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스트림 라이프ㅣ인수봉 4개 루트 당일등반] 몰입, 몰입, 몰입… 그것이 시작이고 끝이자 모두다!
- 글·사진 염동우 기자산악등반 가이드 전용학·강한별
- 심우길~취나드A~의대길~하늘길을 하루 만에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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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 많은 암벽 루트를 오르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인수봉을 찾은 친구들이 있다. 전용학(48)과 강한별(40)이 벌이는 모험에 관한 이야기다. 시내의 혼탁한 실내암장에서 벗어나 이들이 찾은 곳은 부드러운 햇빛과 까마득한 수직의 암벽. 해가 떠서 질 때까지 얼마나 많은 루트를 소화할지는 미지수다. 가장 큰 변수는 속도. 목적을 최대한 만족시키기 위한 지상과제는 신속히 움직여야 한다는 것.
전국 방방곡곡 봄기운이 가득한 4월이다. 봄치곤 유난히 쌀쌀한 날씨가 길다. 4월 중순을 넘겼어도 기온차가 매일같이 들쭉날쭉 변화무쌍하다. 산안개 가득 찬 인수봉은 곧 비가 올 기세다. 심하게 불어대는 바람은 체감온도를 떨어트려 이번 등반이 결코 호락호락할 것 같지 않다. 만약 중요한 해외 원정이었다면 내키지 않는 기상조건에서라도 나서야겠지만. 언제든 찾을 수 있는 국내 암장은 아니다. 이런 날씨는 클라이밍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하지만 날씨가 좋건 나쁘건 그들은 인수봉 서면으로 향한다.
- ▲ 하늘길 2피치를 선등하는 전용학. 이 악물고 비상할 준비를 한다.
- 전용학이 첫 등반 루트로 선택한 것은 심우길. 그가 루트 초입에 도착해 장비를 풀고 등반 준비를 한다. 서둘러 장비를 착용하던 그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입가에 미소를 띠고 서로를 바라본다. 등반 이야기를 하니 그가 깔깔 웃는다. 아무리 심각한 이야기라 해도 그의 미소를 빼앗지 못한다. 이것이 48세 전용학이 가진 등반가의 여유인 걸까?
누구나 웃을 때가 제일 아름답다는 말이 있다. 주관적이거나 관념적으로 들리겠지만, 미학적인 기준으로 보면 그 기준은 아니다 싶을 때도 많다. 산악등반 가이드로 활동 중인 전용학, 그만의 아름다운 웃음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정말 그가 편하게 웃는 모습은 사진에 담지 못했다. 하지만 자유롭게 등반하는 그의 모습이 그 웃음의 근원을 드러내 준다고 말하고 싶다. 얼굴은 이름을 따라간다고 했던가. ‘용학’, 참 매력적이다. 조각 같은 얼굴도, 웃을 때 그 번지는 주름까지도.
심우길의 첫 피치는 그리 어려운 코스가 아니다. 이 루트의 크럭스는 두 번째 피치로, 흐르는 사선크랙을 얼마나 신속하게 빠져나가느냐가 관건이다. 전용학은 두 번째 피치, 바위의 갈라진 틈에 진입해 첫 번째 캠을 조심스럽게 끼워 넣었다. 신속히 퀵드로를 걸고 자일을 통과하더니 저돌적으로 손을 교차해 가며 다시금 캠을 설치했다. 크랙에 손을 걸치고 매달려 거친 호흡을 토해 낸다. 지체할수록 몸의 힘은 급격하게 떨어지게 된다. 너무 많은 생각을 하면 그것은 곧 자기 자신을 망치는 일이 돼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믿을 건 오직 밑에 끼워진 캠과 빌레이를 보고 있는 강한별이다. 그가 로프나 빌레이에 의지하지 않은 채 또 다시 캠을 설치했다. 심우길 사선 크랙을 무난히 해내는 그의 몸동작은 가공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모습이다.
- ▲ 스피드 클라이밍에 중독이라도 된 듯 빠른 손놀림으로 장비를 착용한다.
- ▲ 스피드 클라이밍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며 걸어온 그들의 사이에는 끈끈한 유대가 있다. 심우길 2피치 크랙의 크럭스를 돌파한다.
- 한국 최초의 산악등반 가이드 전용학
프로 등반가의 손길은 계속 전진한 끝에 결국 두 번째 피치 테라스에 도착해 자유를 찾았다. 가장 어려운 지점을 지난 그는 아래에서 거의 경외심에 사로잡혀 빌레이를 보고 있던 강한별에게 소리친다.
“이제 출발해!”
강한별의 순서가 되자 그의 팔뚝에 젖산이 분비되기 시작한다. 그가 사선 크랙에서 매달려 한 말이라고는, “아… 힘들어 죽겠네!”뿐이었다. 이렇게 그들의 첫 번째 워밍업이 끝났다.
이날 둘은 강사와 제자 사이로 줄을 맸다. 전용학이 익스트림라이더 강사 시절인 7년 전, 한 일간지에서 암벽등반 체험자를 모집해 교육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참가자 중 한 명이 강한별이다. CJ오쇼핑에서 쇼호스트로 일하고 있는 강한별은 당시 홈쇼핑을 통해 등산용품과 레저용품을 소비자에게 제대로 소개하기 위해 등산을 배워야겠다는 일념으로 체험을 지원했고, 전용학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 인연으로 코오롱등산학교를 거쳐 산악인의 대학원 과정이라 불리는 익스트림라이더 과정까지 마쳐, 이제는 준 전문등반가가 됐다.
사람의 관계는 힘든 일을 함께 겪을 때 더욱 돈독해진다고 했던가. 등반을 하며 고통과 기쁨의 순간을 늘 함께하는 두 사람. 강한별은 오직 등반밖에 모르는 외골수 전용학의 까칠함과 거침없는 남자다움 뒤에서 로프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운명을 함께하는 사람에 대한 신뢰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 ▲ 전용학과 강한별이 인수봉 정면의 의대길을 마치고 다음 루트를 등반하기 위해 오아시스를 건너고 있다.
- ▲ 전용학은 위쪽의 까다로운 크럭스 구간에 앞서 캠을 설치한다.
- 안개가 사라지고 햇빛이 비추기 시작하자 차가운 공기가 밀려간다. 오전 11시가 막 지났다. 연속으로 두 번째 도전 루트인 취나드A를 등반하기 위해 곧바로 출발했다. 그리 어렵지 않은 2피치를 끝내고 다음 피치를 천천히 살펴본다. 눈앞에 펼쳐진 천장을 넘어선 후, 촘촘히 박혀 있는 볼트에 짜증이 걸리고 의욕이 상실되는 순간이다. 크랙 등반의 진수를 맛보고자 손에는 재밍 글러브를 끼고 장비걸이에 캠 한 세트를 장착했으나, 때때로 자신의 진가를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인수봉의 고전 취나드A 루트는 예전과 비교해서 캠을 사용할 필요가 없는 그런 쉬운 워밍업 루트가 돼버렸다. 그나마 마지막 4피치만이 자신의 근육을 한계까지 쓰도록 만드는, 강인한 인내심을 요하는 곳이었다. 취나드A에서 내려선 시각은 오후 1시였다. 허기를 채우기 위해 미리 준비해 온 김밥을 먹기 시작한다. 허겁지겁 집어먹은 김밥은 다음 클라이밍에 힘을 보태 줄 것이 틀림없었다.
전용학은 현재 한국 최초의 산악등반가이드(KMG. Korea Mountain Guide)로 활동 중이다. 본격적인 산악등반가이드는 2006년 대한산악연맹 등반강사 2급 자격증을 취득하면서다. 하지만 그는 불과 6년 전만 해도 가이드하는 곳마다 실패해 고전을 면치 못했다. 2006년 일본의 시로우마다케(2,900m) 설산을 등반하러 갔지만 폭설로 인해 실패하고 돌아왔다. 물론 그 이전의 원정에서도 그랬다. 인수와 선인의 벽을 섭렵한 그는 고 최승철과 김형진이 개척한 설악산 적벽의 무라길(A4, 5.9)에 도전해 성공한다. 7년 만의 재등이라는 타이틀을 얻고는 기세를 몰아 설악산 소토왕골 산빛JK(A4, 5.9) 개척, 적벽2836(A3+, 5.8) 개척, 갱기폭 붉은악마(A4, 5.8) 개척, 노적봉 남벽 그들과 함께라면(5.10a), 노적봉 4인의 우정길 리지 개척, 선녀봉 솜다리의 추억(5.11b) 개척으로 이어갔다.
그 다음 눈을 돌려 고산 거벽을 시도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2003년 파타고니아 포인세노트(3,002m)의 데스페라도 루트를 등반했지만 악천후로 루트를 변경할 수밖에 없었고 7피치 만에 뒤돌아섰다. 그리고 2005년 유럽 알프스의 그랑조라스(4,208m)와 드류 남벽(3,754m) 단독등반에 나섰다. 하지만 이 역시 자신을 과신한 나머지 단독 등반에 필요한 정신력을 극복하지 못하고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과거 빙벽과 자유등반, 인공등반으로 이루어진 대상지를 섭렵한 터라 그때 이후로는 지금까지 실패 없는 가이드를 펼치고 있다.
- 요세미티 엘캡픽스 닷컴이 주목한 이유
등반 기술보다 등산 철학과 파트너십이 중요하다는 전용학. 그러면서 그가 2008년에 떠난 요세미티 조디악 등반 얘기를 꺼낸다. 대원은 그를 포함한 총 6명이었다. 한 루트에 2인이나 3인이 한 조를 이뤄 등반하는 요세미티에서 6명을 이끌고 오르니 현지의 로컬들에게는 희한한 광경으로 보일 수밖에. 당시 73세인 임영일과 59세인 태향실 대원이 정상에서 내려왔을 때 다들 입을 모아 한국 남녀 최고령 등정자라고 했다.
나머지 대원들 역시 여자인 최영은을 비롯해 정기석, 김진모씨는 43세 동갑내기들로 요세미티 같은 큰 거벽은 처음이었다. 선등 가능한 이는 오로지 전용학뿐이었다. 하지만 국내 훈련을 통해 팀워크는 다져진 상태였다. 전용학이 선등을 맡고 뒤이은 김진모·최영은 대원은 장비 회수와 고정로프 설치, 나머지 정기석·태향실·임영일 대원은 주마등반 후 홀링과 로프 정리를 담당했다. 전용학이 전 루트를 선등하다시피 해, 처음 계획한 대로 3박4일 만에 정상을 밟고 하산했다. 2인 1조 등반시간과 같은 시간 기록이었다. 애초엔 ‘저 팀은 아마도 오르지 못하고 포기할 것’이란 소문이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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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쌀쌀함의 극치다. 예사롭지 않은 날씨지만 적어도 빌레이 자리는 붐비지 않아 좋았다.
- “아무도 저에게 직접 말하지는 않았어요. ‘가만 놔두면 자연히 해결될 거다.’ 다시 말해 결국 포기할 거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요세미티에서 내려온 대원들을 대하는 로컬 클라이머들의 반응은 180도 반전되었다. 탐 에반스가 운영하는 요세미티 엘캡픽스 닷컴에 그들의 이야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상세히 기록되어 소개되었다. 뒤뚱거리는 오리들을 성숙한 백조로 만들어 돌아왔다고. 그 후로 요세미티를 가이드 해달라는 문의가 꾸준히 들어오고 있다.
전용학은 지금까지 쉬지 않고 엄청난 등반, 다양하고 기발한 기술을 보여 왔다. 산빛산악회를 떠난 다음부터는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고 더욱 등반에 매진하고 있다. 등반 15년 동안 설악 소토왕골 산빛JK(A4, 5.8) 개척을 시작으로 파키스탄 유스사르 서벽(6,000m) 한국 초등까지 매년 원정을 다니고 그때마다 새로운 등반을 시도, 산악계를 놀라게 했다.
“원정을 다니면서 죽음의 문턱을 경험하고 나니 죽음에 초연해지더군요. 내가 살아 있는 날까지 세상에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후회 없이 던지고 싶어요.”
- ▲ 의대길 2피치의 크랙. 볼트를 너무 많이 사용하지 않고 신체능력을 활용한 클라이밍은 전용학이 꿈꾸는 루트다.
- ▲ 마치 전설 속 전우치가 도술을 부려 속공을 펼치는 것처럼 바른 스피드로 이동한다.
- 곧 50세를 바라보는 등반가의 이 끊임없는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일단 외치고 싶은 메시지가 있으면 무섭게 집중하고, 내 생각을 바위에다 쏟아내요. 도전이란 얼마나 행복한지-. 산악등반 가이드에서 내 삶의 길을 다시 찾았습니다.”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하면서 발현해 온 재능, 그것이 지금의 전용학을 키웠다.
전용학과 강한별은 인수봉 정면 벽으로 향했다. 심우길과 취나드A를 오른 후, 어느 정도 몸이 달궈진 상태여서 등반에 속도가 붙었다. 그들은 이미 어느 정도의 힘을 소모한 상태지만, 이번엔 의대길에 도전한다. 전용학은 얼마만의 의대길 등반인지, 초반에 공식대로 슬랩을 넘어서리란 기대와는 달리 스텝이 제 위치를 벗어난다. 그가 2피치를 넘어서 크랙 중단에서 손을 넣고 전진할 찰나 무슨 일이 벌어진다는 느낌조차 없이 추락한다. 다행히 크랙 중단에 캠을 설치해 둬, 크랙의 시작점 바로 직전에 추락은 멈췄다.
- ▲ 해가 지려니 그에게 그림자가 드리운다. 어느덧 손이 곱아 온다.
- ▲ 심우길, 취나드A 루트를 마치고 휴식을 취한다.
- 정신이 혼미한 상태-. 아드레날린이 그를 깨운다. 자신의 몸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본능을 부추겨 두 번째 만에 성공했다.
서둘러 남측의 하늘길을 오르기 위해 인수봉의 오아시스를 가로질러 인수A 루트로 하산한 그들은 지면에 발이 닿자 가파른, 불규칙한 바위 언덕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시간은 벌써 오후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번이 해가 지기 전 마지막 등반이 될 것으로 짐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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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길의 첫 피치는 어둠이 내려 무거운 적막이 흐른다. 전용학이 8.9mm 굵기의 60m 더블로프를 사용해 클라이밍을 한다. 첫 피치에 도착해 강한별을 끌어올리는 동안 짧은 휴식으로 재충전을 한다. 처음 몇 미터를 빠르게 나아가 캠을 설치하고 하늘길을 올려다본다.
2피치의 상단은 이번 등반에서 가장 어려운 곳이다. 이번 전체 여정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의 비중은 아니지만, 체력이 떨어진 지금 적어도 상당한 비중을 두고 등반해야 했다. 전형적인 오픈 크랙을 그가 레이백 자세로 천천히, 그리고 완전히 몰입한 채 나아간다. 마찰력을 높이기 위해 손이 크랙을 파고든다. 근육의 한계까지 쓰도록 만드는 하늘길. 결국 피치를 끝내며 그는 행복에 젖었다. |