로써 공생애의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셨던 갈릴리 사역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뒨다.
이 때는 예수께서 십자가 처형으로 죽으시기 약 한달전으로서 대략 A.D. 29년 2-3월경의 일로 추정된다. 한편 본서에 언급된 다섯 종결문구는 본문 이외에 7:28;11:1;13:53;26:1에 나오고 있다.
갈릴리에서 떠나 - 3차에 걸친 갈릴리 사역을 마치신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의 수난주간을 맞이하실 때까지 사마리아를 경유하지 않고 유다와 베레아를 순회하시면서 마지막으로 전도하신 기사이다.
따라서 19-20장은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 입성까지 도중의 기사로, 보통 '베레아 전도'라고 불리운다. 그런데 이 전도사역은 갈릴리에서의 출발(1절)로 시작되어 베다니에서 왜 마리아의 기름부음으로 끝난다.
이 기간 동안에도 예수는 역시 계속해서 민중들로부터는 기대와 환호를 받았으며, 유대 교권주의자 들로부터는 질시 모함과 배척을 받으셨다. 요단강 건너 유대 지경 - 이곳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이견이 많다.
이는 평행구절인 막 10:1에서는 분명히 이 지방이 베레아인 것처럼 보이지만 눅 9:52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 땅을 통과하신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자들도 예수께서 갈릴리를 떠나 (1) 요단 동편 베레아로 가셨다. (2) 요단강 서편 사마리아를 지나 가셨다는 견해로 양분되어 있다. 그런데 대체로 베레아 방문설을 지지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예수께서는 유월절 잔치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다른 수 많은 유대인들과 함께 베레아를 지나 유대인들은 '거룩치 않은 땅'으로 생각한 사마리아를 피하여 대신 베레아로 통과하곤 하였다,예루살렘에로의 순례여행을 하고 계셨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요단강 동편이 베레아를 가리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곳은 유대땅이 아니라고 하는 점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1) '건너편'이라는 표현인 '페란'이 바로 뒷 단어인 '유대'를 수식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
페란'과 '유대' 사이에 접속사 '그리고'가 들어간 것으로 생각하여 '요단강 건너편과 유대에 이르시니'로, 각각 독립 구문으로써 이해하는 방법이 있다. (2) 유대 지경이라는 표현은 그 '구역'을 의미하는 코우스트가 아니라 '경계'를 뜻하는 보오더로 이해하는 방법이다.
이 경우 요단강 건너와 유대지경은 동격으로 베레아가 유대지방이 아니라 그 경계임을 드러내는 정확한 보도가 될것이다. 한편 베레아란 이름의 뜻은 헬라어 문자그대로 '건너편'으로, '요단 저편'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곳 베레아는 그 남쪽 경계가 헤롯의 요새인 마케루스로 세례 요한이 처형된 곳이며, 북쪽의 경계는 야르묵 강까지로 비교적 넓고 비옥한 지역이었으며 예수 당시 헤롯 안티파스의 통치하에 있던 구역이었다.
[마 19:2]
큰 무리가 좇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저희 병을 고치시더라...."
큰 무리가 좇거늘 - 마가의 평행 구절에서는 '무리가 다시 모여 들거늘' 이라고 표현한 것에 비해서 마태는 그가 즐겨 사용하는 동사 '좇다'를 통해 그 무리들이 보통의 군중들이 아니라 예수와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는 사람들임을 시사하고 있다. 보통 이 동사는 '따르다', '
제자가 되다' 등의 의미로 갈릴리에서 베레아까지 예수를 따라온 무리들이 결국 예루살렘으로 까지 계속 예수를 따라다니는 일종의 '제자무리'들 임을 나타낸다. '제자됨'을 나타내는 이 동사는 21절과 27절에서도 다시 사용되고 있다.
저희 병을 고치시더라 - 이적기사가 많은 마가복음에 오히려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라고 되어있고, 설교기사를 선호하는 듯한 마태복음에 도리어 '병고침'이 언급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 마태의 19장 본문의 내용이 설교가 아니라
주로 설화 부분이기 때문에 마태가 의도적으로 마가의 본문을 수정한 것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예수의 주요 세 사역인 가르치심이 갈릴리 뿐만 아니라 이 베레아에서도 행해지고 있음을 뜻하는 말로 이해함으로써,
선포자, 예언자의 모습을 갖춘 메시야로서 예수의 완전한 사역을 설명하려는 마태의 노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마 19:3]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 예수의 소문이 헤롯과 예루살렘의 교권주의자들에게 전해짐으로써 그곳의 산헤드린에서 급파된 진상조사단인 이 바리새인들은 사마리아를 제외한 전지역과 예수를 따라다니면서 그를 시험하고, 비방했으며, 모함할 요소를 찾기에 분주했다
그리고 본문에서 그들은 예루살렘 종교회의와 로마 당국에 고소할 거리를 찾아 신학 논쟁을 벌이고있었다. 한편 지금 예수가 머물고 있는 베레아 지역은 땅이 비옥하고 경제력이 타지역보다 상당히 앞서 있는 참으로 평화로운 전원풍의 지역으로서 유대적 교권주의의 영향권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더욱이 그 지역 주민들은 예수의 선교 활동에 상당히 우호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곳에까지 찾아와서 적대행위를 일삼았을 뿐 아니라 무리를 충동질하여 예수의 사역을 방해하였던 것이다. 특히 본문에서는
그들의 현재 위치가 헤롯 안티파스와 헤로디아의 이혼과 부정한 결혼의 문제로 세례 요한이 처형된 곳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고 하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 그들이 제기한 이혼문제는, 곧 바로 예수의 처형을 획책하려는 음모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는 사실이 분명하다.
그들은 중요한 신학적 논쟁거리처럼 보이는 이혼법에 관한 난제를 제시함으로써 예수를 정치적 곤경에 몰아 넣으려고 하였다. 시험하여 - 마태복음에서 예수가 시험당하거나 유혹받은 것은 맨 처음 사단에 의해서이고
그후에는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헤롯당에 의해서였는데(이는 모두 그의 메시야적 권위를 시험하거나 도전하는 것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특히 바리새인들의 시험의 형식은 언제나 하나의 문제에 대해서 '가', '불가'를 묻는 방법으로 예수께서 만일 '옳다' 하여도, 아니면 '그르다'말씀하셔도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게 될 애매한 문제에 대한 답변 요구가 대부분이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양자택일의 흑백논리의 오류에 빠져들지 않고 논제의 본질을 그대로 파헤치심으로써,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시도하셨기 때문에 그들의 시험은 번번히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 이는 문자적으로 '어떠한 원인으로든지'라는 뜻이다. 이같은 물음은 규율에 어느 정도의 자율성(自律性)을 부여하고 있는 힐렐학파가 취한 태도와 학설에 근거해서 제기한 말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 힐렐과 쌍벽을 이룬 샴마이학파는 일정한 이혼사유가 규정되어 있었으며, 계약을 맺고 들어간 쿰란공동체 사람들은 이혼은 어떤 경우에도 불법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번역에서는 이 문구가 '이유가 있으면', 공동번역에서는 '무엇이든지 이유가 닿기만 하면'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이 번역이 본문 해석상 적절한 것 같다. 한편 이란 번역은 공동번역의 표현과 잘 어울린다.
아내를 내어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 그 당시 팔레스틴의 유대 사상에 주류를 이루는 랍비 학파인 힐렐과 샴마이)는 특히 이혼 문제로 해서 크게 대립되어 있었다. 이 두 학파는 모두 다 이혼을 인정하였는데, 물론 남편이 아내를 버린 경우의 이혼만을 인정하고 그 반대의 경우는 불가하였다.
이들의 이혼에 대한 생각은 신 24:1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에르와트 다바르', 곧 '수치(羞恥)되는 일'이라는 말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수치'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일치를 보지 못하였다.
즉 샴마이학파는 수치를 '간음'과 갈이 엄청난 정도의 것으로 해석했는데, 물론 성경 본문은 수치가 반드시 간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간음에 대한 일반적인 형벌은 죽음이었지 이혼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수치되는 일'이 아내의 '간통에 대한 의심'과도 동일시 될 수 없다. 이는 아내가 간통한 사실을 밝히고 싶을 경우에는 저주를 내리게 하는 쓴물을 아내에게 마시우게 하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수치되는 일'은 바로 간음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아내의 순결 문제 등과 같은 상대 남편에게 큰 충격이 되는 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또한 율법의 근본 취지를 고려한다면 '수치스러운 일'이란 남편이 아내에게 떳떳하게 이혼증서를 써주고 이혼을 요구할 만한 충분하고도 객관적인 사유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한편 힐렐학파는 '수치'의 의미를 확대 해석하여, 실제의 죄든 아니면 상상속의 범죄이든지 간에 모든 종류의 죄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서 '지극히 사소한 잘못'까지도 포함시키고 있다. 예를 들어 음식이 상한 일이라든지, 남편이 자기 아내보다 더 좋아하는 여인이 생겼다든지 또는 더 이상 애정이 생기지 않는 것 등의 부당한 일에 의해서 남편의 이혼 요구가 있는 경우 아내는 이혼을 당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예수 앞에 제기된 물음은 바로 신 24:1에 대한 힐렐의 해석에 동의하느냐 안하느냐의 문제였다. 만일 예수가 힐렐학파의 주장을 따른다고 한다면 그의 대적자들은 샴마이학파의 견해를 지지하면서 '예수가 도덕적으로 엄격하지 않은 자유주의자'라고 공박할 것이며
그와는 반대로 엄격한 샴마이학파의 편을 들면 그들은 '죄인들에 대한 예수 자신의 친절과 자비 행위는 바로 위선'이라고 선전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샴마이나 힐렐의 견해를 모두 따르지 않았는데, 이는 비록 엄격한 샴마이학파라 할지라도 이미 이혼과 재혼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 19: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사람을 지으신 이가...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 유대인들은 신 24:1을 이혼의 합법적 근거로 생각하여 왔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는가를 환기시킴으로써 창조의 원리(를 통해서 이혼의 절대 불가성과 아울러 결혼의 신성함과 영구성을 강조하시고자 하였다.
특히 본문의 '본래'라는 말은 남.녀의 근본적인 창조 목적을 소개하고자 하는 강한 암시가 내포된 말이다. 실로 결혼의 법은 하나님의 섭리로서 하나님이 축복하신 순결하고 거룩한 사랑과 생명 유지의 법이었다. '여호와께서는 이혼을 미워한다'고
선포한 말라기 선지자와 같이 예수는 창 1:27의 말씀을 통해 남자와 여자는 결혼을 통해 한 몸이 되는 것임을 말씀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와 똑같은 상태로 다시 맞추는 것인 동시에 창조때부터 여자와 남자는 하나의 몸에서 잠시 분리되었으며, 적당한 때가 되면 결혼으로 다시 한 몸을 이루게 된다고 하는 사실을 의미한다.
[마 19:5]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찌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므로 - 창 2:24에서의 이 말은 여자는 남자의 갈빗대로 만들어졌고 서로를 위해서 지음 받은 짝으로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임'을 아담이 깨달은 데서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담이 남자와 여자가 가장 심오한 의미에서 '관계되고 있는 존재'임을 깨달은 데서 비롯된 말이다.
정녕 남자와 여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모든 결혼에 있어서 '한 몸을 이룬다'는 말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을 때와 똑같은 상태로 다시 맞추는 동시에 창조 때에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가 된다.
따라서 본 구절은 창 1:27의 말씀, 즉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들었기 때문에 남자는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룬다고 하는것은 당연한 사실이라고 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다.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 남녀 한 쌍이 한 몸을 이루기 위한 필연적인 요구 조건이다.
이는 부모와의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온전히 합일을 이루는데 그 어떠한 장애 요인도 있을수 없다는 뜻이다. 그와 더불어 두 사람의 독립적 인격성을 강조한 말이기도 하다 합하여
이는 '아교로 붙이다', '연합하다'는 뜻을 지닌 원어 '콜라오'의 단수 미래 수둥태로서 '완전히 달라 붙어 뗄래야 뗄 수 없게 될것이다'는 의미이다. 이는 부부란 순간적이고 충동적인 결합체가 아니라 영원히 나뉠 수 없는 온전한 합일체라는 뜻이다.
한 몸이 될지니라 - 남자와 여자와의 결합을 정신이나 혼만의 결합으로서 이해하지 않고 육체 의 결합으로 본 성경의 이해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실제로 결혼에 의하여 남녀는 그 몸이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하나의 몸이 되는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한 몸'이란 결혼을 단순히 정신적인 결합으로 봄으로써 구체성을 상실한 공허한 추상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오류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구체적 요소들을 서로 공유함으로써 두 사람을 결코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잘 드러내 주고 있는 말이다.
물론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한 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육체 그 자체, 곧 단순히 성적 합일체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점이다. 정신과 영혼이 전제되지 않는 육체는 순전히 쾌락의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따라서 '한 몸'이란 육체를 근간으로 한 전인격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법과 생명의 지배를 받는 한 공동 운명체가 되는 것을 뜻한다. 이를 루이스 에이 바비에리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보다 더 높은 관계로의 부르심'이라고 표현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